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1권 19화
19. 블랙헤븐(2)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다.
앞선 사냥에서 어그로를 잘못 끌어서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스킬을 사용한 상태였다.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위기를 벗어나자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또 다른 위기였다.
지금 죽었다가는 지금 진행 중인 퀘스트가 자동으로 실패 처리가 된다.
이 퀘스트를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죽어도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로브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스켈레톤 하나가 그에게 약한 타격을 가해 와 전투 중인 상태로 인식되어 워프 스크롤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정작 중요한 상황에 쓰지도 못할 거, 비싼 값 치르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출구가 없는 불속이나 다름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훈이 어떻게 해서든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맹렬히 회전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동아줄이 하나 내려왔다.
[호야: 티 내지 말고 들으세요.]
갑자기 날아온 귓속말에 그는 순간 움찔거렸다.
누구지......? 친구 목록에 없는 닉네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닉네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호야: 지금 당신 옆쪽의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 있습니다. 시선 굴리지 마시고요.]
성훈은 겨우겨우 무심결에 자신의 시선이 돌아가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성훈: 누, 누구세요......?]
[호야: 본의 아니게 처음부터 다 지켜봤습니다....... 도와 드릴 테니 제가 신호하면 파티원 전원이랑 동시에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이세요.]
[성훈: 그.......]
[호야: 저를 믿어 주세요.]
누군지 모를 그의 마지막 귓속말이 왠지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서 더 안 좋아지지는 않겠지.
성훈은 재빨리 파티원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모두 불안이 가득 찬 답신을 보내왔지만 지금 당장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성훈의 말에 모두 빠르게 수긍했다.
[성훈: 모두한테 다 말했어요.]
[호야: 그럼...... 지금!]
"엎드려어!"
쇄애액-! 콰앙!
성훈의 말에 파티원 모두가 자세를 낮추자 그들의 위를 무언가가 지나갔다.
"......?"
큰 폭발음이 한번 일어난 후, 먼지구름이 일더니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갑자기 고요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훈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걷히고 있는 먼지구름 사이에서 매우 당황해하고 있는 클로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 *
호야는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다.
변화를 느낀 것은 검은 로브의 사람들이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였다.
검은 로브가 모습을 드러내자 제일 앞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인물의 표정이 안 좋은 쪽으로 급격하게 변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야는 귀를 기울여서 그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목숨값으로 지금 끼고 있는 무기들만 내놓으면 순순히 보내 줄게."
그 뒤에 들려오는 말들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들은 꼭 맡겨 놓았던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아주 당당했다.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문득 눈앞의 상황과 겹쳐 보인 기억에 호야의 눈과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는 지금 보는 장면과 같은 장면을 알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장면과 지금의 장면은 자신의 입장이 다르기는 했지만 같은 상황이었다.
파티를 둘러싸고 있는 플레이어들과 언데드는 그 녀석과 그 녀석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위협받고 있는 파티는 자신이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호야 자신은 동창이라고 표현하기도 뭐 같은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이었다.
"......."
저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 같은 입장에 있었기에 그 자리가 무엇보다 두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호야는 그들과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고 있었다.
[호야: 티 내지 말고 들으세요.]
호야는 바로 파티의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는 처음에는 당황해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호야의 말을 들어 주었다.
[성훈: 모두한테 다 말했어요.]
성훈의 귓속말에 호야는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바닥에 조용히 착지해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에 손을 얹었다.
"활대 베기."
호야의 검에 푸른빛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늪 자체가 어두운 환경이라 푸른빛은 눈에 띄기 쉬웠다.
활대 베기는 마력을 소모하는 양만큼 위력도 늘어나지만 차지 시간도 길어진다.
그래서 많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벌써 푸른빛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리려 하는 자가 있었다.
호야는 즉시 귓속말로 타이밍을 알렸고 그들이 엎드린 등 위로 푸른빛을 날렸다.
쇄애액-! 콰앙!
호야의 스킬이 날아간 뒤 일어난 먼지구름이 걷힌 자리에는 성훈이라는 남자의 파티원들과 클로에라는 여자를 포함한 블랙헤븐 두 명과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는 수의 언데드만이 있을 뿐이었다.
살아남은 두 명의 플레이어는 아마 언데드들이 방패가 되어 주었던 모양이다.
이곳에 오기 전의 연이은 사냥으로 이미 스킬은 다 빠져 있었기에 이 이상은 나무의 그림자 아래에서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호야는 천천히 걸어 나가서 블랙헤븐과 성훈의 사이에 벽처럼 섰다.
"너...... 너, 너, 너어! 너 뭐 하는 놈이야!"
"......."
클로에는 갑자기 나타난 호야를 항해 소리쳤지만 그는 아무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상황을 역변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성훈의 눈에는 존경심과 고마움이 가득했다.
