# 37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2권 12화
12. 엘프들의 시험(3)
'뭐야? 어디에 있는 거지?'
호야와 그의 뒤에 딱 붙어 있던 실피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넓혀서 저 먼 곳, 몬스터들이 새로이 들이닥치는 곳을 바라보니 몬스터들이 빠른 속도로 빛으로 화해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야와 실피드라고 짐작되는 것들이 몬스터를 도륙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뛰쳐나가면 어떡해!
[백설: 호야 씨, 위험하니까 돌아오세요!]
[호야: 괜찮아요.]
[백설: 그래도 자리가 비잖아요.]
[호야: 라이스터 님이랑 아르코 님이 맡아 주셨어요.]
호야의 귓속말에 자세히 살펴보니 라이스터와 아르코의 사이에 있어야 할 호야의 자리가 완벽하게 커버가 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야의 공격을 피해 빠져나온 소수의 몬스터들을 라이스터와 아르코가 상대하고 있었다.
호야는 최전방에서 세 명의 구역을 커버하고 있던 거였다.
후웅-!
실피드가 팔을 크게 벌렸다가 오므리자 호야를 피해서 주변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거센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움직임에 제한을 받은 몬스터들을 중간에 블렛을 섞어 가며 호야가 차례대로 쓰러트린다.
오늘 처음 합을 맞추는 것일 터인데도 상대가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인지, 상대가 어떻게 공격을 이어 줬으면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인지를 서로가 이해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니면 서로에게 맞춰 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라는 뜻이거나.
이유야 어찌 됐든지 좋은 상황이었다.
"라이스터! 페드라와 내 사이로 자리 옮겨!"
"네!"
백설은 지금의 상황을 좋은 쪽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호야의 공격을 피해 라이스터와 아르코 쪽으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들은 한 명이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잡을 수 있는 수였다.
그러니 비는 인력은 필요한 곳에 사용해 줘야겠지.
중기와 페드라가 슬슬 위험해 보였기에 라이스터의 자리를 이동시켰다.
라이스터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잡고 있던 몬스터까지만 처리한 후에 백설의 말에 따라서 자리를 옮겼다.
천년 나무를 기준으로 동쪽을 둘이서, 서쪽을 넷이서 막고 있는 쏠림 상황이었지만 호야는 충분히 세 명 이상의 몫을 해 주고 있었다.
[남아 있는 적 (23/200)]
2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몬스터들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2시간 동안 150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이 된다.
2시간에 150마리라니...... 이걸 클리어 하라고 만든 던전인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첫 번째 시험장에서 실피드를 아군으로 만들지 못했더라면, 호야가 파티에 없었더라면 상황이 지금보다 몇 배는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전멸을 어떻게 시키라고 있는 클리어 조건인가 했는데 지금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확신이 들고 있었다.
남아 있는 적이 20이 되자 평원의 위에는 몬스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몬스터가 생성되는 것보다 빠르게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르코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자로 뻗고 싶었지만 말이다.
"어후, 공주님, 두 번째 시험이 끝나면 1시간만, 아니, 30분만 쉬었다가 다음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
"상황 봐서."
"잘 좀 봐주세요!"
백설의 입에서 부정의 말도 아니고 긍정의 말도 아닌 것이 튀어나오자 아르코는 환호했다.
부정의 말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몇 분 뒤, 지평선 너머에서 몬스터들이 다시 보이는 것을 확인한 아르코는 밝은 표정으로 다시 일어섰다.
몬스터들의 수를 세어 보니 딱 20마리, 지금 나오고 있는 것들이 마지막 몬스터였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그들은 남은 몬스터를 모두 사냥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을 '적의 전멸'로 클리어 하였습니다.]
[천년 나무가 입은 피해가 '0'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완벽히 지켜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위그드라실이 축복을 내립니다.]
['위그드라실의 축복'으로 모든 HP와 MP를 회복합니다.]
['위그드라실의 축복'으로 모든 스킬의 재사용 시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장으로의 진입이 가능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아르코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고 백설은 밝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바로 세 번째 시험장으로 넘어가는 게 효율적일 것 같은데?"
* * *
"공주님, 제발...... 네 번째는 내일 넘어가자....... 이러라고 로그아웃이 가능한 걸 거라고!"
"실피드, 다음 시험은 뭐예요?"
"네 번째는 탐색력, 미로 찾기야. 꽤 복잡하고 길지만 내가 도와주면 바람의 방향을 쫓아서 바로 길을 찾을 수 있어. 대신에 길이 조금 길어서 가는 데에만 몇 시간은 걸릴 거야."
"음...... 그럼 접속 제한 시간도 아슬아슬할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만 다들 로그아웃 하고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접속하기로 하자."
"아싸!"
아르코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서는 가장 먼저 로그아웃 했다.
그 뒤를 따라서 모두 순차적으로 로그아웃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호야가 로그아웃 하려 하자 실피드가 그를 붙잡았다.
"저기...... 쉬러 가기 전에 렌시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면 안 될까?"
실피드는 길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같은 애절한 눈동자로 호야를 바라봤다.
접속 제한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호야는 실피드에게 렌시아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호야도 처음 한 달 동안 마을에서 생활하던 것을 제외하면 렌시아와 그리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실피드에게는 호야가 아는 작은 이야기도 충분히 기꺼운 일이었다.
