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한여름
백야. 지평선 아래로 해가 잠시 숨어드는 밤이면 하늘은 새벽처럼 어스름한 빛을 띠었다.
희미한 어둠은 광활한 하늘 위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새벽 4시면 태양은 황금빛으로 타올랐고, 밤 10시가 되어야 하늘을 석양으로 물들였다. 3개월간 지속되는 찬연한 하늘은 많은 사람을 불면증에 시달리게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녀장의 지시로 사람들이 침실에 두꺼운 암막 커튼을 달았다. 그러나 햇빛이 실내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창문을 꼼꼼히 덮어도 예민한 몸은 두꺼운 천 자락 너머 떠오른 태양의 존재를 눈치챘다. 천으로 막지 못한 열기를 감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빛을 알아채는 인간의 본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초여름부터 밤마다 서너 시간 남짓 겨우 잠이 들었다. 그사이 몇 번이나 깨고 쉼 없이 꿈을 꾸고 나면 낮에도 머릿속이 꿈결처럼 몽롱했다. 몸이 한계까지 내몰린 후에야 잠시 푹 잘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다. 그 잠깐의 깊고 달콤한 잠이 내 나약한 육신을 살게 했다.
일요일 아침,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기 전 랭던 경과 마주 앉아 간단히 아침을 들었다. 샐러드와 얇게 저민 고기를 입 속으로 밀어 넣고 포크를 내려놓는 찰나 요란한 쇳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뒹굴었다. 무거운 포크가 힘없는 손가락 사이를 멋대로 탈출한 탓이었다. 칠칠찮은 실수가 부끄러워 뺨이 조금 뜨거워졌다.
멀리 서 있던 애니가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사이 랭던 경의 녹색 눈이 나를 찾았다.
“로엘,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몹시 피곤해 보입니다. 괜찮아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검지로 눌렀다.
“조금 그렇네요. 어려서부터 백야에 피곤하게 지내는 데 익숙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이번 백야는 예전보다 잘 보내고 있어요.”
“영 피곤하면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해를 보면 될 일이니 그렇게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어요.”
“주임 신부님이나 교구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걸요.”
나는 나직이 미소를 띤 채 대꾸하고 애니가 놓아둔 새 포크를 집어 들었다. 랭던 경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나와 같이 미사를 드리기로 결심한 듯 더는 휴식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우리가 일요일에 함께 보내는 시간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주일은 우리가 온전히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는 날이었다.
혁명 후, 영지가 국가 소유로 환속되고 귀족들도 세금을 내야 하는 큰 변화를 거치면서 명문가들은 난생처음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됐다. 반면 랭던 경은 귀족의 노동이 금기시되던 분위기에서 벗어난 덕에 본격적으로 사업에 시간을 쏟았다.
예전에 랭던 철도사의 기차를 소개하며 기쁨과 자부심을 내비치던 눈빛은 변함없는 열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철도사는 여전히 그의 자랑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덕분에 랭던 경은 더 이상 왕궁에 출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전보다 훨씬 바쁜 생활을 이어 갔다. 귀족으로서 크고 작은 행사와 모임에 모습을 비추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바빴다.
혁명은 평민에게 닫혔던 많은 문을 열었지만 피를 적게 흘리고 얻은 자유인만큼 아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귀족의 특권과 의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이젠 천천히 변하는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일이 우리의 몫이 됐다.
랭던 경은 고기를 큼직하게 자르며 말했다.
“미사를 드리고 호숫가 주변을 걷는 건 어때요? 몸을 좀 움직이면 잠드는 데 도움이 될 거요.”
“좋습니다, 저하. 요즘은 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시원하여 걷기가 무척 좋더군요.”
나는 희고 부드러운 빵 위에 살구 잼을 바르며 물었다.
“이제 곧 윌이 한 달 동안 방학하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내 욕심이야 여름방학 내내 저택에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할머니 댁과 에메랄드 저택에서 번갈아 2주를 보내고, 윌이 원한다면 저택에 머물 때 베넷 부인을 초대하면 어떨까 합니다.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저택이 어색하겠지. 일단 베넷 부인과 윌에게 편지를 보내 의견을 물어보려 해요.”
랭던 경은 찻잔 손잡이에 다시 기다란 손가락을 걸고 정갈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랭던 경은 내 시선을 눈치채고 찻잔 너머로 나를 보며 눈썹을 살짝 들었다. 그의 표정이 내 시선의 의미를 물었다. 너무 빤히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하께서 얼마나 생각이 깊으신 분인지 종종 잊을 때가 있네요.”
“윌은 아직 나보다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훨씬 기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천천히 친해져도 좋다는 생각이에요. 성격이 이래서 아이가 나를 좋아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배려세요. 윌리엄도 분명 언젠가 삼촌의 사랑을 깨달을 테니 걱정 마세요. 제가 결국 저하의 진심을 알게 된 것처럼요.”
마지막 말은 수줍음을 참고 간신히 덧붙였다. 위로 올라가 있던 그의 눈썹이 내려앉으며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내가 좀 더 밝고 능숙하게 애정 표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랭던 경이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느끼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첩자 노릇을 할 때나 지금이나 몸도 마음도 서툴기 짝이 없어 랭던 경이 내게 건네주는 연심의 반도 그에게 돌려주질 못했다.
우리는 말쑥한 정장을 입고 성당을 찾았다. 마차에서 내리자 미사를 드리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든 교구 사람들이 보였다. 색색의 작은 모자를 머리에 얹은 숙녀들은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들고 청량한 햇살을 즐겼다. 신사들은 모두 어두운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각자 화려한 타이와 높은 실크해트로 나름의 멋을 뽐내는 중이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 성호를 긋고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랭던 경이 뒤에서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힘 있는 손아귀가 몰래 내 팔을 낚아채 자신의 쪽으로 슬쩍 데려갔다. 의아한 눈을 들어 뒤를 돌아봤다.
