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테런스 랭던 (3)
혁명은 소란했다. 커다란 숲에 둘러싸여 늘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에메랄드 저택조차 혁명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닫혀 있는 창문 너머에서 군중들의 성난 함성과 총소리가 밤낮으로 도시를 흔들었고, 공중에는 희미한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떠돌았다.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계획해 온 혁명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다른 나라의 혁명을 역순으로 밟아 가는 데 있었다. 샤를 대공과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새 헌법의 초안부터 작성했고 내각을 구성하는 데 몇 년이나 공을 들였다. 그렇게 모든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혁명이라고 불릴 오페라를 노르크의 무대 위에 올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려야만 생명력을 얻는 혁명의 본질은 완전히 사멸되지 못했다. 자유의 바람 아래 시민들의 분노는 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도시에 피비린내와 광기를 흩뿌렸다. 굶주린 시민들은 농기구를 손에 쥐고 귀족의 성을 돌무더기로 만들었다.
악명이 드높은 귀족들이 벌거벗겨진 채 끌려 나왔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살려 달라 빌다가 맞아 죽기도 했고, 탑에 걸린 몬치와 워맥의 머리통을 보며 내일은 혁명군이 자신의 목을 잘라 갈까 떨었다.
그러나 혁명의 광기에도 평소 존경을 얻었던 귀족들의 저택은 시민들에게 공격받지 않았다. 시민들의 분노는 겉으론 무질서해 보였지만, 그 안엔 자유를 누릴 만한 품격이 엄연히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이제 샤를 대공과 비밀스레 연락을 취할 필요가 없어졌다. 포도주 장수로 위장해 에메랄드 저택에 서신을 나르던 자유주의자는 당당하게 편지를 들고 나를 방문했다. 샤를 대공이 대낮에 직접 찾아와 응접실에서 편히 논의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랭던 철도사는 혁명 전과 다름없이 운영됐다. 그 때문에 서재 책상 위엔 내가 결재해 주길 고대하며 곳곳에서 몰려든 수많은 문서가 눈더미처럼 쌓여 갔다. 그러나 로엘이 떠나 버린 내 손엔 펜보다 포도주 잔이 들린 날이 많아졌다.
늦은 밤 집사가 일과를 보고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나는 오후부터 마신 포도주에 정신이 반쯤 엉망이 된 상태로 샤를 대공이 보낸 서신을 읽어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들어오시오.”
“공작님, 심부름꾼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집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다 난장판이 된 서재를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스툴에 발을 올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슨하게 기댔다. 가벼워진 포도주병을 들어 빈 잔에 붉은빛을 담았다. 벌써 치밀어 오르려는 화를 억누르며 집사에게 물었다.
“로엘은 찾았어요?”
“그게….”
집사가 대답을 망설이자마자 종잇장처럼 얇아진 인내심이 쉽게 폭발했다. 나는 화가 나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 위에 엉망으로 쌓여 있는 서류 더미가 쏟아져 수십 장이 바닥에 뒹굴었다.
“보나 마나 못 찾았겠지. 무능한 자들. 로엘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영민하게 일을 처리했다 해도 그의 나이 고작 스물한 살입니다. 차라리 개를 풀어 그 젖 냄새를 쫓으라 했어도 그 멍청한 작자들보다는 빨리 찾았을 거요.”
“계속 도미닉 서튼 자작님 댁과 베넷 부인의 집 앞을 감시하는 중입니다. 근처 기차역에도 사람을 심었습니다.”
“베넷 부인의 손주인 윌리엄이 학교에 다니며 묵는다는 집은?”
아까 전 유리 재떨이 위에 올려 둔 여송연을 집어 입에 물었다. 독한 연기를 머금어 봐도 로엘이 나를 떠난 잔인한 사실이 덮이지 않았다.
초조함과 분노, 슬픔과 술기운에 손가락이 떨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리한 여송연이 들들거렸다. 집사인 아서 도프 씨는 내 눈치를 보며 어렵게 입술을 뗐다.
“그 집엔 로엘 서튼 남작님께서 가 보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라지신 다음 날 베넷 부인과 릴리 메이 부인의 집을 찾았을 때도 흔적이 없었구요.”
“그래도 다시 사람을 보내도록 해요. 젠장, 로엘이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녀들과 하인들은 아무것도 아는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번 제대로 물어봤어요?
