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백야
나는 일부러 응접실이 있는 서쪽 복도를 택해 랭던 경의 손님을 확인했다.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손님의 옆모습이 흘끗 보였다.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말끔한 인상이었으며, 평민인 듯 옷차림이 간소했다. 요즘 다른 귀족들이 선약도 잡지 않고 랭던 경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가 퇴짜를 맞는 일이 잦았기에 그 역시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귀족일 줄 알았다가 잠시 놀랐다.
2층에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서재로 가 시간을 들여 책을 골랐다. 책등을 손끝으로 짚으며 관심 가는 책을 찾는 동안 머릿속은 그 청년이 왜 랭던 경을 찾아왔는지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랭던 경은 과거에 상당히 여러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니 그때 알고 지낸 사람일 수 있었다. 그저 철도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일지도 몰랐지만.
“함께 손님을 맞겠다고 할 걸 그랬나…. 대체 누굴까?”
괜한 의심과 질투심이 일어나 입술을 삐뚜름하게 모았다가 폈다. 랭던 경이 물에 젖은 나를 배려해 올라가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2층으로 먼저 보낸 일 또한 갑자기 불만스러워졌다.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눈길을 끄는 책을 빼냈다. 종이에 기분을 담아 시끄럽게 팔락팔락 넘기며 읽었다. 몇 권을 꺼내 봐도 흥미를 돋우는 내용은 없었다. 아까부터 정신이 1층 응접실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냥 어제 읽다 만 책을 읽을 요량으로 침실 문을 당겼다. 그런데 안에는 벌써 만남을 끝내고 온 랭던 경이 참나무 책상에 앉아 서신을 뜯는 중이었다. 막 씻어서 약간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를 덮은 상태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저하, 벌써 올라오셨나요?”
“로엘 씨야말로 무얼 하느라 이리 늦었어요?”
“서재에서 책을 고르느라 늦었습니다. 한데 흥미를 끄는 책이 없네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참나무 책상의 우아한 결을 따라 검지를 움직이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 손님은 누군가요?”
“철도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오.”
“예전부터 알고 지내신 사람인가요?”
랭던 경은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나를 흘끗 쳐다봤다가 다시 쌓인 봉투를 뜯으며 간결히 답했다.
“철도사에서 5년 정도 일한 사람이니 예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할 수 있죠.”
“저택까지 부르신 걸 보면 중요한 사람인가 봅니다. 회사 사람은 좀처럼 집으로 들이시지 않잖아요.”
“꼼꼼한 사람입니다. 이해력이 아주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세심한 면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따로 부탁할 게 있었습니다.”
낯선 손님을 향한 칭찬에 나는 몰래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넣었다. 랭던 경이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칭찬하는 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신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찾았다. 랭던 경이 내 불평하는 표정을 보기 전에 입술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아 다행이었다.
“로엘, 내가 바쁘단 핑계로 당신을 너무 저택에 가둬 두기만 한 것 같습니다. 내일은 오랜만에 시내로 함께 나가 나들이를 하는 것이 어때요?”
“저하께서 시간이 있으시다면야 저에겐 너무 기쁜 제안입니다. 무얼 하고 싶으세요?”
“이 많은 편지가 모두 초대장이라 이 중 몇 군데를 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쏟아지는 초대장을 모두 거절하기가 어렵군요. 선거를 무사히 치르고 나니 경제가 혁명의 여파에서 회복되어 활기가 돌기 시작하네요. 곳곳에 화려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문을 열고 카투(katu)도 생겼어요.”
“카투요? 그게 무엇인가요.”
“요즘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카투라고 합니다. 백화점과 비슷해요. 고급 상점들이 모두 한군데 모여 있어 물건을 사기가 편하거든. 같이 구경도 하고 그대가 소소하게 쇼핑도 하면 좋을 것 같군요.”
최근 노르크의 수도에는 매일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고 있어,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지난달에는 수도에 새로 문을 연 백화점의 초대를 받아 랭던 경과 다녀오기도 했다.
백화점 안은 화려한 철제 계단과 휘황찬란한 조형물들이 장식돼 박물관을 방불케 할 규모였으며, 벽으로 나뉜 구역마다 다양한 종류의 완제품을 팔았다. 나는 아직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이름난 장인을 불러 주문 제작하거나, 유명한 상점을 직접 찾아가 구입하는 방식이 더 익숙했으므로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랭던 경이 부지런히 뜯은 덕에 수북이 쌓인 우편물이 드디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또 상품 책자를 보냈군. 오페라 초대장도 있고…. 극장 수리가 끝난 모양입니다. 오페라를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어떤가요?”
“오페라야 저는 워낙 좋아하는걸요. 랭던 경과 오랜만에 관람할 수 있다면 즐거울 듯합니다.”
“그럼 오페라를 보러 갑시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카드가 턱밑으로 쑥 다가왔다. 나는 랭던 경이 건네준 오페라 초대장을 받아 들어 제목을 확인했다. <테오도르와 죽음의 신>. 본 적이 없는 오페라라 몹시 기대가 되었다.
서신을 다 확인한 랭던 경이 중요한 편지에 답장을 쓰는 동안 나는 창가에 놓인 레카미에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읽다 만 책엔 베넷 부인이 코바늘로 떠서 만들어 준 꽃 모양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책갈피를 햇볕이 드는 창가에 올려 뒀다.
고급스러운 내지를 넘기며 속독하는 동안 창을 투과한 햇볕이 맨발과 책갈피를 덥혔다. 나는 따뜻해진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책을 훌훌 읽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요?”
랭던 경의 목소리에 등받이에 비스듬히 대고 있던 머리를 옆쪽으로 돌렸다. 내심 기다렸던 반가운 질문이었다.
“옆 나라 프레네의 출판물을 번역한 책입니다. <공공장소 계획>이라는 책이에요. 랭던 경께서도 이미 읽으셨겠지만 배울 것이 많네요. 기차역이나 광장같이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장소에 어떤 시설이 필요한지 연구한 내용이에요.”
나는 거의 다 읽은 책을 덮으며 다가오는 그에게 표지를 보여 주었다.
랭던 경은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 넘기며 길쭉한 의자 끝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 맨발을 올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햇볕에 따끈해진 내 발을 주물러 주고, 고개 숙여 발등 위에 입을 맞춰 주었다.
섹스 중도 아닌데 발등에 키스를 하다니. 겸손한 입맞춤에 놀라 소파에 닿은 등을 급히 떼어 냈다.
“랭던 경, 왜 발에 입을 맞추셨어요. 누군가 발등에 키스를 해야 한다면 제가 당신의 발등에 해 드려야 하는 것을요.”
푹신한 소파를 짚으며 의아함이 가득 찬 눈동자를 기울였다.
랭던 경은 이번엔 내 손을 잡고, 햇빛 때문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옅게 비치는 손등 위와 볼록한 손톱의 흰 반달 하나하나에 정성 들여 키스했다. 피부에 닿는 그의 숨결에서 우러난 감정이 찻잎처럼 진했다.
그는 한참이나 입을 맞춘 후에야, 내 반대편 손에 들린 책을 가져가 펼쳤다. 맞닿았던 피부가 떨어져 허전했다.
“요즘 로엘 씨가 도시 계획과 관련한 책을 자주 보는군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랭던 경이야말로 최근에 이런 내용의 책을 많이 읽으시던걸요.”
“선거 전에 돈 헛소문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 시내 곳곳에 불이 났었죠. 폐하께서 이김에 시내 전체를 정비하려 하시더군요. 상수도관을 교체하고 길가엔 나무를 심고 중앙엔 분수를 만들구요. 도움이 될까 하여 공부 중입니다. 로엘 당신은 무엇이 궁금해 그 책을 읽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는… 기차역에 대해 랭던 경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구요. 최근에 기차역이 혼잡하고 더러워져 고민이 많으셨잖아요. 저는 그 때문에 랭던 경께서 외국 서적을 들여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번역가까지 고용하시기에요.”
“그렇군요. 그동안 당신이 나를 따라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기차역에 관심이 생긴 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뺨에 키스했다. 내가 랭던 경의 일에, 그것도 바깥일에 관심을 두어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솔직히 말하길 다행이었다. 랭던 경의 곁에선 솔직함이 내게 해를 입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무심코 속내를 감추는 습관을 고치려 부단히 애썼지만 어릴 때부터 든 습관인지라 아직 쉽지 않았다.
입맞춤은 가벼이 끝나지 않고 입술로 옮겨 가 계속 이어졌다. 물컹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입 속을 채우는 감각이 심장까지 풍족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약간 젖히며 입술을 좀 더 벌리고 그를 최대한 받아들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혀가 입 속을 가득 메웠고, 입 안에 맴돌던 숨결까지 그에게 모조리 빼앗겨 머리가 점차 몽롱해졌다. 랭던 경은 자주, 내가 숨을 참다못해 가슴을 헐떡거릴 때까지 몰아붙이며 키스했다.
더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기절할 듯 머리가 핑 돌아서 가슴께의 옷자락을 쥐어 잡자 랭던 경의 입술이 간신히 나를 놔 주었다. 그는 아쉬운지 도톰하게 부푼 내 혀를 핥고 목덜미로 입술을 옮겼다. 목은 이젠 자국이 없는 것이 허전하게 느껴질 만큼 늘 그의 흔적이 따라다녔다. 랭던 경은 평소처럼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트리고 살이 붉게 물들도록 빨아들였다.
선이 단정한 입술이 다시 내 입술 위로 겹쳤다. 그는 짧은 입맞춤을 반복하며 내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고 문질렀다. 질척이는 감촉과 젖은 소리 때문에 가벼운 키스가 언뜻, 음란한 색을 띠었다.
“내일 오후에 철도사로 와요. 나들이를 하기 전에 사무실을 구경하도록 해 줄 테니까.”
“그래도 될까요?”
기쁜 마음으로 묻는 동안 그의 혀가 치아에 부딪쳤다. 랭던 경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입술 핥는 일을 멈추지 않은 탓이었다. 일상적인 그의 음욕이었다. 그가 내게 입술을 붙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을 계속 세상으로부터 숨기고 가두어 두진 못하겠지. 나는 그대의 부탁에 약하니까. 에메랄드 저택이 아무리 크다 해도, 로엘 씨의 전부로 삼기엔 작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요.”
“원하지 않으시면 구경치 않아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그런 소리가 아니에요. 반드시 보러 와요, 로엘.”
“네, 좋습니다. …그런데 저하, 제발 그만 핥으시면 안 될까요? 입술이 닳아 없어지겠습니다.”
랭던 경은 아예 내 아랫입술을 이로 누르고 짓씹었다. 나는 아파서 앓는 소리를 냈지만 그를 밀어 내지는 않았다. 통통하게 붓기 시작한 입술에 단단한 치아의 힘이 실렸다. 핏기가 비칠 정도로 씹은 후에야 그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이 정도면 내일 회사로 올 때 퉁퉁 부은 채 오겠지. 누가 봐도 내가 빨아 준 입술을 달고 말이오.”
“…랭던 경!”
나는 그의 속셈을 몰랐다가 뒤늦게 당황하여 눈을 둥그렇게 떴다. 랭던 경은 어깨를 흔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로엘 당신은 순진하여 항상 당하는군.”
“그러고 보니 목도 입술도… 매번 이래서야 내일 어떻게 외출을 하나요.”
“그 반대요. 이런 상태가 되지 않고서는 외출할 수 없지. 내 흔적이 없다면 말입니다.”
“점점 흔적이 짙어지고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과 지지난번, 또 그 전에 외출한 일들이 떠올랐다. 아직 여름이라 이번에도 목도리를 매긴 어려웠다. 목덜미의 붉은 기를 햇빛에 내어놓고 다녀야 할 테니, 내일도 수런대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말발굽을 달고 내 뒤를 쫓아다닐 것이다. 허술한 계획에 또 속아 넘어간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이 갓 터진 꽃망울처럼 샐쭉 삐져나왔다.
“저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고 성격이 차분한 편이라 신부님께 신학교 입학을 몇 번이나 권유받았을 정도인데 랭던 경 곁에 있으면 당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요. 쉽게 당황하거나 부끄러워지니 말이에요. 저하께서는 늘 제 예상을 빗나가, 짓궂은 색정광의 면모를 보이시니까요.”
“색정광이라니…. 당신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사랑과 욕정에 타오를 뿐이오. 틈이 생기면 좆을 쑤셔 넣고 작은 희롱을 던질 뿐인데 로엘 씨는 내 인내심을 너무 몰라 주는군.”
“…그것이 색정광의 정의입니다.”
나는 입술과 목덜미를 더듬으며 이미 울혈이 맺히기 시작한 피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랭던 경은 내게 남은 자신의 흔적을 아주 만족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피부 위에 남은 아픔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자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열꽃을 더듬는 짙은 녹안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늘 내 푸른 눈을 칭찬하지만 나는 노르크의 겨울 숲을 옮겨 놓은 듯한 초록빛 눈동자가 더 신비로웠다. 붉은 흔적을 열렬히 탐할 때면 그 시선은 더욱 깊어졌고, 그 때문에 나는 늘 그가 저지르는 행위를 막을 이유를 잃어버리곤 했다.
나는 랭던 경의 뺨 위에 내려앉은 맑은 저녁 햇빛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르튼 입술을 열었다.
“랭던 경께서 매번 남기시는 자국이 세상으로 가는 저의 통행권일까요?”
“그래요, 로엘. 나는 당신을 어떤 자국도 없이 밖에 내보낼 수 없어요.”
랭던 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세상은 너무나 불안하고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품에서 떨어트리는 순간이 견딜 수 없이 두렵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의 몸에 내 흔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소중한 물건에 이름표를 달아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어떤 행동은 하고 나면 불안이나마 가라앉는 법이에요.”
“테런스… 걱정 말아요. 첫 선거는 무사히 치러졌고, 저는 당신의 그늘 아래서 안전한걸요. 제가 알던 귀족들과 이름을 알던 귀족들 모두 혁명의 바람에 목숨을 잃었지만 당신과 저는 살아서 이 에메랄드 저택에 앉아 있잖아요.”
나는 그의 뺨에 얹고 있던 손가락을 가벼이 움직여서 달래듯 그를 쓰다듬고, 손을 조금 더 위로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를 지난 부드러운 흑발은 반듯한 이마 위로 보기 좋게 내려앉았다. 내 스킨십이 반복되자 랭던 경은 눈꺼풀을 닫고 입술 새로 희미한 숨을 내뱉었다.
한참이나 랭던 경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반쯤 일으켜 그 머리를 내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러자 굵은 팔과 힘 있는 손가락이 내 몸통을 끌어안고 등을 감쌌다. 나는 그의 정수리 위에 턱 끝을 얹고 시선을 내려 검은 머리카락 너머에 있을,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을 짐작하며 작은 목소리를 부드러이 떨어트렸다.
