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 리스트 (외전)(비욘드 데이)
1. 다시, 겨울
노르크의 수도는 12월의 맹렬한 추위에 타올랐다. 랭던 경과 내가 두 번째로 함께 맞는 겨울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쌓인 눈을 휘몰아 골목 곳곳을 누빌 때면 행인들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소매로 눈가를 가렸다. 매일 얼어붙는 차가운 공기는 신도 구부러트리지 못할 것 같았던 위대한 강철을 휘게 했다. 그 덕에 산간 지역을 지나는 기차들은 심심하면 탈선 사고를 일으켰고, 랭던 경은 여름에 비해 철도사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잦아졌다.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고 인부들을 충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랭던 경이 철도사에서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시각, 나는 센트럴 기차역에 도착해 마차 밖으로 발을 디뎠다. 흰 수리부엉이의 깃털처럼 커다란 눈송이가 흐린 하늘에서 고요한 지상으로 내려앉는 아침이었다. 멀리 보이는 가파른 산과 나무 위로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풍광이 고즈넉했으나 소란스러운 기차역 앞에선 고요한 겨울의 정취가 허락되지 않았다.
소란한 인파를 뚫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내 비서이자 동료가 된 커트 칼라일 씨였다. 나는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칼라일 씨, 여기예요.”
“죄송합니다, 서튼 남작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눈 때문에 바퀴가 빠져 조금 늦었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오는 길에 눈이 많이 내려 이제 막 도착했어요.”
“그럼 화장실 공사가 잘 끝났는지 확인하러 가 보실까요? 오늘 공사 마무리 승인을 해 주시면 오후부터 바로 화장실을 개방할 예정입니다.”
“네, 그래요. 오늘도 기차역은 변함없이 시끄럽네요.”
“겨울이라 그나마 덜한 것이죠. 여름에는 사람에 끼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칼라일 씨와 나는 가을부터 랭던 경의 감독하에 기차역 환경 개선 사업에 착수했다. 청명한 바람이 노랗게 무르익은 들판을 내달리던 계절이었다.
본래 늦여름부터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부득이하게 가을로 출발을 미뤘다. 혁명 후 불안정한 정부 상황 때문이었다. 노르크는 여름 무렵 선거를 무사히 마치고 내각을 꾸렸으나 행정부 체계는 여전히 미비한 상태였다. 철도역 환경 개선과 관련된 공사를 추진하려면 행정부의 각종 인허가가 필요했는데 추수 감사절 직전에야 체계가 안정화됐다. 때문에 각종 도시 정비 사업이 내년으로 미뤄졌지만, 비교적 소규모인 철도역 공사는 운 좋게도 겨울이 오기 전에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칼라일 씨와 센트럴 기차역에 새로 설치된 화장실을 점검하려 사람들을 헤치고 힘겹게 나아갔다. 매표소 앞은 인산인해였다. 창구부터 늘어선 줄은 기차역 바깥까지 이어졌는데, 어찌나 긴지 발끝을 들고 목을 빼도 끝자락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이 많으니 잠깐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러 소동을 목격했다. 긴 시간 기다리고도 표를 끊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새치기를 시도하며 다퉜고, 무거운 짐을 챙긴 사람들은 가방을 반대편 손으로 번갈아 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누군가 바닥에 놓인 타인의 짐을 실수로 밟았다. 그 바람에 유리병이 깨지자, 주인이 값을 물어내라고 소리치다 드잡이가 벌어졌다.
나는 소란 틈에서 거의 소리를 질렀다.
“칼라일 씨, 겨울이 되니까 사람들이 표를 구입하기 더 힘들어하네요. 추위를 견디며 야외에서 한참 기다려야 하니까요. 표를 더 빨리 살 수는 없을까요?”
“기차를 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남작님.”
“가을에 랭던 경께 건의해 창구 수를 두 배로 늘렸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네요.”
“표를 끊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나는 옮기던 발을 멈추고 막 표를 사서 나오는 노부인을 잡았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정중한 태도를 보인 뒤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인. 저는 랭던 철도사의 직원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방금 끊으신 기차표를 좀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왜 표를 보여 달라고 하시죠?”
“승객분들께서 표를 끊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듯해 문제를 파악 중입니다.”
내 말에 노부인의 동공이 크게 열리며 눈빛에 강력한 항의의 빛이 실렸다. 노부인은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팔에 건 핸드백을 연 뒤 방금 집어넣은 표를 꺼냈다. 추위 때문에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 얇은 종이를 잡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곧 단호한 손길이 내 눈앞에 기차표를 들이밀었다.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공중에서 기차표가 팔랑팔랑 나부꼈다.
나는 공손히 표를 받아 들었다. 노부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문제야 너무나 자명하지요. 센트럴 기차역에서 먹고 사는 떠돌이 개들도 왜 표를 사기 힘든지 알걸요? 직원들이 하나같이 손이 느리답니다. 창구에 앉아 표를 파는 사람은 철도역 이름과 좌석을 더 빨리빨리 적을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랭던 경이라면 게으른 창구 직원들이 표를 다 팔길 기다리느니, 노르크에 봄이 와서 은방울꽃이 피어나는 편을 더 고대하겠어요. 왜냐하면 그편이 훨씬 빠를 테니까요!”
나는 건네받은 표를 들고 노부인의 불평을 열심히 듣는 척했다. 그동안 철도사에서 기차표 견본을 본 일은 있으나 실제 시민들이 구입한 표를 제대로 살펴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른의 손바닥만 한 표에 인쇄된 글자라고는 ‘출발역, 도착역, 날짜, 출발 시간, 좌석’이 전부였고 나머지 글자들은 모두 수기로 기입되었다.
출발역: 센트럴 역
도착역: 이스턴 해안 역
날짜: 12월 19일
출발 시간: 오후 7시 30분
좌석: 2A 칸 1행 1열
모자란 잉크를 다시 찍어 가며 글씨를 쓰느라 검은 선은 중간중간 흐릿해졌다 다시 진하게 이어지길 반복했다. 노부인은 내가 표를 살피는 동안 말을 끊지 않았다.
“예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키우시던 양이 떠오르네요. 내가 열두 살 때였는데 한 녀석이 이상하게 털이 자라지 않는 거예요. 고민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단호히 결정을 내렸답니다. 우리 식구는 그날 밤 양고기를 배불리 먹고 남은 고기 판 돈을 보태 털이 풍성한 멋진 양을 새로 샀지요. 창구 직원들을 보니 이별한 그 양이 떠오르네요.”
노부인은 신랄한 비판을 끝내고 우아한 손짓으로 내게서 표를 거둬 가 핸드백에 넣었다. 털 코트를 여미고 기차역 앞 여관으로 향하는 노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옆에 선 칼라일 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맡은 일은 꼼꼼하게 해내지만 상상력이 빈약한 편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남작님. 승객들이란 언제나 불평불만이 많은 법이랍니다. 그들의 항의를 다 들어 주려면 끝이 없지요.”
“그런가요.”
“이스턴 해안은 눈이 쌓인 험지를 지나야 해서 예전엔 마차를 타고도 일주일씩 가던 곳입니다. 거친 돌이 많아 바퀴가 자주 빠지고 부러지니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이제 기차를 타면 12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데, 기차표를 사는 데 4시간이 걸린다고 불평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칼라일 씨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갈등과 논쟁을 꺼리는 성미가 여전하여 수긍하는 척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가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상대는 오직 랭던 경 한 명뿐으로 그 외에 사람들에겐 속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였다. 물론 그는 여태 내 화법이 두루뭉술하다며 몹시 답답해했으나, 랭던 경이기에 그나마라도 표현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괜히 시간을 지체해서 미안합니다, 칼라일 씨. 얼른 1층부터 둘러보도록 해요.”