“네, 공작님.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습니다. 특히 하녀인 애니에게요. 그러나 다들 이상한 사람을 본 적도, 남작님께서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고 느낀 적도 없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엔 수도 안의 마부들을 다시 뒤져서 로엘을 태웠다는 사람을 찾아내요.”
“죄송합니다, 공작님.”
나는 집사가 나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넓은 서재를 걸어 다녔다. 벽에 걸린 환한 가스등이 내 발밑에 깔린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 줄이길 반복했다. 긴 한숨을 내쉬자 여송연 연기가 뿌옇게 피어났다.
서재는 내가 하루 종일 피워 댄 시가 연기가 가득 차 안개라도 낀 듯 눈앞이 흐렸다. 나는 괴로움에 손가락이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며 나직이 뇌까렸다.
“어떻게 나를 속이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도망을 갈 수 있을까.”
나는 로엘을 그날 안가로 데려가지 않은 일을, 에메랄드 저택에 묶어 두고 나오지 않은 일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 하얗고 가는 발목에 붉은 멍이 가시지 않도록 매번 족쇄를 채워 둬야 했는데….
가슴속엔 로엘을 향한 그리움과 원망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로엘이 다시 돌아오면 둥글고 흰 엉덩이에 손바닥과 회초리로 붉은 자국을 잔뜩 남기고 그만해 달라 빌 때까지 멍이 든 피부를 주무르고 성기를 박으며 괴롭히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울며 비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느낀 바다와 같은 배신감에서 한 동이의 소금물 정도야 퍼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덜어 내고 덜어 낸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용서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것인지.
로엘이 자신의 죄가 밝혀지는 일을 두려워했음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내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도망갔단 사실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로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하여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건만, 사소한 편지를 부칠 주소조차 주어지지 않아 나의 돈과 명예로도 이 비극을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로엘이 지은 죄가 무겁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몹시도….
로엘이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물론 로엘을 용서하려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기만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 이 계획에 걸린 삶이 너무 많아서였다.
현재 귀족들은 노르크의 비옥한 영토를 독식하고 있었다. 가난한 평민들은 자신의 밭이 아닌 그들의 땅을 일구었고, 그들이 세를 준 집에서 돈을 내며 지친 육신을 쉬었다. 평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귀족은 평민을 가난에서 구제할 어떠한 정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그럼에도 내가 로엘의 죄를 가혹하게 책망하지 않고 그를 언젠가 용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이 혁명에 로엘의 삶 역시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혁명은 그의 인생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역사의 흐름 아래 그는 열여섯에 아버지를 잃고 형의 학대에 시달리며 자랐다. 등 뒤에서는 로엘이 아버지의 목을 잘랐다는 비난과 몸을 판다는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유주의자라는 이유로 로엘의 삶이 무너질 때마다 나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본 로엘 서튼은 이 계획에 직접적으로 포함된 가장 어린 희생자였다.
나는 3층 트렁크에 남겨진 손때 묻은 <평등론>이, 로엘이 남기고 간 편지가 그의 진심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지은 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내가 로엘을 연민하고 그를 용서하려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로엘을 사랑한다 하겠는가.
“로엘… 그대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내게 당신을 미워하고 원망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외로이 버려두다니….”
나는 결국 책상 앞으로 돌아가 어느새 빈 잔을 가득 채우고 핏빛 술로 마음을 채웠다. 뜨겁게 물드는 가슴 속엔 아직 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다음 주에도, 그다음 달에도… 나는 로엘을 만나지 못했다.
***
타오르던 분노는 심지가 다하여 꺼졌다. 나는 더 이상 로엘을 만나면 어떻게 괴롭혀 줄지, 그 입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지 상상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미 본 로엘의 표정과 들었던 목소리, 그가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을 복기하고 로엘이 적어 준 서신들을 되풀이해 읽었다.
평소처럼 술에게 내 눈물과 고통을 바치고 서랍을 열어 로엘이 준 편지들을 뒤적였다. 긴 글이 적힌 서신을 꺼냈는데 그 사이에서 작은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로엘이 준 글이 아닌 줄 알고 치우려 했는데 작은 종이 위에 쓰인 익숙하고 아름다운 그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그가 적어 주었던 짧은 쪽지였다.
랭던 경, 저는 사실 저하와 보낸 오늘이 첫날밤이랍니다.
