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테런스 랭던 (2) (15/27)

15. 테런스 랭던 (2)

겨울 아침, 정갈하게 매무새를 정돈하고 들어오는 로엘의 얼굴엔 흐린 하늘처럼 무거운 수심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눈빛에 먹구름이 드리운 이유가 궁금했으나 나는 그의 그늘을 못 본 체해야 했다. 내 고백을 에둘러 거절한 후 로엘이 나를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나를 향해 스스럼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 주던 입매에 웃음 대신 근심 어린 표정이 자리 잡았다.

어제 로엘은 도미닉을 만나러 시내로 외출했다. 도미닉은 표면적으론 로엘이 폭탄 사고에 휘말린 일을 걱정하여 찾아온 듯했지만, 막상 만나서 상처가 되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은 아닐까?

로엘이 하나뿐인 형을 붙잡고 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가 디디고 있는 관계는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 같았다. 로엘만 그 위를 건너다닐 뿐, 상대방은 절대로 로엘이 있는 곳까지 와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로엘은 애니에게 트레이를 받아 와 내 침대 테이블 위에 아침을 올렸다.

“저하, 오늘 아침은 스튜와 빵이에요. 아직 등이 아파 팔을 움직이기 어려우실 테니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래 주면 고맙겠습니다. 등이 아프니 팔을 쓰기가 영 힘들군.”

“아니에요. 제가 아플 때도 랭던 경께서 간호해 주셨잖아요.”

로엘은 어느 틈에 어두운 그늘을 지우고 내 곁에 앉았다. 그는 이젠 제법 노련하게 스푼으로 스튜를 떠서 내 입에 옮겨 주었다. 처음엔 로엘이 스푼에 담긴 음식을 여기저기 흘려 영 받아먹기가 어려웠는데 금세 능숙해진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의 고백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식사까지 챙기는 태도가 몹시 사려 깊었다.

아침을 신선한 샐러드와 빵으로 간단히 마무리하고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로엘이 서랍에서 시럽과 환약을 꺼내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약을 먹으니 잠이 오기만 해서 오늘은 먹지 않겠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멈칫했다. 로엘은 잠시 동요하는 듯하더니 곧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하… 잠만 오게 하는 약이 아니라 상처를 아물게 해 주는 약이니 드셔야 합니다.”

“오늘 집사에게 보고받을 게 있어서 먹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신문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옆에서 로엘이 주저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그는 곧 뒤돌아서 달그락달그락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무얼 하나 살짝 눈을 들어 보니 조그마한 유리그릇에 약을 담고 있었다. 그는 약병을 서랍에 넣어 두며 당부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드세요, 저하.”

“알겠습니다. 신문 좀 넘겨줘요.”

“네.”

로엘은 내 쪽으로 걸어오며 어색하게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냈다. 신문을 넘겨주는 손길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긴장한 듯한 기색이었으나 짚이는 이유는 없었다.

로엘은 내가 신문을 읽는 내내 시계를 곁눈질하기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기 어려울 작은 변화들이었다. 로엘이 가진 특유의 부드럽고 침착한 분위기가 작은 부산스러움쯤은 쉽게 희석해 버렸기 때문이다.

“저하, 주무시기 싫으시면 애니에게 커피를 좀 내오라 할까요?”

로엘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속삭이듯 물었다.

“좋습니다.”

“잠시 쉬고 계세요.”

로엘이 다시 시계를 흘끔 올려다보는 모습이 눈꼬리에 닿았다. 내가 잠시 신문에 눈을 돌린 사이 침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로엘이 침실을 나간 것이다. 종을 흔들어 하녀를 부르지 않고 왜 직접 나갔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다른 개인적인 용무가 있을 거라 생각되어 넘어갔다.

기사를 두 꼭지 정도 읽었을 때 문밖에서 맑은 로엘의 목소리와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로엘이 하녀와 대화를 나누며 침실로 오는 중인 듯했다. 곧 문이 열리고 로엘이 격의 없는 태도로 애니와 함께 들어오며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로엘은 늘 서튼 가문 사람답게 행동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아버지를 잃었는지 돌이켜 볼 때 참으로 존경스럽기 그지없는 태도라 할 수 있었다. 고용인들을 대하는 권위적이지 않은 태도는 다른 귀족에게선 찾아 보기 힘든 겸손한 모습이었다.

나를 대할 때 역시 예의는 차리되 비굴한 자세를 보이지 않으려 스스로 몹시 노력하는 데가 있었다. 물론, 섹스를 하는 순간은 예외였지만.

애니가 협탁 위에 트레이를 올려 두고 나가자 로엘이 직접 커피를 잔에 따랐다. 나는 잔을 따르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서먹함이 감도는 침실 공기에 부드러운 커피 향이 섞여 들었다.

로엘이 잔을 내게 쥐여 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퍼렐 의원은 언제 오나요?”

“오후에 온다고 합니다.”

“치료받는 게 많이 아프시죠? 곁에 있어 드리고 싶은데….”

“됐습니다. 별로 보여 줄 게 못 돼요.”

말투가 다소 쌀쌀하게 들렸는지 로엘이 잠시 멈칫하며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저 아파하는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거센 파도가 모래 위에 하얀 거품을 남기고 가듯 푸른 눈동자에도 슬픈 빛이 가득히 남았다.

등이 아프지 않았다면 끌어안아 주기라도 했을 것을.