랭던 경은 짙은 눈썹을 사납게 찌푸리고 내 어깨 너머의 자리를 응시했다. 내가 늘 고르는 가운데 자리였는데, 싫어하는 벌레라도 붙어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랭던 경이 작게 속삭였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군. 나를 따라와요.”
“네? 네, 저하.”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성당 안에서 소란하게 굴 수 없어 그를 따라 이동했다. 랭던 경은 큰 기둥 옆에 놓인 가로 폭이 좁은 의자를 골라 나를 안쪽에 앉혔다. 성당에 놓인 다른 의자와 달리 자리가 협소하여 둘밖에 앉을 수 없었고, 제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위치였지만 북적이는 것이 싫은가 싶어 군말 없이 따랐다.
우리는 평안한 분위기 속에 미사를 드렸다. 랭던 경이 성가를 부르고 라틴어 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저음의 우아한 목소리가 주변 공기를 묵직하게 울렸다. 랭던 경의 신앙심이 깊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와 함께 미사를 드릴 때마다 천국에 있는 성인(聖人)들도 그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을 것만 같다는 성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미사가 끝나고 잠시 짧은 기도를 바친 뒤 고개를 들었다. 랭던 경은 할 말이 있는 듯 이미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였다. 그럴 리 없는데 키스를 하려는 줄 알고 흠칫 놀라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민망한 예상은 당연히 틀리고 말아 랭던 경의 입술은 뺨을 지나쳐 귓가에 도착했다. 익숙한 숨결이 귓불 근처를 포근히 간질였다.
“로엘, 오늘은 성당을 나서며 주임 신부님과 악수를 하지 않는 게 어떻겠어요?”
랭던 경이 귀엣말로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조금 놀라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가까이서 랭던 경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악수를 하지 않는다면 신부님께서 결례라 생각하실 텐데요.”
“세간에 나도는 소문에 따르면 신부 중에서도 여색이나 남색을 탐하는 불경한 작자들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주임 신부님이 겉으로는 훌륭한 분이라고 하나 사람의 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당신의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며 음탕한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이지.”
랭던 경이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영롱한 빛들은 그의 머리를 아름답게 덮었다. 청아한 빛이 비쳐 그렇지 않아도 수려한 얼굴이 천사처럼 보일 지경이건만, 랭던 경의 입에서 나온 신성 모독적 발언에 나는 몹시 소스라쳤다.
“어떻게 신부님을 상대로 그런 의심을 하실 수가 있나요? 모든 사람이 저하처럼 저를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신음처럼 그에게 속삭였다. 불손하기 그지없는 의심이었다.
랭던 경은 평소에도 자주 변덕스러운 질투를 했으므로 나는 그가 제안을 물릴 줄 알았다. 그러나 정말 진심이었는지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내게 당부했다.
“아무튼 악수를 하지 말아요. 로엘 씨는 살결이 연약하여 악수를 조금만 세게 해도 잠시 피부가 붉어집니다. 피부에 신부님의 자국을 남기는 게 현명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것은, 그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흔적일 뿐입니다.”
“로엘, 아까 말했듯 나는 이제 성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참기가 어려워요. 내가 미사를 다녀오면 매번 당신 아래 입에 조….”
“저하!”
나는 그의 다음 말을 막기 위해 급박하게 소리쳐 그를 불렀다. 성당을 나서던 사람 몇몇이 흘끗 돌아보는 눈총이 따가워 뺨의 살갗이 아리도록 뜨거워졌다.
랭던 경은 붉게 물들었을 내 뺨을 보며 느른히 웃었다. 내 반응을 예상한 듯, 여유 있는 미소였다. 나를 당황케 하고자 의도된 음담패설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러나 내가 막지 않았다면 그는 성당 안에서 그런 말을 내뱉고도 남았을 사람이라 소리친 일에 후회는 없었다.
나는 이번엔 목소리를 낮춰 간신히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제발, 저하,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할 테니 표현을 거칠게 하지 말아 주세요. 누군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흠, 그대가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뭐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당신은 고상한 표현을 좋아하니까. 그래. 미사를 드리고 오면 매번 내 마음이 동하고 잘 진정되지 않은 것이 우연이었을지 생각해 봐요.”
고상하고 격식을 갖춘 표현에 비로소 마음이 놓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면서…. 그리고 저하께서는 주일에만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평일에도 늘 그러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차이를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요즘 랭던 경은 관계를 할 때 늘 부드러웠고, 미사 후에 저택으로 돌아가 섹스할 때도 모든 면에서 완벽히 다정했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긴 시간 공들여 나를 샅샅이 녹였다. 그런데 그 행위 밑에 신부님을 향한 질투가 똬리를 틀고 있었을 줄이야.
“로엘, 그대가 주일의 특별함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내가 자주 동요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정결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로엘 씨는 추잡하고 천한 행위라곤 모르니, 음습한 의도가 있어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지. 그렇지 않나요?”
랭던 경의 눈빛과 음성에 나를 회유하려는 의도가 달콤히 얹혔다.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였다.
“물론 악수를 한다 해도 화풀이를 하지는 않겠지만 로엘 씨가 올바른 판단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참아 낸 내 애정을 헤아려 준다면 말이오.”
나는 당황함에 살짝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 신부님께서 설사 랭던 경의 생각과 같은 분이라 해도 여인이 아닌 저를 보고….”
“꼭 생각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봐요. 때로는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는 일도 죄가 될 수도 있는 법이오.”
랭던 경의 주장이 궤변이라 생각하면서도 마땅히 반박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랭던 경은 내가 내비친 찰나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내 입술 위에 봉랍을 눌렀다.
“로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순수하지 않을뿐더러 신의 지붕 아래에 있는 인간들도 우리와 본질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랭던 경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손끝과 뺨이 붉어진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미사를 마친 후 신부님과 악수하는 일마저 질투하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상스러운 소유욕이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나를 굳이 기둥 옆 외진 자리에 앉힌 것도 다른 사람과 나란히 앉지 못하게 하려는 그의 속계산이었을지 몰랐다.