로엘이 나와 처음 관계를 맺은 후 썼던 글귀였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진실한 문장이 날카로운 갈고리 끝에 잊었던 기억을 꿰어 가져왔다.
‘로엘 씨의 농담을 가져가겠습니다.’
나는 어리고 소심한 로엘이 어렵게 털어놨을 진실을 눈앞에 두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지금 보니 차마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펜촉 끝에 담아 내게 전해 준 것이었다.
그 문장을 쓰던 로엘의 옆모습과, 울어서 퉁퉁 부어 있던 눈꺼풀이 생생히 떠올랐다. 첫날밤 힘겨워하며 비는 로엘에게 창부라고 조롱했던 내 목소리도….
내가 서튼 경의 아들이 남창이 되었다는 소식에 실망하지 않고 로엘을 편견 없이 보려 했다면 로엘이 과연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었을까. 나는 로엘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아봐야만 했다. 그랬다면 그가 프리데릭의 첩자로서 오랜 시간 마음을 졸이지도, 내게 창부라는 힐난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낙서로라도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로엘의 가여운 마음을 더듬듯 손끝으로 단정한 필체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 쪽지를 발견하고 밤새 술을 마셨지만 그날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깊은 밤 처음으로 로엘이 아닌 내가 그에게 입힌 상처를 생각했다. 내 죄에 대한 성찰이었다.
나는 로엘이 새뮤얼의 첩자 노릇을 하며 나를 속이고 도망갔다고 원망하느라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돌아본 내 죄과는 로엘에게 너무 가혹했다.
관계를 할 때면 아프다는 로엘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어느 날은 혼낸다고 결박해 놓고 다른 사람에게 묶여 본 적이 있다는 거짓말에 눈까지 가려 둔 채 어둠 속에 방치했다. 울면서도 창부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로엘의 심정을 처음으로 헤아렸다.
그때 로엘도 혹시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술기운이 눈가를 뜨겁게 덥혔다. 혁명에 성공하면 나를 떠날 줄 알았던 괴로운 후회가 밀려와 가슴속 곳곳에 익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윌리엄에게 지은 죄는 혁명의 성공으로 절반쯤 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만 로엘에게 지은 죄는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로엘이 내게 돌아와 주지 않는다면 신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결코 그 죄를 씻어 내지 못할 것이다.
이른 새벽, 거인으로 변한 포도주가 나를 밟아 혼절시킬 때까지 나는 로엘과의 첫날밤을 곱씹고 곱씹었다.
그날 이후 점점 내 소망은 단순하고 단출해졌다. 로엘이 에메랄드 저택의 문을 열고 되돌아오는 것, 그 하나만이 내 유일한 바람이 되어 갔다.
집사 아서 도프 씨가 오랜만에 유모 마틸다를 침실에 데려왔다. 마틸다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부터 젖혔다. 봄 햇살이 몹시 불쾌해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나는 로엘이 내 곁에 없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밤새 술을 마시느라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마틸다가 바닥에 앉은 나를 일으키려 애썼다.
“테리 도련님, 또 밤새 술을 드신 거예요? 이러지 마세요. 도련님께서는 랭던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유모…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마시오.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셔도 잠이 들질 않으니 어쩌겠어요? 정신을 잃을 때 말고는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산단 말입니까.”
“설마 밤새 바닥에서 술을 드신 거예요?”
“서재에서도 마시고… 침대에서도 마시고… 그냥 닥치는 대로 마셨어요.”
꼬부라진 발음으로 대답하며 부축하려는 유모의 손을 밀어내고 혼자서 몸을 일으켰다. 마틸다는 몹시 서운한 기색으로 눈물을 훔쳤으나 이제는 거짓으로도 유모의 기분을 챙길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안에도 피부에 닿던 로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내 머리카락은 억세고 뻣뻣하기 짝이 없었다.
“집사님, 간밤에 로엘의 소식은 들어온 게 있나요?”
아무런 희망 없이 몇 달째 되풀이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더 늘려 봤지만 아무도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했는데 로엘 한 명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알아내야 하는 거 아니오?”
나는 이제 로엘에게도, 로엘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더는 화를 낼 기력이 없었다. 집사 역시 더는 전해 줄 변명이 없는 듯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수도 근처의 모든 호텔과 여관, 마부들을 붙잡아 하나하나 물어봤는데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공작님.”
