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여정의 끝 (20/27)

20. 여정의 끝

자비 없는 불은 창고 한 채를 남김없이 태웠으나 모래밭이 차지한 영역을 넘지 못했다. 다행히 불은 숲까지 번지지 않았고 도미닉의 시신은 랭던 경의 지시로 수습됐다. 랭던 경은 불을 지른 사람을 잡으려고 했으나 방화범이 도미닉의 비명을 듣고 재빨리 도망치는 바람에 목격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유년 시절이 도미닉의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슬픔과 형제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 휩싸여 며칠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식사도 들기 어려웠다. 랭던 경은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맡에 앉아 흥미진진한 소설과 아름다운 시를 읽어 주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활력이었다.

강아지들 또한 작은 낙이 되었다. 랭던 경이 침실에 강아지를 들여 준 덕택에 비숑 ‘루비’와 레트리버 ‘새미’의 애교를 보며 위로로 삼았다. 강아지들은 처음엔 내 얼굴을 잊어버렸는지 서먹해했으나 곧 냄새를 기억해 내곤 꼬리를 흔들고 저택을 질주하며 재회의 기쁨을 드러냈다.

나는 도미닉의 장례를 치르는 날에야 오랜만에 침대에서 벗어나 저택을 나섰다. 그날은 이른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려 하루 종일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장례는 초라했다. 도미닉의 죽음을 신문 부고란에 실었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랭던 경과 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장례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성경 구절을 읽어 주는 동안 하인들이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들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다. 그와 나는 도미닉의 관이 축축한 땅으로 들어가 묻히는 장면을 무거운 침묵 속에 지켜봤다.

우리를 위로해 주는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랭던 경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검은 정장에 묻은 물방울들을 털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도미닉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까지 제대로 치르게 해 주셔서요.”

“로엘 씨도 알다시피 나는 도미닉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도미닉이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은 다 헤아릴 수조차 없어요. 하지만 마지막을 제대로 애도해야 오늘의 기억이 훗날 로엘 씨에게 후회로 남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의 영혼이 평온히 잠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나니 랭던 경께서 배려해 주신 만큼 제 마음은 부쩍 편안해졌어요.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행입니다.”

마차가 요란한 빗줄기를 뚫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래 내린 비 때문에 길이 질퍽해져 말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마차 창문 위로 흐르는 빗물을 보고 있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랭던 경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히 랭던 경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도미닉이 죽기 전에 제게 한 말이 있었어요.”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아버지가 정말 자살했다고 생각하는지 묻더군요.”

슬픔에 젖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랭던 경은 몹시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도미닉의 말에 내포된 속뜻을 금세 눈치챈 듯했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연민이 차올랐다.

“로엘, 정말 유감이에요.”

“…처음에는 몹시 충격을 받았지만 자결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기도 했어요. 아버지의 단단한 성품을 생각하면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거든요.”

“맞는 말입니다. 서튼 경은 그러실 분이 아니었지.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 오랜 시간 도미닉이 저와 어머니를 속이고, 제가 아버지의 목을 잘랐다며 비난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에요.”

“자신의 죄를 동생에게 뒤집어씌웠으니 들킬까 봐 겁이 났을 겁니다. 그래서 로엘 씨가 어떤 의심도 품지 못하도록 당신을 몰아붙인 거예요. 불쌍한 나의 로엘. 그대가 도미닉과 살며 겪어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당신은 가족에게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어요.”

랭던 경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나의 유년 시절은 도미닉이 씌운 누명으로 불행했고 나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도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 실재를 아름답게 봐 준 사람은 오직 테런스 랭던 경뿐이었다. 빗물 소리가 잡음이 들끓는 머릿속으로 떨어졌다.

랭던 경은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 듯, 아무 말 없이 손끝을 움직여 자신의 밑에 놓여 있는 내 손등을 토닥였다. 사려 깊은 작은 위로가 열 마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괴로움을 덜어 냈다. 피부에 닿는 토닥임이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마차는 에메랄드 저택 홀 앞에 멈췄다. 하인 두 명이 미리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랭던 경은 그중 한 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산을 내게 줘요.”

