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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차 여행 (1) (12/27)

12. 기차 여행 (1)

한동안 2층에서 얌전히 요양하며 새뮤얼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랭던 경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를 천천히 덜어 내고 있었지만, 그동안에도 우리 사이에 섹스가 끊이지는 않았다.

랭던 경은 내가 옆에 있으면 색욕을 참지 못해서 아침에 나가기 직전 갑자기 나를 엎어 놓고 박는 짧은 섹스부터, 밤새 울리는 긴 섹스까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나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뻣뻣한 사람인지 거친 섹스에도, 첩자 노릇에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못했다.

죄책감은 나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가끔 랭던 경이 아무 데나 열쇠 꾸러미를 던져 놓으면 서랍을 몰래 열어 수첩에 추가되는 일정을 확인했다. 내 영혼을 갉아 빼돌린 랭던 경의 일정은 꾸준히 새뮤얼에게 전달되었다. 새뮤얼은 내가 준 정보들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오늘 오전은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곳곳에 쌓인 눈이 말간 하늘에서 쏟아진 투명한 햇빛을 반사했다. 2층 응접실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홍차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샬롯이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그녀는 지금까지 새뮤얼의 첩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하녀 노릇을 잘 이어 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새뮤얼에게서 온 편지가 없는지 샬롯이 하녀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튼 남작님, 오늘 자 신문과 호외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호외는 가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발행한 신문사가 없다고 하더군요. 빈민가에는 무료로 뿌려졌다고 하고요.”

“그래요? 그래도 한번 읽어 볼게요. 고마워요.”

샬롯이 나간 후 잔을 내려놓고 신문을 집었다. 신문 앞면을 찬찬히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연이은 베버릭 왕국의 약탈’이라는 머리기사였다.

새해에도 베버릭 왕국의 사우스라인 약탈은 계속되었다. 1월 10일과 24일, 노르크의 군인들은 총을 발포하며 베버릭과 격전을 치렀다. 사우스라인은 물고기 비린내 대신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곳곳에 진동하였다.

10일과 24일…. 어딘가 친숙한 날짜였다. 신문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머리기사를 마저 읽었다.

이에 샤를 대공이 25일 새벽에 긴급히 앨버트 3세를 알현, 왕가의 위로를 직접 전하기 위해 친히 사우스라인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샤를 대공은 호화로운 마차 행렬 대신 평민들에게 익숙한 기차를 이용하여….

나는 신문을 무릎에 올려놓고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10일, 24일…. 랭던 경의 수첩에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던 날짜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을 줄 알았던 날짜.

새뮤얼도 이 기사를 봤다면 날짜에 주목했을까? 내가 보내 준 날짜와 베버릭 왕국의 약탈을 연결 지어 생각했을까?

가슴 밑에 자리한 심장이 세찬 펌프질을 했다. 신문을 마저 훑어봤으나 눈에 띄는 기사는 없었다.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시 날짜를 곱씹다가 이번엔 가짜 호외를 들었다.

호외는 ‘샤를 대공은 서열 1순위의 적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호외의 형식을 취했을 뿐 샤를 대공의 적통성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물에 가까워 보였다. 호외는 왕가에 대한 노르크 시민들의 불만을 자극적으로 겨냥했다.

샤를 대공은 곧 무능한 앨버트 3세 대신 침통한 슬픔에 잠긴 사우스라인을 방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할 예정이다. 샤를 대공은 어떤 분인가? 무능한 국왕과 왕비가 사치로 국고를 탕진하는 동안 빈민을 구제하고, 전쟁에 3번 참전한 서열 1순위의 왕손이시다!

옆 나라 카일랜드에서는 10년 전, 왕이 서열 1순위인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내각에 정치를 일임하고 왕가가 직접 혁명 사업을 평화로이 완성하였다. 우리 노르크도….

나는 호외를 다 읽은 후 내 트렁크가 보관된 3층 방으로 갔다. 이제는 다리가 많이 나아 지팡이가 없어도 걷고 이동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잠겨 있는 트렁크를 열어 맨 위에 놓인 <평등론>을 제쳐 놓고 그동안 모은 정보들을 기록해 둔 노트를 집었다.

1월 10일 (메모 없음)

1월 24일 (메모 없음)

1월 25일 기차 시간표 인쇄, 5천 장

“베버릭 왕국이 사우스라인을 침략한 날짜가 10일, 24일… 가짜 호외가 뿌려진 날이 어제, 25일….”

우연의 일치인데 내가 끼워 맞추고 있는 걸까?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가 아니길 바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무의식은 그가 내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이길 바라고 있는 걸까?

25일의 인쇄물이 기차 시간표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짜 호외를 얘기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베버릭 왕국의 약탈이 갑자기 샤를 대공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랭던 경의 수첩 하나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랭던 경의 막대한 자금들이 어디에 쓰이고 있을지도 추측 가능했다.

‘그게 가능한 걸까? 다른 나라에게 재산을 바쳐 가며 내 나라를 약탈하도록 하는 일이. 샤를 대공이 왕위에 적합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도 많을 텐데.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잃어 가면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고심했으나 답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랭던 경은 겉으로 보기에 자유주의자라고 볼 만한 점이 거의 없었다. 아랫사람에게 인자한 것을 빼면 공작으로서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했다. 게다가 침대에서 나와 대면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귀족다웠고 엄격했다.

나는 침대에서는 늘 자지러지도록 울면서 빌고, 좋아서 신음하는 단계를 지나쳐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쾌감을 견뎌 낸 뒤에야 그에게서 놓여 나는 일이 허다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의 정보들을 정리하기 전에 밖에서 랭던 경의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황급히 트렁크를 잠가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로엘, 어디 있어요?”

“저 여기 있습니다, 저하.”

대답을 하며 방 밖으로 나가자 3층 복도에 서 있던 랭던 경이 황급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늘 감정이 없어 보이는 눈동자에 옅은 흥분이 엿보였다. 그가 기쁨을 내비칠 정도로 좋은 일이 생겼다는 직감이 들었다. 랭던 경이 내 손을 다정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로엘 씨, 기차를 탈 준비를 해요. 밤에 기차 여행을 같이 갑시다.”

“기차 여행을요?”