몸이 성치 않아 내가 의미 없이 준 상처를 바로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당장 달콤한 말을 덧붙여 상대를 달래는 건 공작의 신분으로 살아온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폭탄으로 입은 등의 상처가 몹시 아파 로엘이 쥐여 준 작은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자상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작은 화상도 입어 약을 먹지 않으면 통증을 견디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로엘이 마음 아파 할까, 그의 앞에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로엘은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옆에 붙어 있었다. 아직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며칠이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 옆만 지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쿠키를 먹여 주려고 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로엘 씨의 시간을 보내도 됩니다.”

하녀가 실수로 커피를 태웠는지 지나치게 쓴맛이 나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에도 말투가 너무 냉담하게 들렸는지 로엘은 들고 있던 쿠키를 머뭇거리며 접시 위에 다시 되돌려 놓았다.

“쉬세요, 저하.”

그는 몸을 숙여 내 뺨에 부드러이 입술을 눌렀다. 설탕처럼 달콤한 입술이 내게 닿았다가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은은한 향기를 남기며 스쳐 지났다.

나는 혼자서 쓴 커피를 거의 다 비우고 힘겹게 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졸음이 무겁게 쏟아졌다. 몸이 성치 않은 탓인지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피곤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날카롭게 쑤시는 등의 통증을 참으며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자전(自轉)했다. 소란히 돌아가는 내 우주의 중심에는 혼자서는 결코 정리하지 못할 로엘을 향한 강렬한 애정이 남아 있었다. 이 소용돌이를 누그러트릴 방법은 로엘이 내 마음을 받아 주는 것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지껏 로엘과 내가 연인 사이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고백을 미룬 나의 선택이라 여겼다. 내가 고백만 한다면 로엘이 기쁘게 받아 주는 것 외에 다른 상황이 생길 거라고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게 내 오만으로 인한 착각이었다. 폭탄 사고보다 로엘의 거절이 나를 더 빠르게 허물어트렸다.

나는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 가끔 눈이 떠졌으나 나의 우주는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고, 그중 한 번은 로엘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흠칫 놀라는 표정이 이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 보였으나 이내 눈이 감겨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른 때처럼 점심이 되어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오래된 습관대로 잠옷 앞섶에 손을 넣어 열쇠가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윌리엄의 서재 열쇠는 작은 손수건에 싸여 제자리에 있었다.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려 로엘인 줄만 알았으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도프 집사였다.

“공작님, 철도사에서 급한 결정을 부탁드린다고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을 뜯어 읽어 주세요.”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리스트’ 철도사에서 선로 사용료를 올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올해는 리스트 측에서 반드시 요청이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다. 로엘에게 대필을 부탁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는 요즘 나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아 보여 할 수 없이 집사에게 말했다.

“대신 답장을 적어 줘요.”

집사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편지지를 펼치고 펜촉을 잉크에 담갔다. 잉크가 맑게 찰랑거렸다.

“공작님, 불러 주십시오.”

“안녕하시오, 테런스 랭던 공작입니다. 얼마 전 일어난 사고로 글씨를 쓰기가 힘들어 집사인 아서 도프 씨가 대신 편지를 적습니다. 작년에 석탄의 가격이 크게 인상된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때문에 리스트 철도사에서 올해 사용료 증액을 요청하리라 작년 여름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10퍼센트 범위 내에서의….”

“10퍼센트요?”

“그렇습니다. …사용료 상승은 회사에 손해가 없을 것이라고 회계사인 제퍼슨 씨가 계산하였소. 리스트 철도사 담당자인 콜린 씨가 이 범위 내에서 사용료 증액이 이루어지도록 리스트와 협상 절차를 밟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집사는 내 말을 부지런히 받아 적은 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밀봉했다. 봉랍에는 내 반지에 새겨진 랭던 가문의 인장이 남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 샬롯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내가 며칠 전 집사에게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날 좀 일으켜 줘요.”

“네, 공작님.”

나를 일으키는 집사의 손길은 로엘의 부드러운 도움에 비하면 거칠기 짝이 없어 등을 꿰맨 실이 터지지 않았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로엘에게 부탁하지 않은 내 잘못이니 집사에게 따로 불편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짧은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집사의 불안정한 시선이 흘끗 나를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하… 등이 견딜 수 없이 쑤시는군. 퍼렐 의원은 언제 오나요.”

“곧 도착할 시간입니다.”

“그래, 로엘의 소문에 대해서는 알아봤어요?”

내가 로엘이 정말 창부인지 의심하게 된 건 이번 기차 여행 때 그와 특등석 객실에서 섹스를 한 후부터였다. 나는 그동안 로엘이 섹스에 서툰 듯 행동할 때마다 내게 거짓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 기분이 몹시 상했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추느라 연기를 하는 것이 몸에 뱄는지, 로엘은 섹스를 할 때마다 매번 필요 이상 서투른 척했다. 그러나 결국 엄살을 부리지 않고 내 거친 취향을 소화해 냈기 때문에 여태까지 그가 창부라는 소문에 대해 진위를 의심하진 않았다.

도구를 잘 모르기는 했으나 그건 로엘이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21살인 데다 소문이 돈 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니, 몸을 팔아 봤자 몇 번이나 섹스를 해 봤겠는가. 그러나 이번 기차 여행에서 기승위에 서툰 모습을 본 후 의심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둔부를 쥐어 잡고 움직여 주지 않으면 허리조차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게 영락없이 그 자세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창부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점 한 가지는 로엘이 나와 관계가 깊어진 후에도, 자신에 대한 소문을 부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창부가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태도였다.

로엘을 향한 나의 집착적인 애정이 만들어 낸 망상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한번 의심을 품자 교활한 머릿속은 쉬지 않고 그럴듯한 심증을 쏟아 냈다. 대부분의 심증은 내가 연기를 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때나, 로엘이 특정한 행위(로엘의 사견에 따르면 변태나 할 법한)를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던 순간이었다. 그가 처음 에메랄드 저택을 방문했던 날, 발코니에서 단 한 번 창부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도프 집사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며 말문을 뗐다.

