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차 여행 (2)
나를 깨운 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옆자리로 손을 뻗었으나 랭던 경은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자리가 미지근했다. 두 개의 목소리는 침실 옆 응접실에서 들렸다.
“날짜를 정해서 알려 주십시오.”
랭던 경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익숙한 음성이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가능하겠나?”
“…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날짜는 회의 뒤에 평소처럼 …로 전달하겠네.”
나는 잠결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려 애썼다.
꼿꼿한 자세, 멋있게 넘긴 검은 머리… 샤를 대공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샤를 대공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듯 그 목소리 뒤에는 분명히 다른 기억이 존재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
곧 대화가 끊기고 침실 문이 열리며 가벼운 남색 로브를 걸친 랭던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 뒤로 어슴푸레한 가스등 빛이 쏟아졌다. 나는 어두운 침대에 누워 조각 같은 옆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 지금과 꼭 같은 그의 실루엣을 보고 있었던 기억이 번개처럼 머리를 내리쳤다.
랭던 경의 침실에서 처음 잠을 잤던 날, 목이 말라 깼을 때 랭던 경은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던 낯선 남자와 랭던 경의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서재 문을 열고 내가 일어났는지 확인하던 랭던 경의 옆모습, 어둠 속에서 숨소리를 삼키며 숨어 있던 나.
샤를 대공의 목소리는 바로 그 낯선 남자의 음성과 같았다.
소름이 끼쳐 이불에 묻고 있던 입술로 숨을 작게 들이마셨다. 머릿속에서 그때의 기억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가 정보를 빼내고 있어요’, 샤를 대공이 염려하던 목소리. ‘돈은 철저하게 금괴로만 오가고 있고 장소도 비밀리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를 진정시키던 랭던 경의 목소리.
숨죽인 채 기억에 잠겨 있는 나를 랭던 경이 흔들었다.
“로엘 씨, 일어나요. 이제 기차를 타야 합니다. 윌리엄과 베넷 부인은 이 별장에서 쉬다 돌아갈 거예요. 곧 인사를 나올 겁니다.”
“…네, 저하.”
떠오른 기억을 감당하기 힘겨워 몸이 제대로 가눠지지 않았다. 랭던 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랭던 경은 가스등을 켠 후 내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고 몸을 완전히 일으키도록 도와주었다. 그에게 닿는 내 손끝이 차가웠다. 랭던 경이 의아해하며 내게로 몸을 숙였다.
“혹시 몸이 안 좋아요? 퍼렐 의원도 동행했으니 진료를 봐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몇 시간 못 자서 그런 것뿐이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갖추어 입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내가 찾아낸 고리들을 연결 짓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샤를 대공과 랭던 경이 금괴를 주고받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꼭… 혁명 자금이라는 법은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희붐한 어둑새벽의 탓으로 돌리고 별장 홀에서 베넷 부인과 인사를 나눴다. 베넷 부인은 공작가의 별장에 머물 수 있게 된 기회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 역시 랭던 경 덕분에 도미닉보다 나를 애정 어리게 보살펴 준 그녀에게 여행을 선물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베넷 부인이 종이로 싸인 그릇을 내밀었다.
“이건 레몬파이랍니다. 새벽에 일어나 만들었어요. 공작님과 디저트로 드세요.”
“고마워요, 베넷 부인.”
옆에 서 있던 하녀가 레몬파이가 담긴 그릇을 받아 들었다.
“여행 잘 다녀오시구요, 도련님.”
우리는 작은 포옹을 나눴다. 베넷 부인의 투박한 손이 내 등을 부드러이 다독여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참았다. 내가 연결 짓지 않으려 애쓰는 비밀들을 그녀의 정다운 손길이 모두 거둬가 줄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과 함께 샤를 대공이 탄 객실 칸에 들러 이른 아침 인사를 나누고 어제 이용한 특등석 객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공간은 밀폐됐다.
우리는 안락한 특등석 소파에 마주 앉았다. 랭던 경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부드러이 웃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고 옆으로 자리를 옮겨 품에 안기자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덮었다.
“열은 없지만 안색이 안 좋으니 누워서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편할 것 같긴 합니다.”
랭던 경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동행한 하녀 한 명을 불렀다. 별장에 가는 줄 알고 따라왔던 하녀는 기차 여행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눈에 띄게 들뜬 표정이었다. 그녀는 길쭉한 의자에 부드러운 러그를 깔고, 내가 몸을 누이자 담요를 정성스레 덮어 주었다.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출발했다.
나는 잠을 자는 척 눈꺼풀을 내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미동 없이 있으니 랭던 경이 내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작은 책을 꺼내 독서를 시작했다. 천천히 덜커덩대며 움직이던 기차는 어느 정도 속력이 붙고 나자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철길 위를 힘차게 달렸다.
샤를 대공과 랭던 공작이 금괴를 융통하는 비밀스러운 방법에 대해 논할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공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랭던 경이 혁명 자금을 대고 있는 것.
왤까? 랭던 경은 샤를 대공이 왕이 되면 지금보다 이득을 볼 일이 하나도 없는데. 공화정의 도래가 더 이로운 귀족은 노르크에 단 한 가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평민과 결혼하겠다는 동생을 죽인 사람이었다.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떠나 보낸 뒤 깊은 후회감에 짓눌려 사상을 바꾼 걸까. 자신의 이권조차 내려놓기를 각오하며 자유주의자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야, 너무 단정 짓지 말자. 샤를 대공과 랭던 경이 금괴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둘이 혁명을 공모하고 있다고 확신할 순 없어. 랭던 경은 왕궁의 일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고 철도 사업가이기도 한걸. 그와 금전적으로 얽혀 있는 귀족은 샤를 대공 외에도 많을 거야.’
내 양심에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쓰는 동안 머릿속은 시끄럽다 못해 어그러지는 듯 아팠다. 옷 안주머니에 넣어 둔 약 봉투가 짓무른 상처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여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 내가 하는 일들이 랭던 경을 해치지 않을 텐데. 그가 자유주의자라면 이제껏 내가 새뮤얼에게 전달한 정보와 도미닉이 받은 돈은 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고통에 저며진 내 눈앞에 아버지의 썩은 머리가 나타났다. 상자에 들어 있던 그 머리. 허연 점막으로 덮인 눈동자엔 초점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음은 분명했다. 목의 절단면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피가 뺨 위로 생생히 떨어졌다. 잘린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엔 내 이름을 부르는 끔찍한 쇳소리가 섞였다.
‘로엘… 로엘….’
사지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고통에 눈이 떠졌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으읍, 흡….”
아버지의 흰 점막이 천천히 벗겨지며 무섭도록 충혈된 붉은 눈이 드러났다. 시뻘건 눈을 마주 봐야 하는 생생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경련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머리는 반투명이라 특등석 천장이 훤히 올려다보였다. 길게 늘어진 금발이 소름 끼치게 뺨을 쓸었다. 공포심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때 갑자기 내 눈동자와 아버지의 머리 사이에 커다란 손바닥이 끼어들었다. 그 손은 그대로 내 눈을 덮었다. 손에서 익숙한 체취가 났다.
“쉿, 눈을 감아요. 괜찮으니까.”
나직이 달래는 랭던 경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파묻힌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흣, 읏….”
랭던 경의 눈에도 아버지의 머리가 보이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랭던 경이 내 몸을 등받이 쪽으로 살짝 밀며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눈을 가리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굳은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몸에 힘을 풀면 곧 잠에서 깨어날 겁니다.”
“흐읏….”
“몽마가 나쁜 꿈을 꾸게 하는 거예요. 나도 오랫동안 시달려서 압니다.”
그의 속삭임과 아버지의 환영이 교차했으나 팔을 쓸어내리는 따뜻한 손길만은 몽마에 휩쓸리지 않고 내게 온기를 남겼다. 몸을 다독이는 손길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천천히 누그러졌다.
마침내 내가 손가락을 까닥, 움직이자 랭던 경이 눈을 덮고 있던 손바닥을 거두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내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몽마가 떠났습니까?”
“네, 랭던 경….”
두려움과 잠에 눌린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랭던 경은 양손으로 내 팔뚝을 쓸어내려 주며 그 어느 때보다 다정히 물었다.
“무엇을 봤어요?”
역시 꿈일 뿐이었는지 그는 내가 아버지의 머리를 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혹여나 환영이 진짜 유령일까 봐 오래도록 불안에 떨어 온 가슴속에 작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랭던 경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물들인 눈물과 식은땀을 훔쳐 냈다. 다정한 손길에 간신히 말할 기운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머리였어요, 저하.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의 머리가 자꾸 저를 찾아옵니다.”
“괜찮아요…. 당연한 겁니다. 나도 아직 꿈에서 죽은 동생을 만나요.”
“…그럴 때면 랭던 경도 눈물을 흘리세요?”
“처음에는 많이 울었는데 이제는 울지 않습니다. 끔찍한 모습이지만 그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서요. 내가 그렇게 마음을 바꿔서인지 요즘은 가끔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한 성품의 랭던 경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도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며 나처럼 고되고 외로운 밤을 보내 온 걸까.
“어느 때부터 울지 않게 되셨어요?”
“동생에게 속죄를 시작한 다음부터입니다.”
