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 리스트 4권
16. 리베라, 리스트
처음으로 도미닉에게서 먼저 편지가 왔다. 2층에 있는 작은 살롱에서 강아지들과 앉아 차를 마시며 쉬고 있다가 서신을 전달받았다. 편지를 가져다준 사람은 붉은 머리 샬롯이었다. 나는 봉투를 뜯으려다 말고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프리데릭 경에게 제가 그만두었다는 얘기는 들으셨나요?”
“네, 서튼 남작님. 그래서 저도 오늘까지만 일을 하고 에메랄드 저택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제가 남작님께 저지른 잘못은 너그러이 잊어 주세요.”
뜻밖의 인사에 편지를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밀쳐 떨어트린 샬롯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으나 그녀의 의지로 한 일이 아니라 딱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도 않았다. 샬롯이 떠난다니 정말 내 역할이 끝났구나 싶어 안도감이 연무처럼 피어올랐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샬롯은 고개를 숙이고 살롱을 나갔다. 무사히 끝나는 것이 서로 다행스러운 관계였다.
서튼가의 붉은 봉랍이 붙어 있는 봉투를 뜯는 동안 도미닉의 호통이 들리는 듯해 손가락이 떨렸다. 아마 새뮤얼에게 내가 첩자 일을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신을 보낼 리 없을 테니까.
나는 도미닉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모두 랭던 경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도미닉이 폭발 사고를 겪은 동생을 찾아오지 않은 행동에 온갖 변명을 갖다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나 스스로가 도미닉이 지난날 내게 한 행동을 납득하지 못했다. 랭던 경을 통해 진실한 애정을 너무 많이 맛봤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도미닉의 서체가 보였다.
로엘 서튼에게.
어제 새뮤얼을 만나 모든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내게 상의도 없이 모든 일을 정리할 수가 있지? 너의 이기심에 치를 떨며 잠 못 이루다 펜을 잡았다. 나는 분명히 네게 과수원 근처에 있는 저택을 매입했다고 얘기했어. 잔금을 치르지 못하면 집주인에게 돈을 물어 주어야 해. 지금까지 네가 새뮤얼을 위해서 일한 시간 역시 몽땅 헛짓거리가 되는 거야.
하긴, 너는 어려서부터 악마 같은 부분이 있었지. 그게 네 본성이야. 지독한 이기심! 그런 놈이기에 아버지의 목을 잘라서 피를 뒤집어 써놓고도 너 편한 대로 그 기억을 잊어버린 것이다.
너는 네가 열여섯 살이라 아버지의 목을 자르긴 너무 어렸다고 말했지만, 상자에 죽은 아버지의 머리를 담아 태연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탄 건 너야. 그 기억까지 잊어버렸다고 하진 않겠지? 나는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네 어리석은 주장을 믿어 본 적이 없다.
이 편지를 읽는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랭던 경과 섹스를 하면서 뒹구는 중인 건 아니겠지? 네가 창부라는 소문은 처음엔 분명 헛소문이었으나 지금은 명백한 진실이야. 남창이자 더러운 남색가. 새뮤얼에게 60만 골드를 가져왔다지? 그 돈이 있었으면 내게 주었어야지 새뮤얼을 가져다줘?
그럼 이제 첩자 일도 때려치웠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오도록 해. 오는 즉시 흠씬 두들겨 패 줄 테니까. 에메랄드 저택에서 비비적거릴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양심이 있다면 랭던 경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겠지.
도미닉 서튼으로부터.
신랄한 나무람에 내 뺨은 온통 눈물로 젖었다. 내가 랭던 경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소리에는 눈물이 뺨을 데울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나는 랭던 경이 나를 버리기 전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이 도미닉이 지적한 내 악마 같은 이기심일 것이다.
나는 차마 답장을 쓰지 못하고 벽난로에 도미닉의 편지를 태워 버렸다. 눈의 부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눈 주변이 붉어진 채로 랭던 경에게 미리 허락받았던 산책을 나섰다. 본래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갈 예정이었으나 도미닉의 편지에 힘이 빠져 혼자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마구간 근처에서 기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그걸 들고 정원을 쏘다니다가 녹지 않고 쌓인 눈을 발견하면 가지 끝으로 랭던 경의 이니셜인 ‘T.L.’을 적었다.
겨울이 끝 무렵이었지만 봄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바람은 눈동자가 시릴 만큼 찼다. 코까지 목도리를 끌어 올려 덮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나는 저택 모퉁이를 돌며 무심코 옆을 쳐다봤다가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저택 뒷문 앞에 랭던 경이 서 있었다. 그는 등이 무척 쓰라릴 텐데도 통증을 참고 몸을 굽혀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비밀 가림판 뒤에 분필로 쓰여 있는 암호는 역시 내 추측대로 랭던 경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알은체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동그란 입김이 허공에서 여러 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랭던 경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뒷문으로 향했다. 덮개를 열자 글자는 ‘E/DC/34R’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포도주 저장고로 가서 랭던 경이 있나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랭던 경은 이미 포도주 창고를 떠났는지 벽에 걸린 십자가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랭던 경을 찾았을 때는 퍼렐 의원이 그의 치료를 마치고 등에 붕대를 감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랭던 경이 보여 주지 않아 여태 제대로 등을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퍼렐 의원에게 흉터가 남을 것이라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저하, 치료는 잘 끝나셨나요?”
그는 침대에서 셔츠를 여미며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냉담한 것은 당연했다. 그에게 아직 새뮤얼을 만난 이유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랭던 경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이 안쪽에서부터 조금씩 곪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시야 끝에 서로가 걸려 있음은 분명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저하, 집에 잠깐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이번엔 정말 도미닉 서튼을 만나는 거요?”
작은 칼날이 파고드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에 어깨가 저절로 움찔했다.
“…네.”
“그렇다면 나가지 말아요.”
랭던 경은 벗어 둔 조끼를 어렵게 입으며 말했다. 도미닉을 만나지 말라는 소리에 잠시 놀랐으나 일단 손을 내밀어 그가 베스트를 제대로 갖춰 입을 수 있도록 도왔다. 랭던 경은 내 손길이 닿자 힘겨운 움직임을 멈추고 내가 그의 매무새를 정돈하고 단추를 끼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나는 서글픔을 누르려 애썼다.
“제가 저하께 거짓말을 한 일에 대한 벌인가요?”
“그 일과는 상관없어요. 도미닉은 해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답 없이 그의 조끼 단추를 하나씩 잠그는 나를 보며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웬일로 편을 들지 않습니까? 이제 당신도 그가 해로운 사람인 걸 아는 거요?”
“…그렇습니다. 만나는 게 싫으시면 그냥 답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꼭 만날 필요는 없어요.”
“그게 좋겠습니다. 웬일로 편지를 보낸 모양이군. 무슨 내용의 편지였습니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평소처럼 저의 행실을 나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신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네? 아, 형님이야 제가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을 항상 원망하죠.”
랭던 경은 감정을 크게 표출하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도미닉을 경멸하는 기색이 훨씬 강해졌다.
왜일까? 전에도 도미닉을 싫어했지만 집에 가는 걸 반대하진 않았으면서. 며칠 전 내가 정말 도미닉을 만나는 줄 알았을 때는 에메랄드 저택으로 부를 걸 그랬다고 말했으면서.
랭던 경은 이번엔 도미닉을 저택에 부르자는 말조차 없이 녹색 눈동자에 불쾌한 기색만을 가득 띄웠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내게 혐오감을 느껴서 도미닉을 향한 미움도 커진 걸까?
가정일 뿐이었지만 랭던 경이 나를 혐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걱정이 금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목이 메고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로엘, 왜 금세 풀이 죽었어요. 집에 못 가게 해서 서운해요?”
뜻밖의 다정한 말투에 놀라서 고개를 얼른 들었다. 어제부터 죄책감이 너무 심했던 까닭에 그의 말투가 조금 나긋해졌을 뿐인데도 작은 기쁨이 샘솟았다. 뺨은 희망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힘겹게 침을 넘기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닙니다. 풀이 죽은 게 아니라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풀이 죽으면 입술이 나오고 눈동자가 젖습니다. 서운한 마음은 알아도 그 외출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몰래 갈 생각은 말아요.”
“제가 비록 며칠 전 저하께 거짓말을 했지만 하늘에 맹세코 더는 당신을 속일 생각이 없어요. 저를 향한 의심을 거두기 어려우시겠지만 확신이 생기실 때까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외출을 허락하시지 않아도 좋아요. 저하께서 다시 저를 예뻐하실 수만 있다면 침대에서든 밖에서든 순종하고 싶습니다.”
나를 보는 랭던 경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 눈동자엔 오늘의 욕망과 어제의 분노가 뒤엉켜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할 때 보이는 차가운 눈빛이 아니라 나를 녹이고 짓밟고 싶어 하는 뜨거운 시선. 나는 그 눈빛이 그리웠다. 그는 나를 겁박하는 투로 말했다.
“로엘 씨는 겁이 없군. 나는 당신을 평생 가둬 둘 수 있는 더러운 욕망도, 권력도 모두 가지고 있어요.”
“저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지금 저를 가두셔도 괜찮아요. 다만….”
“다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랭던 경이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 그사이 젖은 속눈썹을 들어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다만 애정으로 가두셔야 해요. 저를 미워하고 잘못을 훈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매일 저와 얘기를 나눠 주시고 저만 안으신다면… 저하께서 저를 밖에 내보내시지 않아도 제 육신과 영혼이 당신께 속해 있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로엘… 항상 그런 말로 나를 부추기지 말아요. 당신을 괴롭히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 봐도, 그대의 고통을 통제하고 싶은 어두운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침대 위에서 당신을 지배하고픈 쾌감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 것은 나의 타고난 귀족적 독성(毒性)이에요. 나는 지금도 그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요. ”
“…저는 당신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미 엉망진창이에요.”
나는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랭던 경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는 내 입맞춤을 피하지 않았다.
며칠 만의 키스였다. 입술 위에 닿는 그의 숨결까지 애틋했다.
나는 진심으로 당장 랭던 경이 그 섬세한 입술을 열어 내게 연인이 되어 달라 다시 청해 주길 바랐다. 랭던 경을 속였으면서도 나는 그의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을 절대로 놓아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나의 이기적 독성이었다. 벌어진 내 입술 사이를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혀를 입에 가득 머금고 빨았다. 체액을 빨아 먹고 맞닿은 혀를 문질렀다. 거짓말을 들킨 후 처음으로 그가 키스를 받아 주었다는 사실이 떨렸다. 랭던 경은 고개를 살짝 숙여 혀를 좀 더 깊숙이 밀어 넣고 나를 탐했다.
서로의 입술이 완전히 포개져 우리 사이의 틈이 메워질 때마다 나는 그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키스는 이전과 변함없이 똑같았다. 나는 내 거짓말이 우리 사이를 망치지 않을 거라는 낙관적인 희망에 불타올랐다.
“아….”
내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이번엔 랭던 경이 먼저 내게 입술을 맞댔다. 두툼한 혀가 내 속의 점막을 빠짐없이 훑고 단단한 치아는 내 혀끝을 물었다. 잘근잘근 씹힐 때마다 올라오는 통증과 내가 아파할 때마다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 역시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도무지 숨을 쉴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몰아붙여지다 그가 입술을 잠시 떼어 내면 급하게 숨을 들이켜 봤으나, 그 숨을 다 삼키기도 전에 다시 그가 내 혀를 빨아들였다.
“…흡….”
나는 내 곁에 앉아 있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잡고 의지하며 무너지려는 몸을 가누었다. 실수로 손을 조금 움직였다가 어느새 단단해진 페니스가 손끝에 닿았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 손을 피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몹시 두려워하는 구음을 해서라도 랭던 경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를 향한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나는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저하, 구음을 할까요?”
랭던 경은 눈을 내리깐 채 내 입술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런 질문은 무릎을 꿇고 해야지.”
무거운 목소리가 내 다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듣는 명령조의 말투와 복종을 요구하는 눈빛이 날카로워 갈퀴에 긁힌 듯 배 속이 뜨끔거렸다.
뜨겁게 울렁이는 몸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전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행동인데 이제는 모두 섹스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랭던 경 외의 사람은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섹스하는 방식에 내가 길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하, 제가… 빨아도 될까요?”