“네, 공작님.”

랭던 경은 받은 우산을 직접 펼쳐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격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검은색 천을 받치고 있는 우산살과 랭던 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잡이를 쥔 기다란 손가락을 잡았다.

“제가 들겠습니다, 저하.”

“아닙니다. 내가 씌워 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도….”

“내가 로엘 씨에게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자, 들어갑시다.”

“감사해요.”

우리는 다정히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는 우산을 직접 접어 하인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멀리서 강아지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1등으로 도착한 보더콜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코트를 벗었다. 랭던 경은 외투 안주머니에 늘 넣어 다니는 작은 꾸러미를 꺼내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골고루 먹였다.

“로엘, 침실로 올라가서 쉴 거예요?”

“아니요. 장례가 끝났으니 이제 저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죠.”

“그럼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차라도 한잔할까요?”

“네, 랭던 경. 사고 후 경황이 없어 저하께 드릴 말씀도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무슨 할 말?”

“이따가 차를 마시며 차분히 말씀드릴게요.”

나는 옆으로 다가와 간식을 달라고 치대는 레트리버의 금색 털을 만지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랭던 경은 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조금 동요하는 듯 보였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가 턱을 슬쩍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내가 로엘 씨에게 사과하지 않고 넘어간 잘못이 있나 잠시 생각했습니다. 혼이 날 수 있으니 대비를 해야지.”

“제가 저하께 혼이라뇨! 정말 짓궂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대가 도망쳤다 돌아온 후로 눈치를 보는 건 내 쪽이에요.”

여태 랭던 경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고 혼나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엉덩이를 맞은 건 나인데 도망을 한 번 쳤다고 그가 피해자처럼 구는 건 몹시 부당한 일이었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 후로 시간마다 어느 방에 갔는지까지 알려 드리고 눈치를 보는 건 저인걸요. 이젠 다리도 아프지 않건만 정원에 산책 나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게 하시잖아요.”

랭던 경은 나의 항변에 다시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던져 주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나팔처럼 내밀었다가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럼 저는 3층으로 올라가 필요한 물건을 좀 꺼내 오겠습니다.”

“그래요. 1층 응접실 옆 서재로 내려오세요.”

“네, 저하.”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을 뿐 평소처럼 어디에 갈지, 무얼 할지 알리고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며 난간 손잡이 사이로 아래를 문득 내려다보니 랭던 경이 강아지들과 놀아 주며 1층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쪽에선 난간을 짚으며 이동하는 손가락밖에 보이지 않았을 텐데. 랭던 경의 끈적하고 집요한 눈빛이 나를 빨아들일 듯했다. 내 자유를 구속하고 싶어 하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나는 서둘러 눈을 거두고 손등으로 볼을 누르며 빨개진 피부를 식혔다.

3층엔 에메랄드 저택에서 살다가 떠난 많은 이들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초상화 속에 앉아 고택(古宅)에 살고 있었다. 랭던 가문의 이름을 빛낸 훌륭한 조상들과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 그리고 윌리엄 랭던 백작의 초상화까지. 액자 안의 그들이 근엄한 눈빛으로 에메랄드 저택에 돌아온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초상화들을 유심히 마주 보며 내 짐이 보관된 안쪽 방까지 천천히 걸었다. 도미닉이 죽은 직후, 나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릴리 부인에게 받아 온 윌리엄 랭던 백작의 초상화를 내 물건이 있는 방에 보관해 두었다. 화재의 충격으로 경황이 없던 상태라 마음을 추스른 후 랭던 경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도미닉의 장례까지 마쳤으니 이 이상 랭던 경에게 좋은 일을 알리길 미루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내 물건들은 이제 트렁크 안이 아니라 3층에 생긴 내 개인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인 <평등론>과 릴리에게 받아 온 윌리엄의 초상화를 집었다. 혁명의 성공으로 <평등론>은 이제 더 이상 금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랭던 형제의 신념이 이뤄진 것이다.