“네, 공작님. 조사할 시간이 좀 짧긴 했지만 서튼 남작님과 거래를 해 온 손님의 명단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직접, 흠, 직접….”

도프 집사는 단어를 고르는 데 무척 고심하는 듯 말을 잇질 못했다. 구부러진 수염이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내려가길 반복하며 소란하게 요동쳤다. 격식을 따지는 것이 그만 지겨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직접적인 단어를 써도 됩니다. 섹스라고 해도 돼요.”

“…직접 거래를 해 봤다거나 돈을 지불했다는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목격자도 없었습니다. 주변 이웃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로엘 서튼 남작님께서는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고 집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사는 결국 섹스를 에둘러 말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고 몹시 안도했다. 집사가 로엘의 손님을 찾지 못한 건 그의 말대로 단순히 조사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로엘이 창부라는 소문의 출처는 알아냈어요? 노르크의 수도에 1년 동안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이잖아요.”

“네, 그것은 알아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소문의 출처는 아무래도 도미닉 서튼 자작님 같습니다.”

뜻밖의 이름에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로엘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그 무뢰한의 이름이었다. 얼굴의 근육들이 일그러지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로엘의 형?”

“예, 그렇습니다. 도미닉 자작님께서 주변의 친우분들에게 동생이… 이런 표현을 인용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님. 흠, 동생이 몸을 파는 남창이라 부끄럽다고 말했답니다. 그 무리에게서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그때부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형이 동생에 대해 그런 소문을 내다니!”

나의 격렬한 호통에 집사는 자기가 혼나는 것처럼 매우 움찔했다. 그는 노련하게 내 불같은 화가 폭발하기 전에 입을 열어 다른 정보를 쏟아 냈다.

“동생이 집에 끌어들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친우분들과 안주 삼듯 얘기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 이웃들은 로엘 서튼 남작님 댁에 낯선 남자가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고 그런 소문도 전혀 몰랐습니다.”

집사는 이후에도 조사한 내용을 더 상세하게 보탰다. 그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오랜만에 맹렬한 분노가 내 피를 태웠다.

로엘의 행실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들은 소문이 많아 나를 새로이 자극하지 않았다. 창부라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오직 도미닉 서튼이었다.

도미닉 서튼. 로엘의 유일한 가족. 로엘이 자라 오며 애정을 얻기 위해 목을 맸을 게 분명한 상대.

내 피가 불타오르는 이유는 그 도미닉이 로엘에 대한 추잡스러운 소문을 낸 장본인인 걸 알게 되어서였다. 로엘이 창부인지 아닌지를 떠나, 추문을 퍼트린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건 한 영혼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내가 형을 비난할 때마다 어떻게든 감싸던 로엘의 안쓰러운 얼굴이 생각났다.

내 가슴 속에 일어난 거친 폭풍 때문인지 등에 남은 상처가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날카로운 고통이 잠시 진정이 되길 기다렸다가 바로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 친우들은 누구요?”

“사교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분은 새뮤얼 프리데릭 백작님입니다. 프리데릭 백작님은 로엘 남작님과 직접 거래를 한 적이 있다고도 얘기하고 다녔다 합니다.”

“프리데릭?”

사교 모임이나 왕궁에서 종종 마주쳤던 새뮤얼의 뱀 같은 눈매가 떠올랐다. 서튼 가문이 몰락한 후 도미닉은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생각지도 못했던 연결 고리였다. 물론 로엘이 아니었다면 우연히 알게 되었어도 무시했을, 별 볼 일 없는 인맥에 불과했지만.

“프리데릭과 서튼이 친구인데 둘 다 로엘이 창부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 말이지. 프리데릭이 로엘과 섹스했다는 건 확실한가요?”

‘섹스’라는 표현에 집사는 헛기침을 남발했다.

“공작님, 제발 말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매번 얼마나 곤란을 겪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마님과 주인님이 아시면!”

“그분들은 행복만이 가득한 천국에 계실 터이니 내가 난잡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실 거요. 아들이 난잡하게 사는지 알려 주는 곳이라면 천국이라 할 수가 없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천국이 있다면 말이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공작님! 천국을 의심하시다뇨!”

도미닉 때문에 화가 난 중에도 집사가 펄쩍 뛰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를 잠시 즐겁게 했다. 요즘 로엘과 서먹하여 그를 골려 주는 소일거리를 죄다 놓치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심심한 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로엘이 갓 구운 먹음직스러운 빵이라면 집사는 입 속에 실수로 들어온 텁텁한 생밀가루 같다는 차이가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 말을 듣는 건 도프 씨뿐인데 내 신념이나 태도가 다 무슨 상관이요.”

“흠, 아무튼… 소문이 났던 당시에 프리데릭 백작님께서 로엘 서튼 남작님을 만나셨던 정황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작년 말부터 센트럴 호텔에서 프리데릭 백작님이 서튼 남작님의 방에 드나들었다고 증언한 호텔 직원이 있습니다.”

“작년 말?”

내가 로엘을 막 만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로엘이 창부인 건 알고 있었으니 상관없지만 시기가 겹친다는 사실은 묘한 찝찝함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집사의 질문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새로울 건 없는 내용이니까요. 혹시나 하여 뒤를 캤다가 알 필요 없는 내용만 알아 버렸군. 그럼 로엘이 창부 일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도프 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로엘 남작님의 형님이신 도미닉 서튼 자작님께서 직접 확언하신 일입니다. 스스로 그런 사이라 얘기하셨던 프리데릭 백작님께서도 호텔에서 만남을 지속하셨고요. 그러니 소문은 사실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사견일 뿐입니다, 공작님.”

