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여름 새벽 (24/27)

외전 4. 여름 새벽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을 취했다. 여름이 노르크를 찾은 후 오랜만에 맞은 단잠이었다.

푹 자서 가벼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으나 암막 커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니 귀밑머리에 랭던 경의 고른 숨소리가 닿아 아직 새벽임을 알았다.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철도사에 출근했다. 랭던 경이 깨지 않도록 아직 몸 위에 놓인 팔을 들어 살며시 침대 위에 내려놨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맨발바닥에 스치는 푹신한 러그가 간지러웠다.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서재는 이미 환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재빨리 좁은 틈을 빠져나온 후, 랭던 경이 깨지 않도록 문손잡이를 조용히 돌려 닫았다. 방은 대낮처럼 밝았으나 시곗바늘은 아직 새벽 6시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고 창가로 다가가 작은 창문을 위로 들어 열었다. 실크 잠옷 차림으로 창틀에 걸터앉아 햇볕을 쐬고, 싱그러운 풀 내음을 맡으며 심호흡도 했다.

정원을 내려다보니, 새벽부터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들의 둥그런 밀짚모자가 풀과 나뭇가지 사이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작은 찌르레기와 박새는 노래하며 날아다녔고, 바람이 불 때마다 저 멀리 보이는 너른 들판의 꽃들이 몸을 뉘었다.

평화로운 에메랄드 저택의 풍경과 노르크의 여름 새벽을 만끽하고 있는데 돌연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벽을 하나 두고 잠에 빠져 있는 랭던 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한 감정에 잠겨 새벽을 맞을 수 있는 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임을 모르지 않았다. 나의 연인, 나의 사랑, 테런스 랭던.

사랑하는 이가 세상에 없다면 에메랄드 저택이 천국보다 눈부시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한 영혼을 풍요롭게 해 주진 못할 것이다.

나는 창틀에서 벌떡 내려와 책상에 앉은 뒤 충동적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잉크병을 열자 부드러운 잉크 향이 종이 내음과 뒤섞였다. 갓 구운 빵 냄새 같았다.

나는 펜을 들고 정성 들여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랭던 경에게 지금의 벅찬 감정을 전해 줄 편지였다. 어제 들은 불평이 떠올라 좀 더 격식을 갖춘 편지를 줄 요량으로, 그의 미들 네임까지 빠트리지 않고 적었다.

펜촉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스쳤다.

사랑하는 테런스 F. 랭던 경에게.

랭던 경, 저는 새벽에 일어나 서재에서 홀로 아름다운 에메랄드 저택의 정원과 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신께서 사랑해 마지않으실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그대를 향한 제 애정 역시 한여름의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그러니 이 편지가 어제 랭던 경이 서운함을 표했던 일 때문에 의무감으로 쓰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알아주시겠지요. 이 모든 건 당연한 듯 저를 곁에 잡아 둔 그대의 사랑이 메마른 제 영혼에 평온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나무 잎사귀와 새의 깃털을 데워 놓은 태양은, 이제 창틀의 돌과 책상에 앉은 제 등을 따뜻하게 덥히는 중입니다. 제가 뜨거운 햇빛을 미워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건, 당신이라는 존재가 언덕 위에 버티고 선 미루나무처럼 제게 크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기 때문이에요. 이제 저는 해를 견디기 괴로우면 언제든지 푸른 언덕을 달려가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쉴 수 있으니까요.

랭던 경께서 종종 욱하는 성미를 못 이겨 과거의 제 잘못을 들추어 내기는 하지만, 저를 향해 품으신 사랑의 깊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지은 죄를 지독한 배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이해해 주는 당신의 마음은 제게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어요. 랭던 경의 배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당신과 같은 지붕 아래 머무르며 행복한 기분으로 새벽을 맞지 못했겠지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또 그대처럼 훌륭한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저는 새벽부터 가슴이 벅차올라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테런스, 당신은 항상 예전에 저를 함부로 대했던 잘못을 마음 쓰여 하죠. 제가 저지른 잘못이 더 큰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 후 그대가 부어 준 사랑은, 제 상처를 모두 치유하고도 몇 바구니가 남을 만큼 충분했습니다.