랭던 경을 향한 걱정으로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윌리엄 백작을 기리며 혁명을 기뻐하지 못했다. 지난날을 뉘우치며 그들에게 속으로 작은 축하 인사를 건넨 뒤, 오래된 책 표지 위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복도로 나와 잠시 윌리엄 랭던 백작의 초상화 앞에 발을 세웠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는 릴리가 건네준 초상화 속 모습에서 더는 나이를 먹지 못했다. 그는 변함없는 초록 눈으로 나를 자애롭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앞에서 성호를 긋고 죽은 윌리엄의 영혼 역시 신의 자비로 평화에 들었길 기도했다. 윌리엄은 그에게 아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으나, 그의 영혼은 형이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도록 나를 테런스와 릴리에게 데려갔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1층으로 내려가 랭던 경을 찾았다. 서재의 벽난로가 방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 바싹바싹 타오르는 불꽃이 비가 내려 꿉꿉하게 젖은 실내 공기를 보송하게 말렸다.

랭던 경은 벽난로 앞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턱을 가벼이 받치고 있는 손가락과 벽난로 불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옆모습이 훤칠하고 말쑥했다.

나는 조용히 등 뒤로 다가가 랭던 경을 가득 껴안고 그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는 이미 내 기척을 느꼈는지 전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입술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겹쳤다.

얼굴로 밀려드는 모닥불의 온기가 더해져 그의 입술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맞물린 입술이 떼어졌다가 포개지길 반복하는 사이 그가 책을 덮었다. 두꺼운 책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를 묵직하게 울렸다. 커다란 손은 내 뒷머리를 자신에게 바짝 끌어당겼다.

나는 소파의 등을 짚고 고개를 더 숙여 그와 젖은 키스를 나누었다. 그의 입술은 나를 가볍게 빨다가 놔 주길 되풀이하고 혀를 당겨 맛보았다. 푹신한 입술이 내 코끝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안락한 감촉이었다.

나는 들고 온 초상화와 책을 안고 벽난로 앞 카펫 위에 앉았다. 책과 그림을 바닥에 놓으며 속으로 할 얘기를 정리하는 사이 그도 어느새 내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는 턱을 괴며 책에 먼저 눈길을 주었다.

“<평등론>이군. 로엘 씨가 떠나고 나서 트렁크에서 이 책을 찾았지.”

“살펴보셨어요?”

“물론입니다. 내가 서튼 경에게 선물한 책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어요. 그대가 소중히 보관했더군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책이어서 금서여도 처분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밤마다 몰래 읽곤 했습니다.”

“서튼 경은 내가 자유주의자로 전향했다는 사실에 항상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증표로 내 아우인 윌리엄의 책과 피로 서명한 편지를 건넸었어요. 그 책을 로엘 당신이 읽고 있었다니. 앞장에는 윌의 글씨가 남아 있죠.”

랭던 경은 반가운 기색으로 책을 집어 들어 첫 장을 펼쳤다. 그의 눈동자에 벽난로의 장작불이 뜨겁게 어렸다. 이제는 랭던 경보다 내게 더 익숙할 윌리엄의 인사말이 나타났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동생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듯 미려한 손가락이 글자를 어루만졌다. 랭던 경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내 푸른 눈동자 안에 비치는 붉은 불빛이 그에게도 보일 것이다.

“이 책의 테스가 랭던 경임을 알게 된 건 비밀 서재에서 돌아가신 윌리엄 랭던 경의 필체를 보고 난 뒤였어요. 기차 사고가 난 직후였죠. 저하께서 어머니가 어릴 적에 테스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신 덕분이기도 했고요.”

“…당신이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겐 운명처럼 느껴져요, 로엘.”

“저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랭던 경은 오랜만에 조우한 책을 천천히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그는 윌리엄에 대한 죄책감을 많이 내려놓은 듯 보였다. 오랜 시간 모든 힘을 다하여 동생에게 지은 죄를 갚았으므로 그에겐 홀가분히 추억을 곱씹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는 랭던 경이 추억을 살펴본 후 책을 내려놓길 기다렸다.