“샤를 대공께서 마차가 아니라 철도를 이용해 사우스라인으로 이동한다는 기사를 봤겠죠? 오늘 신문에 실려서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봤습니다. 설마, 대공께서 오늘 기차를 타시는 건가요?”

“그래요.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랭던 경은 정말 지금 막 그 소식을 접한 사람처럼 들떠 보였다. 철도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랭던 경은 늘 순수한 열정에 불탔다. 얼굴엔 어린아이가 성탄절 선물을 받은 듯한 밝은 기쁨이 넘실거렸다. 기차는 랭던 공작의 자부심이자 귀족은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스스로 일구어 낸 업적이었다.

수첩이 오늘 일과 관련이 있다면 랭던 경은 이미 샤를 대공이 기차를 타고 사우스라인에 갈 예정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자연스럽게 기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정말 처음 안 걸까, 아니면 연기인 걸까?

랭던 경을 내내 속여 온 사람은 나인데 갑자기 그를 알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을 얘기하는 랭던 경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오늘 밤 기차를 타고 은밀히 이동할 예정입니다. 철도사의 성과를 널리 알릴 기회라 나도 사우스라인까지 동행하며 대공께 기차를 소개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로엘 씨도 나와 같이 가요.”

“정말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대공께 중요한 일정일 텐데요.”

첩자 노릇을 하다가 생긴 기회지만 샤를 대공의 일정에 동행하는 건 서튼 가문에 몹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도미닉도 이 일을 알면 왕족의 일정에 동행한 동생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길지도 몰랐다. 아직 하나뿐인 가족을 버리지 못해 인정받고 싶어하는 내 어리석은 미련이었다.

랭던 경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 되고말고. 샤를 대공을 뵐 테니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마차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만 말해 두었으니 실수로 얘기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요. 대공의 일정은 비공개 정보입니다.”

랭던 경의 당부가 돌연히 내가 지고 있는 의무를 일깨웠다. 언젠가 마음의 병이 될 죄책감이 한 겹 더 쌓였다.

“…네, 저하.”

우리는 함께 2층으로 내려갔다. 랭던 경은 내 이마에 입술을 눌러 주고 2층 복도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비밀 서재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랭던 경이 내 앞에서 그 서재로 들어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냉혹하게도 랭던 경과 갑자기 떠나게 된 기차 여행의 설렘을 느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양손을 맞잡고 떨다가 비밀 서재 앞으로 갔다. 그 앞에서도 한참 주저하다 손등으로 묵직한 문을 두드렸다. 혹시 부탁하면 나를 들여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바람을 붙잡아 보기 위해서였다.

“저하.”

노크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랭던 경이 문간에 나타났다. 문이 겨우 두 뼘 정도의 폭으로 열려, 내 시야는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에 완전히 가로막혔다. 비밀 서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서재 안으로 들일 미미한 확률이 조금 더 낮아졌으나, 혹시 모를 가능성을 확인해 두고자 물었다.

“저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곁에 있어도 될까요?”

“…미안해요, 로엘. 이곳은 내 개인 공간이라. 원하는 데서 쉬고 있으면 곧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랭던 경의 거절이 무척 낯설었다. 그가 내 부탁을 내치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비밀 서재가 나를 들이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공간이라는 건 이로써 추측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나는 더 부탁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층으로 내려가서 저택 주변을 산책해도 될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날이 좀 추운데…. 흠, 알겠습니다. 허락할 테니 대신 외투와 장갑은 잘 챙겨요. 목도리도.”

“네, 저하. 목도리를 하고 장갑도 꼭 끼겠습니다.”

나는 이제 제법 그의 방식에 익숙해져 작은 일도 되도록 허락을 구하고 행동했다. 잠시 방심하여 허락받는 일을 잊을 때면 섹스하기 전에 엉덩이를 맞거나, 침대 기둥 혹은 서재 책상에 다치지 않은 쪽 발목을 묶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랭던 경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워낙 가혹하게 화풀이를 당했던지라 나는 종종 억울하다고 울면서도 그때처럼 몸부림을 치거나 저항하는 일 없이 랭던 경이 풀어 주기를 기다리며 곁에 매여 있었다.

외투를 입고 작은 서재로 들어가 편지지와 잉크병을 꺼내 앉았다. 오동나무로 만든 책상 위엔 아름다운 나무 무늬가 물결쳤다. 바로 서신을 쓰지 않고 손끝으로 책상 무늬를 만지작대며 오늘 밤 기차 여행을 새뮤얼에게 알릴지 말지 여러 가지 방향으로 검토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잉크병에 펜촉을 담갔다. 새뮤얼에게 기차 여행을 알리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를 입을 게 너무 명백해서였다.

여행에 동행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든, 붉은 머리 하녀 샬롯을 통해서든, 결국 새뮤얼은 내가 그 기차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랭던 경에게서 강제로 떨어트려 놓을지도 몰랐다. 도미닉의 사치 때문에 70만 골드로 불어난 돈 역시 내 목을 죄고 있었다.

새뮤얼 프리데릭 경에게.

안녕하세요, 새뮤얼. 어제에 이어 다시 편지를 적습니다. 긴급히 알릴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보시고 나면 도미닉에게 지불한 돈이 후회스럽지 않으실 거예요.

오늘 자 신문의 머리기사를 보셨나요? 샤를 대공께서 기차를 이용해 사우스라인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 말입니다. 별다른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일정은 오늘 밤이 될 것 같습니다. 랭던 경께서 대공과 동행을 하시게 되어 저 또한 밤 기차를 타고 사우스라인으로 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프리데릭 경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 떠나기 전에 이렇게 편지를 몇 자 적습니다.

로엘 서튼으로부터.

봉투를 단단히 밀봉하고 샬롯에게 즉시 전달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알 수 없는 초조한 예감이 혈관을 따라 흘렀다. 나는 불안감에 한참이나 홀로 서재를 서성이다 허락받은 산책을 가기 위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마구간으로 가 말과 토끼에게 잘린 당근 몇 개를 간식으로 던져 주고, 저택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자주 산책하는 짧은 구간으로 간혹 하인들을 마주치는 것 외에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길이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뽀얀 눈은 내 무게에 금세 뽀드득 납작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새하얀 눈 위를 찾아다니며 발자국을 찍었다. 이 하얀 눈으로 머릿속에 쌓인 근심을 문지르고 닦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면 죄책감에 꽉 막힌 가슴 속이 시원해질 것만 같았다.

