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비밀 장부 (14/27)

14. 비밀 장부

밤사이 열쇠는 그의 잠옷 안으로 돌아갔다. 침실 창밖에는 눈꽃이 핀 앙상한 나뭇가지가 거친 바람에 흔들렸다. 랭던 경과 나의 아침엔 서먹한 기운이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랭던 경의 아침 식사를 도왔지만 벽난로 속 장작이 바짝바짝 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몰락한 귀족인 것도 모자라 창부라는 소문까지 난 로엘 서튼에게 고백을 거절당했으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을 만도 한데, 랭던 경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서툴게 떠먹여 주는 수프와 잘라 주는 고기를 먹고, 먼저 말을 걸지 않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날 즈음 애니가 신문을 들고 왔다.

“랭던 공작님, 오늘 아침 신문입니다.”

“로엘 씨에게 주세요.”

“네, 공작님.”

나는 빈 그릇을 쟁반에 돌려 두고 신문을 받아들었다. 신문 1면에는 ‘샤를 대공의 목숨이 위협받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폭탄이 터져 엉망이 된 식당 칸 내부의 모습까지 상세히 공개됐다. 나는 신문을 랭던 경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저하, 시민들이 몹시 분노하겠습니다.”

“기사를 너무 자극적으로 썼군. 이러면 철도사에 피해가 가겠는데…. 폐하와 워맥 장군도 불편해하겠습니다.”

“읽어 드릴까요?”

“아니, 됐습니다. 그냥 침대 테이블 위에 올리고 넘겨줘요.”

물어보긴 했지만 그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신문을 든 손이 잠시 방황했다. 목이 메서 힘겹게 침을 넘기고 대답했다.

“…네, 저하.”

침대 테이블 위에 신문을 반으로 접어 올렸다. 랭던 경은 되도록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다 읽고 고갯짓을 할 때마다 신문을 넘겼다. 나는 그가 신문을 반절 정도 읽을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인내했다. 그러나 오전 내내 이어지고 있는 불편한 침묵을 그 이상은 견디지 못했다.

“저하, 어제의 일을 거절로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그저 대답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제가 어떻게 저하를 거절하겠습니까.”

“내가 말을 아끼고 있는 건 침대 밖에서 화풀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내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그 얘기는 당분간 하지 맙시다. 이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신을 말로 상처 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요.”

랭던 경이 신문에 눈을 둔 채로 대답했다. 그의 사려 깊은 거절에 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져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랭던 경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게 상처를 주는 건 아주 간편한 선택지였다. 반면 나를 향한 애정으로 그 선택지를 포기하는 건 공작의 자존심에 무척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처음 에메랄드 저택에서 만난 고고한 그였다면 반드시 내게 모멸감을 주었을 것이다.

랭던 경이 다음 장을 읽을 수 있도록 페이지를 넘겨 주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자존심이 상했을 테니 날 보는 시선이 냉랭하게 변했을 거라 막연히 상상했건만, 막상 마주한 그의 시선은 예상과 사뭇 다른 빛을 띠었다. 늘 단단하던 시선에 짙은 슬픔이 배어 있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내가 로엘 씨에게 그러지 않도록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습니다. 불같은 성질이 있어 잘못 마음을 먹으면 주저함 없이 그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최소한 내 스스로 당신이 나보다 안전한 사람을 만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행동하면 안 되잖아요.”

“저하보다 안전한 사람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대를 침대 위에서 울리지 않고, 침대 밖에서 말로 상처 주지도 않는 사람을 말하는 거요. 적어도 타인을 죽고 싶게는 만들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저는… 아니에요, 저하. 어째서 그런 말씀을….”

랭던 경은 다시 신문 위로 눈을 돌렸다. 내 눈가에는 금세 뜨거운 물기가 고였다.

동생을 죽였다는 누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서도 그는 아직 자책을 그만두지 못한 것이다. 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고 그가 글을 다 읽길 기다렸다가 신문을 팔락, 넘겼다.

약 기운 때문에 그가 잠시 눈을 붙인 틈을 타 샬롯이 가져온 새뮤얼의 답장을 확인했다. 쪽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센트럴 호텔 501호, 오후 5시.

나는 메모를 태워 버리고 랭던 경이 준 선물을 모아 둔 3층 방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당장 전당포에 맡길 수 있는 귀중품들을 골라 작은 트렁크에 담았다. 랭던 경이 사과하며 주었던 노란 다이아몬드 소매 단추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나올 때 혹시나 해서 가지고 나왔던 패물 역시 모두 챙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 몫으로 물려받은 보석이었다.

나는 랭던 경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오후에 잠시 도미닉을 만나러 외출해도 될까요? 사고 소식을 듣고 수도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랭던 경이 예전과 달리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혹여 나를 향한 애정이 줄어들어 통제하려는 욕구도 줄어든 게 아닐까, 몹시 신경이 쓰였다. 모든 게 내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고백을 거절했으면서 우리가 예전과 같기를 바라다니….

그는 등의 상처가 몹시 아픈지 점심을 들고난 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소설을 읽어 주는 동안 간간이 시계를 확인할 뿐이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와서 내가 나갈 채비를 시작하자 랭던 경이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몇 시쯤 돌아올 것 같아요?”

“6시면 돌아올 듯합니다.”

막상 나갈 시간이 되니 역시 신경이 쓰이는가 싶어 기쁜 마음이 작게 움텄다. 랭던 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흠, 당신 형을 저택으로 오라고 할 걸 그랬군. 6시면 무척 캄캄할 텐데. 기차 여행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데 외출까지 하면 피곤하지 않겠어요?”