칼라일 씨와 나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화장실을 살펴보려 다시 발을 재촉했다.
그동안 센트럴 기차역은 이용하는 탑승객의 숫자에 비해 화장실이 턱없이 부족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게 한 군데 설치된 간이 변소가 전부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가을부터 공사를 진행해 화장실을 1층에 세 곳, 2층에 한 곳으로 늘렸다. 물론 청소부도 더 고용했다.
나는 어제 막 공사가 끝난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잘 나오는지 살폈다. 거센 추위를 극복한 상수도관이 반짝이는 은색 주둥이 아래로 맑은 물을 졸졸 흘려보냈다.
처음 계획은 수도꼭지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펌프를 설치하고, 그 밑에 커다란 나무통을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는 역무원들은 시민들이 나무통 안에서 목욕을 하거나 집으로 물을 길어 갈까 염려했고, 건의를 받아들인 랭던 경은 값비싼 수도꼭지를 택했다. 물론 나는 그의 결정에 누구보다 찬성했다. 기차역은 더럽고 혼잡한 곳이라는 오명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빡빡한 은색 수도꼭지를 꽉 틀어 잠갔다.
“다행히 물이 잘 나오네요. 바로 개방해도 되겠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만족할 것 같습니다, 남작님.”
2층까지 점검을 마치고 계단으로 향했다. 서슬 퍼런 바람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귓불과 뺨을 얼리며 지나갔다. 기차역에 지붕이 있긴 했으나 사방이 뚫려 있어 바람은 곳곳에 눈을 실어 날랐다. 계단에 눈이 얼면 승객들이 너도나도 미끄럼틀을 탈 듯해 역무원에게 청소를 부탁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멀찍이 선 한 신사의 모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대의 자태는 독보적으로 우아하고 멋스러웠으므로,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내 관심을 끌어낸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그 신사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나의 연인, 테런스 랭던 경이었다.
프록코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점잖게 모자를 벗었다 쓰며 인사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그를 맞닥뜨린 기쁨이 내 입꼬리를 위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랭던 경!”
소음 틈으로 그를 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를 향한 짙은 녹안이 뒤편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과 대조를 이루며 형형하게 빛났다.
뒤에 선 칼라일 씨가 의식되어 퐁퐁 샘솟는 반가움을 양껏 표현하지는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에게 정중한 투로 인사를 건넸지만, 장갑에 든 손가락은 그를 당장에라도 껴안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랭던 경, 일찍 오셨네요. 아직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요.”
“당신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서둘러 나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이동했다.
“칼라일 씨는 이만 회사로 들어가 보시오. 남은 일정은 내가 로엘 씨의 곁에서 돕겠습니다.”
돕겠다는 표현은 몹시 겸손했으나 칼라일 씨를 회사로 복귀시키는 처사는 평소보다 다소 냉정했다. 질투심이 많고 내 행동을 통제하려 드는 그의 성미를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칼라일 씨는 철도사로 복귀하라는 지시에 잠시 당황한 듯 갈색 눈을 깜빡였으나 곧 예의를 갖추고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공작님. 이만 회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튼 남작님.”
모자를 쓰고 마차로 걸어가는 칼라일 씨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노르크의 겨울 숲을 담아 놓은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엔 나를 향한 치열한 애정과 칼라일 씨를 향한 냉정한 경계심이 반씩 담겨 있었다. 투명한 빛을 받은 유리 조각처럼 안광이 번쩍였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여닫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빽빽하게 얼어붙었다.
“칼라일 씨도 가을부터 기차역에 상가를 만든다고 애썼는데 같이 있게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오늘 모임은 입점할 상인들을 만나는 자리라 무척 참여하고 싶었을 텐데요.”
사실 기차역 시설 개선 사업의 핵심 과제는 계단이나 바닥 정비, 화장실 공사가 아니었다. 바로 센트럴 기차역 안에 상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노르크 사람들은 아직 기차역에 식당이나 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지금껏 간이 변소만 놓아두었는데도 항의하는 승객들이 전혀 없었던 이유다. 모두 기차역은 기차를 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식당이 없는 센트럴 역은 잡상인이 넘쳐 났다. 배고픈 승객들은 다급한 나머지 근처에서 나무를 주워다 역사에 불을 피우고, 짊어지고 온 커다란 솥에 스튜나 수프를 끓여 먹었다. 때로는 돈을 받고 한 그릇씩 파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식당과 상점이 생기면 그 자체로 기차역의 환경이 나아질뿐더러, 월세를 받아 시설 유지 비용을 넉넉히 확보하는 게 가능했다. 환경과 예산 양쪽에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랭던 철도사는 가을부터 기차역 상가 입점 지원자를 받았고, 그 담당자가 나와 칼라일 씨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인들과의 모임을 앞두고 회사로 돌아가라는 랭던 경의 지시는 참으로 너무한 처사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로엘 당신과 칼라일 씨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늘어났습니다. 결정권자인 내가 있을 때는 칼라일 씨가 필요치 않으니 이런 때라도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요. 어쩔 수 없는 조치입니다.”
“어쩔 수 없다뇨. 제가 다른 사람과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을 붙이기에 적당한 일입니다.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칼라일 씨는 아내와 딸이 있으니 저하께서 경계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랭던 경께서도 그 점을 고려해 칼라일 씨를 제게 붙여 주신 것 아닌가요?”
“그 일이라면 내 판단이 옳았는지 의문이오. 아내와 딸이 있다고 그대에게 홀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칼라일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내 앞에서 지금 칼라일 씨를 두둔하는 거요?”
되묻는 그의 눈매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음습한 질투심으로 타오르는 듯했다. 연유를 몰라 잠시 흠칫하는 사이 랭던 경은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을 의식적으로 내렸다. 진심으로 관대한 마음 씀씀이를 발휘했다기보다는 공공장소임을 의식한 처사 같았다.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감정을 가지런히 정돈한 뒤 덧붙였다.
“그건 세속의 욕정에 눈이 어두운 로엘 씨의 천연한 생각입니다.”
“저도 이제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리에서 로엘 그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자지를 발딱 세운 치들이 좆을 문지르며 쫓아와도 순진한 당신은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요.”
“세상에! 랭던 경!”
나는 그의 언사에 몹시 놀라 얼른 한쪽 가죽 장갑을 빼내고 손을 그의 입술에 갖다 붙였다. 섬려한 입술이 지그시 위로 올라가며 웃는 모양새가 손바닥 밑으로 생생히 느껴졌다.
그런 상상을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겼대도 경악할 지경인데 소리 내어 뱉고 웃다니! 조금 전 그가 공공장소임을 의식하는 것 같다는 내 판단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랭던 경은 언제나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으로, 그의 언행에 따르는 수치심은 늘 내 몫이 되기 일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차역을 나고 드는 행인들은 랭던 경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품위 없이 소리 지른 나를 스쳐 갈 뿐, 랭던 경에겐 닿지 않는다는 것이 그 확실한 증거였다.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시면 어떡하나요. 제발 조심하십시오. 누가 듣겠습니다.”