“저하께서는 어떻게 속죄하셨나요?”
나는 그에게 간절히 물었다. 그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고 싶었다. 랭던 경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동생의 기일에 미사를 바치고 성당에 다니며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보이시니 성모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셨나요? 제게도 그만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열여섯 살 그날에 이미 죽어 지옥으로 영혼이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깜빡이는 눈꺼풀 밑으로 고통스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를 오래도록 괴롭혀 온 악몽이건만, 랭던 경 외에 누구도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 주지 않았다. 꿈이 주는 고통과 아버지를 향한 죄책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랭던 경은 내 아픔을 한가득 덜어 주었다. 눈물이 귓바퀴로 떨어지기 전에 랭던 경의 손수건이 눈물을 닦아 냈다.
“로엘, 미안합니다. 당신을 위로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당신의 형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5년이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 겁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거예요?”
“도미닉은 제 악몽도 거짓말이라고만 했어요. 그렇게 생생한 꿈은 꿀 수가 없다고요…. 거짓말이 아니라면 제가 악해서 마귀에 씐 것이라고요….”
랭던 경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욕을 하듯 단어를 하나하나 힘주어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 섞인 분노는 살얼음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내몬 죄책감이 한 인간의 창자를 끊고 영혼을 불태울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얄팍한 작자일 뿐입니다.”
“랭던 경, 화내지 마세요. 이제 저에게 도미닉의 생각은 중요치 않은걸요. 당신이 알아주시니 그걸로 되었어요.”
랭던 경은 한참이나 겁에 질린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쳐 주고 머리카락 위에 따뜻한 입술을 눌러 주었다.
샤를 대공은 좀처럼 특등석 객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랭던 경과 나는 단둘이서 식당 칸을 이용했다. 만약 약을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불운인지 행운인지 그런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샤를 대공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저녁 8시 무렵이나 돼서였다. 샤를 대공이 같이 저녁을 들자며 랭던 경과 나를 초대했다. 그쯤 나는 긴 기차 여행으로 몹시 지친 상태였다. 우리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식당 칸으로 이동했다.
먼저 도착해 여송연을 태우고 있던 샤를 대공이 밝은 웃음을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탈한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오랜 시간 기차를 탄 사람 같지 않게 활력이 넘쳐 보였다. 랭던 경 역시 마찬가지라 이미 기진맥진한 나로서는 두 사람의 기력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샤를 대공이 먼저 제안했다.
“셰리주로 입맛을 돋우고 시작할까요?”
“좋습니다, 전하.”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답하는 랭던 경과 달리 나는 모든 게 편치 않아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샤를 대공 같은 왕족과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이 처음인 데다가 그에게 열병을 안길 수 있는 가루약을 품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그 가루약은 나를 이 자리의 이방인으로 자처하게 했다.
기차 안에서 준비된 저녁 식사는 상당히 간소했지만 독한 셰리주가 흥을 돋우어 주었다. 잔이 모두 비자 샤를 대공이 손짓으로 집사를 불렀다.
“집사님, 리베라 와인 있습니까?”
와인의 이름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랐다. 랭던 경이 죽은 동생에게 선물해 준 책에 나온 여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예, 있습니다.”
“몇 년산입니까?”
“1785년산입니다.”
“내주시오.”
샤를 대공, 랭던 공작과 같이 자리한 기차 식당 칸에서 ‘리베라’라는 단어를 다시 만났다.
윌리엄, 포도주, 테스, 리베라…. 셰리주 때문에 살짝 취기가 오른 나는 겁도 없이 그 단어를 직접 입에 올렸다.
“리베라 와인은 처음 들어 봅니다.”
“리베라는 포도주의 여신으로 불리기도 하니 와인의 이름으로 참 적당하죠. 랭던 경께서는 포도주에 조예가 깊으시니 저보다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저야 귀하다고 하는 포도주를 모으기만 할 뿐 맛을 깊이 있게 음미할 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랭던 경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식사는 이제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우스라인의 상황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후식으로 베넷 부인이 준비해 준 레몬파이가 나왔다.
랭던 경은 포크로 파이를 한 입 떠먹었다. 나는 레몬파이를 맛보는 그의 표정을 세심히 살폈다. 그는 곧 미간을 모으며 살짝 인상을 쓰더니 곁에서 식기를 정리하고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린다 양, 이 레몬파이 말입니다. 베넷 부인이 준비한 게 맞습니까?”
“네, 공작님. 어제 동행했던 베넷 부인이라는 분이 새벽에 준비한 파이입니다.”
“…저택에서 먹는 레몬파이와 맛이 똑같군. 그렇지 않습니까, 로엘?”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하.”
랭던 경은 내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이를 몇 입 더 먹었다. 그리곤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 잔을 돌려 리베라 포도주의 향을 음미했다. 그가 레몬파이에 대한 관심을 거둔 듯 보여 나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겸 식사가 끝난 후 식당 칸에 남아 포커를 쳤다. 샤를 대공이 하녀와 하인들을 쉬라고 들여보내서 식당 칸에는 우리 셋과 하인 한 명 외에 사람이 남지 않았다.
낯선 하인은 가끔 잔심부름을 해 주는 일 말고는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우리 세 명이 앉은 자리에는 여송연 연기가 쉬지 않고 피어올라 가스등 밑에 뿌연 연기가 가득 찼다.
“서튼 경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샤를 대공이 갑작스레 물었다. 나는 카드를 섞으며 가볍게 답했다.
“저야 크게 관심 가질 일이 있나요. 집에서 소일거리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로엘은 상당한 다독가입니다. 저택에서 하루에 서너 권씩 책을 읽고 피아노 연주도 자주 합니다.”
“오, 상당히 속독하시는 모양이군요.”
랭던 경의 자랑 아닌 자랑에 금세 부끄러워져 재빨리 대답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학문적인 소양은 한없이 부족한데 글 읽는 속도만 빠른 편입니다.”
“어려운 글을 읽는 실력 또한 학문적 소양이지요. 아버님께서 자랑스러워하셨겠습니다.”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돌아가신 제 아버지에 대해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던 듯한데….”
내 말에 샤를 대공이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아, 그렇습니다. 사실 돌아가신 서튼 자작께서 궁지에 몰리신 일이 순수하게 이념 탓만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모두 알고 있지만 당시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바람에 전쟁을 고의로 포기하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죽게 한 작전이 있었죠. 세틸리아 전쟁은 일반 시민들에게 오래된 기밀이었습니다. 자작님께서는 사실 그 일을 폭로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밖에 국고가 바닥난 이유들도요.”
샤를 대공이 언급한 전쟁은 3년 전에 국가 전역에서 일어났던 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그때 하마터면 앨버트 3세가 폐위되고 샤를 대공이 왕위에 오를 뻔했었으나 위기감을 느낀 귀족들의 협력으로 간신히 사건이 무마되었다.
귀족들은 모든 힘을 다해 왕권 교체를 막을 이유가 충분했다. 샤를 대공이 공공연히 자유주의자들의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정책에는 귀족이 계속 영지를 소유하려면 국가에 대금을 지불하고 다시 토지를 매입해야 한다는 내용과, 귀족 역시 평민처럼 세금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아버지가 자결했던 당시는 왕가의 썩은 병폐들이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오래된 상처가 곪아 터지기 위해서는 어딘가를 찔러 피를 내야 한다. 그 피를 내려던 사람이 내 아버지였던 것이다.
돌연히 숨이 차올라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 그렇게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그 후로 여러 사람이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였습니다. 결국 진실은 세상에 드러났고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 왕권이 위태로워졌죠. 내 이름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모두 그분의 희생 덕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드님께서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샤를 대공이 담담히 하는 얘기들을 듣는 동안 나는 가끔 랭던 경을 흘끗 쳐다봤다. 랭던 경은 그때마다 여송연을 태우며 어김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고요한 시선이 분명한 빛으로 나를 위로했다. 목이 메도록 차올랐던 슬픔은 간신히 눈물이 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나는 감정을 정리하고 차분히 답했다.
“그렇게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샤를 전하.”
“흠, 이런. 랭던 경이 포커를 다 이겨서 은화가 떨어졌군. 객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돈을 걸지 않으면 포커를 치는 재미가 없지.”
랭던 경이 샤를 대공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시가를 가져오려던 참입니다. 같이 가시지요, 전하. 기다리고 있어요, 로엘.”
“네? 네, 저하.”
나는 느닷없이 혼자 있게 된 상황에 놀라 얼결에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앉았다. 둘은 담소를 나누며 기차 통로의 문을 열고 이동했다.
나무 문이 소리 내며 닫히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에 앉아 있는 하인의 동태를 신중히 확인했다. 그는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잠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옷 안주머니에 넣어 둔 약을 싼 종이가 심장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요동쳤다. 입술 사이를 빠져나오는 숨결은 살을 델 듯 뜨거웠다.
틈이 생긴 것이다. 이 틈이 샤를 대공의 잔에 약을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되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마침 대공의 잔엔 포도주까지 적당히 담겨 있었다.
밀려오는 불안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잠시 테이블 앞을 서성였다. 도미닉의 빚을 가장 많이 탕감할 수 있는 지시임을 알고 있었다. 도미닉이 보낸 쪽지가 선명히 떠올랐다.