울타리가 눈앞을 가로막아 한참 만에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눈이 소복이 덮인 하얀 언덕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네. 저하께 허락받은 것보다 좀 멀리 온 듯한데.”

아직 뛸 수 있을 정도로 발목이 나은 건 아니라 다시 깨끗한 눈 위를 골라 가며 언덕을 종종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는 작은 새가 발자국을 남기며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귀여운 뒷모습을 쫓았지만 작은 새는 내 기척을 알아채고 금세 창백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언덕을 다 내려와 돌아본 흰 들판엔 내가 찍어 놓은 발자국이 한가득 남았다.

생각보다 많이 걸었는지 금세 지쳐 나는 곧장 저택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은 포도주 장수나 식재료 장수들이 자주 이용하는 쪽문으로, 저택에 빨리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 역할도 했다. 무거운 문을 잡아당기는데 손잡이에 묻은 하얀 가루가 내 손에 옮겨 묻었다.

밀가루인가. 별생각 없이 손끝으로 문질렀는데 감촉이 퍼석한 것이 꼭 깨진 분필 가루 같았다.

‘분필….’

잊고 있던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갑자기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포도주 장수의 셔츠 앞주머니, 그 속에 들어 있던 하얀 분필, 흰 가루가 묻은 그의 장갑.

나는 저택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두꺼운 문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문 아래쪽에서 작은 홈을 발견했다. 문이 낡아 패인 자국처럼 보였지만 모양새가 피아노 의자 아래에서 봤던 홈과 꼭 같았다.

나는 좁은 홈에 손톱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손을 다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제쳐 두고 옆으로 힘껏 당기자 곧 삐걱, 소리가 났다. 미닫이문처럼 움직이는 작은 가림판이 존재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피아노의 비밀 서랍과 완벽히 일치했다.

요령이 없어 한참 매달린 끝에야 가림판을 다 열었다. 나는 뻣뻣해진 손가락을 간신히 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시간에 힘을 준 까닭인지 온몸에 급작스러운 피곤함이 찾아왔다. 가림판 뒤편엔 분필로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L/AC/75A

“이게 뭐지.”

나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다행히 쳐다보는 눈은 없었다. ‘L/AC’… 랭던(Langdon) 경의 이름인가 싶었지만 그렇다면 ‘C’라는 철자가 말이 되지 않았다. 숫자 75와 A는 더욱 알 수 없는 조합이었다.

다시 홈에 손톱을 집어넣고 힘겹게 가림판을 닫은 다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무대 위에 포도주가 또 등장했다. 하늘을 나는 검은 새, 반복해서 그려지는 동그라미.

포도주 장수가 뒷문에 분필로 남긴 비밀 문자를 누구와 공유하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에메랄드 저택의 주인일 것이 확실했으므로.

3층으로 급하게 되돌아가 잊어버리기 전에 방금 본 글씨를 비밀 노트에 적어 두었다.

L/AC/75A

아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글자였다. 나는 곰곰이 뜻을 짐작하려고 노력하다 이내 포기하고 노트를 덮었다. 당장 몇 시간 후면 저택을 떠나야 했으므로 지금의 내겐 저장고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기차 여행에서 돌아와 포도주 저장고를 확인해 봐야 했다.

***

랭던 경과 나의 목적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집사와 샬롯을 포함한 모두가 랭던 경과 내가 밤 마차를 타고 랭던가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날 예정인 줄 알았다.

랭던 경은 저녁 내내 비밀 서재에 머물다가 잠시 준비할 일이 있다면서 외출했고, 그사이 샬롯이 새뮤얼의 답장을 전해 주었다. 봉투 안에서는 평소와 달리 작은 쪽지가 나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편지를 확인할 것.

나는 고개를 들어 샬롯에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이제 나가 봐도 돼요.”

“네, 서튼 남작님.”

샬롯의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닫히는 문틈으로 곧 자취를 감추었다.

봉투 너머로 느껴지는 서신의 두께감이 평소와 달랐다. 편지를 꺼내 펼치자 안에서 접힌 종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가루약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얇은 재질의 종이였다. 새뮤얼의 편지를 쥔 손끝에 불안한 예감이 번졌다.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경에게.

이 편지는 읽는 즉시 지체하지 않고 태워 버려야 하네. 서신의 조각이 남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열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접힌 종이에는 특별히 제조한 가루약이 들어 있네. 그 가루약은 생명이나 건강에는 지장이 없지만 일주일 정도 고열과 복통을 유발하는 종류여서 먹은 사람의 낯빛을 유령처럼 아주 창백하게 만든다네.

기차로 사우스라인까지 가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릴 거야. 짧지 않은 시간이니 랭던 경의 친분에 힘입어 로엘 자네가 샤를 대공과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때 샤를 대공이 마실 잔에 그 가루약을 몰래 타 주었으면 해. 자비로운 신께서 부디 가루약을 탈 기회를 주시길!

샤를 대공이 이번 사우스라인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몇 년이나 소국(小國) 베버릭의 침략을 막지 못한 왕의 꼴이 더욱 우스워지고 말걸세(멍청한 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네). 샤를 대공의 방문을 망칠 수 있도록 로엘 자네가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해.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도미닉이 가져간 70만 골드 중에서 50만 골드는 대가가 지불된 것으로 치겠네. 잊지 말게. 반드시 샤를 대공이 이 약을 먹어야만 하네!

그대의 오랜 친구, 새뮤얼 프리데릭으로부터.

나는 편지를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라서 벽난로로 뛰어갔다. 다리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급히 편지를 불 속에 집어넣고 벽난로 옆에 걸린 부삽을 꺼내 재를 뒤집어 가며 남은 조각이 없는지 철저히 확인했다. 몸속의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잔에 약을 타라니 그런 악한 짓을…. 새뮤얼은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 걸까. 그것도 샤를 대공 같은 훌륭한 분에게!’

나 역시 대부분의 노르크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샤를 대공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분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샤를 대공은 사치를 일삼는 여느 왕족이나 귀족과 달리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으며 사재(私財)를 털어 수많은 빈민을 구제해 왔다. 지난 성탄 세금 사건 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정치가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 역시 훌륭한 인품의 증거였다.

