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역사에 휩쓸려
가혹한 겨울이 끝나고 순탄한 혁명의 말미에 완연한 봄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릴리 메이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로 한 기한을 넘기고 석 달째 신세를 지고 있었다.
몇 주 전엔 프리데릭 가문 사람들의 목이 성문에 내걸렸다. 프리데릭가 사람들 대부분은 들이닥친 혁명군에게 바로 총살을 당했으나, 새뮤얼은 도망을 치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농기구로 잔인하게 맞아 죽었다.
나는 이번 혁명이 실패로 끝날 경우 프리데릭이 랭던 경과 나의 안위를 해칠까 봐 몹시 염려해 왔다. 그러나 새뮤얼 프리데릭의 죽음으로 모든 우려는 끝을 맞았고, 환호하는 평민들 사이에서 남몰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잭슨 씨는 늘 그렇듯 평민이 아무 죄 없는 귀족을 죽이다니 나라가 망해 간다며 혀를 찼지만 릴리 부인은 악명 높은 가문이 죗값을 치렀다고 기뻐했다.
프리데릭이 죽은 직후 사람들은 앨버트 3세가 곧 항복하고 샤를 대공에게 왕좌를 넘기리라 예상했다. 혁명군이 무장한 6연발 총은 단시간에 수많은 군인과 귀족의 목숨을 앗아 갔고, 살아남은 소수의 귀족은 진작 왕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앨버트 3세는 모두의 예상보다 끈질긴 사람이었고, 견고한 성벽 뒤에 숨어 이미 진 싸움을 억지로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새싹이 움트고 꽃이 필수록 내 몸은 점점 병들어 갔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고(진실을 알게 된 후 아버지의 머리는 이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 대부분 탈이 났다. 잠과 음식은 부족한데 그리움은 눈(雪)처럼 무겁게 쌓여 가기만 하니 유약한 육신이 제대로 버텨 내질 못했다.
미열이 몸을 떠나지 않아 누워 지내는 날이 늘어났다. 매일 랭던 경 생각으로 베갯잇이 젖고 눈두덩은 발갛게 부었지만 나는 그 모든 증상을 열병의 탓으로 돌렸다. 메이 부부와 윌리엄 앞에선 괜찮은 척했지만 이미 무너져 버린 마음을 감추기가 점점 녹록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마당에 놓인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었다. 햇빛엔 봄이 넘실거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어린 꽃봉오리를 올려다보며 랭던 경을 생각했고, 이따금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랭던 경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하루 종일 무얼 보든 무얼 듣든 무얼 하든 매번 그를 찾아냈다.
아침인데 고요한 작은 마을에 미약한 술렁임이 일어났다. 출근한다고 나갔던 릴리가 멀리서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지가 바람에 팔락거렸다. 나무문이 삐걱, 열리고 함박웃음을 머금은 릴리가 활기찬 기운을 내뿜으며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앨버트 3세가 항복을 선언했어요! 드디어 오늘 샤를 대공이 노르크의 왕이 된대요!”
“정말요?”
나는 급히 일어나다가 홍차를 바닥에 조금 엎질렀다. 찻물이 닿은 자리마다 퍼석한 흙색이 진하게 바뀌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혁명의 끝이었다.
랭던 경의 완전한 안전. 그가 무거운 죄책감을 내려놓을 오페라의 종장(終章)!
찻물에 젖은 손을 흔들어 공중에 물기를 털어 내고 잔을 의자 위에 올려놨다. 릴리는 호외를 내 손에 들려 주었다.
‘앨버트 3세 망명! 샤를 대공, 금일(今日) 왕으로 즉위!’
나는 호외를 한 문장, 한 문장 시간 들여 읽었다. 종이 위의 모든 단어가 훌륭한 오페라처럼 아름답게 노래했다.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작게 헐떡이며 릴리에게 말했다.
“정말 드디어 앨버트 3세가 항복했군요.”
“네, 도련님. 그 무능한 왕은 이미 다른 나라로 망명을 했다고 합니다. 샤를 대공과 혁명군을 피해 노르크를 버리고 몰래 도주했대요! 도련님께선 앨버트 3세를 동정하는 건 아니지요?”
내가 신중하게 구느라 대답을 않고 호외를 마저 읽는 사이 릴리는 작은 삽을 들고나와 햇빛에 완전히 녹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먹을 작물을 마당에서 기르려는 듯했다. 이제 씨앗을 뿌릴 시기였다.
릴리는 거친 흙을 고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글자는 깨쳤어도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아 호외를 이해하기가 어렵더군요. 도련님께서는 내용이 이해가 가시나요?”
“샤를 대공이 오늘 검소한 즉위식을 마치고 새 헌법과 몇 가지 법령을 선포할 예정이시래요.”
“무슨 법령을요?”
“아직 그것까진 자세히 나와 있지 않네요. 하지만 분명히 시민들을 위한 것이겠죠.”
“도련님께서는 귀족이라 불만이실지 몰라도 저희에겐 정말 다행스러운 소식이네요.”
“아니에요, 릴리 부인.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앨버트 3세가 물러나고 샤를 대공께서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시는 게 마땅하죠.”
나의 대답을 듣고 릴리는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의견이 달라 서먹해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크게 마음이 놓인 듯했다.
릴리가 삽으로 흙을 써걱써걱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빽빽한 글씨를 절반 정도 읽었다. 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역시 랭던 경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의 모든 기사가 그랬다.
사우스라인의 분쟁, 베버릭 왕국 군의 합류, 무기 자금, 혁명군 유지 비용… 그 모든 돈을 댄 랭던 경의 이름이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호외 아랫부분에 실린 다른 토막 기사의 제목을 발견했다. 제목엔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랭던 경의 이름이 선명히 인쇄되어 있었다. 뛸 듯이 반가운 철자였다.
하지만 제목을 제대로 읽은 순간 내 눈앞엔 종말과 같은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귀족들도 항복! 테런스 랭던 공작이 패배를 인정하다.’
등줄기에서 차가운 땀이 기어 나오고 피부의 솜털이 죄다 위로 솟아올랐다. 랭던 경이 샤를 대공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이라니….
랭던 경의 신변에 무언가 잘못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
눈가가 뜨거워지고 호외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신문이 힘없이 구겨졌다. 심장은 터질 듯 양쪽 귀를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피곤하여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몽마의 장난으로 아직 꿈을 꾸는 중인 걸까? 어째서 랭던 경이 패배를 인정한다는 걸까.
릴리가 흙을 정리하며 내게 거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처럼 기사를 느긋하게 읽을 수가 없어 이번엔 최대한 빠르게 단어들을 훑어 내렸다.
자유의 반대편에서 시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귀족들은 앨버트 3세가 항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의회에서 줄행랑을 쳤다. 노르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테런스 랭던 공작 역시 오늘부로 패배를 공식 선언 했다.
랭던 공작은 자유의 흐름을 외면해 온 귀족들의 대표로서 조만간 샤를 대공을 공개적으로 알현하여 패배를 인정하고, 다른 귀족들과 함께 정치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랭던 공작은 앞으로 랭던 철도사 운영에만 전념할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한다니…. 랭던 경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굴욕적인 모습까지 보여야 한단 말인가.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내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소식이었다. 샤를 대공이 랭던 경에게 왜 이러는지, 랭던 경은 왜 샤를 대공에게 당하고만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사회를 안겨 주기 위해 대공을 보필해 온 랭던 경이 아닌가!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나는 그에게서 도망친 후에도 매일 신문과 호외를 확인했다. 랭던 경의 업적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그를 찬양하는 기사가 실리는 날이 올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멀리서 랭던 경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으며 사는 것이 현재 남은 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런데 이 호외가 내 바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모든 기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신문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나는 급하게 소매로 물기를 훔쳐 냈다. 울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릴리에게 담담히 물었다.
“릴리 부인, 이 호외가 사실인가요? 예전처럼 가짜 호외일 수도 있지 않나요?”
“신문사에서 뿌린 호외라 가짜인지 걱정하실 것 없어요, 도련님. 마지막 기사도 보셨죠? 기차를 만든 위대한 분마저 무릎을 꿇는다니! 귀족들이 전부 다 포기하고 의회에 권력을 넘기려는 모양이에요. 정말 자유로운 세상이 오나 봐요!”
릴리는 밝은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대꾸했다. 나는 기쁨에 찬 릴리의 표정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시민들에게 ‘랭던’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을 처음으로 헤아려 보았다.
‘기차를 만든 위대한 분’이 항복했다는 사실이 샤를 대공의 이름을 더욱 빛내 주는 것이다. 샤를 대공은 그 점을 노리고 본인에게 충성을 다한 랭던 경을 배신한 걸까?
“그렇겠죠…. 어쩌면 앨버트 3세가 물러나는 것보다 랭던 경 쪽이 귀족들에게 더 타격이 크겠죠.”
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다 릴리에게 호외를 돌려주고 찻잔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에 찻잔을 치워 놓고 뒷문으로 빠져나와 바로 내가 묵는 작은 뒤채로 갔다.
릴리를 피해 급히 문을 닫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울면서 짐을 담을 트렁크를 찾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가득 적시기 시작했다.
“랭던 경에게 가야 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어떻게 샤를 대공이 저하에게 굴욕을 줄 수가 있어.”
랭던 경의 공적을 밝히기는커녕 그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악랄한 귀족의 역할을 맡기다니. 자유주의자로서 존경받아야 할 랭던 경이 대공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일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장 수도로 달려가 랭던 경을 말려야 했다.
나는 트렁크를 열고 정신없이 옷가지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엔 여러 가지 가설들이 폭우처럼 빗발쳤다.
‘샤를 대공이 랭던 경을 배신한 걸까?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이 귀족들을 새 체계에서 제외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랭던 경을 밀어낸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랭던 경이 대표로 굴욕까지 당할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되면 랭던 경은 역사에 자유주의자로 이름을 남기지 못할 텐데. 랭던 경이 샤를 대공에게 무언가 책잡힐 일을 해서 버림받은 건 아니겠지?’
트렁크를 닫고 걸쇠를 잠갔다. 나가려고 급히 문을 연 순간, 쏟아지는 봄 햇볕이 내 머릿속 가장 안쪽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잔인한 상상을 비췄다. 서둘러 수도로 올라가려던 성급한 발소리가 멎었다.