나는 혹여 그가 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을까 손바닥으로 입술을 더 꽉 눌렀다. 랭던 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으라고 하세요. 사실이 그러한데 거리낄 게 무어요? 뻔뻔한 치들이 당신 얼굴을 보고 좆을 세우지 않으면 모두 해결될 일이지.”
뺨에서부터 붉은 열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추위에 꽁꽁 얼었던 피부는 여름 햇볕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버터처럼 뜨거워졌다.
“대체 오늘따라 왜 그러시나요. 평소에도 그런 쪽으로는 전혀 예의를 차리지 않으셨지만 오늘따라 심술이 더 심하신 것 같습니다.”
랭던 경은 경악하고 당황한 나를 예민한 눈길로 살뜰히 뜯어보았다. 동공 안쪽에서 이글거리던 새빨간 질투심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 보였다.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 주변 사람의 시선을 끄는 탓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놀랄 만한 미인이라는 점이 내겐 참으로 문제요.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으니 말입니다. 어떨 때는 개들도 당신을 탐내는 거 같소.”
“또 강아지 얘기를! 제발 그런 상상은 하지도 마세요.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아도 저하의 음담패설을 저지할 수가 없네요. 목소리가 워낙 묵직하셔서요.”
불현듯 손바닥 밑으로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지났다. 놀라서 떼어 내려 했으나 그는 물러나려는 손목을 붙들고 다시 진득하게 혀를 문질렀다.
“흣….”
“당신은 언제 맛봐도 달군.”
“…저하….”
애원하듯 랭던 경을 불렀으나 혀가 손바닥에 다시 뜨거운 길을 냈다. 나는 결국 그의 혀가 내 손바닥에 하는 일을 주변에 들키지 않으려 할 수 없이 손을 오목하게 모아야 했다. 혀는 몇 번이나 더 내 손바닥을 핥았고, 느른한 눈매는 손 너머의 나를 응시했다. 진득한 욕정을 마주하자 뺨이 탔다.
나는 신음이 흐를 듯한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주변을 둘러봤다. 랭던 경의 성벽이 도무지 나아지질 않으니 나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백금색 머리카락 틈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들이 외투를 여미고 바삐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서 빽빽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눈송이도 우리를 가려 주었다. 눈이 반갑긴 오랜만이었다.
뾰족한 혀끝이 손바닥 가운데를 꾹 눌렀다.
“한눈팔지 말아요, 로엘.”
“주변에, 흡, 보는 눈이 있을까 봐요.”
“별걱정을 다 하는군. 눈발이 짙어져 괜찮습니다. 당신 속눈썹에 눈송이가 맺혔을 정도예요.”
랭던 경은 자신의 침으로 축축해진 내 손을 그의 코트 주머니로 데려갔다.
노르크엔 그가 남색가인 걸 모르는 사람도, 내가 그의 애인이라는 소문을 못 들은 자도 없었으나 길거리에서 티를 내고 다니는 일은 꺼려졌다. 손을 잡는 일이 거기에 해당됐다. 은근슬쩍 빠져나가려는 손을 굵은 손가락이 옭아맸다. 손가락 사이를 잇는 여린 살을 매만지는 손끝에도 지나친 음심이 배어 있었다.
“그럼 시선을 피해 얼른 사무실로 갑시다. 곧 상인들도 도착할 테니까.”
“네, 저하.”
나는 결국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길 포기하고 그의 곁에 바싹 붙어 발을 옮겼다. 떨어져 걸으면 오히려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더 티가 날 게 자명했다.
랭던 경은 기차역 지붕 아래로 가서야 손을 놓아주고 내 머리카락과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주었다. 평소 차가운 눈을 만지길 꺼리는 나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랭던 경에게 받았던 손수건을 꺼내어 나 역시 그에게 얹힌 눈을 털어 주고 다정히 눈을 맞췄으나, 랭던 경은 어쩐 일인지 또 칼라일 씨를 들여보낼 때처럼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잘 안 풀리시는 것 같네. 무슨 일이 있으셨나?’
나는 몽글몽글 피어나는 의문을 돌돌 말아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단둘이 있을 때 물어보는 편이 더 적당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우리는 기차역 2층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사이 내 손은 또 랭던 경의 코트 주머니로 끌려 들어갔다.
묵직한 나무 문이 닫히자마자 그에게 이유를 물어볼 요량으로 손을 강하게 쑥 빼냈으나, 손아귀에 붙잡혀 탈출하지 못했다. 민망하게 팔만 아팠다. 나는 결국 놓여나길 포기하고 최대한 나긋한 어투로 물었다.
“저하, 다시 한번 여쭙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심술이 나셨나요? 표정까지 어두워 보이시네요. 사람들이 오가는 기차역 앞에서 다 들리도록 교양 없는 말씀을 하시고 손바닥까지 핥으시고요. 하도 닦달하시기에 오전에 인편으로 서신까지 보내 일정을 알려 드렸는데 제크 씨에게 저를 미행하라고 시키신 것만으로는 부족했나요?”
랭던 경은 가라앉은 낯빛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기차역 지붕에 가득 쌓인 무거운 눈을 날려 버릴 듯한 큰 한숨이었다. 마침내 입을 열고 나온 그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이 부는 듯 쓸쓸하기까지 했다.
“로엘 그대를 사무실에 묶어 놓은 것도 아닌데 부족하지 그럼 충분하겠소? 제크 씨를 미행 붙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하께서 통제욕이 지나치신 탓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사실 조금 전 당신을 기다리며 역 앞에 서 있다가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습니다.”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한 그의 눈가가 불쾌한 말을 상기한 듯 파르르 떨렸다. 반듯한 미간이 좁아지고 잘생긴 입매가 꾹 붙었다가 떨어졌다.
대체 랭던 경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혹여나 내 행실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 되묻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가 남은 말을 이었다.
“기차표를 사서 나오는 승객들이 당신과 칼라일 씨를 두고 수군거리는 대화였습니다. 둘이 접 붙는 것 같다는 뉘앙스가 역력하니 내 기분이 어찌나 참담한지…. 칼라일 씨를 들여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다정한 당신이라면 내 심정을 헤아려 주겠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당연히 저하의 상처받은 심정을 헤아리겠지만… 정말 그들이 접 붙는다는 식으로 얘기했나요?”
쏘아 대기에 능한 랭던 경이 웬일로 내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랭던 경. 정말 승객들이 접 붙는다는 표현을 썼나요?”
나는 그의 반응에 제법 심증을 가지고 다시 캐물었다. ‘접 붙는다’는 말 자체가 랭던 경이 즐겨 사용하는 경박한 표현이기도 했거니와, 정말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칼라일 씨를 회사로 돌려보내고 내 손바닥을 희롱하는 것보단 더 심한 조치를 취했을 게 분명해서였다. 대노하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나를 며칠 묶어 둔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대답해 주세요.”
내가 거듭 확언을 구하자 펜으로 한 올 한 올 그린 듯한 정갈한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찌푸린 미간이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가 빙판처럼 굳은 입매를 움직였다.
“정확히는 한 승객이 동행에게 2층에서 옆에 선 남자와 친하게 대화를 나누는 금발이 로엘 서튼 남작이냐고 묻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저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친해 보인다는 소리를 접 붙는다고 해석해 들으실 수가 있나요? 누가 들어도 그냥 제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질문 아닐까요?”
“…….”
