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불길 (19/27)

19. 불길

우리는 엉망이 된 옷차림을 정돈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내 재킷 안에는 윌리엄 랭던 공작의 초상화가 잘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저택에 가서 중요한 소식을 알리고 랭던 경이 기뻐할 모습을 볼 요량에 속으로 몹시 들떴다. 랭던 경은 거울을 보며 남색 타이를 매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한쪽 어깨에 손을 포개 올리고 뺨을 기댔다. 거울 속의 우리는 함께 있었다. 랭던 경이 나를 흘끗 내려다보며 슬며시 미소 짓는 표정이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우리는 의회당 밖으로 나갔다. 불이 났는지 멀리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연기 뒤로 보이는 하늘은 창백할 정도로 푸르렀다. 나는 랭던 경을 뒤따라 마중 나온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어디서 불이 났나 봅니다.”

“아직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요즘 노르크는 툭하면 불이 나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의 뜻대로 된 것 아닌가요?”

“어디나 급진주의자들은 있습니다. 아예 왕실을 없애 버려야 한다는 과격파들이 곳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과격파들의 대부분은 왕이 권력을 의회에 넘겨 주었다는 사실을 못 믿는 자들이죠. 그들은 왕이 언제든 권력을 되찾아 갈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첫 선거를 치러야만 잠잠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나라가 크게 바뀌는 일이니 소란스러운 게 당연하겠죠. 릴리의 마을은 작고 한적하여 수도가 이런 분위기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말들은 달그락달그락 길을 따라 출발했다. 마차는 약간 덜컹대긴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릴리 메이의 마을은 길이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마차를 타면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오랜만에 마차 좌석에 편히 기대앉았다.

랭던 경과 나는 내내 손을 잡은 채로 눈이 마주치면 웃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했다.

복잡한 거리를 거의 지날 때쯤 마부가 갑자기 돌아보며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랭던 경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놓고 몸을 뻗어 작은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랭던 공작님, 마차 두 대가 저희를 따라오는 거 같습니다.”

“누군지 알겠어요?”

“한 대는 모르겠지만 한 대는 알 것 같습니다. 의회당 앞에서 공작님을 기다릴 때 도미닉 서튼 자작님처럼 보이는 분을 봤습니다. 그분이 올라탄 마차가 저것처럼 붉은색으로 치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도미닉… 이제 내겐 두려움과 끔찍함으로 남은 이름이었다. 본인이 지은 죄를 동생에게 뒤집어씌우고 평생을 그 일로 학대하고 비난한 사람.

손끝이 차가워져 손가락을 꼭 접었다. 랭던 경은 안심시키려는 듯 나를 잠깐 돌아보고 마부를 질책했다.

“왜 그를 봤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밖에 뵌 적이 없어 그때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가다가 숲에 들어가기 전에 마차를 세우시오.”

“예, 공작님.”

랭던 경은 창문을 닫고 다시 내 곁에 털썩 앉았다. 몹시 겁이 나고 긴장이 되어 심장이 조여들었다. 이제야 첩자의 신분을 버리고 랭던 경의 곁으로 돌아와 평화로운 날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고통을 부추기고 외면했던 도미닉이 또 나를 불행에 빠뜨리면 어쩌나. 두려움에 곱아드는 손끝을 간신히 펴고 랭던 경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도미닉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랭던 경의 곁을 떠나던 날 도미닉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저하의 말씀이 맞더군요. 형님이 제게 아버지의 목을 자른 일을 덮어씌운 것이었어요. 저는 그 일로 제 마음속에서 도미닉을 완전히 지워 냈고, 다시는 형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동안의 일을 듣는 랭던 경의 눈이 차츰 커졌다.

“…이런, 큰일이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랭던 경은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엔 낯선 곤란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말문을 닫고 잠자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랭던 경은 짧은 한숨을 한 번 더 뱉어 내고 고개를 들며 내 무릎을 잡았다. 그의 눈빛엔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마차가 갑자기 크게 덜컹거렸다.