“알겠습니다. 가 보세요.”

집사는 지시에도 나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분명 껄끄러운 할 말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뒷조사를 해 보라 했으니 로엘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아냈을 듯했다. 내가 실망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실.

나는 집사를 흘끗 올려다봤다.

“할 말이 있는 거로군.”

“예, 공작님.”

“말해 봐요.”

“호텔 직원에게 연락이 왔는데 어제 오후 로엘 남작님께서 프리데릭 백작님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501호에서요. 그리고 오늘 오전에도 로엘 남작님이 호텔 건너편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프리데릭 백작님까지 보지는 못했다고 하고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집사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어제 로엘은 분명히 형을 만나러 나가겠다고 했고, 오늘은 외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산책 같은 작은 일조차 하나하나 허락을 받고 다닌 로엘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과, 인간은 언제나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경험이 충돌했다. 그가 프리데릭과 부정을 저질렀다면 나의 분노는 갈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로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응접실에 계시는데 깜빡 잠이 드신 것 같습니다. 깨울까요?”

“아니요. 깨울 필요까지는 없어요.”

나는 로엘이 몰래 프리데릭 백작을 만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가장 쉬운 답은 내 뒤에서 부정을 저지른 것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로엘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프리데릭 백작가는 돌아가신 서튼 경이 자결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며 선동한 가문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 프리데릭가의 인간에게 몸을 팔았을까.

예전이면 몰라도 나를 만나 금전적으로 어렵지 않게 된 상황에서까지 로엘이 그랬을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 해도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두었다. 로엘 서튼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고. 가장 중요한 약속을 그가 저버렸을 리 없을 거라고 믿는 건 내게 남은 어리석은 순진함일까?

하지만 모두가 나를 순진하다고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내가 지켜본 로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나는 고용인이나 어린애와도 늘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로엘의 인격적인 태도를 떠올리며 의심을 애써 붙들었다. 옆집에 사는 평민 아이에게까지 학비를 지원한 로엘이었다.

직접 확인하지도 않고 로엘을 재단하는 실수를 또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신 서튼 자작의 아들이 남창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실망하여, 그를 창부라 모욕 주고 다그친 예전처럼은….

“집사님, 내일 도미닉 서튼을 만나야겠습니다. 그를 저택으로 데려와요. 물론 로엘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서튼 남작님께서 형님을 보시지 못하도록 동쪽 건물 응접실에서 만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줘요. 퍼렐 의원은 오는 대로 들어오라고 하시오.”

“네, 공작님.”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갔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엘과 함께 찾아왔던 노르크의 겨울은 어느덧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폭탄 사고로 상처 입은 등에서 올라오는 아픔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매달린 심장이 보내는 고통이었다. 로엘이 내게 얘기하지 않고 어제오늘 호텔에서 프리데릭 백작을 만난 건 어쨌거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기 전에 퍼렐이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멋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내 안부를 확인하고 왕진 가방을 펼쳤다. 퍼렐은 노련한 의사답게 금세 상처를 소독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밤에 주무시는 건 좀 어떠십니까.”

“상처가 쓰라려 약이 없으면 깊이 잠들기 어렵습니다.”

“오늘 치료도 좀 아프실 겁니다.”

“괜찮아요. 참을 만합니다.”

퍼렐이 솜에 소독약을 묻히며 내 눈치를 슬쩍 봤다. 퍼렐이 상처를 소독하는 과정은 살갗을 다시 태우고 지지는 것처럼 강렬한 통증을 선사했다. 매번 소독을 할 때마다 로엘이 다치지 않은 게 신의 도우심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아픈 치료를 받아야 했다면 여린 마음에 견뎌 내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소독의 아픔조차 나를 평소처럼 괴롭히지 못했다. 로엘이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몰래 밖으로 나가 프리데릭 백작을 만나고 온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무표정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낙심한 마음이 비쳤는지 퍼렐은 평소처럼 농담을 하지 않고 조용히 치료에만 전념했다. 그는 눈치도 무척 빠른 편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작님.”

“수고했어요.”

퍼렐은 상처에 깨끗한 붕대를 감아 주고 곧 자리를 비켰다.

치료를 받은 뒤라 몹시 피곤했으나 나는 눕지 않고 그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평소처럼 왜 말없이 프리데릭을 만났냐고 로엘에게 소리를 지르며 겁박하고 싶은 충동을 어렵게 가라앉혔다. 대신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봤지만 무엇이 정답인지 알기 어려웠다.

내가 애정을 품은 상대는 이제껏 로엘이 유일했다. 그 외의 관계는 성욕과 권력욕을 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간혹 내게 애정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조금도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어떤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상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하는 일은 내게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큰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해가 진 게 아니라 눈이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였다.

곧 가루눈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루눈을 물끄러미 보며 서툴게 답을 찾아 나갔다.

오후가 되어서야 응접실로 이어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엘이 문을 두드릴 때 나는 특유의 나긋한 소리였다. 로엘이 내는 소리는 그게 무엇이든 다른 사람보다 보드라웠다.

곧 등 뒤에서 문이 열리고 애틋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저하, 주무세요?”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실내에 은은한 불빛이 들어왔다. 로엘이 가스등을 밝힌 것이다. 나는 로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졸고 있는 줄 알았는지 어깨를 살짝 떨며 놀랐다.

“저하, 일어나 계셨으면서 왜 불을 안 켜고 계셨어요.”