랭던 경의 넓은 등은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조차 방해하려는지 시야를 전부 가로막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었다.
재킷 너머로 그의 탄탄한 등 근육이 느껴졌다. 여름이 되어 얇아진 옷감은 그가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팽팽해지며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를 드러냈다. 누가 그를 탐하여 음심 어린 시선을 보낼까 저어될 정도였다. 나는 겨울이 오면 내가 자주 감기에 걸려 앓아눕는 것을 망각하고 잠시 추운 계절이 오길 바랐다가, 살을 에는 칼바람이 떠올라 어깨를 푸르르 떨었다.
주임 신부님은 성당을 나서는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랭던 경은 신부와 정중히 악수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오, 레온시오. 꼬마 백작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학교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오늘 미사에 데리고 오실 줄 알았는데요.”
‘레온시오’는 랭던 경의 세례명이었다. 랭던 경은 조금 전까지 신부님을 의심한 사람답지 않게 공손히 대꾸했다.
“네, 매주 편지가 오는데 아주 잘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모두 주임 신부님의 기도 덕분이죠. 윌은 방학을 맞아 할머니 댁에서 먼저 2주를 보내다 오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 저택으로 돌아온 윌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싶은 소망뿐입니다.”
나는 처음으로 랭던 경이 거짓말을 잘하는 편인가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 보니,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라고 칭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자리에 맞게 품위 있는 표현을 구사할 줄 아는 공작의 고귀한 재능이라 보는 편이 적당했다.
주임 신부의 눈이 랭던 경의 뒤에 서 있는 나를 향했다. 나는 미소를 띤 채 예의를 차려 묵례만 하고 바쁜 용무가 있는 듯 먼저 자리를 떠났다. 굳이 랭던 경의 사나운 질투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과거 창부라는 거짓말로 랭던 경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그의 구속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나는 성당 앞 정원에 서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걸어가거나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곤함이 쌓여 몽롱해진 머리 위로 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나무들은 물을 잔뜩 머금은 잎사귀를 비비며 바람 소리에 초록빛 부스러기를 실어 보냈다.
랭던 경은 신부와 다시 악수하고 인사를 마무리 지은 뒤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신부의 손을 잡았던 그의 큰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랭던 경의 말을 듣고 보아서 그런지 나 역시 그가 다른 사람과 악수하는 모습이 썩 기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질투도 전염이 되는 걸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썼던 실크해트를 다시 벗었다. 시원한 바람이 따뜻한 햇살을 비집으며 손질이 잘된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호수까지는 마차로 갈까요?”
“그렇게 해요, 저하.”
랭던 경은 다가오려는 마부에게 손을 들어 올려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문을 쥐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그의 손을 몇 번이나 잡고 싶었기 때문에 마차에 오르는 그 짧은 순간, 욕정을 견뎌 내지 못했다. 신부와 악수를 나눈 일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랭던 경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내 손을 쥐었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기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었고, 굵은 마디가 잔뜩 벌어진 손가락 안쪽 틈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랭던 경의 말대로 때론 감각조차 죄가 되는 모양으로, 내 손가락 사이를 잇는 얇은 살을 그가 슬쩍 비빌 때마다 괜스레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마차는 호수로 이어지는 숲 진입로에 멈춰 섰다. 우리는 마차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손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깊게 숙여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금세 서늘해진 뺨에 따뜻한 온기가 남았다.
“로엘 씨, 아까보다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쌀쌀하지 않아요?”
랭던 경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먼저 얇은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덮어 주었다. 몸을 넉넉하게 감싸는 옷감에서 코를 녹일 듯한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내가 몹시 좋아하는 향기로, 그의 체향이 충분히 섞인 향수 냄새였다.
“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저하께서는 춥지 않으세요?”
“나야 추위를 타지 않아 여름보다 겨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걱정 말아요.”
노르크의 본성은 겨울과 혹한에 있었다. 한여름이어도 숲속의 바람은 찼다. 여름엔 5시간을 제외하면 하늘에 계속 해가 떠 있는데도 그늘 아래는 별로 무덥지 않았다.
나는 그가 덮어 준 옷을 여미며 말했다.
“저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따뜻한 지방에서 살아 보고 싶습니다. 노르크의 겨울은 제게 너무 버거울 때가 있어요.”
“그럼 이번 겨울에는 휴양차 사우스라인으로 여행을 가는 게 어때요? 한 달 정도 지내다 오면 혹한의 고통이 덜할 거예요.”
나는 잠시 기차를 다시 탈 수 있을지 생각했다. 기차 폭탄 사건의 후유증이었다.
“…아직도 기차를 타고 사우스라인으로 가는 일을 생각하면 겁이 나기는 합니다.”
“바다를 보면 그대의 두려움도 나아질 겁니다. 보여 주고 싶어요. 당신의 눈처럼 아름다운 바다를…. 내가 곁에 있을 텐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에요.”
약하게 떨리는 내 등을 든든한 팔이 덮으며 옆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품에 비스듬히 기대 걸으며 폭탄 사고 당시의 충격을 떠올렸다. 지난달에도 랭던 경이 바다를 보러 도웨스의 별장에 가는 일을 제안했으나 기차를 타기가 꺼려져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새뮤얼과 도미닉이 내게 심어 놓은 악몽을 떠안고 살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노르크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 폭설이 기억을 좀 더 흐릿하게 덮을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사우스라인에 윌도 데리고 갈까요?”
“…흠, 윌을 데리고 가면 아무 데서나 섹스를 못 하는데.”
랭던 경이 낯부끄러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덕분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애써 담담한 척 대꾸했다.
“그거야 침실에서 하면 되는걸요.”
“윌이 저택에 있으면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고 그대가 자꾸 신음을 참아서 불만이에요.”
“윌이 자고 있는 옆방 서재여서 그랬을 뿐입니다. 충분히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별장은 고용인의 수가 적으니 윌을 데려가지 않으면 복도나 정원에서도 스릴을 즐겨 볼 만합니다. 테라스도 좋고. 잡무에서 벗어나 하루 종일 뒹굴 기회요.”