“로엘,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사실은 당신이 도망가기 며칠 전 내가 도미닉을 불러 단둘이 만났습니다. 나는 당신이 첩자인 줄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때쯤엔 창부가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엘 서튼이 창부라고 소문을 낸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불길한 짐작이 심장 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은 상처가 될 추측을 멈추길 바라며 요란한 경고탄을 쏘아 올렸지만 머리는 합리적인 의심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내 소문의 출처를 쉽게 입에 담지 못했다. 나는 냉랭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게 도미닉이었나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짙은 연민이 어렸다. 이윽고 랭던 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서튼과 새뮤얼 프리데릭이었습니다.”

떨리기 시작한 손을 랭던 경의 따뜻한 손가락이 부여잡았다. 내 손은 그의 손바닥 안에서 그가 잡은 모양대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눈물이 고인 내 눈을 마주 보며 랭던 경은 가슴 아픈 진실을 더 얘기해 주었다.

“나는 그때 도미닉을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소문을 내지 않았고, 로엘 씨가 창부인 게 맞다며 끝까지 진실을 부정했어요.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대가 첩자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그 소문만은 끝까지 부인했던 것 같습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비통한 눈물을 랭던 경의 손끝이 훔쳐 갔다. 도미닉은 내가 평생 지워 낼 수 없을 수치스러운 소문을 안겨 주고 첩자로 발을 들이게 했다. 나를 팔아 새뮤얼에게 받아 낸 돈으로 사치하고 도박할 궁리를 오래전부터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내가 가문에 수치를 안겼다며 오래도록 죄스러워하고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다. 내 남은 유일한 가족인 도미닉과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랭던 경은 울먹이는 내 코끝과 눈꺼풀 위에 입술을 누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나는 도미닉에게 7만 골드를 주고 서튼 경의 목을 벤 사람이 도미닉인 것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리고 로엘 당신에게 진실을 밝히면 5만 골드를 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제가 떠나고 도미닉이 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며 당신에게 돈을 받으러 왔겠군요.”

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랭던 경은 계속 내 손을 놓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미닉에게 로엘이 도망쳐서 편지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얘기했지만 도미닉은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 내가 돈을 주지 않으려고 당신을 숨겨 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미닉이 정말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니. 내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아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군.”

긴장감에 꼿꼿이 펴고 있던 등줄기에 힘이 빠졌다.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마차의 덜컹거림이 몸을 공허하게 울렸다. 내 정신이 현실에 매여 있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랭던 경의 손길 덕분이었다. 상처로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그가 감싸 주지 않았다면 세상에 두 발을 붙이고 서 있다는 감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차의 흔들림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부는 랭던 경이 지시한 대로 숲의 입구에 천천히 말을 세웠다. 우리를 따라오던 마차 두 대는 미행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고 바로 뒤에 멈춰 섰다.

랭던 경은 굳어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무릎을 토닥이며 달랬다. 그가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도미닉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면 마차에서 기다려도 돼요.”

“…아닙니다, 저하. 도미닉은 서튼가의 수치이니 제가 책임져야 해요. 저하와 함께 내리겠습니다. 제가 도미닉에게 말하겠어요.”

“로엘 씨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무척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오늘은 그 용기에 당신이 상처받을까 두려워요.”

랭던 경은 진심 어린 연민과 염려를 담아 말했다. 나를 지지해 주는 그 마음이 오히려 내 작은 용기를 지탱해 주었다.

나는 이제 내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를 정말 사랑해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테런스 랭던.

나는 허리를 숙여 내 손을 따뜻하게 덥혀 주고 있는 그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고 입술을 열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저하, 도미닉에게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어요. 도미닉은 당신이 돈을 주며 제안하지 않았어도 유일한 혈육인 제게 진실을 밝힐 의무가 있었어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건 스스로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지,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 내기 위함이 아니에요.”

“…알겠어요. 로엘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저하.”

나는 먼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마차 두 대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내 얼굴이 좀 더 분명히 보이도록 수풀 안쪽으로 걸어가자 앞쪽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높은 실크해트를 쓴 신사 한 명이 비틀대는 발을 겨우 땅에 내디뎠다. 술에 취한 걸음이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독한 술 냄새는 풀숲의 아름다운 향기를 어둠으로 덮었다. 밤새 카드 게임을 했는지 찌든 여송연의 악취까지 섞여 있었다. 눈앞의 망가진 신사는 나의 하나뿐인 혈육, 도미닉 서튼이었다.