“생각할 게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내가 로엘 그대를 믿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로엘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가스등이 비추고 있는 하얀 살결과 푸른 눈동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 모습조차 아름답고 슬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설사 로엘이 나 몰래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나는 결코 그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인품, 성격, 말투, 생각, 표정…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을 앗아 가지 않은 게 없었다.

로엘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하.”

“별거 아닙니다. 그럼 오늘은 계속 응접실에 있었어요?”

“…네, 저하.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네.”

로엘의 입에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푸른 눈동자가 거센 바람에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그러나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봤더라면 태연하게 보일 정도로 고요한 눈빛이었다.

로엘이 몰래 외출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던 마지막 기대가 낱낱이 깨어졌다. 깨진 파편들은 내 등에 꽂혔던 유리 조각들보다 더 아프게 심장에 박혔다. 막 일어난 생생한 출혈이었다.

로엘이 내 곁에 와서 앉아 침대가 얕게 내려갔다. 그는 내 뺨에 입술을 누르고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메마른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록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그 손길엔 분명한 애정이 담겨 있었으므로 나는 로엘이 건네는 스킨십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은 거짓말로 인한 배신감과 로엘을 향한 갈증으로 타올랐다.

로엘이 다정히 물었다.

“저하, 며칠 전 제게 물어보셨던 질문이요. 지금 다시 대답하면 안 될까요?”

“무슨 질문을 얘기하는 겁니까?”

머릿속이 복잡해 로엘이 무슨 질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건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제게 연인이 되어 달라….”

“아, 그 질문.”

로엘은 내가 질문을 끊어 버리자 몹시 놀란 듯 속눈썹을 움찔 떨며 내게 닿아 있던 보드라운 손길을 거두어 내고야 말았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로엘의 승낙을 스스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로엘 씨, 당신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하기 전에 먼저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합니다.”

“네, 저하. 어떤 질문을….”

“어제오늘 새뮤얼 프리데릭은 왜 만났어요?”

로엘의 몸이 빳빳이 얼어붙었다. 굳어 버린 표정을 보니 그가 정말 새뮤얼 프리데릭을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깊은 배신감이 조용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강렬한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놀란 듯한 로엘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싶은 심정은 들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지금 대답을 듣기는 틀렸군.”

말이 날카롭게 나오는 것까지는 조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로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좀 더 부드럽게 얘기할 것을 그랬나, 작은 후회가 머리를 들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겼지만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로엘 씨를 창부 취급하지 않고 존중하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고 당신의 대답을 기다려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애정인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여전히 로엘이 나를 두고 부정을 저질렀으리란 판단은 내리지 않았다. 창부라는 결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소문의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지 못했고, 로엘이 직접 만난 인물은 프리데릭뿐이었다. 창부의 손님이 한 명뿐일 리 없으므로, 새뮤얼 프리데릭은 로엘의 손님이 아니라 친구나 숨겨 둔 연인이라고 보는 게 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아, 새뮤얼 프리데릭이 그의 친구라면 다행이지만 숨겨 둔 연인이라면 어찌할까! 내게 주어진 권력과 명예로도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이 닥친다면….

나는 그가 친구가 아니라면 차라리 손님이었으면 했다.

지독하게 사람을 통제하는 내가 로엘이 차라리 창부이길 바라다니.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생각이었지만, 프리데릭이 로엘의 숨겨 둔 연인으로 밝혀지느니 아무런 마음 없이 돈만 주고받은 관계인 것이 더 나았다. 그가 로엘의 연인일지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여태껏 내가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영영 없을 거란 고민은 해 봤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택하지 않으리란 가정은 꿈에도 해 본 일이 없었다.

“로엘 씨는 내가 기차에서 몸을 던져 당신을 구해 줬다고 고마워했지만 실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다친 후에 그대 역시 죽을 각오로 나를 안고 보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와 바닥재가 타는 매캐한 연기 사이로 맡았던 로엘의 살냄새, 등 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보여 주던 그의 절박한 표정, 피가 쏟아지는 내 등의 상처를 힘껏 누르던 손바닥과 울음 섞인 목소리.

우리가 위험에 빠졌던 그 지옥 같은 순간이 지금 나의 유일한 위로였다.

“그런 그대의 마음을 사랑이라 생각했던 나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긴다면 지금 거짓을 지어내어 대답하지 말아 줘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을 얘기하겠다고 신께 맹세해 주시오.”

“…….”

“…로엘.”

“…매, 맹세합니다, 저하. 신께, 신께 맹세하겠어요.”

로엘이 고개를 숙이며 흐느꼈다. 그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나는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내쉬며 실망감과 허탈감이 뒤섞인 내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로엘의 손끝이 살짝 나를 스쳤다.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을 잡고 녹여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으나, 나를 속이고 호텔에서 프리데릭을 몰래 만났다는 배신감이 나의 동정심을 더럽혔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의도와 달리 말투가 다소 차갑게 흘러나왔다.

“울지 말아요, 로엘. 내가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는데.”

로엘의 어깨가 다시 흠칫 떨렸다. 마음속 갈등 때문에 내 목소리가 서늘해서 울고 있는 그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린 듯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의 눈물을 예뻐해 좀처럼 울지 말라고 한 적이 없으니 몹시 서러울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로엘은 가여울 정도로 꿋꿋이 눈물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저하께 너무 죄송합니다. 다, 다시는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을 거예요.”

“…로엘, 예전에도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나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하. 도미닉을 만난다고 말씀드리고 외출한 일도 매를 맞아야 마땅한데 당장 설명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저하께 너무….”