“저하께서도 정말 못 말리십니다. 부디 그 얘기는 잊고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어차피 당신의 연인인 것을요.”
“당신에 관한 소문이 꽤 잦아들었다지만 한때 창부라고 이름을 떨친 데다, 그대와 내가 아래를 겹치는 걸 노르크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칼라일 씨와 시시덕대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상상들을 하겠소? 접 붙는다는 것도 부드러운 해석입니다.”
좋게 풀어 보려고 했건만 그의 대답은 내 기분을 무척 상하게 했다. 물론 랭던 경이 내가 밖에서 일하며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데 아직 적응하지 못한 건 알았다. 일을 시작한 지 4개월도 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강한 통제욕을 고려하면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응당 필요했다.
그러나 죽은 도미닉과 새뮤얼이 낸 소문까지 언급하는 언사엔 몹시 화가 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양쪽 뺨은 아이들이 단단히 쥐어 뭉친 눈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랭던 경은 홧김에 쏘아붙여 놓고 내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곧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려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이젠 랭던 경과 말을 나누고 싶은 심정이 아니어서 노크 소리가 자못 반가웠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대로 자연스레 표정을 풀고 점잖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센트럴 기차역 사무실에서 일하는 캐서린 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랭던 공작님. 서튼 남작님. 입점 지원서를 가져온 상인들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들여보낼까요?”
“잠시 로엘 씨와….”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날이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은 예의가 아니죠.”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대답하고 중앙에 놓인 넓은 마호가니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 옆에서 랭던 경과 나란히 서 손님들을 맞았다.
내 기분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일관하고 상인들에게 평소보다 더 보란 듯이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1년간 랭던 경에게 풍족한 사랑을 받으며 내게도 뻔뻔한 기질이 작게 움튼 것이다.
여러 연령대의 식당 주인들이 지원서를 품에 안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함박눈 때문에 다들 얼굴이 빨갛게 얼었고, 머리와 어깨엔 미처 털어 내지 못한 눈을 한 움큼씩 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나풀대며 떨어지는 눈송이가 벽난로의 열기에 물방울로 변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남작님.”
“반갑습니다. 테런스 랭던입니다. 옆은 기차역 상가 사업의 책임자이신 로엘 서튼 경입니다.”
랭던 경이 상인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 악수하는 동안 나는 눈인사로만 방문자들을 환대했다. 비록 랭던 경의 언행에 화가 난 상태긴 했지만 상인들과 손을 덥석덥석 잡으면서까지 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괜한 반항심으로 악수를 나눴다간 오늘 밤 침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랭던 경과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맞은편엔 열 명 남짓한 상인들이 앉았다. 이미 사무실에서 한 단계 검토를 거쳐 불러들인 후보들이기에 시내에서 평판이 좋은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가져온 지원서를 검토했다. 랭던 경은 마음에 드는 지원서 한 장을 골라 질문했다.
“미첼 씨는 빵집을 열 계획이군. 자릿세가 매월 칠백 골드인데 보증을 서 줄 사람이 있소?”
“예, 그러믄요. 부인이 보증을 서 주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이미 시내에서 빵집을 크게 하고 있는데 장사가 무척 잘되어 노르크 수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습죠. 도웨스 바게트라고, 도웨스식으로 빵을 만드는 곳입니다. 공작님께서도 들어 보셨겠지요?”
“못 들어 봤습니다. 나는 평생 빵을 구입해 본 적이 없소. 저택에 요리사들이 있으니 말이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랭던 경의 대답은 무척 오만하고 서늘했다. 간신히 쌓아 올린 예의가 산사태를 일으킨 투였다.
신분제에 따른 법적인 차별이 철폐되었다지만 불과 작년만 해도 공작과 평민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그가 조금만 무뚝뚝하게 나와도 평민들은 몸을 벌벌 떨기 일쑤였다. 빵집을 차리려는 중년의 남자는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코트 안에서 흰 손수건을 쑥 뽑아냈다. 그리곤 추수를 끝낸 밭처럼 텅 비어 버린 정수리와 이마의 땀을 연방 훔치며 조금 전에 한 말을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친히 빵을 구입해 보셨을 리 없으시죠. 저택에 고용인들이 많으실 텐데…. 그저 조그마한 빵집을 두고 실언을 했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상인과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저하께서는 그런 일엔 기분 상해 하지 않으시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쉽게 기분 상하시거나 곡해하시는 일들은 따로 있으시거든요.”
옆얼굴에 랭던 경의 따끔한 시선이 닿았다. 나는 일부러 미첼 씨를 향해 눈을 접어 웃고 다른 지원서를 살폈다. 아래로 향한 시선 때문에 구불구불한 백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귀 뒤로 넘겨 꽂았다. 하녀 애니가 매일 아침 열심히 손질해 주었으나 가는 머리카락은 겨울바람을 견뎌 내질 못했다. 오후가 되면 쉽게 흐트러지고 나풀거렸다.
이번엔 내가 수프 가게를 차리겠다는 숙녀의 지원서를 집었다. 지원자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랭던 경은 그사이 이 모든 절차에 흥미를 잃었는지 구두 옆면으로 내 신발을 꾹 밀었다. 겉으로는 온화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랭던 경과 장난을 칠 기분은 아니었다. 허벅지를 바짝 붙이고 발을 의자 뒤쪽으로 피신 보냈다. 접촉을 피하는 티를 감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랭던 경은 한숨을 커다랗게 내쉬며 여송연을 꺼내 붙을 붙였다. 공작의 한숨 소리에 10명분의 어깨가 가파르게 위로 튀어 올랐다. 그의 입술에선 무심한 여송연 연기가 길게 흘러나왔다.
“그럼 1주일 뒤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지원자들과의 긴 면담을 마무리했다.
상인들이 모두 나가자 보조 사무원을 대동한 캐서린 양이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어떤 가게가 입점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주고받았다. 적당한 후보를 고르기 위해 캐서린 양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동안 보조 사무원이 벽난로에 땔감을 던져 넣었다. 식어 가던 두 뺨이 금세 따뜻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용이 괜찮은 듯한데 잡화점을 내겠다는 부인이 마음에 걸리네요. 캐서린 양이 보기엔 어때요?”
“저도 그런 듯해 수소문을 해 봤는데 잡화점 운영이 처음이 아니랍니다. 결혼 전에 아버지와 수도 근교에서 잡화점을 운영했었는데 당시 평판이 좋았다고 해요. 보증인인 폴먼 씨도 신용이 가는 사람이고요.”
마침내 가게가 다섯 개로 추려졌다. 나는 자꾸 치근거리는 랭던 경의 구두를 피해 발을 뒤로 바짝 당긴 상태를 견고히 유지했다.
내내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여송연을 피우던 랭던 경이 시가를 비벼 껐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최종 승인이 났다.
“그럼 가게 배치를 어떻게 할지 센트럴 역 사무실에서 의논해 보고 서튼 경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시오.”
“네, 공작님.”
캐서린 양의 손끝이 지원서를 향하자 구석에 앉아 있던 보조 사무원이 재빨리 달려와 대신 서류 더미를 챙겼다. 둘을 따라 사무실을 떠나려는 나를 커다란 손이 뒤에서 잡아 붙들었다.
그에게로 몸을 돌리자마자 열렸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들어오던 냉기가 사라지고 입술엔 여송연 향이 묻은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벽난로에선 장작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나직하면서 불규칙한 소리의 틈을 두 사람의 침음성이 소란하게 메웠다. 두꺼운 혀는 거침없이 입술을 틈입하여 미끄러운 치아를 하나하나 문지르고 어느새 뜨거워진 내 침을 빨아 넘겼다.