도미닉과 나는 침묵 속에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랭던 경은 나를 뒤따라 내렸다. 등 뒤에서 문이 덜컹, 닫히고 그의 정장 바지가 긴 풀을 사락사락 스쳤다. 걸을 때마다 구두 밑의 풀이 으깨져 그가 다가올수록 풀 향기가 짙어졌다. 저음으로 부드럽게 울리는 랭던 경의 목소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도미닉 서튼 씨, 이 근처에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습니다. 마부들이 듣고 있고 이 길은 지나가는 나무꾼과 농부가 많으니 그쪽으로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귀족들이 길바닥에서 얘기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그러지. 내가 원하던 바요. 조용히 얘기할 장소가 필요했거든.”

“당신 뒤를 따라오는 마차는 누굽니까?”

“…내 채권자요. 몇 주 전부터 도박 빚 때문에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딜 가든 저렇게 따라오면서 밤낮으로 괴롭히고 있어요. 밤에 무턱대고 들어와 총으로 나를 쏘려 한 적도 있소! 이 모든 것이 로엘과 당신이 비열하게 내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지.”

본인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랭던 경과 나를 탓하는 도미닉의 언사에 내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이 내 몸에 흐르는 서튼의 피를 뜨겁게 달구었다.

랭던 경과 나는 먼저 앞장서 창고로 향했다. 랭던 경은 내 안색을 살폈으나 고맙게도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숲길을 지나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창고로 쓰이는 오두막은 돌무더기가 가득한 평지 위에 황량하게 홀로 서 있었다. 랭던 경은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녹슨 자물쇠를 열었다. 랭던 사유지의 오두막들은 다 비슷한 자물쇠를 사용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창고 문을 열자마자 묵은 나무 냄새가 밀려 나왔다. 우리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겹겹이 쌓인 목재와 가구들이 창문을 모두 막고 있어 안은 겉보기보다 좁고 침침했다. 높이 난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창고 안에 두껍게 쌓여 흩날리는 뿌연 먼지를 비췄다.

도미닉의 눈빛에는 사나운 광기가 어려 있었다. 창고의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는 작게 욕을 뇌까리고는, 흥분해서 랭던 경에게 소리를 질렀다.

“역시 내 이럴 줄 알았지. 랭던 당신! 로엘과 함께 있으면서 로엘이 도망쳤다고 거짓말을 한 거요?”

“형님, 저하께 호칭을 제대로 붙여 부르세요.”

겉으로나마 귀족의 품위를 지키던 나의 형 도미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래전부터 나 몰래 수도를 드나들며 도박을 하고 사치를 했겠지만 그땐 이렇지는 않았다.

나를 첩자로 만들어 큰돈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도미닉이 과연 이 정도로 망가졌을까? 프리데릭가에 양자로 들어가고 싶다는 헛된 야망과 새뮤얼이 쥐여 준 큰돈이 오히려 도미닉의 정신을 남김없이 망쳐 버린 듯했다.

도미닉은 눈에 보일 정도로 침을 튀기며 랭던 경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런데 그에게 삿대질을 하는 손가락의 모양새가 어딘가 이상했다. 도박 빚 때문인지 검지의 한 마디가 잘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잘게 떨었다.

“귀족을 작위만 있는 허수아비로 만든 작자에게 무슨 예의! 이제 귀족도 평민들과 똑같이 세금 따위를 물고 무식한 놈들과 같이 정치를 해야 해. 그 버러지 같은 평민 놈들과! 랭던 당신이 오늘 당한 굴욕이 샤를 5세와 짜고 친 연극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이 모든 게 다 네 놈 짓이지?”

도미닉이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나는 그의 나머지 손을 자세히 살폈다. 양손 다 손가락 두어 개가 한 마디씩 짧아져 있는 모양이 눈에 띄었다. 도박은 이제 도미닉의 정신뿐만이 아니라 육신마저 빠르게 망가트리는 중이었다.