“괜찮습니다. 시내까지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것뿐인걸요. 그리 피곤치 않을 거예요.”

“취소를 하면 좋겠건만…. 그럼 털목도리를 하고 나가요. 감기 듭니다.”

“그러겠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에 고분고분 대답하며 평소처럼 옷차림까지 다 확인받은 뒤에야 저택을 떠났다. 마차는 센트럴 호텔에서 떨어진 카페 근처에 세웠다. 마부에게 쉬다 오라고 삯을 쥐여 준 후 혼자 길을 나섰다.

내 목적지는 전당포였다. 큰 전당포를 몇 군데 돌며 랭던 경이 그동안 선물한 회중시계와 귀중한 물건, 어머니께 물려받은 보석들을 맡기고 금전을 꾸었다. 언젠가 랭던 경에게 돌려주려 간직하고 있던 첫날밤에 받은 수표까지 챙겼다.

그러나 지금 조끼에 걸고 있는 금색 회중시계만은 전당포에 맡길 수 없었다. 첫 키스를 한 밤, 랭던 경에게 성탄 선물로 받은 시계였다.

나는 센트럴 호텔 로비에 도착한 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회중시계를 꺼냈다. 바늘은 5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뚜껑 뒷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장이 로비의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성탄의 밤,

그대에게 드리는 첫 입맞춤을 기억해 주시오.

나는 모든 일이 잘되길 기도하며 회중시계의 뚜껑 위에 입을 맞추고 501호로 올랐다. 이제 내가 찾아낸 정보들과 전당포에서 바꾼 돈으로 새뮤얼과 거래를 해야 할 때였다. 무사히 놓여 날 수 있을지 겁이 났지만, 나와 랭던 경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이제는 물러날 데가 없었다.

나는 랭던 경을 사랑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나를 구해 주기 훨씬 전부터.

사랑하는 그가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이번 기차 여행을 통해 확신으로 변했다. 5년 전엔 아버지를 지킬 힘이 없었으나 이 자유주의자만은 내 목숨을 걸고 보호하고 싶었다.

심호흡을 한 뒤 옷차림을 가다듬고 노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폭탄 사고 후, 처음 맞닥뜨린 새뮤얼 프리데릭의 얼굴이었다. 그를 본 내 표정은 노르크의 겨울 호수처럼 굳게 얼어붙었다.

“새뮤얼, 안녕하세요.”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로엘.”

등 뒤로 501호의 문이 닫히고 나는 새뮤얼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이 다치던 순간이 떠올라 내 눈동자엔 차디찬 불꽃이 탔다.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좋아 보인다는 말이 나오나요? 좀 더 제게 예의를 갖춰 주시면 좋겠어요.”

“몇 달 동안 랭던 경 옆에 붙여 놨더니 귀족의 말투가 다 되었군.”

“그렇게 느껴지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귀족이 맞으니까요.”

나는 새뮤얼과 마주 보고 앉았다. 하녀가 차를 내오고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새뮤얼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곤란하지. 도미닉은 프리데릭가의 양자 자리까지 생각하고 있던데. 로엘 너는 그 정도로 귀중한 정보는 찾아내지 못했잖아.”

“도미닉의 양자 자리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정말 줄 생각은 있으신 거예요?”

“글쎄….”

새뮤얼이 너구리같이 능글맞은 태도로 덧붙였다.

“하지만 도미닉이 받아 간 돈은 로엘 자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지.”

“…지금부터 그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도미닉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으셨으면 해요.”

새뮤얼은 씩, 미소를 짓더니 난감한 것처럼 검지로 턱 근처를 긁적였다. 내 건방진 태도에 대한 가소로움이 절반, 소식을 들은 도미닉의 반응에 대한 호기심이 절반쯤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물었다.

“제가 새뮤얼 당신에게 갚아야 할 돈이 얼마나 되죠?”

“그보다, 왜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건가? 그동안 별말 없이 잘해 왔잖아.”

“…제게 첩자 일을 제안하기 전에, 이미 도미닉을 따로 만나셨죠?”

차를 마시던 새뮤얼이 흘끗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맞았다는 뜻이다. 뺨이 분노로 금세 뜨거워졌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당신과 도미닉은 제가 첩자 짓을 하는 대가를 미리 상의했을 거예요. 저는 이 일에 엮인 후로 당신과 도미닉이 저를 제외하고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어요.”

“자네 말이 맞네. 도미닉과 미리 상의했어. 그걸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이 일의 당사자는 저예요. 도미닉이 아니라요. 제가 당신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을 알려 주세요. 모두 갚고 첩자 일을 그만둘 수 있게요. 그렇지 않으면 랭던 경에게 당신에 대해 모두 다 얘기해 버리겠어요.”

“그이가 자네가 첩자인 걸 알면 지금처럼 옆에 끼고 있을 거라 생각해?”

물론 그럴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새뮤얼에게 내 생각을 들킬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교묘히 말을 틀어 대답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랭던 경에게 걸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이번 기차 사건 때처럼 목숨을 잃을 뻔할 수도 있구요. 자유주의자도 아닌 사람 뒤를 캐느라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뮤얼은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고 싶은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무표정으로 새뮤얼의 시선을 똑바로 응수했다. 랭던 경이 아닌 사람은 내 눈동자에 무슨 감정이 파도치는지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새뮤얼은 천장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채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금액을 계산했다.