‘설마… 샤를 대공이 내가 프리데릭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랭던 경이 배신자로 몰린 걸까?’
손에 들린 트렁크가 툭, 떨어지며 안에 쑤셔 넣었던 옷가지들이 쏟아졌다. 불길한 예감으로 들어찬 가슴팍이 얕게 들썩거렸다. 나는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을 웅크리며 오열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내가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의 행동이 랭던 경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혁명이 끝난다면 한 번쯤은 그를 다시 찾아가 만나고 싶었다. 동생에게 빚을 갚고 나면 내게 마음이 너그러워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가끔은 나와 차를 마시거나 섹스하고 싶은 정도의 욕정은 남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는데 랭던 경의 이름이 역사에 이런 식으로 남는 상황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결말이 나 때문이라면….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애써 붙잡으며 고개를 들고 뿌옇게 번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멀게만 느껴졌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손을 뻗어 낡은 문을 닫았다.
***
샤를 대공은 왕위를 이어받고 미리 준비해 둔 새 헌법을 제정했다. 시민들의 투표도,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도 허용되었다. 작위가 없어지진 않았지만 시민들 역시 자신의 성취에 따라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작위는 권력이 아니라 개인의 명예가 되었고, 왕실은 스스로 물러나 내각에 권력을 이양했다.
귀족들의 영지는 국가로 환속되었다. 국가에 토지의 소유권이 있다는 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한 귀족은 랭던 경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그가 반기를 들길 간절히 원했겠지만 그가 환속을 인정함으로써 혁명으로 세운 내각에 힘이 실렸다. 랭던 경은 곧 나라에 정당한 값을 치르고 자신의 땅을 다시 사들였으나 대부분의 귀족은 본래 토지의 절반도 되찾지 못했다.
나는 주일이 되고서야 오랜만에 별채 밖으로 나와 마을의 자그마한 성당으로 발을 옮겼다. 메이 부부, 윌리엄과 함께 조용히 미사를 드린 뒤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랭던 경 역시 신심이 깊었던 동생의 유지를 따라 매주 성당을 찾았으므로 지금쯤 미사를 마쳤을 것이다. 랭던 경과 함께 미사를 드리곤 했던 소박한 성당의 내부와 내 옆에서 나직이 성가를 부르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리웠다.
잭슨 씨는 낮부터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러 갔고 릴리 부인은 성당 앞뜰에서 나뭇가지에 핀 분홍색 꽃을 꺾었다. 작은 꽃들이 소담스러웠다.
“윌리엄, 오랜만에 엄마에게 꽃을 가져다드릴까?”
“네, 이모.”
윌은 이모가 주는 꽃을 받아 들었다. 나는 릴리가 쓰고 있는 작은 모자의 꽃장식을 쳐다보며 물었다.
“윌의 어머니 무덤이 이 성당에 있나요?”
“네, 도련님. 제 언니는 엄마가 다니는 성당이 아니라 이곳 성당에 잠들어 있어요. 저희 집에서 윌을 낳다가 죽었거든요.”
나는 윌리엄을 흘끗 내려다봤다. 윌은 태어나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이모의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리어 가슴 아팠다.
우리 셋은 성당 뒤편 묘지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줄지어 선 십자가들을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레 랭던 경의 동생인 윌리엄 백작이 떠올랐다. 랭던 경은 성당 안 가족묘에 윌리엄 백작을 묻기 위해서 동생을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오명을 뒤집어쓸 상황이었다.
릴리와 윌리엄은 한 비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 뒤에서 청명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 뒤늦게 짧은 기도를 바쳤다.
‘성모님, 하늘에서는 윌리엄을 낳다 죽은 그녀의 가엾은 영혼을 보살피시고, 땅에서는 외로운 랭던 경을 보호하여 주소서.’
머리를 드니 윌리엄이 어머니의 비석 앞에 분홍 꽃을 삐뚜름하게 세워 두는 중이었다. 릴리는 윌이 가여운지 잠시 혀를 차다 언니를 추억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걸 알면 언니가 아주 기뻐할 거예요. 부모님은 모르시지만 언니는 어느 백작님과 사랑에 빠졌었답니다. 하지만 가문의 반대가 너무 격렬해 그 남자는 죽임을 당했고, 뒤늦게 임신 사실을 눈치챈 언니는 해코지를 당하기 전에 제가 있는 마을로 도망 왔어요. 오, 불쌍한 로즈! 가엾은 엄마는 그저 언니가 윌을 낳기 전에 남편 될 사람을 잃었다고만 알고 계신답니다.”
어딘가 묘하게 낯익은 이야기였고 친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제야 윌리엄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비석의 글씨를 제대로 읽어 보았다. 반듯한 돌에는 어린 윌리엄을 낳은 여인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로즈 베넷(Rose Bennet)’
“로즈….”
그녀의 이름을 보자마자 머리가 깨닫기도 전에 온몸에 전율이 솟아올랐다. 오래도록 보아 온 한 책의 인사말을 잊었을 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테런스의 동생, 윌리엄 랭던 백작이 사랑했던 평민 여인의 이름은 로즈였다. 나는 로즈 베넷의 비석에 눈이 붙들린 채 조용히 릴리에게 물었다.
“릴리 부인… 혹시 윌의 이름이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건가요?”
“네, 언니가 죽기 직전 윌의 아버지 이름이 ‘윌리엄’이라고 알려 줬거든요. 하지만 이름이 너무 평범해서 윌리엄이라는 것만으론 어느 가문인지 알아낼 수 없었답니다.”
“…혹시 윌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 있을까요?”
“언니가 가지고 왔던 그분의 초상화가 있어요. 화가의 솜씨가 제법 좋답니다. 백작가의 후원을 받는 화가였을 테니 실력이 좋은 건 당연하겠지만요. 그런데 왜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릴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굳은 심지가 엿보이는 그녀의 고동색 눈동자를 보며 어린 윌의 녹색 눈동자가 어디에서 왔을지를 생각했다. 에메랄드 저택 3층에 걸린 초상화 속 윌리엄 랭던 경의 눈 색깔이 선명히 그려졌다.
“윌리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릴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는 어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는 윌의 손을 꼭 붙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윌리엄이 심심하다고 해서 나는 마당에서 아이와 공놀이를 해 주며 릴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사이 릴리는 그림을 찾으러 재빨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초상화를 둔 곳을 잊어버렸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릴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초상화에 뽀얗게 내려앉아 있는 먼지를 털며 작게 재채기했다. 나는 윌리엄과 발차기로 주고받던 공을 손으로 잡아 내고 릴리를 빤히 쳐다봤다. 릴리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 로즈가 사랑했던 윌리엄의 초상화예요.”
릴리가 내민 그림에는 영원히 늙지 않는 윌리엄 랭던 경이 에메랄드 저택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녹색 눈에서 그리운 테런스의 눈빛이 보였다. 윌리엄 랭던의 눈동자에 겨울이 온다면 그 사람의 눈 색과 같을 것이다. 겨울 숲과 같은 짙고 어두운 녹색.
눈가에 금세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도련님, 아시는 분이세요?”
나는 그림을 뒤집어 뒷면을 확인해 보았다. 그곳엔 윌리엄 랭던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로즈에게.
봄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산들바람 속에서 이제야 운명이 던져 준 단서들을 하나로 꿰어 낸 나를 지켜보는 불멸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아는 사람이에요. 릴리 부인… 괜찮다면 잠깐 이 그림을 빌려주겠어요? 초상화를 가지고 수도로 돌아가야겠어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 초상화가 반드시 필요한 분이요.”
고개를 들어 다시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깃털처럼 생긴 띠가 이어진 엷은 구름이 섬세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의미하는 바를, 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이제 정확히 알 것 같았다.
망설임은 사라졌다. 이제 내가 다시 그에게로 휩쓸려 갈 시간이었다.
***
나는 윌리엄 랭던 경의 초상화를 품에 넣은 뒤 낡은 마차를 타고 노르크의 수도로 향했다. 마부는 수도의 지리를 잘 몰라 나를 센트럴 호텔 앞까지만 데려다줬다.
호텔 근처에서 갈아탈 마차를 찾고 있는데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나는 뒤늦게야 주변이 몹시 북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수 축제가 있을 때나 볼 수 있는 수많은 인파가 어딘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중 흥분한 사람들 몇몇이 몸싸움을 벌이다 돌을 던지는 바람에 고급 모자를 파는 가게의 유리창이 파손됐다. 주인이 뛰어나와 울상을 지었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수도는 아직 혁명의 열기가 곳곳에서 난폭하게 들끓고 있었다.
한갓진 시골에서 지내느라 수도의 분위기를 전혀 몰랐던 나는 과격한 광경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고 호텔 앞으로 다시 건너갔다. 바구니를 들고 가는 부인 한 명을 붙잡아 상황을 물었다.
“부인, 죄송하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나요?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길에 인파가 많은 것을 보고 놀라서요.”
“모르셨어요? 오늘 랭던 공작님이 샤를 폐하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할 거래요! 다들 그 모습을 보러 몰려가고 있어요.”
일주일 전 신문에서 본 랭던 경의 기사가 실현되는 날이 오늘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몸이 떨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서요?”
“왕궁 옆에 있는 의회당에서요.”
의회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센트럴 호텔에서 묵을 당시 나는 마차를 타지 않고 도시 곳곳을 쏘다녔고, 의회당은 여기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 근처에 랭던 경이 있다. 그것도 내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내게 그를 말릴 기회와 시간이 있을까?
나는 품에 넣어 둔 초상화를 재킷 위로 만지며 고심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오늘 랭던 경을 말리지 못한다 해도 모욕을 겪을 그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겁을 먹고 스스로 떠났으니, 스스로 랭던 경의 옆자리에 돌아가야 할 때였다.
나는 바로 의회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의회당 건물 중앙에는 커다란 발코니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발코니 난간과 근처 외벽에는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들이 붙어 있어 흡사 발코니를 떠받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발코니는 국가에서 중요한 발표를 할 때 종종 이용하여 신문 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장소 중 하나였다.