“혁명 때문에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설마 로엘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좌절감이 내 존재를 짓눌렀다.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로엘이 도망간 날이 다시 떠올랐다.
레스토랑에서 로엘이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말을 몰아 숲길을 달릴 때만 해도, 로엘이 그동안 나를 속여 왔다는 배신감과 묻고 싶은 질문들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저택에 도착해 로엘을 찾으니 모두 ‘남작님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넓은 저택 어딘가에서 로엘이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산책 하나, 외출 하나 내가 일일이 통제해도 순종하는 사람이 먼저 나를 떠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자만이었다.
로엘이 정말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당황했다. 뒤늦게 지배인이 건네주었던 종이가 생각나 품에서 꺼내 읽고 나서야 그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편지를 좀 더 빨리 펼쳐 보았다면, 급히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나는 집사와 유모를 밖으로 내보냈다. 침대엔 내가 읽다가 놔둔 로엘의 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해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몇 주째 되풀이해 읽고 있는 그의 마지막 편지를 다시 손에 쥐었다.
…수도에는 제가 창부라는 거짓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였고 저는 그 소문을 이용해 저하께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랭던 경께서는 저를 남창이라고 굳게 믿으셨기에 서툴기 짝이 없는 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지요. 평생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성관계에 관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 제겐 무척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에메랄드 저택에서 일했던 빨간 머리 하녀 샬롯을 기억하시나요? 그녀 역시 새뮤얼 프리데릭의 첩자였습니다. 제가 계단에서 떨어져 저택에 묵게 된 건 샬롯이 프리데릭의 명령대로 한 일이었어요. 저하께서는 아픈 저를 정성껏 간호해 주셨지요.
저를 걱정해 주시는 다정한 저하의 모습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즈음 진심으로 첩자가 된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미닉은 프리데릭에게 미리 돈을 받아 냈고, 저는 그 돈을 갚느라 첩자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새뮤얼은 제가 기차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샤를 대공에게 해로운 약을 먹이라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랭던 경, 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약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새뮤얼이 보낸 두 번째 첩자가 기차를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났고, 저하께서 저를 보호하다 다치시고야 말았죠.
저는 더 이상 첩자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주신 선물들을 전당포에 넘긴 돈으로 새뮤얼에게 도미닉의 빚을 갚았지만 금액이 한참 모자랐습니다. 모자란 금액을 메우기 위해 저는 결국 새뮤얼에게 당신의 비밀 장부를 넘겼습니다. 그것이 제가 당신 몰래 센트럴 호텔에서 프리데릭을 만났던 이유입니다. 프리데릭과는 어떠한 부정도 없었음을 맹세합니다.
저하께서 저를 미워하고 증오하시는 건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약한 저는 당신이 제게서 사랑을 거두어 가는 모습을 볼 용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디 비겁한 저를 용서하지 말아 주세요.
랭던 경, 마지막으로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하께 저는 비열한 거짓말쟁이일 뿐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몇 가지 거짓말을 제외하고는 저는 당신을 늘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중 가장 순수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대가 물으신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저하를 사랑한 제 마음이라구요.
사랑해요, 테런스.
죄책감에 당신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 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건강하세요.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당신의 로엘 서튼으로부터.
관자놀이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잠시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또 귀찮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검지로 눈가를 문지르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나중에 찾아오시오.”
“공작님, 샤를 대공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도록 하세요. 곧 내려가겠습니다.”
“네, 공작님.”
마시던 술을 내려놓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으나 로엘을 찾지 못한 슬픔과 버림받은 좌절이 쉽게 가릴 리 없었다.
로엘은 나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없는 매분 매초가 나를 죽이고 있는데 로엘이 나를 떠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목을 짓눌렀다.
나는 응접실 문 앞에서 포도주에 취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동생에 대한 속죄를 끝내려는 일념이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햇살 아래 샤를 대공이 앉아 있었다. 대공은 몹시 놀란 기색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랭던 경!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은 윌리엄의 죽음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로엘을 영영 찾지 못한다면 동생의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내가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둘 다 나를 떠나기로 택했다는 점에서 같은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샤를 대공의 앞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대공. 앨버트 3세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망명할 나라가 추려졌습니다. 확정이 되면 곧 항복을 선포하고 망명국으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머리가 몹시 아팠으나 마침 나도 샤를 대공에게 할 말이 있던 터라 정신을 바로 차려야 했다. 하녀가 차를 내왔다. 나는 괴로워 술에서 깨고 싶지 않았으나 대공과 얘기하기 위해 잠시 따뜻한 홍차를 마셨다.