“100만 골드. 갚지 못할 거야.”

“…아니요. 저는 갚을 겁니다. 여기 현금으로 60만 골드를 가져왔어요.”

또 늘어난 큰 금액에 가슴이 무너질 듯이 아팠으나 눈물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돈이 든 트렁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새뮤얼은 다리를 꼬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젓자 자신의 입에 물고 성냥개비를 그었다.

“나머지 40만은.”

“…제가 랭던 경의 비밀 장부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걸로 끝내 주실 수 있나요?”

불을 붙이느라 시가를 연신 뻐끔뻐끔 빨던 새뮤얼의 눈이 나를 향해 날카롭게 움직였다.

“설마… 비밀 서재 문을 연 거야?”

“네, 열었습니다.”

“내용은? 내용을 봤어?”

“그건 가격을 지불하고 새뮤얼 당신이 확인하세요. 40만 골드로요. 그리고 이후 도미닉에게 돈을 주시려거든 도미닉에게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제가 아니라요. 저와 당신의 거래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새뮤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가를 태우며 방을 서성이는 모습이 초조하게 보였다. 나를 과연 첩자로 계속 써먹을 수 있을지, 아니면 비밀 장부를 얻고 깔끔히 버릴지 득실을 따져 보고 있을 것이다.

아까울 터였다. 나는 유일하게 랭던 경의 저택에까지 머물게 된 사람이었고, 각종 수첩과 서신의 내용을 훔쳐서 전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밀 장부는 새뮤얼이 애초에 제안했던 내 최종 임무이기도 했다. 비밀 장부만 얻는다면 나를 투입한 목적은 확실히 이루는 셈이었다.

새뮤얼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휙 돌아봤다.

“로엘 네 생각에는 그가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 같아?”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랭던 경은 오만하고 자신이 공작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의 성격을 아시지 않으세요?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도요.”

“그야 그렇지만… 왠지 로엘 자네가 하는 소리는 못 믿겠군. 랭던 경을 보호하려고 하는 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저는 제가 판단한 바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제가 드린 정보를 보고 새뮤얼 당신이 판단할 문제죠.”

새뮤얼이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제길! 말본새하고는! 몇 달 새에 자네가 너무 변했군.”

“당신이 저를 첩자로 만들었으니 그 역할에 걸맞게 변한 것이죠. 제게 아무런 언질 없이 기차에 폭탄을 설치해 죽을 뻔하기도 했구요. 그러고도 제가 이 일을 계속할 거라 생각한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랭던 경에게 첩자라는 사실을 들키기도 싫고 당신 때문에 목숨을 날리기도 싫습니다.”

“…폭탄의 위력이 생각보다 너무 컸다고. 우리도 예상 밖이었어. 기차를 고장 내려던 것뿐인데 랭던 경이 죽을 뻔하고 애써 심은 첩자는 죽어 버렸으니!”

역시 그때 식당 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인이 폭탄을 설치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 하인 말고는 누구에게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새뮤얼의 첩자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새뮤얼은 나지막이 욕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40만 골드에 사겠네. 애초에 목적은 그거였으니 여기서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내일 오전 9시,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에요. 랭던 경은 약 기운 때문에 점심 전까지 못 일어나실 거예요. 페이지는 5백 쪽 정도 되니 베낄 수 있는 사람을 최대한 많이 준비하세요.”

“알겠으니 역겨운 명령조는 집어치우는 게 어때? 아직 빚을 다 갚지도 않은 주제에.”

“일단 제게서 60만 골드를 현금으로 받았다는 증서에 사인해 주세요.”

“이거 섭섭하군.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당연한 절차일 뿐입니다.”

나는 트렁크를 열어 새뮤얼에게 가지고 온 현금을 보여 준 뒤 미리 써 둔 증서를 꺼냈다. 새뮤얼이 돈을 세 보는 동안 나는 증서에 ‘60만 골드’를 변제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돈을 확인한 새뮤얼은 증서에 사인하고 촛농을 떨어트려 손에 끼고 있던 굵은 반지로 가문의 인장을 찍어 주었다.

드디어 절반 넘게 갚았다. 내일 비밀 장부만 무사히 가져다준다면 이 살 떨리는 첩자 짓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자유주의자’ 로엘 서튼으로서 살 수 있었다. 죄책감 없이 랭던 경의 곁에서 혁명에 같이 기여할 길을 찾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슴이 흥분으로 떨렸다.

증서를 소중히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도리를 매며 물었다.

“장소는요?”

“호텔 맞은편에 있는 건물 2층 사무실로 하지. 그곳을 빌려 두겠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봬요, 새뮤얼. ”

새뮤얼은 내 태도에 비위가 상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호텔방에서 얼른 달려 나오고 싶은 욕구를 겨우 삼키며 침착하게 객실 문을 열었다. 마침내 등 뒤에서 묵직한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더는 긴장감을 억누를 수 없어 도망치듯 로비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숙녀와 신사들의 눈빛이 내게 향했으나 심장이 폭발할 듯해 천천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호텔을 나와 구석진 곳으로 달려갔다. 가스등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손발이 미친 듯이 떨려서 주먹을 쥐어 봤지만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 하아….”

들썩대는 가슴팍을 가라앉히려 계속 심호흡했다. 랭던 경이 준 소중한 선물들을 끌어모아 훔치듯이 돈을 만들었다는 죄책감. 내일 다시 비밀 서재의 열쇠를 빼돌렸다가 되돌려 놔야 한다는 두려움. 무엇보다 몇 달간 이어진 첩자 노릇이 끝나게 되었다는 흥분.

