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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말과 끝말 (27/27)

3. 첫말과 끝말

애틋한 나의 연인 로엘에게.

로엘, 어느덧 당신과 맞는 두 번째 겨울이 노르크에 차가운 그림자를 깊게 드리웠습니다.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건만 가파른 산등선은 붉은색을 띤 구름을 등에 이고 있소.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노을이 이른 밤을 데려올 채비를 마쳤음을 짐작게 하는 빛이군요.

우리가 함께할 두 번째 성탄절 역시 이틀 뒤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그 어느 해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로엘 그대와 함께 보낼 성탄의 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눈이 소복하게 내린 탓에 곳곳에서 마차 바퀴가 빠져 마부들이 고전 중인 듯합니다. 당신은 노스턴 역에 잘 도착했을지 걱정입니다. 센트럴 역의 재단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노스턴 역에 미리 답사를 간 당신의 부지런함과 계획적인 면모에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군요.

아침에 이어 재차 편지를 보내는 건 나흘 전 내가 태엽 기차로 장난을 친 후 당신이 부쩍 하나뿐인 연인에게 냉담해진 것 같기 때문이오. 점심까지 답장이 없으니 그러한 심증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어젯밤도 당신과 하려는 나를 침대에서 매몰차게 거절하였고, 이틀 전엔 나들이조차 거부하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오.

또한 요 며칠 편지에 답장을 보내 줄 때면 내 이름 앞에 붙는 인사의 첫말과 당신 이름 앞에 붙는 작별의 끝말이 생략되거나 간소해진 경향이 눈에 띄었소. 로엘 당신은 우리가 만났던 초반에 편지의 인사말을 무성의하거나 냉담하게 적는 경향이 있었죠. 그대가 준 서신들은 모두 보관하고 있을뿐더러 내용을 잊지 않고 있으니 발뺌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튼 당신은 여태껏 내게 성이 난 것이 틀림없고, 이 모든 게 나의 잘못임을 알고 있소.

로엘, 며칠 전 당신이 거의 기절할 때까지 회사에서 몰아붙인 일은 내가 정말 지나쳤습니다. 그날 내가 잘못한 일을 세기 어려우나, 특히 마지막 행동은 하지 않았어야 마땅한 일 같소. 손님 응접실에서 개인 집무실로 옮겨 가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했던 것 말입니다. 게다가 그 전엔 태엽 기차까지 그런 식으로 사용했으니 로엘 그대의 기분이 상하고도 남았을 거요.

내가 성벽을 자제하지 못하여 가끔 당신을 화나게 만들곤 하니 참으로 할 말이 없소. 그대의 그림 같은 나신과 아름다운 얼굴을 보노라면 도무지 음란한 욕구를 떨쳐 내기가 어려우니 그것이 내 비루한 변명이라면 변명이오.

사랑하는 로엘, 내 미안한 마음을 알아줘요. 다시는 나무 기차로 철도사에서 희롱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답장을 보내 주길 바랍니다. 화가 났으면 화났다는 말이라도 써서 보내 주시오.

내가 불같은 분노보다 차디찬 외면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나는 당신과 밤새 소리 지르고 싸우는 편이 낫지, 등을 대고 다정한 인사 없이 잠드는 밤은 도저히 못 버틸 지경입니다. 지극히 당신을 사랑하는 내게 일말의 연민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대놓고 화를 내 주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당신 화가 풀릴 때까지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찹니다. 부디 코트를 잘 여미고 목도리와 장갑을 챙기길 바라오. 당신은 겨울이면 감기가 들어 고생할 때가 많으니 늘 걱정입니다.

그럼 저녁에 만납시다.

속죄의 마음을 가득히 담아, 당신의 테런스로부터.

사랑하는 테런스에게.