나를 향한 랭던 경의 정욕 앞에선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도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나는 그가 충분히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뺨을 더 붉히며 대꾸했다.
“…저를 위해서라도 윌을 꼭 데려가야겠습니다.”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랭던 경은 어깨를 흔들며 나지막이 웃었다.
랭던 경과 나는 흙길을 따라 걷다 말고 서서 가볍게 입을 맞추기도 하고, 곳곳에 열린 파랗고 붉은 베리를 따기도 했다. 호수까지는 먼 길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입맞춤이 길어지는 만큼 걸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는 소매로 크랜베리를 반질반질하게 닦아 입 속에 넣고 랭던 경에게도 먹여 주려 하였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하, 잘 익어서 아주 맛있습니다. 드셔 보세요.”
“괜찮습니다. 나는 새큼한 맛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정말요? 노르크 출신이 크랜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산딸기를 딸까요? 산딸기는 덜 새큼할 텐데요.”
“산딸기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숲에 놀러 가서 동생이나 친구들이 산딸기를 먹으면 나는 그동안 토끼를 잡아 보려고 돌을 던지거나 베리를 발로 으깨며 다녔어요. 그래도 지루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내 성미에는 숲이 별로 맞지 않아요. 나는 화려하고 정돈된 도시를 좋아합니다.”
나는 어린 랭던 경이 던진 돌에 맞는 불쌍한 토끼의 모습을 상상했다.
“토끼를 잡으려고 하시는 것도 모자라 토끼의 간식까지 망치며 다니시다니. 어린 랭던 경은 토끼의 천적이셨네요.”
나는 랭던 경을 놀리며 허리를 숙이고 키가 작은 나무에 매달린 크랜베리를 더 땄다. 탐스럽게 익은 베리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잠시 랭던 경보다 앞서갔다.
어느새 곁에 그가 없어 돌아보니 그는 커다란 손바닥 위에 탐스러운 산딸기를 한가득 쌓아 둔 상태였다. 랭던 경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샘물을 찾아냈다.
그는 샘물 앞에 앉아 산딸기가 가득한 손을 담갔다. 맑은 물이 손안에서 시원하게 찰랑대며 베리를 깨끗이 씻었다. 랭던 경이 곧 무릎을 폈다. 젖은 손가락 틈으로 산딸기즙이 섞인 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먹어요.”
랭던 경이 나를 위해 직접 샘물에 손을 담그고 산딸기를 씻어 주었다는 사실이 배 속을 간질였다. 나는 물이 떨어지는 그의 손을 아래에서 받치듯 감싸 잡고 허리를 굽혔다.
나는 산딸기 대신 그의 젖은 손을 혀끝으로 핥았다. 샘물에 차가워진 그의 피부를 뜨거운 혀끝으로 달랜 뒤 산딸기 서너 개를 입에 물고 고개를 들었다. 찬물에 막 씻어 낸 산딸기의 맛이 무척 싱그러웠다.
랭던 경의 녹색 눈이 산딸기를 씹는 내 입술 위에 머물렀다. 내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산딸기를 먹고 허리를 펴자 이번엔 그의 입술이 겹쳤다. 뜨겁고 두툼한 혀가 입 안을 침범해 산딸기즙으로 잔뜩 젖은 입 속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과즙 때문에 서로의 혀가 뒤엉키는 입 속이 더 질척거렸다.
“더 먹어 봐요.”
랭던 경의 말에 딸기를 집으려고 손을 올렸다. 그러나 랭던 경이 원했던 건 그게 아닌 듯 산딸기가 담겨 있는 손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결국 아까처럼 허리를 굽혀 샘물에 젖은 그의 손가락을 정성스레 빨고 다시 산딸기를 가득 물었다. 랭던 경은 내가 입으로 먹는 것만 허락했다.
나는 숲길을 걸으며 그의 손에 놓인 산딸기를 먹고, 때로는 멈춰 서서 그가 내 입 속을 맛보도록 했다. 발바닥 밑으로는 풀 내음 섞인 푹신한 흙이 눌리고 그와의 키스에서는 산딸기 향이 났다.
혀를 섞으면 아직 입 속에 물고 있던 산딸기가 으깨졌다. 붉은 물이 흘러나오면 입 속이 담방 젖었고, 과즙에 물든 입술과 턱 끝을 그의 혀가 맛봤다. 랭던 경이 젖은 내 턱을 핥으며 속삭였다.
“이렇게 먹으니 산딸기도 달콤하군.”
“아… 으응….”
서로의 혀를 빨며 그의 체액을 한가득 넘길 때마다 달착지근한 맛이 나를 감미롭게 채웠다. 호수에 도착할 즈음에야 그의 손에 담아 느리게 나눠 먹은 산딸기가 다 사라졌다.
우리는 과즙으로 젖은 얼굴과 손을 호수 물에 씻고 잔디밭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호수를 쓸며 지나가는 잔물결 소리가 잔잔했다.
나는 품에서 여송연을 꺼냈다. 졸린 눈꺼풀을 깜빡이며 골고루 불을 붙이고 랭던 경에게 건네자 그가 한 모금을 깊이 빨았다가 뱉었다. 연기는 하늘에 널린 구름처럼 몽글몽글 흩어졌다.
“로엘 씨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네요.”
“그런데 막상 감으면 잠이 들질 않아요.”
“요즘 당신이 계속 피곤해 보여 걱정이군. 나는 계절에 무뎌 여름도 그다지 괴롭지 않은데, 좋아하던 백야가 걱정되긴 처음입니다.”
“백야를 좋아하세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 좋아해요. 노을을 긴 시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기쁨이고. 캄캄해야 할 시간에 밤하늘을 오래도록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면 모든 죄책감이 잊히는 기분이 들더군요.”
“…설마 요즘도 죄책감을 느끼시는 건 아니겠죠?”