서툰 질문에 랭던 경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나는 그가 저질스러운 단어를 사용하길 바란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입술을 옴찔거렸다. 그런데 그는 평소와 달리 잠시 고민하다가 별다른 지적 없이 나를 다음 단계로 보내 주었다.
“그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니 맛있게 핥고 빨아 봐요.”
“…네.”
나는 조금 주춤했다. 언뜻 들으면 예전과 똑같이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으나 그는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도, 나를 모욕하는 말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말투도 평소보다 몹시 정중했다.
잠시 의아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싶어 손을 바지 앞섶에 가져갔다. 옷 위로 부풀어서 두툼한 성기의 실루엣이 비쳤다. 나는 바지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샅에 얼굴을 묻고 바지 위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머리카락이 그의 굵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군. 그대가 상당히 서툴렀지.”
“지금도 몹시 서툽니다.”
“…그것도 그렇군. 왜 그때는 몰랐을까.”
랭던 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혀를 내밀고 뜨거운 기둥을 진득하게 핥으며 랭던 경을 올려다봤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말투에 배어나는 씁쓸함을 모르고 지나치기엔 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관계가 너무 깊어져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일단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저하의 것이 너무 커서 빨기가 어려운걸요.”
입을 벌리고 페니스를 가득 담았지만 역시나 절반밖에 들어가질 않았다. 혓바닥과 입천장에 성기를 가로지르는 굵은 핏줄이 생생히 느껴졌다. 곧 나를 채울 남자의 살냄새와 뜨거운 열기도.
굵은 귀두가 입 속을 불편하게 눌렀지만 참을 만했다. 이전엔 역하게만 느껴졌던 것들에 미묘한 기대감이 섞여 들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고갯짓을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붉어진 뺨도, 굵은 귀두가 목구멍을 누를 때마다 젖는 눈꺼풀도 숨기지 않았다. 랭던 경은 구음하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감아쥐었다. 당연히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거칠게 박거나 나를 부끄럽게 하는 말을 하리라 예상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굵은 손가락은 내 머리카락을 쥐고만 있었다. 잡아당겨 박아 넣고 싶은데 인내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랭던 경은 커다란 그의 것을 핥고 빠느라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내 뺨을 간간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 힘들지 않아요?”
나를 염려하는 질문에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처음 구음을 할 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걱정이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약한 기침을 하며 목구멍에 박힌 성기를 빼냈다. 쿠퍼액과 섞여 끈적해진 침이 귀두와 아랫입술 사이에 매달려 아래로 불룩한 호선을 그렸다. 나는 혀끝을 가져가 다시 그의 것을 핥으며 말했다.
“힘들지만… 거칠게 하셔도 저는 괜찮아요.”
“내가 거칠게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오늘은 좀 부드럽게 해 보려 합니다. 거친 말이나 행동도 좀 삼가고.”
“…지난번처럼 맞는 행위를 좋아하냐 물으신다면 저는 당연히 아프고 무섭다 할 거예요. 하지만 저하께서 매를 드시는 섹스가 싫은지 물어보신다면 그건 아닌걸요.”
“그래도 좀 더 부드럽게 하면 그대가 편하겠지.”
랭던 경은 그렇게 말하고 직접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키스는 분명 예전과 같았으나 구음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속이 불길한 예감으로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구음을 시작할 때 애써 수긍하지 않으려 했던 느낌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이 내게서 거리를 두고, 예전처럼 쾌감을 찾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
그는 선뜻 하던 행위들조차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과 지난주 기차에서 섹스했을 때만 해도 나를 한계까지 괴롭히고 울리며,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던 랭던 경이었다. 랭던 경이 나를 아프게 할 때마다 울고 투정을 부렸다고 해서 녹색 눈동자에 담긴 안온한 애정도 몰라봤겠는가.
내 거짓말에 실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프리데릭을 만난 까닭을 해명하지 못하니 역시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는 걸까?
랭던 경은 신음을 내쉬며 정액을 내게 뿌릴 듯하더니 그마저도 모두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 가 버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가 정액을 뿌릴 수 있도록 얼굴을 내밀고 있던 나는 당황하여 아랫입술을 물었다.
속에 감춘 저열한 욕망을 내게 쏟아 내지 않는 랭던 경의 태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지근했다. 그리고 나는 미지근한 섹스에 익숙지 않았다.
랭던 경은 손수건에 정액을 닦아 내고 협탁에서 기름병을 꺼냈다.
“엎드려요.”
“네, 저하.”
침대에 엎드리려 하자 그가 슬쩍 웃더니 자신의 허벅지 위를 두드렸다. 그 작은 미소가 애정을 잃어버렸을까 두려움에 질린 나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리 와서 엎드려요.”
“예.”
그의 다리 위에 엎드리는 자세는 싫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을 때처럼 힘없이 그의 허벅지 위에 엎어졌다. 랭던 경은 가볍게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하지만 그 한 대가 끝이었다.
랭던 경은 내 바지를 끌어 내리고 엉덩이 골 사이로 기름을 흘렸다. 손끝이 기름을 입구에 바르는 소리가 질척거렸다. 잠시 만져 줬을 뿐인데 아래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져 무척 부끄러웠지만 역시 그의 입에선 아무런 모욕의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흣… 저하….”
나는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의 시선이 잠시 내 뒤쪽과 발을 향했다 돌아왔다.
“발끝은 왜 오므리고 있습니까. 아프지 않을 텐데.”
“조금, 긴장이 되어서… 으응….”
움츠리고 있던 발가락을 펴 보려고 했으나 자꾸만 빳빳이 굳었다. 굵은 손마디가 안을 파고들었다. 그의 허벅지에 부풀기 시작한 내 것이 닿는 게 쑥스러워 엉덩이를 위로 약간 들어 올렸다. 그에게 엉덩이를 내미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다시 내릴 수도 없어 어설프게 치켜든 채 발가락을 더 꽉 오므렸다.
랭던 경은 아프지 않게 밑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죄책감을 가득 안고 있는 나는 그의 행동이 다정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나와 섹스할 때보다 더 거리를 두고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랭던 경은 밑이 적당히 풀리자마자 별다른 말 없이 나를 침대 위로 잡아 눌러 엎드리게 하고 뒤에서 성기를 천천히 삽입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하, 흣… 더 거칠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안 아프게 해 줄 때 그냥 가만히 있어요, 로엘.”
“…….”
“나는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그대가 서투르게 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기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랭던 경은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다만 돌아보고 있는 내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랭던 경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놓치는 많은 단서를 표정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랭던 경의 생각이 잡히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알알이 다 흘러내렸다. 내게 상처를 내지 않으려 배려하는 그 거리감이 지금의 나를 상처 입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얼굴을 묻었다. 랭던 경은 내 허리를 잡고 성기를 천천히 집어넣었다. 늘 버거운 크기에 금세 눈물이 쏟아졌으나 크게 소리 내 울 수도, 그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어 입술을 물었다.
그가 둔 거리는 내 울음소리가 들리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머리를 잡아 들어 나의 우는 얼굴을 감상하지도, 젖은 뺨을 핥아 주지도 않았으니까.
“흐읏, 으응….”
성기가 안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랭던 경에게 이미 길든 몸은 야속하게 쾌감을 느꼈다. 쾌감은 슬픈 기분을 파고들어 내 심장과 배 속을 저릿하게 움켜쥐었다.
랭던 경은 내 양쪽 엉덩이를 꽉 움켜잡으며 성기로 안쪽을 쳐올렸다. 퍽, 퍽 살이 맞는 소리가 건조했다. 거친 허리 짓이 힘겨워 시트를 움켜쥔 순간 랭던 경이 내 위로 엎드리며 온몸을 끌어안았다.
“…아, 읏… 흐으응….”
“하….”
“저하, 흣….”
나는 그에게 깔린 몸을 뒤챘다. 쾌감이 차오를수록 떨림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가 감추려 해도 그의 몸 밑으로 성감에 절여진 피부의 경련이 느껴질 터였다.
“하읏, 아… 응….”
시트를 움켜쥐고 간신히 쾌감을 삼키고 있는데 랭던 경이 예고 없이 뒷덜미를 깨물었다. 단단한 치아가 살갗을 누르는, 울혈이 맺힐 통증이었다. 익숙한 통각이었고, 친밀한 고통이었다.
나를 건조하게 대하느니 차라리 아프게 만들어 달라 부탁하고 싶었으나 그가 나와 거리를 두길 원하므로 다시 참아 냈다. 랭던 경은 내 목을 깨무는 일마저도 얼마 안 가 끝내 버렸다.
평소와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처음부터 침대에서 랭던 경의 욕망을 낱낱이 봐 온 나는 그가 내 앞에서 어두운 욕정을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로 울며 풀어 달라고 빌 때보다 더 비참했다. 어둠과 빛을 동시에 헤매는 듯하던 그와 나의 세상이 볼품없이 작아져 버린 느낌이었다.
자세를 바꾸어 바로 눕고 나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전에는 엎드려서 해도 그의 표정이 궁금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랭던 경이 욕망을 자제한 까닭에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는 손길과 행동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내기 어려웠다.
마주한 그의 눈빛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생각보다 슬퍼 보였다. 랭던 경은 내 발목을 모아 잡아 자신의 한쪽 어깨에 걸치고 깊숙이 자신의 것을 쑤셔 박았다.
“하윽… 읏….”
“로엘….”
“저하… 저는… 아!”
내가 말을 마저 잇기 전에 랭던 경이 어깨에 걸친 내 두 다리를 자신의 몸쪽으로 당겨 안으며 엉덩이를 살짝 띄운 뒤 허리 짓을 시작했다. 깊게 안을 찌르는 귀두 때문에 급작스러운 쾌감이 허리뼈를 따라 찌르르 울렸다. 흉포하게 굵은 성기가 내벽을 긁는 감각 역시 적나라했다. 일부러 느끼는 곳만을 골라 짓누르는 것 같을 정도였다.
“아으응… 윽, 흣! 아….”
“후으….”
랭던 경은 다리를 더 움켜쥐며 껴안았다. 그가 거칠게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어깨에 올린 두 발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나는 내 무릎을 안고 있는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손등에 돋은 굵은 힘줄과 피부의 열기가 느껴졌다. 내 무릎을 안고 나를 움직이는 커다란 손을 쥐고 있으니 랭던 경이 억제하고 있는 욕망이 희미하게 붙잡혔다.
“저하, 으읏….”
랭던 경이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는 자신의 등에서 올라오는 통증마저 잊은 듯했다. 붕대가 감겨 있는 넓은 가슴팍이 내 가슴 위를 짓눌렀다. 위에서 아래로 깊숙이 파고드는 성기에 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질렀다.
“…하, 프리데릭이 당신의 이런 표정을 봤다면 그자의 눈을 도려내 버릴 거예요.”
“아… 그, 그는, 흣, 못, 봤어요…. 오직, 으응… 저는, 저하, 밖에는….”
“확실해?”
“네, 아읏… 흣, 흐읍….”
그는 내 몸이 울릴 정도로 성기를 깊게 처넣었다. 나를 삼켜 버릴 기세였다. 이제야 내가 아는 것과 비슷한 쾌감이 내 배 속을 건드리고 몸을 가로질렀다. 쾌감과 뒤섞이는 아릿한 아픔이 내가 아는 열락이었다.
랭던 경이 내 안에 정액을 흩뿌리자마자 나 역시 사정했다. 우리는 말없이 미지근하게 땀이 배어난 가슴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내 안에 박혀 있던 페니스가 미련 없이 빠져나갔다. 동그마니 열린 아래쪽에서 정액이 끈적하게 흘러나와 엉덩이 골을 타고 떨어졌다.
랭던 경은 복종하고 괴로워하며 우는 내 모습을, 나는 나를 지배하며 만족하는 그의 모습을 열망했지만 지금 한 섹스는 서로의 독성을 채워 줄 수 없었다. 나는 이 섹스를 하기 전까진 그의 뒤틀림이 내 일그러진 일면 역시 메워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앉아서 이불을 움켜쥔 채 나를 등지고 있는 랭던 경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옷을 다시 단정히 갖춰 입고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가 방을 나가기 전에야 간신히 물었다.
“어디 가세요?”
“손님이 오기로 했습니다.”
“몸이 편찮으신데….”