그 모든 감정이 거대한 눈사태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거칠게 내뱉는 숨결은 차디찬 바람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잘될 거야, 조금만 참으면 돼…. 내가 다 끝낼 수 있어.”

어둠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채 한참 동안 스스로를 달래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장갑을 꺼내 끼고 마부와 헤어졌던 장소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마부는 이미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창문 너머의 풍경이 빠르게 움직였다. 쓸쓸한 노르크의 거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떠올랐다.

‘도미닉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장부엔 랭던 경에게 해가 될 내용이 없는 것이 맞을까? 꼼꼼히 확인했으니 괜찮을 거야. 내가 봤을 땐 의심할 만한 내용이 없었으니까.’

장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복기했다. 비밀 장부엔 원장부와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른 내용이 없었다. ‘하클리스’라는 이름이나 ‘베버릭 왕국’과 관련된 이니셜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안심했다.

비밀 장부에서 원장부와 다른 해외 지출 내역은 ‘리스트(List)’밖에 없었다.

리스트.

리스트는 노르크와 선로가 이어져 있는 타국(他國)의 철도사로, 랭던 회사와 거래하는 유명 해외 철도사 중 하나였다.

철도사의 거래처임에도 불구하고 랭던 경의 개인 장부에 내역이 적혀 있는 걸 보면, 그가 개인적으로 리스트 철도사와 뒷거래를 했거나 비자금을 주고받은 내역일 듯했다. 하지만 불법적인 일이어도 상관없었다. 리스트 철도사는 샤를 대공의 혁명 자금과 관계 있을 리 없는 곳이었으니까. 즉, 새뮤얼이 본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내용이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랭던 철도사는 해외 거래처가 여러 군데 있었다. 도버 철도사, 브리네오 철도사, 오턴 철도사…. 그러나 개인 장부에 이름을 올린 거래처는 ‘리스트’ 뿐이었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고민들이었다. 비밀 장부가 원장부와 다른 점은 ‘리스트’ 하나뿐인데 새뮤얼에게 보여 준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리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더 참아 내면 돼.”

그러면 랭던 경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일에 더는 관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젠간 그에게 죄를 털어놓고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르크의 시내를 빠져나온 마차는 어두운 숲길을 달려 저택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모두 끝날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 생각을 하며 저택의 불빛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마침내 창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이 과연 에메랄드 저택의 불빛인지, 길을 지나는 사냥꾼의 랜턴인지… 이 모퉁이만 돌아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죄책감은 평소처럼 아버지의 머리로 변해 나를 괴롭히려 시도했다. 하지만 랭던 경이 기차에서 몽마에 시달리는 나를 달래 준 후로, 몽마는 예전처럼 생생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지 못했다. 그의 애정 어린 위로에 끔찍한 몽마의 힘이 바랜 듯했다.

대신 가끔씩 눈이 떠질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랭던 경의 신음이 들렸다. 그는 깨어 있을 땐 좀처럼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잠에 빠져 뒤척일 때는 종종 고통스럽게 앓았다. 나는 혹여나 상처가 덧났을까 잠옷을 들춰 붕대를 살피고, 달래듯 그의 팔뚝을 토닥이다 다시 잠에 빠지곤 했다.

날카로운 긴장감 속에 새벽은 더디게 찾아왔다. 하늘을 낮게 뒤덮은 구름은 세상으로 떨어지려는 햇빛을 촘촘히 가로막았다. 랭던 경이 아침 약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데 그가 신문에 두고 있던 시선을 내게로 옮기며 말했다.

“약을 먹으니 잠이 오기만 해서 오늘은 먹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 손가락으로 약통을 열고 있던 나는 랭던 경의 말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 놀라 모든 행동을 멈췄다. 오전에 새뮤얼에게 장부를 전달하려면 랭던 경이 반드시 약을 먹어야 했다. 약을 먹지 않은 그는 잠귀가 밝았다. 절대로 품에서 열쇠를 떼 놓지도 않았다. 나는 느려진 머릿속을 휘저으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저하, 잠만 오게 하는 약이 아니라 상처를 아물게 해 주는 약이니 드셔야 합니다.”

“오늘 집사에게 보고받을 게 있어서 먹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랭던 경은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신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기었다. 나는 들고 있던 약통을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부여잡았다.

‘어떡하지.’

오늘 장부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어제 새뮤얼에게 건넨 60만 골드도, 그에게 받은 증서도, 장부를 베껴 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랭던 경을 등지고 선 채 일단 알약을 꺼냈다. 그중 한 알은 내 손바닥에 몰래 감추고, 다른 한 알은 작은 유리그릇에 담아 협탁에 올려 두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약을 드세요, 랭던 경.”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지어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신문 좀 넘겨줘요.”

생각했던 것보다 랭던 경이 기사를 빨리 읽고 나를 불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으나 다소 어색하게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 조끼 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약을 떨어트렸다. 다행히 랭던 경은 내 행동을 의심하지 않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 신문을 쳐다봤다.

‘괜찮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을 뿐이니까.’

그렇게 안심하려 해도 뺨엔 새빨간 불안감이 가득 차올랐다. 중요한 아침인데 삐거덕대는 것이 너무 많았다. 모든 일이 다 맞아떨어져도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건만,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신문을 넘겨주며 쭉 뻗은 랭던 경의 콧날과 단정한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에게 약을 줄 방법을 고민했지만 몰래 뜨거운 차에 약을 녹이는 것 말고는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는 차를 마실 때 약 특유의 쓴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는 대부분 약보다 맛이 옅었다. 그러므로 되도록 커피여야 했다.