“물론 이제 죄책감은 사라졌어요. 그래도 노을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여송연을 끼운 그의 손 쪽으로 허리를 숙여 시가 끄트머리를 물었다. 연기를 가볍게 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독한 여송연 향이 노곤한 머릿속을 휘저었다.
랭던 경은 풀밭에 누우며 한쪽 팔을 옆으로 뻗었다. 나는 그가 내준 팔을 베고 곁에 누워 단단한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서 햇볕을 쬐며 누워 있노라니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잠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피곤한 머릿속이 비현실적인 행복감으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는 내가 베고 있는 팔을 구부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코끝이 맞닿았다. 랭던 경이 코끝을 비비다가 힘 조절에 실패하여 미끄러질 때마다 푹신한 두 입술이 스쳤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랭던 경은 눈을 감은 채 웃는 내게 입을 맞췄다. 호숫가는 나무가 적으니 다른 사람이 볼까 걱정이 되어 밀어 내고 싶었지만 얕게 잠이 든 사람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는 어느새 반쯤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더 허리를 숙였다. 가슴팍에 무게가 실리고 서로가 겹쳤다. 위에서부터 깊이 파고드는 두툼한 혀가 입 속을 가득 채우고 훑었다. 나를 녹이는 깊은 입맞춤이었다. 이번엔 산딸기 향 대신 주변에 가득 핀 달콤한 꽃 내음이 키스에 섞였다.
“흣… 응….”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간신히 그의 가슴팍과 내 몸 사이에 밀어 넣었으나 입 속을 문지르는 혀끝이 꿀처럼 달콤해 밀어 내지 못했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도, 입술이 맞물릴 때마다 바람처럼 스치는 숨결도 모두 좋았다. 잠이 부족해진 머릿속은 쾌락에 취약했다.
“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시려구요.”
간신히 그의 입술이 나를 놓아 주고 나서야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그의 몸에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랭던 경은 목선에 입술을 묻고 가빠하는 내 숨결을 따라 키스하며 속삭였다.
“키스를 허락했잖아요.”
“그건, 잠이 부족하여…. 저는 지금 판단력이 흐려져 있으니 저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랭던 경은 풀밭에 붙이고 있던 내 허리를 받쳐 위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커진 성기가 하반신에 부딪쳐 깜짝 놀라 몸을 다시 아래로 내빼려 했으나 커다란 손에 붙들려 소용없었다.
“하, 야외에서 하는 것은 그대에게 도저히 안 되는 일이겠지? 하지만 내 몸이 이런 상태라는 건 알아줘야 해요. 내가 얼마나 인내하는 중인지 당신이 모른다면 참을 가치가 없으니까.”
잠이 모자라 판단력이 흐려졌대도 누군가 들를지도 모를 호숫가에서 섹스를 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주일은 사유지에 외부인의 통행을 금지했지만, 경비병이 셰퍼드와 함께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았다. 그리고 평일에는 사유지를 개방하여 외부 사람들의 통행을 허락했기에 오늘도 실수로 들어온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내 몸에 문질리는 페니스의 묵직한 양감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랭던 경은 외설스러운 행동을 한참이나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는 그가 흥분한 나머지 기어이 강요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으나, 랭던 경은 내 목덜미를 짓씹어 붉은 열꽃을 남겼을 뿐 곧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랭던 경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방금 싫다는 그대를 여기서 강제로 범하는 상상을 했어요. 누가 오든 말든 깔아 놓고 좆으로 쑤셔 주면 그대가 예쁜 목소리로 울 텐데. 팔다리를 눌러 못 움직이게 하고 박아 넣으면 그대도 느끼지 않고는 못 배길 거요.”
랭던 경은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으며 미려한 손가락 사이에 들린 여송연을 입에 물었다. 적당히 도톰하고 멋들어진 입술이 빨아들인 연기가 곧 풀밭에 누운 내 얼굴로 안개처럼 쏟아졌다.
일부러 한가득 머금고 내 쪽으로 내뱉은 것이 확실했다. 돌연히 시가 연기를 마시는 바람에 잔기침이 흘러나오는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은밀히 속삭였다.
“아쉬운 대로 정액 대신 흰 연기를 뿌린 거예요.”
기침을 누르느라 들썩이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나는 간신히 잔기침을 진정시키고, 연기를 마신 여파가 남긴 울퉁불퉁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액, 대신이라니…. 대체 저하께서는 어떻게 매번 그런 발상을 하시는 건가요?”
“내 발상이 특이한가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당신과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대의 얼굴과 몸에 정액을 싸지르는 상상을 하거든.”
음란한 농담을 한 사람답지 않은 화사한 미소가 얼빠진 나를 맞이했다. 속에 든 음탕함과 어울리지 않는 반듯한 얼굴이 다른 의미로 내 넋을 한 번 더 빼놓았다.
랭던 경은 여송연을 짓이겨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풀잎을 털어 냈다. 그는 매우 키가 커 내 위로 넓은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여전히 풀밭에 누운 채로 고개만 움직여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 너머로 맑고 깨끗한 여름 하늘이 펼쳐졌다.
그는 성기가 옷 위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도록 요령 있게 바지를 갈무리하였으나, 워낙 페니스의 크기가 대단하다 보니 발기한 상태에서 그 존재감을 완전히 감추기는 힘들었다. 머리 위에서 랭던 경의 웃음소리가 햇볕과 함께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그의 아래쪽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제 와서 아쉬워?”
장난스러운 물음에 침을 넘기며 말없이 뺨을 붉히자 눈앞에 큼직하고 마디가 굵은 손이 나타났다. 나는 그 손을 붙들고 풀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랭던 경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허리를 굽히더니 순식간에 어깨에 나를 둘러멨다. 그가 자루 푸대처럼 어깨에 나를 멘 까닭에 무방비한 상태에서 머리가 급하게 땅으로 기울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
내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가문비나무에 숨어 있던 찌르레기와 어치 같은 새들이 깜짝 놀라며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랭던 경은 내가 무서워 버둥거리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재밌는지 몸을 흔들며 웃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일이 위태롭게 느껴져 셔츠 자락을 더 세게 틀어쥐었다.
