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1권 20화
20. 블랙헤븐(3)
"아악! 젠장!"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 클로에는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질렀다.
도무지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집에 있던 집기 몇 개를 벽에 던지자 그제야 화가 조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후우...... 망할. 지지리 복도 없지."
그 남자에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열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봉이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을 밟고 있더니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지금 시간이면 접속을 종료했을 즈음이었다.
"흑흑. 오빵~!"
-뭐야? 뭔데 그래?
클로에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당황하며 그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이때다 싶어서 말을 이었다.
"나 레바에서 역 PK 당했엉. 무기라도 떨어트렸으면 어떡해! 흑흑!"
-뭐?! 아니, 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놈들은 뭘 하고 있었길래......! 열이 뻗쳐서 정말!
"걔네도 다 당했어! 랭커도 아닌 녀석들이라 도움이 안 된단 말이야! 오빵...... 나 그놈한테 계속 쫓기면 어떻게 하지? 그놈이 나를 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었단 말이야."
물론 그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눈빛이라 할 것의 꼬리도 못 봤지만.
알 게 뭐야.
-우리 클로에를 괴롭히다니......! 어떤 자식이야?!
"나도 잘 몰랑. 녹색 머리에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정도 알면 됐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그놈 잡아다가 네 눈앞에 무릎 꿇려 줄 테니까!
"정말? 고마워, 오빵!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이 오빠만 믿어. 그리고 나도 사랑해, 클로에.
쪽~.
뽀뽀 소리로 통화를 마무리 한 클로에는 스마트폰을 침대에 집어 던지고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흥, 오빵 좋아하시네."
랜선 연애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거였다.
블랙헤븐의 길드 마스터라는 사람이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 초록 머리 남자의 일은 이걸로 해결될 것이다.
블랙헤븐의 길드 마스터인 디노는 무려 데스 나이트를 세 개나 소환할 수 있는 네크로맨서이니 말이다.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길드에 소속된 랭커들을 움직여 줄 것이다.
* * *
호야의 발걸음은 어제와도 같이 동문을 나와서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을 구하기 위해 늪지대로 향했다.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은 총 12개.
어제 도와주었던 파티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네 개를 더 구할 수 있었다.
일단 그의 목표는 오늘을 포함한 4일 안에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을 모두 구하는 것이었다.
일주일 뒤에는 약속이 잡혀 있기에 늦어도 6일 안에는 모두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 호야는 지금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찰박, 찰박, 찰박.
호야는 일부러 소리가 얕게 멀리 퍼져 나가도록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를 듣고 올 블랙 리자드맨을 노린 일종의 함정이다.
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블랙 리자드맨들은 불빛을 보고 날아든 나방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탐지 관련 스킬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기척들과 아주 작은 스치는 소리가 블랙 리자드맨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둘러싸였다.
찰박!
호야가 발을 살짝 강하게 굴리자 그걸 신호로 삼은 블랙 리자드맨들이 호야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블랙 리자드맨은 지성을 갖춘 몬스터다.
블랙 리자드맨들이 동시에 달려들기는 했지만 한 번에 달려들지는 않았다.
제일 처음으로 가한 공격이 막히면 뒤따라서 다른 블랙 리자드맨이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그것을 피해 내니 빈틈을 노리고 다른 블랙 리자드맨들이 찌르고 들어왔다.
작은 목표에 한 번에 공격을 가하는 것은 악수(幄手)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주 체계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크루아아악......."
블랙 리자드맨의 체계적인 움직임은 호야를 묶어 두지 못했다.
방금 전에 마지막 블랙 리자드맨이 신음을 흘리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땅에 떨어져 있는 비늘은 3개. 이번은 운이 좋았다.
호야는 다시 찰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호야는 자신을 둘러싼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검은 무리들이 호야의 앞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 애 맞아?"
"나도 모르지. 녹색 머리는 다 족치라고 그랬잖아. 가면도 쓰고 있으니까 확률은 높지 않을까?"
"어휴, 이게 무슨 고생이냐."
"길마가 까라면 까야지, 뭐."
그 검은 무리들은 블랙 리자드맨이 아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장비를 통일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하나같이 똑같은 하얀색 원 안에 검은 구름이 그려져 있는 마크를 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 호야는 이들이 어제의 보복을 위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형씨, 그냥 얌전히 따라와 줄래, 아니면 굴욕 영상이라도 하나 찍혀 볼래? 난 개인적으로 얌전히 안 따라와 주면 좋겠는데."
"......."
"애가 쫄아서 말도 못 하네."
그들은 블랙헤븐의 길드 마스터이자 클로에의 남자 친구인 디노의 명으로 레바에 왔다.
레바에 있을 초록 머리에 가면을 쓴 남자를 죽이거나 클로에의 앞에 무릎 꿇리라는 명을 들었다.