그는 알지 못하는 작은 그림의 뒷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랭던 경 대신 그림을 집어 내 무릎 위에 올렸다. 중요한 소식을 잘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랭던 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했다. 떨리는 입술을 어렵게 열었다.

“저는 첩자 노릇을 하며 저하께서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책이 랭던 경의 소유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하께 첩자임을 밝히고 베넷 부인의 막내딸인 릴리 메이의 집으로 갔음은 랭던 경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그렇습니다.”

랭던 경은 내가 왜 이미 서로 아는 이야기를 길게 되풀이하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로막지 않고 인내심 있게 귀 기울여 주었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베넷 부인의 손주인 윌리엄은 제 후원으로 릴리 메이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윌의 엄마가 출산 후 바로 숨을 거두는 바람에 할머니와 이모가 윌을 돌봐 주고 있거든요. 그 아이 엄마의 무덤은 릴리 메이의 마을에 있었어요. 저는 얼마 전 미사를 드린 후 릴리 메이와 함께 처음으로 그녀의 묘를 찾았습니다. 그때 전 당신이 패배를 인정했다는 기사를 보고 슬픔에 빠져 제정신이 아닐 때였어요.”

벽난로 안에 쌓인 장작이 뜨겁게 타들어 갔다.

“…무덤을 찾은 릴리는 베넷 부인에겐 비밀로 해 달라며 언니가 윌을 낳은 사연을 털어놓았어요. 사실 언니는 어느 백작과 사랑에 빠졌었고, 그의 가족이 남자를 죽이는 바람에 릴리의 마을로 도망을 왔다고 하더군요. 가족이 남자를 죽였다고 생각해서 임신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서요.”

랭던 경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팔을 뻗어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게 닿는 그의 손가락이 차갑긴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부드러이 말했다.

“비석엔 그 여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즈 베넷.”

랭던 경은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얘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하. 그 이름이었습니다. 이건 릴리 메이가 가지고 있었던 윌의 아버지의 초상화예요. 로즈가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다가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랭던 경은 목울대를 움직여 힘겹게 침을 삼켰다. 늘 강해 보이기만 했던 그가 긴장감이 역력한 손길로 내게서 초상화를 받아 갔다. 떨리는 손이 작은 그림을 뒤집은 순간, 봄처럼 밝은 초록 눈빛을 가진 윌리엄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테런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럴 수가, 윌리엄.”

랭던 경의 눈에 눈물이 그득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겨울 숲이 처음으로 맞이한 5월이었고,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촉촉하고 따뜻한 봄비였다.

오래도록 단련된 강인한 인내심이 가로막아 빗물이 흘러넘치지는 못했지만 랭던 경의 목소리만은 비에 젖어 잘게 떨렸다.

“그림의 뒤쪽을 보세요, 랭던 경.”

랭던 경은 초상화의 뒷면에서 동생의 글씨를 확인했다.

사랑하는 나의 로즈에게.

그는 그림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고 머리를 감싸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물었다.

“로엘, 윌리엄에게 아이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윌리엄을 죽였다고 위장하여 로즈의 임신 소식을 듣지 못했다니.”

랭던 경은 믿기지 않는 듯 그림을 계속 살펴보며 가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 그 아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었습니다. 윌리엄 베넷이라니. 윌리엄 베넷. 그날 집사와 꼬마의 이름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집사도 놀랐다고 했죠. 우리에게 그 두 이름은 잊을 수 없는 상처였으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죽은 윌리엄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이나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 조카였다니….”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랭던 경의 눈동자엔 밝은 빛이 타올랐다. 벽난로의 어두운 불빛이 아니라 태양과 같은 밝고 선명한 빛이었다. 그 마음속에 차오른 생생한 기쁨과 넘실거리는 생명력이 내게도 또렷이 전해졌다.

나까지 가슴이 몹시 벅차올라 발끝을 들어 떨고 있는 그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포옹하고 삶이 선물처럼 안겨 준 놀라운 인연과 운명에 감사했다.