발코니에는 임시 의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 의원들의 신분은 모두 평민임이 확실했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노르크의 국기가 봄바람에 세차게 펄럭였다. 건물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는데 대부분 노동자로 보였지만 고급 옷차림을 한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구경을 나온 부자들과 지위가 낮은 귀족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욕을 먹으며 인파를 헤치고 최대한 앞으로 나아갔다. 발코니에 서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만큼 의회당과 가까워졌을 때 안쪽 커튼이 걷히고 샤를 5세와 랭던 경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들은 샤를 5세를 향해 만세를 부르고 혁명의 표어를 외쳤다.
“노르크의 새로운 왕, 만세! 노르크에 자유를! 노르크에 자유를!”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랭던 경의 모습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낯빛은 평생 가슴속에 사무쳐 잊히지 않을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지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 놀라 눈물을 쏟아 냈다.
“저하….”
혁명군 대장이 자유주의자들을 대표해 임시 의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몇 가지 법률을 공포하고, 랭던 경을 포함한 중요한 귀족들이 의회에서 물러날 예정임을 선언했다. 2개월 후 평민이 참여하는 첫 선거를 시행한다는 발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오래도록 혁명의 완성을 염원했던 랭던 경의 얼굴에선 기쁨의 빛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은 동생을 위해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한 자유주의의 승리였다. 그 앞에서 기뻐하지 않는 랭던 경의 모습이 나를 무너트리려 했다. 이 모든 상황이 첩자 노릇을 한 나 때문에 벌어진 걸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가슴께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랭던 경!”
힘껏 외쳤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이 거세어 내 부르짖음은 완전히 묻혔다. 내 귀에도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주변의 함성은 엄청났다.
나는 몸을 비집고 군중을 밀치며 좀 더 발코니 가까이 다가갔다. 샤를 5세가 의자에서 일어나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모두가 환호하며 다시 그를 연호했다.
샤를 5세는 묵직한 음성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고 사인을 한 뒤 랭던 경에게 펜을 넘겨주었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내 피부 위에서 미끄러지던 우아한 손가락이 펜을 받아 부당한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앞뒤로 나를 미는 사람들 틈에서 힘겹게 계속 그를 불렀다
“랭던 경! 테런스! 안 돼요! 당신은 자유주의자잖아요!”
내가 막아 볼 틈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랭던 경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샤를 5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검은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지고, 우아한 옆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샤를 폐하의 발등 위에 키스했다. 노르크의 귀족이 할 수 있는 가장 미천한 인사이자 모욕적인 굴복의 표시였다.
랭던 경은 그렇게 귀족이 시민들에게 패배했음을, 앨버트 3세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하였다. 나는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이제 제대로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안 됩니다, 랭던 경! 저하께서 무릎을 꿇으시다니!”
울부짖는 내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흥분한 사람들이 “노르크에 자유를!” 함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모자와 스카프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지팡이나 돌멩이같이 위험한 물건들을 섞어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환희에 차오른 군중들은 혼란을 개의치 않았다.
샤를 5세가 손을 흔들며 먼저 퇴장하고 임시 의회원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발코니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테런스 랭던 경이었다. 그는 못 박힌 듯 발코니에 서서 자신에게 야유를 쏟아붓고 자유를 외치는 군중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의회당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화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밑그림부터 채색까지 직접 완성한, 랭던 경이 그려 낸 노르크의 역사화였다. 나는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린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는 소리 지르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발코니에 선 랭던 경의 모습을 내 기억 속에 담았다. 비록 왕에게 스스로 무릎을 꿇었지만 비굴한 빛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고아하고 기품있는 테런스 랭던 공작의 자태를.
내게는 그의 모습이 노르크의 혁명이고 자유의 완성이었다.
고요히 군중을 둘러보던 온아한 녹색 눈동자가 수많은 사람 위를 미끄러지다 마침내 내게 닿았다. 랭던 경은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완벽히 맞물린 순간 둘 사이의 대기가 흔들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로엘!”
랭던 경은 외마디 비명처럼 나를 부르며 양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오늘, 패배한 귀족의 대표자 역할을 해야 했던 랭던 경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만 억울함을 가누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냈다.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뺨에 열상이 남을 것만 같았다.
“랭던 경!”
나는 그를 향해 닿지 않을 손을 뻗었다. 울고 있는 나와 달리, 나를 찾아낸 녹색 눈동자에 선연한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진 찾아 볼 수 없었던 밝은 빛이었다. 당장 쓰러질 듯 지쳐 보였던 랭던 경은 발코니의 난간을 꽉 잡고 몸을 내밀며 내게 외쳤다.
“로엘, 절대 다시 도망가면 안 돼요! 당장 1층으로 나를 찾아와요! 알겠어요?”
그가 힘껏 지르는 외침이 사람들의 고함에 묻혔지만 나는 입 모양을 보고 랭던 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내가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가 황급히 발코니에서 모습을 감췄다. 나를 향한 랭던 경의 애정이 식었을 것이라 지레 상상하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내 마음속에 한 줌의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랭던 경이 나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팔다리에 기운이 생겼다. 몇 달이나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푹 못 자서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서로 이리저리 밀치며 해산하려는 인파를 비집고 서둘러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귀족을 쳐 죽여야” 한다며 폭력적으로 날뛰는 사람들 때문에 곳곳에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정문에 도착했지만 의회당 근처도 분위기가 험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삼엄하게 정문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정문은 오늘 봉쇄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로엘 서튼 남작입니다. 조금 전 폐하와 함께 계셨던 테런스 랭던 공작님의 친구입니다. 들어가서 공작 저하께 한 번만 제 이름을 여쭤봐 주세요. 그러면 제 신분을 확인해 주실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1층에서 만나기로 공작님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들은 정문이 봉쇄되어 있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 내 신분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정문을 벗어났다.
인파가 몰린 데다 왕명으로 문이 봉쇄되어 있어 랭던 경도 정문으로 나오긴 어려울지 몰랐다. 안으로 들어갈 다른 입구를 찾아내야 했다. 건물 주변을 헤매다가 후미진 골목 쪽으로 난 작은 쇠문을 발견했다.
쳐다보는 눈이 없는지 경계한 후 녹슨 문손잡이를 잡았다. 안쪽에서 잠겨 있는 듯 아무리 당겨도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녹 때문에 거칠거칠한 표면이 얇은 피부를 아프게 긁었다.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아당긴 순간 쇠문이 돌연히 쉽게 덜컹 열려 버렸다. 나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누군가 안에서 잠금쇠를 푼 모양이었다.
넘어진 시선 끝에 깨끗하게 손질된 신사의 구두가 들어왔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찰나 나를 내려다보는 랭던 경과 눈이 마주쳤다.
“로엘!”
“테런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아픔도 잊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몇 달간 떨어져 그리움에 침식되었던 우리는 서로를 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옹했다.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두 팔로 단단한 몸을 끌어안자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그의 체온과 살냄새가 몰려왔다.
그의 향기를 더 생생히 맡고 싶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흐느끼며 우느라 들썩대는 내 등을 따라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 나는 그날 밤 어떻게 감히 그를 떠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내 몸을 덮는 이 묵직한 무게와 그의 온아한 영혼이 나를 떠난다면 내가 살아 있음을 대체 어떻게 느낄 수 있다고.
랭던 경의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까이서 그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쏟아졌다. 그의 목소리는 재회의 감동과 열기로 잠겨 있었다.
“로엘, 다시는 그대를 못 만나는 줄만 알았어요. 대체 왜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까. 나는 그대를 영영 잃어버린 줄 알고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저하. 제가 어떻게 감히 랭던 경을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는 죄인이라 그저 당신께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을 뿐, 절대 저하를 버렸던 것이 아닙니다.”
랭던 경은 내 얼굴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더니 존재를 확인하듯 젖은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푹신한 입술이 피부 위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나를 탐하는 그 익숙한 감각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뺨과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서고 속눈썹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랭던 경이 나를 터트릴 듯 꽉 안았다가 놓으며 입을 열었다.
“홀로 남은 나를 가엾게 여기고 왜 더 빨리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없는 동안 외로움에 미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대를 만나니 무너져 버렸던 나의 세상이 다시 부활한 것만 같습니다.”
마음속의 고통을 털어놓는 랭던 경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늘 강하고 고고한 랭던 경을 내가 이토록 아프게 만들었다니.
그에게 죄스럽고 미안하여 심장이 둘로 갈라져 내렸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강인한 턱 끝에 내 이마를 대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 오늘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신가요? 왜 샤를 폐하께서 랭던 경에게 모욕을 주고 무릎을 꿇게 만드신 건가요? 저하의 공적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지는 못할망정 그대를 자유주의자들의 반대편에 세우고 공개적으로 굴복하게 하시다니요.”
“그건… 로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저 때문이신 거죠? 제가 한 일들이 밝혀져 폐하께서 랭던 경의 충성심을 의심하신 게 틀림없어요. 사실이면 제발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저하.”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엘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저 때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저는 일주일 전에 기사를 보고 당신을 말리기 위해 달려오려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이 당신에게 가려는 제 발목을 붙잡고 말았는걸요.”
“가여운 로엘… 당신의 근심이 우리의 만남을 늦추었군요. 부디 그런 죄책감은 느끼지 말아요.”
랭던 경은 다시 내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몸을 건물 옆으로 내밀어 시가지의 분위기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투표권을 얻게 된 승리에 기뻐하며 술을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싸움을 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나를 다시 안쪽으로 잡아끌며 쇠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로엘. 샤를 폐하를 뵙게 해 주겠습니다.”
“제가 폐하를 뵈어도 될까요? 이제 대공의 신분도 아니신데….”
나는 깜짝 놀라 머뭇거리며 발을 멈췄다. 왕을 알현하는 건 무척이나 영예로운 기회였으나 내 마음속엔 샤를 5세를 향한 개인적 원한이 혼재되어 있었다. 내가 억울한 감정을 잘 눌러 내고 제대로 예의를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왕을 향한 원망을 곱씹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그분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시민들 앞에서 저하를 자유주의자의 반대편에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랭던 경은 나를 한참이나 지그시 내려다봤다. 작은 한숨과 함께 내 뺨에 두툼한 손바닥이 얹혔다.
