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1권 22화
22. 우연 혹은 필연
중앙 도시 이즈바론트.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이 도시는 이니티움의 수많은 도시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렇기에 여행을 목적으로 이니티움을 시작한 플레이어들이 꼭 한 번씩은 찾는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시작의 마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만큼 플레이어들이 항상 바글바글한 곳이기도 했다.
호야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이와의 약속 장소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약속 장소는 이즈바론트의 서쪽 구역에 위치한 광장의 커다랗고 예술미가 넘치는 분수대 앞이었다.
광장은 이즈바론트를 시작의 마을로 선택한 이들이 처음 캐릭터가 생성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디 계시지......."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약속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캐릭터 생성에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자신보다도 먼저 접속했으니 상대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광장 근처를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서 사람들 몇몇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의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야가 찾고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모습 보니까 오늘 시작한 것 같은데 이 오빠가 친절하게 알려 줄게. 일단 친구 추가부터 할까?"
"하, 오빠 좋아하시네. 나보다 어린 것이."
목소리에 확신이 생긴 호야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사이를 헤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그곳에는 호야의 약속 상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엄마?"
"어? 아드을!"
가면을 쓰고 있고 머리색과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도 자신의 아들을 몰라보지 못할 이예숙이 아니었다.
호야를 발견한 이예숙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왜 분수대 앞에 안 있고 여기에 있어?"
"저 사람들이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잖아!"
이예숙의 말에 호야의 시선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하하, 엄마란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쳐야 통하지."
"차라리 누나라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하겠다, 바보야."
"그 여자는 우리가 먼저 찜했으니까 그냥 두고 가라?"
그들은 호야와 이예숙이 모자 관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긴, 호야가 봐도 이예숙은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기는 했다.
원래도 동안이라서 30대 초중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녀다.
그런데 단발로 가지런히 자른 머리까지 벚꽃색으로 물들이고 있으니 더 어려 보이는 느낌이었다.
호야는 지금 상황이 난감했다.
이들이 자신들을 그냥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력을 행사하기에는 도시의 안이라서 무리가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자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이 그를 향해 내밀어졌다.
"당신들, 지금 내 일행한테 뭔 짓거리야?"
"하, 너는 또 뭐...... 헉!"
끼어들어 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들은 깜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호야는 그들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눈같이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백발을 허리까지 가지런히 늘어트린 여자.
새하얀 그녀를 보좌하듯이 뒤에 서 있는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의 왼쪽 가슴에는 리포른에서 많이 보았던 하얀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하하하...... 죄, 죄송합니다. 백설 님 일행인 줄도 모르고 실례를....... 야, 야, 빨리 가자."
"어? 으, 응. 실례했습니다, 하하하......."
그들은 이니티움에서 최고로 유명한 유저 중 한 명을 못 알아볼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진 그들을 보고 호야와 이예숙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벌레를 처리했다는 듯한 개운한 표정을 지은 백설은 호야에게 다가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니까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그나저나 당신을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이거 운이 좋은데요?"
"네?"
"호영아, 아는 분이니?"
아뇨, 처음 보는데.......
호야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희 동생이 항상 호야 씨에게 신세지고 있어요. 호야 씨의 누나 되시나요?"
"호야......? 아아, 우리 호영이? 호호호호. 누나가 아니고 엄마예요."
"어머! 정말요? 진짜 엄청 동안이시네요!"
"에이~ 누나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지~."
백설의 진심인지 아부인지 모를 말에 이예숙이 껌뻑 넘어갔다.
이 여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나자마자 자신의 엄마에게 점수를 따는 것이 대단하다고 호야는 생각했다.
잠깐만, 동생이 신세지고 있다고?
호야는 왜 백설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킹의 누나분 되시나요?"
"네, 킹의 누나인 백설이라고 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호야는 이예숙의 존재를 핑계로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호야가 거절하기 전에 이예숙이 먼저 말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엄마는 신경 쓰지 말고 잠깐 다녀와. 여기 가만히 있을게."
"......하지만 아까와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어."
"걱정 마세요. 라이스터가 어머님과 같이 있어 줄 거예요. 해 줄 거지?"
"네."
이예숙의 등쌀에 밀려서 호야는 백설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자 이예숙이 양손을 꽉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해 주고 있었다.
갑자기 왜 파이팅?
무언가 오해한 것 같다고 하고 호야는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할 이야기라는 게 뭐죠?"
"킹에게 한번 들었던 이야기일 거예요. 아직 길드가 없으신 것 같은데 저희 길드에 오시지 않겠어요?"
"......그건 전에도 한번 거절했던 이야기입니다."