“흣, 응….”
짓궂은 말을 들은 후 모임 내내 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뾰족한 고드름이 뜨거운 살덩이의 온도에 허무할 만큼 사르르 녹아 버렸다.
단단한 치아는 내 아랫입술과 혀끝을 지근지근 누르고, 커다란 손바닥은 뺨을 몇 번이고 소중하게 쓸어내렸다. 벽난로 불빛이 닿지 않는 쪽이었다. 조금 얼어 있던 피부를 그의 체온이 부드러이 녹였고, 맞물린 두 사람의 입술 새로 신음이 샜다.
“아….”
살풋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입맞춤에 집중하는 그의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미려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멋있는 얼굴이었다. 내게 몰입하는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에 겨우 남아 있던 작은 얼음 조각까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혀를 깊숙이 집어넣어 목구멍을 틀어막을 것처럼 휘젓고 몰아붙이다가, 내가 숨을 쉬지 못해 가슴팍을 들썩이면 입술을 물고 빨며 쉴 틈을 내 주었다. 가쁜 헐떡임이 잦아들면 거침없이 다시 안을 파고드는 건 물론이었다.
성탄절 밤, 마차 안에서 호젓한 호수를 옆에 두고 키스를 나눈 후로 나는 이 고통 없는 행위를 지극히 사랑했다. 당연히 그 바탕에는 랭던 경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자리했다. 그날 내리던 눈보다 더 짙게 내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감정이었다.
입술 주변이 모두 침으로 흥건히 젖고 다리가 떨려 서 있기 힘들 정도가 된 후에야 간신히 그가 입술을 떼어 냈다.
“기분은 좀 풀렸어요?”
“흐읏….”
묻는 중에도 입술 주변을 핥는 혀가 뜨거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가 간신히 떴다. 아직 여운에 젖어 다물리지 않은 입술 사이로 두꺼운 혀끝이 잠시 들어왔다가 물러났다. 그의 혀끝과 내 아랫입술을 은실처럼 잇던 침이 톡, 끊겼다.
“당신의 새치름한 표정을 푸는 데는 입맞춤만 한 것이 없군.”
“자꾸, 흣, 키스로 모면하려 하지 마세요, 랭던 경.”
항변하는 내용과는 반대로 내 음성엔 이미 흐물흐물 풀어져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보드레하게 묻어났다. 격정적이면서도 달짝지근한 입맞춤과 뺨에 닿은 단단한 손바닥의 감촉은 언제나 나를 쉽게 허물어트렸다. 엄지손가락이 젖은 내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내가 다른 사람과는 지위를 내려놓고 대화해도 당신에겐 늘 공작이고 싶은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을 거요. 그러니 말실수를 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어요? 응? 로엘. 내가 먼저 당신에게 매달려 입을 맞췄으니 그쯤은 당신도 부드러이 넘겨 줄 수 있겠지?”
부탁하는 투에 그러지 않아도 풀린 마음이 금세 더 약해졌다. 나는 랭던 경이 조금만 달래 주어도 손바닥에 얹은 눈송이보다 더 빠르게 화가 잦아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목소리는 물에 불린 지푸라기처럼 금세 힘을 잃었다.
“물론 저하께서 먼저 제게 손을 내밀어 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넘길 수야 있지만….”
“요즘은 사실 그대가 토라진 모습을 보면 좀 꼴리기도 합니다.”
“…네? 어째서요?”
대체 왜 내가 화났는데 음심이 일어나는 걸까. 나는 순수한 궁금증이 일어 되물었다. 그가 내쉰 작은 한숨에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게 성을 내다가도 엎어 놓고 박아 주면 다 잊고 운다는 걸 확신한 후부터 화난 표정을 볼 때 이런저런 상상을 하거든.”
“랭던 경! 꼴… 다니요. 그리고 저하께서는 공작으로서의 본인 위신은 그렇게 챙기시면서 남작인 제게는 토라진다고 표현하시는 것이 말이 되나요? 저는 엄연히 화를 낸 것입니다.”
나는 랭던 경에게 되도록 당당히 따지려 했으나 돌아온 건 내 말을 모조리 흘려들은 듯한 대답이었다. 조금 전의 키스를 복기하는 듯 여운에 잠긴 녹안이 비스듬히 위로 올라갔다.
“물론 당신은 키스도 무척이나 좋아하여 입술이 맞닿아도 쉽게 화를 풀지. 혀를 겹칠 때마다 밑이 이렇게 되는데 당신이 장소를 가려 아무 데서나 박을 수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시선이 다시 내 얼굴을 향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이 거침없이 바지 위로 내 것을 찾아 쥐었다. 넓게 밀려오는 압력이 반쯤 선 성기를 지그시 눌렀다.
놀라서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악력에 차이가 있어 떨어트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뜨거운 혀가 목덜미를 스치는 감각이 선연했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와 윗니로 아랫입술을 누르며 버둥거렸으나 그는 좀처럼 나를 놔주지 않았다.
“저하, 흣, 그만하세요.”
간신히 손이 떨어졌을 땐 부쩍 뜨거워진 숨결이 잇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기차역 사무실에서 흥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애써 태연한 기색을 가장했다. 일부러 가볍게 내쉰 한숨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한 나의 작은 위장술이었다.
“저는 정말 저하를 못 말리겠습니다. 항상 이리 충동적이시니 말입니다.”
“궁금해서 만져 본 것뿐입니다. 그리 싫다면 그대가 자지를 안 세우면 될 일 아닐까?”
자… 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니 일순 커다란 민망함이 일어났다. 더불어 랭던 경은 나와 달리 더 이상 입을 맞추는 것만으론 자극받지 않는 건가,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이기도 했다. 본인은 그렇지 않으니 내 상태를 저리 당당하게 지적하는 것일 터였다.
확인하고 싶었으나 조금 전 키스할 때 그가 하반신을 문지르지 않았으므로 알아볼 길이 요원했다. 그렇다고 시선을 내려 그의 바지춤을 빤히 쳐다보기도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벽난로의 열기에 뜨거워진 뺨을 찬 손바닥으로 누르며 겨우 입술을 뗐다. 나로서는 몹시 용기를 낸 질문이었다.
“그러면 랭던 경께서는… 저와 달리 이제 키스로는 반응이 아, 안 오시나요?”
그는 무표정으로 내 손을 자신의 바지춤으로 끌어갔다. 언뜻 닿은 옷감 너머로도 페니스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윤곽이 느껴져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내 손바닥에 남근을 여러 번 문지른 후에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됐어요?”
“…네.”
“당신 얼굴을 보면 가라앉아 있을 때가 있기나 한지 걱정해 주시오, 로엘. 그편이 더 합당합니다. 대부분 이 상태니까요.”
“…알겠습니다. 마차 안에서 저를 만지시는 거야 뭐라고 하나요. 밖이라 혹시 모를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을 신경 쓰는 것뿐입니다.”
“그 말은 마차 안에서 얼른 뒹굴자는 의미로군.”
“뒹구는 정도까진 아니고….”
내 기세는 평소에도 그리 대단하지 못했지만 꺾일 때도 참으로 쉽게 꺾였다.
“비슷하겠지. 요즘 당신은 내 몸이 닿기만 해도 좋아 자지러지잖소.”