‘과수원 근처에 있는 저택을 100만 골드에 매입하였다.’
나는 일단 품에서 종이를 꺼내 손에 쥐고 통로로 이어지는 문에 다가갔다. 샤를 대공과 랭던 경이 앞쪽으로 이동해서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차라리 랭던 경이 식당 칸으로 돌아오고 있길 바랐는데…. 오길 바라지 않았던 기회는 비극적인 사고처럼 홀연히 나를 찾았다.
‘어떡하지….’
머뭇거리다가 샤를 대공의 자리로 가서 약이 담긴 종이를 펼쳤다. 종이를 여는 손끝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나는 구석에서 졸고 있는 하인을 또 한 번 쳐다보고 가루약을 쏟으려 종이를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수평으로 되돌렸다. 모서리까지 다다랐던 가루 더미가 가운데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서튼 경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드님께서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샤를 대공의 목소리가 나를 막았다. 심장이 뒤틀릴 듯 세차게 뛰었다.
‘로엘, 너는 서튼 집안의 수치야. 한 번이라도 서튼가를 위해 희생이라는 걸 해 봐.’
도미닉의 목소리가 다시 종이를 기울였다. 양심의 가책이 나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그 고통의 근원이 당신을 향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테런스 랭던 경의 목소리.
나는 숨을 삼키며 손바닥 위에 올려 둔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식당 칸 끝으로 달려가 작은 창문을 열고 손에 든 종이를 기차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찬 바람은 구겨진 종이를 펼치고 하얀 가루약을 공중으로 흩어 버린 뒤 내 손바닥을 아프게 때리며 지나갔다. 나는 모든 흔적이 사라진 어두운 허공을 보며 떨리는 아랫입술을 가만히 물었다.
한밤중에 에메랄드 저택까지 찾아와 랭던 경과 서재에서 밀담을 나눈 사람은 샤를 대공이었다. 랭던 경이 여태껏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이 모두 샤를 대공이라면…. 그렇게 가정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라는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나는 그동안 발견했던 퍼즐 판의 빈자리에 샤를 대공이란 조각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저택 피아노 의자 서랍에서 발견했던 낯선 귀족의 편지가 강한 바람결을 따라 머릿속으로 날아들었다.
‘랭던 경의 고견대로 저는 물고기를 먼저 잡으려 합니다. 밀려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밭을 일구던 자들도 땅을 버리고 일손이 필요한 바다로 나갈 것이며, 일손을 잃어버린 농부는 결국 농사를 포기할 것입니다.’
물고기와 베버릭 왕국, 바다와 사우스라인, 일손과 수도군, 농부와 왕….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편지를 나지막이 읊었다.
“랭던 경의 고견대로 저는 사우스라인을 먼저 건드리려 합니다. 밀려드는 베버릭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수도군은 수도를 버리고 병력이 필요한 사우스라인으로 나갈 것이며, 병력을 잃어버린 왕은 결국 왕권을 포기할 것입니다.”
편지의 마지막 인사.
‘당신을 존경하는 충실한 친구, 하클리스(Harcles)로부터.’
하클리스… Harcles…. c를 맨 앞으로 옮기면….
“당신을 존경하는 충실한 친구, 샤를(Charles)로부터….”
눈물이 고인 눈동자가 흔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카만 어둠을 응시하며 한참을 떨고 있는데 등 뒤에서 랭던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엘.”
나는 창문틀을 꽉 부여잡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내고 그를 쳐다봤다. 랭던 경은 황급히 다가와 열려 있는 창문 덮개를 닫고 차디찬 바람을 맞아 까칠해진 내 얼굴을 매만졌다.
“감기 들립니다. 멀미라도 났어요?”
“…예, 조금 답답하여….”
“포커를 계속 칠 수 있겠어요? 힘들면 객실로 들어가 쉬어도 됩니다. 침대 칸으로 이동해도 돼요.”
“걱정 마세요, 저하. 바람을 조금 쐬니 괜찮아졌어요. 기차에서는 푹 잠들기 어려우니까 사우스라인에 도착할 때까지 깨어 있는 게 나을 듯해요.”
“조금만 참아요. 곧 새벽이니 사우스라인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눈을 붙일 수 있을 겁니다. 샤를 대공이 접전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대와 나는 쉬면서 바다를 보고 신선한 생선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즐거운 여행이 될 겁니다.”
“네, 저하. 무척 기대돼요.”
나는 붉어진 눈가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하고 그를 지나쳐 자리로 가서 앉았다. 랭던 경은 금세 나를 뒤따라왔다.
곁에 앉은 그가 리베라 와인을 약간 따라 주었다. 나는 술을 몇 모금 홀짝였다. 도수 높은 포도주는 겨울바람에 식은 몸을 곧 따뜻하게 데웠다. 랭던 경은 통로 쪽을 흘끗 확인하고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샤를 대공께서 당신의 아픈 기억을 헤집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죠?”
그 말에 머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진한 에메랄드 눈동자에는 내가 평생 받아 본 적이 없는 깊은 염려가 가득 배어 있었다. 새뮤얼이 준 약 때문에 심적인 괴로움을 겪은 내 모습이 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듯했다. 나는 그의 뺨에 손을 올리며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저하. 그분의 말씀은 제게 상처가 되지 않았는걸요. 다만… 어두운 창밖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저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동시대를 산다고 해서 모두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구요.”
“…….”
“그러나 랭던 경과 저는 샤를 대공과 함께 기차를 타고 사우스라인으로 가고 있죠.”
랭던 경은 자신의 뺨에 얹힌 내 손등을 부드러이 감싸 쥐었다.
“그래요, 로엘. 이 일은 어떻게든 역사의 한 줄기가 될 겁니다. 그대가 말한 어두운 창밖을 보세요. 불이 꺼진 저 많은 집집마다 사람들이 자고 있을 테고, 그들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노르크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역사에 휩쓸리고 말았다는 저하의 말씀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날, 제가 프리데릭가의 살롱으로 간 순간부터요.”
“로엘….”
랭던 경이 입을 열려는 찰나 샤를 대공이 문을 열고 식당 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그의 뺨에 올리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대공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동전이 든 비단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주머니가 제법 묵직했다. 랭던 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왕족인 샤를 대공을 조금은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전하, 주머니가 꽤 두툼하군요.”
“랭던 경이 이렇게 포커를 잘 치는 줄 알았으면 더 묵직하게 챙겨 올 것을 그랬소.”
샤를 대공 역시 랭던 경과 사적인 얘기를 한 번도 나눠 본 적이 없는 듯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연기는 나만이 잘 해내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여기에 앉아 역사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휩쓸어 갈지 운명에 맡겨 두고 있는 사람들은 그랬다.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포커를 치며 연극의 한 막을 꾸렸다. 연극 무대인 거대한 기차는 쉬지 않고 연기를 내뿜으며 사우스라인으로 달려갔다.
샤를 대공이 사우스라인을 방문하여 민심을 달래겠다는 계획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는 약을 버림으로써 샤를 대공의 길을 막지 않았다. 새뮤얼과 도미닉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테니 약을 모두 넣었는데 마시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면 믿어 줄 것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창문 밖으로 불이 켜진 민가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랭던 경은 여송연 연기를 내뱉으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사우스라인이군.”
샤를 대공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썹을 추켜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글쎄요. 로엘, 무슨 소리 들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샤를 대공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무언가 낯선 소리가 났소.”
샤를 대공은 일어나 하녀와 하인들이 잠들어 있는 뒤쪽 칸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샤를 대공의 뒷모습을 좇았다.
대공이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랭던 경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역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득히 깊은 녹색 눈동자에 의문과 당혹감이 서렸다. 잠시 망설이던 랭던 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네, 랭던 경.”
랭던 경이 문을 열며 복도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 뒤쪽에서 무언가가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진동하더니 눈앞이 밝아졌다.
벌써 해가 뜬 걸까, 생각한 찰나 랭던 경이 잡고 있던 문을 놓으며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몸을 내던졌다.
“로엘!”
그의 목소리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기차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모든 창문이 일시에 부서졌다. 깨진 유리 파편들은 눈앞으로 벌떼처럼 날아들었다. 뺨에는 영문 모를 뜨거운 액체가 튀었다. 하인이 앉아 있던 방향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공기를 흔드는 이 모든 소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저하!”
나도 모르게 머리가 울릴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이 그에게 닿지 못했다. 온몸에 땀이 솟는 순간 아슬아슬 스쳐 떨어지는 내 손목을 랭던 경이 낚아챘다. 그는 나를 힘껏 움켜잡고 내 발이 선로에 갈리기 전에 나를 끌어 올렸다.
나는 공포에 질린 채 발을 버둥대며 기차 바닥으로 몸을 완전히 올려놨다. 바닥엔 큰 구멍이 뚫려 빠르게 움직이는 철로가 고스란히 보였다.
“아….”
망연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랭던 경이 나를 부서트릴 듯 끌어안고 그가 들어가려 했던 통로 쪽으로 내 몸을 밀쳐 버렸다. 나는 그대로 문에 등을 부딪치면서 복도로 나동그라졌다. 간신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땅에서 치솟는 두 번째 천둥소리와 함께 랭던 경의 등 뒤로 거센 불길이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태양처럼 찬란한 죽음의 빛이 내 눈동자를 비췄다.