“내일 이름표를 잘 달고 나갈게요.”
“그래요, 로엘. 무슨 옷과 장신구를 준비해야 할지는 하녀에게 일러두겠습니다.”
“그쯤은 제가 정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어떤 타이와 반지가 어울리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옷도 마찬가지고.”
“…제가 저하의 고집을 어떻게 이기겠나요. 아예 속옷도 정해 주시지 그러세요.”
그의 못 말릴 소유욕에 가볍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래도 될까? 조금 지나친 것 같아 그것만은 자제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괜찮다면 나야 몹시 기쁜 일입니다.”
랭던 경의 반응에 나는 순간적으로 진저리를 치며 온몸을 푸르르 떨었다. 정수리에 괴고 있던 턱을 떼어 내자 내 가슴팍에 기대고 있던 랭던 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몹시 진지했다.
“저하께서는 정말….”
“구슬을 두어 개 넣고 온다면 나를 더 기쁘게 해 줄 텐데.”
“제가 내일 가져가야 할 구슬이 있나요?”
“…이렇게 순진한 사람을 그렇게 괴롭혔으니. 내가 죄인입니다.”
그의 눈동자에 죄책감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게 무슨….”
“몸에 걸치는 장신구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첩자 노릇을 할 때 트렁크에 들어 있던 물건 기억해요?”
랭던 경이 말을 다 마무리하기 전에, 나는 그가 성관계에 사용할 수 있는 저질스러운 물건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에 줄줄이 꿰여 있던 흉측한 구슬이 떠올랐다.
“테런스!”
“…넣지도 못하고 혼만 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창부라는 거짓말에 속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상태일 때 도구나 실컷 써 볼 것을….”
나는 랭던 경이 신께 죄가 될 상상을 더 하기 전에 황급히 그의 말을 끊어 냈다.
“아무튼 입을 옷은 하녀에게 일러두십시오. 내일 철도사로 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랭던 경은 잠시 아쉬워 보였지만 집사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침실 문을 두드려 더는 외설스러운 얘기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문이 열린 순간 침실로 뛰어 들어온 강아지 다섯 마리도 그가 더 죄를 짓지 않게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랭던 경은 큰 강아지들 틈에 끼어 달려온 어린 웰시코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웰시코기는 곧 성견(成犬)들에게 치여 뒤로 넘어졌고, 그는 바로 강아지를 구해 품에 안고 일어났다. 강아지는 랭던 경의 팔에 안긴 채 둥그런 엉덩이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선택에 활발한 기쁨을 표했다.
나는 그에게 앞발을 딛고 안기려는 나머지 강아지들에게 앉으라고 명령한 뒤, 얌전히 앉는 아이들에게 육포를 나눠 주었다. 나도 이제는 랭던 경처럼 품에 작은 꾸러미를 지니고 다니며 강아지들을 칭찬할 때 간식을 먹였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강아지들이 모두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야 우리는 함께 침실을 나섰다. 조용해진 강아지들이 다시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랭던 경, 내일 몇 시까지 철도사에 가면 될까요?”
“4시까지 오도록 해요.”
“네, 저하.”
나는 내일 있을 간만의 나들이를 기대하며 랭던 경과 함께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
다음 날, 오랜만에 외출을 앞둔 나는 목욕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애니에게 머리 손질을 받았다. 평소처럼 애니와 담소를 나누며 웃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려 말을 멈췄다. 나는 웃고 있던 입술을 점잖은 무표정으로 되돌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나타난 자는 매우 친숙한 하인으로, 작은 체구에 바짝 말랐으며 늘 빵모자를 쓰고 다니는 제크 씨였다. 그의 나이는 50대로 랭던가에서 오랜 시간 일한 사람 중 하나였다. 제크 씨는 랭던 경을 따라 철도사로 출퇴근을 하며 자질구레한 일을 도왔다.
문을 닫고 뒤돈 제크 씨의 품에는 꽃잎이 풍성한 장미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공작님께서 서신과 함께 꽃을 보내셨습니다.”
“수고 많으시네요, 제크 씨. 심부름을 오셨군요.”
나는 랭던 경이 보낸 꽃과 편지를 건네받았다. 편지는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올려 두고,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제대로 고쳐 들었다. 잠시 코를 묻고 향기를 맡았다.
새빨간 빛으로 함뿍 젖은 장미는 활기찬 생명력이 깃든 화려한 꽃잎에 은은한 향을 아름답게 둘렀다. 저택은 이미 랭던 경이 선물한 꽃이 넘쳐 났지만, 노르크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탓에 꽃은 언제나 특별하고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침실 화병에 꽂아 줘요, 애니 양.”
“네, 남작님. 장미가 너무 아름답네요.”
곁에 선 애니에게 꽃다발을 건넨 후 이번엔 편지 봉투를 집었다.
“서신을요? 오늘 약속을 취소한다고 하시던가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편지를 읽는 동안 앉아서 기다리셔도 돼요. 백야가 계속되어 피곤하시죠?”
“감사합니다, 남작님.”
제크 씨는 근처 나무 의자에 앉으며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 내고 대답했다.
“어휴, 피곤은요. 저는 백야에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자기 때문에 끄떡없습니다요.”
“다행이네요. 모두 제크 씨처럼 백야를 편안히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나는 오랜만에 마주한 랭던가의 봉랍을 뜯어내고 편지를 펼쳤다. 언제 봐도 유려한 필체가 고아한 자태로 나를 맞이했다.
사랑하는 나의 로엘에게.
로엘, 벌써 점심이 지나 그대를 본 지도 반나절이나 되었군요. 별거 아닌 메시지라 제크 씨를 통하여 말로 전달할 수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간만에 당신께 드릴 연서(戀書)를 적는 설렘으로 내 마음은 천사들의 날개처럼 환히 빛나는군요.
나는 오전 내내 해외에서 데려올 기술자들에 관한 서류에 파묻혀 지냈소. 프레네의 철도 기술자들인데, 프레네는 노르크보다 땅덩이가 크고 사람이 많은 데다 기후마저 온화하니 모든 산업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쓴 논문과 업적을 살펴보고 쓸 만한 사람 둘을 골랐는데 누구를 선택할지 매우 고민이군요.
당신은 오전에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까? 지금은 여름이라 괜찮지만 로엘 씨는 겨울이 오면 감기에 쉽게 들고 열이 자주 나니 몸 관리에 더욱 신경써야 해요. 지금부터 피곤하더라도 산책을 가볍게 하고 음식을 자주 들며 휴식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어제도 한밤중에 떠 있는 태양 탓에 당신이 깊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어 번 깨어 내 품에 안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야 고요한 잠에 빠진 중에도 잊지 않고 내 품을 찾는 그대 덕분에 밤새 포근한 꿈을 꾸었지만, 당신에겐 그 모든 일이 힘겨우리라 생각하니 매일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오후 일정이 바빠 잡담은 이쯤 해야겠군요. 편지를 보낸 일은 다름이 아니라 약속을 5시로 미루기 위함이오.
처음 로엘 씨가 철도사에 찾아오는 기념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선물이 4시까지 도착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5시에 와서 내가 바로 당신에게 선물을 안겨 줄 수 있는 기쁨을 허락해 주겠어요?
그대가 선물을 받고 나면 새로 문을 연 카페와 식당에 갑시다. 그리고 노르크에 간신히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페라를 보도록 해요. 카투에 가서 상점을 구경하는 일은 조만간 또 기회를 만들어 보겠소.
애석하게도 기술자를 고르기 위한 회의가 있어서 더 편지를 쓰지는 못하겠군요. 짧아도 상관 없으니 부디 답장을 주길 바라오.
언제나 그리운 푸른 눈을 떠올리며, 당신의 테런스로부터.
내가 편지를 읽는 동안 애니는 테이블 위에 답장을 쓸 준비를 해 두었다. 나는 편지를 다 읽자마자 테이블 가까이 옮겨 앉아 펜촉에 잉크를 적셨다. 병 입구에 펜촉을 두드려 잉크를 적당히 덜어 냈다. 유리와 펜촉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했다.
사랑하는 나의 테런스에게.
보내 주신 정성스러운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언질 주신 대로 오후 5시까지 철도사에 가겠습니다. 상점가는 다음에 가도 상관없답니다. 저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 무엇인지 무척 기대되네요.
제크 씨의 시간을 뺏지 않도록 답장은 짧게 적습니다. 짧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괜찮으시죠?
오후에 만나요.
당신의 로엘 서튼으로부터.
서신이 아니라 쪽지에 가까운 길이의 편지여서 굳이 봉투에 넣지 않기로 했다.
나는 손끝으로 종이를 꼭꼭 눌러 여러 번 접고, 실링 왁스를 녹여 떨어트린 뒤 서튼가의 봉랍을 남겼다. 안 주머니에서 10골드를 꺼내고 고개를 돌려 제크 씨를 쳐다보았다. 제크 씨는 내 쪽만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이 닿자마자 바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편지지와 10골드를 내밀며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제크 씨, 랭던 경께 답장을 전해 주세요. 가시는 길에 시원한 과일이라도 사 드시구요. 날씨가 무척 덥죠?”
“감사합니다, 서튼 남작님.”
“수고하셨어요.”
제크 씨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나는 채비를 일찍 마쳤으나 약속 시간이 밀려 시간이 남았다. 랭던 경의 당부대로 산책을 하기 위해 보더콜리들을 데리고 양 목장으로 잠시 나들이를 나갔다.
영리한 보더콜리들은 양 목장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서로 신이 나서 울타리로 뛰었다. 나와 친한 보더콜리 ‘아더’는 양 목장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와 신난 꼬리를 흔들며 혀를 빼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더, 얼른 양을 몰고 싶지? 들판도 마음껏 달리고. 같이 달려갈까?”
나는 더워서 조금 힘들었지만 양 목장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아 아더와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커다란 미루나무와 떡갈나무, 느릅나무가 잔디에 드리운 그늘을 따라 개와 함께 달렸다. 우리를 반기듯 시원한 바람이 언덕 높은 곳에서 불어왔다. 푸른 잔디는 바람을 따라 일제히 우리 쪽으로 몸을 뉘었다.
나는 바람을 맞으려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들고 아더와 함께 신나게 뛰어갔다. 양 목장 입구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일찍 도착한 보더콜리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하인이 모자를 벗고 나를 맞았다.
“아더, 너도 재밌게 놀다 와.”
간식을 꺼내 하나 먹여 주자 아더는 말을 알아들은 듯 목장 안으로 달려갔다. 양을 관리하는 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시원한 물 한잔 드릴까요?”
“네, 좋아요.”
나는 양 목장이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하인이 내온 물을 마셨다. 살짝 배어났던 땀은 나뭇잎과 들풀 사이를 지나며 차갑게 식은 바람이 가져갔다.
빈 잔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시원한 물기를 공중에 털어 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았다. 개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도.
보더콜리들은 지치지도 않고 너른 들판 위를 한참 달린 후에야 양들을 몰면서 본능적 욕구를 해소했다. 양들은 영문도 모르고 가냘프게 울며, 웃고 있는 보더콜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한쪽에 몰려 발을 동동거렸다.
개들이 충분히 놀이를 하기도 했고, 랭던 경과의 약속에도 가야 해서 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 목장 입구에서 문으로 개들을 한 마리씩 불러들였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 표정이 몹시 밝아진 보더콜리들은 하인이 준비한 물을 마시고 내게서 상으로 육포를 받아먹었다.
“모두 아주 양을 잘 몰았어. 똑똑해라. 다음에 또 놀러 오자.”
한 마리씩 쓰다듬으며 칭찬한 뒤 간식을 한 번씩 더 주고 여름 바람을 등진 채 편안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보더콜리들을 저택 안으로 들여보내자마자 바로 마차에 올라타 철도사로 출발했다. 철도사는 센트럴 철도역 근처에 있어 저택과 가까웠으나 랭던 경이 초대한 적이 없어 이번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늘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길 무척 꺼리는 눈치로, 누군가 내게 치근덕대거나 관심을 보일까 봐 항상 걱정스러워했다. 에메랄드 저택 외의 세상을 보여 주기 싫어하는 데는 동생을 일찍 떠나보낸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이하고 근원을 알기 어려운 독점욕 역시 그러한 염려에 힘을 보탰음은 물론이다.
마차는 눈에 익은 길을 등지고, 낯선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삭막한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 끝에 유독 고풍스러운 취향의 건물이 눈에 띄었고, 마차는 그 앞에 쉼 없이 굴러가던 바퀴를 세웠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직원의 환대를 받았다.
“서튼 남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랭던 철도사 직원 제퍼슨입니다.”
“안녕하세요. 회계사님을 처음 뵙네요.”
내가 그의 직함을 정확히 얘기하자 제퍼슨 씨는 사뭇 흥분한 기색으로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양 손바닥을 맞비볐다.
“네? 네, 그렇습니다. 남작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랭던 경께 자주 존함을 들었습니다.”
“존함이라뇨. 말씀 낮추십시오, 남작님.”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서로 존칭을 쓰면 좋죠.”
나는 먼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웃는 얼굴이었던 제퍼슨 씨는 내가 악수를 청하자 갑자기 몸 둘 바 몰라 하며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손은 갈피를 잃고 허공을 부여잡았다가 등 뒤로 어색하게 물러났다.
“제가 방금 전까지 계, 계산기를 만지다 와서 손이 더러워….”
“그러세요? 괜찮은데…. 그럼 악수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나는 제퍼슨 씨의 어설픈 대답이 매우 미심쩍게 들렸다. 그러나 그가 곤란함을 느끼지 않도록 적당한 반응으로 상황을 넘긴 뒤 재빨리 발을 옮겼다. 마부가 출입문을 붙들고 있는 터라 그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일찍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사무실 안에는 나무 책상을 앞에 둔 직원들이 이미 모두 일어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맞이하며 고개를 숙이고 너도나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악수하려 하자 제퍼슨 씨가 다시 나를 어설프게 가로막으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 명 한 명 악수하시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시니 공작님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시지요.”
“…그럴까요?”
제퍼슨 씨의 반응에 혹시나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랭던 경이 내가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어려서부터 감정을 절제하는 귀족식 교육을 받았으므로 자연스레 대답하며 방향을 돌렸다.
제퍼슨 씨는 랭던 경이 있는 방문을 열어 주고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임을 다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랭던 경은 넓은 떡갈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은 면적이 매우 넓었으나 곳곳에 서류 뭉치가 쌓여 있어 랭던 경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혼잡했다. 나는 납작한 모자를 벗어 직접 옷걸이에 걸어 두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으나, 랭던 경은 웬일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나를 맞았다.
“왔어요?”
심지어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당연히 따스한 환대를 기대했던 나는 매우 의아해하며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위치까지 발을 디뎠다.