“로엘, 미안해요. 이 일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 줄이야. 오늘 발코니에서 벌어진 일은 전부 내 계획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두 랭던 경의 계획이라니요.”
“내게 모든 전말을 들어도 그대의 마음에 의심이 싹틀지 모르니 폐하께 직접 확인하도록 해 주겠습니다. 이 모든 게 로엘 그대의 탓이라 믿고 또 도망이라도 친다면 내가 어떻게 견뎌 내겠어요. 불길한 싹은 모두 확실히 제거해야겠습니다.”
랭던 경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좁은 문을 지나 의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랭던 경은 걸쇠를 안쪽에서 단단히 잠갔다.
의회의 복도엔 몇백 년이나 소중히 보관된 노르크의 위대한 정치가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화병에 담긴 여린 분홍빛을 띤 꽃잎들은 은은한 향을 풍겼다. 랭던 경은 나를 데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며 물었다.
“로엘, 의회당을 장식한 꽃들을 보았나요?”
“그렇지 않아도 화병을 보고 있던 참입니다.”
“본래 의회와 왕궁엔 외국에서 수입된 화려한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봄에는 시장에서 수수한 노르크의 꽃들을 구입해 꽂았어요. 곧 왕궁과 의회의 예산을 작년의 5분의 1 수준으로 낮추는 안건이 임시 의회에서 통과될 겁니다.”
랭던 경의 얘기들이 모두 샤를 5세를 감싸는 듯이 들려 나는 몰래 입술을 내밀었다. 작은 불만의 표시였다.
“제가 샤를 폐하를 원망한다고 해서 그분의 자잘한 업적까지 상기시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이 혁명의 업적의 절반은 내 것이오. 나는 방금 로엘 그대에게 내 업적을 이야기한 겁니다.”
랭던 경은 방금 전 굴욕적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오만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 고고한 귀족적 자부심이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의회당 안에서 여러 사람과 마주쳤다. 랭던 경을 배신자라 낙인찍고 홀대할 거라는 내 불길한 상상과 달리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내게도 예의를 갖췄다. 복도와 계단을 몇 개나 지나 랭던 경이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시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문을 두드렸다.
“폐하, 랭던입니다.”
“들어오시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샤를 5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랭던 경의 뒤에 선 나를 발견했다. 그는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성큼성큼 걸어 내게로 다가왔다.
“이런! 서튼 경께서 돌아오셨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내 집에서였지. 그때 목숨을 걸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소.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그동안 많은 심려를 끼쳤습니다.”
“랭던 경과 함께 앉으시오. 같이 차라도 듭시다.”
따뜻한 환대해 기분이 얼떨떨해진 상태로 방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은은한 베르가모트 향이 감도는 홍차를 마시며 우리는 각자의 근황에 대해 짧게 인사를 나눴다.
샤를 5세는 혁명에 성공하여 왕좌에 올랐음에도 기차 식당 칸에서 만났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격의 없이 같이 어울리며 포도주를 마시고 포커를 치던, 소탈한 샤를 대공의 모습 그대로였다.
랭던 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샤를 5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 갑자기 다시 이렇게 찾아온 건 로엘에게 오늘 일이 저의 제안이었음을 확인해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아… 그렇군.”
랭던 경이 오늘 일을 입에 올리자 샤를 5세는 몹시 어두워진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품에서 여송연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튼 경께서 몹시 놀라셨겠군요.”
“…네, 폐하. 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랭던 경께 내가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랭던 경이 공식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게 되길 바랐소. 혁명 후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랭던 경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그리고 나는 항상 그랬듯 랭던 경의 제안이 몹시 훌륭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소.”
샤를 5세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책상 옆의 작은 개인 금고를 열어 밀봉되어 있는 서신 하나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봉투에는 랭던 경의 필체로 샤를 5세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봉투는 봉랍으로 재밀봉된 상태였다.
“제가 열어 봐도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서튼 경이 열어 보시오.”
샤를 5세가 고개를 끄덕여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봉투를 뜯어보았다. 안에는 투박한 재질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소박한 편지지로 처음 이 종이를 보고 랭던 경의 검소함에 놀랐던 기억이 선명했다.
나는 익숙한 랭던 경의 글씨를 한 자 한 자 정성껏 읽어 내렸다. 랭던 경은 내가 편지를 읽는 동안 샤를 5세와 함께 시가를 태우며 침묵을 지켰다.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입니다. 철도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데릭이나 워맥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랭던 가문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샤를 대공의 존함보다도 유명한 이름일 겁니다.
그러니 대공, 다시 한번 거절하셨던 저의 제안을 고려해 주십시오. 대공께서 즉위하시면 제가 귀족의 대표로 당신에게 항복하고 무릎을 꿇겠습니다. 랭던 공작이 샤를 대공에게 항복하고 의회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시민들에게 알려지면 귀족에 대한 불가침성은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앨버트 3세의 통치가 끝나고 노르크에 자유의 시대가 왔음을 실감하게 될 겁니다.
귀족의 영지를 국가에 환속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문서에 가장 먼저 가문의 인장을 찍는 귀족이 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들은 어설픈 희망을 품고 남은 힘을 동원해 피를 보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이미 역사가 자신들을 버리고 혁명의 편에 섰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노르크의 역사에서 당신의 반대편에 있었던 귀족으로 이름을 남기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랭던 공작가의 사람으로서 진 책임이자 나의 조국 노르크를 위한 의무입니다. 전하, 저는 오래도록 이 혁명의 끝이 그렇게 막을 내리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제 뜻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신실한 당신의 친구, 테런스 F. 랭던으로부터.
샤를 5세가 앞에 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입 속을 씹어 가며 눈물을 참고 편지를 끝까지 읽었다. 나는 눈물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랭던 경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울음을 잘 참고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어 샤를 5세에게 돌려주었다.
잠자코 시가를 피우던 랭던 경이 나를 흘끗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눈물을 참느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나 대신 샤를 5세에게 말했다.
“그런 연유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폐하. 로엘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랭던 경은 나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언제든 사소한 일이라도 찾아오길 주저하지 마십시오. 서튼 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나라가 불안정해 바쁘실 텐데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요. 서튼 경이 다시 돌아와 매우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겨우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랭던 경과 나는 잠시 샤를 5세와 담소를 나누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오가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많아 우리는 편히 대화하지 못했다.
모퉁이를 돌아 한산한 복도에 이르고서야 랭던 경이 발을 멈췄다. 그는 유달리 내 기분을 신경 썼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리까지 숙여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나는 그 편지를 읽은 뒤부터 계속 눈물을 참고 있어 눈가에 붉은 기가 역력할 것이 분명했다.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뜨거워진 뺨을 손등으로 눌렀다. 랭던 경은 그런 나를 염려하는 듯, 한편으론 사랑스러워하는 듯 손끝으로 내 눈가를 매만졌다.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나는 목이 메어 굳어 버린 목구멍을 겨우 움직였다.
“어떻게 랭던 경께서 스스로 그런 결심을 하실 수가 있나요? 저는 랭던 경처럼 헌신적인 사람이 못 되어 많은 시민들이 저하께서 한 일을 모르고 넘어간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고 억울합니다. 네, 억울해요. 모두가 저하의 공적을 알아주길 바라는 게 제 부당한 욕심인가요?”
“…로엘, 그 편지는 내 진심이었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혁명의 끝자락을 상상했어요. 그 끝에서 나는 늘 가장 낮은 자가 되었고 그날이 오늘이었던 겁니다.”
랭던 경이 노르크를 위해, 샤를 폐하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억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눈물이 동공까지 차올랐다.
“랭던 경께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신 모습을 직접 보았는데 그 편지를 읽었다고 아, 그렇게 된 거구나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엔….”
“…….”
“…그러기엔 제가 저하를 너무 사랑합니다.”
랭던 경이 작게 숨을 삼켰다. 그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를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긴 처음이라 허공에 놓인 내 두 손도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꽉 모아 잡고 떨림을 멈추려 노력했지만 지난 몇 달간 상사병을 겪으며 깨달은, 첫사랑인 그를 향한 열망과 갈증이 내 육신에서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열렬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눈물 섞인 숨결을 내뱉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랭던 경은 내 손목을 잡고 주변을 둘러보다 복도를 빠져나가 구석진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이 너무 빨라 나는 뛰다시피 랭던 경을 따라갔다.
“어디 가세요?”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못 참습니다.”
커다란 손에 잡힌 손목이 얼얼하게 아팠지만 그의 말에 놀라 심장이 배꼽 뒤로 떨어졌다.
“저하, 여기는 의회당입니다.”
“귀빈실이 있어요.”
랭던 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4층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빈방과 복도를 여러 군데 거쳐 랭던 경이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귀빈실은 센트럴 호텔 객실과 비슷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나 종종 밤을 새우며 집무를 보는 귀족을 위해 만든 곳으로 보였다.
랭던 경은 작은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잠갔다. 기다란 손가락이 걸쇠를 달칵 채우는 소리에 심장이 반응했다. 랭던 경은 잠시 닫힌 문에 이마를 대고 깊게 숨을 내리 쉰 다음 내 쪽으로 뒤돌아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멍해졌으나 이내 우리 둘만 이곳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발끝을 들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저하.”
“로엘… 그대의 달콤한 살냄새를 맡고 이 부드러운 피부를 다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당신은 결코 다 알지 못할 거예요.”
랭던 경은 나를 으스러트릴 듯 세게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된 줄만 알았던 그의 입술은 머릿속에 남아 있던 것보다 더 부드럽고 나긋했다.
아, 나는 얼마나 그의 입술이 그리웠던가. 온몸이 떨려와 그가 나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조각을 맞붙이듯 상대와 입술을 겹치고, 두 손으로 서로를 구속하듯 당겨 안았다. 등을 받치는 커다란 손에 의지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위에서 나를 파고드는 랭던 경의 혀를 받아들이는 건 숨 막히는 기쁨이었다. 두툼한 혀가 부드러운 입 속 곳곳을 쓸고 치아를 훑으며 내 호흡을 틀어막았다.