“이젠 참을 만합니다.”
문이 닫혔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다 해가 지기 전에 1층으로 내려갔다. 노을이 숲 위를 덮고 있었다.
나는 채우지 못한 허전함을 달래고자 저택 주변을 혼자서 쏘다니다가 평소처럼 뒷문으로 향했다. 이제 새뮤얼에게 랭던 경의 사적인 정보를 넘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뒷문에 달린 비밀 여닫이를 살짝 열어 보니 잠깐 사이 글자가 바뀌어 있었다. ‘E/DC’로 시작되는 글자는 사라지고 ‘B/DC/84R’이 쓰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문자와 숫자가 바뀌어 있는 걸 보면 몇 시간 사이 다시 포도주 장수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다행히 나는 새뮤얼에게 ‘분필로 적힌 문자’에 대한 정보는 한 번도 넘겨준 적이 없었다. 짧은 산책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에 발을 디뎠다. 대리석 계단을 한 단 한 단 밟으며 분필 글씨를 곱씹던 중 갑자기 반짝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꿰뚫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해 트렁크가 있는 3층으로 급하게 올라갔다. 잠긴 트렁크 안에 그동안 첩자 노릇을 하며 정보를 모아 놓은 노트가 있었다. 노트를 팔락팔락 넘겨 방금 오늘 본 문자 두 개를 마저 적어 넣었다. 나는 이제 제법 길어진 ‘분필 문자’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L/AC/75A’
‘I/BA/75A’
‘L/DA/63M’
‘A/AD/55A’
‘E/DC/34R’
‘B/DC/84R’
뒤에 붙은 두 자리 숫자와 알파벳 1개는 포도주가 제조된 연도와 상표명일 테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건 앞자리 알파벳이었다.
L, I, A, E, B…. 알파벳 ‘R’ 하나가 부족했지만 나는 이 글자들로 이루어진 익숙한 단어 하나를 알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절대 쓰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의 입을 오르내렸던 공통된 단어.
‘리베라(Libera)’
나는 포도주 저장고로 내려갔다. 기차 여행에서 돌아와 살펴보려 했던 곳이었으나 새뮤얼과 인연을 끊을 결심을 하면서 찾지 않았다. 랭던 경이 다치는 바람에 경황이 없기도 했다.
랭던 경은 포도주 저장고를 잠가 두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저장고는 창이 작아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제법 어둑했다. 촛대에 불을 붙이고 진열장 앞에 섰다.
진열장은 모두 6개였다. 오늘의 암호는 ‘B/DC/84R’
“리베라(Libera)의 B는 세 번째 진열장, D는 4번째 줄, C는 세 번째 칸….”
나는 그 자리에 꽂혀 있는 묵직한 포도주병을 한 손으로 힘겹게 꺼냈다. 뜨거운 주황빛 불꽃으로 포도주의 상표를 비췄다. 1784년산 로열 워든(Royal Woden)이었다. 분필 문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연도와 이름이 나를 맞이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미끄러졌다. 타의였지만 홀로 오랜 시간 랭던 경의 비밀에 근접해 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이었다. 이 저장고가 그의 비밀을 실어 나르는 종착역일 거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이젠 새뮤얼과 상관없는 내 선택이었다. 나는 그의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아 두길 원했다. 조만간 샤를 대공이 혁명을 일으킬 예정이라면 위험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혁명이 실패하고 샤를 대공에게 협조한 사람들에 대한 진상이 밝혀진다면 랭던 경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도구를 찾아 떨리는 손으로 코르크를 땄다. 코르크에는 좁은 포도주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긴 유리병이 매달려 있었고, 안에는 돌돌 말린 하얀색 종이가 보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으나 랭던 경을 향한 걱정이 두려움을 이겼다.
작은 병을 열어 종이를 펼쳤다. 쪽지에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습니다. 내가 과연 당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수도로 입성할 날짜는 3월 17일로 확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서 노르크의 역사를 바꿀 것입니다. 노르크에 자유를!
나는 편지를 재빨리 다시 넣었다. 포도주 저장고 안에는 새 코르크를 끼울 수 있는 도구가 있어서 원래대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포도주를 제자리에 두고 저장고를 나가기 전,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몹시 놀라 손가락으로 심지를 눌러 연기가 나지 않게 초를 끄고, 저장고 안에 있는 기둥 뒤로 몸을 감추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사실 포도주 저장고는 열린 장소라 상대가 누구였든 그냥 마주쳐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몰래 랭던 경의 비밀을 엿본 죄책감이 나를 어둠 속에 숨겨 버렸다.
이러다 들키면 더 이상할 텐데. 나는 제발 랭던 경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주먹을 꼭 쥐고 숨소리를 삼켰다.
누군지 모를 사람의 발소리가 기둥 바로 뒤 진열장 앞에서 멈췄다. 손으로 눌러 껐는데도 촛불의 탄내가 남은 걸까.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를 겨울바람이 스치는 듯한 쓸쓸한 숨소리. 테런스 랭던 경이었다.
익숙한 그의 향수 냄새가 공기를 옅게 물들였다. 이어 포도주병이 진열장에 살짝 부딪치는 소리, 코르크 마개를 여는 소리,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쳐 보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도.
“3월 17일… 얼마 남지 않았군.”
갑자기 내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두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참아 냈다. 순간적으로 그가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얼굴에 촛불을 들이민 줄 착각했다. 온몸이 저릿하도록 땀이 솟구쳤으나 다행히 불길한 예측은 나를 비껴갔다.
랭던 경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탄내가 뒤늦게 나를 찾아왔다. 나는 몇 박자 늦게야 랭던 경이 종이를 불태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때문에 주변이 갑자기 밝아진 것이다.
나는 어두워진 저장고 안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았다. 돌바닥에 떨어진 작은 불씨들은 점점 사그라들다 내가 나가기 전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다시 잠긴 트렁크가 있는 3층으로 돌아갔다. 수첩에 3월 17일을 적어 넣고 문장을 하나 더 썼다.
‘노르크에 자유를!’
나는 이 문장을 알고 있었다. 16살, 아버지의 목을 프리데릭가에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위로해 주었던 이름 모를 신사에게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사가 두고 갔던 장갑과 내 귓속에 남긴 목소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노르크에 자유를! 내가 돌아가신 서튼 경 대신 샤를 대공을 왕위에 올리고 평민들에게 투표권을 쥐여 주겠습니다.’
그 신사가 테런스 랭던 경이었던 걸까. 울면서 프리데릭가를 나온 열여섯 살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가 따라왔던 걸까.
흘러가 버린 우리의 대화가 내 심장을 흔들었다.
‘역사가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에 미래를 맡겨야만 하지. 그대와 나는 이미 역사에 휩쓸린 사람들이고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어요.’
‘…저는 역사에 휩쓸린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랭던 경은 알고 있었다. 동생 윌리엄이 죽고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한 순간부터,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로엘 서튼을 살려 줘야 한다고 프리데릭가의 살롱에서 주장했던 그날까지. 역사가 자신을 휩쓸어 내게로 데려온 것임을.
나 역시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광장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랭던 경의 위로를 들은 순간부터, 새뮤얼의 첩자가 되어 에메랄드 저택에 발을 들이고 랭던 경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까지. 운명이 나를 떠밀어 그에게로 데려간 것임을.
우리는 그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나뭇잎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후회로 흘려보냈다. 각자의 삶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애썼지만 3월 17일의 역사가 우리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펜촉을 잉크에 적셔 이 수첩의 마지막 문장을 써넣었다.
‘로엘 서튼은 결국 테런스 랭던에게로.
테런스 랭던 역시 로엘 서튼에게로.’
그 두 줄의 문장은 우리의 인연에 대한 깨달음이자 테런스 랭던 경을 향한 나의 진심이 담긴 고백이었다. 나는 내 글씨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 냈다.
수첩에는 내가 새뮤얼의 첩자 노릇을 하는 동안 에메랄드 저택에서 훔친 건조한 정보들이 담겨있었다. 랭던 경을 배신한 흔적이었다. 그 수첩의 마지막 장을 나의 진실한 고백이 담긴 페이지가 장식하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수첩이 아니라 <평등론>에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나는 찢어 낸 수첩 페이지를 <평등론>의 맨 뒷장에 끼워 넣었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에 마지막 온점이 번졌다.
***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된 후부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새뮤얼이 비밀 장부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건지 랭던 경의 신변엔 다행스럽게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3월은 17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랭던 경에게 새뮤얼을 만난 이유를 해명하지 못한 지도 벌써 3주에 다다랐다. 랭던 경은 놀라운 인내심으로 내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는 첩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줄 알면 나에 대한 실망감과 허탈감이 얼마나 클까.
나는 둘 사이의 서먹함은 견딜 수 있어도 랭던 경이 내게 실망하는 일은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실망하여 나를 버린다면 설령 노르크에 봄이 오더라도 내 마음속엔 영원한 겨울의 혹한이 불어닥칠 터였다.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애니가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작님, 신문과 호외입니다. 이건 전단지구요.”
지난달부터 뿌려지기 시작한 전단은 점점 종류가 늘어나 귀족들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전단에는 시민들의 원성과 폭력의 전조가 가득했다.
노르크는 겨울이 유독 길어 3월이 되어도 추위의 잔해가 남아 농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3월이 오면 가장 많은 빈민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한겨울보다 더 많이.
나는 호외와 전단을 빠르게 훑으며 제목들을 읽어 보았다. 한 전단에는 돼지가 도축당하는 그림이 크게 실렸다.
살진 돼지 새끼 앨버트 3세
노르크를 구할 진정한 왕은 샤를 대공!
도웨스 지역에서도 농민 봉기 발생! 험버트 공작이 자택에서 살해당하다
험버트 공작은 시민들을 혹독하게 쥐어짜기로 유명한 귀족이었다.
수많은 봉기와 귀족들이 살해당한 소식으로 노르크의 3월은 급속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왕가와 귀족들의 사치를 견디며 노르크를 떠받치고 있던 시민들이 겨울에 쌓인 눈보다 빠르게 허물어졌다.
3월 17일이라는 날짜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모든 사건이 17일을 향한 역사의 질주처럼 느껴졌다. 샤를 대공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때를 맞추기 위해 곳곳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며 샤를 대공이 왕위를 계승받아야 한다는 여론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랭던 경은 모닝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지 않은 가벼운 차림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요즘 건강이 회복되어 그는 철도사와 왕궁을 오가는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등에는 사고의 흔적으로 흉터가 남았다. 나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팠으나 랭던 경은 담담히 받아들이며 말했다.
‘나는 등을 볼 수 없으니 그대만 마음이 아프군.’
속상하여 눈물짓는 나를 위로하는 다감한 말이었다. 내가 여태 해명을 하지 못해 랭던 경이 종종 냉담해질 때도 있었으나 그는 내 마음을 견딜 수 없이 아프게 만들지는 않았다. 관대하고 사려 깊은 태도였다.
반면 일적으로는 그에게서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그의 뒤를 캐지 않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그의 역할은 금전적 지원이라 일찍이 자신의 몫을 끝내고 물러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혁명에 기여할 만한 기회는 아직 쉽사리 포착되지 않았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빨리 나가시네요.”
아침 햇살 속에 서 있는 그와 내 시선이 교차하였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내 문제 때문에 서로를 보는 눈빛 속에 많은 감정이 오갔다.
애정, 불신에 대한 회피, 간절한 열망.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실크해트를 머리에 얹었다.
“로엘 씨, 얘기할 준비는 아직 안 됐나요?”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죠?”
“내 성격 알지 않습니까.”
첩자라고 털어놓을 결심이 도무지 서지 않아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비볐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기다려 주는 건 오직 진실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마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은 뒤돌아 나가려다 말고 나를 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도미닉에게서 그 후로 다른 서신은 오지 않았어요?”
“네, 그때 제가 답장을 보낸 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어요. 그건 왜 물어보세요?”
“…당신 형도 참 이기적인 사람이군.”
“도미닉이 그런 면이 있어요.”
나는 도미닉을 위한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타이 매무새를 손보며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흘끗 쳐다봤다.
“편을 들 줄 알았더니 웬일이에요.”