“로엘, 당장 그 아이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저하. 릴리가 몹시 기뻐할 거예요.”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 릴리 메이에게 보여 줄 윌리엄 랭던 경의 초상화를 한 점 더 고르고 그의 친필이 남은 <평등론>을 챙겼다. 물론 릴리 부인이 빌려준 윌리엄 백작의 그림도 잊지 않았다. 충직한 하녀 애니는 아무런 질문 없이 그림과 책이 빗물에 젖지 않도록 종이로 꼼꼼히 포장하고 짐을 작은 트렁크에 넣어 주었다.

마차는 바로 준비됐다. 다행히 비도 그쳤다. 집사가 뒤쪽에 짐을 싣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다시 세상을 축복하듯 땅을 굽어보고 있었다. 5월의 태양은 몹시 뜨거웠다. 나는 눈썹 근처에 손을 대어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릴리 메이의 마을은 노르크의 수도에선 한참 떨어져 있었다. 마부는 지도를 들고 어떤 길을 통해 갈지, 거리가 얼마나 될지 랭던 경과 상의했다.

“늦어도 저녁 무렵엔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공작님.”

“다행입니다. 급한 일이니 서둘러 주시오.”

“네, 공작님. 비가 그쳐서 숲만 빠져나가면 속도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어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랭던 경은 고용인들 앞에선 내내 침착한 표정이었으나 문이 닫히자 내게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늘 무감하게만 보였던 냉정한 얼굴이 어느덧 이토록 다양한 색채를 띠게 되었나 싶었다.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마차는 드디어 릴리 메이의 마을 근처로 진입했다. 나도 한두 번 나와 본 작은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랭던 경이 조금 어두운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창에 두고 있던 눈을 떼어 내고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왜 그러세요?”

“메이 부인은 내가 윌리엄을 죽였다고 알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해명을 해야 하겠지. 믿어 줄까 걱정이에요. 믿지 않으면 조카를 내게 맡길 수가 없겠지.”

“저하와 조금만 대화를 해 보면 오해였다는 걸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윌리엄을 가족의 곁에서 쉬게 해 주려고 했던 거짓말이 이런 결과를 낳았군요. 그 때문에 로즈가 도망가 버려 내가 조카의 존재도 모른 채 살 뻔했으니 말입니다. 로엘 당신이 첩자가 되어 나를 속이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

랭던 경이 짓궂은 말투로 내 죄를 입에 올려 나는 민망함과 미안함에 얼굴을 붉혔다.

“너무 죄송하니 그 얘기는 되도록 하지 말아 주세요.”

“다 지난 일인걸. 그리고 로엘 씨에게 고마운 건 사실이에요.”

랭던 경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나를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레몬파이! 그래서 레몬파이의 맛이 똑같았던 거로군.”

마차는 덜컹대며 순탄히 릴리의 마을로 들어갔다. 랭던 가문의 마차가 공작 가문 중에서는 소박한 편이라고 해도, 릴리의 작은 마을에선 너무 눈에 띄는 마차인 모양이었다.

랭던 경과 내가 마차에서 내려 보니 애들이 마차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왔는지 릴리의 집 앞에 마을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다른 집 울타리에도 일을 하다 말고 나온 사람들이 목을 빼고 귀족 가문의 마차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밖에 서서 사람들에게 흔쾌히 구경거리가 되어 주는 동안 마부가 정중히 릴리 메이의 집 문을 두드렸다. 릴리 부인은 이 소란을 전혀 몰랐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누구세요?”

“랭던 공작가의 하인입니다. 랭던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공작님께서요? 잠시만요.”

릴리는 당황했을 텐데도 잠시 문을 닫았다가 성당에 갈 때 쓰는 작은 모자를 머리에 얹고 나타났다. 옷차림도 단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랭던 경은 망설이지 않고 릴리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탈하게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신분을 따지지 않는 그의 고귀한 성품 덕이기도 했지만, 동생이 사랑한 여인의 가족에게 보이는 존경의 표시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메이 부인. 저는 테런스 랭던 공작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릴리 역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그의 어깨 너머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해명을 요구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그냥 미소 짓고 말았다. 내가 함부로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 기쁨은 오롯이 랭던 경의 것이었다.