생명이나 건강에 큰 위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지만 내가 샤를 대공에게 그런 일을 자행해야 한다니…. 왕족과 동행할 수 있는 관대한 기회를 준 랭던 경에게도 죄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미닉이 미리 받아 낸 돈을 생각하며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금전적인 대가를 미리 받아 내서 다 쓰지만 않았어도….’

이젠 도미닉을 향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나를 핑계로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아 내고 있는 걸까.

나는 일단 새뮤얼이 준 가루약 종이를 내가 사용하는 침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기차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약을 챙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서랍을 잠근 후, 약이 있는 침실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치미는 긴장감을 견딜 수 없어 응접실을 계속 서성였다. 그러다 등 뒤에서 기척을 느끼는 바람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나만큼이나 놀란 랭던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저하!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랭던 경인 것을 알고 나는 간신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귓가가 둥둥 울릴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지만 겨우 태연한 척 인사했다. 하지만 뺨이 너무 뜨거워 긴장감이 잘 숨겨졌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밖에 나가신 일은 잘 마치셨나요?”

“잘 마치고 왔습니다. 로엘 씨는 좀도둑도 아닌데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면 항상 지나치게 놀라는군.”

랭던 경의 놀림에 양심이 찔려 나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저하, 좀도둑이라니요.”

“과민하긴. 귀여워 놀리는 겁니다.”

귀여워 놀린다는 소리는 싫지 않아 이번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갈까요? 로엘 씨의 첫 기차 나들이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을요?”

“올라갑시다.”

랭던 경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손을 잡아끌며 응접실을 나섰다. 나는 넓은 등을 바라보며 그의 뒤에서 계단을 올라갔다.

3층 복도 벽엔 랭던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중엔 테런스 랭던 경의 앳된 모습을 담은 초상화도 있었다.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그의 걸음이 워낙 급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랭던 경이 나를 데려간 방에는 고급스러운 연미복과 코트, 넥타이가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모자, 보석으로 장식한 회중시계, 손잡이에 화려한 조각이 달린 지팡이 등 치장품 또한 종류별로 다양했다.

선물이 보관된 옷장 역시 장인이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임을 증명하듯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이게 다 뭔가요?”

“로엘 씨에게 선물하는 옷과 물건입니다. 지난번에 옷 치수를 쟀던 것 기억해요? 그때는 연미복 한 벌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계절별로 필요한 옷을 모두 준비했어요. 작은 선물입니다.”

“세상에, 저하. 저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나는 잠시 랭던 경이 준 선물에 압도당했다. 고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셔츠 하나를 꺼내 몸에 대어 봤다. 옷의 감촉은 흐르는 우유처럼 부드러웠다.

옷감을 만져 보는 동안 나를 신경 써 주는 랭던 경의 애정에 감격하여 가슴속에 뭉클한 감동이 피어올랐지만 내겐 너무 사치스러운 물건들이었다. 일단 랭던 경을 올려다보며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저하, 너무 감사합니다.”

“내 마음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물건을 준비해 주시다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하지만 제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으니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 놓았으면 합니다. 백성들이 몹시 어려운 때인데 제가 이 선물을 모두 가져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랭던 경은 얼굴의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를 차갑게 굳혔다. 그는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무슨 말이든 퍼붓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전 내게 주었던 상처 또한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로엘 씨.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갈아입고 나오도록 해요.”

랭던 경이 담담히 대답하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저하. 마음껏 기뻐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부담스럽게 한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랭던 경의 모습이 섭섭해 보여 나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정말 기쁘지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랭던 경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랭던 경은 급한 성미를 섬세하게 갈무리하여 감추고 내 뺨에 입술까지 눌러 준 뒤 뚜벅뚜벅 방을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랭던 경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액수의 선물은 아니었을 텐데, 어려운 백성들의 상황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었나…. 다시금 후회가 머리를 들었다.

“어렵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랭던 경이 돌아온 줄 알고 급하게 고개를 들었는데 애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서튼 남작님, 랭던 공작님께서 외출 준비를 도와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저하께서요?”

랭던 경이 지시했다는 사실에 가슴에 드리운 먹구름이 조금 걷혔다. 나는 애니와 적당한 예복을 고르고, 얇은 검은색 타이를 리본 모양으로 단정하게 맸다. 실크해트는 높이가 적당한 것을 골랐다.

방에서 나가 보니 랭던 경은 팔짱을 끼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여송연을 태우고 왔는지 짙은 시가 향이 났다. 내려가지 않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 그를 보니 긴장이 풀려 그만 울음이 터질 뻔했다.

“저하!”

나도 모르게 달려가 랭던 경에게 안기며 넓은 등을 감싸 안았다. 랭던 경은 내 등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새 연미복이 참 잘 어울립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안 어울리는 게 있겠냐마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두른 것처럼 빛나는 모습이에요.”

랭던 경의 칭찬이 외로운 가슴 속을 달콤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발갛게 변한 뺨을 그의 넓은 품에 묻으며 대답했다.

“과분한 칭찬이세요. 샤를 대공을 뵙기에 부족하지 않은 차림을 할 수 있어 저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당신의 부탁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내가 로엘 씨에게 주는 선물은 모두 받아 주시오. 대신 앞으로 그대에게 선물을 할 때마다, 당신이 받아 주는 선물의 값만큼 고아원에 기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내 선물을 좀 더 기쁘게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관대하고 자비로운 제안에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랭던 경은 둥그렇게 뜬 내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몇 번이나 눈썹 언저리에 다정히 입술을 눌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더듬더듬 말했다.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 걸까요? 저하를 서운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로엘 씨가 평민들의 궁핍한 삶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스스로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는 건 충분히 신사다운 태도입니다. 내 기분은 조금 서운했지만 금방 풀었습니다. 당신의 고결한 생각을 존중하겠어요. 그러면 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겠죠.”

내 의도를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랭던 경의 너그러움에 감동했다. 그는 종종 고압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했지만 노르크의 대귀족이라 믿기 힘든 유연한 사고방식과 소탈함을 갖추고 있었다.

랭던 경을 향한 존경이 가슴속에 물씬 피어올랐다. 그러한 깊은 존경심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일 것이다. 나는 매우 감격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관대하시고 존경스러운 결정이세요.”

“당신이 내 성미를 고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하의 인품은 이미 너무 훌륭하신걸요. 이번 일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조금 전 저하의 앞에서 주제넘은 말을 했어요.”