랭던 경이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 방법이 없으니까.

신문을 또 넘겨주기 전에 손끝에 솟아나는 미지근한 땀을 옷자락에 몰래 닦아 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얼른 물어보고 싶은 조급한 마음도 억눌렀다. 가끔 티 나지 않게 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내 부족한 인내심을 메꿨다.

랭던 경이 마침내 신문을 다 읽었다. 약 30분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나는 하루를 보낼 힘을 다 쏟아 낸 듯 피로해졌다. 신문을 반으로 접으며 입술을 간신히 곡선으로 휘었다. 심장은 끊임없이 가슴 안쪽을 짓이기듯 뛰어 댔다.

“저하, 주무시기 싫으시면 애니 양에게 커피를 좀 내오라 할까요?”

랭던 경의 입술이 열리는 모습이 느릿하게 눈 안에 들어왔다. 그의 입에서 마침내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잠시 쉬고 계세요.”

나는 침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조끼 주머니 위로 느껴지는 알약을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랭던 경에게 몰래 약을 주어야 한다니.’

계속 추가되는 내 죄의 무게는 과부하 상태에 이른 지 오래였다. 여기에 또 새로운 죄과가 더해져야 했다.

다 포기하고 싶은 연약한 마음을 달래며 1층에 있는 작은 서재로 들어갔다. 깨끗한 종이 위에 알약을 올려놓고 적당한 물건이 있나 주변을 살폈다. 마침 잉크병이 눈에 띄어 그걸로 약을 찧었다. 약은 쉽게 바스라졌다. 가루가 담긴 종이는 곱게 접혀 다시 내 조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커피에 약을 탈 기회를 엿보기 위해 포도주 저장고를 지나 안쪽에 숨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작의 신분으로 부엌까지 직접 온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근처를 서성였다. 다행히 부엌에서 나오던 애니가 나를 발견했다.

“서튼 남작님,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하께서 커피를 찾으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종소리를 놓쳤나 보네요!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남작님.”

“고마워요.”

내 목소리는 흔들렸고 말하는 속도는 조급했다. 그러나 애니는 다행히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안에서 급히 커피를 끓여 나왔다. 나는 커피가 담긴 주전자와 빈 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트레이를 직접 들고 갈 수도, 애니에게서 뺏을 수도 없어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셔츠 끝자락을 꼭 쥐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서야 겨우 엉성한 변명을 지어냈다.

“애니 양,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면 트레이만 놓고 바로 자리를 비켜 줄래요? 커피는 제가 저하께 직접 따라서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남작님.”

남은 계단을 올라가며 근근이 평소처럼 애니에게 말을 붙였다.

“…요즘 아프다는 언니는 좀 괜찮아졌나요?”

“네, 남작님. 한시름 놓았어요. 배 속의 아기도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답니다.”

“다행이네요. 언니도 아기도 건강해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엄마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성당에 봉사하시면서 열심히 기도드리고 계세요.”

“무슨 봉사를 하세요?”

“영성체 때 쓰는 빵을 만든답니다.”

“그런 봉사를 하시는군요. 성당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교구에 큰 도움이 되겠어요.”

나는 침실 문을 열며 랭던 경을 쳐다보았다. 애니는 문이 열리자마자 입을 급히 다물고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린 뒤 약속대로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다시 또 그를 등지고 섰다. 심장이 너무 뛰어 폭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조끼 주머니에서 간신히 종이를 꺼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종이를 벌리는 손길이 위태로웠다. 커피 잔이 작아 약을 다 넣지 못하고 절반 정도 털어 넣은 뒤 커피를 붓고 스푼으로 저었다. 생각보다 잘 녹지 않아 얇은 셔츠가 금세 땀으로 덤벙 젖었다. 조끼를 위에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스푼으로 눈에 띄는 가루를 눌러 가며 약을 탄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애쓴 뒤 트레이를 랭던 경의 옆으로 옮겼다. 커피를 붓는 것뿐인데 시간이 수상히도 오래 걸렸다. 랭던 경이 의심을 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하, 오늘 퍼렐 의원은 언제 오나요?”

“오후에 온다고 합니다.”

“치료받는 게 많이 아프시죠? 곁에 있어 드리고 싶은데….”

“됐습니다. 별로 보여 줄 게 못 돼요.”

마음이 약해진 상태라 랭던 경의 대답이 시리게만 들렸다. 내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라는 걸 알면서도 과연 연인이었다면 곁에 있지 말라고 했을까, 의문을 품지 않기 어려웠다. 잠시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랭던 경이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쓴맛이 나는지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줄 쿠키도 챙겼다.

나는 랭던 경이 약을 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몸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었음에도 죄책감은 마음을 넝마로 만들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빌고 울고 싶었으나, 그러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됐다. 오늘 하루만….

“나는 괜찮으니 로엘 씨의 시간을 보내도 됩니다.”

랭던 경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아니면 나와 선을 긋는 걸까. 미리 들고 있던 쿠키를 주춤주춤 접시 위에 돌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쉬세요, 저하.”

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랭던 경이 우리 사이에 그은 경계선으로 엉망이 된 마음을 끌어안고 침실을 나섰다. 붉어진 눈을 움직여 시계를 보았다. 벌써 8시였다. 원래대로라면 랭던 경이 약을 먹고 한 번 더 취침했을 시간인데 일정이 늦어졌다. 걱정이 폭설처럼 내렸다.