“…저하, 부디 그런 표현은 삼가 주세요.”
“알겠으니 빨리 마차로 갑시다.”
작은 다툼을 해소한 우리는 상인들과 모임을 갖기 전보다 훨씬 더 다정한 모습으로 기차역을 나섰다. 마차 안은 마부가 훈훈하게 공기를 데워 놓아 무척 포근했다.
랭던 경의 말대로 나는 장소에 따라 스킨십에 달리 반응했다. 기차역처럼 개방된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점잔을 차렸으나 마차에서까지 그를 서운하게 하진 않았다.
랭던 경의 팔꿈치를 잡고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쉬다가, 먼저 얼굴을 들어 올리고 뺨에 입술을 눌렀다. 어느새 고개를 내린 그와 입술이 닿은 건 필연이었다. 랭던 경은 입을 맞추며 평소처럼 내 것을 주물럭거리고, 자연스레 내 손을 데려가 부푼 성기를 문지르며 자위했다.
그러나 마차 안이었기에 나는 부끄러워도 항의하지 않고 신음만 흘렸다. 창피스럽게도 랭던 경과 마차 안에서 음란한 행위를 벌이는 데 그만 적응해 버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 요즘은 내가 먼저 구음을 해 드리겠다, 내색할 때도 있었다. 물론 바람직한 욕구가 아닌 걸 알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청하지는 않았으나 랭던 경은 내가 그런 생각을 품을 때면 놀라울 정도로 기민하게 의중을 알아차렸다. 또한 날아온 기회를 놓치는 법도 없었기에 나는 늘 못 이기는 척 그의 고간에 입술을 묻었다.
“흣, 응….”
마차가 덜컹거리고 두툼한 귀두 끝이 목구멍을 찔러 올렸다. 버거워서 고개를 빼내려 할 때마다 랭던 경의 손바닥이 뒤통수를 지그시 누르며 인내심이 얕은 나를 막아섰다.
“로엘, 하, 곧 도착할 듯하니 내가 직접 박아야겠소. 입을 더 크게 열어요. 침이 많이 나오는 데를 찔러 줄 테니까.”
“…으응… 끅….”
머리카락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가득 실렸으나 막상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내가 스스로 고갯짓을 할 때보다 성기가 깊이 들어오긴 했으나 랭던 경이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아차릴 정도였다. 내가 창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후로 그는 고통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위를 몹시 자제하고 있었다.
그는 예고했던 대로 박으면 침이 뚝뚝 떨어지는 부근에 귀두를 쑤셔 넣었다. 그러곤 능숙하게 때에 맞춰 사정하고 정액을 삼키는 내 목울대를 더듬었다. 상점가가 모여 있는 거리인 카투(katu)에서 말들이 발을 멈출 즈음이었다.
나는 남근을 빠느라 흐트러진 옷차림을 급히 가다듬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랭던 경의 손을 잡고 푹신한 눈 위에 발을 디뎠다. 흐트러진 호흡을 마저 추스르는 내 입꼬리를 다감한 손끝이 어루만졌다. 조금만 스쳐도 쓰라린 것이 피부가 성기의 크기를 못 이기고 결국 찢어진 듯했다.
랭던 경은 손길을 금세 거두지 않고 중얼거렸다.
“겨울에는 마차 바퀴가 자주 튀어 올라 꼭 당신 입술 끝이 찢어지는군.”
나는 이제 입꼬리가 갈라지면 그가 반드시 혀를 대어 쇠 맛을 보려 하는 걸 알았으므로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가 상처를 숨겼다. 마차나 에메랄드 저택 안에서는 괜찮지만 시내에서는 원치 않는 일이었다. 반듯하게 다물려 있던 랭던 경의 입술이 잠시 삐뚜름하게 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점점 방어가 재빨라지는군요. 아무리 나라도 길거리에서 그럴 일은 없으니 염려 마시오. 당신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어쩔 수 없는걸요. 랭던 경께서 돌발 행동을 하시는 일이 잦으니까요.”
“뭐 괜찮습니다. 오늘 안에 그대의 입술을 다시 찢어트리는 거야 일도 아니지. 밤에 저택에서 꼭 그 맛을 보겠소.”
“저하께서는 정말…. 왜 그런 기이한 충동을 느끼시는 거죠? 곁에서 긴 시간 지켜봐도 연유를 알 길이 없네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행선지는 장난감 가게였다. 오늘은 방학을 맞은 윌이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고, 우리는 일찍부터 아이의 선물을 준비했다. 올해 대유행 중인 태엽 장난감이었다.
단정한 치마를 입은 주인이 깍듯이 인사하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주인은 우리가 두 달 전에 미리 주문한 장난감을 선반에서 꺼냈다.
“주문하신 대로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보시겠어요?”
“그러죠. 로엘, 기차를 택한 건 당신이었으니 직접 작동시켜 봐요. 오래 기다렸잖소.”
“그래도 될까요?”
나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태엽이 달린 기차 모형을 받아 들었다. 윌의 선물이었건만 괜히 내 마음이 더 들떴다.
차가운 태엽을 감을 때마다 들리는 직, 직, 긁히는 소리가 기대감을 자극했다. 랭던 경의 시선은 기차가 아니라 미소를 머금은 내 푸른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 번갈아 머물렀다.
나는 기차를 장난감 가게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태엽이 풀림과 동시에 동그란 바퀴가 앞으로 매끄럽게 굴러갔다. 노르크에 기차 회사는 랭던 철도사(LangdonRail Co.) 하나뿐이어서 주문할 때 특별히 요청하지 않았지만 모형 기차엔 랭던이라는 성(姓)이 쓰여 있었다. 이제는 윌리엄의 성이기도 한 그 이름이었다.
“잘 만들어졌네요. 정말 기차가 달리는 거 같아요.”
내 반응에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렇죠? 요즘 날이 갈수록 태엽 장난감 수준이 높아지고 있답니다. 아이들이란 움직이는 장난감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니까요. 성탄절을 앞두고 물량이 밀렸는데 랭던 공작님의 주문이시니 특별히 빨리 진행했습니다.”
“조카를 위한 선물이니 랭던 경께서도 고마워하실 겁니다.”
“물론이오. 아이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군요.”
랭던 경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썼다. 예의를 갖춘 대답에 주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랭던 경이 단골인 가게라고 소문이 나면 특별히 영업하지 않아도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치렀다.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돈이 넘쳐 나는 자산가들은 그들이 갖지 못한 사회적 명예를 소비로 메꾸려는 경향을 보였고, 사업적 성공과 공작 작위를 양손에 거머쥔 랭던 경은 너무나 완벽한 모델이 됐다.
주인이 갈색 종이로 장난감을 포장하는 동안 랭던 경은 작은 가게를 둘러보았다. 굵은 손가락은 나무 공이 담긴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공이 한 손에 딱 알맞게 들어오는 크기라 작은 강아지들과 놀이를 할 때 쓰면 적당할 듯했다.
나는 랭던 경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선 주인의 시선이 포장지에 붙박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랭던 경의 손을 맞잡았다. 보드라운 스킨십에 랭던 경의 눈이 작은 공을 벗어나 내게로 움직였다.
“강아지들과 놀아 주시려고요?”
“…음, 뭐. 그렇소.”
“비숑이나 웰시코기는 덩치가 작으니 그 아이들에게 적당할 듯합니다.”
“맞아요.”