나는 도미닉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평민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곧 세상은 자유로워질 테니 귀족이 먼저 문을 여는 것이 맞다고요.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최소한의 피로 연 자유의 문이에요. 저는 형님이 아버지를 기리며 조금이라도 기뻐하시길 바랐어요.”

“…개소리하지 마. 아버지는 우리 집안을 망쳐 놨어!”

도미닉은 술에 취해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옆에 쌓여 있는 목재를 내리쳤다. 목재는 위험하게 흔들거렸다.

“우리 집안을 망친 건 형님이에요. 제게 아버지의 목을 잘랐다는 누명을 씌우고 창부라는 소문을 냈잖아요. 그랬으면서 랭던 경에게 뻔뻔스럽게 금전을 요구하고 제게 소리를 지르다니….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직접 해 주셔야 하지 않나요?”

나는 거짓이어도 좋으니 도미닉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도미닉은 사과는커녕 만면에 비웃음을 띄우고 내 쪽으로 발을 한 걸음 디뎠다. 뒤에서 듬직하게 나를 지켜보던 랭던 경이 앞으로 걸어와 도미닉을 막아 주듯 팔을 내 가슴께 쪽으로 뻗었다.

도미닉은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리곤 이를 갈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술에 취해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왜 미안해야 하지? 로엘 너를 가르치고 기른 건 나인데! 나약하고 쓸모없는 새끼. 너 따위가 서튼가를 일으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병신이지! 이제 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오늘은 고매하신 랭던 경을 만나기 위해 신문을 보고 직접 찾아온 거거든. 로엘 네가 말해! 내가 진실을 털어놓았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랭던 경은 도미닉의 고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소처럼 담담히 대꾸했다.

“그때는 정말 로엘이 나를 떠나 당신이 편지로 고백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로엘이 돌아와 사실을 확인했으니 로엘이 동의하면 돈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진정해요.”

“자작인 나를 애 취급하듯 말하지 마! 로엘의 허락 따위는 내게 필요 없어!”

취한 도미닉이 갑자기 랭던 경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발이 꼬여 넘어졌다. 도미닉의 몸뚱이는 벽에 기대 쌓여 있던 목재에 부딪쳤다 맨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미닉의 머리 위로 목재가 떨어지려는 게 보여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도미닉!”

흔들리던 목재는 볼썽사납게 누워 있는 도미닉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목재를 맞은 그의 이마가 길게 찢어졌다. 두껍게 먼지가 쌓인 더러운 바닥 위로 도미닉의 검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도미닉을 일으키려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도미닉은 내 도움을 거부하며 팔다리를 휘저어 나를 뿌리쳤다. 거친 발길질을 피하려다 발목이 꺾여 그만 나까지 넘어졌다.

“로엘!”

먼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랭던 경이 도와주려 했으나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였으나 내 뜻을 결국 존중해 주었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며 내 곁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도미닉의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다시 그를 일으키려고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미닉은 일어날 의지가 없었다. 그저 누워서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사납게 소리를 질러 댈 뿐이었다.

“오늘 돈을 받지 않으면 난 죽은 목숨이야! 집은 이미 은행에 빼앗기고 파산했어. 그러니 로엘, 랭던에게 말해! 약속한 돈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란 말이야!”

나는 민낯을 드러낸 도미닉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건 안 돼요. 형님이 진 빚이니 형님이 책임지셔야 해요. 귀족은 그러해야 한다고 저에게 가르치시지 않았나요? 귀족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걸 랭던 경이 대신 치러 줄 수는 없어요.”

“그건, 그건 포커에서 돈을 잃고 온 날 너한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지껄였던 헛소리야.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사는 게 귀족이지. 서튼 가문의 재산은 말 한 마리까지 노름으로 다 날려 버렸어. 그러니까 이번에 랭던 경이 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판돈을 그렇게 크게 걸지 않았을 거라고! 모든 게 랭던의 책임이야!”

도미닉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대어 그의 입가엔 더러운 침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망가지고 추악해진 도미닉의 겉모습보다,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나를 얼게 만들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가 텅 비어 버린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나는 도미닉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형님은 서튼가의 재산을 처분한 건 어머니가 진 빚 때문이라고 했었죠.”