침실 바로 옆 서재로 살짝 들어가 문에 귀를 붙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랭던 경에게선 별다른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서재를 서성이고 조끼 주머니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끊임없이 열어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약효가 돌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분침은 느리게도 돌았다.

15분이 지났을 때 참지 못하고 침실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랭던 경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저하?”

그를 부르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지만 랭던 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게 틀림없었다. 나는 까치발을 든 채 침대로 조용히 다가갔다. 금실로 촘촘한 자수가 놓여 있는 이불은 미동이 없었다.

“랭던 경?”

다시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자수 부분을 잡아 이불을 느리게 들췄다. 심장이 귀 옆으로 올라붙어 두근대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이불을 조심히 젖혀 두고 그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다 풀어낸 순간 랭던 경이 몸을 살짝 움직였다. 무심코 얼굴을 쳐다봤는데 눈을 반쯤 뜨고 있는 랭던 경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공포에 숨을 들이켰다.

“흡….”

세상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어 버리고 발밑은 무너지는 아찔한 좌절이었다. 내 영혼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의 눈이 다시 감겼다. 침실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나서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가 그가 잠결에 나를 언뜻 본 것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긴장이 풀리는 찰나 뜨거운 눈물이 속눈썹을 적시기 시작했다.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물고 안쪽을 더듬어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겨우 단추를 여며 주고 이불을 원래 위치로 되돌린 다음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어 나는 바로 비밀 서재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침입이었다.

“아….”

심장 부근의 옷자락을 누르자 쿵쿵 뛰는 박동이 내 손을 두드렸다. 랭던 경과 눈을 마주쳤던 순간의 공포가 아직 생생했다. 쓰러질 듯 비틀대는 몸을 끌고 가 미리 찾아 둔 비밀 장부를 서랍에서 꺼냈다. 나는 두근대는 가슴팍 위로 장부를 끌어안았다. 나를 살려 줄 물건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돼.’

스스로를 달래며 소매로 남은 눈물을 훔치고 허리 뒤쪽 바지와 몸 사이에 장부를 찔러 넣었다. 조끼를 잘 내려 허리를 덮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열쇠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하녀 한 명이 복도를 지나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기다려야 했다.

땀이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옆 책장에 꽂혀 있는 작은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평등론>이었다.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은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홀린 듯이 꺼내 앞 장을 펼쳤는데 책의 주인일 듯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다름 아닌 ‘윌리엄 랭던(William Langdon)’.

나는 멈칫했다. 짧은 두 단어였지만 내가 가진 <평등론>에 인사말을 써 둔 ‘윌’과 글씨체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그 윌이 윌리엄 랭던일까?’

궁금했지만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나중을 위해 충동적으로 앞장을 뜯어내고 책을 되돌려 놓았다. 열쇠 구멍 너머의 하녀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비밀 서재를 속히 빠져나왔다.

나는 약속된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숲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정원을 지나가던 하인 한 명이 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남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디 가십니까?”

“호수 쪽으로 산책 가요!”

아무 말이나 지어내어 대답했다. 땅을 딛는 발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온 세상엔 내 심장 소리가 울렸다. 나의 달음박질은 저택이 아니라 영혼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한 걸음이었고, 도미닉이 내 목에 걸어 놓은 목줄을 벗겨 내려는 한 걸음이었다.

살기 위한 걸음걸음이 쌓여 질식할 듯 숨이 차오른 나를 마차로 안내했다. 뛰어들듯 마차에 올라타 묵직한 문을 닫았다.

“빨리 가 주세요.”

“네.”

마부가 힘차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나는 떨리는 손을 모으고 아는 기도문을 하나하나 외우기 시작했다. 기도를 바친다기보다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암송을 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성모송을 읊으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밖을 응시했다. 사위를 둘러싼 어두운 숲과 아무도 발을 디딘 적 없는 하얀 눈이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마차가 호텔 맞은편에 도착했을 때 회중시계의 바늘은 이미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넘긴 상태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잔뜩 성이 난 새뮤얼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욕을 뇌까리며 굵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왜 이리 늦었나!”

“죄송해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약속대로 11시까지는 끝내 주셔야 하겠어요.”

“늦은 게 누군데 약속을 지키라는 거야?”

무례하게 소리를 지르는 새뮤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새뮤얼은 급히 물었다.

“장부는?”

“여기…. 하지만 그 전에 증서에 사인을 해 주세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증서를 받지 않을 순 없었다. 조끼 주머니에 미리 넣어 놨던 증서를 꺼내 둥근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새뮤얼은 팔짱을 끼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부를 확인해야 사인을 해 주지.”

“…그럼 장부를 보여 드릴 테니 증서에 사인을 한 뒤 가져가세요. 사인을 해 주지 않으면 바로 장부를 들고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으니 어서 꺼내 봐. 시간이 없잖아.”

나는 묵직한 장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 감긴 매듭을 풀어 맨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넘기며 새뮤얼에게 글씨를 보여 주었다.

“랭던 경의 글씨체예요. 아시죠?”

“…알지. 어서 증서.”

새뮤얼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내가 새뮤얼의 앞으로 증서를 밀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사인했다. 그리고 장부를 들고 가 옆방 문을 열었다. 사무실로 사용했던 것 같은 넓은 방에는 족히 50명은 되어 보이는 여자와 남자들이 작은 책상을 하나씩 두고 촘촘히 앉아 있었다.