로엘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과 눈 주변이 눈물로 다 젖고, 눈꺼풀과 눈 밑이 모두 장밋빛으로 물든 채 퉁퉁 부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슬퍼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서 이내 삼키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미안하다고 우는 사람이 설마 나 모르게 부정을 저질렀을까.’

새뮤얼 프리데릭을 호텔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희미한 희망을 붙잡으려 애썼다. 로엘이 언젠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한다면 복구되지 않을 신뢰였다.

그날 로엘은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뒤척이더니 새벽녘에는 악몽에 시달리는 듯 끙끙대며 앓았다. 나는 한동안 외면하였으나 결국 힘겹게 일어나 그의 눈두덩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가 나오는 악몽에 시달리는지 눈꺼풀이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로엘이 깨지 못할 깊은 악몽에 시달릴 때면 나는 종종 그의 눈을 덮어 주었다. 이미 닫힌 눈꺼풀을 내 손으로 막는다 해서 꿈이 가려질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로엘은 내가 이렇게 해 주면 얼마 안 가 몽마에서 벗어났다. 잠든 로엘의 따끈한 체온이 내 손바닥의 온도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물이 마른 기다란 속눈썹이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물들 때쯤에야 로엘은 겨우 몽마를 떼어 냈다. 곤히 잠든 그의 숨결이 안락해졌다. 나는 한동안 그에게 계속 손을 얹은 채 창밖을 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겼다.

나는 로엘의 도움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상처를 돌보기 위한 최소한의 약만 먹었다. 어제 아침에는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잠이 쏟아졌지만 오늘은 맨정신으로 생활하는 게 가능했다. 점심쯤 로엘이 강아지들과 놀아 주기 위해 침실을 비운 사이 집사가 내게 도미닉 서튼의 방문을 알렸다.

“곧 마차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1층 동쪽 응접실로 모시라고 미리 말을 해 두었습니다.”

“내려가서 기다리도록 하지.”

나는 도프 집사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등만 다쳤을 뿐, 다리에는 부상이 없어 통증만 견딜 수 있다면 직접 장소를 이동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팔을 움직이는 일은 몹시 고되어 로엘이 도와주어야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넓은 응접실에는 찬란한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큰 유리창 밖으로 고드름이 녹아 생긴 물방울이 간간이 떨어졌다. 눈꽃이 핀 나뭇가지에 엉덩이를 누르고 앉은 작은 새싹들도 보였다. 이제 곧 노르크의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사람에게도 봄이 오는 것은 필연이고 운명이었다. 나는 노르크에 봄을 불러오고 싶었다.

내겐 도미닉 서튼을 중요한 손님으로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을 등지고 가장 좋은 의자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며 그를 기다렸다. 집사는 약속한 시간에 도미닉 서튼을 데리고 왔다.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도미닉 서튼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인사에 나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살짝 움직여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자작.”

“…안녕하십니까, 랭던 경.”

도미닉 서튼이 가까이 와서 묵례했으나 나는 쳐다보기만 하다 대꾸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 주는 예의조차 차리기 귀찮았다. 그가 시간을 질질 끌지 않고 어서 의자에 엉덩짝을 붙이고 앉길 바랄 뿐이었다.

도미닉은 곧 모욕감에 벌겋게 절여진 얼굴을 달랑달랑 달고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로엘이 본인의 품위를 위해 분한 마음을 참고 예의를 차리는 것과 달리 이 자는 공작과 몰락한 자작의 차이를 아는 표정을 하고 있어 짓밟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도미닉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를 하대했다.

“그래, 오는 길은 평안했나요?”

“눈이 녹아 편히 왔습니다.”

“로엘과 내가 기차 사고를 당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신문으로 봤습니다. 로엘이 에메랄드 저택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면서 안부를 여쭙는 서신 한 통 보내지 않아 죄송합니다, 저하.”

“나야 굳이 자네가 보태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서신이나 병문안을 왔다 발걸음을 돌리는 이가 많지만 로엘에게 안부 편지 한 장 오지 않으니 내가 다 민망하더군. 왜 로엘을 찾아오지 않았나?”

로엘의 이름이 나오자 도미닉 서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로엘이 도미닉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그가 어린 동생을 얼마나 깔보고 있는지 느껴졌지만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하니 혹시나 싶은 작은 의구심마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로엘에게 연락을 안 한 이유에 대해 변명까지 할 필요가 있나, 꺼려 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사 준비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하녀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겨울에 먹기 귀한 과일들을 본 도미닉의 눈썹이 움찔댔다. 유명한 요리사가 직접 구운 아름다운 모양의 과자와 빵들까지 그에게 잃어버린 영광을 상기시키는 모양이었다. 그는 200년 전 왕가에서 사용했던 찻잔의 손잡이를 보물처럼 어루만지다 집어 들었다.

나는 등의 통증을 무시하고 잔을 들어 태연하게 홍차를 마셨다. 잔을 내려 두는 손길이 살짝 떨렸으나 도미닉 서튼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 내가 서튼 씨를 부른 용건이 무엇일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몹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엘이 무언가 폐를 끼쳤나요?”

도미닉은 내가 서튼 씨라고 부르고 하대하는데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로엘에 비하면 강단도 없는 작자였다. 나는 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자네에게 로엘에 대한 화대를 지급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네? 아, 그야….”

로엘과 같은 핏줄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탁하고 검은 눈동자가 천박하게 좌우로 굴러가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래도 명색이 자작인데 내 제안을 바로 거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도미닉 서튼의 저질스러움에 대한 나의 과소평가였다.

“로엘이 받으나 제가 받으나 큰 차이는 없겠지만…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공작님.”