랭던 경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펜을 든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오랜만에 맞닥뜨린 그의 무례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예의를 갖추는 걸 잊지 않았다.
“철도사에서 뵈니 무척 반갑습니다, 랭던 저하. 직원들이 아주 따뜻하게 맞아 주더군요. 랭던 경께서 미리 언질을 주신 덕분이겠죠.”
“…….”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로엘 씨야말로 내게 기분 상한 일이 있는 거 아니오? 당신은 화가 나면 앞에선 괜찮다고 했다가 뒤돌아선 등 뒤에 고드름을 꽂는 재주가 있잖아요.”
랭던 경은 단단히 기분 나쁜 일이 있는지 내 성격의 단점을 과장해 가며 날카로운 말씨로 공격했다. 나는 그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쏜 화살을 슬쩍 피하며 부드러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랭던 경은 삐뚜름하게 구겨진 잘생긴 얼굴로 무언가를 찾아 시선을 홱홱 돌리더니, 한쪽 구석에 팽개쳐 둔 종이를 꺼내 내게 불쑥 내밀었다. ‘여우’가 그려진 서튼가의 봉랍이 붙어 있는 서신으로, 내가 오늘 오후에 답신으로 보낸 편지지였다. 나는 당황하여 편지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 두며 말했다.
“저하께서 짧게 보내도 된다고 하셔서 그랬지요. 여름이라 날이 더워 제크 씨를 오래 기다리게 하기 싫었습니다. 애니도 제 외출 준비를 도와주는 상황이었구요. 제가 아무렴 저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짧은 답장을 보냈겠습니까?”
“오랜만에 설렘을 안고 당신 편지를 기다린 내 마음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군.”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설마 제가 저하의 마음을 짓밟으려고 그랬겠어요? 랭던 경을 향한 제 감정을 아시면서요.”
“첩자 노릇을 하며 내 서랍과 서재를 들쑤시고 다닌 사람인데 당신이 뭔들 못 하겠소?”
랭던 경은 욱하는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사람은 정말 잘못한 일이 공격당하면 비겁한 본성으로 인해 같이 화가 나기 마련이라 나는 얼굴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흘끗 나를 올려다보고 날카로운 언사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살폈다. 녹색 눈동자는 이번엔 자신이 쏜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화가 치민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침착하게 답했다.
“예전 일은 백번 다시 말씀하셔도 제가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죽은 도미닉에게 휘둘려 옳지 않은 판단을 했고, 비겁하게도 저하께 고백하는 일을 늦추고 늦추었으니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랭던 경이 격앙된 기분을 누그러트릴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오늘 답장을 너무 짧게 드린 일 역시 돌이켜 보니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저 인사치레로 하신 말씀인데 정말 짧게 보내도 된다고 생각했다니… 제 생각이 편지보다도 더 짧았네요.”
다행히 내 감정의 고저(高低)는 담담한 음성 안에 안전히 갇힌 상태였다.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 이상 성미를 드러내지 않았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아까보단 확연히 화가 잦아들었다.
“안다니 다행이군.”
“네. 저하께서는 화가 나시면 제가 잘못했던 일을 들추시지만 저는 저하께 서운한 점을 같이 얘기하며 싸움을 괜히 키우고 싶지는 않아요. 몇 번을 나무라셔도 반성은 저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하겠습니다.”
내 평온한 어투에 꼭꼭 숨겨 둔 작은 가시를 눈치챘는지 랭던 경의 눈꼬리가 위로 인정사정없이 올라갔다.
“내게 서운한 점이 무엇인지 말해 봐요, 로엘.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요.”
“이렇게 성미가 불같으신 것을 알아 제 마음에 상처가 되는 얘기를 하셔도 참작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제 잘못이 더 큰 것은 분명한데 왜 저하의 잘못을 들추겠어요.”
“…화가 나서 당신 과거를 들먹였으니 내가 경솔했는지도 모르지. 당신은 뭐가 그렇게 서운했는지 한 번 솔직히 말해 봐요. 마음에 묻어둔 것이 있는 눈치인데.”
“…글쎄요. 저야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도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무어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랭던 경께서 과거를 들먹이신다 해도 상심할 자격이 없는 게 사실인걸요. 제게 그럴 자격이 생기는 날이 뒤늦게라도 온다면 부디 저하께서 알려주세요. 첩자로 저지른 잘못이 워낙 커 그런 때가 올 것 같지는 않지만요.”
“하….”
랭던 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고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 책상에 쌓인 서류들이 내가 그를 피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성스러운 편지에 짧게 답장한 것은 분명한 내 잘못으로, 랭던 경이 그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일견 당연했다. 그러나 과거를 끄집어내 공격하는 일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자제하기로 약속한 사안이었다. 나는 말싸움을 더 키우지 않고 침착히 이 순간을 넘겼다는 사실에 일단 안심했다.
랭던 경은 돌려 말하는 귀족다운 언사를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나 나는 여전히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랭던 경처럼 날카로운 성미를 지녔다면 우리는 눈 덮인 벼랑 위의 검독수리들처럼 피를 흘리고 싸워 댔을 것이다. 나도 할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로, 랭던 경이 과거에 내 앞에서 테이블을 엎어 버렸던 일이나 창부라고 무시한 일을 얼마든지 꼬집을 수 있었다.
랭던 경의 깊은 숨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
화를 삭이는 건지 벌컥 성을 낸 일을 후회하는 건지 한숨만 듣고는 알기 어려웠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소파는 높이가 낮았고, 서류 더미는 어느 각도에서든 랭던 경의 얼굴을 정확히 가려 그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탑처럼 쌓인 종이 너머 가끔씩 들리는 한숨 소리만이 랭던 경의 심정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언뜻 검소해 보이지만 분침에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사무실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재깍, 약한 리듬이 반복될수록 랭던 경의 치솟은 화도 천천히 가라앉은 듯했다.
그사이 내 당황스러움 또한 누그러져 스스로의 잘못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마음속에 다른 감정을 숨기지 않은 상태로 다시 사과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입술을 뗐다.
“편지 일은 확실한 제 잘못이 맞습니다. 랭던 경께서 정성 들여 서신을 보내 주셨는데 제가 너무 성의 없이 답장했어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제게 랭던 경이 가장 우선임을 보여 드리고 애정을 드러내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풀어 주세요, 저하. ”
서류 더미 뒤에서 작은 한숨과 함께 랭던 경의 나긋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돌려 말하는 화법에 화가 치밀어 편지 일은 이미 잊었어요. 비꼬는 게 아니라는 것도, 말버릇이라 고치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만 가끔씩 다툴 때마다 미치겠군. 물론 내가 작은 앙심을 품고 함부로 말한 것도 사실이오.”
“저를 향한 애정으로 저하께서 참아 주시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니 또 화가 풀리네요. 내 마음을 녹이는 부드러운 말씨 또한 그대의 화법이지. 아까는 화가 났다고 말을 함부로 하여 미안합니다.”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높게 쌓인 종이 위로 그의 빼어난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저함 없이 내게로 다가온 그는 내 팔뚝을 쥐고 자리에서 나를 일으켰다. 적당히 힘을 준 굵은 손가락에서 기분 좋은 무게감이 전달되었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저하를 뵈러 온다고 생각하니 기쁜 마음뿐이었습니다.”
랭던 경은 이제야 정말 기분이 풀린 듯 나를 잡은 손가락에 더 힘을 풀었다. 그 손가락은 옷 위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와 소매 밖에 얌전히 놓인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그 사이를 문지르는 손길에서 느른한 갈망과 조급한 욕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빈말은 아니겠지?”
“이런, 빈말인 것이 티가 났나요?”
“로엘 씨도 꽤 장난기가 늘었군.”
단정한 입술이 시원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눈을 바로 감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녹안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초점이 맞지 않게 된 후에야 눈꺼풀을 닫았다.
우리는 사무실의 후텁지근한 여름 공기 속에서 키스했다. 열린 창문으로 이따금 그늘에 머물다 온 서늘한 바람이 밀려들어 방 안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랭던 경의 키스는 짧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농밀하고 짙었다. 내 혀를 물었다가 놓고, 입 속을 가득 채우며 숨결을 짓이기는 충만한 키스가 바로 내가 기대했던 환대였다. 랭던 경과 나는 아쉬운 숨을 내뱉으며 서로의 입술을 놓아 주고 상대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로엘 당신에게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무엇인데요?”
“다름 아닌 칼라일 씨와의 만남입니다. 들어오시오, 칼라일 씨.”
갑자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엉거주춤 그에게서 물러나며 조금 구겨진 소매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급히 다듬었다.
내가 아직 품에 안겨 있는데 예고 없이 고용인을 들이다니.
항의하는 뜻으로 그를 슬쩍 올려다보자, 랭던 경은 제법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뜰히 살피는 중이었다. 답장을 받고 두어 시간쯤 화가 난 채로 일을 했을 테니 그의 성미에 작은 앙갚음을 추가로 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고용인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들어와 랭던 경과 내게 깍듯이 인사했다.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검소하지만 깨끗하게 다림질된 옷차림도. 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어제 랭던 경이 약속을 잡고 에메랄드 저택까지 불러들였던 그 ‘커트 칼라일’ 씨라는 걸 눈치챘다.
그는 다소 긴장한 듯 입술을 부자연스럽게 다물고 있었다. 나는 랭던 경이 주일에 그와 약속을 잡은 것도 모자라, 내게 주는 선물로 그와의 만남을 준비한 연유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칼라일 씨.”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튼 남작님.”
“로엘, 칼라일 씨는 철도사에서 5년 정도 일한 직원으로 작년에 결혼하여 얼마 전 건강한 딸을 낳았습니다.”
“그렇군요. 축하드려요.”
내가 또 악수를 청하려는데 랭던 경이 앞으로 나서며 내 손목을 자연스럽게 밑으로 눌렀다. 랭던 경은 어제 신부님과의 악수를 금지하고 난 후 아예 다른 사람과 접촉을 노골적으로 가로막았다. 나는 랭던 경의 등을 방패 삼아 뒤에서 몰래 입술을 삐뚜름하게 내밀었다.
“칼라일 씨는….”
랭던 경은 말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가 내 표정을 보고 놀란 듯 잠시 흠칫했다. 퉁명스러운 표정을 들킨 일이 매우 무안하여 나는 재빨리 눈치를 보고 입술을 제자리에 얌전히 되돌려 놓았다.
랭던 경이 간신히 끊긴 말을 이었다.
“…칼라일 씨는 앞으로 로엘 씨가 하는 일을 도울 겁니다.”
“예? 무슨 일을요?”
“기차역 환경을 개선하는 업무를 로엘 씨에게 맡기고 싶어요. 내가 공부하는 동안 당신도 모든 서적을 따라 읽었으니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칼라일 씨는 노스턴 기차역을 지을 때 공사에 필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실무자였어요. 로엘 씨가 계획을 세우고 칼라일 씨와 현실적인 부분을 점검한 후 내게 결재를 맡았으면 합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로엘?”
랭던 경의 계획을 듣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며 귓가를 울렸다. 아무리 깊은 잠을 자도 이보다 더 내 소망을 선명히 실현하는 꿈은 꾸지 못할 것이다. 랭던 경이 준비한 선물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저하….”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문가에 칼라일 씨가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랭던 경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 듯 손짓으로 칼라일 씨에게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칼라일 씨는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둘만 남게 된 후에도 한참이나 가슴을 들썩이며 어렵게 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나온 내 음성은 벅찬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늘게 흔들렸다.
“제게는, 그야말로 너무 기쁜 일입니다, 랭던 경.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직접 일을 해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요.”
“당신은 여느 귀족과 다르잖아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부심으로 생각하지 않지. 그런 점은 실로 나와 비슷하다 할 수 있어요.”
랭던 경은 자부심을 단단히 두른 채 대답한 후, 기다랗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나의 흘러내린 백금색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넘겨 주었다.
“더구나 내가 읽는 책을 모조리 따라 읽으며 늘 기차역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니 눈치채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부는 충분히 한 것 같아 그대에게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았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하. 악수도 하지 않고, 누구를 만났는지 무얼 했는지 다 상세히 말씀드리구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로엘 씨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는 칼라일 씨가 책임지고 보고할 겁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매듭짓기 위해 사적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었어요.”
나는 들뜬 기분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여전히 입가에 명랑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상태였지만, 그의 지나친 통제벽을 짚고 넘어가는 일은 잊지 않았다.
“정말 짓궂으십니다. 오늘 제퍼슨 씨에게도 제가 악수를 하지 못하도록 당부하셨죠?”
“티 나지 않게 막으라고 했건만. 흠.”
그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칼라일 씨에게도 보고를 맡기시다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당신이 보고한다면 본능적으로 불리한 부분을 미화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사람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로엘 씨에게도 따로 전달받고 싶기는 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장부에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가급적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내게 일기처럼 건네주길 바랍니다. 물론 적당한 길이로요.”
랭던 경은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담백한 표정을 지은 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봤다.
사무실은 즐거운 공간이었다. 나는 곁에서 랭던 경이 새로운 역의 도면과 기차의 내부 설계도 따위를 공들여 검토하는 것을 지켜보고, 비서 대신 그가 보내야 할 답장을 대신 가필하기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그와 일을 하는 건 매우 보람있었다.
랭던 경은 “과연 로엘 씨의 필체는 직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척이나 교양있고 아름답군요. 이 글씨를 보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초상화를 받아 본 것처럼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오늘 그 글씨로 쓴 편지를 길게 받아 보지는 못하였지만.”이라고 내 서체를 고평가해 주었다.
평범한 글씨를 그토록 우아하게 봐 주는 데에는 나를 향한 랭던 경의 애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나는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과분한 칭찬을 해 주시니 기쁘네요.” 하고 온순히 답하였다. 기분이 몹시 좋았기에 랭던 경이 쏜 화살을 연이어 맞고도 그를 걸고넘어질 기분 따윈 들지 않았다.
랭던 경은 서신에 관한 사과를 다시 한번 못 들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듯 굵은 눈썹을 꿈틀, 구겼다가 폈다. 그러나 그도 꽤 서운함이 가라앉은 듯 연인다운 관대한 태도를 발휘하여 내 화법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일을 마친 랭던 경은 퇴근을 위해 얇은 여름용 겉옷을 입었다. 여름이라 밝은 하늘엔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노르크는 이 시간이면 해가 지지 않아도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그래서 격식을 중시하는 숙녀와 신사들은 대부분 코트를 걸치고 외출에 나섰다.
건물을 나가기 전 사무실 위층에 들러 랭던 철도사의 모형 기차를 구경했고, 시가지에 생긴 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프레네에서 건너온 주방장이 노르크에 차린 레스토랑이었다.
노르크는 귀족이라면 벽이 있는 방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다. 그러나 이 레스토랑은 주변이 탁 트여 있고 테이블이 일정한 간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각자 일행과 앉을 테이블이 따로 있었지만, 마치 모두가 모여앉아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는 듯 보였다.