대공은 내 안색을 살피더니 한숨을 쉬며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프리데릭은요.”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곧 잡게 되면 그들의 목을 잘라 성문에 내걸 예정입니다.”
“대공의 마음은 변함없으신 겁니까?”
중요한 결심을 말하기에 앞서 샤를 대공의 확답이 필요했다.
“네, 저는 랭던 경과 혁명군에게 한 약속을 지킬 예정입니다. 저는 허수아비 왕으로 남고 뒤로 물러나 모든 권력을 의회에 일임하겠습니다. 시민들이 뽑은 사람이 의회를 이끌어 나갈 것이고, 작위 제도는 남기겠지만 그로 인한 차별은 법제상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귀족들의 영지 역시 그들이 정당한 값을 치르지 못한다면 국가 소유로 환속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가질 기회를 줄 것입니다.”
“드디어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군요. 농부들이 자신의 땅을 가질 기회도요.”
“그렇습니다. 랭던 경께서 꿈꾸시던 그대로입니다.”
나는 푸석한 얼굴을 들어 열정에 들뜬 샤를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고귀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므로 시민들에게 권력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공은 오랜만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랭던 경, 이렇게 지내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귀족의 권리를 내려놓겠지만 귀족의 의무까지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두 가지는 몹시 다른 일입니다.”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피곤한 눈을 들어 샤를 대공을 쳐다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대공.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나는 랭던이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언제든 나약해질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입니다.”
“혁명이 끝나 가는 때입니다. 정신을 바로 차려 정치적인 조언을 해 주셔야죠. 새 헌법을 만드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셨잖습니까. 게다가 철도사는요. 시민들의 살림살이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공.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으로 대공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로엘이 프리데릭의 첩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겠죠.”
“…그렇습니다.”
대공과 나는 로엘에 대해 잠시 얘기했다.
그 후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 왔던 혁명의 끝에 대해 처음으로 대공에게 털어놓았다. 내게는 오랜 시간 고심해 온 혁명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중간 과정은 정치적 상황에 의해 끝없이 수정되었지만 시나리오의 끝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긴말을 다 마치자 대공이 잠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깊은 고뇌로 파르르 떨렸다.
대공은 눈가가 붉어진 채 품에서 시가를 꺼냈다. 그가 내게 시가를 내밀어 나는 어제 밤새 피운 여송연을 다시 입에 물었다. 우리는 각자의 여송연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몇 모금 빨아내고서야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저택을 나설 때까지 말없이 시가를 태웠다.
나는 샤를 대공을 홀 바깥까지 배웅했다. 오랜만에 직접 쬐는 햇볕이 뜨거웠다. 그러고 보면 로엘과 나는 추위가 시작될 때에 만났다. 노르크의 10월 말이었다.
만났던 시기가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같이 꽃을 구경한 일도, 따뜻한 태양 아래서 산책을 한 일도 없었다. 늘 추웠고 폭설이 내렸으며 아무리 단단히 여며도 칼날 같은 바람이 피부를 시리게 베었다.
우리가 좀 더 평화로운 시대에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혁명이 마무리되고 꽃이 피어나는 4월의 봄날에, 역사가 우리의 삶을 휩쓸어 버리는 일에 관심을 거둬 버리고 난 후에….
나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빈 잔을 포도주로 채웠다. 샤를 대공의 말대로 내 일을 모두 팽개쳐 둘 수는 없었다. 당장 닥친 중요한 결정이라도 몇 가지 내려야 했으나 그러려면 어느 정도 취해야 했다. 술을 마신 뒤에야 맨정신으로 일하거나 잠잘 수 있다는 것이 로엘이 나를 떠난 후 발생한 역설이었다.
나는 술에 취해 곤죽이 되고서야 철도사에서 보내온 서류들에 사인하고 혁명군에 전달할 서신을 작성했다. 그리고 다시 로엘의 편지를 읽어 보고 나를 사랑한다 적은 글씨 위에 키스했다. 로엘에게 건네는 입맞춤이었다.
아, 로엘 서튼이 내 곁에 없다면 나는 노르크의 잔인한 겨울을, 핏빛의 혁명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한단 말인가. 로엘이 없는 혁명의 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