“…저하의 곁에 있으니 도미닉이 저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져서요. 저는 도미닉이 저를 사랑해서 엄격하게 대하는 줄만 알고 살았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였겠죠. 안 그러면 견디기 어려웠으니까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내가 의지할 사람은 세상에 도미닉뿐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의심하지 않아도 충분히 외로웠기 때문에 도미닉의 실체를 마주 볼 용기 따위는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곁에 랭던 경이 있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에게 물었다.
“제가 저하께 진실을 말씀드려야겠죠?”
“그게 옳은 일입니다.”
“…저하께서 저를 버리시면 어떡하죠. 진실을 알고 제게서 마음이 떠나신다면요.”
“솔직히 말하면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가벼워지도록 진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로엘 씨가 새뮤얼 프리데릭과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나는 당신을 놓지 못해요.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진실을 마주하려는 그의 용기가 식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랭던 경은 나처럼 나약한 자가 아니었다. 괴로운 일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느니 정면으로 고통을 겪을 사람이었다.
눈꺼풀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 밖에서 식사를 할까요? 그때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밖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요.”
“네, 저하.”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랭던 경은 다가와 내 뺨과 목덜미에 키스했다. 나는 1층까지 내려가 그를 배웅했다.
랭던 경을 배웅한 뒤 점심을 먹고 나면, 나는 요즘 공부를 소일거리 삼아 시간을 보냈다. 서튼가가 몰락하면서 내가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랭던 경이 가정 교사를 추천해 주었다.
나는 그가 저택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대학 수준의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수학을 배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었다.
오랜만에 랭던 경을 밖에서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적당한 넥타이를 골라 맸다.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애니가 빠른 발걸음으로 나를 찾았다.
“서튼 남작님, 서신이 한 통 도착했습니다.”
“누구에게서 온 건가요?”
“도미닉 서튼 자작님이십니다.”
애니가 건네준 갈색 봉투에는 도미닉의 필체로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랭던 경을 만나고 와서 읽어 보는 게 나을 듯해 봉투를 프록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고마워요, 애니 양.”
1층으로 가는 계단 층계참에 도착할 때쯤 오전에 랭던 경이 도미닉에게서 서신이 오지 않았냐고 물어봤던 일이 떠올랐다. 조금 묘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랭던 경이 그런 질문을 한 날 때마침 도미닉의 편지가 도착한 게 우연의 일치일까? 도미닉은 내게 편지를 자주 쓰는 편도 아니었다.
기묘한 느낌을 끌어안고 다시 발을 움직여 홀 앞으로 나갔다. 이젠 익숙한 랭던 가문의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올라앉았는데 마차의 창문 너머로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에메랄드 저택에는 붉은 머리를 가진 고용인이 없었다.
집사가 마차 문을 닫으려 하기에 손바닥으로 막고 물어보았다.
“방금 붉은 머리를 한 사람이 지나갔는데 누구죠?”
“아, 예전에 하녀로 일했던 샬롯입니다. 놓고 간 소지품이 있어서 가지러 왔더군요.”
“그렇군요…. 잘 지낸다고 하던가요?”
“네, 추천서를 잘 받아서 모니카 백작 부인 밑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다녀올게요.”
집사가 다시 문을 닫아 주었다. 마차는 숲을 가로질렀다. 나뭇가지는 이제 제법 푸른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지만 꽃은 아직이었다.
마차가 숲을 빠져나와 시내로 진입했을 때 붉은 머리에 화려한 장식을 얹은 귀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피곤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이 무척 고단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다가 홀연히 샬롯을 다시 떠올렸다.
“아!”
갑작스럽게 든 생각 때문에 입술에서 작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불안한 예감에 심장은 벌컥대며 피를 흘려보냈다.
‘혹시 나나 랭던 경의 물건을 훔치러 온 건 아니겠지? 비밀 장부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 걸까?’
이제 와서 샬롯이 저택에 다시 들를 이유가 없었다. 비밀 장부에서 무언가 발견된 게 아니라면. 두고 온 물건이 있다는 건 핑계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초조하게 손끝을 깨물다가 마차의 앞 유리를 두드렸다. 마부가 작은 창을 열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작님.”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약속에 늦으실 텐데요.”
“급한 일이에요.”
“알겠습니다. 이랴!”
마부가 급히 마차를 돌렸다. 말들이 긴 울음소리를 흩뿌리고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
마차는 다시 검은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비밀 장부에서 마음에 걸렸던 점이 없지 않았다.
바로 ‘리스트(List)’라는 회사였다.
리스트 철도사 이름으로 적힌 금액은 샤를 대공에게 혁명 자금으로 들어갔을지 모를 돈이었다. 새뮤얼이 그 고리를 이을 만한 정보를 다른 데서 얻어 낸 걸까? 내가 준 정보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그날 원장부와 비교하며 밤새 몇 번이고 확인했던 이름과 숫자들이 어두운 숲속을 부유했다.
마차가 다시 에메랄드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둠이 세상을 삼키기 직전이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홀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뛰어나왔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네? 무슨 소리세요, 집사님?”
“나가시고 나서 랭던 공작님께 늦은 전갈이 왔습니다. 오늘 급한 일이 생겨 약속에 가지 못하니 서튼 남작님을 식당에서 다시 모셔 오라구요.”
“아니요. 저는 저하께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놓고 간 게 있어서 다시 돌아온 것뿐이에요.”
“마침 때가 맞았군요.”
도미닉의 편지와 샬롯을 본 데 이어 기묘한 우연이 세 번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집사를 뒤로하고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3층은 겉보기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트렁크도 잘 잠겨 있었고 달라진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일단 급히 열쇠를 찾아 트렁크를 열고 안을 뒤졌다.
없었다. 수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트렁크 안을 뒤져 보다 다른 데 잘못 넣어 뒀나 싶어 내 짐을 모두 풀어 헤쳤으나 수첩은 나오지 않았다. 그 수첩에는 3월 17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히 적혀 있었고, 랭던 경이 샤를 대공과 관련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많은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내가 그동안 새뮤얼에게 숨긴 정보들도.
샬롯을 본 게 이미 1시간 전이었고, 오늘은 3월 14일…. 새뮤얼이 내 수첩을 봤다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그의 목표는 당연히 랭던 경이 아니라….
나는 트렁크를 닫지도 못하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내 심장을 터트리고 나를 무너트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랭던 경을 지키기 위해 쓰러질 것 같은 상태를 참아냈다.
“집사님! 도프 집사님!”
나는 비명을 지르듯 집사를 찾았다. 아서 도프 씨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달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랭던 경께서 어디로 간다고 하시던가요?”
“워맥 장군의 저택에….”
나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당장 며칠 후면 목을 잘라 버릴 워맥 장군에게 갔을 리가 없었다.
“랭던 경의 목숨이 위험해요! 정말 어디 가셨어요?”
“…워맥 장군의….”
“테런스가 위험하다니까요!”
목에 핏대가 서도록 집사의 양쪽 팔을 붙잡고 흔들며 힘껏 소리쳤다. 내 체면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위험한 일에 휘말려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내 표정을 본 집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샤를 대공의 저택으로 가셨습니다.”
“안 돼….”
나는 집사의 팔을 놓고 다시 2층 응접실로 달려갔다. 랭던 경이 숨겨 놓은 열쇠를 찾아 예전에 서랍을 뒤질 때 보았던 권총을 꺼냈다. 나는 총을 프록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1층으로 뛰어가려던 찰나 두 발이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돌연히 떠오른 작은 발상 하나 때문이었다.
새뮤얼이 여태까지 얻은 모든 정보를 망쳐 버릴지도 모를 사소한 계획. 겁에 질린 머릿속을 꿰뚫고 <평등론>에 끼워 둔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났다. 새뮤얼과의 악연을 이용해 혁명을 도울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새뮤얼에게 놓을 작은 덫. 폭탄 사고로 의식을 잃은 랭던 경과 함께 수도로 돌아오며 했던 다짐을 실현할 기회였다.
나는 결심을 굳히자마자 아랫입술을 윗니로 꽉 누르고 3층으로 서둘러 달려 올라갔다. <평등론>을 펼쳐 끼워 둔 종이를 꺼내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펜과 잉크를 찾았다. 펜촉에 급히 잉크를 적셨다.
지금은 재가 되어 사라진, 포도주병 속에 숨어 있던 샤를 대공의 글씨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수도로 입성할 날짜는 3월 17일로 확정하였습니다.’
나는 찢어진 페이지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맨 위에 장소에 관한 가짜 정보를 적기로 결심했다. 새뮤얼이 날짜를 알게 되었으니 혼선을 빚을 허위 정보를 흘려야 했다.
‘사우스라인에서부터 진군. 수도는 마지막에 진입.’
내가 거짓으로 쓴 문장 아래에는 한참 전에 써 놓은 랭던 경에 대한 진심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로엘 서튼은 결국 테런스 랭던에게로.
테런스 랭던 역시 로엘 서튼에게로.’
이 사(私)적인 문장이 새뮤얼 프리데릭으로 하여금 이 정보의 진위를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눈과 귀를 막아 줄 것이다.
나는 방금 쓴 문장을 손끝으로 눌러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페이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애니를 찾았다.
“애니 양!”
애니는 평소처럼 2층에 있었다. 나는 복도에서 애니와 마주치자마자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엿들을지 모를 복도에서 계획을 말할 수 없었다. 애니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남작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애니 양, 샬롯이 오늘 저택에 다녀갔어요. 샬롯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아요?”
“네, 마을 여관에서 쉬다가 내일 오후에 백작 부인 댁으로 돌아간다 들었어요.”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애니양. 무척 중요한 부탁이에요.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려도 꼭 들어 줘야 해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네, 남작님.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간절한 내 심정이 애니에게 닿은 듯, 그녀의 눈빛이 단단하게 변했다. 내가 애니를 처음부터 신뢰했던 건 침엽수처럼 강인한 그 눈빛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니 양, 글씨를 읽을 줄 아나요?”
“아니요, 읽지 못합니다. 글씨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일인가요?”
“아니에요. 읽지 않는 편이 애니 양의 신변을 위해 좋을 거예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해요. 내일 아침 샬롯 양을 찾아가서 이 종이를 저택 계단에 떨어트리고 갔다고 한 뒤 전해 주세요. 샬롯 양이 혹시 읽어 봤냐고 묻거든 글씨를 읽지 못한다고 솔직히 대답해 주고, 마을에 나올 일이 있어 그 김에 들렀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해했어요?”
“네, 남작님. 알아들었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그대로 하겠습니다.”
애니는 평소처럼 씩씩하게 대답한 후 내가 건네준 종이를 품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나는 애니에게 심부름 값으로 1천 골드를 쥐여 주었다.
“이건 수고비예요, 애니 양. 늘 고마워요. 아픈 언니를 위해 쓰도록 해요.”
“남작님, 이런 큰돈은….”
“미안해요, 이제 더 이상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저택 밖으로 뛰어나가 마차에 올라탔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마부에게 급히 말했다.
“샤를 대공의 저택으로 가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네, 남작님.”
마부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들이 울면서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억누르고 있던 신음을 내쉬었다. 두려움이 가슴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혁명은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있었다. 그 모든 불길은 왕위에 오를 정당성을 쥐고 있는 단 한 명, 서열 1순위 샤를 대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공을 왕위에 앉혀 노르크를 구하고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새뮤얼이 내 수첩을 본다면 혁명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랭던 경의 역할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러니 이제 와 랭던 경을 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프리데릭가는 랭던가를 늘 부담스러워했다. 새뮤얼의 삼촌은 차라리 샤를 대공을 치는 것이 쉬울 거라는 소리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새뮤얼이 수첩을 보고 혁명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거대한 물살을 가로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건 프리데릭 백작이 내게 공언했던 대로 샤를 대공을 치는 길밖에 없었다.
프리데릭 백작이 언제 샤를 대공을 공격할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랭던 경이 샤를 대공의 저택을 방문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의 안위를 확률에 맡겨 둘 수 없었다. 랭던 경을 보호하려면 프리데릭가가 정보를 얻자마자 행동에 돌입할 거라는 전제하에 움직여야 했다.
“나 때문에… 내 수첩 때문에….”
나는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아플 정도로 피가 몰린 심장 부근을 움켜잡은 채 몸을 숙이고 오들오들 떨었다. 수첩을 도둑맞은 후로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정신은 죄책감을 인식하자마자 급히 무너져 내리려 했다.