새뮤얼이 대표로 보이는 사람에게 장부를 건네자 그는 종이를 묶은 끈을 능숙하게 풀어낸 후 앞 사람부터 정확히 10장씩 세어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단 한 자도 빠짐없이 똑같이 베끼고 원본은 받은 순서 그대로 올려 두시오! 순서를 섞어 놔서는 안 됩니다!”

종이를 받는 순서대로 사람들의 머리가 차례차례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넓은 사무실 안은 금세 사람들이 사각사각 랭던 경의 장부를 베껴 쓰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 풍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새뮤얼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새뮤얼이 다가와 내 턱을 잡아 들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새뮤얼의 손목을 쳐 냈다.

“함부로 제 얼굴에 손대지 마세요.”

“흠… 이거 섭섭한데. 이 일을 하면서 그쯤은 정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우리에게는 어린 시절 추억도 있는데 말이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랭던 경과는 아래를 접붙이고 놀면서 나는 자네 얼굴에 손대는 것도 안 되나?”

“저는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로엘, 테런스 랭던을 사랑해?”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제가 랭던 경을 왜 사랑하나요?”

나는 새뮤얼 프리데릭을 노려보았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웃으면서 수염으로 거뭇해진 턱을 문지르고 둥근 테이블 쪽으로 가서 앉았다. 낡은 의자가 부러질 듯 삐거덕댔다. 새뮤얼은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으로 맞은편 의자를 탁, 쳤다.

“앉아. 아무리 빨라도 1시간은 넘게 걸릴 테니.”

나는 그 의자를 새뮤얼에게서 더 멀찍이 떨어트리고 앉았다. 팔짱을 낀 채 검지를 까닥이며 가끔씩 벽시계를 확인했다. 랭던 경이 약을 절반만 먹고 잠드는 바람에 처음 제안한 11시는 아슬아슬한 마감 시간이 되어 버렸다. 오래된 2층 사무실의 눅눅한 공기가 흐르는 시간과 나를 좀먹었다.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양이 많은데. 랭던 경에게 해가 되는 내용은 정말 없는 거겠지? 그가 샤를 대공에게 자금을 대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어떡하지.’

영원히 ‘11’에 도착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침이 마침내 11시를 가리키고 벽시계가 소리를 내며 우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새뮤얼의 하수인이 모든 종이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은 장부를 들고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가죽 표지를 낚아챘다. 페이지를 훑으며 장부가 손댄 흔적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나 살폈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뭉툭하고 두툼한 손가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걸로 끝인가?”

새뮤얼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의 싸구려 감상에 어울려 줄 마음이 없었다. 예의상 담담히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으나 새뮤얼이 다시 억세게 내 손가락을 붙들었다. 랭던 경이 알면 싫어할 일이라 불에 덴 듯 바로 손을 뿌리쳤다. 새뮤얼이 능글맞게 웃었다.

“이거 계속 섭섭하게만 구는군, 로엘.”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으면 해요, 새뮤얼. 안녕히 가세요.”

계속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내 태도가 새뮤얼의 심기를 건드렸다. 새뮤얼의 목소리가 2층을 빠져나오는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도미닉 말이야. 무척 화낼 텐데 로엘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나야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그럭저럭 만족한다 쳐도 말이야.”

나는 좁은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새뮤얼을 올려다보았다.

“형님도 언젠가 이해해 주실 거예요.”

“과연 그럴까? 자네는 아직도 도미닉을 믿는 모양이지?”

이제 나는 도미닉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새뮤얼 프리데릭에게 변한 진심을 내보일 이유는 없었다.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제가 도미닉을 믿든 안 믿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도미닉을 조심하라고.”

새뮤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가 더 지껄이기 전에 계단을 마저 뛰어 내려갔다. 마차는 나를 내려 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 가쁜 숨을 겨우 정리하고, 허리 뒤쪽에 꽂고 있던 랭던 경의 가죽 장부를 꺼냈다. 내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작성된 페이지부터 역으로 올라가며 각종 이름과 숫자를 다시 훑었다. 장부의 앞부분은 내가 그를 알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 내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장부를 비밀 서재에 되돌려 놓기 전에 내가 혹여 놓친 것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은 없는지 확인해 두고 싶었다. 마차가 흔들려 멀미가 나고 글씨가 요동쳤으나 목록과 금액을 세심히 확인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펼쳐 볼 수 없을 장부의 페이지가 손끝을 타고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빼곡한 이름들과 숫자 사이에서 옆 나라 철도사인 ‘리스트(List)’가 다시 한번 눈길을 사로잡았다. 올해 1월 ‘리스트’에 지출된 200만 골드의 금액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새뮤얼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랭던 경의 수첩에 적혀 있던 ‘2M’을 봤기 때문이다.

기차 천장에 은닉하여 운반했을 금괴들, 포도나무 아래 서 있는 금발의 리베라 여신.

“리스트, 리스트…. 리스트가 설마 혁명 자금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지난 1년간 리스트에 지출된 돈은 무려 1500만 골드에 육박했다.

‘너무 많은 게 아닐까? 하지만 내가 넘기지 않은 정보는 새뮤얼이 알지 못하니까 리스트를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거야. 다른 데 지출된 금액은 훨씬 많을뿐더러 리스트는 혁명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아닌걸. 샤를 대공이나 랭던 경과도 관계없는 단어야.’

장부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엔 큰 돌과 십자가 빼곡히 서 있었다. 마차가 랭던 경이 다니는 성당의 묘지를 지나는 중이었다.