음식값을 지불할 수만 있으면 따로 입장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숙녀들끼리만 외출하여 여름 저녁을 즐기는 신선한 풍경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겨울이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에서 갓 태어난 뜨거운 자유는, 많은 이들의 구속을 성공적으로 풀어 주었다. 소음 역시 해방을 맞아 식당은 어느 때보다 소란했다. 나는 난생처음 시끄러운 장소에 앉아 고기를 자르며 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시내 분위기가 한 달 전과 확연히 다르네요. 선거가 무사히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희망적인 분위기가 넘실거려요.”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기쁨이죠. 우리가 한데 어울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레스토랑이 이렇게 시끄럽다니…. 저택에서 키우는 개들을 전부 모아 놓아도 이보다는 질서가 있을 거요.”
“시끄럽기야 하지만 신선하긴 하네요. 음식도 무척 맛있구요.”
“음식은 제법 훌륭하군. 요리사가 음식만 들여왔으면 될 것을 프레네에서 괴상한 분위기를 들여왔네요. 식당에 벽으로 나눈 공간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니…. 양 목장의 양 떼보다 못한 취급이군.”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정돈하다 말고 그의 불평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기이할 정도로 질서가 무너진 식당 분위기가 귀족으로서의 내 긴장감마저 누그러트린 덕분이었다.
“저하, 저도 몹시 시끄러워 정신이 사납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조용한 식당에 가면 적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엘 씨는 보기보다 은근히 긍정적인 데가 있군요.”
“노르크의 미래가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혼란 속의 질서요. 어지럽기는 하지만 즐겁고 활기차네요.”
“…노르크가 이 레스토랑 꼴이 될 거라고? 샤를 폐하께서 나를 미혹하여 나라를 망쳐 놓았군.”
“저하! 농담이어도 말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석에서 함부로 폐하를 언급하시면 안 되죠.”
왕을 모욕하는 발언에 내가 발끈하자 이번엔 랭던 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꼿꼿이 폈던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랭던 경께서는 가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하께서 지나치게 격식과 수치가 없는 편이긴 하시죠.”
“그런가? 그대가 작은 농담을 음탕하게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지.”
랭던 경은 대답하며 테이블 아래서 구두코를 맞춰 왔다. 가죽이 만났을 뿐인데 내가 얼굴을 붉히자 랭던 경은 교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랭던 경의 행동에 음탕한 의도가 존재하지 않을 리 있나요?’ 반박하고픈 심정이 들었으나 입술이 꿀을 듬뿍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의 음란한 욕구가 나를 압도하였기 때문이다. 괜히 말대꾸를 했다가 처음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그랬듯, 랭던 경이 구두코를 물려 버릴까 저어되는 마음도 있었다.
우리는 식사 후 마차를 타는 대신 직접 걸어 카페로 이동했다. 하늘이 푸르러도 저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시가지를 달려갔다.
우리는 비좁은 거리에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걸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숙녀들은 종종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귓속말을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랭던 경과 나는 길을 가로지르다가 움푹 파인 땅에 발이 걸려 발목을 여러 번 삐끗했다. 마차가 다니기 쉽도록 얼마 전 나라에서 부드러운 재질의 흙을 새로 깐 탓이었다. 우리는 길 상태에 관해 불평했지만, 말(馬)들의 편의를 생각하며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지나가던 젊은 신사 한 명은 발목이 꺾이자마자 지팡이로 땅을 사납게 두드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나라에 멍청한 흙을 깐 막돼먹은 자유주의자 놈들! 오, 그리운 앨버트!”라며 큰 소리로 세태를 힐난했다.
랭던 경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에이든 백작이군. 그의 집안은 앨버트 때도 그다지 재미를 못 봤을 텐데.”
“랭던 경, 누가 듣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에이든 백작은 투자하는 것마다 망해서 저택이 겉보기만 멀쩡할 뿐, 집 안에 쥐가 들끓는다고 합니다.”
“사실이어도 소문을 퍼트리는 일은 점잖지 못한 행동입니다.”
“…도미닉은 본인은 교양이라곤 없으면서 어떻게 당신 교육만은 이렇게 철저히 시켜 놨는지 모르겠군. 그가 조금만 당신을 느슨하게 대했다면 내가 로엘 씨와 더 많은 재미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대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이 흠입니다.”
“품행을 느슨히 하는 건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재미라뇨.”
나는 그 말에 내포한 뜻이 육체적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 말을 하며 얼굴을 발갛게 붉히자 랭던 경은 실크해트를 벗으며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로엘 씨, 나는 대화나 연극 따위의 건전한 재미를 일컬은 거예요. 당신의 머릿속이 죄로 가득 찬 것 같군요.”
정결한 대답에 일순 민망함이 솟구쳤다.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다른 의미가 있는 줄 알고 제가 오해했네요, 저하.”
“그대가 강아지나 노예로 출연하는 연극 말입니다. 사제나 학생도 좋구요.”
“랭던 경!”
뺨이 달아오르는 걸로 모자라 손끝까지 빨간 꽃잎을 으깬 듯 붉게 물들었다. 랭던 경은 실크해트를 다시 쓰며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렸다. 온아하고 예의 바른 표정. 노르크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가문의 공작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우아한 자태였다. 그 얼굴을 보자 금세 마음이 누그러져 어깨에 가득 담겼던 힘이 풀렸다.
물렁한 흙 때문에 생각보다 고된 산책을 마치고 카페에 도착했다. 랭던 경은 붉은 가림막 아래에 놓인 야외 테이블을 택했다. 보드레한 미풍을 맞으며 즐기는 아이스크림과 홍차, 케이크는 저택에서 먹고 마실 때와는 다른 즐거움을 입 속으로 데려왔다.
나는 스푼 가득 던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가며 테이블 밑에 놓인 구두 끝을 먼저 그에게 붙였다. 랭던 경이 홍차를 마시다 말고 눈을 슬쩍 들었다.
“왜요, 랭던 경. 음탕한 생각이라도 나셨나요?”
내가 그를 당황하게 만들 요량으로 장난스럽게 묻자 그는 내 예상과 달리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장 로엘 씨를 끌어다가 내 다리 위에 앉히고 그대의 좆을 주무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너무나 뻔뻔한 대답에 입 속에 들어 있던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뱉을 뻔했다. 랭던 경은 빙글빙글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인데 왜 그래요?”
“…저는, 저는 당신이 당황하실 줄 알았죠.”
둥근 그릇 밑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녹은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스푼을 기울이자 노란빛이 열따랗게 맴도는 흰 아이스크림이 끈적한 줄기가 되어 떨어졌다. 그는 나와 발끝이 닿지 않은 쪽 다리를 꼬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며 턱을 괴었다. 여유 있으면서도 깊은 눈동자가 성큼 다가오는 듯하여 심장이 떨렸다.
“로엘,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대가 테이블보 안으로 기어들어 가 내 좆을 빨아도 나는 당황하지 않을 거예요.”
랭던 경은 내 어깨 너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눈을 맞추고는 덧붙였다.
“사실 상상해 보니, 그러면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일 것 같군요.”
꿈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외설스럽고 음란한 예시에 나는 머리를 저으며 다시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분야에 관한 한 저하의 상상력을 따라잡질 못하겠습니다. 경악스럽긴 하나 어떨 때는 랭던 경의 일관적인 모습이 감탄스러워요.”
“경악이라니. 로엘 씨를 향한 내 마음이 대단한 까닭입니다. 부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강요하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쩌겠나요. 상상은 죄가 아닌 것을요.”
“비꼬는 솜씨가 날로 늘어가는군.”
“랭던 경이 언젠가 말씀하셨듯, 귀족이 갖춰야 할 덕목이지요.”
랭던 경은 내 대답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건지, 기분 좋게 웃으며 붉은 천막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보기 어려웠던 표정이다.
요즘 그에게는 여유로움이 늘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와 길게 뻗은 목선을 잠시 넋 놓고 보다가 그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
태양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구름이 빠르게 옆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바람은 작은 섬(小島)만 한 뭉게구름을 쉽게 밀어 냈다. 저 먼 하늘에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얗게 타는 태양을 또 다른 뭉게구름이 나타나 가리고, 거리엔 다시 시원한 그늘이 드리웠다.
디저트를 충분히 즐긴 후,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오페라 극장으로 이동했다. 행인들의 발을 푹푹 빠지게 만들었던 폭신한 흙 위를 말들이 경쾌하게 걸어갔다.
랭던 경은 마차에서 먼저 내려 마부 대신 직접 문을 잡고 내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럴 필요 없는데 손까지 잡아 주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내리며 작게 속삭였다.
“신사에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는 마차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걸요.”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로엘 씨를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요. 순간 중심을 잃고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이니까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랭던 경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갑자기 그 마음이 실감 날 때가 있었다. 방금 들을 그의 말이 그랬다.
주변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내가 다칠까 봐 손을 잡아 주고, 점심 시간에 나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긴 편지를 써 주는 사람. 숲속을 걸으며 자신은 먹지도 않을 산딸기를 따고, 등에 업혀 잠든 내가 깰까 봐 마차도 타지 않는 사람.
랭던 경의 애정이 내 가슴 저 깊은 곳, 갈빗대 안쪽에 음각으로 남았음 직할 상흔을 건드렸다.
“고마워요, 테런스.”
손가락에 힘을 넣어 그를 마주 잡았다가 천천히 살결을 쓸면서 힘을 풀었다. 랭던 경 역시 내 손을 느리게 놔 주었다.
그는 여름밤이 더웠는지 여름 코트를 벗어 마부에게 맡기고 나와 함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표를 검사하는 극장 직원은 랭던 경을 보자마자 몹시 기뻐하며 환대했다. 랭던 가문은 이 오페라 극장의 2층 박스석을 소유하고 있어서 따로 표나 초대장을 보여 주는 일은 필요치 않았다. 초대장은 그저 중요한 공연 일정을 알리는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늘 앉는 박스석에 랭던 경과 단둘이 남았다. 나는 오페라 망원경을 들어 눈가에 붙였다. 얼굴을 가리고서야 겨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용기가 생겼다.
“랭던 경께서 늘 저를 신경 써 주시니 몹시 기쁘네요. 가족에게도 받지 못했던 사랑을 늘 넘치도록 주시니 저는 요즘 하느님께 저 자신을 위해 더는 기도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저 랭던 경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제게 당신을 주셨음에 감사할 뿐이에요.”
품위 있는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악기를 조율하는 음악가들을 내려다보며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건만, 랭던 경은 내 손에 들린 작은 물건을 앗아 갔다. 얼굴을 가릴 소품이 사라지자 수줍음이 뺨 위를 넘실거렸다.
다시 망원경을 찾아오려 손을 뻗었으나 랭던 경은 아예 자신의 등 뒤로 팔을 돌려 물건을 숨겼다. 나는 할 수 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야 했다.
“저하, 돌려주십시오. 오페라를 준비하는 모습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가 애정 어린 말을 할 때마다 온 얼굴을 샅샅이 보면서, 내게는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무심한 태도로 그렇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밤에 다른 표정만은 샅샅이 보일 테니 지금은 부디 그냥 넘어가 주세요.”
랭던 경은 이번에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낮게 웃더니, 큰 손바닥으로 내 머리카락을 잠시 헤집었다가 망원경을 돌려주었다. 붕, 솟아올랐던 머리카락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를 어린애처럼 대하는 태도가 배 속을 따뜻하고 간지럽게 만들었다.
‘나는 늘 랭던 경보다 열 살이 더 어릴 테니, 언제나 그의 눈엔 내가 어리숙하고 어린 사람으로 보이겠지. …참으로 다행이야.’
나는 태연한 척 망원경을 다시 눈가에 대고 아무 데나 바라보며 생각했다.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핥아 내리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오페라는 언제나 그렇듯 황홀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합창할 때는 청중들 사이에서 무언(無言)의 벅찬 감동이 솟아올랐다.
나 역시 한껏 감격하여 마지막 4막의 절정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허벅지 사이를 커다란 손이 침범했다. 몹시 놀라 망원경 손잡이를 꽉 부여잡으며 동그란 렌즈에서 눈을 떼어 냈다.
“랭던 경?”
“더는 못 참겠습니다, 로엘. 당신의 달콤한 말에 동요하여 1막부터 그대를 울리고 신음하는 표정을 볼 생각만 했어요. 그때부터 내내 이 상태요.”
그의 속삭임에 시선을 내렸는데, 최대한 수납한 상태인데도 흉흉한 물건이 검은 바지 위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나와 한참 관계를 맺다가 사정에 이르기 직전처럼 부푼 크기였다.
당황하는 바람에 조금 전까지 나를 황홀경에 잠기게 했던 오페라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그의 물건이 내게 주는 황홀경이 그 무엇보다 대단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처럼 욕정이 차오른 그를 앞에 두고 담담하게 굴거나, 무작정 그의 변태성을 비난하기가 수월찮았다.
랭던 경은 뜨거운 숨으로 내 귓가와 목선을 문지르며 물었다.
“로엘, 지금 당장 나갈까요? 마차나 건물의 옥상으로 갑시다. 어디든 좋으니 그대의 살결을 쥐고 문지르고 싶어요.”
“제 생각에도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세상에… 저하의 것이 이렇게 티, 티가 나서야….”
“여름 코트를 마부에게 맡기고 왔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나는 랭던 경이 당장의 급한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떠올렸을 정도이니 랭던 경의 머릿속엔 수십, 수백 번 그 생각이 지나갔겠지만 나를 향한 애정과 배려로 참아 냈을 것이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충동적으로 열렸다.
“랭던 경께서는 기이하게 하시는 걸 좋아하시죠?”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제가 여기서 입으로 해 드린다면… 그렇게 한다면 저하께서 싫으실까요?”
창피하여 눈을 내리깔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지만 랭던 경은 그 모든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는 의외의 제안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싫을 리가. 하지만 그대는 그런 취향이 아니잖아요. 결국 후회할 테니… 부디 나를 유혹하여 꾀어내지 말아요.”
“하루쯤은, 그리고 곤란한 상황이라면, 특별한 날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대로는 도저히 숨길 수 있는 크기가 아닌걸요.”
랭던 경이 잠자리에서 내 엉덩이를 내리치거나 음탕한 말로 수치를 주는 것은 평범한 날에 포함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 외에도 그가 나를 묶어 두고 방치하거나, 눈을 가리거나, 채찍으로 매질을 하거나, 야외에서 울리거나, 개나 노예 노릇을 시키고 싶어 하는 이상(異常) 욕구를 품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실수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
“그야 얼마든지 있지.”
평소라면 거절했을 랭던 경은 절제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내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공연이 한참 중인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은 어두웠다. 문가 쪽은 더욱 침침했다.