나를 잠식할 듯한 격정적인 키스였다. 나는 그에게 기댄 채 내 안에 들어온 두꺼운 혀를 음탕하게 빨며 체액을 마시고, 나를 탐하는 그의 혓바닥에 내 혀를 맞붙였다. 랭던 경은 그에게 안기듯 달라붙는 내 혀를 질척하게 빨아 주었다. 혀 밑을 문지르는 움직임에 몸이 다 녹아내릴 것 같았다.
“…으응… 흣….”
차오르는 숨이 목구멍 안에 가득 찼지만 그의 키스가 다디달아 입술을 떼어 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혀가 잠시 입 속을 빠져나간 순간 모자란 숨을 간신히 들이켰다. 그러나 서로의 입술을 잇고 있는 가느다란 타액이 끊기기도 전에 랭던 경이 다시 내 혀끝을 물었다. 단단한 치아는 나를 아리도록 씹었다. 달콤한 아픔이 솟구쳐 손끝에 힘을 넣고 그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아, 응… 흐읏, 응….”
아랫입술이 퉁퉁 붓도록 빨리고 혀끝이 너덜해지도록 씹혔다. 입술을 놓아 주는 건 그가 내 목덜미를 빨고 싶을 때뿐이었다.
랭던 경은 내 입술과 목을 핥고 빨며 자신의 흔적이 사라진 몸 여기저기에 집요한 자국을 남겼다. 도망가기 전에는 내 목덜미에 울혈이 가시거나 혀끝이 멀쩡한 적이 없었으므로 나 역시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흔적들이었다.
키스를 하는 내내 쾌감과 통감이 섞여 끙끙대며 앓았다. 랭던 경은 자국을 남기는 데 몰입하여 나를 한참이나 탐한 뒤에야 내 신음을 인식했다. 이미 충분히 울혈이 진 후였다. 그는 새삼 흠칫 놀라며 내 입술을 달래듯 핥았다.
“로엘, 아팠어요?”
“…조금….”
나는 쾌감에 취하여 몽롱해진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렸다. 내게 키스란 본래 이런 것이었으므로 아픔에 아무런 의문이 없었건만, 랭던 경은 여느 때와 달리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달아오른 내 뺨 여기저기에 촉촉한 입술을 짓누르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나도 모르게 습관대로 해 버렸어요.”
낯선 사과가 도리어 나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달콤하고, 다정한 언사였다.
“저는, 괜찮은걸요. 저하의 입술이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요.”
“그래요?”
“네… 저하의 입술이 너무 그리웠는걸요.”
수줍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의 눈빛이 의회당의 창문에 내려앉은 햇살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로엘, 그대의 피부는 보드랍고 연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자국이 남습니다. 그래서 내 욕망을 참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나 역시 당신의 따뜻한 살결이 그리웠습니다.”
랭던 경은 이번엔 나를 달래듯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
작은 스킨십이었지만 오랜만에 맡는 그의 살냄새와 피부 위를 스치는 입술의 감촉, 묵직하게 귓바퀴를 맴도는 목소리가 내 몸을 예민하게 울렸다. 떨면서 그에게 매달려 있는 나를 그가 가뿐히 안아 들었다. 나는 익숙하게 두 다리로 두꺼운 몸통을 껴안았다. 랭던 경은 급할 때면 무작정 나를 소파나 테이블 위에 엎어 놓고 삽입부터 할 때가 잦았건만, 오늘은 나를 소중히 안아 들고 응접실 옆에 있는 침실로 데려갔다.
푹신한 침대 위에 등이 사뿐히 닿았다. 그는 목에 매고 있는 풍성한 타이를 풀면서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녹색 눈이 조끼에 닿았다. 그는 여전히 내 조끼 단추에 걸려 있는 금색 회중시계 체인을 잡아당겼다. 성탄절 밤에 선물 받은 회중시계였다.
손톱마저 단정한 엄지손가락이 회중시계 뚜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그날 밤, 바람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소복이 쏟아지던 눈처럼 점잖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는 계속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성탄의 밤, 마차에서 나와 나눈 입맞춤이 로엘 그대의 첫 키스였어요?”
“…네, 저하. 그날이 저의 첫 입맞춤이었습니다.”
랭던 경은 고개를 숙여 시계 뚜껑 위에 입술을 눌렀다. 금색 회중시계가 내 조끼 주머니로 다시 돌아오고, 커다란 손은 내 얼굴 양옆을 짚었다.
그는 내 몸 위에 올라타 나를 단단한 팔 사이에 가두고 내려다봤다. 묵직한 몸이 나를 침대 위로 눌러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서럽도록 그리운 테런스 랭던의 육체였다.
나는 그의 육체가 지닌 욕망을 적나라하게 알았다. 침대 위의 그는 사랑하는 상대를 괴롭히고 지배하고 싶은 가학심과 독점욕에 사로잡혔다. 지금도 녹색 눈동자엔 깊은 애정과 소유에 대한 열망이 어지러이 뒤얽혀 있었다. 랭던 경은 한 손으로 천천히 내 조끼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와 센트럴 호텔에서 보낸 밤 역시 그대의 첫날밤이었어요?”
“…네, 저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마음이 깊어질수록 존재한 적도 없는 당신의 손님들을 질투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질투심을 못 이기고 애꿎게 그대를 괴롭힌 적도 많았어요. 로엘 당신이 빌고 우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진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뜨겁게 맞닿은 시선 아래서 단단한 손바닥이 내 뺨을 덮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등을 부여잡고 뺨을 살짝 비볐다. 랭던 경은 그런 내 코끝에 입을 맞췄다.
“당신의 첫날밤에도 마찬가지였지. 돌아가신 서튼 경의 아들이자 아름다운 그대가 창부라는 사실에 혼자 실망하여 스스로의 폭력적인 행동을 합리화하고 작은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처음인 당신에게 어떠한 배려도 해 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기적이게도….”
“…….”
“…내가 그대의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기쁘오.”
랭던 경은 열기가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마지막 조끼 단추를 풀어냈다. 그의 입술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움푹 파인 곳에 파묻혔다. 피부 위에 닿는 습한 숨결과 조심스레 살을 빨아들이는 부드러운 키스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랭던 경의 양어깨를 움켜잡았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
“몇 달 동안 못 본 사이에 살집이 더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저하의 곁을 떠나니, 흣… 식욕이 생기질 않았습니다.”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어느새 서 있는 유두를 머금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그를 쳐다보았다. 내 가슴을 빨아올리는 단정한 입술과 살갗에 눌린 오뚝한 콧날이 너무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오랜만의 스킨십도, 그가 유두를 빨아 줄 때마다 떨리는 내 몸도 몹시 부끄러웠다.
허리를 살짝 비틀며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힘 있는 손이 내 몸을 붙들었다. 도망치려는 등을 받쳐 올리는 손길은 단호했다. 덕분에 나는 그의 입술을 피하긴커녕 가슴을 빨아 달라 내밀고 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흣….”
“살은 빠졌어도 이 젖꼭지는 빨아 주면 여전히 통통하게 잘 불어나서 음란하게 흔들리는군. 박아 줄 때마다 둥그렇게 떨리는 엉덩이도 그대로인지 얼른 확인하고 싶어요.”
“…아, 저하!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으응….”
랭던 경을 향한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모든 기억이 점점 미화된 모양으로, 나는 그 우아한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낯부끄러운 음담패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얼굴은 벽난로 가까이 앉은 사람처럼 호되게 붉어졌다. 랭던 경은 내 낯빛을 보고 젖꼭지를 문 채 장난스레 웃었다.
“뺨이 놀랍도록 붉어졌어요, 로엘.”
“저, 저하께서, 흣, 이상한 말… 씀을 하시니… 아… 으읏….”
젖꼭지를 흔드는 매끄러운 혀끝의 움직임이 온몸을 진동시키는 듯해 끝까지 대꾸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쾌감이 배 속에 가득 고이고, 손끝과 발끝까지 흘러넘쳤다. 몸이 서서히 쾌감에 절고,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이 교차했다.
소리 나게 유두가 흡입되며 입 속을 드나들수록 밑은 점점 단단해졌다. 나는 랭던 경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지만 그는 짓궂게도 발기한 내 것을 몸으로 슬며시 눌렀다.
“흐으응….”
랭던 경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쾌감에 손끝에 힘이 들어가려 해서 아랫입술을 물고 버텼다. 그는 유두를 문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내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다정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얼른 박아 줄까? 그대도 내 좆이 그리웠겠지?”
“…네, 저하.”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머리를 끄덕였다. 고개가 떨어졌다가 마저 올라오기도 전에 랭던 경의 손이 바지 위로 내 것을 감싸 쥐었다.
“흣….”
랭던 경은 어깨를 흔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렇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떨어진 사이 그대가 내 좆이 어지간히 그리웠나 봅니다.”
솔직히 대답했을 뿐인데 랭던 경이 웃으며 놀려 얼굴이 또 금세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다행히 나를 더 놀리지 않고 달래듯 말했다.
“오늘은 부드럽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대의 첫날밤에는 그렇게 못 해 주었잖아요.”
“그때는 무척, 읏, 서러웠어요.”
랭던 경은 칭얼거림을 받아 주며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손길이 나약한 나의 응석을 부추겼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하늘이 무너질 듯 서럽게 울었잖아요. 처음인데 입에 재갈을 물고, 손을 묶고, 내게 혼나 가며 박혔지. 처음인 줄 알았더라면 그대의 곳곳을 녹여 부드러이 먹었을 것을.”
랭던 경은 귓불을 물더니 내 귓구멍 안으로 축축한 혀를 밀어 넣고 쑤셨다. 귓속을 할짝거리는 질척한 소리가 음탕하기 짝이 없어 나는 몹시 놀랐다. 강한 자극이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질렀다.
“흐읏, 아….”
랭던 경은 동글게 말린 내 몸을 꼼짝 못 하게 끌어안고 내 귓속을 집요하게 할짝댔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그를 방해하자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 사이에도 혀는 멈추지 않고 귓속을 쑤셨다. 그가 성기로 밑을 박을 때나 들릴 법한 소리여서 혀가 귓속에 박히고 있는 건지, 그가 밑을 쳐올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아, 으응… 흣, 저하, 아!”
“밑을 쑤셔 줄 때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군.”