“테런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불길을 향해 다시 몸을 던졌다. 그와 함께 죽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화염이 테런스를 삼키기 전에 그의 옷을 꽉 부여잡았다. 손마디가 비틀리도록 온 힘을 다해 그를 내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테런스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내 쪽으로 성큼, 몸을 크게 움직인 찰나 불길이 그를 덮치려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밀려왔다.
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불길이 테런스의 등 뒤로 휘몰아쳤지만 그를 침범하지 못하고 뻗었던 붉은 손을 거두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불길에 그를 잃을 뻔했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테런스!”
기차의 속도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흣… 로엘…. 도망치지 왜 그랬어요. 다치면 어쩌려고….”
“저하께서도 끝까지 저를 보호하셨잖아요.”
테런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얼마 가누지 못하고 내 어깨 위로 무너져 내렸다. 부둥켜안은 그의 등에서 아까 내 뺨에 튀었던 것과 같은 뜨거운 액체가 만져졌다. 나는 덜덜 떨리는 양손을 그의 등 뒤로 들어 올려 손바닥에 묻은 물기의 정체를 확인했다.
내 손바닥엔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테런스의 피였다.
“아… 아….”
덜덜 떨리는 손을 다시 내려 상처가 있다고 짐작되는 곳을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손에 다시 뜨거운 액체가 닿았다. 겁이 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지혈을 하며 그를 끌어안은 채 안쪽으로 기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테런스 없이 도망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여기서 테런스가 죽는다면 나도 그를 따라 목숨을 끊을 것이다.
“테, 테런스… 정신을 차려 보세요.”
“로엘….”
“괜찮아요. 부, 불길이 잦아들었어요.”
나보다 몸집이 훨씬 큰 테런스를 안고 발버둥을 치며 어떻게든 그를 붙든 채 통로 쪽으로 피신했다. 테런스가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는 피에 젖은 손으로 조금씩 바닥을 짚어 가며 내가 그를 안고 움직이는 걸 도왔다.
나는 그가 입은 부상이 큰 상처는 아닐 거라고 애써 믿으며 없는 힘을 쥐어짜 냈다. 그와 함께 통로에 쓰러지자마자 기차가 멈췄다.
주변은 언제 그렇게 소란했냐 싶게 고요하고 어둑해졌다. 귓속엔 폭발의 흔적으로 가느다란 이명만이 남았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것을…. 그런데 나는 등 뒤에서 일어난 불길이 비치는 것을 보고 해가 떴다는 멍청하고 태연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채 나를 바라보던 테런스의 표정이 떠올라 눈가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불길을 보자마자 나를 향해 뛰어들었던 그의 모습도.
“랭던 경, 괜, 괜찮으세요?”
“하… 등이, 등이 아파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눈물이 고여 있는 내 시야에 랭던 경의 등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파편이 보였다. 나는 한쪽 손으로 피가 덜 나오도록 주변의 상처를 힘껏 누르고 다른 손으론 그의 뺨을 감쌌다. 그의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다정히 문질러 닦아 주고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벼, 별거 아니에요, 테런스.”
“로엘… 할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비밀로 해 줘야 해요….”
“죽지 않으실 거예요. 작은 파편이라 뽑아내고 꿰매면 돼요.”
“…자, 장기를 건드리지 않았을 때 이야기지.”
랭던 경이 말을 더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는 몹시 숨이 찬지 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끔찍할 텐데…. 내게 기대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벅찬 아픔이 느껴질 터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곧 의사가 올 거예요. 말씀하지 마세요, 테런스. 피가 더 나와요.”
“혹시 모, 르니 당신에게… 풀고 싶은 오해가 있어요. …나는 동, 생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서 랭던 경과 나를 찾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화염의 잔여물로 까맣게 그을린 그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치솟던 불길이 아니라 낯선 그의 모습이 나를 무너트릴 것만 같았다. 그는 힘겹게 속삭였다.
“내가… 동생의 결혼을 반대했어요…. 동생은, 비, 비밀 서재에서 목을 맸습니다. 자살자는… 신, 부님이 자, 장례 미사를 볼 수 없고… 성당에 무, 묻힐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요. 나는, 그 아이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차, 차가운 땅에… 혼자 묻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소.”
“저하… 제발 말씀하지 마세요….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발, 테런스….”
랭던 경의 뺨 위로 떨어진 내 눈물이 그의 눈물과 섞여 그을음을 지워 냈다. 어느새 랭던 경은 모로 쓰러져서 내 다리 위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그를 내 품에 안고 있는 일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그의 품을 빌리기만 하고 그에게 내 품을 내어 주진 못했다.
“그래서 죽은 그 아이 머리에… 초, 총을 쐈고… 내 손에는 윌, 의 피가….”
랭던 경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등 뒤를 적시는 뜨거운 피와 함께 그의 눈꺼풀 밑에서도 울컥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통로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퍼렐 씨! 랭던 경의 등에 유리 파편이 박혔어요! 바닥이, 바닥이 갑자기….”
퍼렐 의원이 내 목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왔다. 충격적인 현장을 본 그의 풍성한 수염이 힘없이 떨렸다.
“서튼 남작님 얼굴에도 피가!”
“이건 제 피가 아니에요. 같이 있던 하, 하인이 죽은 것 같아요. 빨리 랭던 경을, 랭던 경을 봐 주세요.”
하인들은 퍼렐 의원의 지시에 따라 랭던 경을 들고 불에 타지 않은 뒤쪽 침대 칸으로 이동했다. 내가 랭던 경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침대 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퍼렐 의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곁에 있으면 못 견디십니다. 부디 나가서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기다리십시오, 남작님.”
랭던 경의 곁에 있고 싶었으나 나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결국 뒤로 물러났다. 한시라도 빨리 퍼렐 의원이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내 욕심으로 시간을 지체하게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침대 칸의 문이 닫혔다.
랭던 경의 말이 옳았다. 나는 그가 없는 객실 밖 세상에 갇혔다.
다가온 하녀들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내 얼굴과 손을 닦아 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넋이 나간 채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샤를 전하는요?”
먹먹하게 울리는 내 목소리 사이를 날카로운 이명이 꿰뚫고 지나갔다.
“다행히 다치지 않으셨습니다.”
흐릿한 가스등 아래 서 있던 도프 집사가 울먹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나는 늘 강인해 보였던 아서 도프 씨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봤다. 겨울이라 일출이 늦어 기차 통로는 아직 캄캄했다. 고용인들은 좁고 어두운 복도 곳곳에 서서 흐느끼고 있었다.
랭던 경이 다치는 바람에 모두 경황이 없어 각자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고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나밖에 없었다. 랭던 경은 다쳐 침상에 누워 있었다. 랭던 경이라면 어떻게 상황을 정리했을지 생각을 가다듬은 후 집사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집사님, 하인들을 시켜 민가로 가서 마, 마차를 빌려 오게 하세요. 랭던 경은 다치셨지만 샤를 전하께서는 사우스라인으로 정해진 시간까지 가셔야 해요. 신문사에서 나와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기, 기차 폭발 사고가 아니라 그분이 내일 신문 1면에 실리셔야 해요.”
“네, 남작님.”
“그리고 기차역과 경찰에 연락해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알리세요. 이 철로로 다른 기차가 지나가게 되면 큰일이니…. 그리고 저하께서 긴급하게 수술을 마치시면 수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집사가 하인들을 모아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눈물을 그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퍼렐 의원이 랭던 경을 치료하고 있는 객실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사람들은 내 상태를 걱정하며 자꾸 나를 데려가려고 시도했다. 모두가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실패하자 마침내 샤를 대공까지 나타났다.
“서튼 경, 지금쯤 사우스라인에 도착해서 취침했을 시간입니다. 의원이 수술을 무사히 마칠 테니 걱정 말고 눈 좀 붙여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나 랭던 경이 위독하신 상황에서 제가 편히 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샤를 대공은 잠시 고민했지만 내 의지를 존중해 주었다. 나는 이번만큼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랭던 경이 일어나 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면.
침대 칸 문이 잠깐 열렸다. 하녀 한 명이 피로 범벅이 된 물 대야를 들고나와 사라졌다. 나는 쓰러져 우는 대신 심호흡을 하며 문간을 지켰다. 곧 그녀는 깨끗한 수건과 새 물을 들고 다시 랭던 경이 있는 침대 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경찰까지 나타나 주변이 몹시 시끄러워졌지만 랭던 경과 나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니 나는 곧 세상에 홀로 남은 듯 고독해졌다.
예전에 자주 느끼던 감정이었다. 랭던 경은 의식도 없이 상처와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는 무사히 준비를 마쳤다. 집사가 샤를 대공이 사우스라인으로 출발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주어 처음으로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였다.
마차는 풀숲 옆에 있는 거친 흙길에 대기하고 있었다. 샤를 대공은 랭던 경의 부상에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그 이상의 상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와 나의 자제심이 랭던 경을 지키고 있었다.