문 위를 덮고 있는 두꺼운 붉은색 커튼을 보고서야 나는 랭던 경이 취할 행동을 짐작했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않고 박스석을 드나들어, 여태 그 커튼의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커튼을 걷어 나를 데리고 그 속으로 들어갔지만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지는 않았다. 커튼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우리의 몸 옆을 묵직하게 덮었고, 나를 지독한 불면에 빠트린 백야는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커튼 밖의 음악가들은 아직 노래하고 연주했지만 우리는 고요한 어둠에 갇혔다. 이마에 닿는 랭던 경의 숨결과 내 두 뺨을 감싸는 손바닥이 세상의 전부 같았다. 짙은 어둠을 뚫고 다다른 그의 목소리가 귀 안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다시 묻지 않을 테니까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요.”
“가끔은… 괜찮아요. 다만 극장이니, 저와 하지는 말아 주세요. 야외에서 끝까지 하는 것은 무리예요.”
뺨에 얹힌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꼬리 끝을 느리게 문질렀다. 랭던 경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입에 싸 줄까?”
“네. 언제나 그렇게 하시잖아요.”
“먹고 싶겠지? 그대는 내가 부어 주는 정액의 맛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어째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시나요?”
순수한 궁금증이 들어 되묻자마자 작은 한숨이 이마에 날아와 앉았다.
“…이럴 땐 그냥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랭던 경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은밀히 나무랐다. 옷 위로 맞았는데도 무척 아파 그의 셔츠에 입술을 묻고 잠시 신음을 삼켰다.
나는 셔츠 단추 위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양손으로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성기의 존재감을 감추지 못하는 바지 위를 뺨과 코끝으로 더듬어 단추의 위치를 확인하고, 어둠 속에서 여밈을 풀며 작게 항의했다.
“엉덩이를 때리는 일도 저하께서 자제하신다 하셨던 과격한 행위에 포함됩니다.”
“채찍이나 회초리 정도는 들어야 매질이지, 손바닥으로 살짝 때리는 건 폭력적이라 할 수 없어요. 당신도 실제론 그렇게 느끼지 않겠지?”
“하지만 제가 도미닉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다 했을 땐 불같이 화를 내셨잖아요.”
얼마 전 나는 포도주에 취해 도미닉과 살며 겪은 일들을 랭던 경에게 솔직히 자백하였다. 그날 내 얘기를 듣고 성난 랭던 경은 다시 도미닉의 무덤을 파헤치려 하였고, 성당으로 뛰쳐나가려는 그를 도프 집사와 마틸다 할머니까지 매달려 겨우 말렸다. 그의 계획은 도미닉의 해골을 도끼로 찍어 내리고, 강아지들을 시켜 그 위에 소변을 뿌리는 것이었다.
“비교할 걸 해야지!”
랭던 경은 내 예시에 충동적으로 벌컥 소리쳤다가 다시 목을 겨우 가다듬었다.
“흠… 소리를 질러 미안하오. 어둠 속에서 그대와 섹스에 관한 대화를 하려니 몹시 답답증이 들어서…. 아무튼 섹스할 때 엉덩이를 때리는 일은 즐거운 여흥이라 보는 것이 적당해요, 로엘.”
“제가 여즉 당신의 성(性)적 취향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답답하신가 봐요. 죄송합니다, 랭던 경.”
“…죄송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나는 새치름하게 대답하고 속옷 안에 간신히 수납되어 있는 페니스를 꺼냈다. 성악가의 풍부한 성량이 극장을 가득 울리는 동안 기둥에 뺨을 비볐다.
나는 그의 샅에 코를 묻고 혀를 내어 혓바닥에 닿는 살이란 살은 전부 핥았다. 어둠에 숨어 마음껏, 추잡스러울 정도로 그의 은밀한 곳을 탐했다. 혓바닥엔 성기의 굵은 기둥과 혈관이 닿았고, 내가 내뱉는 숨결은 흥분한 그의 것을 더듬었다.
“하….”
랭던 경은 두 손으로 내 머리통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은 머리카락 속을 억세게 파고들었다가 진정하며 뒤로 물러나길 반복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표정이나 팔의 떨림을 선명히 상상할 수 있었다. 굵은 손끝이 매우 초조했으므로.
“빨리, 로엘, 그 축축한 입 속으로 좆을 빨아 줘요. 감질나 미치겠군.”
오페라 극장, 붉은 커튼 안에 숨어 구음을 하는 행위에 장점이 있다면 그에게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페니스가 워낙 거대해 평소에도 입을 얌전히 벌릴 수는 없었으나, 그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입술을 더 우악스럽게 열기 편했다.
귀두부터 기둥까지 한 번에 뜨거운 입 속으로 빨아들이자 머리 위에서 만족감이 섞인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 눈을 내내 감고 있었는데, 성기를 빨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열렸다. 얼굴은 자연스레 뒤로 젖혀졌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에 익숙한 녹안 대신 캄캄한 어둠이 담겼다.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얼떨떨한 느낌을 안고 귀두를 더,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목구멍에서 채 삼키지 못한 버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응… 흣….”
귀두는 혓바닥과 입천장을 긁었고 아슬아슬하게 내 치아 옆면을 스쳤다. 버거운 양감에 혀의 뿌리가 빳빳하게 굳었지만 구역질을 참아 가며 간신히 절반 넘게 페니스를 품었다.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굵기에 적응하는 사이 랭던 경의 손이 머리카락에서 뺨으로 옮겨 왔다. 그의 손가락은 성기를 삼키느라 젖은 채 떨리는 내 속눈썹과 눈가를 더듬었다.
“하, 설마… 지금도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진 않았겠지만 손끝에 내 대답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는 신음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카락을 꽉 쥐고 한참이나 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머리 위의 목소리가 성난 듯이 읊조렸다.
“젠장… 참기가 힘들군.”
굵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 갈 것처럼 다시 붙들었다. 나는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옛날처럼 직접 움직여 마구잡이로 박을 거라 생각했다. 긴장감에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를 향해 들어 올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느새 구음할 때면 눈을 마주치는 것이 몸에 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랭던 경의 허리 짓에 대비하여 손끝을 오므리고 단단한 허벅지를 붙들었다. 거부하지 않고 참아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랭던 경은 나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자비로운 인내심을 발휘하여 다시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다만 내가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손끝으로 눈가를 더듬어 확인했다.
“당신이 움직여요, 로엘. 내가 지금 직접 박으면 적당히는 못 하니까. 응?”
나는 목구멍을 움찔대며 머리를 끄덕이고 고갯짓을 시작했다.
랭던 경의 짙은 살냄새, 페니스와 입 속의 여린 살이 미끄러지며 서로를 문지르는 감각, 뭉툭하고 커다란 귀두가 목구멍 깊숙한 곳을 누르는 느낌, 물컹한 혓바닥에 닿는 굵은 혈관의 모양, 머리 위에서 흐르는 그의 신음성, 커튼 너머로 들리는 아름다운 성악가의 음색과 관중들이 감탄하는 소리. 그리고….
“흐으응… 끅, 응… 읏….”
게걸스레 그의 것을 맛보는 내 신음 소리.
나는 내가 구음을 하면서 흥분하게 됐다는 사실을 소리로 처음 느꼈다. 밝은 데선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귀가 예민해진 덕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려 성기를 빨며 온갖 신음을 흘렸다. 고통을 견뎌 내는 소리도 있었지만 랭던 경의 신음을 들을 때나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내 얼굴을 만져 줄 때, 구역감에 들썩대는 가슴팍을 억누르며 젖은 입술로 성기를 빨아들일 때, 그러다가 버거워서 흐른 침이 턱 끝에 고일 때, 나는 신음했다.
“읏, 흡… 으응….”
“로엘, 하… 좆이 목구멍을 찔러서 흥분했어요? 응? 자지를 게걸스럽게도 빠는군. 그렇게 맛있을까.”
다른 때 같으면 랭던 경이 말도 안 되는 기이한 음담패설을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을 텐데. 그 말이 완전히 틀린 소리가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창피스러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반응 없이 그의 것을 가득 빨았다.
랭던 경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 젖은 뺨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당신이, 하아… 내 좆을 빨며 흥분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대답도 안 했건만 어쩌면 그는 이토록 매번 예민하게 눈치챌까.
갑자기 커튼이 살짝 열리고 오페라 극장의 빛과 생생한 노랫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나는 누군가 커튼을 열어젖혀 우릴 발견한 줄 알고 놀라 몸을 들썩였으나, 곧 랭던 경이 내 표정을 보기 위해 틈을 살짝 벌린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음하다 흘린 눈물 탓에 붓기 시작한 눈을 깜빡였다.
랭던 경은 내 얼굴에 그어진 빛줄기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하… 미안해요, 로엘. 힘들겠지만 열 번만 참아 볼까?”
무얼 참으라는 걸까.
“열 번만 참아요.”
랭던 경이 다독이듯 말하더니 내 뒷머리를 누르며 갑자기 내 목구멍에 성기를 쑤셔 박았다. 나는 놀라서 끅, 끅 소리를 내며 동공을 크게 열었다. 흥분과 지배욕이 끝까지 치달은 내 연인의 눈빛이 보였다.
“하나.”
“흑… 으읏, 끅….”
랭던 경은 다시 거칠게 성기를 빼내고 내가 구음해서는 닿지 않는 목구멍 안쪽까지 성기를 처넣었다.
“두울… 하….”
입 속에 가득 들어찬 성기와 점막의 틈을 비집고 침이 울컥, 흘러내렸다. 그는 약간 젖히고 있던 커튼을 놓고 다른 손바닥으로 내 뒤통수를 더 꾸욱 눌렀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허벅지를 힘없이 밀어 냈지만 저항하기보다는 입을 크게 여는 데 더 많은 애를 썼다.
랭던 경은 내 머리를 붙잡고 조금 더 속도를 내어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과격한 구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익숙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참아 냈던 걸까.
어쨌든 여덟 번만 더 견디면 되었기 때문에 나는 허벅지를 잡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횟수가 다 채워지길 기다렸다.
“흣, 윽… 흡, 으으응….”
침이 철벅대는, 젖은 입 속을 맛보던 성기는 약속대로 열 번째에 목구멍 안쪽으로 정액을 쏟아부었다. 나는 눈물과 침으로 축축이 젖은 얼굴을 그의 샅에 파묻은 채 그가 나를 놓아 주길 기다렸다.
랭던 경은 한참 동안 정액을 쏟아 낸 후에야 아쉬운 듯 내 머리를 놔 주었다. 나는 놓여나자마자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으며 기침했다. 랭던 경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는지 바로 앞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다정한 손길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로엘. 오랜만에 약속을 어긴 줄은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대가 좆을 빨며 흥분할 줄 알게 되다니…. 당신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내가 이성을 붙들고 견디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흡, 언제 흥분했다고….”
제대로 반박하기도 전에 랭던 경의 손이 내 고간을 파고들었다. 나는 넓은 손등을 밀쳐 내려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것을 쥐어 잡았다. 무릎을 모으고 몸을 비틀며 간신히 집요한 손길을 가랑이 사이에서 쫓아냈다.
“봐요, 로엘. 내 걸 빨면서 이렇게 단단히 섰잖아.”
“마,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 제발 모른 척해 주십시오.”
“좆을 맛보는 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리됐겠어요. 박힐 때처럼 바짝 섰군. 아래 입만 자지에 약한 줄 알았더니 위쪽 입도 이제 그 맛을 안 모양이오.”
“모든 사람이… 저하처럼 벼, 변태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항변하는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랭던 경의 달콤하고 야릇한 속삭임이 귀를 적실 때마다 피부가 흠칫흠칫 떨리고 목덜미에 작은 소름이 돋아났다.
“아무튼 미안합니다. 순간적인 정욕을 못 이기고 아프게 좆을 쑤셔 넣어서 말이에요.”
“그런 말을 삼가 주시는 것이 제가 더 바라는 바입니다.”
“내가 비록 잠깐 엇나가긴 했지만 당신이 고통을 겪는 것이 싫어 다른 행위들은 최대한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러운 말을 입에 올리며 그대가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작은 즐거움은 부디 기쁜 마음으로 허락해 줘요. 정직한 심정으로는 로엘 씨가 엉덩이에 구슬이나 모조 성기를 박아 넣고 철도사에 와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무실에서 이미 녹진해진 구멍을 잔뜩 울려 줄 수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지만 두꺼운 커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성악가의 노래보다 커지지 않도록 간신히 목소리를 낮췄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어, 어떻게 그런 것을 넣고 외출을 한단 말씀입니까.”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저택을 나선다면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나를 떠올리며 흥분하겠지. 그러다가 사정도 하여 밑이 젖은 채로 나타난다면 내가 얼마나 설레겠어요?”
“제발 그런 것은 생각으로만 간직해 주세요.”
“당신이 모조 성기를 넣고 외출하는 게 무리라면 억지로 시키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 하루만 마차에서 내 것을 맛보는 게 어떨까요? 로엘 씨는 모조 성기보다야 진짜 좆을 더 좋아하니까. 그대도 밑이 이런 상태로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 힘들잖아요.”
“하지만….”
“특별한 날을 이어 가는 것이지. 어때요, 로엘. 응?”
흥분한 머릿속은 랭던 경의 비뚜름한 성벽을 달콤한 제안으로 받아들였다. 예전의 나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즉시 거절했겠지만, 내 영혼은 이제 랭던 경에게 제법 물들어 고상하지 않은 쾌락에 유혹을 느꼈다.
“그건…. 랭던 경, 하지만….”
오랜만에 금단(禁斷)의 사과를 베어 문 랭던 경 역시 내가 내뱉는 단어 사이사이 스민 공백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 당신은 평소와 사뭇 다른 것 같으니 허락의 의미로 알겠습니다.”
랭던 경은 무릎 꿇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문을 덜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연이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어 홀에는 직원들만 몇몇 서 있었고, 랭던 경은 어느새 옷을 깔끔히 정돈한 모습으로 실내 가스등 불빛 아래 섰다.
오히려 내가 더… 그에게 매달려 성기를 빠느라 내내 울고 흥분하기까지 했던 내 몰골이 훨씬 더 흐트러진 상태였다.
랭던 경은 얼룩덜룩 붉어진 내 얼굴을 보고 바로 실크해트를 벗어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모자는 몹시 헐거워서 눈썹 부근까지 챙이 흘러내렸는데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덕분에 붉게 물든 눈가가 확실히 가려졌다.
나는 흥분한 티가 나지 않게 바지 매무새를 정돈하고 여름 코트를 여몄다. 랭던 경을 따라 겉옷을 두고 오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떨리는 발을 힘겹게 움직여 랭던 경과 함께 극장 밖으로 나섰다. 랭던 경은 마차를 타기 직전, 조끼 안쪽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꺼내 한 손으로 뚜껑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군.”