갑자기 도미닉이 어깨를 크게 흔들며 낄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나는 도미닉의 반응에 흠칫 놀라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유년 시절부터 수도에 다녀온 도미닉에게선 늘 찌든 여송연 냄새가 났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런 악취가 났었을까? 너무 오래되어 처음 그 냄새를 맡았던 때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벌겋게 변한 악귀 같은 눈이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머저리 같은 놈.”

“어디까지 저를 속였던 거예요?”

도미닉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움켜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나는 그에게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도미닉과 내 얼굴이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의 악취와 벌겋게 충혈된 눈빛이 몸을 떨리게 만들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도미닉의 잔인한 눈빛을 받아 냈다. 도미닉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정말 자살했다고 생각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고 안에 벼락이 치는 굉음이 터졌다. 여러 장의 창문이 동시에 부서지며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소리였고, 날아든 물체들이 깨지며 불길을 터트리는 폭음이었다.

“랭던 경!”

나는 불길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랭던 경에게로 몸을 돌려 뛰었다. 내 덩치로 그를 다 가릴 수 없었지만 튀어 오르는 불꽃을 조금이라도 막아 내기 위해서였다.

폭발로 일어난 열기가 등 뒤로 생생히 느껴졌고, 랭던 경은 불길을 피하려 나를 부둥켜안은 채 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밖에서 누군가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도미닉 서튼! 너는 죽은 목숨이야! 얼른 나와! 오늘 돈을 못 갚으면 나머지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잘라 주지!”

바깥에서 내지르는 협박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폭발로 일어난 불이 삽시간에 창고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불은 바싹 마른 나무 가구와 목재, 먼지에 찌든 커튼으로 옮겨 가며 빠르게 창고 뒤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가 서 있는 쪽은 괜찮았지만 갑작스레 몰려든 연기가 매캐하고 역겨웠다. 밭은기침을 내뱉자 랭던 경이 겉옷 소매로 내 입과 코를 막아 주며 급하게 말했다.

“빨리 나갑시다.”

랭던 경이 나를 끌어당겨 문으로 이동했다. 나는 쓰러진 도미닉을 끌고 나가기 위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도미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앞을 쳐다본 순간 도미닉이 문을 막고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이 잠시 지체되었을 뿐인데 불길이 벽을 따라 번지는 열감이 느껴졌다. 여태 나와 도미닉의 언쟁을 참아 주던 랭던 경은 결국 도미닉의 어리석은 행동에 분노가 폭발하여 벌컥 소리를 쳤다.

“뭐 하는 짓이오? 비켜요. 그렇지 않으면 완력으로 끌어내겠습니다.”

“형님, 제발 그만하세요.”

랭던 경이 도미닉을 무시하고 나와 함께 나가려는 찰나 도미닉이 품속에서 총을 꺼내 내 머리를 겨눴다. 우리 두 사람의 발이 지뢰를 밟은 것처럼 동시에 멎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도미닉은 아버지를 자살로 위장하여 죽이고, 목을 잘라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도박으로 서튼가의 재산을 탕진했다. 취하고 궁지에 내몰린 그가 무슨 일을 못 할까. 그는 충분히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랭던 경을 떠나고 싶지 않아.’

총구에서 언제라도 총알이 발사될 것만 같았다. 오들오들 떨리는 내 어깨를 커다란 손이 진정시키듯 단단히 쥐어 잡았다. 랭던 경은 도미닉을 향해 천천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밖에서는 불을 지른 사람이 도미닉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진정합시다, 도미닉. 이대로 있으면 우리 셋 다 죽습니다. 이 창고는 목조 건물이라 어느 정도 타고 나면 순식간에 건물이 소실될 거요.”

“죽기 싫으면 지금 수표에 지장을 찍어. 그렇지 않으면 불에 타 죽기 전에 로엘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줄 테니까.”