“흐응… 아, 읏….”
“하… 로엘 그대는 어쩌면 신음마저 아름다울까.”
축축한 혀가 귓속을 몇 번이나 파고드는 바람에 눈꼬리에 눈물이 길게 매달렸다. 내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할 때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싸 제자리에 되돌려 놨다. 나는 양쪽 귀가 녹아내릴 만큼 그에게 잔뜩 빨리고 나서야 겨우 놓여 날 수 있었다. 너무 느낀 탓에 속눈썹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가슴 언저리는 얄팍하고 빠르게 들썩였다.
랭던 경은 젖은 속눈썹 주변을 핥고 키스했다. 오랜만에 그가 내 눈물 자국을 탐하여 나는 다시 한번 재회의 기쁨에 온몸을 떨었다. 내 상태를 확인하는 그의 음성이 젖은 귓가에 크림처럼 얹혔다.
“기분 좋아요? 로엘 당신이 충분히 느꼈으면 좋겠어요. 내가 준 상처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흣, 저하께서 귀애해 주시면 저는 그저 기쁘고 좋을 수밖에 없는걸요. …제가 처음인 줄 아셨더라면 저하께서 그날 이렇게 다정히 대해 주셨을까요?”
나는 내 첫 경험의 아픔을 곱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그동안 침대 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랭던 경을 원망하는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랭던 경은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속인 쪽은 기실 나였다.
그날 밤 나는 그에게 겉으로는 창부였고 속으로는 첩자였으므로 누군가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면 내가 느끼는 편이 마땅했다. 내 덧없는 질문에도 랭던 경은 입을 맞추며 정성껏 대답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로엘.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그날 밤과 같지는 않았을 거예요. 로엘 그대에게 애꿎은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대했겠어요?”
“…그럼 만약 제가 계속 창부인 줄 알고 계셨더라면 이렇게 다정히 해 주시는 날이 오지 않았을까요?”
연이은 나약한 질문에도 랭던 경은 어리고 감상적인 나를 비웃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 안에 나를 가득히 담으며 다시 귓속으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는 당신을 창부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부터 이미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로엘, 이런 날은 반드시 왔을 겁니다. 거친 섹스는 동생을 떠나보내며 삶의 통제권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귀족의 권리를 놓아 버리며 발생한 나의 뒤틀린 지배욕일 뿐, 당신을 향한 경멸을 의미했던 건 아니에요.”
그의 다정한 위로가 쾌감으로 반쯤 감겨 있던 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테런스 랭던, 노르크 공작가의 장남. 동생이 죽음으로써 평생을 키워 온 권력욕을 내려놓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마음속엔 폭풍이 불어닥쳤을 터였다. 나는 침대 위에서 나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행위가 그에게 주는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나는 내 쪽으로 고개 숙인 그와 가까이서 눈을 맞추고, 코끝을 맞대고, 입술을 겹쳤다. 넓은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어 녹색 눈동자의 절반은 봄의 새싹처럼 어린 초록빛으로 빛났다.
랭던 경은 베개를 내 엉덩이 밑으로 밀어 넣고 바지 단추를 풀었다. 움직이는 손과 팔뚝엔 굵은 힘줄이 솟아 있었다.
내 성기는 그의 부드럽고 노근한 애무로 아직 단단한 상태였다. 햇살이 비추는 그의 품위 있는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그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무언가 하면 좋겠건만. 발기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이 부끄러워 다리 사이를 가리기 위해 손을 움찔움찔 근처로 가져갔다. 그러나 몰래 가리기 전에 랭던 경에게 팔을 붙잡혔다.
“이제 와서 가리면 무슨 소용이에요. 내게 한두 번 보여 준 것도 아니면서. 응?”
“하지만… 너무 빤히 바라보시니 창피합니다.”
“창피한 건 알고 있어요. 하얀 피부가 붉어졌거든. 가슴 주변도, 팔뚝도, 뺨도 붉은 꽃잎을 짓이긴 듯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그게…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첫날처럼 부끄럽습니다.”
어설프게 허벅지 안쪽에 놓여 있는 내 양손을 그가 다정히 쥐었다. 랭던 경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입을 벌린 뒤 천천히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슴보다도, 배꼽보다도 밑이었다. 이내 발기한 내 성기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시야를 침범했다.
“아! 저, 저하….”
나는 놀라 시트에 대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려 랭던 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 가슴을 빨아 주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입술 사이에 내 성기를 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랭던 경이 내게 해 주는 첫 구음이었다.
견딜 수 없이 창피했지만, 축축한 입 속이 성기에 달라붙는 야릇한 쾌감에 눈꼬리가 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힘이 빠져 머리가 다시 시트 위로 떨어졌다.
“아… 으응, 흣….”
랭던 경이 밑을 빨아 주는 순간 낯선 쾌감이 밀려오고 막을 틈 없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릎을 모으고 싶었으나 그가 내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고간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불가능했다. 내게 입을 맞춰 주던 혀가 기둥을 쓸어내리는 감각이 강렬해 하마터면 허리를 들어 올릴 뻔했다.
“흐읏… 아! 하으응… 저, 저하… 흣….”
손가락 끝에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랭던 경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요란하게 소리를 내어 빨고 내가 놀라서 내려다볼 때마다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가끔은 눈이 마주칠 때면 일부러 성기를 입 속에서 꺼내 자신의 혓바닥 위에 얹고 나더러 보란 듯이 내 것을 전시했다. 수려하고 단정한 얼굴과 음탕하게 부푼 내 것이 함께 보일 때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나는 온몸이 봄볕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붉게 익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진동하면 그는 다시 성기를 입 속 가득 담고 빨아올렸다. 사정을 할 것 같아 엉덩이를 뒤로 빼내어 도망가려 했지만 두꺼운 손가락이 골반을 꽉 붙들고 힘을 실어 눌렀다. 나는 랭던 경의 두 손을 붙잡고 무릎을 세웠다.
“저하, 하, 할 것 같, 으응, 같습니다. 부, 부디… 흐읏… 입 밖에, 아, 하게 해 주세요.”
“내 입 속에 좆물을 싸질러도 돼요.”
랭던 경은 부드러운 말투로 무척이나 천박한 단어를 사용하여 대답했다. 도망가려는 엉덩이는 매번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차마 그의 입 속에 사정하겠다는 결심은 서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마음을 돌릴 때까지 최대한 견뎌 보기로 했다.
“저하, 제발… 흐읏, 윽… 아응….”
입 속이 귀두를 가득 빨아들이고, 혓바닥은 기둥을 문질렀다. 사정하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손끝엔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나는 랭던 경의 손을 치우려고 계속 시도하고 시트도 붙잡으며 성감을 눌러 봤지만, 쾌감은 매번 잦아들었다고 나를 착각하게 만든 뒤 더 격렬하게 몸을 덮쳤다.
“아읏, 흐응… 흣! 아, 안 돼… 아… 제발, 응….”
한계였다. 눈물이 고인 시선 너머로 낯선 의회당의 천장이 올려다보였다. 창문 밖에서는 시민들이 오가는 소음이 희미하게 흘러들고 있었다. 말들의 울음소리도 요란했다. 그런데 나는 랭던 경에게 성기를 빨리면서 이 낯선 곳에서 신음을 흘리며 울고 있는 중이었다.
“아… 아, 흐읏….”
결국 나는 굵은 손가락을 밀어 내려는 부질 없는 시도를 포기했다. 담요 대신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창피하여 표정이라도 가리지 않고는 사정할 수 없었다.
습하고 따뜻한 입 속이 성기를 남김없이 조이는 순간 결국 힘이 풀려 버렸다. 성기 끝에서 정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어 랭던 경의 입 속에 계속 정액을 흘려보냈다. 그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어이 입술을 물리지 않았다.
길게만 느껴졌던 사정이 간신히 끝났다. 다 쏟아 내고도 창피하여 얼굴을 가린 채 떨고 있는데 드디어 랭던 경이 축 늘어진 성기를 그의 입 속에서 풀어 주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내 얼굴 양옆에 손을 짚었는지 머리를 둔 시트가 깊게 내려갔다.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렸다. 나를 보는 그와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랭던 경은 손가락 틈으로 엿보는 내 눈앞에서 자신이 물고 있던 정액을 손바닥 위로 길게 뱉어 냈다. 그의 혀끝에 고였다 떨어지는 정액이 내 것이라니.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울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하! 부, 부끄럽습니다. 어째서 보여 주시나요.”
“나는 그대의 혀에 정액이 쌓인 것을 보면 기분이 좋던데. 로엘 당신도 사정하면서 온몸을 떨고 좋아했잖아요.”
“저는, 저는 아닙니다. 입 밖에 해 달라고 빌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낯설었어요? 좋아할 줄 알았더니 그대의 성미가 너무 까다롭군.”
모욕을 주는 게 랭던 경의 목적이 아님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너무 부끄러워했나 싶어 랭던 경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그저 처음이라 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나와 한 적이 없는 모든 행위가 로엘 씨의 처음이라는 걸 자꾸 잊는군. 미안해요.”
나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라 눈을 깜빡였다. 오늘 시작할 때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두어 번 해 주기는 했으나, 예전이라면 행위 중에 그런 표현을 입에 올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침대 밖에서는 자유주의자일지 몰라도 침대 위에서는 봉건 시대의 영주이고 종에게 매질을 서슴지 않는 주인이었다.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겁에 질린 듯 올려다보자 랭던 경이 눈꼬리를 접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기다란 손가락은 그 틈에 엉덩이 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젖은 손가락으로 밀부를 질척하게 문지르며 내 뺨에 키스하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목덜미는 조금 전 그가 자국을 남기지 않았던 멀쩡한 부분까지 온통 빨리고 씹히며 그의 입술 아래서 질척하게 젖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한 게 그렇게 놀라워요?”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어 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랭던 경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익숙해진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저, 저하께서… 침대 위에서 미안, 아, 미안하다는 말, 씀을 하시니… 으응… 익, 숙지 않아서요.”
“내 성미에 맞지는 않지만 어쩌겠어요. 로엘 씨도 거친 섹스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익숙한 건, 흣… 거, 거친 섹, 스예요. 저는 랭던 경밖에 알, 지 못하는걸요.”