수많은 비석이 하늘을 향해 십자가를 들고 있는 그 속에서, 유일하게 꽃이 놓여 있는 무덤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른 장미 한 다발. 겨울의 막바지에 저런 귀한 장미꽃이라니. 왠지 윌리엄 랭던의 무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미가 놓인 무덤을 향해 가만히 성호를 긋고 테런스 랭던 경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저택에 도착해 무사히 장부와 열쇠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다행히 랭던 경은 내가 외출을 다녀온 줄도 모르고 약 기운에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잠옷 단추를 잠그고 이불을 덮어 줄 때까지 그는 고른 숨소리를 뱉으며 이따금 통증에 신음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랭던 경의 이마에 키스한 뒤 침실 옆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랭던 경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파에 앉았는데 며칠간 계속되었던 긴장이 풀리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졸음이 쏟아졌다.

응접실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어두워진 창밖엔 가루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응접실의 벽난로가 환히 타고 있었지만 왠지 몸에는 한기가 들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침실로 발을 옮겼다. 랭던 경의 몸 상태가 나아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저하, 주무세요?”

랭던 경을 찾으면서야 나는 늘 내 가슴에 아릿하게 맴돌던 그를 향한 죄책감이 처음으로 끝자락을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랭던 경의 위험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뮤얼의 지시를 받아 새로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내 안에 낯선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얼른 랭던 경의 얼굴을 마주 보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다정히 입을 맞추고 싶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몽글몽글 들떴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졸고 있는 랭던 경의 실루엣이 보였다. 밖에 가루눈이 흩날리고 있어 실내는 무척 어둑했다. 가스등을 켠 뒤 침대로 다가갔는데 앉아서 졸고 있는 줄만 알았던 랭던 경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라 어깨를 살짝 흠칫했다.

“저하, 일어나 계셨으면서 왜 불을 안 켜고 계셨어요.”

“생각할 게 많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내가 로엘 그대를 믿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이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싸늘하게 흘러내렸다.

‘설마 오전에 내가 열쇠에 손댄 걸 눈치채신 걸까? 아니야, 그랬으면 그때 반응을 하셨을 거야.’

나는 미간을 모은 채 랭던 경을 마주 봤다. 그가 지금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으나 무표정한 얼굴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랭던 경.”

세상이 진동하듯 흔들리는 건 내 눈동자가 불안스레 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랭던 경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럼 오늘은 계속 응접실에 있었어요?”

“…네, 저하.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을 꼭 말았다. 고백을 거절한 뒤 계속 어색한 기류가 존재했었으므로 지금의 대화도 그런 흐름 위에 놓여 있을 뿐이라 믿고 싶었다. 나는 다시 굳은 발을 움직여 랭던 경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랭던 경이 내게 화가 난 건지 확인하고 싶어 매끈한 흰 뺨에 입술을 누르고 다정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그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세상을 진정시켰다.

“저하, 며칠 전 제게 물어보셨던 질문이요. 지금 다시 대답하면 안 될까요?”

“무슨 질문을 얘기하는 겁니까?”

어떤 질문인지 알 텐데, 그가 내게 되물었다. 다시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제게 연인이 되어 달라….”

“아, 그 질문.”

랭던 경이 내 말을 싹둑 잘랐다. 나는 멈칫하며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역시 내게 무언가 화가 난 걸까. 그러나 늘 벌컥 화를 내던 평소와 달리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품위 있는 태도를 견지했다. 점잖은 표정을 보고 있음에도 내 속에는 바깥에서 내리는 것과 같은 차가운 가루눈이 바람을 따라 풀풀 날아다녔다.

“로엘 씨, 당신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하기 전에 먼저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합니다.”

“네, 저하. 어떤 질문을….”

“어제오늘 새뮤얼 프리데릭은 왜 만났어요?”

랭던 경의 단정한 입술에서 믿기지 않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의 심장과 눈동자, 손가락과 혀끝… 내 몸의 모든 것이 시간을 멈춘 듯 일순간에 정지되었다.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묵직한 목소리가 주저앉은 나의 심장을 다시 한번 꿰뚫었다.

“표정을 보니 지금 대답을 듣기는 틀렸군.”

“…….”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겼지만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로엘 씨를 창부 취급하지 않고 존중하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고 당신의 대답을 기다려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애정인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랭던 경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부정(不貞)을 저질렀는지 의심하며 화를 내는 기색도, 무섭게 혼을 내겠다 겁박하는 의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명을 기대하는 단순한 목적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물어볼 준비를 하기까지 랭던 경에게 얼마나 고된 결심이 필요했을지는 구태여 추측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적인 정적이 흘렀다.

랭던 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엘 씨는 내가 기차에서 몸을 던져 당신을 구해 줬다고 고마워했지만 실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다친 후에 그대 역시 죽을 각오로 나를 안고 보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대의 마음을 사랑이라 생각했던 나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긴다면 지금 거짓을 지어내어 대답하지 말아 줘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을 얘기하겠다고 신께 맹세해 주시오.”

“…….”

“…로엘.”

“…매, 맹세합니다, 저하. 신께, 신께 맹세하겠어요.”

나는 다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떨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몽글몽글 떠올랐던 설렘은 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랭던 경은 내게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사람이 스스로 지은 죄과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대가를 치르는 일은 더더욱….

내가 과연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일까.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지고 산 테런스 랭던 경처럼.

다시금 나의 죄가 내 영혼을 깊은 어둠으로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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