“로엘 씨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는 건 정말 맞는 말입니다.”

랭던 경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순식간에 뺨이 화끈하게 달았다.

“저하!”

“예법에 어긋나는 반응이라는 건 알지만 나도 로엘 씨처럼 맞는 말은 해야겠어요. 옳은 말이지만 주제에 맞지는 않았지.”

“저하께서는 정말….”

나는 가까스로 진심을 삼켰지만 랭던 경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걸요.”

“내 말투와 태도가 오만하다고 하려 했던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랭던 경에게 나와 같은 심정을 느낀 것이다. 나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랭던 경과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까 가볍게 훑어보며 지나친 초상화들이 우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3층을 장식한 화려한 홀 테이블에 세워 놓은 작은 액자들엔 갖가지 그림들이 놓여 있었다. 내 발길이 한 작은 장식 테이블 앞에서 멈추자 랭던 경도 따라 섰다.

“이 테이블 위에 있는 초상화들도 전부 랭던 경의 가족분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려진 랭던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화가들을 여럿 후원하셨기 때문에 가족의 초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이게 내 어린 시절 초상화예요.”

그 초상화에는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아이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이목구비가 그대로 남아 있어 몹시 신기했다.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랭던 경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 옆에 놓인 초상화엔 랭던 경과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 여자아이는 누구인가요?”

랭던 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답을 알려 주었다.

“…그것도 나입니다.”

“네?”

깜짝 놀라 허리를 편 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은 처음으로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깊은 눈동자가 기억을 떠올리듯 화려한 천장 위로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는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내 눈을 마주하고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머님께서 딸을 무척이나 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이 입는 드레스를 입히고 나를 ‘테스’라고 부르며 소꿉놀이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랭던 경을 테스라고 부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가족들은 내가 자라서도 나를 놀리려 종종 테스라 불렀어요.”

나는 그제야 초상화 속 여자아이가 그토록 불만스러운 눈빛을 띠고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어린아이의 불만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화가의 솜씨가 감탄스러우면서도, 저 무뚝뚝한 랭던 경을 테스라고 부르며 여장을 시킨 어머니의 장난기에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소리 없이 흐느끼듯 웃자, 랭던 경은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그런 초상화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차 시간에 늦겠어요. 어서 내려갑시다.”

“네, 저하…. 서, 두를, 게요.”

웃음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는데 사나운 녹색 눈이 시선 끝에 걸렸다. 애써 그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2층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랭던 경의 넓은 등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데 갑자기 손 글씨가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난간을 움켜잡으며 발을 멈췄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포도주’에 이어 무대 위에 다시 ‘윌리엄’이 등장했다. 테스와 윌리엄. 그저 흔한 이름들이 만들어 낸 우연에 불과했지만 어찌 되었건 윌리엄은 계속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내가 소유한 <평등론>은 윌리엄이라는 남자가 테스라는 여인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테스라는 여인이 아버지와 아는 사이여서 다시 선물해 주었거나, 아버지가 헌책방에 나온 책을 구입하면서 내게로 오게 됐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뀐 기구한 책이었다.

랭던 경의 어릴 적 별명이 ‘테스’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층계참에 멈춰 있던 나는 랭던 경의 뒤돌아보는 시선에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녀와 하인들은 랭던 경과 내 짐이 담긴 여행 트렁크를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나는 그사이 침실 서랍에 보관해 둔 가루약 종이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랭던 가문의 마차는 노스턴 역으로 향했다. 힘 좋은 말 두 필이 저택에서 노스턴 역까지 걸리는 시간을 제법 단축시켰다. 랭던 경은 피곤한지 잠시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바깥 풍경을 보며 약에 대해 집요하게 곱씹는 중이었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랭던 경이 설핏 웃는 소리가 났다. 고통스러운 계획에 매몰됐던 정신이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왜 그러세요, 랭던 경?”

“내 이름이 있군. 그대가 적었어요?”

랭던 경이 가리킨 창문을 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 쪽으로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가스등 불빛에 비친 자국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서야 내가 손글씨로 남겼던 희미한 ‘Terrance’ 철자를 발견했다. 내 마음을 마차 유리창에 걸어 두고 내린 듯해 민망함에 뺨이 달았으나 당황하지 않은 척 숙였던 허리를 폈다.

“도미닉을 만나고 돌아오던 새벽에 적었습니다.”

“왜?”

“그야….”

적절한 이유가 떠오를 리 없었다. 입술을 우물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랭던 경이 빤히 쳐다봤다. 그의 표정엔 어느새 웃음기가 없어졌고 진지한 갈망이 남았다.

“당신, 정말 나를 좋아하는군.”

“…이미 아시고 계셨잖아요. 제 마음은 얼마 전 편지에도 모두 적었는걸요.”

“아닙니다, 로엘. 그대는 어려운 사람이에요. 당신이 큼직한 푸른 눈을 내리깔고 있을 때면 그 깊은 눈빛 안에 어떠한 생각이 담겨 있는지 다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신에는 꽃이 봄을 연모한다고 하였지, 그대가 나를 연모한다고 쓰진 않았어요. 나는 좀 더 직접적이고 외설적인 표현을 원해요.”

“저는 아직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에게 제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어째서요? 내 마음속에는 온통 로엘 그대뿐입니다.”

“저는 그동안 밤하늘의 별을 세듯 당신의 생각을 헤아려 보려 했어요.”

밤하늘에 놓인 별의 수를 세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계속 새로운 별이 나타나듯, 아침이 오도록 별을 세도 우주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랭던 경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애를 쓰다가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깊은 생각과 감정에 빠져 버렸다. 그 증거로 나는 그의 녹색 눈동자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할 찬란한 별들을 끝없이 발견했다.

나는 랭던 경의 뺨 위에 손을 얹으며 낮게 읊조렸다.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본 목자들이 떨어져 있는 별들을 이어 의미 있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것처럼, 저 역시 저하의 곁에서 제가 발견한 당신의 모습들을 잇고 진실한 당신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날 밤 이후로 내가 아직 로엘 씨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군요. 내가 당신의 과거를 지워 낼 수 있으리라는 걸…. 모든 게 내 잘못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외에도 제가 이어 내야 할 당신의 모습은 수없이 많은걸요.”