“…로엘, 그렇게 말하면 그대를 괴롭히고 울리고 싶어져요. 나는 이미 눈물로 젖은 당신의 얼굴이 얼마나 음란한지 알고 있는 걸.”
손가락이 깊숙한 안쪽에 박히는 바람에 말을 더 이어 나가지 못했다. 나는 신음을 참아 보려 입술 위에 손등을 얹었으나 랭던 경에게 곧바로 손목을 붙잡혔다. 그는 입을 막고 있던 내 손을 치워 버리고 키스했다.
손가락은 안을 부드럽게 풀어 내고 혀는 입 속을 휘저었다.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손가락이 뻑뻑하게 느껴질 때면 그는 예민하게 눈치채고 손을 빼냈다. 그리고 미끈한 정액으로 범벅이 된 입구를 집요하게 넓혔다.
“하, 벌써 다시 섰어?”
랭던 경이 내 입술을 혀로 진득하게 핥아 주며 말했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창피하여 아랫입술이 떨렸다.
“으응… 노, 놀리지 마세요, 저하.”
“얼른 박고 싶지만 조금 더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박으면 아플 테니. 그렇지?”
첫날밤에 받아 보지 못한 배려에 눈가가 금세 뜨거워졌다. 랭던 경은 위로하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꺼풀과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그렇게 울면 내가 미안하잖아요.”
“좋아서, 흣, 그렇습니다.”
“거친 섹스가 그렇게 싫었어요? 나와 맺은 관계가 그대에게 모두 상처였을까?”
“그게… 아니라, 저를… 생각, 응… 새, 생각해 주시는 게 좋아서예요. 그, 모든 게, 흣… 상처였다면… 제가 저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그대와 맺은 관계가 모두 달고 달았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는 그대가 준 상처마저 그리웠어요.”
랭던 경은 내 무릎 뒤를 잡아 누르고 허벅지 뒤편에 입을 맞추었다.
“아, 읏….”
나는 그의 입술 아래서 따뜻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처럼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허벅지 뒤쪽과 안쪽에 거듭되는 입맞춤과, 살을 쓰다듬는 손길이 재회의 기쁨을 피부 밑에 새겼다. 랭던 경은 나를 안아 올려 허벅지 위에 앉히고 귀두로 입구를 문질렀다.
오랜만의 삽입을 앞두고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커다란 손이 긴장한 나를 토닥이며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는 바로 쑤셔 넣고 싶은 걸 참는 듯 목덜미의 흔적에 입술을 누르며 긴 숨을 내쉬었다.
“힘 풀어요.”
“네, 저하… 아….”
언제나 크게 느껴지는 귀두가 부드러워진 입구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커서 밑이 찢어질 것 같아 겁이 났지만 랭던 경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의 얼굴을 보며 아픔을 참았다. 랭던 경은 눈빛으로 나를 위로하며 입을 맞추고, 그의 커다란 두 손안에 폭 담긴 내 둥그런 엉덩이를 옆으로 천천히 잡아 벌렸다.
“아읏, 흐윽….”
밑은 천천히 귀두를 삼켜 냈다. 랭던 경은 어느새 눈물로 젖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
“천천히 넣는다고 하는데 기름병이 없어 한계가 있군.”
“저, 저하의 것이 크니… 흐으응… 어쩔 수, 읏, 없습니다.”
“그대가 작아지면 좋겠다고 투덜거렸던 거 기억해요?”
아파서 젖은 속눈썹을 깜빡대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랭던 경은 가슴팍을 들썩이며 같이 웃고는 내 엉덩이를 조금 더 벌리며 성기를 반쯤 밀어 넣었다.
“하, 빨리 집어넣고 싶어 조바심이 납니다. 잘하고 있으니 힘을 좀 더 풀어 봐요, 응? 긴장할 거 없습니다.”
“흐읏… 저하….”
나는 랭던 경의 도움으로 천천히 그의 품에 주저앉으며 성기를 끝까지 집어넣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마주 안았다. 오랜만에 성기를 받아들이느라 긴장한 등에 땀이 배어났다. 단단한 손이 거리낌 없이 땀이 밴 등을 쓸어내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달뜬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나직이 귀엣말을 했다.
“로엘 그대와 몸을 겹치는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사랑하는 당신의 살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지 못한다면 혁명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도, 흣,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하.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지배하지 않는다면 제가 세상 어디에 속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필요한 건 외로운 자유가 아니라 저를 속박하는 당신의 사랑인걸요.”
나는 그의 손에 의지해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할 것은 많지 않았다. 그의 손을 나를 꽉 끌어안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부드럽게 내 몸속을 짓눌렀다. 성기는 깊숙이 박혀 익숙한 곳에 파묻혔다.
랭던 경이 달콤한 애무로 한차례 녹여 낸 육체는 쾌감에 몹시 취약해져 있었다. 한 차례도 욕구를 배출해 내지 못한 그의 성기는 어느 때보다 크고 단단하게 부풀었다. 페니스가 내벽을 가득 벌리며 들어와 안쪽을 뭉근히 눌렀다. 엉덩이를 움켜잡고 있는 강인한 손길과 안쪽을 꿰뚫는 성기가 나를 천천히 잠식했다.
“으으응… 아! 읏….”
랭던 경은 나를 껴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나는 편히 그의 몸 위로 엎드렸다. 단단한 팔이 등을 감싸 안고 품에 엎드려 있는 내 안을 부드러이 쳐올렸다. 서 있는 내 것이 그의 몸 위에 문질리고 잔뜩 벌어진 밑이 페니스를 버겁게 물었다.
빡빡하게 안쪽을 벌리며 들어오는 성기에 아래턱이 떨어졌다. 신음은 스스로 천박하게 들릴 만큼 가득 쏟아져 나왔다.
“아, 흐응, 아응, 흣….”
“이렇게 박아 주니까 좋은가 보네.”
“예, 흣, 조, 좋습니다… 저하, 읏….”
“후으… 귓가에 신음을 내지르니 꼴려서 거칠게 박고 싶어지는군.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그대가 알아줘야 할 텐데.”
랭던 경은 그렇게 말하며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오랜만에 엉덩이에 떨어진 손길이 이전의 수많은 섹스를 상기시키며 피부를 야릇하게 울렸다.
“아읏, 흣….”
“가볍게 맞는 건 좋아?”
그의 품에 엎드린 채 흔들리며 우는 내 귓불을 랭던 경이 깨물며 물었다.
“네, 흐으응… 자, 자극, 자극적입니다… 아!”
그는 자신의 품에 엎드린 내 밑을 얕게 쳐올리며 손바닥으로 연이어 엉덩이를 내리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남을 게 분명한 강도였다. 그때마다 좋아서 몸이 떨렸다.
그가 허리 짓을 할수록 성기는 점점 더 깊숙이 안쪽을 침범했다. 성감대를 비비는 굵은 혈관과 살덩이의 자극이 너무 강했다. 속도를 늦추려 엉덩이를 비틀어 봤지만 그의 품에 엎드려 있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기지? 정액을 싸 주면 그대가 침을 질질 흘리는 데가. 당신이 좋아하는 곳이 젖어야 제대로 박아 줄 수 있으니 지금 싸 줄게요.”
“아! 흐읍, 읏… 아….”
랭던 경이 등을 꽉 붙들고 안을 쳐올릴 때마다 그의 귓가에 신음을 쏟아 냈다. 나는 랭던 경의 품에서 다시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가 빨아 주었던 귓가도, 그의 입 속에 정액을 한 번 뱉어 내고 연이어 배에 비벼지고 있는 페니스도 쾌감에 범벅이 되었다.
무엇보다 거대한 성기를 음탕하게 삼켜 낸 내벽이 제일 엉망이었다. 랭던 경이 페니스를 박아 넣으면 질퍽하게 들러붙다가, 빠져나가면 다시 빨고 싶어 경련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랭던 경이 주는 쾌락과 따뜻한 체온밖에는.
그가 안쪽까지 성기를 박아 버리고 정액을 흩뿌리는 순간 나는 온몸으로 그를 부둥켜안고 진동했다. 랭던 경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쪽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 고환이 문질리도록 짓눌렀다.
“흐윽… 흐읏, 흡… 저하, 저하… 아!”
“하….”
듣기 좋은 그의 신음 소리와 함께 정액이 안쪽에 흩뿌려졌다. 안쪽이 정액으로 질퍽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나 역시 뒤따라 사정했다.
내벽이 축축이 젖자 아랫배가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달달 떨렸다. 그는 품위에 늘어져 훌쩍이는 나를 안고 등을 토닥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나를 눕히고 올라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랭던 경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랭던 경은 내 뺨을 쓸어내리며 젖은 속눈썹에 키스했다.
“로엘, 당신이 돌아와서 이제야 나는 비로소 행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제가 저하의 곁을, 흣,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죄송할 뿐입니다. 용기를 내어 모든 거짓말을 털어놓아야 했는데….”
쾌감과 후회가 뒤섞여 쉽게 눈가가 뜨거워지고 고인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랭던 경은 떨어지는 눈물에 키스해 주고 입을 맞추며 다시 한번 나를 달랬다.
“나의 어리고 여린 로엘. 그대가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내 잘못을 돌이켜 보지 못하고 당신이 나를 속였다고 나무라기만 했겠지. 모든 게 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몸을 섞는 동안 나와 시선을 맞춰 줘요. 당신의 푸른 눈을 보며 하고 싶습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엔 우리가 처음 만난 노르크의 겨울과 어두운 숲이 담겨 있었다. 짙은 녹색 눈동자 안에 부는 외롭고 차가운 바람을 보며 고개를 들어 섬세한 콧잔등 위에 입술을 누르고 그와 입술을 포갰다.
랭던 경과의 키스는 처음부터 달콤하고 포근했다. 성탄의 밤, 마차 안에서의 키스가 그러했듯.
달짝지근한 캐러멜 시럽을 넘기듯 나는 그의 혀를 빨고 타액을 마셨다. 그는 내 행동에 흥분하여 잠시 머리카락을 거세게 움켜쥐었지만 곧 놓아 주고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나는 랭던 경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상관없었으나 그가 나를 다정히 대하려 애쓰는 모습이 좋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드러운 애정을 느꼈다.