클로에가 마지막에 짧게 영상을 찍었지만 자신의 체면이 쪽팔려서 영상 자체는 바로 삭제해 버렸기에 이들에게는 호야의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 초록 머리라면 다 쫓아가서 죽일 생각이었다.
클로에의 앞까지 끌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길드 마스터가 여자한테 빠지니 아랫것들만 고생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클로에가 영상을 지워서 이들이 호야의 무력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악재로 적용했다.
클로에가 말로는 디노에게 그의 무력을 전했지만 디노는 그것을 겁에 질린 여자의 과장된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들은 호야를 그저 자신들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 짜증을 풀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잖냐."
호야의 무반응에 로브를 두르고 있던 이가 볼이라도 찰싹찰싹 칠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호야의 바로 코앞에 그가 서자 그제야 호야는 입을 열었다.
"블렛."
퍽!
손가락 두 마디 크기 정도의 푸른빛의 탄환이 생겨나더니 호야의 앞에 다가왔던 자에게 쏘아져 박혔다.
푸른빛의 탄환이 가슴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던 그는 그 직후 몸에 힘이 풀리듯이 무릎부터 쓰러져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사망으로 인한 강제 로그아웃이었다.
그 장면을 온전히 보고 있던 블랙헤븐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호야의 뒤에 있던 이들은 호야의 몸에 막혀서 푸른빛의 탄환이 날아가 그에게 박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호야의 앞에 있는 이들은 빛이 되어 사라진 자의 몸에 막혀서 마찬가지로 그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탄환이 발한 옅은 푸른빛만으로는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스킬이었다.
모안이 호야에게 가르쳐 주었던 3개의 술식 중 하나.
[제1술식 - 블렛]
전방을 향해 총알 크기의 마력의 집합체 하나를 즉시 발사합니다.
보유 속성에 따라서 마법의 속성이 변화합니다.
공격력 130%의 피해를 입힙니다.
마법 방어력의 30%를 무시합니다.
사용 MP: 150
재사용 대기 시간: 5분
재사용 대기 시간도 가진 스킬들 중 제일 짧았기에 호야는 블렛을 애용하고 있었다.
스킬명을 말한 뒤 스킬이 발생되어 적에게 공격을 가할 때까지의 딜레이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법 방어력의 30%를 무시한 호야의 스탯과 칭호 등의 효과가 겹친 공격을 레벨 163의 체력이 낮은 편인 마법사가 버텨 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호야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버프, 신속."
크라우스식 검술의 제3장인 신속은 평범한 이동 스킬이 아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와 이동하려는 위치의 사이에 적이 있고 스킬로 이동하는 중에 적에게 공격을 가하면 한 방, 한 방이 공격력 120%의 위력으로 적용된다.
몬스터의 수가 몇이든, 공격을 몇 번 가하든, 그 수에 제한은 없다.
현재 신속의 이동 가능한 거리는 3m, 그 3m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사용하면 10초짜리 지속형 공격 스킬처럼 사용이 가능했다.
그 사이사이에 몇 걸음의 기본 이동만 섞으면 거리도 늘려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바닥을 대차게 구르기는 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노력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걱-.
그들은 호야의 공격을 세 번 이상 버텨 내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빛이 되어 사라진 후, 호야는 땅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아직 호야의 인벤토리에는 전날 만났던 블랙헤븐의 아이템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호야는 인벤토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 조각을 20개만 채운 채 레바의 경매장으로 향해 아이템들을 등록했다.
"호......수 님!"
경매장을 나오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지만 호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갈 길을 가려는 호야에게 재빠르게 뛰어온 그 누군가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 왠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호......수 님!"
호야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전날 호야가 구해 주었던 성훈이었다.
근데 그가 호야를 칭호는 호칭이 이상했다.
"저요......?"
"네!"
호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성훈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호야 님. 호야 님이 호야 님이라는 것은 비밀로 할 테니까요."
"......?"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일부러 숨기시고 다니는 것을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무슨 소리지.
호야가 성훈에게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커뮤니티에 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서 바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으로 글을 찾아낸 호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 글에서 파생된 글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글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에 대한 추측 글이었는데 은둔 고수라느니 버그 유저라느니 대형 길드에서 무언가를 노리고 키우고 있는 비밀 병기라느니 별의별 말이 가득했다.
심지어 소설과 짬뽕시켜서 새로 쓴 패러디 소설 또한 존재했다.
호야는 그제야 성훈이 자신을 '호수'라고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일부러 닉네임을 숨겨 준 것이었다.
"그......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어제 죽었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을 텐데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에요. 아, 혹시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 아직도 구하고 계신가요?"
성훈은 호야에게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 일곱 개를 건넸다.
예상치 못하게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을 받은 호야는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그와 헤어져서 다시 늪지대로 향했다.
잘하면 오늘 안에 30개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