“호수로 들어갑시다.”
“내, 내려 주십시오, 랭던 경. 들어가자고 말씀을 하시면 될 것을요!”
“로엘 씨는 종종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군. 그야 놀리는 편이 더 재밌어서 이러는 게 뻔하잖아요.”
그가 성큼성큼 호숫가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어깨에 얹혀 버둥대는 내 검은 그림자가 풀밭 위에서 춤을 췄다.
랭던 경은 허리춤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주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내려간다면 가슴께까지 찰 높이였다. 티 없이 맑은 호수 위에 하얀 구름과 높이 솟은 자작나무의 그림자, 그리고 겁을 먹어 울상이 된 내 얼굴이 비쳤다.
“저하, 제발 곱게 내려 주십시오.”
“흠, 이미 호수 깊이 들어왔어요. 그대를 적당히 던져서 빠트리면 다치지 않을 겁니다.”
“여름이지만 물이 차갑습니다.”
나는 랭던 경의 어깨에 매달려 팔다리를 버둥거렸고, 그때마다 피부에 튀는 차가운 물방울에 온몸을 푸르르 떨었다.
“수영은 할 줄 알잖아요. 사실 못 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무척 잘하거든.”
“할 줄은 알지만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제발 그냥 내려 주세요, 저하!”
그의 어깨가 크게 위로 솟았다가 내려가는 사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귀를 간지럽혔다.
“…휴,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오래간만에 재미있군. 로엘 씨가 빠지면 더 재밌을 듯한데.”
“대체, 무슨… 말로만 그러시는 거겠죠? 랭던 경, 장난은 그만두시고… 아!”
랭던 경이 나를 어떻게 한 건지 나는 한순간에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몸이 뒤집히고 눈앞에 맑고 고운 여름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에게 닿아 있던 팔다리는 원치 않은 자유를 맞았고, 눈동자는 높이 솟은 뭉게구름을 응시하며 요동쳤다. 무서워서 몸을 움츠리기도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뒷머리와 귓속을 때리고, 온몸이 맑은 물로 풍덩 잠겨 들었다.
갑작스러운 물속의 침묵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차가운 물은 고슴도치로 돌변해 살갗을 아프게 찔러 올렸다. 온몸을 감싸는 충격에 나는 호수 속에 빠진 것도 망각하고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코와 입에서 생명을 달고 보글보글 빠져나오는 공기 방울을 따라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자, 맑은 수면에서 찰랑이는 빛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빛줄기에 도달하려 바삐 굳은 팔다리를 휘저었다. 물속에서 개헤엄을 쳐서 겨우 젖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자마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랭던 경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하기는커녕 웃는 그를 보니 너무 황당하고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하! 실성이라도 하셨습니까? 대체 사람을 호수에 던지는 분이 어디 있나요?”
그에게 바락 소리를 질렀으나 랭던 경은 내게서 조금의 위엄도 찾지 못하는 듯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그런 그가 주책없이 보이는 건 내가 몹시 화가 난 까닭이었다.
“당신 꼴이, 남작이라 하기 어렵군.”
랭던 경은 웃음을 참느라 말도 제대로 잇질 못했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훑어 물기를 털어 내고 발장구를 쳤다. 구두와 정장이 모두 젖어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간신히 발이 닿는 부근까지 헤엄쳤다.
어느새 다가온 그가 우뚝 선 나를 부둥켜안았다. 호수 속에서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몸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최대한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사람을 물에 던지는 건 공작다우신 건가요?”
“제멋대로인 행동이니 그야말로 귀족답고 공작다운 일이오. 그대야말로 공작에게 실성을 하였냐고 물으면 안 되지. 공작은 정말 실성을 해도 그런 질문을 듣지 않는 신분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어떤 질문이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하께서는 자유주의자이시잖아요.”
“나는 편한 대로 입장을 고르는 편이에요. 설사 작위 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그대에겐 공작 저하이고 싶군. 내가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어 된 것도 아니고, 윌리엄이 먼저 하늘로 가며 내 등을 떠민 탓에 이리되었는걸. 나는 애초에 내가 공작이라는 데 불만 없었어요.”
“그것참, 그것참….”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랭던 경이 친절한 도움을 건넸다.
“교양 없다고? 이기적이라고? 편리하다고?”
“네, 그거요. 그것참 편리하신 사고방식이시네요.”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톡 쏘는 말을 내뱉고 호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랭던 경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는 웬일로 나를 순순히 놔 주고 뒤에서 따라오며 다정히 물었다.
“혹시 물에 떨어질 때 아팠어요?”
“아픈 것보다야 놀라서 심장이 덜컹대니 문제입니다. 여름에도 호수 물은 차갑기 그지없네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이 잔잔한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옷이 다 젖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으나 햇볕에 얼른 말릴 요량으로 발을 재촉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뜬금없이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떨어졌다. 비가 오는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봤으나 그사이 먹구름이 생겼을 리 만무했다. 뒤를 보니 다름 아닌 랭던 경이 내게 물을 튀기는 중이었다.
살짝 튀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머리 위로 차가운 호수 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놀라서 손을 휘저었으나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을 걷어 내기는 어려웠다.
“저하, 차갑습니다. 정말 짓궂으세요.”
랭던 경이 손으로 물을 가득 푸는 것을 보고 도망가려 등을 돌렸다. 그러나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머리 위로 물이 떨어졌다. 손바닥이 워낙 큰지라 손으로 물을 퍼 올렸을 뿐인데 바가지로 물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머리를 가득 적시고 옷 속으로 흘러들어 온 호수 물 탓에 몸이 더 무거워졌다.
“물이 차가워 춥습니다. 부디 장난은 그만두세요, 저하.”
“몸의 물기가 말라 가서 더 추운 거예요. 푹 젖어야 안 춥습니다.”
