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1권 18화
18. 블랙헤븐(1)
블랙 리자드맨이 서식하는 늪지대 바로 옆에 위치한 레바에 도착한 호야는 미리 모안에게서 전해 들은 대로 동쪽 성문을 향해 움직였다.
리포른보다 플레이어들이 많이 북적거리는 길이었지만 리포른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은 느낌은 없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이니까.
이들은 나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다.
나에게 관심도 없고.
"어두운 늪지대에서 사냥하실 사제님 모십니다! 탱 딜 다 있어서 오시면 바로 출발해요! 4시간 사냥하고 고정 팟도 가능합니다!"
"장비 수리 평균가의 60%로 해 드립니다! 대장장이 퀘스트예요!"
"혹시 경비 NPC와 친밀도 쌓으신 분 있으신가요! 연결해 드리면 수고비 드립니다!"
"같이 사냥하실 탱커 구해요!"
동문의 앞에는 플레이어들이 가득했다.
호야는 그들을 지나쳐 동문을 나가 사냥터로 향했다.
[킹: 형님! 지금 뭐 하고 계시나요? 잠깐 광장 분수대에서 만나면 안 될까요? 제발요!]
그때 킹에게서 귓속말이 도착했다.
호야는 그의 귓속말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야: 어...... 저 지금 리포른이 아니에요.]
[킹: 아니, 형님! 편하게 말 놓으시라니까요! 것보다 리포른이 아니라니요? 아이언 보어 잡으러 나가신 거예요? 그냥 경매장에서 사는 게 빠를 거예요!]
[호야: 저 지금 레바입니다.]
[킹: 네?]
그 뒤로 한참 동안 킹의 귓속말이 끊겼다.
[킹: 어어......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즐겜 하세요!]
* * *
"......지금 레바에 있으시다는데?"
"뭐?"
설백호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백설영, 게임 닉네임 백설인 그녀는 지금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너희랑 사냥도 했다며? 그런데 지금 레바에 있다고? 워프 스크롤이라도 썼대?"
"그건 나도 모르지."
진행 중이던 중요 퀘스트를 끝내고서 워프 스크롤까지 써 가며 리포른에 날아온 백설이었지만 그녀가 리포른에 온 목적인 호야는 리포른에 없었다.
전에 킹의 권유를 상대가 거절했었기에 진심과 성의를 보이고자 직접 찾아왔지만 정작 중요한 그가 이곳에 없었다.
워프 스크롤을 찢기 전에 킹에게 귓속말로 미리 물어 뒀어야 했는데 워낙 시간에 쫓기는 몸이다 보니 빨리빨리 진행하느라 그 과정을 건너뛴 것이 실수였다.
오히려 의미 없이 시간을 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마스터,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것보다 다음 장소로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나도 알긴 아는데...... 하아, 아까운데."
"......저는 솔직히 마스터가 왜 마을사람한테 그렇게 집착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백설과 거의 항상 함께 움직이는 설백호의 부마스터인 라이스터는 솔직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랭킹에 올라온 마을사람이 지금 얼굴도 알리지 않은 채 유명인이 됐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길드 1, 2위를 다투는 설백호의 마스터가 그를 잡기 위해 직접 움직이며 집착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네가 영상을 못 봐서 그래. 보면 너도 나랑 똑같아질걸?"
"그 정도입니까?"
"응, 그 정도야. 나중에 보내 줄게. ......그 레벨에 그 실력과 무력, 지금이 아닌 나중에 영입하려면 꽤나 고생하게 될 거야."
백설은 과장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야박한 편에 속했었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라이스터도 조금 흥미가 커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마스터가 그를 직접 찾아가 권유하실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도 간신히 빼신 시간이니까요."
"음...... 호민아. 일단 귓속말 좀 자주 보내면서 친분 좀 다져 놔. 오늘은 포기하고 다음에 다시 찾아가 봐야지, 뭐."
백설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킹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저요! 저요!"
"뭐야?"
"내가 지금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응, 안 돼. 레벨이나 올려놔."
"치잇......."
"떼써도 안 돼."
백설과 라이스터는 워프 스크롤을 찢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 * *
"크롸아아아악!"
시미터를 한 손에 든 블랙 리자드맨 한 마리가 호야를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블랙 리자드맨은 선공 몬스터.
습기가 가득한 늪지대에서 찰박 소리 하나라도 만들어 냈다가는 귀신같이 듣고서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소리의 진원지로 바로 모여든다.
그 덕에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어그로 스킬이 별로 필요 없는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운이 안 좋으면 한 번에 열 마리가 넘게 몰려드는 극한 사냥터이기도 했다.
그만큼 경험치도 많이 주는 녀석들이기는 하지만.
서걱!
"후우......."
호야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마지막 블랙 리자드맨을 처리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떨어져 있는 블랙 리자드맨의 비늘은 고작 두 개.
1시간 동안 일부러 소리를 내어서 소리에 끌려 다가온 것들을 잡은 수만 해도 20마리는 가뿐히 넘긴 것 같은데 떨어져 있는 비늘이 두 개인 것을 보면 드랍률이 말이 아니다.
체감상으로는 자이언트 골렘의 핵보다도 잘 안 나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수 시간 동안 블랙 리자드맨을 잡으면서 모은 비늘은 총 8개.