“뭐가 부끄럽지?”

“서튼가가 몰락한 후 로엘이 엇나가는 바람에…. 제가 가르친다고 가르쳤는데 참 쉽지 않더군요. 비뚤어진 영혼을 바로잡는 건 신에게 달린 일인 것 같습니다.”

“…하긴, 로엘이 몸을 팔고 다니니 형으로서 무척 부끄러웠겠군.”

“한동안은 제 잘못인 것 같아 밖을 나다니기 어렵더군요. 로엘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사치품을 사들이느라 매춘의 유혹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도미닉 서튼은 그 뒤로도 로엘에 대한 흉을 늘어놓았다. 더러운 입을 나불대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오래도록 떠드는 것이 듣기 싫어 나는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촉새처럼 떠드는 입술이 얌전해졌을 때쯤 나는 이미 도미닉 서튼이란 인간에게 흥미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로엘을 위해 몇 가지 확인해 둘 일이 있어 간신히 자리를 지켰다.

“그 부끄러운 일을 왜 스스로 떠벌리고 다녔지? 나는 당신이 로엘이 창부라고 소문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동생인 서튼 남작에 대한 추문을 흘리다니, 서튼 씨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내가 턱을 괴며 무심히 대꾸하자 도미닉 서튼의 눈동자가 엉성하게 흔들렸다.

“그렇잖습니까? 내가 가진 의문이 그거요. 왜 스스로 가문에 해가 될 소문을 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소문내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당신이 친구들에게 처음 소문을 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에드윈 달튼, 해리 로드, 빅터 피셔고 그 자리에 없었던 다른 하나는 새뮤얼 프리데릭이지.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서튼 씨.”

“…….”

“내가 주목한 점은 당신이 소문을 내기 전엔 로엘이 창부라고 말하고 다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로엘이 정말 창부가 맞을까 의심하게 되었어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로엘이 창부인 건 맞습니까?”

도미닉 서튼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두 번째 질문이 도미닉의 무언가를 자극했는지 그의 얼굴은 어느덧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공포심에 가까운 당혹스러움에서 로엘이 창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거의 확신으로 변했다.

다만 그 확신에선 해결되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었다. 왜 도미닉에게 그런 소문을 낼 필요가 있는가, 였다.

동생을 남창으로 위장하여 내게 쉽게 접근시키기 위해서?

‘도미닉은 로엘을 통해 내 마음을 얻어 내어 사교계로 복귀할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겠지. 도박질을 하고 귀족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돈도 필요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프리데릭은 역시 로엘의 숨겨 둔 연인인 걸까.’

아직 눈이 내리고 있는 가슴 속 얼어붙은 호수에, 묵직한 고드름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랭던 경, 로엘이 몸을 판 건 사실입니다. 저는 동생을 잘못 키운 것 같아 친우들에게 털어놓고 고민을 나눴을 뿐입니다. 그렇게 소문이 날 줄은 몰랐습니다.”

“입만 열면 천박한 거짓말이군. 고민을 상담한다는 사람이 동생이 내는 신음 소리를 따라 하며 웃고 다닙니까?”

“…….”

“그럼 세 번째, 당신을 만나고 오면 로엘의 몸에 내가 모르는 멍이 생깁니다. 특히 이마에 자주 멍이 들더군. 당신이 때렸어요?”

“…그건 그저 훈육을….”

훈육이라는 소리에 나는 그냥 서랍에 든 총을 꺼내 도미닉 서튼의 머리통에 총알을 한 발 갈겨 주고 싶었다. 내겐 사실 그편이 훨씬 쉬웠다.

“자작…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요. 훈육을 받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오늘 만나 보니 당신은 로엘보다 나은 점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이 말이지. 대체 누가 누구를 훈육한다는 거요? 내가 로엘이라면 당신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소리는 한숨 하나라도 마음속에 남겨 두지 않았을 겁니다.”

“…….”

“그러니 다시 로엘의 몸에 손을 댔다간 당신이 내게 훈육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알겠습니까?”

“…예, 랭던 경.”

새파랗게 질렸던 도미닉 서튼의 얼굴이 다시 처음처럼 모멸감에 붉게 절었다. 오래도록 창고 속에 처박혀 있다 나온 토마토처럼 붉은 물이 질질 흐르는 낯빛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도미닉에게 잘 보이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잉크병을 열고 펜촉을 담가 수표에 7만 골드를 적어 놓고 내 이름부터 사인했다. 수령자의 이름을 쓰기 전에 흘끗 도미닉을 쳐다보니 그는 모멸감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내가 자신의 이름을 수표에 적어 넣는지 아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자작, 당신에게 카드 도박으로 인한 5만 골드의 빚이 있다 들었어요. 맞습니까? 이 수표를 현찰로 바꾸면 좋아하는 카드 게임을 좀 더 할 수 있겠군.”

“…예.”

나는 그의 대답에 도미닉(Dominic)이란 이름 철자 중 두 자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가여운 로엘에게 매질을 했다는 소리지?”

“…예.”

그 대답에 철자를 다시 두 자 더 적어 넣었다. 방금 내 행동으로 도미닉 서튼은 이 게임의 룰을 완전히 이해한 듯 보였다. 진실로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이 수표에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적어 주지 않으리란 것도.

“당신은 군 복무를 했어요. 20살 때. 그때 외국에 나가서 포로들의 목을 베는 일을 했다지?”

“…예.”

그 대답에 세 글자를 적어 넣어 ‘도미닉’이 완성되었다. 이제 그의 성(姓)인 서튼(Sutton)이라는 글자만 쓰면 도미닉이 7만 골드를 수령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먼저 ‘S’를 적어 넣고 고개를 들어 도미닉의 눈을 쳐다봤다.