태양을 통해서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백야는 아직 노르크에 어두운 하늘을 허락지 않아 새털구름 너머로 선홍빛 노을이 흘렀다.
랭던 경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키스부터 하려 했다. 나는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막아섰다.
“저하, 커튼을…. 마부가 덮개를 열어도 볼 수 없게 앞쪽 커튼까지 다 쳐 주세요.”
“그가 보는 건 싫어요?”
“당연한 말씀을요!”
“나도 보여 주는 건 싫습니다. 잠깐은 흥분되겠지만 그가 당신이 우는 모습을 기억하면 유쾌하진 않을 거예요.”
“…보통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싫지 않은가요?”
“그런가?”
“이럴 때는 저하께서 소유욕이라도 강한 것이 무척 다행스럽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보다 더 도덕적이지 않은 쾌락을 추구하셨겠죠.”
랭던 경은 내 말을 흘려들은 듯 아쉬운 한숨을 뱉어 내며 앞쪽으로 난 작은 창문 덮개와, 양옆의 큰 유리를 커튼으로 덮었다. 커튼은 금실 수가 놓인 얇은 살구색 커튼이라, 창가에 바짝 붙으면 자칫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염려가 있었다.
그는 의자 바닥에 달린 서랍을 열어 기름병을 꺼냈다. 나는 하인들이 마차에 기름병을 준비해 놨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선이 굵은 턱과 조각 같은 입술이 내 목덜미에 파묻혔다. 바지 단추를 모두 풀어낸 손가락은 바로 기름병에 푹 파묻혔다.
병의 주둥이를 빠져나오는 긴 손가락에선 윤기 나는 기름이 뚝, 뚝 떨어졌다. 미끈한 손가락은 그대로 내 속옷 안을 파고들어 와 엉덩이 골 사이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곳을 문질렀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손길에 놀라 몸을 파르르 떨며 그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흣, 저하, 이, 이러면 안 되었던 것인데….”
등 뒤로 느껴지는 마차의 덜컹거림과 말발굽 소리가 한여름 밤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앞에 마부가 있고, 아직 시내라 길가에 행인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신음을 참아야 할 것이다. 마차는 결코 실내가 아닌 것을… 유혹에 흔들린 내 잘못이었다.
그의 페니스는 오페라 극장에서 이미 한 번 사정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부풀었다. 랭던 경은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내벽을 비비며 성기 때문에 팽팽해진 바지 앞자락을 내 몸에 문질렀다. 불과 몇 분 전에 구음을 했으므로, 내 몸은 그 굴곡진 모양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입 속으로 맛본 단단한 감촉이 떠올라 배 속이 더 달아올랐다. 부쩍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점잖지 않은 내 성욕이 퍼뜩 원망스러웠다. 구음을 하며 계속 참아 왔던 성감은 손가락의 농락에 금세 꼭대기까지 치받혔다.
“으응… 조금, 사, 살살….”
“뜨거운 감촉이 기분 좋아서 별로 빼고 싶지 않은데. 좀 더 다정하게 쑤셔 줄까?”
“네, 흣…. 부디, 그, 그렇게….”
랭던 경은 손가락 두어 개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도드라진 굵은 관절이 내벽을 능숙하게 벌려 냈다. 손가락이 안을 꽉 채워 주지 않아 서늘한 밤공기가 밑을 침범했다. 나는 찌르르 울리는 허리를 떨며 비좁은 좌석에서 그에게 매달렸다.
“으응… 채, 채워 주셔야….”
“부드럽게 해 달라더니 이제는 손가락을 더 넣어 달라 조르고…. 로엘 씨의 까다로운 변덕을 맞춰 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애원하는 대로 하나 더 쑤셔 줘야겠군.”
랭던 경은 내 입술을 혀로 핥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박아 넣었다.
그의 말대로 내 몸은 몹시 예민하고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여름밤의 선선한 공기를 몰아내는 세 손가락이 너무 벅찼다. 숨을 헐떡이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랭던 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지만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진 않았다. 섬세한 손가락들이 천천히 안쪽을 녹이며 성기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흣, 아….”
내 몸은 손가락의 자극을 못 이기고 점점 동그랗게 말렸다. 그래서 반쯤 누운 채 위로는 랭던 경의 무게를, 아래로는 마차의 진동을 견뎌 내게 되었다. 마차가 들썩댈 때마다 등과 뒷머리에 문이 부딪혔다.
랭던 경은 기름에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적시고 안을 풀어 준 뒤 말했다.
“로엘, 이제 넣어도 되겠지?”
“저하… 괘, 괜찮을까요. 마차에서.”
“당연히 괜찮지. 쾌락에 약해진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랭던 경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커튼 틈새로 들어온 선홍빛 노을이 그의 흥분 위로 내려앉았다. 반듯한 눈코 입에 드리운 욕망이 아름다운 빛을 띠었다.
그는 나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긴 뒤 뒷무릎을 눌러 내 몸을 거의 반으로 접었다. 랭던 경은 내 엉덩이를 덮은 바지를 밀어 올려 살덩이가 반쯤 드러나게 만든 후, 둥그런 엉덩이 한쪽을 바깥으로 잡아 벌렸다. 다시 안쪽에 바람이 끼쳤다. 입구와 안을 질척하게 적신 기름이 속으로 더 흘러들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무릎 사이로 그를 올려다봤다. 기름을 부어도 그의 것은 늘 품기 버거웠다. 창부라는 거짓말을 가려 주었던, 누구나 섹스에 서툴도록 만드는 큰 성기였다. 그래서 나 역시 아직도 삽입하는 순간엔 처음 하는 사람처럼 낑낑거릴 수밖에 없었다.
뭉툭한 귀두가 파묻혔다.
“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랭던 경은 내 손을 치워 내고 대신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 입술을 짓눌렀다. 내 교성까지 통제하려는 열망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내 신음에 관한 지배권을 넘겨주고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흡, 읏….”
굵은 기둥이 입구를 팽팽하게 벌렸다. 손가락이 벌려 놓은 내부는 성기가 들어가기엔 한없이 비좁았다. 힘을 풀려 애썼지만 처음이 어려운 것은 일 년이 다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랭던 경은 요즘 내게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가르쳤지만, 그 크기 때문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푹, 천천히 들어온 성기가 거의 끝까지 들어온 순간, 내벽이 진동하듯 벌름거리더니 바짝 선 내 성기에서 정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반쯤 접힌 상태였으므로 흰 액체는 내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 쪽으로 쏟아졌다.
“아아… 아, 흐읍….”
눈앞에서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사정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그가 보지 못하게 엉덩이를 비틀어 벗어나려 했으나, 안에 깊이 박혀 있는 페니스가 마치 몸을 꿴 듯하여 불가능했다. 나는 결국 스스로 엉덩이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랭던 경은 박아 넣은 페니스를 흔들며 정액이 흐르는 성기와 내 표정을 마음껏 감상했다. 쾌감과 수치에 눈물이 관자놀이를 흠뻑 적실 정도로 흘렀다. 내 신음을 억지로 가두고 있는 그의 손바닥 역시 침으로 질척해졌다.
“흐읏, 으으응….”
“넣자마자 싸다니. 아직 배 속은 두들겨 주지도 않았는데.”
랭던 경은 여유롭게 웃으며 내 입을 막지 않은 다른 손으로 드러난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뜨끔할 정도로 아프게 맞았는데 내벽이 요동쳐 숨이 가빴다. 벌렁대는 밑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정액만 길게 늘어질 뿐이었다.
랭던 경은 몸을 숙여 자신의 손등과 그 주변에 떨어진 내 액체를 핥았다. 나는 놀라서 그를 힘껏 밀어 내고 발을 버둥거렸다.
“하, 하지 마세요, 아… 흐윽…. 제발 머, 먹지 마세요, 저하….”
입을 막고 있는 넓은 손바닥 안에서 내가 내뱉는 단어들이 꿀벌들의 날갯짓처럼 웅웅거렸다. 랭던 경은 뭉개진 단어들을 용케 알아들었다.
“내가 이걸 먹고 키스해야 로엘 씨도 자신의 음탕한 맛을 알게 되겠지.”
랭던 경은 내 몸의 일부처럼 박혀 있는 자신의 것을 서서히 움직이며 얕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르는 눈두덩도, 굵은 기둥이 비비는 아래쪽도 서서히 뜨거워졌다. 나는 그와의 섹스에 익숙하여 이 정도의 수치로는 치솟는 성감을 막을 길이 없었다.
랭던 경의 육체는 언제나 내게 불꽃이었다. 냉담한 시선 속에서 자라며 차갑고 메마르게 변한 몸에 늘 뜨거운 불을 지폈다.
사정하여 힘이 가신 내 것은 그가 안쪽을 박을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쾌감은 이어졌다. 귀두가 내벽을 짓이기면 손끝과 발끝뿐만이 아니라 성기 끝에도 열기가 퍼져 나갔다.
나는 할 말이 있어 입술 사이로 혀를 빼물고 내 입을 막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비볐다. 랭던 경이 눈치채고 손을 잠시 떼어 주어 신음을 참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흐윽, 흣… 아, 아프, 흣…. 큽니다, 저하. 아….”
“조금 더 풀고 박아 줄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랭던 경이 허리 짓을 늦추고 부드럽게 안을 비벼 주었다. 불편한 마차에서 입을 막힌 채 박히니 온몸이 그의 무게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체중을 싣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프게 느껴져도 내가 기쁘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이 무게였다.
랭던 경은 내 정액을 마셨던 혀를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나는 수치심에 다시 몸을 떨며 그의 혀를 빨았다. 랭던 경이 그 맛을 더는 느끼지 못하도록 얼른 지워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입 안 가득 들어찬 두툼한 혀를 쭙, 쭙 소리 나게 빨고 침까지 모조리 마셨다. 그래도 그 맛이 다 지워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으읏, 흑, 아… 저하, 치, 침을, 뱉어 주… 세요, 흣….”
“어디에.”
“제 이, 입에….”
나는 입술을 열고 두 손으로는 스스로 오금을 잡아 다리를 더 옆으로 벌렸다. 랭던 경과 가끔 하는 행위였다. 다른 이들도 이런 방식의 접촉을 할 때가 있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침을 흘려 주고 내가 삼키는 모습을 달콤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내가 다시 매달려 입술과 혀를 더 빨아 내어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나서야 그가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정말 예쁘고 음란해 미치겠군…. 그대는 알까? 응? 하… 내게 박힐 때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 저하, 흐윽… 으응….”
“밑도 한없이 달콤하여 좆을 빼는 순간이 싫어요. 계속 처박고 있는 중인데도 다시 넣으면 기억보다 더 달아. 온몸이 설탕처럼 달고 음탕해서는… 하….”
랭던 경은 다시 내 입술을 막고, 힘을 주어 위에서 아래로 성기를 찍어 내렸다. 랭던 경이 입술을 막아 준 것은 다행스럽고 현명한 일이었다.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으니까.
나는 입을 틀어막은 랭던 경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신음했다. 두 다리는 랭던 경의 어깨에 얹혔다. 거칠게 파고드는 성기가 내벽을 짓이길 때마다 발가락 사이가 벌어졌다. 내 신음이 그의 손바닥에 셀 수 없이 부딪치고 갇힌 뒤에야 그가 사정했다.
그러나 그는 성기를 빼지 않고 내 몸을 돌려 엎드리게 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마차 문과 의자에 머리를 찧으며 박힐 때도 랭던 경의 손은 충실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뒤에서 들어온 성기가 안쪽을 문지르는 감각에 나는 다른 아픔은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 부딪치자 랭던 경이 결국 내 등 위로 엎드리며 남은 손으로 흔들리는 머리를 감싸 잡았다.
“후으… 당신이 아프면 안 되지.”
“흣, 아, 읏… 거, 거기 그만… 흐읏… 힉.”
손바닥 안에서 웅얼대며 맴도는 단어들이 랭던 경에겐 제대로 닿지 않는 듯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감당하지 못하고 뻐근한 가슴을 억눌렀다. 그는 이성을 놓은 것처럼 내 안을 짓이겼다.
가끔 손이 입술을 놔 주었지만 나는 금방 다시 숨이 찼고, 엉덩이는 쾌감을 버티지 못하고 경련했다. 그가 신음을 붙들어 주지 않았으면 밖을 오가는 행인들이 다 알도록 신음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으응, 힉… 흣, 윽….”
그가 입술을 세게 틀어막으니 숨이 차서 머리가 몽롱해질 때도 있었다. 내가 손을 벗겨 내려 시도하면 랭던 경은 숨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가락을 살짝 열어 주었다.
나는 그 틈으로 공기를 마셨지만 가쁜 숨이 가라앉으면 스스로 그의 손가락을 모아 입술에 붙였다. 신음을 밖에 새어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가쁜 숨이 목구멍 안을 거칠게 때리는 것이 힘겨워 눈가에 눈물이 고였으나 신음을 지켜 내는 게 내가 간신히 쥐고 있는 마지막 체면이었다.
“흑, 으응… 힉….”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애쓰느라 자꾸 허리를 동그라니 쳐들었다. 어설픈 자세였다.
계속 허리를 아래로 누르던 랭던 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체중을 실으며 나를 의자 바닥에 붙였다. 나는 팬케이크 반죽처럼 힘없이 납작해졌다. 의자가 좁아 다리를 펼 수도 없어, 무릎은 애매하게 뒤로 접혔다.
랭던 경은 그대로 나를 포박했다. 그의 두 손은 머리와 입술을 감싸고 있었고, 그의 체중에 눌린 팔다리는 자유를 잃었다. 그래서 그가 내 엉덩이 골 사이에 굵은 성기를 쑤셔 박을 때마다 의자에 성기가 문질려 자극이 늘어났다.
“흐읏, 아, 안… 아, 힉….”
“하….”
거듭되는 허리 짓에 사정감이 밀려왔다. 참으려 했지만 성기에선 결국 정액이 흘렀다. 내벽이 부들부들 떨려 알아챘는지 그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아래로 넣어 축축한 내 성기를 쥐었다. 나는 볼품 없이 떨면서 몸을 웅크리려 애썼지만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손으로 막은 탓에 입 밖으로 흐르지 못한 신음이 목구멍을 턱턱 쳐올렸다. 졸도할 것 같았지만 손바닥을 물릴 순 없었다.
“로엘, 입을 막아 주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이번엔 의자에 싸질렀군. 내 손바닥에 한 것도 아니고 이건 너무 칠칠찮은데.”
“…흡, 으응… 아….”
“우느라 대답도 못 하는군. 아래 입도 자지를 쭉쭉 빠느라 정신이 없고… 후으…. 예의를 차리던 당신은 어디 갔어요?”
“하아… 힉, 읏….”