나는 고귀한 ‘공작’과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그가 어디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내가 첩자인 것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랭던 경이 머릿속으로 무슨 꿈을 그리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진실한 그를 결국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랭던 경은 내 뺨을 감싸고 입술이 젖은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마차가 느려지고 이윽고 시끄럽게 굴러가던 바퀴에 적막이 찾아왔다. 노스턴 역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아쉽게 입술을 떨어트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뒤따라온 하인들은 우리의 짐이 담긴 트렁크 10개를 옮기고 기차 칸 벽에 걸 그림을 가져갔다. 랭던 경과 나는 조용한 플랫폼을 걸었다. 랭던 경이 먼저 기차에 올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로엘 씨가 바다를 보러 가는군.”

“랭던 경 덕분입니다. 샤를 전하와 같은 기차에 타게 되었다니 크나큰 영광이에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기차에 오르며 덧붙였다.

“하지만 랭던 저하와 같이 기차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더 큰 기쁨입니다.”

랭던 경은 내가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기차의 좁은 통로에서 나를 껴안고 키스했다. 놀라서 랭던 경의 어깨를 밀었지만 딱 벌어진 어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단단히 껴안은 채 입술을 겹쳐 오자 달리 벗어날 방도가 없어 결국 나도 포기하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두툼하고 따뜻한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입 속을 부드럽게 핥고 내 혀를 빨아당겨 체액을 가져갔다. 랭던 경은 아까 듣지 못한 대답을 가져가듯, 그를 향해 벌어지는 내 입 속을 마음껏 탐했다. 나는 숨이 막히고 힘겨워도 그가 나를 마음껏 맛볼 수 있도록 호흡을 맞췄다.

“읏, 응…”

그가 내 혀끝을 입 속의 부드러운 살로 몇 번이나 빨아 주는 바람에 나는 신음을 감추기가 몹시 어려웠다. 랭던 경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 성감대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어 원할 때면 언제든 나를 순식간에 달구었다. 나는 어느새 넋이 풀려 침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그와 혀를 섞었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조금 들이마신 호흡은 곧 랭던 경에게 빼앗겼다. 머릿속이 점점 멍해졌다. 그의 혀가 나를 범하는 감각이 그 자리를 채웠다. 기차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랭던 경에게 으스러질 듯 안겨 깊은 키스를 받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공작님, 곧 샤를 대공님께서 오십니다.”

도프 집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키스를 멈추고 몸을 굳혔다. 지금까지 랭던 경과 스킨십하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망함에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랭던 경은 집사가 나타났는데도 입술을 내게서 천천히 떨어트렸다. 그동안 나는 온몸을 떨며 귓속까지 울리는 심장의 박동을 듣고 있었다. 내 팔뚝을 꽉 붙들고 있던 그의 손길에서 간신히 놓여 나고,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살풋 올려다봤다.

“알겠습니다, 도프 씨.”

발걸음 소리가 기차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나는 창피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하, 키, 키스를 빨리 멈추셨어야지요. 그렇게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시면…. 애초에 이런 데서 입을 맞추시면 어떡합니까.”

“당신도 응했으면서 편하게 내 탓을 하네요. 집사는 더한 꼴을 본 적도 많으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무슨 꼴을….”

“내가 남자와 뒹구는 꼴이지.”

“저하와 제가 하는 걸 집사가 본 적이 있단 말씀인가요?”

깜짝 놀라 되묻자 랭던 경은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심히 덧붙였다.

“무슨 소리요?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했던 때지.”

“…네?”

나는 둥그렇게 뜬 눈을 깜빡였다. 랭던 경의 눈동자에 다시금 당황한 빛이 스쳤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더 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집사의 눈에 띄었다면 당신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나는 처음으로 랭던 경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동안 그의 과거에 대해 곱씹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엔 심장이 다른 의미로 이상하게 뛰었다. 가슴이 어그러지는 듯한 박동이었다.

얼마나 앞뒤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과 섹스를 했으면 집사에게 들키기까지 했을까. 그의 처신이 실망스러워 거짓으로도 괜찮은 척할 수 없었다. 화가 나서 알밤을 문 것처럼 양쪽 뺨이 단단해졌다. 뜨거운 열기가 눈가까지 가득 차올라 증기 기차가 연기를 뿜듯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저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처신을 하고 다니셨길래 집사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셨나요? 품위를 잃지 마셨어야죠.”

“그럴 수도 있지. 품위보다 쾌락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타오르는 듯 붉어진 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나마 차가운 손등으로 볼을 정신없이 눌렀다. 그래도 피부에 불이 난 듯한 열기가 진정되지 않았다.

“설마 제게 시키시는 것들이 다 그 작자와 하신 건가요? 그 작자가 좋아해서, 그래서 저도 좋아할 거라 생각하신 거예요?”

“그 작자가 아니고 그 작자들이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내가 창부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신경 쓰면서 본인의 난잡한 과거는 저토록 당당히 말하다니. 심지어 내 과거는 거짓이고, 랭던 경의 과거는 진실인데!

조금 전보다 더 큰 분노가 가슴속을 휘감았다.

샤를 대공을 맞이하기 위해 기차 밖으로 나온 뒤에도 부글부글 끓는 속이 가라앉지 않아 입술을 살짝 열고 숨을 쌕쌕 내쉬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랭던 경의 난잡한 과거를 속으로 열렬히 경멸했지만 화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고도 내 앞에서 당당할 수가.

랭던 경은 플랫폼의 가스등 아래서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의 입꼬리에 장난기가 그득히 담겼다.

“로엘 씨, 지금 질투를 하고 있네요.”

“…질투가 아니라 저하의 난잡한 과거에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여럿과 그러고 다니실 수가 있나요?”

“하, 다행입니다! 이제 로엘 씨가 내 심정을 반이나마 알겠군!”

그동안 랭던 경이 느껴 온 감정이 이토록 강렬한 것이었다니.

내가 창부인 줄 알면서도 나를 그 정도만 괴롭히고 넘어갔다는 사실이 문득 감탄스러웠다. 나는 처음으로 랭던 경의 인내심을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내 목소리는 겨울바람에 흔들리며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 작자의, 아니, 그 작자들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저하의 이상한 성벽에 동조한 사람들 말입니다.”

내가 물어보면서도 스스로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내면 뭘 하려고?”