샤를 대공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랭던 경이 일어나면 소식을 전해 주시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랭던 경 대신 내가 샤를 대공을 배웅하게 된 자리여서 나는 울음을 참고 최대한 침착하게, 랭던 경처럼 기품 있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의 동행으로서 왔으니 내가 귀족답게 처신하지 못하면 그를 망신시키는 일이 될 뿐이었다.
샤를 대공은 아직 더러운 내 손을 직접 잡아 주며 나를 위로했다. 대공의 따뜻한 성품이 느껴져 울음의 고삐가 잠시 풀릴 뻔했으나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를 노린 일일 텐데 랭던 경이 다쳐서 마음이 아픕니다. 경찰의 말이 식당 칸 바닥에 누군가 폭탄을 설치한 것 같다고 합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노르크의 수도와 다른 따뜻한 남해의 바람이 대공과 내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벌써 바람에 이른 봄 냄새가 묻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랭던 경의 수술이 끝나면 남해의 온기를 등지고 바로 차디찬 노르크의 수도로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야 말로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사우스라인까지 안전히 모셔다드리지 못해 랭던 경께서 무척 미안해하실 겁니다. 샤를 전하의 방문이 사우스라인의 시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맙소.”
샤를 대공은 몹시 놀랐을 고용인들에게도 상냥한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마차에 올랐다. 일반 백성들이 타는 작고 검소한 마차였으나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샤를 대공의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배웅했다. 기차에 올라 다시 혼자가 되어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폭탄이 터져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는 샤를 대공의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역시 새뮤얼이 한 짓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새뮤얼을 향한 분노와 스스로를 향한 원망이 가시덤불처럼 뒤엉켰다.
‘샤를 대공의 포도주 잔에 약을 탈걸…. 특등석 객실 바닥이 아니라 식당 칸에 폭탄을 설치하고 새벽 시간에 터트린 걸 보면, 대공의 목숨을 노린 게 아니라 기차를 고장 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거야. 기차가 망가져야 약을 먹고 병이 난 샤를 대공이 사우스라인으로 가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을 테니까. 샤를 대공이 아팠다면 우리는 계속 식당 칸에 있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랭던 경이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역사에 휩쓸렸다 해도, 나는 근본적으로 랭던 경이나 샤를 대공과 같은 그릇의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나와 랭던 경의 안위가 더 소중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어쩌면 그들의 앞길을 방해하는 성가신 돌부리에 지나지 않았다. 샤를 대공의 안위가 나라를 위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약을 넣지 않아 랭던 경을 다치게 만든 일을 후회했다.
“테런스….”
어깨를 떨며 한참을 흐느꼈다. 화염을 보고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나를 보호하던 그의 표정, 손길, 목소리가 한 폭의 그림처럼 잊히지 않았다.
퍼렐 의원이 다시 나왔을 땐 밖이 환히 밝아 있었다. 그는 몹시 지쳐 보였고 옷에는 랭던 경의 혈액으로 보이는 붉은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내 애간장을 녹였다. 나는 가슴을 들썩이며 간신히 호흡을 정리하고 그의 옷깃을 다급히 잡았다.
“랭던 경께서는요.”
“다행히 파편들이 장기를 비껴갔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의식을 회복하는 게 더디긴 하겠지만 괜찮으실 겁니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도감이 손끝에 작은 떨림을 일으켰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 낸 후 발끝을 들어 퍼렐 의원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간신히 객실 안쪽이 보였으나 랭던 경의 얼굴까지 볼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들고 있던 발꿈치를 바닥에 붙였다.
“들어가서 뵈어도 될까요?”
“네, 남작님. 이제 많이 안정되셨으니 들어가 보십시오.”
그를 한참이나 못 본 듯한 느낌이 들어 한시라도 빨리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침대 옆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의식이 없는 랭던 경의 손을 잡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피부는 전과 다름없이 따뜻한 온도로 나를 맞았다.
커다란 손등 위로 내 눈물이 떨어졌다. 랭던 경이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굵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줄 것 같았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랭던 경의 곁에 무릎을 꿇은 내 등 뒤로 퍼렐 의원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랭던 경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걱정스러운 사람처럼 그에게서 눈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언제쯤 의식이 돌아오시나요?”
“하루는 지나야 할 겁니다. 가끔씩 눈을 뜨시겠지만 한동안 잠을 많이 주무실 거예요.”
“사우스라인에 숙소를 구해서 회복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수도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빨리 안정되고 계시니 속히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만에 하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이곳엔 필요한 인력과 의료 도구가 부족합니다. 사우스라인은 상황이 열악해서요. 제대로 된 병원이랄 것이 없습니다, 남작님.”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했던 대로 수도로 돌아가요. 돌아가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어요.”
내 머릿속은 랭던 경을 향한 걱정과 새뮤얼과의 관계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에 대한 염려로 복잡해졌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등 위에 내 뺨을 비비며 한참을 곁에 앉아 있었다.
점심 무렵 랭던 철도사에서 급하게 도착한 전문가들과 기관사가 상황을 같이 살펴보고 나와 일정을 상의했다.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로 같았다.
“폭발 때문에 식당 칸이 손상되기는 했으나 증기 기관엔 이상이 없습니다. 뒤쪽 열차 칸들을 떼어 내고 앞쪽 특등석과 일등석 객실 차만 남겨 수도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남작님. 속도도 빨라질 겁니다.”
“제일 빠른 방법 같으니 그렇게 하도록 해요. 지금부터 쉬지 않고 가야 내일 밤에 도착할 테니까요. 다만 랭던 경께서 좀 더 편히 누워 가실 수 있도록 맨 앞 특등석을 정비할 수 있을까요? 침대 칸의 침대는 저하께 너무 작아서요.”
“그렇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우스라인의 날씨가 수도에 비해 따뜻한 편인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온화한 날씨 덕에 인부들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열차 칸은 분리했고, 맨 앞 특등석 객실에는 의자 사이에 판자를 깔아 침대처럼 평평한 모양을 잡았다. 그 위엔 두꺼운 이불을 몇 겹이나 쌓았다. 퍼렐 의원의 지시 아래 하인들은 랭던 경을 들것으로 옮겨 조심스레 뉘었다.
랭던 경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퍼렐 의원이 괜찮을 거라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랭던 경을 대신해 나를 찾을 때면 멀쩡한 척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렸으나 혼자 남은 뒤엔 뒤돌아 눈물을 닦았다.
‘다쳐서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였어야 했는데….’
평생을 안고 산 죄책감이 익숙하게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기차는 겨우 노르크의 수도로 출발했다. 나는 사고 후 처음으로 식사를 했으나 긴장한 목구멍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아 수프만 몇 모금 먹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입 속이 까끌거려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때 말고는 랭던 경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듬직한 손을 잡고 있으면 랭던 경이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퍼렐 의원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객실을 찾았다. 그는 랭던 경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본 후 내게 충고했다.
“서튼 남작님, 랭던 경은 이제 괜찮으시니 누워서 좀 주무십시오. 건강 상하십니다.”
“랭던 경께서 일어나셨을 때 제가 곁에 없으면 어떡하나요. 졸면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퍼렐 의원 먼저 잠자리에 드세요.”
“남작님 고집도 보통이 아니십니다!”
퍼렐 의원이 풍성한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랭던 경에게 종종 듣는 소리라 나는 살짝 미소만 짓고 말았다.
퍼렐 의원이 나간 후, 나는 랭던 경의 손을 잡은 채 앉아 있다가 결국 깜빡 잠이 들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잤는지 기차가 덜컹 흔들릴 때 옆머리를 벽에 세게 찧었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한 까닭에 그다지 큰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랭던 경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그의 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긴 속눈썹이 섬세하게 매달린 눈꺼풀은 아직 꽉 닫혀 있었다. 기차가 흔들려서 꿰맨 상처가 아프지 않을까, 무척 걱정이 되었으나 랭던 경의 표정은 몹시 편안해 보였다. 첩자라는 거짓말을 유지하며 랭던 경을 향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와 달리, 본인은 동생에 대한 진실을 다 털어놓고 잠들었으므로 어쩌면 마음이 후련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두운 객실 안에서 그의 얼굴을 지켜봤다. 또 울보처럼 눈물이 솟아올랐지만 닦아 줄 그가 없으니 참아 냈다.
귀족은 울어선 안 된다는 도미닉의 훈육은 이제 중요치 않았다. 랭던 경이 내 눈물을 훔쳐 줄 수 있는지만이 문제가 되었다. 고개를 숙여 그의 뺨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칠흑처럼 까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랭던 경, 기차 밖은 당신의 머리 색처럼 새카만 밤이네요. 아침이 오면 잠에서 깨시겠죠? 생각해 보니 일어나면 상처가 너무 아프실 것 같아 잠을 오래 주무시는 편도 나쁘지 않을 듯해요.”
나는 다시 달빛이 옅게 비추는 그의 뺨과 코끝에 입술을 눌렀다.
“그런데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인지… 당신의 눈빛이 벌써 그리워요. 제 눈동자 색과 비슷하다는 사우스라인의 바다엔 결국 가지 못했지만 아쉽지 않아요. 곧 나무가 많고 겨울이 혹독한 수도로 돌아가면 어디를 쳐다보든 당신의 눈동자 색이 보일 테니까요. 짙고 차가운 겨울 숲이요.”