안녕하세요, 랭던 경. 아침에도 뵈었고 저녁에도 곧 뵐 예정인데 세 시간 사이 편지를 두 통이나 보내셨네요. 제 안위는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아침부터 저를 부지런히 미행하고 있는 제크 씨에게 이미 여러 가지 보고를 받으셨으리라 생각되네요. 칼라일 씨도 평소처럼 저 몰래 쪽지를 써서 자꾸 제크 씨에게 전달해 주는 듯하고요.

저하께서 편지로 하도 간청하시니 솔직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나흘 전의 일로 여태 몹시 화가 난 것은 사실입니다. 예전 같으면 아니라고 말씀드렸겠지만 이젠 딱 잡아떼도 소용없을 거란 예감이 드네요. 심증을 굳히신 저하께서 믿어 주지 않으실 테니 말이에요.

일단 그때 일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윌이 저택으로 돌아오던 날, 저하께서 장난감 가게를 찾아 나무 공을 구입하시기에 강아지들과 놀아 주시려는 거라고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저 몰래 추가로 주문하신 태엽 기차도 철도사 사무실에 장식해 두시겠다기에 그런 줄만 알았죠.

그러나 그날 저하께서 들려주신 여러 가지 변명은 저를 속이려는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랭던 경께서는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참담한 성벽이 불러일으킨 괴이한 상상력에 사로잡혀 계셨던 겁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난 후 랭던 경께서 하셨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나 배신감이 들던지요. 철도사에서 벌어졌던 상황도 참으로 난감하였지만, 그 전에 계획을 꾸미던 당신 모습이 자꾸 생각나 저는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하께서 굳이, 굳이 애니에게 나무 공을 남겨 두라고 지시하셨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것을. 제가 태엽 기차에 대해 여쭤봤을 때 잠시 대답을 주저하셨던 순간에라도 말이에요. 이 모든 것이 어리석고 순진한 제 탓입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침대에서 저하를 밀어 낸 것은 사실이나 저를 살살 달래어 끝까지 하신 일을 발뺌하시진 않으시겠죠? 그리고 태엽 기차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까진 좋으나 굳이 ‘철도사에서’라는 단서를 달아 놓으신 연유는 무엇일까요? 에메랄드 저택에선 사용하시겠다는 뜻이 아닌지 몹시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저하의 말씀대로 저는 며칠간 무척 화가 났으나 방금 서신과 함께 보내 주신 선물에 마음이 사르르 풀리고 만 것이 사실입니다. 겨우살이와 제 첫 명함을 보내 주시다니! 종이 포장을 뜯은 뒤 겨우살이 가지 위에 놓인 명함 상자를 열어 보고는, 감동을 받아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정말 당신을 길게 원망할 수가 없네요. 저하께서 저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니 말이에요. 두꺼운 종이에 금박 장식까지 더해 주셔서 저하의 명함과 똑같게 만들어 주셨네요.

비록 저하께서 황당한 상상력으로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거나 지나친 질투심에 사로잡혀 괴롭히실 때가 있기는 하지만, 제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믿어 주시는 분 또한 랭던 경뿐입니다. 선물해 주신 명함을 볼 때마다 저를 향한 저하의 진심을 늘 상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테런스, 성탄절이 되는 자정에 작년처럼 함께 마차를 타고 호젓한 호숫가를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하께서 저의 제안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다면 그날, 오늘 주신 겨우살이를 마차에 달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퇴근길에 철도사로 가겠습니다. 지난 며칠간 일부러 들르지 않아 죄송해요. 저도 랭던 경께서 캐묻기 전에는 뒤로만 꽁해 있는 성격을 고치기가 힘드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곧 만나요, 테런스.

당신의 하나뿐인 연인, 로엘로부터.

나는 그대로 봉투를 밀봉하려다 다시 편지를 꺼내 추신을 덧붙였다. 남은 자리가 모자라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써넣어야 했다.

추신. 저하의 당부대로 인사의 첫말과 끝말을 공들여 적었습니다. 매번 첫말과 끝말을 집요하게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이젠 일을 하느라 급하게 서신을 적을 때가 있으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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