눈앞의 남자의 등이 너무 넓게만 느껴졌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지금 이거 영상 다 찍고 있어! 손 하나 까딱하기만 해 봐! 게임에서 아주 매장을 시켜 버릴 테니까!"
"......헛소리도 작작 하시죠."
클로에의 말에 답하는 호야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면에 가려서 눈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의 눈빛에 꿰뚫릴 것만 같았다.
가면으로 인해서 표정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그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이익......! 야! 솔직히 네가 뭔데 여기에 끼어들어서 망쳐 놓는 거야? 외부인이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지!"
"......."
외면하면 당신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속으로 답한 호야는 몸을 앞으로 쏘아 냈다.
호야의 움직임에 뒤늦게 반응한 그들은 언데드를 움직여 방패로 세우고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호야는 소환된 언데드들의 사이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려움 없이 지나쳐서 소환자들만을 노렸다.
소환자가 사망하면 소환수들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굳이 소환수부터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호야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를 공격하였습니다.]
[카오 상태의 플레이어입니다. PK 패널티를 받지 않습니다.]
호야가 검을 몇 번 휘두르자 남아 있던 두 사람도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처음에 활대 베기를 사용했을 때에 연속으로 나타난 메시지가 다시 생겨났다.
카오 상태였던 그들은 아이템도 2~3개씩 떨어트렸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훈과 그의 파티원들이 감사의 인사를 해 왔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은 호야는 고개만 살짝 저어서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감사 인사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기에 행했던 행위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성훈은 감사의 표시로 직접 블랙헤븐이 떨어트린 아이템들을 주워 왔다.
호야가 잡은 카오이니 그들이 떨어트린 아이템은 그의 것이란다.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요......."
성훈은 아이템을 주워 와 준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호야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이 흡사 똥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호야는 보답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보답을 바란다고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받지 않는 이상 자신을 그냥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으음...... 아.'
"......혹시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 있으신가요?"
그들은 호야에게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 4개를 건네주었다.
더 있으면 더 주었겠지만 그 4개의 비늘이 그들이 오늘 하루 동안 사냥하면서 구한 비늘의 전부였다.
호야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도 호야에게 감사를 다시 표한 뒤 그들은 분위기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에게도 같은 학교의 학생들과 선생님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바뀌어 있었을까?
지금 고민해 봤자 바뀌지 않는 과거의 일이었다.
* * *
"오늘 정말 죽다 살았어."
"정말 네 말대로야~. 그분이 아니었으면 퀘스트고 뭐고 다 날아갔을 거야."
레바로 돌아온 그들은 주점에서 화포를 풀었다.
게임이라서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그들은 하루 동안의 사냥이 끝나면 아무 음식 가게에나 들어가 음식을 먹으며 오늘의 화포를 푸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었다.
그들만이 그러는 것은 아니었기에 주점은 플레이어들로 가득했다.
"정말 대단했지! 뭐 하는 사람일까?"
"아, 그러고 보니 성훈아, 너 그 사람이랑 귓속말했다며. 그러면 그 사람 닉네임 보지 않았어?"
"응?"
그들의 시선이 얌전히 맥주를 마시고 있던 성훈에게로 모였다.
"그야 보긴 봤지."
"그럼 좀 알려 줘 봐 봐. 나중에라도 찾아가서 제대로 보답해 드려야지."
"으음...... 역시 그러는 게 좋겠지?"
아이템도 주워 주고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도 줬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혜는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녀석이다.
"호야라는 닉네임이시던데?"
"호야? 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어? 너도 그래? 나도 그랬는데."
성훈은 처음부터 '호야'라는 닉네임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냥 착각이겠거니 했는데 같은 파티의 파티원도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니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여, 여러분, 그 닉네임......."
"응? 뭐야, 너 왜 그래?"
둘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 사제가 매우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더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사람이잖아요."
"......아아!"
어쩐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더라니.......
이도 저도 아닌 마을사람이라는 직업으로 랭킹에 올라 화제가 된 사람의 닉네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을사람이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하긴, 그런 힘이 있었기에 마을사람으로 랭커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 우리가 처음으로 마을사람을 목격한 사람인가?"
"어떡해, 어떡해, 성격도 엄청 좋으신 것 같던데."
"랭킹에서 레벨 확인하니까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를지도 모르겠는데?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려나?"
"커뮤니티에 자랑할까요?"
"......아니, 그건 하지 마."
성훈은 들떠 있는 이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행동했다는 거잖아? 우리가 괜히 떠벌려서 알리는 거는 은인에게 괜히 민폐만 끼치게 될 거야."
"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럼 우리끼리의 비밀인가?"
"왠지 두근거리는데, 히히."
자신들끼리만의 비밀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