질문이 너무 황당했던 탓에 랭던 경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뜨거운 얼굴을 식히길 포기하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코트 자락을 꼭 부여잡았다. 뜨거운 냄비 안에 들어간 곡물처럼 단어들이 입천장을 여기저기 두드리며 날뛰었다.

“이름을, 이름을 알아내면 그 작자들을 당장….”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구에 올려 둔 주전자처럼 뜨거운 김을 내뿜는 것밖에는.

랭던 경은 내 반응에 상당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품위를 중요시하는 로엘 선생이 가서 예의라도 가르칠 생각입니까?”

“이제 와 가르친다고 되겠습니까? 보나 마나 이상한 변태들일 텐데요!”

“그 사람들을 욕하는 척하면서 면전에 대고 내 욕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대가 정 원하면 한 명 정도는 이름을 알려 줄까?”

변태의 이름 따위 알고 싶지 않았으나 플랫폼을 걸어 나오는 내내 화를 낸 게 있어 자존심 때문에 이제 와 거절하지 못했다. 랭던 경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로엘 서튼이라고 그대도 잘 알 거요.”

“그게 무슨….”

나는 당황하여 발을 멈췄다. 머리카락이 휘감길 정도로 겨울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으나 피부가 너무 따끈해 추위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이상한 성벽에 동조한 사람을 알려 달라며. 당신은 동조하지 않았어요?”

반박하려 해 보았으나 틀렸다고 지적할 부분이 없어서 나는 입술을 단단히 닫았다. 머릿속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랭던 경과 뒤엉켜 변태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랭던 경 외의 사람과 성행위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상은 머릿속에서조차 제대로 이어지질 못했고, 결국 익명의 사람은 반드시 내 얼굴로 바뀌고야 말았다. 랭던 경이 확언한 대로 내 머릿속의 나는 그의 기벽에 착실히 동조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기차역 앞 광장에 나가 샤를 대공의 마차를 기다렸다. 광장 멀리서 말 두 마리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뺨을 달구던 흥분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간신히 샤를 대공을 가까이서 뵐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왕족의 마차답지 않은 검소한 검은색 마차가 마침내 우리 앞에 멈춰 섰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대공의 집사가 정중히 문을 열었다.

샤를 대공은 주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기고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신사로 기껏해야 5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언뜻 보기엔 말랐으나 자세히 보면 다부진 몸에서 꼿꼿한 기개가 풍겼다.

랭던 경이 먼저 인사를 올렸다.

“샤를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랭던 경, 나를 위해 특별히 기차를 운행해 주어 고맙습니다. 급한 부탁이었는데.”

나는 샤를 대공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잠시 멈칫했다.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이 목소리… 언젠가 들어 봤는데.’

샤를 대공은 이내 내게로 눈길을 돌리며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이분은 누구시오?”

“저와 사우스라인까지 동행하기로 한 로엘 서튼 남작입니다.”

랭던 경이 나를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내 이름을 들은 샤를 대공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는 진실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돌아가신 서튼 자작님의 아드님이시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샤를 전하.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엘 서튼입니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아드님께서 물론 더 잘 알고 계시겠죠.”

거침없는 호감의 표현에 잠시 놀랐으나 가슴속에 선연한 감동이 피어올랐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감사의 뜻으로 짧게 묵례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샤를 전하.”

“그때는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어요. 짧은 여행이지만 같이 담소를 나눌 기회는 충분히 있을 테니 나중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두 분 다 피곤할 텐데 이만 기차로 가서 쉬도록 하죠.”

샤를 대공과 랭던 경은 다소 서먹하게 거리를 두고 대화도 없이 기차로 향했다. 둘 사이의 친분은 깊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내 신경은 온통 다른 데 팔려 있었다. 바로 샤를 대공의 목소리였다. 나는 계속 그의 목소리를 언제 들어 봤는지 생각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 아니, 분명히 최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샤를 대공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있었다면 분명히 얼굴도 볼 기회가 있었을 텐데 처음 보는 사람임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목소리가 익숙한 걸까.

흐릿한 기억을 헤집어 보다 목소리를 찾아내길 포기하고 랭던 경을 따라 기차에 올랐다. 샤를 대공 일행은 맨 앞 특등석 칸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두 번째 특등석 객실로 향했다. 랭던 경은 직접 객실 문손잡이를 잡더니 잠시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먼저 들어가세요. 로엘 씨를 위해 준비한 게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요? 오늘 이미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요.”

“음, 이번 선물을 제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보통은 그렇지 않지만 당신의 성품을 고려하면 말입니다.”

랭던 경이 객실 문을 열어 주어 궁금함을 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어린 윌리엄이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사랑하는 아이의 얼굴에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팔을 열었다.

“윌리엄!”

“로엘 도련님!”

윌리엄은 벌떡 일어나 내게로 뛰어들었다. 나는 윌리엄을 번쩍 안아 들고 정신없이 뺨에 입을 맞췄다. 윌리엄은 뽀뽀 세례가 무척 귀찮은지 얼굴을 피하며 눈을 찡그렸다. 순전히 내 욕심 때문에 뺨에 뽀뽀를 한 번 더 하고 아이를 내려놓았다.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어떻게 왔어? 응? 혼자 온 거야?”

“할머니랑 같이 왔어요.”

“할머니는 어디 계셔?”

“요리를 하러 갔어요. 할머니는 내가 아니라 도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거래요.”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웃음이 가득 고인 얼굴로 랭던 경을 돌아봤다. 랭던 경은 이번 내 반응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눈빛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랭던 저하,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요?”

“지난번에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미안하여 당신이 예뻐하는 아이를 급하게 초대했습니다. 윌도 기차 여행을 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기뻐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세상에, 저하! 너무 사려 깊으신 선물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윌리엄의 뺨에 키스하고 허리를 폈다. 기차가 출발하려는지 천둥이 치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덜컹 움직이는 느낌에 놀라 랭던 경의 팔을 붙잡았다가 부끄러워 손을 금방 뗐다. 윌리엄은 기차가 달리자마자 바로 창가로 다가가 빠르게 휘날리는 플랫폼을 내다보았다.

랭던 경은 아이가 눈을 돌린 틈을 타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심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윌리엄.”

랭던 경이 내 허리에서 손을 떼어 내며 아이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마른침이 넘어갔다.

“할머니가 준비하신 저녁을 먹으러 식당 칸으로 가 보자.”

“네, 공작님.”