랭던 경은 모자를 들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약속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시대가 달라졌다지만 공작님께서 친히 방문해 주시다니 무척 영광입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죄다 구경을 나왔네요. 작은 마을이라서요. 옆집에 포크 개수가 몇 개인지 아침에 호박을 몇 개나 땄는지도 다 알고 지낸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엘 도련님도 이리 오세요!”

릴리 부인이 소리쳐서 나는 웃으며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랭던 경과 함께 익숙한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소파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잭슨 메이가 랭던 경을 발견하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신지.”

“안녕하십니까. 테런스 랭던 공작입니다.”

“아니! 공작님께서 저희 집에!”

잭슨 씨는 기절할 듯이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악수를 청한 랭던 경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귀족은 그가 숭상해 마지않는 존재였으므로 그는 랭던 경을 직접 만난 충격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설마, 철도?”

“네, 그 랭던입니다.”

랭던 경이 웃으며 대답해 주자 잭슨 씨는 또다시 펄쩍 뛰며 파이프를 휘두르다 그만 커튼에 까만 구멍을 내고 말았다. 우리가 가고 난 후 릴리에게 등짝을 맞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잭슨 씨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어쩌지요. 설마 식사를 할 예정은 아니시겠지요? 아내가 솜씨가 없는데요!”

“입 닥쳐, 잭슨.”

릴리가 혼쭐을 내 주었고 잭슨 씨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랭던 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락도 없이 오는 폐를 끼쳤는데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뒤따라온 집사가 시내 쪽에 숙소와 식사를 마련했을 터이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이고….”

랭던 경은 또 굽신거리는 잭슨 씨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자리에 없는 까닭이었다.

“윌리엄은 어디에 있나요?”

“옆집 친구랑 공을 찬다고 잠시 나갔답니다. 곧 들어올 거예요.”

“그렇군요. 꼬마 윌이 돌아오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메이 부인과 둘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괜찮다면 로엘 씨도 함께요.”

“그럼요. 여보, 잠깐 나갔다 와.”

릴리의 명령에 잭슨 씨는 모자를 집어 들고 얼른 집 밖으로 나갔다. 마침 친구들에게 가서 랭던 경이 방문한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릴리의 작은 집엔 따로 큰 응접실이 없어 우리는 식탁에 앉아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오늘 연락 없이 찾아뵙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어린 윌리엄 때문입니다.”

랭던 경은 침착하게 릴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자신이 동생의 사랑을 열렬히 반대했던 일과 윌리엄의 자결, 성당에 묻기 위해 동생을 타살로 위장한 사실까지. 그 뒤로 후회하며 로즈를 돕기 위해 오랫동안 찾았지만 그녀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고, 죽었을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는 것까지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랭던 경은 트렁크를 열어 윌리엄의 친필이 담긴 책과 에메랄드 저택에 있던 다른 초상화를 릴리에게 보여 주었다. 늘 씩씩하던 릴리는 그가 내민 그림 속 윌리엄 랭던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쏟아 냈다.

“언니는 백작님이 살해당한 줄만 알고 겁에 질려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게 소문에 불과했던 거군요. 윌에게 삼촌이 생긴 걸 알면 언니가 몹시 좋아할 거예요. 저희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죽는 순간까지 윌을 걱정하며 제발 고아원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거든요. 물론 저는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맹세했답니다. 그래서 아이도 낳지 않았어요. 남편이 이해해 주어 고마운 일이지요. 저렇게 멍청하지만 가끔 쓸데는 있답니다.”

“그동안 메이 부인과 베넷 부인이 어린 윌을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로엘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신께서 도우셨군요. 윌이 기관사가 되겠다고 하길래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나무랐던 일이 미안해지네요.”

“윌은 원하면 기관사도 되고 철도사를 운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죽은 윌과 로즈에게 속죄하고 싶었습니다. 윌리엄과 베넷가를 돌보는 의무를 다할 수 있다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둘의 영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떳떳하게 인사할 수 있겠지요.”