코앞에서 덜렁거리는 돈을 보고 그는 내가 앞서 주었던 모욕들은 모두 잊은 듯했다. 카드 게임을 한 번이라도 더 할 수 있다면 중독자들은 무슨 짓이라도 함을 모르지 않았다. 도미닉은 붉은 생고기를 눈앞에 둔 들개나 다름없었다. 이 고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얘기할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두 번은 묻지 않을 거요. 그러니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자작.”

“예, 공작님. 무슨 질문이든 하십시오.”

“당신이 아버지의 목을 베었지?”

“예, 제가 벴습니다.”

나는 말없이 계속 도미닉 서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마침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날 아침 로엘에게 아편을 먹이고 아버지의 피를 묻혔습니다. 그래서 로엘은 자기가 한 줄 압니다.”

“로엘에게 편지를 써요. 당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하시오. 그러면 5만 골드를 더 주도록 하겠습니다.”

도미닉 서튼의 눈동자가 계산기를 두드리듯 공중을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는 로엘이 두렵지 않을 테니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뒤 물었다.

“아까 말했듯 두 번 묻지 않겠습니다. 하겠어요?”

“…계약금으로 2만 골드를 먼저 주시면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나머지 3만은 로엘이 당신에게 편지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즉시 지불하겠습니다. 잘 들어요, 서튼 씨. 이 수표는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로엘의 화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값싼 자존심을 사는 비용이오. 굳이 따지자면 도미닉 서튼에 대한 화대지.”

나는 7만 골드짜리 수표에 서튼이라는 성을 마저 휘갈겨 썼다. 2만 골드짜리 수표를 추가로 써서 그 금액에도 사인한 뒤 수표책에서 뜯어내 도미닉 서튼에게 집어 던졌다. 도미닉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수표 두 장을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도미닉이 수표를 들고 나가자마자 나는 그를 향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불타 등의 통증도 잊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녀들이 들어오려 했으나 모두 물리고 창가를 서성였다.

나는 도미닉 서튼의 팔다리를 하나씩 떼어 내 개에게 먹이로 집어 던져 주고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에라도 당장 그리할 수 있었으나 도미닉이 로엘에게 해명 편지를 쓸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로엘은 아직 밤마다 아버지의 환영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집사님! 도프 씨!”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재빨리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나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계속 서성이다 그에게 성난 투로 말했다.

“도미닉 서튼의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어울리는 도박꾼들 중에 손이 빠른 자들을 매수해서 그를 뼛속까지 발라먹으라고 하시오. 도미닉이 유일한 도피처가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까지 몰아붙여요. 어차피 오르게 될 빚더미입니다. 높은 산일수록 빠르게 정상을 정복해야 하는 법이지. 알아들었습니까?”

“네, 공작님.”

“그리고 도미닉이 돈을 못 갚을 때마다 주먹으로 훈육하고 내게 보고해요. 얼마나 맞았는지 확인해 두고 싶소. 로엘은 도미닉이 아무리 쓰레기라도 내가 형을 직접 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상심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는 별수 없어요. 손가락 몇 개쯤은 잃게 해도 괜찮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로엘은 강아지들과 산책을 나간다더니 돌아왔어요?”

“강아지들을 두고 혼자 산책을 나가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잠깐 혼자 있고 싶습니다.”

집사는 금세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나는 쓰라린 통증을 등진 채 햇빛을 반사하는 눈 무더기를 바라보며 로엘을 생각했다.

‘도미닉은 로엘이 창부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어. 로엘이 가학적인 섹스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동안 그 모든 행위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걸까?’

나는 앞으로 로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심하다 오랜만에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작은 판을 열자 바뀐 글자가 남아 있었다.

B/AC/34R

포도주 저장고로 들어가 6개의 진열장 중 B가 가리키는 세 번째 진열장 앞으로 갔다. 첫 번째 줄, 세 번째 칸에 든 포도주병을 꺼내자 1734년산 로열 워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르크를 열었다. 밀봉된 서신은 평소처럼 코르크에 매달린 채 핏빛 액체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얇게 말린 편지를 펼쳤다.

사고로 다치셨는데도 쪽지를 무사히 확인하실 수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신이 우리의 편임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지원해 주신 덕분에 B에게 자금은 무사히 전달되었습니다. 지난번의 비밀스러운 회동 결과 제안해 주셨던 3월과 4월 중 3월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을 더 미뤄서는 안 된다는 판단입니다. 바다의 흐름과 날씨를 생각하여 3월 1일로 하려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짧은 답장을 썼다.

2월 말에 워맥 장군이 외교 문제로 프리네에 갑니다. 3월 1일이면 노르크의 수도에 없을 확률이 큽니다. 수도를 바로 쳐야 하니 다른 날짜를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편지를 말고 밀봉하여 새 코르크에 매단 뒤 같은 포도주에 넣고 끼웠다. 등이 아파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다.

몸을 돌려 나오려다 죽은 윌리엄이 저장고 벽에 걸어 둔 십자가를 올려다봤다. 포도주 수집은 내가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의 취미였다. 이 포도주 저장고는 윌리엄에게 속한 장소였다. 2층의 비밀 서재처럼.

나는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죽은 윌리엄을 떠올렸다. 포도주 저장고와 비밀 서재에서 벌였던 그간의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면 드디어 내가 짊어진 무거운 사명도 끝이 난다. 그러고 나면 이제 나의 의무는 딱 하나만이 남을 터였다.

로엘만은 결코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

나는 로엘을 생각하며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성호를 그었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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