아직 내 안에 머물러 있는 페니스는 키스가 무르익을수록 단단해졌다. 입맞춤은 그의 흔적이 가득해진 목덜미로 이어졌다. 나는 입술의 폭신한 감촉과 따뜻하게 스치는 숨결을 사랑했다. 그가 입술을 누르는 자리마다 피부가 저릿해져 입술 사이사이 떨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랭던 경은 허리 짓을 시작하기 전에 내 엉덩이 밑에 베개를 여러 개 밀어 넣어 하반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하면 그대가 좋아하겠지. 그렇지?”
랭던 경은 짓궂게 속삭이며 반쯤 걸쳐 있는 페니스를 다시 끝까지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는 누워 있는 내 양 손목을 붙들었다. 잡아당기며 쳐올리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지 않았고, 정액으로 안이 젖으면 그가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랭던 경을 향한 애정과 솟아오르는 떨림이 긴장감 위에 겹겹이 쌓였다.
랭던 경은 움찔대는 내 허벅지와 붉게 물들기 시작한 손등을 쳐다보며 성기를 완전히 박았다. 엉덩이가 들려 있어 침대 위에 겨우 닿아 있는 발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랭던 경의 성에 찰 리 없었다.
랭던 경은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성기를 좀 더 안쪽까지, 내가 가장 느끼는 곳까지 완전히 박아 넣었다. 떨리는 안쪽이 굵은 귀두를 조이는 감각에 나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질렀다.
“아으응… 흣….”
“로엘, 내 눈을 봐야지.”
부드러운 지적에 눈동자만 간신히 내려 그를 쳐다보았다. 지시를 지키지 않았다고 나무라지 않는 일이 몹시 낯설었다. 그가 다시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안을 힘 있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저절로 옆으로 벌어지며 경련했다. 쌓인 베개들 위에 놓인 엉덩이는 성기가 드나드는 입구를 그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아! 으응, 아읏… 흐으응….”
“깊숙한 데까지, 하, 잘 들어가는군. 오랜만에 먹는데도 당신의 구멍은 음란하게 좆을 빨아 대요. 이러니 내가 그대의 거짓말을 못 알아챘겠지. 안 그래요?”
“네, 흐읏, 응… 음란, 하게… 아! 빠, 빨아… 흐응, 빨아 대어….”
깊이 들어와 있는 페니스가 성감대를 뭉근히 짓뭉갤수록, 내 혀끝의 단어들이 힘없이 바스라져 그의 말을 끝까지 따라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올라갔다.
“굳이 예전처럼 내 말을 따라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순진한 그대를 음탕하게 길들였군.”
“…저, 저하… 아… 아, 읏, 안쪽이 저리, 흡, 저립니다… 아, 살살….”
“오랜만에 들어온 좆이 반가운지 이렇게 쭉쭉 빨아 대서야…. 천천히 박는 게 더 어렵습니다.”
랭던 경의 얼굴에 만족감과 애정이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감아 버리고 싶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채 그의 표정을 쳐다봤다. 랭던 경만이 느끼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 역시 랭던 경이 내게 성기를 박아 넣으며 욕망을 채우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는 계속 손목을 잡아당기며 조금 더 세게 안쪽에 성기를 처박았다. 발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랭던 경은 내내 다감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두 번째 허리 짓은 첫 번째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내가 강한 쾌감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아파서 애원하는 게 아님을 랭던 경이 아는 것이다.
“아, 저하… 흣, 으응….”
정액이 찌걱대는 소리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끈적하고 요란하게 침실을 울렸다. 낯선 공간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멀리 밀려났다. 벌어진 입은 다물릴 틈이 없었다. 입술은 이미 침으로 질척하게 젖었고 입 주변은 넘기지 못한 채 흘러내린 침으로 젖어 모두 엉망이었다.
퍽, 퍽, 성기가 안을 치댈 때마다 배 속이 울려 온몸이 진동했다. 내 몸이 밀려 나지 않은 건 순전히 랭던 경이 손목을 잡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친 허리 짓에 몸이 밀려 침대 헤드에 머리를 찧으면서도 아픈지 모르고 쾌감에 울었을 터였다.
랭던 경은 집요하게 성기를 물고 있는 아랫부분과 눈물을 떨구는 내 눈을 살폈다.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낯이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나는 침대 위에선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저, 저하… 흐읏, 배, 배 속까지, 힉, 들어오는 거 같, 흐응, 같습니다….”
“아랫배가 요란히도 들썩대는군. 후으… 그렇게 좋아요? 응? 침도 삼키지 못하고 울기만 할 정도로?”
“…네, 흐읏… 더, 더는 사, 사정도… 흐응, 흣… 참을, 수가… 아, 아….”
랭던 경은 당기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내 몸 위로 엎드렸다. 나는 그의 등에 매달려 다리를 더 활짝 열었다. 서로의 얼굴이 옆에 있고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황홀했다. 랭던 경은 눈물과 침으로 젖은 내 뺨을 핥고 빨았다. 둥그런 뺨이 그의 입 속으로 몇 번이나 들어갔다가 나오고, 이미 너덜해진 입술 위는 두툼한 혀가 훑어 주며 위로했다.
“사정해요, 로엘. 흣, 나도 그대의 안에 다시 내 흔적을 남길 테니….”
“아, 으응… 흣… 아!”
랭던 경은 매달린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몇 번이나 내벽을 짓이겨 놓던 성기가 내가 두려워하던 안쪽에, 내가 정신을 놓아 버리는 곳에, 배 속에 처박히며 정액을 쏟아 냈다. 첫 번째 사정할 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이었다.
이미 녹아내린 안쪽에 그가 정액을 퍼붓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넓은 등을 안고 있던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나는 발을 떨고 자지러지다가 강렬한 쾌감에서 벗어나려 엉덩이를 뒤로 물렸으나 랭던 경의 손에 다시 끌려와 성기를 끝까지 먹어야 했다. 바짝 선 내 것에서 묽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랭던 경은 페니스를 빼내지 않고 계속 안쪽을 뭉근하게 비볐다.
“아읏… 흑… 으으응….”
“하… 로엘, 아름다운 눈을 보여 줘요.”
눈물이 가득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랭던 경은 절정에 올라 덜덜 떠는 내게 키스했다. 나는 신음을 그의 입 속에 쏟아 내며 정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엉덩이로 받아 마셨다.
달콤한 절정이고, 온전한 결합이었다. 외로움의 털끝도 우리 사이를 파고들 수 없었다.
정사 후,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나는 그의 가슴팍 위에 뺨을 대고 심장 소리를 찾아 들으며 쉬었다. 두근대며 몸통을 울리는 박동이 나의 것과 같았다. 엉킨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구름처럼 포근했다.
창문 가까이서 들려오는 혁명의 소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지금은 난동 소리도, 사람들의 고함도 우리의 평온을 방해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이 계속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서 지냈습니까? 당신 형의 집을 몇 달 동안 지켰는데 흔적이 보이지 않아 혹여 중간에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몹시 걱정했어요.”
“제 옆집에 살던 베넷 부인을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부인이 손주와 함께 기차 여행에 동행했었죠.”
“베넷 부인의 막내딸인 릴리 메이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윌리엄이 이모네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 같이 신세를 졌어요.”
“릴리 메이? 하! 그 집도 분명히 찾아보았는데!”
랭던 경은 아쉬워하며 주먹으로 시트를 작게 내리쳤다. 나는 여전히 그의 가슴께에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집 뒤쪽에 작은 별채가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저를 찾으러 온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어요. 아마 릴리 부인이 잘 따돌렸을 거예요. 영민한 사람입니다.”
“다들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군.”
랭던 경은 혀를 찼다. 나는 부쩍 수척해진 그의 뺨을 감쌌다.
“저하께서는 얼굴이 왜 이리 상하셨습니까?”
“당신이 떠나니 음식도 먹을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들지 않아 포도주 저장고가 다 동이 났어요. 로엘 그대의 얼굴 역시 많이 상한 것 같습니다. 나를 떠나고 그대 역시 괴로웠던 거요? 푸른 눈동자에 아직 봄이 깃들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저하의 곁을 떠났는데 어떻게 제게 봄이 올 수 있겠어요. 저 역시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밤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일어나면 랭던 경 생각에 눈물이 그치질 않아 눈가가 다 짓무를 정도였습니다. 저하의 존함이라도 뵐 수 있을까 매일 신문을 읽고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턱 끝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짚고 사랑하는 랭던 경을 내려다봤다.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아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제가 했던 일들 때문에 혹시 곤란을 겪진 않으셨어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샤를 대공의 저택으로 찾아와 위험을 알리고 내게 솔직히 모든 것을 알려 줬잖아요. 혁명의 불길은 이미 꺼질 수 없을 만큼 열렬히 타오른 뒤였고, 당신이 골라서 넘긴 이 빠진 정보로는 프리데릭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행이에요. 평생 죄책감 속에 살아갈 뻔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저하, 사실 샤를 대공의 저택으로 찾아가기 전에 제가 새뮤얼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거짓 정보를?”
랭던 경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그의 피부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혁명군이 사우스라인에서부터 진군할 거라는 내용의 정보를 흘렸어요. 제가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저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앨버트가 사우스라인에 추가로 군대를 보냈던 것이군.”
랭던 경은 일어나 앉으며 자신의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눈꺼풀을 내리고 내 손등 위에 정중히 키스했다.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콧날이 시큰하게 울렸다. 그는 양손으로 따뜻하게 내 손을 감싸 잡으며 손등에 입술을 묻고 애원하듯 속삭였다.
“로엘, 에메랄드 저택으로 갑시다. 우리의 집으로 함께 돌아가요.”
‘우리의 집’이라는 말이 가족이 입힌 상처로 가득한 내 가슴 속을 강렬하게 관통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에게 말했다.
“네, 집으로 같이 가요. 그러기 위해 돌아왔어요, 테런스.”
랭던 경은 내가 대답하고 나서도 한동안 손등에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뒷머리에 입을 맞추고 검은 머리카락에 뺨을 얹었다. 낯선 의회당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집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안식처는 서로의 영혼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랭던 경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지금의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