그는 조금 망설이다 덧붙였다.
“…작은 곳을 채우기 적당할 듯하군요. 이것도 구입해야겠습니다.”
“작은 입으로 물기 적당하다는 것이 옳은 표현 아닐까요?”
평소 달변인 랭던 경은 내 지적에 놀란 듯 잠시 어깨를 흠칫했으나 곧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단어를 잘못 사용하였군. 지적해 주어서 고맙소.”
그의 표정이 잘못 사용한 문장보다 더 어색하게 느껴졌으나 곧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우리를 불러 궁금증은 금세 증발되었다.
“공작님, 남작님. 태엽 기차 포장이 끝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맞닿아 있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몸을 돌렸다. 랭던 경은 나무 공이 든 유리병을 추가로 계산한 뒤 상점 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마부가 얼른 종이 가방을 받아 들고 마차 짐칸에 실었다.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거리의 인부들은 바쁜 손놀림으로 하나둘씩 가로등의 가스 불을 밝혔다. 하늘은 붉은 노을로 타올랐다. 빨간 장미에 불을 지른 듯한 강렬한 색채 밑으로 칼을 벼린 듯한 바람이 지나가며 붉은 구름을 거세게 떠밀었다. 나는 금세 얼어붙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오늘 밤은 오로라를 볼 수 있겠어요.”
“그거 알아요, 로엘? 노르크의 겨울에 바람처럼 흔한 것이 오로라인데 다른 나라는 겨울에도 오로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요? 그럼 다른 나라들의 겨울 밤하늘엔 무엇이 있나요?”
“어둠만이 있겠지. 노르크처럼 추운 나라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 따뜻한 사우스라인에도 겨울밤엔 오로라가 없나요?”
“사우스라인이 따뜻하다 해도 노르크는 노르크요. 다만 수도에 비해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길고 긴 겨울밤을 아름다운 오로라 없이 어떻게 버틸까요. 상상이 가질 않네요.”
노을이 비쳐 여러 빛깔이 일렁이는 랭던 경의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마부 대신 마차 문을 열어 주고 내가 오를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말들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뚫고 에메랄드 저택이 있는 숲을 향해 달렸다. 마차가 랭던가의 영지로 진입한 오후 4시쯤엔 칠흑 같은 어둠이 대지를 완전히 뒤덮었다. 숲속과 들판을 지나가는 늑대와 여우, 하늘을 비행하는 검독수리의 그림자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달마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정원에 도착할 즘에야 하인이 밝힌 가스등 불빛이 우리를 맞았다. 희미한 빛이 나뭇잎을 모두 잃어버린 빈 나뭇가지를 비추었다.
윌은 아직 저택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녀에게 모자와 코트를 벗어 주고 장난감 가게에서 받아 온 종이 가방을 직접 살폈는데 갈색 포장지로 싼 물건이 세 개나 들어 있었다. 나는 랭던 경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랭던 경, 이상하네요. 주인이 착각을 했나 봅니다. 종이 가방 안에 물건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들어 있습니다.”
“태엽 기차가 두 개요. 아까 나무 공도 구입했으니 세 개가 맞습니다.”
“기차를 두 개나 주문했었나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하나는 윌에게 줄 선물이고 하나는… 내 사무실에 둘 장식용으로 구입했습니다. 철도사에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러셨어요? 주문서를 작성할 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두 개인 줄 몰랐다니…. 제가 요즘 바빠서 정신이 들락날락하나 봅니다.”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나중에 하인을 보내 주문서를 고쳤으니까.”
“저하께서 기차가 아주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개인 집무실에 두시려고 할 정도면요.”
“흠… 그렇습니다. 아주 마음에 들 것 같아요.”
함께 침실로 올라가려는데 홀에 갑자기 한기가 가득한 바람이 들이쳤다. 열린 문은 소란하게 덜컹거렸다.
자연히 시선을 옆으로 옮긴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 윌과 눈이 마주쳤다. 집사인 아서 도프 씨와 랭던 경의 유모였던 마틸다 할머니도 함께였다.
랭던가에 오래도록 충성한 두 사람은 윌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투신했다. 나이가 지긋한 마틸다 할머니에겐 긴 마차 일정이 부담일 법도 했으나 그는 방학을 맞은 윌을 데려오겠다고 자청하였다.
나는 윌을 향해 반갑게 두 팔을 뻗었다.
“윌!”
“삼촌들, 잘 지내셨어요?”
윌은 씩씩하게 달려와 나를 껴안고 랭던 경에게도 안겼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다. 랭던 경은 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이 뒤에 선 두 사람의 안부도 챙겼다.
“오는 길은 안 힘들었습니까? 특히 유모는 멀미가 심한 편인데 고생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소.”
“고생은요. 그저 어린 도련님을 빨리 뵐 생각에 기쁘기만 했습니다.”
마틸다는 또 돌아가신 윌리엄 백작을 생각했는지 목에 두른 스카프 끝을 들어 올려 눈물을 찍어 냈다. 랭던 경은 가볍게 혀를 쯧, 찼다.
“그만 좀 울어요, 유모. 윌을 볼 때마다 울면 되겠습니까?”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답니다. 테리 도련님께서도 나이가 드시면 이 늙은이의 마음을 아시겠지요.”
랭던 경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고 윌에게 다정히 당부했다.
“윌, 그럼 푹 쉬고 저녁 식사 시간에 보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인들에게 말하고.”
나는 굳이 ‘저녁 시간’에 다시 얼굴을 보자고 콕 집어 말하는 랭던 경의 말속을 알아차렸다. 겸연쩍어 뺨에 잠시 열이 돌았다. 윌은 순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삼촌.”
“피곤할 텐데 한숨 자는 것은 어떠니?”
“전 괜찮아요. 방학해서 힘이 넘치는걸요! 강아지들이랑 놀 생각에 잔뜩 기대가 되어서 어젯밤엔 잠도 설쳤어요.”
윌은 랭던가 사람답게 강아지를 아주 좋아해서 에메랄드 저택만 오면 늘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우리는 윌이 어린아이다운 활력으로 여독을 떨쳐 내고, 강아지들을 찾아 저택을 쏘다니기 시작한 모습을 본 뒤에야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랭던 경에게 붙들려 그의 품에서 녹아내렸다. 랭던 경은 관계를 맺는 내내 피부가 무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내 입꼬리를 핥았다. 저택으로 돌아와 또 한 차례 구음을 하며 찢어진 입술 끝이었다. 붉은 기가 보이는 틈을 집요히 문지르며 쇠 맛을 느끼는 호흡이 거칠었다.
“흣… 아직 부족하세요?”
내 안에 한 번 사정을 하고서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랭던 경은 혀를 넓게 펴 내 뺨과 입술을 핥은 뒤 애정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고작 한 번 박았는데 충족이 되었을 리 있겠어요? 나는 당신을 아무리 안아도 갈증이 납니다.”
“이따 윌과 저녁을 먹은 뒤에 하시면 되죠.”
“허락한 겁니다.”
“어차피 저하께서는 원할 때 어떻게든 하시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당신이 지나치다며 밀어 낼 때는 마음이 약해지니 말입니다.”
랭던 경은 아쉬워하며 다시 갈라진 입꼬리에 입술을 누르고 겨우 내게서 얼굴을 떼어 냈다.