목표 개수인 50개까지는 며칠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재료 수급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좋은 옵션이 되기를 바라면서 호야는 늪지대를 이동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1시간 정도는 더 사냥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쪽에서 들려오는 블랙 리자드맨들의 울음소리에 호야는 땅에서 나무 위로 올라와 찰박 소리가 나지 않게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동해 소리와 거리를 좁혔다.
오늘 안에 10개는 채우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이동하자 곧바로 시야에 블랙 리자드맨들이 들어왔다.
발소리를 내면서 가다가 주위를 끄는 것보다는 이미 많이 몰려 있다면 기습을 하는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선객이 있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이미 블랙 리자드맨을 사냥하고 있는 중이었다.
몬스터 스틸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호야는 다른 블랙 리자드맨을 찾아서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 했지만 상황이 묘했다.
"힐! 빨리!"
"쿨 타임 아직 다 안 돌았어요! 교대하고 물약 먼저 마셔 주세요!"
"젠장!"
"씨이발! 이 자식들은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사제복을 입은 플레이어가 후위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로브를 입은 여자가 아예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둘을 보호하듯이 해서 전위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상태 또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 명이 돌아가면서 탱커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많이 버거워 보였다.
그들의 앞에는 아직 다섯 마리의 블랙 리자드맨들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았다.
상황이 상황이니 나중에 몬스터 스틸 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야는 영상 기록을 시작했다.
인생의 차디찬 시절을 겪으면서 친구에게 배웠던 것이었다.
그 후, 호야가 나무에서 내려와 행동하려고 할 때, 땅에서 갑자기 스켈레톤과 좀비 등의 언데드 몬스터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아 씨...... 사망 패널티 어떻게 하냐......."
"여기서 언데드가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언데드를 보고서 그들은 좌절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좌절로 물들었던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바뀌었다.
땅에서 솟아났던 언데드들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을 받는 것은 플레이어들이 아닌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블랙 리자드맨들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냐, 이건......."
자신들을 공격할 줄 알았던 언데드들이 같은 몬스터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당혹감마저 들었었다.
한데 나무 사이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내밀자 그들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서 긴장시켰던 몸을 풀 수 있었다.
블랙 리자드맨들도 언데드들에게 물어뜯기기 시작한 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모두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여러분, 괜찮으신가요?"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여성이 다가와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블랙 리자드맨에게 둘러싸여 있던 파티는 거의 여신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후후, 별말씀을요."
"혹시 네크로맨서이신가요?"
"네,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한 번에 이 정도 수의 언데드를 불러내실 수 있다니....... 네크로맨서의 히든 직업이신가 봐요."
망자들, 언데드들을 부리는 직업인 네크로맨서.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길을 열어 주는 언데드들을 보고서 그들은 그녀의 직업이 네크로맨서라 추측했고 그들의 추측은 맞아들었다.
"아뇨, 히든은 아니에요. 평범한 네크로맨서예요."
"와...... 그런데도 이 수의 언데드라니...... 대단하세요, 정말."
"후후후."
마치 옛 귀족 부인처럼 웃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열한 미소로 바뀌었다.
"너희들 다 바보 아니니? 이 숫자가 전부 내가 소환한 거일 리가 없잖아?"
"네......?"
갑자기 바뀐 그녀의 분위기에 파티는 당황했다.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 나무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호야도 그 모습을 보고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피식 웃으면서 손짓하자 나무들 사이에서 검은색 로브를 후드까지 뒤집어쓴 사람들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로브의 왼쪽 가슴 앞에는 공통적으로 하얀색 원 안에 검은 구름이 그려져 있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파티의 얼굴은 블랙 리자드맨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 같이 좌절로 물들었다.
"브, 블랙헤븐......."
암흑 기사,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등의 플레이어가 속한 길드 '블랙헤븐'.
그들은 여러모로 유명했다.
우선 길드 마스터인 디노가 네크로맨서의 히든 직업인 '암흑의 대리자'라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그들이 PK 전문 길드라는 점이었다.
블랙헤븐에 속한 플레이어는 한 명도 빠짐없이 반카오 아니면 카오 상태인 플레이어였다.
즉, 그들의 앞에 블랙헤븐의 마크를 달고 있는 이들은 모두 카오유저인 PK범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디 보자~ 우리가 구해 줬으니까 당신들의 목숨값 정도는 줄 수 있지? 목숨값으로 지금 끼고 있는 무기들만 내놓으면 순순히 보내 줄게."
"클로에 님, 너무 착하신거 아닙니까?"
"역시 우리 클로에 님은 천사 그 자체라니까. 어떻게 무기만 받을 생각을 하시지?"
"후후후, 모두 칭찬 고마워~."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블랙헤븐의 대화에 커다란 방패와 둔기를 들고서 파티의 제일 앞에 서 있던 이가 반발했다.
그 한마디에 화기애애했던 블랙헤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뭐가 웃긴다는 거야? 야,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여기서 죽어서 경험치 까이고 아이템 떨구고 2일의 접속 제한이 걸리는 것보다는 무기 하나로 퉁 치는 게 저렴한 편 아냐?"
"클로에 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 녀석들이 바보라서 계산이 안 되는 걸 거예요."
"그래. 머리 좋은 내가 바보들을 이해해 줘야지."
무기만 받고 보내 주기는 개뿔이.
차라리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지킨다는 말이 더 진실성이 있겠다.
성훈은 그리 속으로 욕하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