수첩을 바로 없애야 했다. 이 모든 게 나의 어리석은 방심과 혁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새뮤얼은 바로 샤를 대공을 칠 것이다. 이런 위험한 때에 랭던 경이 샤를 대공의 저택에 가 있다니…. 랭던 경이 그 수첩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대공의 저택이 멀게만 느껴졌다. 새뮤얼이 아직 행동에 나서지 못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이 내가 붙들 수 있는 희망의 전부였다.
저택은 조용했다.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은 마차에 달린 랭던 가문의 나뭇잎 인장을 보고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고즈넉한 대공의 저택은 은은한 가스등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거운 어둠을 힘겹게 뚫으며 마차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내 마차가 대공의 저택 앞에 도착하였을 땐 해가 완전히 진 상태였다.
말 울음소리를 듣고 샤를 대공의 집사가 안에서 나왔다. 사우스라인으로 갈 때 샤를 대공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대공이 여행에 데려왔던 걸 보면 믿을 만한 자가 분명했다.
집사 역시 나뭇잎 인장을 알아보고 말이 완전히 멈춰 설 때까지 정중한 태도로 나를 기다렸다. 내가 급히 마차 문을 열며 내리자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랭던 가문에서 오셨군요.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샤를 대공께서 사우스라인으로 가실 때 동행했던 로엘 서튼이라고 합니다.”
불안으로 가득 찬 내 음성엔 통제되지 않는 떨림이 가득했다. 샤를 대공의 집사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머리를 한 번 더 숙여 인사했다.
“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서튼 남작님. 저택 안으로….”
“테런스 랭던 경께서 샤를 대공과 약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급하게 랭던 경을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선약이 없는 실례를 무릅쓰고 저택으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랭던 경께서는 오셨나요?”
나는 태연함을 가장한 채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타들어 가는 내 마음을 모르고 집사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 샤를 대공께서는 약속이 없으십니다.”
집사의 대답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간신히 발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랭던 경께서는 오늘 샤를 대공과 저녁 약속이 있으시다고 하셨는걸요.”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랭던 경께서는 오늘 대공의 저택을 찾아오신 적이 없으십니다.”
“…….”
“그런데 서튼 남작님, 추우신가요? 몸을 무척 떠시는 것 같습니다.”
“…네, 조금 춥네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어서요.”
집사는 아무런 속사정도 알지 못했다. 저택이 깊은 물 속처럼 고요해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으나 몸의 떨림까지 숨기기는 어려웠다. 주변을 둘러보며 랭던 경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집사도 모르는 그의 행방을 지금 막 도착한 내가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집사를 따라 홀을 지났다. 대공의 저택은 검소했으며 모든 게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가구와 소품은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사용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러나 노르크 왕가의 역사가 깃들어 있을 저택을 감상할 여유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품위를 차리며 집사와 대화를 나누고 느긋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미 새뮤얼이 보낸 암살자가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일지도 몰랐다. 보이지 않는 새뮤얼의 검은 손아귀가 내 심장을 움켜잡았다.
집사는 나를 안내하기 위해 옆 복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튼 남작님, 일단 응접실로….”
나는 집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넓은 홀에 덩그러니 멈춰 섰다. 에메랄드 저택의 충성스러운 집사, 아서 도프 씨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샤를 대공의 저택으로 가셨습니다.’
랭던 경이 이곳에 없다면, 새뮤얼 프리데릭이 지금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대공의 저택에서 명예를 실추하고, 그렇지 않아도 바닥을 친 서튼가의 평판을 더욱 훼손할 것이다.
하지만 랭던 경의 말대로 내가 정말 역사에 휘말린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알지 못할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었고, 내 모든 직감과 본능은 지금이 그 순간이라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얌전히 예의를 차리며 집사가 시키는 대로 모든 절차를 밟아 샤를 대공을 만날지, 아니면 지금….
“랭던 경! 랭던 경!”
나는 이내 목이 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랭던 경을 찾기 시작했다. 저택에 없다는 랭던 경을 목청껏 부르는 내 모습에 앞에 서 있던 집사와 하녀가 당황하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비의 목을 들고 구걸을 다니던 로엘 서튼이 드디어 광인(狂人)이 되었다고 소문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랭던 경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서튼가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지금의 내가 가장 소망하는 바였다.
대공의 집사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크게 소리치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랭던 경을 불렀다. 그가 샤를 대공과 밀담을 나누고 있다면 내 비명을 듣고 밖으로 나와 주길 바라서였다.
“랭던 경!”
“서튼 남작님, 왜 그러십니까? 랭던 공작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만류하는 집사를 뿌리치고 1층 문을 벌컥, 벌컥 열고 다니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녀들이 옆에서 나를 말리려 애썼지만 그들과 나 사이엔 명백한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들은 남작인 내 앞길을 함부로 막아서지 못했다. 허락받지 않고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랭던 경! 저예요. 로엘 서튼입니다. 저하!”
“서튼 남작님! 랭던 공작님께서는 안 계십니다.”
“테런스!”
내가 일으킨 소란에 잠에 빠진 듯 조용했던 저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층을 헤매는 내내 집사와 하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따라다녔다.
마지막으로 벌컥 연 문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서재였다. 2층에도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이 없다니…. 역시 내가 잘못 짚은 걸까.
창피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상태로 3층을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딘 찰나 등 뒤에서 달칵, 문이 열렸다. 익숙하고 우아한 목소리가 술렁이는 복도의 공기를 갈랐다.
“로엘.”
부드러운 랭던 경의 음성이었다. 언제나 나의 시간을 느리게 붙드는 그 목소리.
계단의 난간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조금 전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서재의 문 앞에 랭던 경이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랭던 경을 발견한 집사는 유령을 본 사람처럼 눈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집사 역시 내 뒤를 쫓아다니며 그 방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다 이내 그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대공의 저택 사람들이 보고 있어 그를 함부로 안지 못하고 손끝으로 허공만 움켜쥐었다. 랭던 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 있는 얼굴로 떨리는 내 손을 부드러이 붙잡았다.
“로엘,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저, 저하, 당장 대공의 저택을 떠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 수, 수첩을 도둑맞았습니다. 제가 프, 프리데릭의 첩자입니다, 저하. 하녀 샬롯이 돌아와서 제 수첩을 훔쳐 갔어요. 제 말을 믿어 주세요.”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눈물로 젖기 시작한 두 뺨을 감싸 안았다.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려 부단히 애썼으나 랭던 경은 두서없는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악몽을 꾸고 달려온 아이를 어르듯 나를 달래려 했다.
“로엘, 진정하고 안으로 들어갑시다. 대공의 집사와 하녀들이 당황했잖아요.”
“아, 안 됩니다, 저하. 지금 당장 에,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도, 도망치셔야….”
그때 아래층에서 무언가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큰 소음에 모두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 오래 걸렸다. 오직 나만이, 새뮤얼의 첩자인 나만이, 그 소음이 총을 쏘는 소리임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뭐야? 무슨 소리야?”
하녀들이 속삭였다. 불길함을 느낀 듯 랭던 경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약하게 진동했다. 더는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랭던 경은 내가 첩자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내 정체와 우리가 처한 위험을 단번에 이해시키려면 다르게 말해야만 했다.
첩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랭던 경의 비밀스러운 단어들.
나는 떨리는 양손을 들어 그의 팔뚝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손바닥 밑으로 단단한 팔이 잡혔다. 눈가에 번진 열기는 눈물이 되어 뺨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열고 그에게 말했다.
“리, 리베라, 리스트.”
그 말에 랭던 경이 멈칫하며 나를 내려다봤다. 잠시 마주친 시선에서 우리는 영원과도 다름없는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랭던 경이 내 눈에서 진실과 위험을 읽어 냈음을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저하, 리, 리베라, 리스트. 도망가야 합니다.”
그 순간 랭던 경이 내 손을 움켜잡고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온 힘을 다해 달렸으나 두려움에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거나 넘어질 것만 같았다. 복도 바닥이 늪지처럼 내 발을 잡아당겼다.
우리가 2층의 복도 끝에 다다른 순간 뒤에서 총성과 하녀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대리석 계단을 딛는 시끄러운 소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샤를 대공은 어디 있나!” 하고 윽박질렀다.
랭던 경은 나를 먼저 방으로 밀어 넣고 조용히 문을 잠갔다. 그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밖에서 들어온 가스등 불빛과 달빛이 어둠 속의 그를 희미하게 비췄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다시 손을 잡고 벽으로 이동했다.
랭던 경은 벽을 여기저기 더듬고 주먹으로 두드려 보다 막힌 벽에 걸려 있는 큰 그림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기이한 행동에 몹시 놀라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하, 도망쳐야 합니다. 초, 총을 쏘고 있어요. 여기에 있다가는….”
“그들은 대공을 노리고 있어요. 그대와 내가 여기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로엘, 당신 먼저 탈출시켜야겠어요.”
“아니에요. 저는 랭던 경을 모시고 가려고 왔어요. 저하….”
둘 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뭐에 홀린 듯 그림만 붙들고 늘어졌다. 당장이라도 총을 든 남자들이 문을 열고 뛰어올 것 같았다. 공포심이 기도를 틀어막아 가만히 서 있는데도 숨이 가빴다. 숨이 차서 힘겹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저하, 창가 쪽으로 가야 해요.”
떨면서 빌었지만 랭던 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힘주어 다시 한번 그림을 당긴 순간, 믿기지 않게도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넓은 창문이 나타났다. 커다란 그림이 비밀 입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랭던 경은 고개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상황을 확인한 후 내게 따라오라 손짓하며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랭던 경은 손쉽게 저택의 외벽에 매달렸다. 언뜻 보기엔 조각으로 보였지만 사다리로 쓸 수 있는 장식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안전합니다.”
“네, 저하.”
떨어질까 봐 겁이 나는 높이였지만 응석을 부릴 시간은 없었다. 용기를 내어 그를 따라 나가 사다리에 매달렸다. 그는 팔을 길게 뻗어 무거운 그림 벽을 다시 닫아 우리가 나온 창문을 숨겼다.
랭던 경은 창문을 은닉한 뒤 조각을 잡고 움직여 바로 내 옆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로엘, 당신은 밑으로 내려가요.”
“안 돼요. 저하 없이는 못 갑니다.”
“가야 합니다. 샤를 대공이 아직 3층에 있어요. 나는 대공에게 가 봐야 해요.”
“안 됩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저하께서는 어떠실지 몰라도 제게 샤를 대공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저하만이….”
그때 위층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리에 얹혀 있던 랭던 경의 손바닥이 재빠르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는 마주한 눈을 천천히 들어 위에서 소리를 낸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는 다름 아닌 샤를 대공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내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바닥을 데웠다.
랭던 경은 예민해진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내게서 손을 천천히 거뒀다. 매달려 있는 외벽에 거칠고 차가운 밤바람이 휘몰아쳤다. 샤를 대공은 우리처럼 튀어나온 조각을 붙잡고 벽에 매달렸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랭던 경이오?”
저택이 어둠에 휩싸여 있어 위에선 우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 랭던입니다, 전하. 암살자들입니다. 계획대로 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랭던 경은 외벽에 매달려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다시 쳐다봤다. 겨울이 빠져나가고 있는 3월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조각을 붙들고 있는 손가락은 끊어질 듯 금세 얼어 버렸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그와 나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헝클었다.
“같이 내려갑시다, 로엘. 걱정 말아요.”
“네, 네.”
나는 두려움에 곱아 가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와 함께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외벽 밑엔 성인 여러 명이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는 무성한 덤불이 있었다. 샤를 대공은 몸놀림이 매우 빨라 우리가 덤불 속으로 몸을 숨김과 동시에 바닥까지 내려왔다.
캄캄한 덤불 속에서 셋이 얼굴을 마주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가쁜 숨결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렸다. 어둠 속에서도 랭던 경은 침착했다.
“로엘, 전하. 저를 따라오십시오.”
우리는 몸을 낮추고 바닥을 기어갔다. 등 뒤에서는 커다란 총성이 드문드문 울렸다. 아직 대부분의 총은 탄환을 하나밖에 장전하지 못했다. 한 발을 쏘고 다시 장전하는 속도를 고려했을 때 3명에서 4명 정도 정도의 소수 정예가 샤를 대공을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듯했다. 하녀들과 하인들의 끔찍한 비명이 어둠을 뚫고 죽음의 비보를 전해 왔다.