처음 렌시아와 만났을 때에 활로 땅에 크레이터를 만들었던 것.
틈만 나면 크라우스와 티격태격하는 일.
어쩌다가 한번 렌시아에게 약의 시음을 부탁받았다가 처음 느껴 보는 강인한 쓴맛에 약을 바로 뱉어 버린 일과 그것을 보고 웃은 렌시아의 일까지, 호야는 자신이 아는 렌시아의 생활에 대하여 실피드에게 말해 주었다.
호야가 그것들을 말하는 동안 실피드는 귀를 쫑긋거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호야의 이야기를 단어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겠다는 듯이 경청했다.
"그렇구나....... 히히, 잘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서운함과 불안감이 들었다.
렌시아가 내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가 친구가 아닌 그저 옛날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면 어떡하지?
왜 지금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거야?
약속은 기억하고 있는 거지?
렌시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호야에게서 이야기를 듣자 실피드에게서는 자그마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실피드는 그런 기분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기 위하여 미소로 자신을 포장했다.
하지만 호야에게는 간단하게 그 포장이 벗겨진 속 알맹이가 보이고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렇겠지? 흐흑."
무엇 때문에 실피드가 불안해하는 것인지 까지는 몰랐으나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기에 호야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실피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 * *
"도차아악!"
네 번째 시험장에서는 실피드의 안내를 따라서 곧바로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로 자체가 꽤 길었기 때문에 이동하기만 하는 데에 4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말이다.
실피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며칠이나 걸렸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마지막 시험인 다섯 번째 시험은 시험이라고 할 것도 없어. 지금까지의 시험을 지켜본 정령들이 너희들 중 한 명과 계약하고 싶다고 다가오면 한 아이를 골라서 계약을 하고 모두가 계약을 마치면 바로 위그드라실의 마을로 향하는 입구가 열릴 거야."
실피드의 말에 살짝 긴장을 하면서 다섯 번째 시험장으로 넘어갔다.
처음 이니티움을 시작하면 오게 되는 캐릭터 생성을 위한 공간과 같이 땅과 벽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는 전신 거울 대신에 오색 빛의 수많은 정령들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을 발견한 정령들이 각자 자신과 계약해 주었으면 하는 상대에게 날아갔다.
"저기, 저기. 나는 그류페인이라고 해! 얼음을 다를 수 있어! 나랑 계약할래? 응?"
"나는 노임! 인간, 너는 머리가 웃기니까 특별히 계약해 줄게! 계약하자!"
"내 이름도 노임이야! 나랑 계약할래? 할래?"
"아아! 새치기하지 마!"
"나는 있지......."
모두가 정령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정령들 중에서는 진짜 계약을 하고 싶어 하는 정령들과 인간이 신기해 그냥 구경만 하는 정령들이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호야의 주위도 수많은 정령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계약을 하자고 다가오는 정령은 단 한 명뿐이었다.
주위를 맴돌고 있는 정령들 사이에도 호야와 계약하고 싶어 하는 정령들이 있었다.
하지만 호야에게 다가간 하나의 정령에게 대들 수가 없었기에 정령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검은 머리와 피부가 하얗다는 느낌이 아닌 진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년이었다.
"어? 네가 어쩐 일이야?"
실피드가 까맣고 새하얀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소년은 실피드의 말을 무시한 채 호야에게 다가갔다.
"나랑 계약할래?"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미소를 지은 소년이 말함과 동시에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에 호야는 멈칫했다.
[히에로스가 당신을 유혹합니다.]
[상태 이상 '매혹'에 걸렸습니다.]
[칭호 '땅끝 마을의 주민'의 효과로 인해 저항하였습니다.]
[히에로스가 당신의 감정을 조작합니다.]
[상태 이상 '공포'에 걸렸습니다.]
[칭호 '땅끝 마을의 주민'의 효과로 인해 저항하였습니다.]
[히에로스가.......]
⋮
끝도 없이 생겨나는 시스템 메시지들, 모두 하나같이 상태 이상에 걸려 저항했다는 내용이었다.
상태 이상을 시도한 대상의 이름은 '히에로스'.
호야는 눈앞의 소년의 이름이 히에로스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면 밑으로 보이는 호야의 입이 굳어지자 히에로스는 싱긋 웃었다.
"역시. 희한하게도 내 정신 공격이 하나도 안 통하는구나? 마음에 들었어.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랑 계약할래?"
허공에 떠올라 호야와 시선을 마주친 히에로스의 얼굴은 여전히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호야는 이 정령과 계약을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되었다.
처음부터 계약을 원하는 상대에게 상태 이상을 걸어오다니.......
별로 신용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 올라올 정도의 크기와 간단한 생김새가 보통인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게 겉모습에 맞는 크기와 키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상위의 정령인 것이 거의 확실했기에 계약을 거부하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겠어.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신용이 안 가는 거지?"
"......."
"쿡쿡, 너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감정이 겉으로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나 좀 믿어 주면 안 돼? 엘프들은 내 능력을 무서워해서 나랑 계약 안 해 준단 말이야~."
호야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히에로스는 웃음을 짓고 있는 가운데 실피드가 둘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가 장난이 조금 심하고 성격이 이래도 근본은 착한 애니까 믿어도 돼."
"그럼 계약할게요."
"어? 내 말은 못 믿어도 실피드의 말은 믿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