잠시 후에 봐요, 테런스.

그대와 함께할 오늘과 내일을 기대하며.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로엘 S. 서튼으로부터.

나는 편지를 깨끗한 봉투에 넣고 실링 왁스를 녹여 서튼가의 인장을 찍었다. 힘을 주다가 잠깐 삐끗하는 바람에 여우의 꼬리가 두 개로 보였다. 봉투는 랭던 경의 이름을 적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가운을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아침 산책을 다녀온 강아지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끝낸 강아지들과 응접실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곧 힘이 빠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난기가 돌아 강아지들을 놀리려고 잠을 자는 척 누웠다. 작은 혀가 곳곳에서 얼굴과 발등을 핥아 간지러웠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눈을 꼭 감고 누워 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응접실에 강아지들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나는 몹시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며 놀았던 공과 인형 사냥감들 역시 모두 바구니에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다. 하녀들의 손길이 지나간 것이다.

“…깜빡 잠들었네.”

나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분주한 모습으로 지나가던 하녀 한 명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사만다 양. 랭던 경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2시간 전에 철도사로 가셨습니다.”

“2시간 전에요? 지금 10시란 말인가요?”

“네, 남작님. 공작님께서 잠이 드신 걸 보고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백야 때문에 잠 못 이루셨다고요. 아침은 침실로 올려 드릴까요?”

“네, 부탁해요.”

나는 부끄러움에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대답했다. 품위 없이 응접실에서 잠이 든 것도 모자라 랭던 경을 배웅하지도 못하다니.

관계할 때처럼 랭던 경이 종용한 것도 아닌데, 점잖지 못하게 행동한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했다. 깨끗이 목욕을 하고 나와 머리 손질을 마쳤다면 잠들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나태하게 군 자신을 책망하며 몸단장을 마친 뒤 침실로 갔다. 침실에는 애니가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애니 양.”

“안녕하세요, 남작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애니가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아 식사를 들었다. 먹음직스러운 흰 생선 살과 방금 구운 보드라운 빵, 묵직한 버섯 수프가 가라앉은 입맛을 돋우었다. 여름에만 맛볼 수 있는 각종 과일과 치즈를 얹은 샐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끝내고 종을 흔들자 애니가 차와 디저트를 가져다주었는데, 배가 불러 디저트는 도저히 비울 수 없었다.

차를 마시며 창밖의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가 랭던 경에게 편지를 남겼던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랭던 경이 편지를 봤는지 궁금해 찻잔을 내려놓고 황급히 서재로 갔다.

책상에는 내 편지 봉투 대신 랭던 경이 남기고 간 쪽지가 남아 있었다. 내가 어제 그에게 보낸 답장처럼 편지지를 접어 봉랍을 누른, 간소하게 마감한 형태였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봉랍을 살살 뜯어 편지를 펼쳤다. 흰 종이 가운데에 랭던 경의 아름다운 글씨체가 남아 있었다. 랭던 경이 적은, 시처럼 짧은 글을 읽는 동안 내 눈가엔 맑은 눈물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로엘에게.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와도 계속될 나의 백야. 나의 운명.

내 하늘의 태양은 당신이오.

나는 그가 선물한 아름다운 단어들을 여러 번 곱씹었다. 한참 뒤에야 뺨 위로 떨어진 눈물을 닦으며 비로소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편지지 하단에는 본론보다 더 긴 추신이 눈보라에 흩날리는 글씨체로 남아 있었다. 평소 서체와 달리 매우 흐트러진 글씨로, 랭던 경이 아주 급하게 덧붙인 흔적이 역력했다.

추신. 어제의 복수로 짧게 적은 것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내 성미가 괴팍하다 보니 당신이 오해할까 걱정되는군요. 공작도 출근길은 늘 바쁘기 마련이에요.

당신의 테런스로부터.

나는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이름 위에 키스하고 편지를 품에 안았다.

<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