랭던 경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얼마 되지 않는 옆자리 공간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누웠다. 그의 곁에 나를 붙여 나뭇가지에 달린 둥근 밤처럼 아슬아슬 매달렸다.
아름다운 옆 선을 눈빛으로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돌려 천장을 보았는데 예전에 랭던 경과 기차를 구경하며 봤던 것과 같은 그림이 있었다.
“저하와 제가 구경했던 그때와 같은 객실이네요. 포도나무 아래….”
무심코 중얼거리다 입술을 닫았다. 천장에는 그때처럼 포도나무 아래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여신 두 명이 인간 남자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랭던 경의 곁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신 중 한 명은 붉은 머리였으나 다른 여신 한 명은….
“…포도나무 아래에서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
나도 모르게 예전에 쪽지에서 훔쳐본 내용을 중얼거렸다. 천장에서 금발의 ‘리베라’ 여신이 나를 온화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랭던 경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판자가 깔려 있지 않은 의자 쪽을 디뎠다. 어둠 속에서 천장의 금발 여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이곳저곳을 눌러 봐도 반응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깨가 아플 정도로 팔을 길게 뻗어 금발 여신이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애써 살피고 있는데 살짝 파인 홈이 손톱에 걸렸다. 저택의 피아노 의자와 뒷문에 있던 홈과 느낌이 비슷했다. 그 안에 손톱을 밀어 넣고 이리저리 흔들자 내 머리 바로 옆에서 무언가 탁, 떨어졌다.
“아!”
놀라서 잠깐 소리를 질렀으나 천장을 마감한 나무판자가 문이 열리듯 떨어진 것뿐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끼우려는데 묘한 예감이 등줄기를 쓸었다. 그냥 떨어진 거라기엔 너무 절묘한 우연이었을뿐더러 꼭 문이 열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싶어 천장 구석에 생긴 넓은 구멍에 손을 넣어 보았다. 어둑한 천장에 쥐가 살고 있을까 봐 조금 겁이 났다. 천천히 안을 더듬어 보며 아직 의식이 없는 랭던 경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죄책감이 다시금 나를 갉았다.
먼지 구덩이를 헤매던 손가락 끝에 동그란 고리가 걸렸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켠 후 천천히 고리를 잡아당겼다. 고리 끝엔 무언가 묵직한 물체가 달려 있었다. 쥐덫일까?
알 수 없는 물체는 천장 바닥을 사각사각 긁으며 머리 위를 기어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나는 먼지를 쫓아내느라 손바닥을 팔락대며 작게 기침했다. 겨우 실눈을 뜨고 확인한 물건의 정체는 투박하고 거친 소재로 만든 커다란 자루였다.
“이게 뭐지….”
두근대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낡은 자루를 열어 보았으나 안은 텅 비었다. 실망감에 입에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땀이 밴 이마를 소매로 문지르고 자루를 거꾸로 뒤집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안에서 작은 쪽지가 툭 떨어졌다. 나는 황급히 쪽지를 펼쳤다.
B가 무기 매입에 필요한 자금 1천만 골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에는 어린 남자아이를 통해 전달해 주십시오. 하클리스(Harcles)로부터.
잠시 멍하니 있다가 쪽지를 자루에 다시 담고 제자리에 되돌려 놓은 다음 판자를 닫았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이마를 쓸어 넘겼다.
이곳이었다. 기차 객실. 금괴를 주고받는 장소.
생각해 보면 랭던 경이 해외로 금괴를 내보내는 일에 기차를 이용하는 건 당연하고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직접 경영하는 철도사이므로 기차 스케줄이나 설계에 관여할 수 있을뿐더러, 국경 지역 밖까지 금괴를 나르는 가장 빠른 방법일 테니까. 랭던 철도사는 리스트(List)나 도버(Dover) 같은 해외 철도사와도 거래하고 있었다.
‘자루에 쪽지를 넣어 두는 것 말고도 서신을 주고받을 다른 방법이 필요했을 텐데…. 역시 포도주 장수가 관련되어 있는 걸까? 피아노 의자, 저택의 뒷문, 기차의 천장. 3개의 작은 홈들. 그리고 늘 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포도주.’
나는 다리를 끌어안으며 손톱 끝을 물었다. 갑자기 알게 된 객실 위 비밀 공간과 자루 때문에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이 객실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샤를 대공이 사용했었으므로 하클리스가 샤를 대공이라는 추리는 옳을 것이다. 랭던 경이 다친 일과 이 쪽지가 수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 또한 우연으로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기를 매입한다는 B는 베버릭(Beverick) 왕국의 머리글자가 아닐까?
머릿속에서 새뮤얼의 삼촌인 프리데릭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무기를 들여왔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무려 6연발 총이.’
랭던 경의 수첩에서 봤던 글자들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B에게 2M.’
B… 베버릭 왕국에게 200만 골드? 샤를 대공은 베버릭 왕국군(軍)의 지원을 받아 앨버트 3세를 치려는 걸까?
비로소 어디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퍼즐 조각들의 위치가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의자에 뒷머리를 기댔다. 지난번엔 초승달이던 밤하늘의 달이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그와 나의 상처도 그만큼 벌어졌다.
나는 홀로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일단 내가 진상을 다 파악해야 해…. 모든 걸 알아내서 랭던 경에게 위험하지 않은 정보를 골라 새뮤얼에게 전달하고 이번에야말로 첩자 일을 그만두겠어. 이제 내게 도미닉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중요치 않아. 나는 자유주의자고 같은 자유주의자인 랭던 경을 사랑하고 있는걸.’
우연찮게 떠난 기차 여행이 내 머릿속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이 여행에서 그간 랭던 경이 세상에 숨겨 온 그의 진실한 모습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랭던 경은 잔인한 살인자가 아니라 죽은 동생이 가족의 곁에서 쉴 수 있도록 누명을 쓸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폭탄이 터지는 순간 몸을 내던질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혁명을 꿈꾸는 자유주의자였다.
‘랭던 경의 계획을 돕기 위해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어…. 첩자 일에서 벗어나면 작게나마 혁명에 동참할 방법을 찾아볼 수 있겠지. 어떤 식으로 혁명에 기여할 수 있을까?’
곰곰이 궁리하는 동안 머릿속에 여러 가지 계획이 떠올랐지만 가장 실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일은 하나였다. 아주 사소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작은 발상이었다.
‘나는 지금껏 새뮤얼과 꽤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니까… 첩자 노릇이 끝난 후라도 새뮤얼이 혼선을 빚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가짜 정보를 흘려서 방해를 놓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날짜나 시간, 이름이나 장소를 착각하게 만든다든가….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은 계획할 수 없지만.’
고통스러웠던 첩자 신분을 역으로 이용하여 언젠가 혁명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랭던 경을 다치게 만든 새뮤얼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건 물론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선을 돌려 누워 있는 랭던 경을 쳐다보았다. 랭던 경을 사고로 잃을 뻔한 순간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는 내게 뛰어들던 그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폭탄이 터진 찰나 내가 했던 결심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랭던 경이 죽으면 나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으리라는 것.
마침내 긴 새벽이 지나고 노르크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수도로 돌아가면 이 모든 일의 시작, 새뮤얼 프리데릭을 바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
랭던 경은 꼬박 하루가 넘게 일어나지 않았다. 퍼렐 의원이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몸을 뒤집어도 아무런 미동이 없어 근심에 입술이 말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떠오른 해가 랭던 경을 비췄다. 바람 없이 강하기만 한 햇살이 혹여 눈부실까 무릎걸음으로 이동해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도록 커튼을 당기고 있는데 뒤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흣….”
“저하?”
나는 깜짝 놀라 뒤돌아 몸을 숙이고 커다란 손을 덥석 잡았다. 영원히 그의 눈동자를 보여 주지 않을 것처럼 나를 애태우던 눈꺼풀이 미동했다. 천천히 긴 속눈썹이 올라가며 마침내 그의 눈이 보였을 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입술을 꽉 물었다 놓았다.
“저하, 정신이 드세요?”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혹여 랭던 경이 놀랄까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화가가 공들여 그린 것 같은 반듯한 눈썹이 통증으로 몇 번 찡그려졌으나 곧 그가 눈꺼풀을 완전히 들고 나를 쳐다봤다.
“로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마음이 놓여 곁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는 입을 막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에게 눈물이 보이기 전에 애써 손등으로 닦아 냈다.
손을 내려놓자 랭던 경이 섬세한 손끝으로 내 손등에 묻은 눈물을 매만졌다. 다시는 이 손이 눈물을 닦아 주지 못할까 두려웠었다. 나는 겨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렐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조금 이따 불러요. 잠시 둘이 있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하, 다행히 죽지 않은 모양이군. 아직 기차 안인 걸 보면 내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은가 봅니다. 등은 끔찍하게 아프지만….”
목소리가 조금 쉬기는 했지만 랭던 경은 사고 전과 다름없이 단정하고 흐트러지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마음이 다시금 놓여 어깨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아직 내 손등 위의 눈물을 만지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한 손으로 소중히 감싸 안았다.