몸을 낮추고 앞서 걸어가는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죄책감에 눈물을 떨구었다. 도미닉과 새뮤얼의 계획에 놀아나 첩자 노릇을 시작한 스스로가 지독히도 원망스러웠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총성도, 내 앞에서 더러운 흙바닥을 디디며 도망치고 있는 두 사람도 모두 내 책임이었다.
랭던 경은 계속 고개를 돌려 내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는 두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긴 어둠 속을 지나 간신히 갈래 길에 도착했다.
암살자들이 총을 들고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을까 봐 내 귀는 토끼처럼 예민해졌다. 바람이 풀과 나뭇잎 사이를 스치고, 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들렸다. 온몸이 스산히 떨렸다.
“로엘,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저하. 저, 정말 죄송….”
“괜찮아요. 지금은 감정적인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로엘, 그들은 당신을 노리지는 않을 거요. 혹시 모르니 저택으로 돌아가지 말고 우리가 처음 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에 가서 지배인을 찾아요. 그 사람도 우리 쪽 사람입니다. 이해했어요?”
“네.”
“에메랄드 저택에 문제가 생기면 지배인에게 연락이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택이 괜찮은지 확인한 후 일단 움직이지 말고 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네, 네….”
랭던 경은 얼이 빠져 있는 내 어깨를 잡았다. 옅은 달빛이 그의 단호한 눈빛을 비췄다. 녹색 눈동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단련된 사람의 용기와 굳은 의지로 빛났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당신은 표적이 되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요. 나는 샤를 전하를 안전 가옥으로 모시고 갔다가 합류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안가를 알려 주어선 안 되기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요.”
“거, 걱정 마세요. 몸은 괜찮으신 거죠?”
“괜찮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전하의 안전을 확인하고 레스토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어요.”
샤를 대공 역시 방금 총격전을 피해 도망친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시오, 서튼 남작.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는 샤를 대공에게 이 모든 위험이 나 때문이었다는 죄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고해조차 사치일 만큼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샤를 대공은 죄인인 나를 향해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안가가 멀지 않으니 곧 랭던 경이 찾아갈 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샤를 전하.”
“고맙소.”
의논을 끝낸 우리는 덤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를 대공이 먼저 몸을 돌렸고 랭던 경이 뒤이어 그를 따라가려 했다. 곧 어두운 숲으로 사라질 랭던 경의 얼굴을 다시 한번 봐 두고 싶어 나도 모르게 급히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달빛 아래서 그가 나를 뒤돌아봤다. 굵은 손가락이 빠져나가려는 듯 움직이다가 이내 내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로엘, 반드시 당신에게 가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 걱정 말고 당신 몸부터 챙겨요. 레스토랑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네, 저하. 부디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로엘 당신도 조심하시오.”
랭던 경이 내게 키스하고 입술을 떼어 냈다. 나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도록 먼저 몸을 돌리며 손을 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지나 떨어지는 순간이 느릿한 감각이 되어 피부에 남았다. 그 온도와 감촉을 마음속에 조각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뛰어가는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둑한 길 너머로 사라지기 전, 랭던 경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고 얼른 가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발을 옮겼다.
랭던 경에게 외치던 내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하, 리, 리베라(Libera), 리스트(List).’
나는 겨울 숲처럼 고요하고 짙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야, 내가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던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자유주의자(Liberalist)
내가 빼돌린 비밀 장부에 쓰여 있던 ‘리스트’가 모두 샤를 대공에게 들어간 자금이었던 것이다.
신발 밑으로 바스락바스락 메마른 낙엽이 밟힐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허공으로 떨어졌다. 나는 좁고 막막한 길을 빠져나와 시내로 가는 넓은 대로에 들어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을 덮은 흙먼지와 눈물은 닦아 냈지만 땀내와 풀 냄새가 진동하는 듯했다. 가스등 아래를 지날 때 손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풀에 베인 상처로 손등이 엉망이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랭던 경이 혁명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 불안하여, 저장고에서 포도주병을 열어 봤던 순간이 내 패착이고 이기심이고 어리석은 실수였다. 방심한 채 노트에 적어 놨던 날짜가 샤를 대공의 목숨을 앗아 갈 뻔했고, 랭던 경과 내 죽은 아버지가 꿈꿔 왔던 자유의 기회를 모두 다 날려 버릴 뻔했다. 대공의 저택으로 오기 직전 떠올렸던 작은 발상이 샬롯을 통해 새뮤얼에게 닿아 혁명이 열매를 맺도록 돕길 바랄 뿐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걸어 노르크 수도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센트럴 호텔로 가는 방향엔 대성당이 있었다. 첨탑 위의 성인(聖人)들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노르크의 수도를 굽어보았다.
나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지친 몸을 끌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예술가가 남긴 조각과 그림이 천사의 노래처럼 아름답게 예배당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앉아 랭던 경을 위해 잠깐 기도했다. 그리고 성경을 필사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에서 랭던 경에게 편지를 한 통 작성했다. 거친 종이 위에 포장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겸허한 마음으로 풀어놓았다.
사랑하는 테런스 랭던 경에게.
지금부터 저의 죄를 당신에게 고해 드리려 합니다. 랭던 경께서는 신부가 아니니 저를 용서하여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씻기 어려운 죄를 털어놓기 전에 먼저 작은 부탁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이제 곧 저하께서 제가 레스토랑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시면, 3층 방에서 열린 트렁크 하나를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안에는 제 소유의 <평등론>과 저하의 책에서 찢어 낸 페이지 한 장이 같이 있을 겁니다. <평등론>은 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책이고, 종이 한 장은 당신 몰래 들어간 비밀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랍니다. 제 책에는 다음과 같은 손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저하의 비밀 서재에서 찾은 종이에는 책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윌리엄 랭던’
이쯤이면 저하께서는 이미 눈치채셨을까요? 제가 그 페이지를 찢어서 나온 이유를요. 제 책에 글을 쓴 사람의 필체와 윌리엄 랭던 경의 필체는 같았습니다. 윌리엄 경께서는 로즈와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사랑하는 형에게 <평등론>을 선물했고, 당신은 동생이 죽고 나서 그 책을 읽고 자유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신 거겠죠. 그 결단의 증표로 제 아버지에게 책을 선물하셨던 걸까요?
저는 그 책을 보며 오래전부터 테스가 어떤 사람일지 몽상했었습니다. 그 ‘테스’가 ‘테런스’ 당신일 줄이야. 테스가 그대인 줄 일찍이 알았다면 당신이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을 텐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을 해칠 첩자 짓을 그토록 오래 해 왔네요.
역사가 제게 바라는 바가 그것이었던 걸까요? 제가 아버지의 금서를 몰래 읽었던 그때부터 당신과 저는 만날 운명이었을까요? 저는 참으로 오래 저하를 생각해 왔는데 그 사람이 저하인 줄은 모르고 지내 왔네요.
그 책은 본래 저하의 것이니 버리지 말고 부디 보관하여 주세요. 이게 제 마지막 작은 부탁입니다.
이제부터 저의 죄를 고백하겠습니다. 6개월 전쯤, 새뮤얼 프리데릭이 몰락한 서튼가를 찾아온 어두운 새벽부터 시작된 죄입니다.
나는 그동안 첩자 노릇을 하며 랭던 경을 속였던 일과, 시간이 갈수록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느라 소매와 손등이 젖었다. 성당은 실로 죄를 털어놓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인사말을 적어 넣었다.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당신의 로엘 서튼으로부터.
봉랍을 만들 수 없어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품속에 보관했다. 바람이 눈물의 흔적을 가져가 주길 바라며 성당 밖으로 나와 다시 추운 거리로 나섰다.
간신히 도착한 레스토랑은 평소처럼 식사하는 상류층들로 붐볐다. 지배인이 나를 맞으며 이름을 물었다.
“어떤 존함으로 예약하셨습니까?”
“로엘 서튼입니다. 테런스 랭던 경이 당신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랭던 경께서도 곧 오실 거예요.”
지배인은 내 말에 얼굴 근육 하나 변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
“예약이 되어 있으니 들어오시지요.”
나는 지배인을 따라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내실로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아 녹초가 된 다리를 뻗었다. 너무 많이 걸어 다리가 뻣뻣하게 굳고 뼈마디가 아팠다. 나는 바로 품에서 편지를 꺼내 지배인에게 건네주었다.
“랭던 경께서 오시면 이 편지를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서튼 남작님.”
“저택은 무사한가요?”
“네, 남작님.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합니다.”
“고마워요. 저는 저하보다 먼저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려 해요. 저하께서 오시면 편지를 주시고 일단 에메랄드 저택으로 급히 돌아오라 전해 주시겠어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는 이 방에서 조금만 쉬다가 나갈게요.”
“언제든 편하실 때 출발하십시오.”
지배인은 편지를 품에 넣고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눈물을 떨구며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을 열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고, 있어도 나를 신경 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뒷문으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더러운 뒷골목을 걸으며 차갑게 굳은 손가락에 입김을 불었다. 구정물 냄새가 나는 골목을 빠져나가자 가스등 아래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한 마부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온 마차인가요?”
“이곳 수도에서 다니는 마차입니다.”
탈락이었다. 나는 노르크의 수도에 사는 마부가 아니라, 노르크의 수도를 떠날 마부를 원했다. 몇 명을 붙잡고 물어본 끝에야 수도에 살지 않는 마부를 찾아냈다.
“어떤 상인이 수도에 물건을 팔러 간다고 해서 같이 왔는데, 편도 값만 주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손해를 볼 수 없어 며칠째 떠나질 못하고 있습죠.”
나는 그 마부에게 삯을 두 배로 주기로 약속하고 낡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래된 마차 내부에서는 쾨쾨한 악취가 났다.
나는 시끄럽게 달리는 마차에 홀로 앉아 다시 외로움을 삼켜야 했다. 고독한 내 곁을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이 스쳐 지났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너머엔 그립고 그리울 단 한 명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테런스 랭던, 테런스 랭던, 테런스 랭던.
지금까지 나는 랭던 경의 뒤에서 첩자 역할을 하며 그를 여러 번 속였지만 그 일들이 랭던 경에게 큰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왔다. 새뮤얼 프리데릭에겐 랭던 경을 위해 정보를 숨긴다거나 랭던 경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만약 첩자로서 내 존재가 랭던 경에게 위험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면 나는 진작에 그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스스로와 약속했었다. 첩자 노릇이 랭던 경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그러나 나는 그 결심을 할 당시에도 이미 새뮤얼의 첩자였고, 그 자체만으로 랭던 경의 상처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내가 비겁하게 외면해 온 진실이었다. 랭던 경이 위험에 처하진 않을 거라는 나의 이기적인 위안은 수첩을 도둑맞아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이 죽을 뻔한 상황을 만들고서야 부서졌다.
랭던 경은 일전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 주겠다 약속했다. 그러나 랭던 경이 상상할 수 있었을 잘못의 범위에 그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혁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실수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남긴 편지에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적었다.
다만 내게 이기적인 소망이 하나 더 남아 있다면 그가 첩자인 로엘 서튼은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랭던 경을 사랑한 로엘 서튼만은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랭던 경의 분노를 견딜 용기가 없어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내게 마음이 식어 가는 그의 모습을 볼 용기가 존재하지 않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잠자리에서 아무런 욕망도 분출하지 않는 그를 보는 것조차 그토록 괴로웠는데, 내게서 애정을 거두어 가는 과정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러기에 내 정신은 너무나도 유약했다.
내가 내쉰 미약한 한숨이 마차의 창문에 닿았다. 나는 입김이 남긴 하얀 흔적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창에는 ‘Terrance Langdon’이라는 이름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말들은 콧김을 뿜어내며 얼어붙은 공기를 헤쳤다. 마차는 도미닉이 새로 집을 산 과수원이 있는 방향으로 힘겹게 달려갔다. 나는 일단 도미닉을 만나 어디로 가 있을지 의논할 생각이었다. 도미닉의 저택에 있으면(이젠 더 이상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랭던 경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그 집에 머물 수는 없었다. 나는 랭던 경을 볼 면목이 없었고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으로 훔쳐 냈다. 그러다 문득 오후에 애니가 건네주었던 도미닉의 서신이 떠올랐다. 품에서 봉투를 꺼내 봉랍을 뜯고 편지를 펼쳤다. 마차 안은 좁고 어두웠으나 창문에 종이를 바싹 붙이니 바깥의 희미한 달빛에 글씨가 드러났다. 그 빛에 의지해 간신히 편지를 읽었다.