랭던 경은 호수 밖으로 힘겹게 걸어가는 내 뒤를 계속 쫓아오며 물을 끼얹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었다. 흰 셔츠는 달라붙어 살이 비쳤다. 급히 떼어 내 봤지만 금방 피부에 감겨 소용없었다.
나는 힘겹게 무릎까지 물이 오는 지점에 도착했다. 랭던 경이 긴 시간 계속된 장난을 그만두고 물을 첨벙첨벙 헤치며 걸어오자 호수에 제법 큰 물살이 일었다. 둥그런 물결은 내 몸에 부딪쳐 갈라졌다.
다가온 랭던 경은 이내 내 얼굴을 다정히 감싸며 입꼬리를 부드러이 당겨 웃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와, 호수에 반사된 햇살이 비치는 눈동자가 아름다워 하마터면 화난 기분이 사르르 녹을 뻔했다. 여름이라 적당히 탄 피부까지 그의 미소에 깊은 고상함을 보탰다.
“얼른 호수에서 나갑시다. 그대의 기분이 상한 것 같으니 마차까지 업어 줄게요.”
“…제가 어린애도 아닌데 업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내게는 어린애죠.”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리니 어린애로 봐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저하보다 열 살이 어릴 텐데요.”
나는 작게 대꾸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저음의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 늘 내겐 어린 사람이겠지.”
다감한 애정이 심장 부근을 간질여서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랭던 경이 보여 주는 다정함에 물렀다. 내 나이는 비록 성년이었지만 어릴 적 받지 못한 따뜻한 애정의 빈자리가 마음속에 일그러진 상흔으로 남았다. 랭던 경의 비뚤어진 통제욕이 종종 그 자리를 메워 줄 때가 있다는 것이 유년기에 얻은 상처의 증거였다.
랭던 경은 내가 쉽게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팔을 잡아 주었다. 자갈 위에서 신을 벗으려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자 물에 젖은 양말이 찰박거렸다.
랭던 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가슴이 흠칫 뛰었다. 고동치는 가슴을 진정하기 전에 그가 직접 내 젖은 신발을 벗겨 주었다. 나는 넓은 어깨를 짚고 그의 도움 아래 구두와 양말을 모두 벗었다. 차가운 맨발이 햇볕에 따뜻하게 익은 자갈 위로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랭던 경. 제가 직접 벗어도 되는데요.”
“뭘. 내가 그대를 흠뻑 젖게 만들었잖아요.”
랭던 경은 풀밭에 두고 갔던 여름 겉옷을 들고 손끝에 자신의 구두를 건 뒤 허리를 굽혔다.
“업어 줄 테니 이리 와요.”
“정말 괜찮은데….”
나는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구두를 양손에 들고 그의 등 위에 편히 엎드렸다. 랭던 경은 나를 업고 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엘, 춥지는 않아요?”
“아니요. 저하께서 업어 주셔서 춥지 않습니다. 등이 따뜻합니다.”
“혹시 추우면 얘기해요.”
셔츠 사이 맞닿은 살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오갔다. 여름의 햇살 역시 등과 팔을 뜨겁게 덥혔다.
랭던 경은 호숫가의 풀밭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는 흙길에 발을 내디뎠다. 나는 걱정이 되어 그의 어깨 뒤에서 흙길을 내려다보았다.
“랭던 경, 발이 아프시지는 않나요?”
“흙길이라 시원하고 부드럽습니다. 어릴 때는 자주 맨발로 뛰어다녔어요.”
“생각해 보니 저도 그랬던 거 같습니다. 발을 닦지 않고 침대까지 들어가 유모에게 혼나기도 했어요.”
“로엘 씨가 깔끔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군.”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의 젖은 옷자락 위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이 무게가 실린 만큼 천에 남은 호숫물이 밀려 나와 입술을 적셨다. 랭던 경은 잠깐 시선을 뒤로 돌려 나를 흘끗 본 뒤 물었다.
“업혀 있는 게 불편하진 않아요?”
“불편하긴요. 요즘 계속 잠이 모자라 피곤했는데 업어 주시니 편하고 좋습니다.”
“호수에서 골이 난 것 같았는데 기분이 좀 나아지면 좋겠군.”
“조금 전 신발을 벗겨 주실 때 이미 다 풀렸습니다. 짓궂은 장난을 치셔서 투덜거린 것일 뿐, 저하께 정말 화가 났던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그의 어깨에 한쪽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밤에 하늘을 물들인 햇빛은 그토록 거슬리더니, 랭던 경에게 업힌 채 숲속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맞는 햇볕은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음미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잎을 비비는 소리와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숲속이라 그늘진 곳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등에 내려앉는 햇살이 끊기지 않았다. 내가 추울까 염려한 랭던 경이 일부러 해가 드는 땅만 골라 딛는 듯했다. 자상하고 나긋한 배려였다. 그 또한 랭던 경의 일면임을 모르지 않았다.
햇볕이 등을 노곤하게 데울 때쯤 손끝에 힘이 빠지더니 손에 걸려 있던 구두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겨우 들어 땅을 빼꼼 내려다보았다. 손끝의 감각이 무뎠다.
랭던 경은 나를 업은 채로 잠시 앉아 내가 흘린 구두까지 손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햇볕에 익은 귓등을 간지럽게 문질렀다.
“로엘 씨, 잠들었어요?”
“아… 그랬나 봅니다, 저하. 온몸에 힘이 없어요.”
“업혀서라도 자요. 백야라 요즘 통 못 잤으니까.”
“랭던 경의 등이 무척 편안해서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지네요.”
“편해야지. 나는 당신의 것이니까.”
랭던 경의 살냄새와 체온, 숨소리… 모든 것이 정말 내 몸의 일부처럼 익숙하고 안락했다. 구두가 사라진 빈손을 그의 목에 두르고 좀 더 편안히 업혔다.
랭던 경이 맨발을 옮기며 흙길을 디딜 때마다 내 몸도 같이 얕게 흔들거렸다. 요람에 몸을 누인 아이처럼 편안했다. 흔들림이 꼭 자장가 같았다.