“파편이 많이 박혔는데 다 제거하고 꿰맸습니다. 통증이 상당히 심하실 거예요. 저를 보호하시려다 이렇게…. 죄송합니다, 저하.”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제가 저하 대신 다쳤어야 합니다.”
랭던 경은 고개를 저었다.
“내 회초리를 맞고도 엉엉 우는 사람이 이렇게 다치면 그 눈물을 어떻게 다 닦아 줍니까. 이 정도 통증이면 로엘 그대는 숨이 넘어갈 거요.”
“눈물이야 저하께서 닦아 주시면 되는걸요. 그러면 아무리 심한 고통도 참을 수 있어요.”
결국 눈물이 더 나오려 해 흉할 정도로 아랫입술을 씰룩대며 울음을 참고 있으니 랭던 경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등의 상처가 땅겼는지 그는 곧 인상을 쓰며 미간을 굳혔다. 걱정이 되어 당장 퍼렐 의원을 불러오고 싶었지만 인내심으로 충동을 억눌렀다.
나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랭던 경은 천장에 그려진 여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폭탄이 터졌던 거요?”
“네, 그렇다고 해요. 경찰들이 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범인은 잡히지 않을 겁니다.”
랭던 경은 천장을 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이 사건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죄책감이 나를 거의 다 갉아 먹었다. 그는 다시 담담히 입을 열었다.
“샤를 전하께서는?”
“무사히 사우스라인으로 가셨습니다. 기사가 칭찬 일색입니다.”
“기사가 잘 나왔다니 다행이군요.”
“네, 랭던 경께서 일어나시기 바로 전 들른 기차역에서 도프 집사님이 신문을 구해 왔습니다. 퍼렐 의원에게 진료를 보세요, 저하. 그러면 샤를 전하의 기사를 읽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퍼렐 의원을 데려와요. 몸이 아프니 신문을 읽는 일로도 로엘 그대에게 협박을 당하는군.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지 당신의 협박에 자주 시달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내가 잠자리에서 괴롭힌 일을 틈틈이 복수할지도 모르겠군.”
“아프신데 재미있는 농담하지 마세요, 저하.”
나는 그의 농담에 다시 눈물을 쏟아 내며 대꾸했다. 깨어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농담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더 놓여서였다. 랭던 경은 우는 나를 보고 무척이나 어이없어했다.
“졸지에 사람을 울리는 농담을 한 자가 되었군…. 어서 퍼렐 의원이나 데려와요. 로엘 그대가 계속 걱정을 하니 얼른 만나는 게 낫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하.”
나는 종을 흔들며 급히 객실을 나섰다.
퍼렐 의원이 꿰맨 자리를 소독하고 거즈를 가는 동안 랭던 경은 신음 한번 내지 않고 통증을 참아 냈다. 랭던 경의 의식이 없을 땐 의연히 지켜봤던 치료인데 그가 깨어나니 눈물샘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담담한 태도로 치료를 견디는 모습이 심장을 짓이겨 놓는 듯 아파 나는 계속 눈물을 훔쳐 냈다. 퍼렐 의원이 나가자마자 랭던 경이 도리어 나를 달래 줄 정도였다.
“그만 울어요, 로엘. 나는 괜찮습니다. 퍼렐 의원도 괜찮다고 하잖아요.”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울지 않고 꿋꿋해야 하는 것을….”
“나는 금방 나을 테니 로엘 그대가 애써 씩씩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여린 모습으로 있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지금은 내가 그대의 눈물을 못 닦아 주니 하는 말입니다.”
다정한 위로에 고개를 숙여 그의 뺨에 키스하고 오전에 플랫폼에서 구해 온 신문을 펼쳤다. 나는 1면을 들어 샤를 대공의 사진을 보여 주고 기사를 읽어 주었다.
“샤를 전하께서는 장교들과 같은 전투복 차림으로 나타나 슬픔에 빠진 사우스라인의 시민들을 위로하고 병사들을 격려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공 전하께서는 위험한 접전 지역까지 방문, 3번의 참전 경험을 살려 장교들과 중요한 작전을 논의하고 접전지의 고충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두 페이지에 걸친 긴 기사를 랭던 경에게 천천히 읽어 주었다. 랭던 경은 아무런 반응 없이 기사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중요한 일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나 뿌듯함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집사에게 들은 다른 소식 또한 알렸다.
“사우스라인에서 시민들이 샤를 대공을 폐하라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합니다.”
“우리에게 왕은 앨버트 3세뿐이신데 그 무슨…. 시민들이 미친 것이 틀림없군. 샤를 대공이 훌륭한 분이긴 하지만 노르크의 왕은 앨버트 3세뿐이오.”
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초록색 눈동자엔 거짓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진심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저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기사도 좀 읽어 드릴까요? 심심하실 테니까요.”
“더 읽어 주면 나야 좋습니다. 로엘 그대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있으니…. 발음이 우아하고 목소리가 낭랑하여 듣기가 편해요.”
“감사합니다, 저하.”
랭던 경의 다감한 말에 다시 그에게 입을 맞췄다. 또 떨어진 나의 눈물이 랭던 경의 뺨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쑥스러워 그에게 묻은 내 눈물을 얼른 닦아 냈다.
내가 신문을 읽어 주는 동안 그는 잠들었다가 깨어나길 반복했고, 그사이 기차는 무사히 노르크의 수도에 진입했다. 혹독하고 자비 없는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며칠이나 이어진 기차 생활과 폭탄 사건 때문에 우리 일행은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로 에메랄드 저택에 도착했다. 쇠약한 모습으로 실려 온 랭던 경의 모습을 보고 몇몇 고용인들이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보인 사람 중엔 랭던 경의 유모였던 할머니, 마틸다도 있었다. 나는 랭던 경 대신 그녀를 안고 위로했다.
“괜찮아요, 마틸다 부인.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시대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 건 이 늙은이인 것을! 이제 랭던가에는 테리 도련님밖에 없으신데 돌아가실 뻔하시다니….”
‘테리’는 테런스의 애칭으로 랭던 경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저택 내에 마틸다밖에 없었다. 마틸다는 마르고 까칠한 손가락으로 연신 눈물을 훔쳤다. 나는 마틸다의 어깨를 끌어안고 주변에 모여 있는 고용인들에게 담담히 랭던 경의 상태를 알렸다.
“기차 안에서 랭던 경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같이 여행을 다녀온 동료들에게 자세한 얘기를 듣겠지만, 보기보다 크게 다치시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퍼렐 의원의 말이 곧 거동을 할 수 있으시다고 합니다.”
나는 곧 침실로 올라가 랭던 경의 식사를 도왔다. 랭던 경은 오래 끼니를 들지 못한 상태였으나 수프를 얼마 넘기지 못했다.
“드시지 못하시겠어요? 제가 너무 불편하게 떠 드리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속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내일 식사를 마저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드신 게 없어 기력이 부족하실 텐데 한 입만 더 드세요.”
“식사보다는 로엘 씨에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스푼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랭던 경이 내가 첩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궁금했다. 식당 칸에서의 내 행동은 수상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혹시 모를 가정일 뿐인데도 공포에 질려 심장이 멎을 듯했다. 그러나 랭던 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내가 그대의 과거를 의식하여 상처 준 일이 여러 번 있었죠. 로엘 씨는 잊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상처받은 마음은 다 풀렸나요? 그때로부터 몇 주가 지났는데 말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그냥 표현을 하지 않는 건지, 마음이 풀린 건지….”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솟구쳤던 심장 박동이 간신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하. 이제 그런 섭섭함은 생각도 나지 않아요.”
“이번에 폭탄 사건에 휘말리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윌리엄의 얘기까지 솔직히 털어놨던 것이고…. 로엘 그대에게만큼은 동생을 죽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어요.”
“저하, 그동안 그런 오해를 받으시면서 마음이 아파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동생을 죽였다고 수군거리고, 하마터면 재판까지 받으실 뻔 하셨는데요. 그리고 저도… 그 일로 저하께 상처를 드렸었잖아요.”
거짓된 소문으로 쌓인 오해와 고통스럽게 지나간 그의 세월이 너무 아파 눈시울이 붉어졌다. 랭던 경은 담담히 말했다.
“그래도… 죽어야겠다는 결심이 설 정도는 아니더군. 그러니 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걸까요. 윌은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기에 목을 매단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아이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선을 무너트린 것이었고, 나에 대한 오해는 그 형벌이라 생각하며 견뎌 냈어요. 후회는 내가 져야 하는 의무였습니다.”
“저하….”
“하지만 기차에서 의식을 잃어 갈 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윌리엄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무얼 더 후회했는지 알아요?”
“…어떤 일을 가장 후회하셨어요?”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일입니다.”
랭던 경의 시선이 뜨겁게 나를 찾아들었다. 나는 가슴을 얕게 들썩였다. 내 가슴속엔 그를 향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기쁨과 지금껏 쌓아 온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이 끔찍하게 뒤얽혔다. 밤과 낮이 함께 있는 듯한 모순이었다.
랭던 경은 등이 무척 아플 텐데도 통증을 참고 팔을 움직여 내 손을 움켜잡았다. 내 손은 달처럼 차가웠고 그의 손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로엘 씨에겐 비겁하게 들리겠지만 그동안 나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어요. 내가 밖에서 하는 일 중엔 위험한 것들이 있고, 그 일이 마무리되기 전엔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잘못되어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까 겁이 났어요.”