랭던 경은 흐느껴 우는 릴리 부인을 다정히 위로해 주었다. 릴리는 곧 벅찬 마음을 추스르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윌에게는 어떻게 말할까요?”

“제가 이야기하면 놀랄 것 같으니 오늘 밤에 메인 부인께서 얘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일 윌리엄과 함께 조부모님을 만나러 갔으면 합니다. 제가 윌을 데리고 가서 돌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 위해서요. 당장 좋은 기숙 학교를 알아보겠습니다.”

“엄마가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윌이 다 크기 전에 당신이 죽으면 어쩌나 늘 걱정하셨거든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것도 속상해하셨구요.”

“이젠 아무런 걱정 마십시오. 로즈의 형제자매들과 부모님 모두 풍족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랭던 경은 줄곧 겸손한 태도로 릴리를 위로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윌리엄이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랭던 경의 눈빛이 흔들려 이번엔 내가 몰래 식탁 밑으로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우리는 메이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비켜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은 얼마나 공을 열심히 찼는지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윌은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며 “로엘 도련님!”이라고 소리쳤으나 랭던 경을 보고는 다소 어색해했다. 그래도 기차 여행까지 같이 갔던 일을 잊지 않았는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윌?”

랭던 경은 놀랍도록 침착한 음성을 유지하며 물었다. 랭던 경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직 나만이 눈치챌 수 있었다.

“네, 공작님.”

랭던 경은 다가가 윌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먼지와 검댕으로 까맣게 더러워진 뺨에 주저 없이 키스했다. 윌은 깜짝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릴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릴리는 다시 뺨이 젖도록 울기 시작했고 나 역시 눈물을 참느라 눈동자가 붉게 변해 있어 아무도 아이를 안심시켜 주지 못했다. 덕분에 윌은 계속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랭던 경과 나는 릴리와 윌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서 나왔다. 어느덧 해가 다 지고 집집마다 창밖으로 가스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윌은 릴리의 손을 꼭 잡고 마차 앞에 섰다. 랭던 경은 그대로 조카와 떨어지기 아쉬운지 다시 허리를 굽히며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네, 공작님.”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고?”

“열 명 정도 있어요.”

윌의 대답에 릴리는 울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은 서너 명 정도가 친구인데 윌은 말만 섞으면 다 친구인 줄 안답니다.”

랭던 경은 허리를 펴고 웃으면서 땀에 젖은 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중요하지. 그럼 이만 저녁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 보겠습니다. 약속 없이 왔는데 기꺼이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 부인.”

“제가 더 감사합니다, 공작님. 로엘 도련님께도 감사드려요.”

“감사해요, 릴리 부인. 내일 오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할게요.”

우리는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랭던 경은 마차의 창문까지 열어 윌리엄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윌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랭던 경을 마주했다.

“내일 보자, 윌.”

“안녕히 가세요, 공작님.”

창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랭던 경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시골의 가스등은 우리의 모습을 마차의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랭던 경은 어둠 속에서 내게 키스한 뒤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늘 내 고단한 여정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어요. 혁명이 아니라 당신이 그 끝을 맺어 주었군요…. 당신이 나의 혁명이고 내 사랑의 끝이오, 로엘. 나를 그대에게 휩쓸어 간 내 삶의 모든 비극에 감사하겠습니다.”

“…….”

“결국엔 그대가 내게 봄을 데려왔고, 가슴속에 영원히 쏟아질 것만 같던 시린 눈이 그쳤군요.”

랭던 경의 속삭임에 참았던 눈물이 눈꺼풀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나 역시 그를 만날 수 있게 해준 내 삶의 모든 불행과 외로움에 감사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혹한이 종지부를 찍고 우리는 마침내 함께 봄에 이르렀다. 그와 나는 덜컹거리는 소음 속에서, 어두운 마차 안에서 서로를 느끼며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테런스 랭던, 나의 리베라 리스트.

내 사랑이 불러온 자유 아래 세상은 고요한 밤을 맞았다.

<끝, 외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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