한참 눈을 감고 랭던 경의 등을 음미하다 눈꺼풀을 겨우 들었다. 제법 눈꺼풀이 묵직한 것이 다시 깊이 잠들었던 듯했다.
“…랭던 경.”
목소리도 약간 잠겨 나왔다.
“깼어요?”
내 엉덩이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손바닥이 느껴졌다. 잠들기 전엔 그의 손에 구두가 들려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내 등에 찰싹 붙어 있던 젖은 옷은 어느새 거의 말라 피부에 따뜻한 여름의 열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에게 두른 힘없는 손가락을 움직여 넓은 어깨를 잡았다.
“한참 업혀 있었던 듯하니 이제 그만 내려오겠습니다. 너무 피곤하실 듯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대의 숨소리가 듣기 좋아요.”
잠든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뺨이 금세 붉어졌다.
“저하께서도 수고스러우시고, 누가 보면 창피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니 그대로 더 자요. 당신을 업어 주는 일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나오는 랭던 경을 이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다시 괜찮다고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랭던 경의 어깨에 턱 끝을 올렸다. 훤히 트인 숲길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옆엔 기둥이 하얀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큰길에서 호수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아니라 저택의 동문(東門)으로 통하는 자작나무 숲길이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저하, 마차는요?”
“이미 지나쳐 왔습니다. 마부에게 구두와 옷을 들려 보냈어요. 당신이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고 싶지 않았거든요.”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몹시 놀라 그에게 업힌 몸이 얕게 들썩였다. 마차가 서 있던 자리부터 걸어온다 쳐도 꽤 긴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오랜만에 내게 깊은 잠을 선물해 준 랭던 경에게 고맙고 미안하여 나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과 코를 묻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저하. 많이 잔 기분이었는데 느낌이 아니라 정말 오래 잠들어 있었네요.”
“로엘 씨를 업고 숲을 걸으니 나도 마음이 편안했어요. 다만 아까 호수에서 괴롭힌 게 있어 그대가 감기에 들까 걱정이군.”
“몸이 따뜻하여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등이 뜨거울 지경이에요. 저하께서 계속 햇볕 아래만 골라 걸으셨나 봅니다.”
“혹여 몸이 차가울까 그랬습니다.”
나는 넓은 등에서 쉬며 저택의 동문에 다다를 때까지 깜빡깜빡 졸았다. 여름 숲이 내뿜는 시원한 풀 내음을 맡다가 그의 품에 코를 묻으면 숨결에 랭던 경의 체향이 뒤섞였다. 나를 나른히 취하게 만드는 향이었다.
랭던 경은 동문 바로 앞에 도착해서야 나를 내려 주었다. 그는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돈해 주고 뺨과 이마에 키스했다. 나는 그가 내 옷매무새까지 봐 주는 동안 어린애처럼 얌전히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옷이 반밖에 마르지 않았고 머리도 젖어 있어 누가 봐도 물놀이를 하다 온 흔적이 역력했다.
짧은 흙길을 지나니 곧 저택까지 펼쳐진 광활한 잔디밭이 우리를 맞았다. 너른 들판 너머로 낮은 언덕 위에 서 있는 그림 같은 에메랄드 저택이 보였다. 멀리서 보는 저택은 장인이 공들인 세공품처럼 작고 섬세했다. 나는 햇빛이 부서지는 에메랄드 저택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뱉었다.
“언제 봐도 저택이 너무 아름답네요. 랭던 가문은 에메랄드 저택의 주인이 된 지 몇 년이나 되었나요?”
“30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랭던의 성(姓)을 잇는 사람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잠들었소. 처음에는 저택뿐이었지만 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여 지금의 면적이 되었어요.”
“저하께서 끝까지 랭던 가문의 땅을 지켜 내셨군요. 랜슬롯 경은 결국 이자와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택을 처분했다 하던데요.”
“누구에게 들었어요? 며칠 되지 않은 일인데.”
“하녀와 하인들은 가끔 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랭던 경은 내 말에 입꼬리를 둥그렇게 올렸다.
“그대가 너무 조용하여 그렇군. 소문은 본래 우리보다 고용인들이 훨씬 많이 알고 있죠.”
공들여 가꾼 들판에 가득 핀 붉은 히비스커스와 보랏빛 라벤더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찬란한 물결을 만들었다. 팬지와 이름 모를 들꽃은 수더분한 색조로 피어 화려한 빛깔에 고운 색을 보탰다.
꽃향기가 가득한 공기를 헤치며 우리는 이따금 손을 잡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 때마다 랭던 경의 머리카락이 흑단처럼 부드럽게 나부꼈다. 흐트러진 타이도, 조끼나 겉옷 없이 흰 셔츠만 입고 있는 모습도 꿈속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나는 햇볕이 내려앉은 그의 옆선에 눈을 두고, 손바닥으로는 한가득 핀 꽃잎들을 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는 더웠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랭던 경의 등에서 한잠을 푹 자고 오랜만에 활력을 얻은 나는 그와 함께 맨발로 포근한 흙과 잔디를 밝으며 저택까지 지치지 않고 걸었다.
우리가 홀 앞에 당도하자 랭던 경과 내 몰골을 본 하인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집사인 도프 씨는 잰걸음으로 다가와 인사하고 랭던 경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공작님, 커트 칼라일 씨가 30분 전에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저택에 랭던 경의 손님이 오는 일은 드문 편이었고, 그 약속이 주일인 경우는 더욱 적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랜만에 일요일 일정이 있다는 것을 깜빡했군. 옷을 갈아입고 바로 만나야겠습니다. 로엘 씨는 먼저 올라가도록 해요.”
“네, 저하.”
나는 하인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머리와 발을 닦으며 랭던 경이 나를 업어 준 행복한 오후를 곱씹었다. 하얗고 폭신한 수건에 얼굴을 묻고 고용인들 몰래 작은 미소를 지은 후, 따뜻한 물에 몸을 씻기 위해 보송해진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