나의 아우 로엘 서튼에게.
어느덧 봄이 다가오는구나. 앞으로 고백할 내용을 읽으면 내게 조금 화가 날 수도 있단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는 것처럼, 너도 얼어붙은 마음을 풀고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랜 시간 혼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죄를 털어놓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렴.
5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에 관한 것이다.
5년 전 일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뒷덜미를 따라 스멀스멀 흘러내렸다. 나는 다음 문단으로 눈을 옮겼다.
아버지의 목을 벤 사람은 나였다. 이른 새벽에 나는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죽은 것을 발견했고 우리 가문이 끝장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장자(長子)로서 책임이 있었고, 사랑하는 식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아버지의 필체를 흉내 냈고, 로엘 네게 남기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너도 알다시피 ‘로엘, 내 목을 잘라 가 프리데릭가에 바치라’는 내용의 편지였지.
어린 너는 아버지의 시신을 보자 졸도했고 나는 네가 기절한 틈에 아편에 취하도록 만들었다. 너는 환영을 보며 오락가락하느라 내가 아버지의 목을 자르고 네 손과 옷에 피를 묻히는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후에 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버지의 머리가 상자에 담겨 있었지. 그 뒤는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거야.
로엘, 나는 당시 어머니의 희망이었고 어린 네가 그런 짓을 해야만 사람들이 더 쉽게 우리를 용서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랬지. 너를 향한 비난의 여론도 많았지만 어린 너를 동정하는 사람도 많았어.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우리 가문은 더 궁지에 몰렸을 거야.
이제 너도 랭던 경을 만나 부유해졌으니 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아무런 대가 없이 죄를 털어놓는 나를 가엾게 여기고 용서해 다오. 나는 동생인 너를 늘 사랑한단다.
너를 언제나 돌봐 온, 도미닉 서튼으로부터.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 아… 아-!”
나는 긴 비명을 토해 내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말발굽 소리와 몰아치는 시끄러운 바람이 유령처럼 창문을 두드리며 내 비명을 가려 주었다.
그러면 그토록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도미닉의 비난은 대체 뭐였을까. 밤마다 시달렸던 악몽과 프리데릭가에 아버지의 목을 잘라 갔다는 나의 죄책감은.
아버지의 잘린 머리가 나타나 나를 비웃고 조롱할 듯했다.
“흐윽….”
참을 수 없는 서러움과 고통이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지난 5년간의 내 삶이 잔인한 거짓말과 모진 학대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진실은 나를 바닥부터 허물어트렸고, 타락한 짐승에게 내 영혼을 먹이로 내던져 주었다.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꿰뚫어 본 랭던 경만이 나의 영혼을 구해 줄 수 있었으나, 그와의 관계는 내 거짓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제 도미닉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테런스….”
나는 랭던 경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을 흐느꼈다.
간신히 눈물을 누그러트렸을 때는 마차가 노르크의 수도를 벗어나 과수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나는 앞 유리창을 열어 마부를 불렀다. 몰아치는 찬 바람이 눈물로 부은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과수원 말고 다른 마을로 가야겠어요. 오른쪽 길로 가 주세요. 길은 하나예요.”
“네.”
마부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마차는 방향을 틀어 어둡고 좁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윌리엄 베넷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
나는 마차를 마을 초입에 세우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 부탁했다. 베넷 부부는 보통 일찍 잠자리에 드는데 그날은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낮추고 다가가 창문으로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다.
베넷 씨는 보이지 않았고 베넷 부인이 뜨개질을 하며 윌리엄과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창문을 작게 두드렸다. 윌리엄이 먼저 그 소리를 듣고 동그란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할머니! 로엘 도련님이에요.”
“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이제 서튼 자작님도 이사를 가셨는데 로엘 도련님이 여기 왜 오시겠니?”
유리창 너머로 베넷 부인과 윌이 아웅다웅 언쟁을 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처지와 다르게 참으로 따뜻한 풍경이었다. 윌은 작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억울한 듯 엉덩이를 들썩대고 크게 소리쳤다.
“저기 봐요! 로엘 도련님이잖아요.”
“얼른 자야 내일부터 이모네 가서 학교를 다니지! 그런 멍한 정신으로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겠어? 대체 저기에 누가 있다고 아까부터 야단법석을… 에구머니! 로엘 도련님!”
어두운 창가에 동동 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한 베넷 부인이 너무 놀라 뜨개바늘을 휘두르는 바람에 꿰여 있던 뜨개코가 한 줄이나 빠지고 말았다. 베넷 부인은 잠시 울상을 지었으나 나무 바구니에 털실과 뜨개바늘을 모아 담고 달려와 창문을 열었다.
“로엘 도련님, 바로 문을 두드리시지 않구요!”
“베넷 씨가 깨실까 봐요.”
“그이는 토미의 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퍼마시다 고주망태가 되어 기절하고 말았답니다. 토미의 부인이 고향으로 여행을 간 틈을 타 거기서 술판이 벌어졌지 뭐예요! 어서 현관으로 오세요, 도련님. 봄이지만 밤은 아직 차답니다.”
“감사해요, 베넷 부인.”
나는 추위에 떨리는 팔뚝을 쓸어내리며 현관으로 갔다. 베넷 부인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윌리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았다. 난롯가에서 잠시 몸을 녹이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베넷 부인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눈에는 궁금증이 차고 넘쳤다. 나는 어렵게 입술을 뗐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오늘은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베넷 부인.”
“죄송은요.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네요.”
“제가 잠시 랭던 경을 피해 다른 데 숨어 있어야 할 일이 생겼어요.”
“그분께서 해코지라도 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랭던 경은 정말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신걸요. 잘못을 한 건 오히려 제 쪽이에요. 그분을 볼 염치가 없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곳에서 조용히 머무르려 해요.”
“로엘 도련님께서 잘못이라니! 도미닉 서튼 자작님께는 가 보셨어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찻잔을 내려다보자 베넷 부인은 더는 도미닉에 대해 묻지 않았다. 베넷 부인이 모른 척해 주었을 뿐, 그녀는 도미닉이 나를 혼내는 모습을 숱하게 봐 왔다. 베넷 부인은 그때마다 개인적으로 파이나 쿠키를 구워 와 나를 말 없이 위로해 주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도미닉과는 함께 지내기가 어려울 듯해요. 혹시 제가 머물 만한 곳이나 마을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낯선 데로 덜컥 혼자 가려니 겁이 나서…. 베넷 부인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왔어요.”
이 마을로 이사 온 후, 베넷 부인은 나를 돌봐 주며 5년간 사실상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 주었으므로 그녀에게 작은 조언이나마 듣고 싶었다. 나는 아직 스물한 살이었고 도미닉의 감시하에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 아는 사람이 없는 동네로 무작정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베넷 부인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나는 깜짝 놀라 찻물을 살짝 쏟고 말았다.
“제 막내 딸아이네 집에 가서 지내시는 게 어떠세요? 딸이 도련님께서 윌리엄의 학비를 내 주신 걸 알고 무척이나 고마워했답니다! 언젠가 저녁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말해 왔거든요.”
“하지만 그건 너무 폐가 되는 일 같은데…. 한 달은 머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는걸요.”
“그 아이는 사람을 아주 좋아해서 먼 친척들도 몇 달씩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답니다. 윌도 집에서 살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구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 주시면 따님께 비용은 넉넉히 치러 드릴게요.”
“그럼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아이가 아닌걸요!”
나는 랭던 경을 떠나자마자 도미닉이 내게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음이 몹시 지치고 허약해진 상태였다. 입으로는 예의상 거절했지만 베넷 부인의 딸이라면 믿고 머무를 수 있었다. 더구나 윌리엄과 같이 지낼 수 있다면 낯선 곳에서 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게 분명했다. 결국 나는 베넷 부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가 물었다.
“로엘 도련님, 언제 가셔야 하나요?”
“사실 바로 가야 해요. 밖에서 마차도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럼 지금 윌을 데리고 가셔요! 한 시간 거리이니 딸아이가 잠들기 전에 도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직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어 늦게 잠든답니다. 서둘러 윌의 짐을 챙길게요.”
베넷 부인이 일어나 윌리엄의 짐을 챙기는 동안 윌은 내심 좋아하는 표정으로 내 곁에 와서 앉았다.
“같이 이모네 놀러 가시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어.”
“도련님께 큰일이 난 것은 아니지요? 공작님과 싸우셨어요?”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해서 싸우기 전에 작별한 거야. 공작님에 대한 건 이모에게 비밀로 해 주겠니?”
‘작별’이라는 말이 하마터면 눈물샘을 건드릴 뻔했으나 슬픔을 잘 참아 냈다. 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도련님.”
내게 되돌아온 베넷 부인의 호의는 이 끔찍한 밤의 유일한 위로였고, 도미닉의 배신에 대한 작은 치유였다. 베넷 부인은 보따리를 가지고 나와서 윌에게 들려 주었다. 나는 어린 윌이 힘들까 봐 보따리를 가져오려다 베넷 부인에게 손등을 맞았다.
“남작님께서 이런 거 드시면 안 됩니다! 이런 건 윌이 들어야지요. 머리에 든 게 조금 생겼다고 버릇이 나빠져 위아래도 모르는 사람이 되면 어째요!”
남작이 손등은 맞아도 되는 걸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베넷 부인은 내게 작은딸의 주소를 적어서 건네주고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안 그래도 내일 윌을 데려다주기 귀찮았는데 정말 잘됐네요.”
“제가 다녀간 것은 누가 물어도 비밀로 해 주세요.”
“그럼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이 편지를 딸아이에게 보여 주세요. 로엘 도련님에 대한 소개를 적었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베넷 부인.”
“무슨 말씀이셔요. 제가 은혜를 갚는 중인걸요. 도련님이 아니셨다면 윌은 학교를 가기는커녕 배가 고파 나무뿌리를 씹고 있었을 거예요.”
나는 먼저 팔을 벌려 베넷 부인과 다정히 포옹했다. 포근히 안아 주는 다정한 손길이 따뜻했다. 랭던 경의 품이 떠올라 눈물이 흐를 뻔했지만 옆에 윌이 있어 견뎌 냈다.
나는 윌과 함께 베넷 부인의 집을 나왔다.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윌이 들고 있던 짐 보따리를 내 손으로 옮겼다.
“내가 들어 줄게. 할머니에겐 비밀이야. 알았지?”
“네, 도련님.”
아이의 손을 잡고 마을 초입까지 걸어가 마차에 올랐다. 마부에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고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에서 랭던 경을 생각했다.
지금쯤 내가 떠난 걸 알았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내게 화가 났을까.
처음에는 화가 날지 몰라도 곧 들이닥칠 혁명의 바람과 승리의 환희가 미약한 내 존재를 잊도록 도와줄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여 신분의 차별이 없어진다 해도, 유서 깊은 랭던 가문의 역사와 스스로 일구어 낸 철도사가 랭던 경의 왕좌를 지켜 낼 것이다.
마부는 마차 삯을 받고 몹시 좋아하며 자신의 고향인 도웨스로 떠났다. 랭던 경의 여름 별장이 있는 서부였다. 윌은 나를 이모와 이모부의 집으로 안내했다.
윌리엄이 문을 두드리자 이모인 릴리 메이가 나왔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작고 땋은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어 언뜻 보기엔 소녀 같은 인상이었으나 눈빛엔 강인한 심지가 엿보이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작고 떨렸지만 내용은 직설적인 편이라 대화를 해 보면 그녀가 베넷 부인의 딸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릴리는 처음엔 나를 약간 경계했으나 내가 윌리엄에게 장학금을 준 사람임을 알고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못된 귀족이 괴롭히는 건가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달 정도 숨어 있을 수 있게 도와주면 고맙겠어요, 메이 부인. 물론 값은 치를 생각입니다.”