랭던 경은 대답을 요구하듯 손바닥을 떼어 냈지만, 나는 숨을 쉬기 바빠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제대로 정액을 처리하지 못하고 의자에 싸 버린 수치에 온몸이 언덕 위의 들풀처럼 초라하게 흔들렸다. 몸집보다 큰 바람이 불면 작은 이파리는 초록빛을 부대끼며 울기 마련이었다.
“흐윽, 흣… 래, 랭던 경….”
“테런스라고 불러.”
랭던 경은 짓이겨진 내 발음을 알아듣고 목덜미를 깨물며 속삭였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뺨이 뜨거워졌다. 말을 하려 입술을 열었지만 그의 손에 틀어막혔던 입 속에선 진정되지 못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힉, 흡….”
몇 번이나 공기를 더 들이마신 뒤에야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그에게 애원했다.
“테런스… 읏…. 더, 못 하겠어요…. 으응… 신음을 참기도, 힉, 숨을 쉬기도… 어려운걸요.”
“나는 아직 싸지 않았어요, 로엘. 흣… 숨을 쉬지 못해 버둥거리는 그대가 너무 꼴려 계속 박고 싶었거든.”
“그러지 말고, 아… 부디, 흣, 얼른, 해 주세요…. 곧, 하실 것 같나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테, 테런스. 흐읏… 이, 이 상태로는 내릴 수 없잖아요.”
나는 내벽을 팽팽하게 벌린 성기의 존재가 느껴질 때마다 말을 바로 잇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내 숨소리 너머, 흔들리는 마차의 공기가 소란했다.
나는 뒤늦게야 말 편자가 도시의 부드러운 흙이 아니라 거친 흙과 돌멩이를 짓이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속도를 높여 달리고 있다는 것도.
이미 숲이었다.
의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성기를 받고, 그가 안쪽을 쑤셔 줄 때마다 숨을 꺽꺽대며 신음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숲이라는 건 우리가 곧 저택에 도착한다는 뜻이었다. 조급함이 목구멍을 묵직하게 치받았다.
“저하, 흣, 얼른.”
넓은 손바닥이 재촉하는 내 등을 감싸 안자마자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성기가 삽입된 채로 그의 품에 올라앉았다. 붉게 물든 눈꺼풀을 들어 그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급하면 로엘 씨가 사정시켜 봐요.”
“저, 저는 위에서 하는 것은 잘… 아시잖아요, 테런스.”
얼떨떨한 눈빛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섹스할 때의 나는 평소의 절반도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툴게 해도 상관없으니 편히 움직여 봐요. 도와줄 테니까. 자꾸 해 버릇해야 실력이 늘지.”
“하지만….”
“로엘.”
랭던 경은 내 말을 부드러이 끊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달콤한 시선을 건넸다. 하늘을 물들였던 선홍빛 노을이 어느새 보라색으로 바뀌었는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눈 속에 오로라가 피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지금 밑으로 잔뜩 마시고 싶을 텐데. 좆에 박혀 싸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는 거 압니다. 갈증을 느끼는 아래 입이 자꾸 움찔대는군.”
랭던 경은 페니스를 품은 채 앉아 있는 내 둔부를 움켜잡고 성기로 이곳저곳을 찔러 보더니 한쪽 방향으로 귀두를 거칠게 쑤셔 박았다.
“아, 으으응….”
나를 녹아내리게 하는 지점이었다. 나는 입을 힘없이 벌리고 고개를 젖혔다. 팔다리가 저릿저릿 울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끼었다.
“흔들어 봐요.”
나는 턱을 떨어트린 채 엉덩이를 앞뒤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굵은 귀두가 안쪽을 여기저기 치받았다. 반들반들하게 젖은 눈동자에 그의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해서 정액을 마실 수 있겠어? 응?”
그는 내 셔츠를 걷어 올리고 가슴께를 혀로 핥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는데 랭던 경이 손끝으로 유두를 찰싹 때렸다. 그는 도망가려는 내 등을 붙잡아 와 젖꼭지를 입 속 가득 물었다. 단단한 치아가 뾰족한 끝을 비틀고 당기며 괴롭혔다. 거친 자극이 달아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붙들어야 했다.
“아! 흐읏, 으응….”
“좋아요? 응? 하아… 젖꼭지를 깨물어 주니 아래 입이 좋아 죽는군. 이렇게 음란하게 좆을 빨아 대니 내가 당신 거짓말에 속았겠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유두를 아프게 깨물었다. 나는 놀라 배운 대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 네, 그, 그렇습… 으읏… 아! 으, 음란, 하여….”
랭던 경이 젖꼭지를 물고 끊어질 듯 잡아당겼다. 나는 허리를 움직이다 말고 아래를 조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창피하게도 그가 자극할수록 유두가 더욱 통통하게 솟았다.
내가 제대로 못 움직이자 결국 그가 직접 밑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랭던 경은 내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혀를 잡아당기고 점막을 문지르며 농락하다가, 신음을 막아 주려는 듯 깊이 키스했다. 커다란 양손이 내 허리를 주저앉히며 성기로 안을 찌를 때마다 배가 불룩 솟는 것만 같았다.
그는 혀를 먹을 듯이 가져가 빨고 안을 쑤시며 마침내 깊숙한 데 페니스를 처박았다. 안쪽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읏, 아… 아….”
랭던 경이 내 혀를 가득 빨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신음도 제대로 못 지르고 다시 사정했다. 막아 보려 했지만 그의 조끼 위로 쏟아지는 정액을 멈출 수 없었다.
랭던 경은 정액을 나의 성감대에 부어 주고, 젖은 지점을 귀두로 뭉근히 눌러 주었다. 자꾸만 튀어 오르려는 허리를 꽉 잡아 거대한 성기로 안을 빈틈 없이 눌렀다. 그는 사정을 마치고도 마차에서 내려야 할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버티다가 간신히 늘어진 성기를 빼냈다.
마차는 저택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보랏빛으로 변한 노을은 빠르게 저물어 하늘은 다행히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나는 랭던 경이 바지 단추를 여며 주는 동안 그가 부어 준 정액이 흐르지 않도록 덜덜 떨리는 아래를 다잡아 모았다. 그러나 밑을 다물고 있기가 힘들었다. 묵직한 성기를 물고 있느라 주름이 내내 가득 펴져 있던 입구는 제멋대로 발씬거렸다. 연이은 쾌감으로 엉망이 된 내벽 역시 성기가 빠져나간 후에도 벌렁대고 움찔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랭던 경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로 젖은 얼굴을 훔쳐 주고 내가 흘려 댄 정액들을 닦아 냈다.
“로엘, 괜찮아요?”
“저하, 고용인들을 물려 주세요. 이, 이대로는….”
“알겠어요. 모두 들여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입술을 여기저기 누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를 달랬다. 나는 그의 위로에 겁이 한결 가라앉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삼키며 진심 어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다, 다시는 이런 데서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도 기분 좋지 않았어요? 그대가 문에 부딪쳐 아프지 않도록 머리도 감싸 주고, 신음을 지르게 만드는 장난을 치지도 않았잖아요. 응?”
“쾌감이야 느꼈고 다정하게 대해 주신 것도 좋았지만, 자, 자세가 불편하고 입이 막혀 숨을 쉬지 못하니 괴로웠습니다. 밖에서 이런 몰골이 된 것도요. 흣… 지금도 저하께서 손바닥으로 누르신 입 주변과, 좁은 데서 웅크리고 체중을 받아 낸 온몸이 욱신거리는걸요.”
“로엘, 왜 섹스할 때는 당신의 긍정적인 면을 잃어버려요? 가끔은 이런 변주가 섹스에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당신이 자신의 생각보다 음란한 취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성(性)과 관련된 일이라도 말이오.”
“저는 별로 깨닫고 싶지 않은걸요. 너, 너무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랭던 경은 몹시 아쉬운 눈빛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본인의 문란한 성벽에 대한 끈질긴 집념으로, 간신히 옷을 추스른 내 목덜미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 가며 달콤한 구슬림을 이어 나갔다.
“그러지 말고 귀족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금 더 육체에 솔직해지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한 건 제가 아니라 테런스 당신이에요. 저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명망 있는 학자들에게 배우셨을 터인데, 어떻게 교육의 영향에서 이토록 멀리 벗어나셨죠?”
“교육도 어쩌질 못하는 본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특히 로엘 씨는 나를 무척 자극하니 말이오.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안을 찔러 올릴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도무지 지겨울 틈이 없어요.”
“저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눈물 지으며 답했다. 그러나 랭던 경은 “그래도 오늘 로엘 씨가 오페라 극장 뒤에서 자지를 빨며 헐떡이는 모습을 보니, 당신의 본능도 나와 색채가 비슷할지 모르겠다는 짐작이 들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말이에요.”라고 고집스레 속삭였다.
나는 몹시 부끄러워 뺨이 따끈해졌다. 해가 진 줄 알았더니, 내 뺨 위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는 중이었나 보다.
말들은 긴 울음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멈췄다. 랭던 경은 먼저 내려 마중 나온 고용인들을 물리고 마차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넓은 손바닥을 붙들고 내리는데 피부의 부드러움과 힘 있는 손가락의 미묘한 조화마저 예민해진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가빠 오는 숨을 뱉으며 그에게 안기듯 마차에서 내렸다. 랭던 경은 다시 실크해트를 내 머리에 씌워 얼굴을 가리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누가 볼까 혼자 걸으려 그의 손을 놓았으나 랭던 경은 손바닥을 내 허리에 감으며 나를 자기 쪽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피부 위를 누르는 손가락의 다섯 지점이 내 밑을 열어 버릴 듯하여 그를 슬쩍 밀어 냈으나 넓은 어깨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안에서 내 것이 출렁거리고 있어요? 좁은 틈으로 흘러내리려 하오?”
“그런 것은, 으응… 제발 묻지 마십시오, 랭던 경.”
“내 좆으로 긁어서 빼내 줄 테니 조금만 참아요.”
“이미, 충분히 하셨으면서….”
나는 그의 기력에 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마차에서 격정적인 정사를 치른 지금은 더더욱 곤란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랭던 경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러 번 절정에 달한 건 로엘 씨잖아요. 나는 조금 더 당신을 맛보고 싶어요. 응? 그대도 내 앞에서 엉덩이를 벌리고 싸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단 내가 좆으로 긁어 주는 편이 좋지 않아요?”
“저, 저는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곤란한걸. 내가 오페라보다 더 관람하길 좋아하는 공연인데.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왜 굳이 매번 그대더러 엉덩이를 내보이며 싸라고 하겠어.”
조금 전 큰 소리로 말대꾸를 하다가 아래쪽에 힘이 풀려 버릴 뻔했으므로 나는 이번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내 상태를 짐작한 듯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더 당겨 안고, 계단을 오르는 내내 걸음까지 멈춰 가며 입술에 키스하기를 반복했다.
그 또한 자극이라 그가 물렁한 혀끝을 빨아 줄 때마다, 내 안을 파고들 때마다, 내벽을 축축하게 적시며 밑으로 흘러내린 정액이 다물린 입구에 몰려 출렁거렸다.
층계참을 지난 후, 내가 발을 더 빨리 움직이려 하자 랭던 경이 앞서 올라가는 나를 돌려세우며 혀를 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목구멍을 막아 버릴 것처럼 두툼한 혀가 들어오고 랭던 경이 엉덩이를 움켜쥐는 순간 아래쪽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오므리고 있던 주름이 펴지며 랭던 경이 한가득 부어 놓은 미끈한 정액이 흘러나왔다. 야릇한 감각과 수치심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높이가 다른 계단을 각자 디디고 있는 두 발이 곧 무너질 듯 아슬아슬 떨렸다.
“아, 흐읏….”
신음이 새어 나오기 무섭게 그가 내 아랫입술을 치아로 지근지근 누르며 물었다.
“밑으로 질질 싸고 있어?”
랭던 경은 얄미울 정도로 내 상태를 바로 눈치챘다.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벌어진 입 속을 혀끝으로 느릿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위쪽 입에 혀를 물려 줬을 뿐인데, 아래 입이 자지가 들어올 거라 생각했나 보군. 먹여 준 간식을 뱉어 내며 입을 벌린 걸 보면.”
“…으응… 흣….”
“안고 올라가 줄까?”
“아… 네에… 래, 랭던 경….”
랭던 경은 그보다 두 계단 위에 서 있던 나를 가뿐히 안아 들고 성큼성큼 2층으로 올랐다. 나는 떨리는 두 다리를 그에게 감고 정액이 더 흐르지 않도록 밑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다리를 벌리고 있으니 더욱 여의치 않았다. 아래를 애써 오므렸으나 정액이 계속 울컥울컥 흐르며 엉덩이 골과 허벅지를 적셨다.
침실은 가스등의 은은한 불빛과 어슴푸레한 밤을 맞은 노르크의 달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침대는 창가와 가까웠다.
그는 높은 침대 위에 나를 조심히 눕히고 바지 단추를 풀어 주며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나는 흐르려는 정액을 붙드는 것이 힘겨워 제대로 키스도 하지 못하고 칠칠찮게 입만 벌린 상태였다.
섹스할 때의 그는 언제나 나보다 단정한 얼굴이었고, 겉모습은 심지어 금욕적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입술이 겹치면 그의 혀가 안에서 벌이는 일은 나밖에 알지 못했으니까. 바지를 벗기면서 두툼한 혀를 내 입 속에 넣었다 빼길 반복하는 행위가 그의 허리 짓을 비유하고 있음을 나는 이제 모르지 않았다.
“으응, 읏….”
랭던 경은 내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긴 후 침대 밖에 서서 내 두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는 몹시 놀라 정돈된 이불을 움켜쥐며 새된 소리를 냈다. 그는 내 발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 엉덩이 골을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쉬었다.
“아래 입이 내 정액으로 하얗게 젖었군. 반들반들 음란하게 젖어 움찔대는 모습이… 하…. 그런데 잠깐을 못 참고 이렇게 질질 흘리고 말았으니 좆으로 남은 정액을 빼내 주긴 어렵겠는데.”
나는 마차에서부터 침실까지 정액을 머금고 버티느라 기력을 소진한 탓에, 그의 말에 반박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마음을 바꾸려 더듬더듬 잘못을 빌었다.
“흡, 제, 제대로 담고 있질 모, 못했습니다.”
“좆으로 긁어서 빼 주는 건 취소요. 대신 안에 남은 걸 스스로 내보내 봐요. 그럼 좆을 먹여 주지. 혹시 손을 넣어 긁었을 때 남아 있으면 다시 바짝 선 것은 내 앞에서 자위로 해결해요.”
“저하…. 제발… 자, 잘못했습니다.”
“어서.”
랭던 경의 단호한 목소리에 눈꼬리 끝에 물방울이 영글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양쪽 발목을 다 움켜쥐고 달빛과 가스등 빛에 드러난 내 밀부를 진득이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덜덜 떨리는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넓적한 손바닥이 엉덩이를 철썩, 소리 나게 내리쳐 살이 다 짓이겨지는 듯 아팠다.