전에 킹에게도 가볍게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룹에 '완전히' 속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기에 거절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거절이신가요....... 그럼, 친구 추가는 가능할까요? 킹처럼 평소에 귀찮게 굴지는 않을게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걸로 하죠."
그녀의 끈질긴 구애에 호야는 친구 추가를 받고 나서 그녀와 헤어져 이예숙과 행동할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그냥...... 이것저것?"
"어머, 그래?"
이예숙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는 솔직히 방금 안심했어. 우리 아들한테 저리 예쁘장한 친구가 있었다니 말이야~."
호야는 이예숙의 밝은 표정에 친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 * *
백설은 자신의 친구 목록에 호야라는 닉네임이 박힌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운이 좋았어. 설마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줄이야."
"그래도 권유는 실패하신 모양이네요."
"뭐, 천천히 한 걸음씩 가까워지면 되겠지. 그리고 반응 보니까 다른 길드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으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지금은 그저 친구 목록에 이름이 있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씩 정보를 주고받고 필요한 것을 해 주며 앞으로 가까워지면 되는 것이다.
한 걸음씩 천천히 말이다.
* * *
"아들! 이번에는 저쪽으로 가자!"
이예숙은 호야를 끌고 다니며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작게 조성되어 있는 이름 모를 꽃밭에도 가 보고,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성을 벽 너머로 구경했다.
게임답게 무기를 파는 가게에도 찾아가 아이쇼핑까지 했다.
아들과 함께 이렇게 실컷 돌아다니는 것이 몇 년 만인지.......
이예숙은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고 있었다.
비록 게임 속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은 상관없었다.
앞으로도 자주 이러한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이예숙은 다짐했다.
"어머! 이 어스윙 꼬치라는 거 엄청 맛있다. 스노윙 치킨 같은 건가?"
"하하하......."
아뇨, 딱딱한 돌덩어리를 뒷구멍에서 벌처럼 발사하며 공격하는 새의 이름입니다.
라는 소리를 호야는 이예숙을 위해서 꾹 참았다.
일명 변비 새라고 불리고 있는 몬스터인데...... 들으면 아마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예숙에게는 예민한 주제였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여기에 가 보자!"
이예숙은 상점에서 파는 마을 안내 책자를 꺼내 펼쳐 보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도시와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법사들이 꼭 한 번씩은 들른다는 마탑의 아즈바론트 본부였다.
지부장이 아닌 마탑장이 거주하는 마탑이었다.
2층까지는 민간인에게 공개되어 있기에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마탑의 1층에 들어가자 중앙에 놓여 있는 나선형의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은 이 높은 데를 저기로만 걸어 다니는 건가 하고 순간 놀랐지만 다행히도 나선 계단이 감싸고 있는 투명한 기둥이 엘리베이터 역할을 하는 듯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엄청 넓다. 높이도 높이고."
"그러게."
호야도 마탑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리포른에는 마탑이 없었고 레바에는 마탑 지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굳이 구경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방문하지 않았었다.
마탑에 와서도 호야는 여전히 이예숙의 손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호야를 끌고 다니던 이예숙의 발걸음이 멈춰 서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들, 저 사람 너랑 닮지 않았니?"
"응?"
이예숙의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몇 개의 커다란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초상화의 아래에는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인물의 이름과 몇 대 마탑장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예숙이 가리키고 있던 초상화는 제일 왼쪽에 걸려 있는 1대 마탑장인 아론 엔스라이였다.
닮은 건가? 하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예숙이 닮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아하니 닮긴 닮은 모양이었다.
자신과 닮았다는 소리에 흥미가 생길 법도 했지만 그의 흥미가 이끌린 것은 그 옆에 걸려 있는 2대 마탑장의 초상화였다.
그곳에는 풍성하게 곱슬 진 솜사탕 같은 하늘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한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2대 마탑장 모안 엔스라이.
초상화 아래에 쓰여 있는 이름이었다.
* * *
다음 날, 호야는 홀로 다시 마탑을 찾았다.
어제 봤던 초상화가 머리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모안 엔스라이.
그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여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이름만 같을 뿐이라면 굳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야가 알고 있는 모안이 초상화의 모안과 같은 솜사탕 같은 하늘색의 풍성한 곱슬머리였기에 호기심에 이끌려 다시 찾아왔다.
자세히 살펴보면 호야가 아는 모안과 마탑장인 모안은 닮아 있기도 했다.
아니, 닮았다고 하기보다는 똑같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린 외형을 하고 있는 모안이 성장한다면 딱 저렇게 될 것 같은 생김새다.
2층에는 마탑의 간단한 역사에 관해 적혀 있는 책들이 보관된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민간인에게도 공개가 허용되는 책이었기에 자세히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호야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