“윌의 학비를 후원해 주셨는데 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미천한 신분이지만 그렇다고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있으세요. 집에 부담이 될 정도면 도움을 달라고 솔직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릴리는 충분히 요청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윌리엄의 이모부인 잭슨 메이는 과묵하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아내의 말에 “옳은 말이오”라고 이따금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릴리는 집 뒤쪽에 있는 작은 안채에 나의 잠자리를 봐 주었다. 메이 부부와 집을 따로 쓸 수 있어 행운이었다. 불을 끈 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눕자마자 랭던 경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에 가득 찬 슬픔은 배 속과 심장을 짓이기고 나를 숨쉬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배를 끌어안고 모로 눕자 뜨거운 눈물이 코끝을 타고 뚝뚝 떨어져 베갯잇을 적셨다.
“저하….”
나는 그를 떠나면서도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편지에 내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빌었어야 했는데.
샤를 대공은 무사히 안전 가옥에 도착했을지, 랭던 경은 나 없는 침대 위에 몸을 눕혔을지, 도망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랭던 경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떠났으면서 염치없이 애정을 탐하는 내 악랄한 욕심이었다. 사랑을 읊던 단정한 입술과 깊은 눈동자를 되새기니 그를 떠나온 이 밤이 모두 몽마가 보여 주는 교활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리운 나의 테런스, 어젯밤 당신의 눈을 보며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나았을 것을.’
나는 뜬눈으로 랭던 경이 곁에 없는 새벽을 맞았다.
***
간신히 잠깐 눈을 붙이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내 뺨은 밤새 흘린 눈물로 부르터서 엉망이었다. 한겨울이었으면 찬 바람에 피부가 까칠해졌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날씨엔 어색하기 그지없는 핑계였다. 세수를 하는 동안에도 랭던 경이 보고 싶어 울음이 쏟아졌다.
나는 이제야 그가 나를 깊고 어두운 수렁에서 건져 내어 얼마나 찬란한 애정을 쐬게 해 주었는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첩자 일에 쫓기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그의 사랑과 따스한 눈빛이 시리도록 생생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놓여 있는 깨진 거울 조각을 들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눈이 퉁퉁 부어 가라앉히기 불가능해 보였다.
이른 아침 릴리 메이, 윌리엄과 함께 식사를 들었다. 윌의 이모부인 잭슨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오래전에 만든 메마른 빵과 건더기 없는 수프가 식사의 전부였다. 둘은 내 얼굴에 묻어 있는 고통과 슬픔의 흔적을 모르는 체해 주었다.
윌이 배가 차지 않는 듯 릴리의 식사를 탐내기에 내 빵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릴리는 윌이 받아 든 마른 빵을 낚아채며 그의 태도를 나무랐다.
“윌, 네 몫은 다 먹었잖아. 도련님의 식사를 탐내선 안 되지.”
“괜찮아요, 메이 부인. 제가 입맛이 없으니 윌을 줘도 돼요.”
“아니에요, 도련님. 어리지만 배고픔을 참는 법도 배워야지요. 세금이 점점 무거워지는걸요.”
가혹한 세금 징수 때문에 배고픔을 참는 건 평민들에겐 무척 흔한 일이었다. 윌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는 릴리의 아픈 심정이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메이 부인의 뜻을 따를게요. 윌, 여기는 이모의 집이니까 이모의 규칙을 지켜야 해.”
나는 릴리가 건네주는 내 빵을 다시 받았다. 윌은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떼를 쓰지 않고 참았다.
햇빛이 아이의 눈동자를 비췄다. 나는 문득 윌리엄의 눈에 감도는 녹색 빛이 랭던 경의 눈동자 색과 무척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햇볕에 밝아진 녹색 눈을 보고 있으니 다시 눈물이 나올 듯해 힘겹게 침을 삼키며 윌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윌이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 직후, 누군가 릴리의 집 문을 두드렸다. 놀라서 릴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나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나무판자로 대충 만든 문에 귀를 대고 릴리가 낯선 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들었다. 릴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로엘 서튼 남작님을 아십니까? 이렇게 생긴 분이신데요. 초상을 자세히 봐 주십시오.”
“…아니요, 저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 댁에서 학교를 다니는 윌리엄이라는 꼬마의 후원자이십니다.”
“아, 그 서튼 남작님이신가요? 말씀으로만 들었지 저는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그런데 누가 이분을 찾고 계신가요?”
낯선 남자는 릴리 메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흠, 언제든 이분을 본다면 이 주소로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지금 급히 찾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없어진 나를 찾을 이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주먹을 꼭 쥐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어젯밤부터 쉬지 않고 울어 눈이 몹시 뻑뻑했고 눈두덩이는 짓이겨지는 듯 아팠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색으로 물든 눈꺼풀이 쉽게 부풀어 올랐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릴리가 뒷문을 열었다. 그사이 운 얼굴을 보여 주기가 창피하여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릴리는 역시나 모른 척 가벼운 말투로 상황을 전해 주었다.
“그 사람은 갔어요. 도련님의 이미지와 비슷한 그림을 들고 다니더군요. 마을에서 아직 도련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힐 거구요.”
“고마워요, 메이 부인.”
“차라도 드시겠어요?”
“아니에요. 뒤채로 가서 쉬도록 할게요.”
“그럼 저는 시내로 출근해 볼게요. 점심은 윌리엄이 와서 차려 드릴 거예요.”
“저도 오븐을 사용할 줄 아니 걱정 말아요. 제가 윌리엄의 점심을 챙겨 줄게요.”
내 말에 릴리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족이 오븐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제가 어른이니 윌을 챙겨야죠. 끼니는 걱정 말아요, 메이 부인.”
내 말에 릴리는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정하시네요. 여느 귀족님과는 다르시다는 것을 알겠어요. 편하게 릴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고마워요, 릴리 부인.”
나는 뒤채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랭던 경을 떠난 슬픔과는 별개로, 그가 나를 찾는다는 사실에 크나큰 안도감이 밀려왔다. 랭던 경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혹여나 안가에까지 새뮤얼의 악마 같은 손길이 뻗쳤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스러웠다.
랭던 경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하녀 애니에게 급하게 당부하고 온 부탁이 생각났다. 애니는 샬롯에게 무사히 종이를 건네줬을까?
지금으로서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애니라면 제대로 심부름을 해냈을 것이다. 그 쪽지에 적은 거짓 정보가 새뮤얼과 다른 귀족들을 방해하여 내 실수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혁명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나는 책을 하나 펼쳐 놓고 내내 랭던 경이 보고 싶어 흐느꼈다. 점심에 윌과 함께 밥을 먹고 숙제를 봐주는 동안은 잠깐 괜찮았지만 여지없이 혼자 남으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의 고통이 깊으면 병이 오는지 어떨 때는 온몸이 아프기도 해서 배를 끌어안고 모로 누워 몇 시간씩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랭던 경을 볼 수 없는 세상이 지옥이었지만, 나는 지옥 한가운데에 앉아서도 매일 1시간씩 기도문을 외우길 거르지 않았다. 17일에 수도로 입성할 혁명군을 위한 기도였다. 물론 그 기도 안에는 랭던 경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만이 담겨 있었다.
***
내가 랭던 경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를 바치고 난 18일 오후였다. 시내 호텔에서 퇴근한 릴리 메이가 호외를 사서 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제 혁명군이 수도로 쳐들어왔답니다!”
“혁명군이요?”
윌의 숙제를 봐주고 있던 나는 놀라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약한 나무 의자가 바닥을 뒹굴었으나 며칠이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린 소식이었기에 호외부터 받아 들었다. 막 퇴근해 파이프를 물고 앉아 있던 잭슨 씨 역시 소파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호외를 읽어 보세요. 몬치 공작과 워맥 장군의 목이 내걸렸다고 합니다! 모두 퇴근하는 길에 호외를 사서 급히 마을로 돌아왔어요. 시내가 온통 난리입니다!”
잭슨 씨는 나와 같이 호외에 코를 박았지만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라 릴리가 팔을 잡아 끌어냈다. 나는 릴리의 배려 아래 호외를 재빠르게 훑었다.
‘샤를 대공의 혁명군이 수도를 점령하다.’
큰 글씨로 쓰인 제목 밑에는 샤를 대공과 앨버트 3세의 초상화가 실려 있었고 작은 글씨로 사건에 대한 내용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3월 17일 샤를 대공은 자유주의자들이 모인 혁명군을 지휘하여 노르크의 수도로 진입하였다. 6연발 신식 총으로 무장한 군대는 사우스라인-베버릭 왕국 분쟁에 군사를 투입하느라 텅 비어 버린 노르크의 수도를 손쉽게 피로 물들였다. 15일에 열린 긴급 귀족 회의의 결과로 남은 군사마저 사우스라인으로 파병한 것이 국왕의 악재가 되었다.
샤를 대공은 앨버트 3세의 폭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표적인 가문 5개를 지목하였다. 혁명군이 본보기로 두 가문을 몰살하고 수장인 몬치 공작과 워맥 장군의 목을 난도질하여 내걸자 시내는 굶주린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몬치와 워맥… 나는 이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랭던 경과 샤를 대공의 편지에서 언급된 목을 베어 버려야 할 허수아비 5인의 이름이었다.
참새의 목마름을 없애 줄 피, 붉은 포도주 리스트.
‘그러니 테런스, 허수아비에게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다섯이면 됩니다. 제가 생각한 허수아비 이름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트, 몬테르, 프리타, 로열 워든, 하인시어스.’
몬치는 몬테르, 로열 워든은 왕가의 피가 흐르는 워맥 장군을 가리켰다. 이제 3개의 가문이 남았다. 혁명은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혁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끝까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호외가 전하는 바는 그러했다.
잭슨은 파이프를 다시 물며 혀를 찼다.
“시민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감히 귀족의 목을 베! 어린놈들이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잭슨이 불평하자 릴리가 사납게 대꾸했다.
“귀족이나 우리나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우리가 귀족과 같아! 귀족들만큼 배우지를 못했는데. 저 멍청한 어린놈들이 나라를 망쳐 버릴 거라고. 앨버트 3세 정도면 훌륭한 왕이시지. 내가 어릴 때는 훨씬 살기가 힘들었단 말이야. 다들 험한 일을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부리니까 빵이 없는 거라고!”
“바보 같은 잭슨. 당신은 잘 모르면 나불대는 입 좀 다물어. 이 집에서 쫓아내기 전에!”
“쳇.”
며칠간 지켜본 잭슨 씨는 고약한 면이 있었지만 아내 릴리의 말이라면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릴리의 말대로 곧 입을 다물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릴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은 남작이시니 혁명이 비극적인 소식이겠죠?”
“그렇지 않아요. 저도 릴리 부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샤를 대공이 혁명군의 의견을 수렴하여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면 노르크의 미래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릴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련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도련님과도 싸울 뻔했군요!”
나는 릴리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짓고 다시 호외로 눈을 돌렸다. 혹시 랭던 경의 이름이 등장하는지 한 번 더 꼼꼼히 읽어 보았으나 그의 이름이 쓰여 있다면 내가 놓쳤을 리 없었다. 그러나 랭던 경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여기 적힌 문장 하나하나가 그의 일이 잘되어 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내게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외 중간에 서술된 15일 긴급 귀족 회의에 관한 내용 역시 기쁜 소식이었다. 사우스라인으로 급하게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걸 보면 내가 흘린 거짓 정보가 새뮤얼에게 무사히 전달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 혁명군이 허수아비로 지목된 가문들과 걸림돌이 될 귀족들의 목을 마저 쳐 내야 앨버트 3세를 왕좌에서 끌어내고 헌법을 다시 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마무리될 텐데 그때까지 갈 길이 멀었다.
혁명이 성공하면 그가 동생에 대한 죄의식을 덜어 낼 수 있을까. 내가 아버지의 목을 자른 사람이 도미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거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듯.
나를 속인 도미닉을 미워하는 건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지금쯤 랭던 경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나처럼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을까…. 내게 화가 나 있겠지? 아니면 혁명 때문에 정신이 없어 나 같은 건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를 생각하니 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들끓었다. 나는 태연한 척 릴리에게 호외를 돌려주고 뒤채로 발을 옮겼다.
어두운 방에서 달빛에 의지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래된 침대 틀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잡고 몸을 엎드렸다.
랭던 경이 몸을 겹치고 그리움에 우는 나를 달래 줄 것만 같았으나 내 등 뒤에는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랭던 경이 없는 끔찍한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