도미닉은 품에서 수표책과 작은 칼을 꺼내 랭던 경에게 던졌다. 어느새 화염은 몸을 뜨겁게 달구어 놓을 정도로 커졌다. 뺨 위로 붉은 불길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랭던 경은 바닥에 떨어진 수표책과 단도를 주웠다. 수표에는 100만 골드라는 엄청난 액수와 랭던 경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고 사인을 해야 하는 칸만 비어 있었다. 도미닉은 애초에 랭던 경을 만나 나를 인질로 협박할 준비를 하고 왔던 것이다.

랭던 경은 망설임 없이 단도로 왼 손바닥을 그었다. 단도가 내 심장을 같이 긋는 듯 애끓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피부가 벌어지며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저하!”

“괜찮아요.”

그는 나를 다독이며 작은 칼을 불 속으로 내던지고 오른 엄지에 피를 묻혔다. 손금 사이사이를 붉은 피가 흘러 메우고 수표엔 또렷한 랭던 경의 지장이 남았다. 도미닉이 손짓을 하듯 총을 움직이며 그에게 명령했다.

“수표를 뜯어서 이리 천천히 건네.”

랭던 경이 수표를 뜯어 도미닉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내밀었다. 도미닉의 입가에 흡사 악마 같은 웃음이 실렸다. 나를 겨눴던 총구가 서서히 내려가고 도미닉의 잘려 나간 손가락이 수표를 받아 든 순간 두 번째 굉음이 터졌다.

거세진 불길이 창문을 깨트리는 바람에 돌풍이 창고로 거칠게 들이닥쳤다.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도미닉의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수표가 빠졌다.

수표는 바람을 타고 창고 뒤쪽으로 펄럭펄럭 날아갔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수표가 창고 바닥을 뒹구는 순간 도미닉이 말릴 틈도 없이 수표를 건져 내려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도미닉! 안 돼!”

이대로라면 죽는다. 비명을 지르며 나도 모르게 도미닉을 따라 들어가려 한 순간 랭던 경이 뒤에서 내 배를 끌어안았다. 마구잡이로 쌓아 놓은 가구들이 타면서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배를 꽉 안고 있는 그의 팔을 붙든 채 소리쳤다.

“도미닉!”

“로엘, 안 됩니다! 구한다고 따라가면 죽습니다!”

“하지만, 저하, 도미닉이….”

도미닉이 용서받을 수 없을 악인이라는 것을 이제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인연을 끊고 살더라도 사람이 눈앞에서 타 죽는 모습을 의연히 넘기기는 어려웠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냥 쉽게 외면하기엔 너무 끔찍한 죽음이니까.

불길 너머에서 도미닉이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며 나를 찾는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려 줘, 로엘! 나를 버리지 마! 뜨거워!” 그가 타 죽으며 내지르는 잔인한 비명이었다.

랭던 경이 굳어 버린 내 몸을 입구 쪽으로 끌어당겼으나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공포에 굳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움직이는 랭던 경의 입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목소리 역시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엘! …로엘!

“…서튼 경.”

단호한 목소리가 멀어져 가던 내 정신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부탁했지만 지금까지 결코 듣지 못했던 내 성(姓)에 대한 존칭이었다.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그의 녹색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렸다. 랭던 경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불길은 우리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는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나를 정중히 불렀다.

“서튼 저하,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나는 눈물을 떨구며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내 팔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굳어 있던 발바닥이 한 발, 한 발, 조금씩 좁은 보폭을 넓히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이내 랭던 경에게 이끌려 바닥을 딛고 뛰기 시작했다. 랭던 경은 닫힌 창고 문 위로 몸을 날렸다. 넓은 어깨로 문을 부서트린 순간 랭던 경과 나는 퍽퍽한 모래 위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우리는 매연과 모래 먼지에 기침하며 힘겹게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사람은 랭던 경이었다. 나는 도미닉을 향한 배신감과 그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슬픔에 파묻혀 버려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일어나지 못하고 목 놓아 오열했다. 랭던 경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내 위로 엎드리며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길게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도미닉의 처절한 비명은 처음에는 바깥까지 들렸으나 어느샌가 더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사라졌다. 도미닉을 집어삼킨 화염은 건물을 서서히 먹어 치우고 천장과 벽을 무너트렸다.

위로 솟구치는 검은 연기를 보고 멀리서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불길이 다 사그라들기 전에 랭던 경의 품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