“…….”
“나는 여태 두려움 없이 살았건만, 로엘 그대를 만나고서는 괜찮았던 일들이 무서워지고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랭던 경의 앞에 놓인 그 위험한 일이 무엇이냐고 캐물어 보았겠지만 도저히 그런 질문은 할 수 없었다. 물어보는 순간 그 또한 거짓말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쌓아 올린 거짓의 탑은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 흔들리고 있었다.
랭던 경은 한없이 다정한,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로엘, 나의 연인이 되어 내가 그대에게 영원히 속박되는 기쁨을 허락해 주겠어요?”
“…….”
“부디 에메랄드 저택에 계속 머무르며 내 곁에 있어 줘요. 당신이 알겠다고만 해 준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사고가 나기 전이었다면… 그랬다면 몹시 기뻐하며 나 역시 랭던 경을 사랑하고 있음을 쉽게 고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랭던 경의 피로 범벅이 되었던 내 손바닥이 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내가 그동안 해 온 거짓말과 나를 첩자로 보낸 새뮤얼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적어도 스스로 새뮤얼과의 거래를 청산하기 전엔 그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내 존재가 아름답게 빛나는 에메랄드 저택의 흠집임을 더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내가 한참 동안 대답을 미루자 랭던 경의 얼굴에서 점점 기대의 빛이 사라졌다. 나를 꼭 잡고 있던 따뜻한 손바닥이 천천히 떨어지고 서로의 손에 빈틈이 생겼다. 타오르던 태양이 흠이 많은 달의 곁을 쓸쓸히 떠난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옆에 있음에도 그만 외로워지고 말았다. 내 잘못이었다.
랭던 경이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대의 대답은 아닌 것이군.”
“저하, 그런 것이 아니라… 저도 말씀드리기 어려운 복잡한 사정이….”
“무슨 사연이 있길래요.”
나는 아랫입술만 짓씹고 대답하지 못했다. 랭던 경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아닌 것에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
“도프 집사를 불러 줘요. 사고에 대해 어떻게 기사를 내야 할지 전달해야겠습니다.”
“저하, 몸도 안 좋으신데….”
“그냥 불러 주시오. 로엘 씨는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는 게 좋겠습니다. 제대로 끼니를 못 챙겼을 테니 건강을 돌보도록 해요.”
랭던 경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목소리 아래 침전해 있는 오래된 고독이 느껴져 내 마음은 애달픔에 잠겼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직접 트레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니가 놀라며 내가 들고나온 쟁반을 받아 들었다.
“저를 부르시지 왜 직접 들고나오셨습니까, 남작님.”
“저하께서 식사를 하고 오라고 하셔서 그 김에 들고나왔습니다.”
“그래도 다음에는 저를 꼭 불러 주세요. 다른 사람이 보면 혼납니다.”
“그럴게요. 저하께서 도프 집사님을 찾으시는데 좀 불러 주겠어요, 애니 양?”
“네, 남작님.”
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랭던 경이 약을 먹고 이미 잠자리에 든 후였다. 랭던 경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숨소리가 잠잠했다. 퍼렐 의원이 막 왔다 갔는지 아직 하녀가 미처 치우지 못한 약 봉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약 봉투를 보고 급하게 침실을 나갔다. 며칠 만에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강아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늦지 않게 1층에서 왕진 가방을 챙겨 나서려는 퍼렐 의원을 잡았다.
“의원님!”
“서튼 남작님.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방금 랭던 경께서 드신 약이 무엇인가요?”
“시럽과 환약인데 통증을 가라앉혀 주고 잠을 재우는 약입니다. 되도록 신경 써서 드시게 하십시오. 맨정신으로 고통을 견디시긴 힘드시니까요.”
잠을 재우는 약. 확인하러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기차 여행 때 퍼렐 의원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지….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편히 주무십시오.”
퍼렐 의원이 깍듯이 인사하고 저택을 나섰다.
랭던 경이 약을 먹고 푹 잠들었으니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쌓아 놓은 거짓말들을 몰래 치우고 버릴 밑 작업을 해 놔야 했다. 그래야만 랭던 경의 곁에 머물 수 있었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일단 가까운 응접실로 갔다. 15세기의 가구들로 채워진 응접실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랭던 가문의 오랜 번영을 짐작게 했다. 그중 작은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새뮤얼 프리데릭 경에게.
오는 오후에 잠깐 만나 뵙고 싶습니다. 용건은 간단합니다.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끝낼 수 있는 조건을 같이 상의하고 싶습니다. 도미닉 없이 당신과 제가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샬롯을 통해 장소와 시간을 바로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로엘 서튼으로부터.
쪽지를 밀봉하고 샬롯을 찾았다. 샬롯은 붉은 머리를 올려 묶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내일 오전에 그분께 전하고 바로 답장을 받아 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샬롯은 봉투를 품에 넣고 응접실에서 바로 빠져나갔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리한 일정으로 며칠간 쌓인 피로함이 몰려왔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책상다리에 붙어 있는 천사 조각상을 내려다보며 오늘 밤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약효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혹시라도 랭던 경이 깨어난다면 그때 둘러댈 만한 거짓말도.
나는 죄를 짓는 주제에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아 성모 마리아께 오늘 밤 주실 도움을 청했다.
중요하고 유일한 밤이었다. 랭던 경이 가장 아프고 가장 피곤하며 가장 깊이 잠든 때였다. 다시는 이와 같은 밤이 오지 않을 것이다. 불행한 사고가 만들어 낸 기회였으므로 절대 또 와서도 안 되었다.
오늘마저 비밀 서재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새뮤얼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카드를 찾아낼 일이 소원했다. 성호를 다시 긋고 일어나 침실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에 발을 디뎠다.
나는 랭던 경의 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저택의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하녀와 하인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시간이 되었다. 말린 장미 꽃잎을 책장에 끼우고 덮었다. 나는 첩자로서 움직이기 전, 잠든 랭던 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로엘, 나의 연인이 되어 내가 그대에게 영원히 속박되는 기쁨을 허락해 주겠어요?’ 랭던 경의 흘러간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물론이에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는걸요.”
저녁에는 하지 못한 대답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내가 입술을 눌러도 뒤척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을 흔들어 다시 한번 그가 깊이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랭던 경?”
랭던 경은 미동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의 옆에 누운 뒤, 잠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잠옷 안쪽을 더듬었다.
몇 달이나 에메랄드 저택에 머물며 비밀 서재의 열쇠를 찾아 여러 군데를 뒤졌지만 감히 살펴볼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바로 테런스 랭던 경의 몸이었다.
랭던 경처럼 조심스러운 성격의 사람이라면 가장 중요한 열쇠는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이다. 그 가설을 풀 유일한 기회가 지금이었다. 평소에 랭던 경은 잠귀가 밝았고 기척에 민감했으므로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틈이 생길 리 없었다. 랭던 경에게 붙이고 있는 내 왼쪽 가슴팍이 얼얼할 정도로 울렸다. 그의 팔이 두근댈 리는 없으니 내 심장의 소란함이었다.
목 부근의 깃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눌러 보고 잠옷 안 주머니에도 손을 넣어 봤다. 내가 모르는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소매부터 바지 주머니까지 전부 뒤졌지만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랭던 경은 다행히 약 기운 때문에 깨지 않고 계속 고른 숨을 내쉬었다. 내 손은 이제 발목 부근까지 내려갔다. 바지 밑단까지 뒤집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나란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그의 상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어둠과 함께 내려와 있는 그의 눈꺼풀이 혹시 들릴까, 얼굴에 드리운 긴 속눈썹 그림자를 응시하며 손을 움직였다.
잠옷 상의를 옆으로 완전히 젖히자 몸통을 감고 있는 붕대가 드러났다. 넓은 가슴팍을 동여맨 붕대 위에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나를 지키다 생긴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이용하는 게 죄스러워 무릎을 꿇고 울고 싶어졌다.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과 손을 동원하여 잠옷을 다시 세심히 살펴보는데 안주머니가 없음에도 두께감이 다른 곳이 만져졌다. 한참이나 뒤적거린 뒤에야 겉으로는 전혀 티 나지 않는 속주머니의 입구를 찾았다. 그곳에 비밀스레 침입한 손끝에 천이 걸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것을 꺼냈다. 랭던가의 문장(紋章)인 나뭇잎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곱게 접힌 손수건을 펼치자… 빛나는 은색 물체가 반짝이며 나를 맞이했다. 그토록 찾던 열쇠였다.
심장이 불쑥, 목구멍으로 솟았다가 내려갔다. 나는 열쇠를 꼭 쥐고 손수건을 되돌려 놓은 다음 그의 옷을 여며 주고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비밀 서재 문 앞에서 한 번 더 성호를 긋고 열쇠를 꽂아 넣어 돌린 순간, 몇 달이나 굳건히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비밀 서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삐걱, 나무 문에 달린 경첩 소리가 음산하게 복도를 울렸다. 방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침을 삼키고 문을 지나 비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윌리엄 랭던이 목을 맨 그 방.
늘 열 수 없을 것 같았던 단단한 그 문을 내 손으로 직접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