“아! 흐읍, 흐윽….”
나는 엉덩이가 잘못될 것 같아 손바닥으로 맞는 동안 허리를 뒤틀었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밑은 벌렁거리며 속에 남은 정액을 쏟아 냈다. 엉덩이를 내리치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정액으로 젖어 빠끔대는 밑을 적나라하게 탐색했다.
“아, 아픕니다. 저하… 소, 손바닥이… 아!”
엉덩이는 따끔하다 못해 피부가 퉁퉁하게 부푸는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이 모질게 내려치는 한쪽만 커다래진 것 같아 서러운 눈물을 쏟았지만 그보다 정액을 빼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랭던 경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침대에서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폭군 같은 면모가 있었다. 내 몸을 아프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때로 아슬아슬하게 통제의 날을 세울 때가 그랬다.
숨을 헐떡이며 엉덩이에 힘을 풀자, 굵은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었다.
“…아으응, 흐읏….”
“잘 비워 냈군.”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자신의 것을 내 안으로 한 번에 밀어 넣었다. 나는 한동안 밑을 계속 오므리고 있었으므로 파고드는 페니스가 버거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랭던 경은 아랑곳 않고 내 발목을 더 위로 잡아 든 후 위에서 아래로 박아 넣듯 성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묵직하게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는 남근의 감각에 속절없이 신음을 쏟으며 손가락으로 이불을 더 틀어쥐었다.
뭉툭한 귀두가 평소에 잘 닿지 않는 지점을 찧어 댔다. 자세가 낯설었던 탓이다. 그는 침대 밖에 서 있고, 나는 위로 발목이 붙들린 채였으니까.
“힉, 흐읏, 아… 저, 저하, 흣….”
성기가 안을 찢어 놓을 듯 박으며 거칠게 파고들수록 정액으로 범벅이 된 엉덩이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아예 내 무릎을 모아 두 손으로 끌어안고 힘있게 밑으로 성기를 쑤셨다. 쾌락이 온몸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밀려왔다.
나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에 경악하여 젖히고 있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젖은 눈으로 랭던 경을 올려다봤으나 이성을 잃다시피 한 그는 내 다리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허리 짓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쾌락에 저며진 엉덩이를 비틀면서, 무릎을 단단히 안은 그의 손가락을 떼어 내려 버둥거렸다.
“아, 으응… 그, 그만, 테런스… 아… 이, 이상… 해요… 아! 흐윽….”
“왜. 하아… 앞을 바짝 세우고 있으면서.”
그는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는 그 때문에, 깊숙한 곳을 자꾸 이상한 각도로 내리찍는 성기 때문에 온몸이 이상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든 채 힘이 빠진 손가락으로 그를 떼어 내려 애썼다.
“느, 느낌이, 흣… 정액이… 으응… 아, 아니라… 아! 흣… 놔, 놔 주… 세요, 힉….”
“…물을 지릴 것 같아?”
이번에도 그가 너무 정확히 내 상태를 알아챘다. 수치스러워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순간 녹색 눈동자 안에 간신히 남아 있던 이성이 끊긴 듯 그의 눈빛이 짐승처럼 돌변했다. 나는 그 눈빛을 보고 무척 놀랐으나, 다행히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무릎 뒤를 잡아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랭던 경이 당연히 나를 욕실로 데려가려는 줄 알았다. 몹시 안심이 되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목을 답싹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여전히 페니스가 녹진해진 안쪽을 들이받고 있는데도, 짐승같이 거칠어진 숨소리가 내 혀를 가져가 빨고 내 귓속을 혀끝으로 난잡히 쑤시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런 천연한 생각을 할 만큼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흐응, 흣… 아… 읏….”
랭던 경은 요의를 느끼며 품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를 돌려 안더니 걸음을 멈췄다. 안쪽을 팽팽하게 채운 성기가 내벽을 문지르며 돌아가자 요의는 더 강하게 솟구쳤다.
그러나 몸을 돌린 내가 마주한 건 욕실 문이 아니라 침실 입구에 새로 들인 커다란 거울 앞이었다. 가로 폭이 족히 다섯 걸음은 되었고 높이도 같았으므로 성기가 박힌 채 안겨 있는 나와, 내 뒤에서 목을 핥는 랭던 경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나를 들고 있는 그의 탄탄한 육체.
“저, 저하… 어째서… 흣….”
“당신이 지리는 모습을 다양한 각도로 봐 두어야지.”
랭던 경은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는 나를 움직여 안을 제대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 무릎 밑을 잡은 손은 거침없이 나를 흔들었고, 녹색의 시선은 거울을 따갑도록 훑었다.
나는 몰아치는 성감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어깨에 뒷머리를 기댔다. 뜨거운 혀가 눈물이 흐르는 내 관자놀이를 핥았다.
“으응, 흣… 아, 안 돼… 아, 안 됩…니다… 아! 흐윽, 힉… 모, 못 참습니다, 저하… 응….”
“괜찮으니까, 지려요. 내가 당신을 처음 안았을 때, 흣, 물을 싸게 될 거라 했었지?”
“저하, 힉… 으으응… 부, 부디… 흣… 아….”
랭던 경은 귀두가 빠져나가도록 나를 들어 올렸다가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점에 귀두를 쑤셔 박았다. 나는 더 이상 힘을 줄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한계였다.
결국 둔부의 힘이 흐물하게 풀리며 성기 끝에서 말간 물이 새어 나왔다.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실수한 물이 튀며 거울이 젖는 것이 보였다.
“흣, 아, 안… 됩니다… 아! 흐응… 읏, 아!”
“하, 박히면서 물을 질질 싸니까 좋아? 응?”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애원했다.
“…저하, 보, 보시면, 흐읏… 아, 안 됩니다, 으응, 힉.”
“로엘. 잘 모르나 본데, 그대의 음란한 모습은 전부 내 것이오.”
랭던 경은 시린 음성으로 속삭이더니 나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단단한 손가락이 뒤에서 양쪽 팔꿈치를 잡아 내가 쓰러지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나는 후들대는 다리를 억지로 펴며 거울 속의 나를 확인했다. 성기 끝에서 물이 다시 주루룩, 흘러내리는 장면을 보자 신음 틈으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요의를 못 이기고 실수하기 시작했지만 랭던 경은 잔인하게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묵직하게 안을 쳐올렸다. 이미 엉망이 된 내벽은 약점을 파고드는 페니스 앞에 허물어졌다.
내 몸이 무력하게 흔들리자 흐르는 물은 더욱 요란해져 내 허벅지 안쪽과 그의 다리를 적시고, 거울에도 튀어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랭던 경이 안을 쑤실 때마다 서로의 허벅지가 젖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퍽, 퍽, 피부가 질척하게 맞는 소리 사이로, 물을 싸는 소리가 음란했다.
“으응, 힉… 아! 아!”
“하, 아래 입이 더 먹여 달라고 너무 조르는군.”
랭던 경이 그 말을 끝으로 성감대를 파고들며 사정하는 순간, 젖은 내벽이 벌렁대며 그가 부어 주는 정액을 마셨다. 그의 정액이 쏟아지자 극도로 흥분한 안쪽이 잔뜩 움직이며 아직 단단한 페니스를 쥐어짜듯 빨았다. 그 순간 엉덩이에 소란한 경련이 일어났다.
“아… 아….”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입이 벌어지고 침이 늘어졌다. 분명 아까 물을 잔뜩 내보냈건만, 갑작스레 더 극심한 요의가 밀려오더니 막을 새도 없이 앞쪽에서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으로 흥건히 쏟아져 내 발등까지 튀었다. 내 앞에서 길게 늘어지는 맑은 물줄기가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쳤고, 그의 시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 가는 중이었다.
“으윽, 흐윽… 흑….”
“물이 많군.”
나는 수치심을 못 견디고 고개를 떨구며 결국 어린애처럼 엉엉 눈물을 터트렸다. 그가 보는 앞에서 요의를 참지 못하고 실수하다니…. 박히면서 물을 여기저기 떨구고 바닥과 거울을 젖게 만들다니…. 랭던 경의 거친 허리 짓에 그의 다리마저 내 실수로 온통 질척해진 상태였다.
랭던 경은 내 어깨에 턱 끝을 얹고 거친 숨을 내리 쉬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숨결은 증기처럼 뜨거웠다. 그 온도를 증명하듯,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이 내 것처럼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탄탄한 가슴 근육이 땀으로 미끈대는 내 등을 꾹 눌렀다.
눈을 질끈 감자 우박처럼 굵은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나의 말간 실수와 뒤섞였다.
모두 늦었다.
나는 뺨 위로 랭던 경의 숨결보다 훨씬 뜨거운 눈물 길을 냈다. 눈물 길은 깊고 흥건했다.
랭던 경은 고개를 움직여 턱 끝에 모인 내 눈물을 핥으며 물었다.
“하, 기분 좋았어요?”
“…저하… 흐윽…. 지, 지금까지 모든 수, 수치를 다 겪은 줄 알았는데… 흡….”
“물을 지린 게 그렇게까지 모욕이에요? 당신도 기분 좋았을 텐데.”
모르는 채 웃으며 물어보는 랭던 경의 연기력이 대단했다. 이곳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가 아니라 에메랄드 저택의 침실이라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단단한 팔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뒤돌아선 나를 꼭 끌어안았다. 섬려한 입술이 통통하게 부푼 눈꺼풀과 속눈썹에 키스했다. 나와 다르게 기분 좋은 흥분만 남은, 단정하게도 달뜬 랭던 경의 얼굴빛을 보자 서러움에 목구멍이 왈칵 울렁거렸다.
“요, 요의를 참지 못한 것이 어떻게 기분 좋은 일인가요? 저하께서는 이토록, 단정하신데… 제 몰골은… 실수로 온통 젖어….”
“요의?”
“요의를 못 참아… 어린 아이도 아니고 바닥에…. 저를, 욕실로… 데려가셨어야죠.”
내가 슬프게 중얼대자 랭던 경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꼭 저택의 개들에게 하듯 엉망이 된 내 금색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훑었다.
“우, 웃지 마십, 시오….”
나는 힘주어 소리쳤으나 흘러나온 목소리는 의도와 달리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랭던 경은 한참이나 키득키득 웃고 난 뒤에야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달랬다.
“로엘, 이건 요의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그 감각과 이 감각이 다르지 않았어요? 사정을 많이 한 상태에서 너무 흥분하여 그런 거예요.”
그의 말은 슬픔에 잠긴 나를 구원할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체면을 잃은 속상함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절망하려 했건만. 다감한 위로에 눈동자를 흔들던 지진이 살짝 멎었다.
나는 침을 꼴깍, 넘기고 입술을 뗐다. 눈물의 후유증으로 간간이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요의, 가, 힉,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래서 내내 도망치려고 아등바등이었군. 당신이 거짓말만 하지 않았어도 처음일 때 이리저리 놀려 먹으며 더 괴롭힐 수 있었는데. 그때는 당신 말에 금세 약해지지 않았으니 말이에요. 온갖 짓을… 하, 참으로 아까운 일이군.”
“대답을 해 주세요, 저하. 부디 저속한 아쉬움을 토로하지 마시구요.”
답답함에 서둘러 재촉하자 그의 멋진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평상시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면 도프 집사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기 일쑤였다.
“저속하다니. 당신 생각대로라면 박아 준다고 요의를 못 참고 줄줄 싼 그대는 고상하오?”
“저하… 분명 그런 것이, 아,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설마 저를 달래려 거짓을 말씀하신 건가요?”
“거짓말은 그대의 전문이지, 내 전문은 아닙니다. 걱정 말아요. 너무 흥분해서 그런 거예요.”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실수였다면 내가 그대를 놀리지 않고 넘어가겠어요?”
수치심에 들썩이던 가슴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랭던 경이라면 내게 더 창피를 안길 수 있는 일을 거짓말까지 하며 가려 줄 리 없었다. 내 부끄러움은 그의 기쁨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간신히 안도감이 피어 올랐다. 나는 어렵게 수치심을 가라앉히며 여전히 떨리는 입술을 뗐다.
“참으로 다, 다행입니다. 저는 창피하여 혀를 깨물 뻔하였습니다. 여전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런 실수가 아닌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러니 내게 혹여 화내지는 말아요. 아무렴, 요의면 내가 그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랬겠어요?”
“제가 저하께 화를 내다뇨. 그거야말로 저하의 전문인 것을요.”
내가 되받아치자 랭던 경은 헛기침을 하였으나 조금 전의 만족스러운 섹스와 나의 흐트러진 모습이 좋았는지 금세 내게 다정한 키스를 해 주었다.
우리는 종종 툴툴대며 언쟁했으나 서로의 마음은 늘 여름의 시냇물처럼 얼지 않고 흘렀다.
랭던 경과 대형 욕조에서 같이 씻고 나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로 올랐다. 계속된 긴장에 온몸이 노곤했다.
랭던 경은 손바닥으로 맞아 붉게 부푼 피부에 손수 보드라운 크림을 발라 주며, 엉덩이의 봉긋한 부분에 여러 번 입술을 눌렀다. 나는 베개 위에 엎드려 그의 다정함을 만끽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굵은 손목을 부드러이 잡았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하셔도 돼요. 충분한걸요.”
“아프지는 않아요?”
“이제는 많이 적응되었어요.”
“당신은 형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으니 혹시 내 성벽이 깊은 상처를 건드릴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섹스가 끝난 후에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사랑스러우신 말씀이세요.”
나는 푹신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반듯한 이마를 덮은 흑발을 쓰다듬다가 부드러운 뺨 위에 키스했다. 그의 체취가 코끝에 닿고, 눈꺼풀 위엔 더욱 무거운 잠이 얹혔다.
“오랜만에 당신에게 일찍 졸음이 찾아온 것 같네요. 어서 잠을 청해 봐요, 로엘.”
랭던 경은 종을 들어 하녀를 부르지 않고 직접 암막 커튼을 닫기 위해 일어났다. 밀려든 잠이 종소리에 놀라 도망갈까 배려한 것이다.
암막 커튼이 완전히 닫혔다. 자정에도 푸르스름한 빛깔이 남아 있던 하늘이란 무대의 막이 비로소 내렸다.
랭던 경이 돌아와 누운 침대 옆쪽이 내려갔다. 졸음에 무뎌진 손끝으로 그를 찾으니 랭던 경이 구름 같은 품 안으로 나를 당겨 온몸을 감싸 안았다.
꼭 겨울처럼 잠이 쏟아졌다. 랭던 경이 내게 손을 두르자 백야가 물러났다. 그 팔의 무게가 산사태처럼 내 몸을 내리누르고, 나를 평화롭고 안온한 밤하늘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