가까이서 보이는 녹안이 커튼 너머 밤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을 오로라의 빛보다 더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침실에 앉아 눈 속에 담긴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평소엔 자제하려 애쓰던 사랑의 기쁨이 물씬 솟아올랐다.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눈가에 여러 번 입술의 흔적을 남겼다. 우리 사이의 애정 표현은 극적이고 낭만적인 랭던 경에게서 발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나 역시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때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우리는 옷을 갖춰 입고 나와 윌과 함께 여유로운 정찬을 즐겼다. 랭던 경과 식사할 때면 말을 조심하느라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는 이젠 제법 수다스럽게 기숙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들려줬다. 내가 아는 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꾀병을 부린 것도, 숙제를 안 한 것도 모두 들켰지 뭐예요. 이마에 뜨거운 찻잔을 대고 있었으니 아무리 열이 난다 해도 사람의 피부라고 하기엔 너무 뜨거웠던 거예요. 문학 선생님께 아주 혼쭐이 났어요.”
“친한 친구니?”
“아니에요, 랭던 삼촌. 에드워드는 좀 말썽꾸러기예요. 숙제를 안 해서 혼나도 아무도 그 애를 불쌍해하지 않아요. 모두에게 싸움을 걸고 시비조로 말하거든요.”
“에드워드가 싸움을 걸면 지지는 않되, 혹시라도 숙제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 들어주어야 한다. 아무리 싫은 동급생이라도 말이야. 약해 보여서는 안 되지만 싫은 사람에게도 선의를 보일 줄은 알아야 해.”
랭던 경의 사려 깊은 조언이었다. 나는 조카를 염려하는 그의 섬세한 말들을 곱씹으며 입 안에 든 고기를 넘겼다. 윌은 접시에 놓인 고기를 순식간에 여러 점 집어삼켰다.
“명심할게요, 삼촌. 싸움은 절대 지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싸움을 잘하니?”
“네! 릴리 이모네 동네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덩치 큰 애들한테 져 본 적은 없어요. 제가 손아귀 힘이 좋아서 거친 애들이 때리려고 하면 잘 뿌리치거든요. 그래서 마을 나무 타기 대회에서 1등 한 적도 있어요. 여름에 나무 타는 거 보여 드릴까요? 할머니 말씀이 겨울에 나무를 타다가 떨어지면 바닥이 딱딱해 크게 다친대서요.”
“그래,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지. 여름에 꼭 보여 다오.”
“여름에 맨발로 타고 올라가면 훨씬 위까지 갈 수 있어요. 꼭대기 과일을 따 드릴게요. 산사나무 열매도 제일 위에 맺힌 것이 가장 맛있어요. 할머니 말씀이 태양과 가장 가까워서 그런 거래요.”
랭던 경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일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조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따 온다면 새콤한 맛이 나는 것도 기꺼이 먹을 것이다. 윌은 정찬이 끝날 때까지 씩씩하게 수다를 떨며 음식을 비웠다.
우리는 후식으로 말린 과일과 케이크를 먹은 뒤 저택에서 가장 큰 서쪽 서재로 이동했다. 나는 이미 윌과 충분히 친했기 때문에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는 랭던 경에게 선물을 주는 역할을 맡겼다.
윌은 종이 포장을 뜯고 태엽 기차를 보자마자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가 그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보았다. 랭던 경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다음엔 색깔별로 만들어 주마.”
“정말요?”
윌은 되물었다가 곧 눈썹을 바닥으로 기울였다.
“아니에요. 할머니가 자꾸 비싼 장난감만 가지고 논다고 나무라세요. 하나로 충분해요.”
“할머니께서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지. 언젠가 랭던 철도사의 기차가 모두 네 것이 될 거란 걸. 그러니 장난감 기차쯤이야 원하는 만큼 가져도 괜찮다. 가지고 싶은 물건은 사되 곤궁한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잘난 척만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조카를 안심시키는 랭던 경의 어투가 상냥했다. 침대에서의 언행만 제외하면 그는 참으로 존경할 만한 점잖은 신사였다.
“그래, 윌. 다른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랭던 삼촌께 언제든 말씀드려.”
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자 윌은 눈을 접어 웃고 아랫입술을 꼭 물면서 몹시 기뻐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나는 거리낌 없이 윌을 껴안고 뺨에 입술을 눌렀으나 랭던 경은 소파에 앉아 근엄한 삼촌의 태도를 유지하며 우리 둘을 지켜보았다.
윌이 태엽을 감은 기차를 작동시키자 곳곳에서 나타난 강아지들이 기차를 따라다녔다. 보더콜리나 레트리버같이 큰 개들이 툭 치면 기차가 뒤집혔지만 강아지도 기차도 좋아하는 윌은 싫은 소리 없이 그때마다 기차를 바로 세웠다.
나는 랭던 경과 같은 소파에 자리 잡았다. 큰 개들에게 치여서 기차 근처도 못 가는 비숑과 웰시코기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 뒤늦게 나무 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무 공은요? 작은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면 잘 가지고 놀 텐데요.”
“…침실에 올려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애니더러 가져와 달라 해야겠어요.”
“두 개만 꺼내 오라고 해요.”
“왜요? 강아지가 여럿인데요.”
랭던 경은 이번에도 잠시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대답했다.
“비숑이고 웰시코기고 죄다 천방지축이라 매번 다 잃어버리고 오래 가지고 놀 때가 없으니까요. 몇 개는 남기고 적당히 꺼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카에겐 후하시면서 저하께서는 검소하게 지내시려는 모습도 보기 좋네요.”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그의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밖에서는 거리낌이 없는 랭던 경이 조카 앞에서 가장 몸을 사리는 건 알았지만 손가락을 만졌을 뿐인데 표정이 다소 심란해 보였다.
“얼굴빛이 왜 어두워지셨어요. 윌이 신경 쓰이시는 거면 손을 떼어 낼까요?”
“…아닙니다. 당신이 칭찬을 하여 그렇소.”
“어째서요? 제가 저하께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요.”
“그야 그렇지만… 오늘따라 좀 민망하군.”
나는 약간 의아했으나 곧 작은 종을 흔들어 애니를 불렀다. 애니가 내 부탁대로 공을 가져다주어 작은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었으나 레트리버 두 마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곧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덩치가 작고 주둥이가 짧은 비숑들은 되물어 오기 선수인 레트리버들에게 공을 빼앗기고 낑낑 앓아 댔다. 가여운 마음에 비숑 ‘루비’를 데려다 무릎 위에 앉혔다.
“랭던 경, 내일 아침에 기차표에 대한 제 건의 좀 들어 주시겠어요?”
“기차표?”
“기차표를 끊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라 대기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아서요.”
“기차표를 바꾼다고 표를 사는 시간이 짧아지겠소? 무언가 생각해 둔 것이 있나 봅니다.”
“네, 오늘 새벽까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나는 신중히 대답하고 비숑의 곱슬곱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윌을 바라봤다. 태엽을 감은 기차가 지직, 지직, 소리를 내며 열심히 앞으로 굴러갔다. 매번 처음 태엽을 감는 사람처럼 재밌어하는 윌의 즐거움도, 아이를 지켜보는 랭던 경의 봄날 같은 눈빛도 모두 나의 감정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요즘은 행복이란 감정이 낯설지 않으니 참으로 신께 감사한 일이다.
가슴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마침내 심연에 닿은 생생한 따뜻함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온 레트리버의 금빛 털을 쓸어내렸다. 행복과 비슷한 털의 온도가 차가웠던 손가락을 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