윌리엄은 랭던 공작을 의식한 듯 눈치껏 얌전히 대답하며 창가에서 몸을 떼어 냈다. 나는 윌의 손을 잡고 좁은 기차 복도를 걸었다. 기차 실내는 걷기에 몹시 덜컹거리고 시끄러워 아이가 넘어질까 염려스러웠다.

베넷 부인이 준비했을 식사를 기대하며 식당 칸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스튜와 소스 냄새가 났다. 베넷 부인은 하녀와 함께 테이블에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베넷 부인.”

베넷 부인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워하며 한달음에 다가왔다.

“로엘 도련님!”

“오시는 길이 고되지는 않으셨어요?”

“공작님께서 좋은 마차를 보내 주셔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답니다. 윌리엄이 기차를 타 보게 됐다며 무척 신나 했어요.”

“부인도 저희와 같이 사우스라인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저희는 중간에 내릴 마을에서 휴가를 즐기다 돌아가기로 했답니다. 랭던 공작님의 배려 덕분이지요.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들뜨는 바람에 무슨 정신으로 짐을 챙겼는지 모르겠어요! 윌리엄과 제가 로엘 도련님 덕분에 별 호강을 다 하네요.”

베넷 부인은 특유의 과장된 어투로 설렘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그녀는 마무리로 소박하지만 푸짐한 고기 요리를 꺼내 놓고 윌리엄의 팔을 잡아끌며 자리를 비키려 했다. 내 뒤로 물러나 있던 랭던 경이 베넷 부인을 급히 불러세웠다.

“베넷 부인, 우리와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도록 해요.”

랭던 경의 제안에 나조차 놀라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귀족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그동안 나 역시 베넷 부인과 다과 정도는 같이 들어 봤으나 식사를 하는 상상은 못 해 봤다. 나이가 지긋한 베넷 부인이 기겁하며 양손을 휘저었다.

“아이고! 공작님과 같은 식탁에서요? 절대 안 됩니다!”

당황한 베넷 부인과 달리 랭던 경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베넷 부인이 불편하다면 내 명령인 것으로 해 둡시다. 아이와 부인의 그릇도 가져오세요.”

“그래도 어떻게….”

“랭던 경께서 괜찮으시다고 하시니 정말 괜찮은 일이에요. 걱정하지 마시고 윌과 같이 앉으세요, 부인.”

나는 앉지 않으려는 베넷 부인을 달래 윌과 함께 테이블로 데려갔다. 기차는 낯선 공간이었지만 랭던 경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니 기운이 샘물처럼 솟았다. 베넷 부인이 잠깐 사이에 음식을 얼마나 잔뜩 준비했는지 기차 테이블이 휠 기세였다. 두근대는 마음을 추스르며 랭던 경의 곁에 앉았다. 재킷 안쪽에 넣어 둔 약 봉투가 없다면 완벽한 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베넷 부인이 끓인 스튜에 구운 빵을 곁들이고, 질이 좋은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먹었다. 윌리엄의 작은 손은 빵과 샐러드 그릇을 지나 계속 고기 접시로 향했다. 베넷 부인이 못 먹게 하려고 계속 손등을 몰래 때리는 게 보여서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만류했다.

“베넷 부인, 윌이 마음껏 먹게 두세요. 고기는 충분히 있습니다. 한창 배고플 나이잖아요.”

“얘가 저보고 먹으라고 준비한 게 아닌데 주책없이….”

랭던 경이 와인을 한 모금 먹으며 점잖게 물었다.

“베넷 부인,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처음 기차를 타면 사람들이 멀미를 많이 합니다.”

“저는 하나도 어지럽지 않고 좋네요, 공작님. 마차보다 훨씬 덜 흔들리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로엘이 이사를 갔을 때부터 옆집에 사셨다면서요.”

“네, 그때부터 제가 출근하며 도련님 댁 집안 살림을 봤답니다. 로엘 도련님께서 윌이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아껴 주셨는데 이번에 도련님의 도움으로 학교에도 가게 됐어요.”

베넷 부인이 팔꿈치로 윌의 옆구리를 찔렀다. 정신없이 고기를 먹고 있던 윌이 아파하다가 작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로엘의 도움으로 학교에 가다니 무슨 말이오?”

랭던 경의 물음에 나는 괜히 창피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작게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랭던 경.”

“별거 아니긴요, 도련님! 아주 큰 일이지요. 로엘 도련님께서 윌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주셨답니다. 학비를 전부 지원해 주셔서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베넷 부인.”

나는 베넷 부인을 부르며 말을 더 못 하게 대화를 끊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빨개진 내 얼굴을 보는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곧 내게 두었던 시선을 옮기고 어린 윌을 바라보았다.

“로엘이 정말 좋은 결정을 했군요. 로엘의 마음 씀씀이에 무척 감동을 받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만큼 윌이 좋은 아이니까 로엘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 같군요.”

베넷 부인은 랭던 경의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녀는 손자를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 손자기는 하지만 윌이 정말 똑똑하고 착한 아이긴 하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친 따뜻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과 베넷 부인은 일등석 칸 객실로, 우리는 특등석 칸 객실로 나뉘어 들어갔다. 기차가 덜컹거려 휘청이는 나를 랭던 경이 팔을 잡으며 감싸 안았다.

“어떻게 평민 아이에게 후원을 할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입니다.”

랭던 경이 부드러이 속삭였다. 비로소 둘이 남아 그를 향한 떨림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자 한편으론 마음이 가벼워져 어깨에 힘이 빠졌다. 물론 품에 든 약 봉투의 무게는 제외해야 했다.

저녁에 대한 감사를 다시 한번 표하려는 찰나 랭던 경이 나를 기차 창가에 밀어붙이며 그대로 입을 맞췄다. 나는 그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었으나 오늘따라 거친 키스에 제대로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휘청이며 유리창에 뒷머리를 살짝 부딪쳤다. 조금 아팠으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무게가 실렸다.

“하읍….”

두툼한 혀가 치아 사이를 밀고 들어와 순식간에 입 속을 차지했다. 샤를 대공을 맞이하느라 한참이나 끊겨 있던 키스가 이어지자마자 내가 저녁 식사 내내 정말로 맛보고 싶었던 것은 그의 체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 속에 찬 그의 혀를 가득 물고 빨며 그 감촉과 체온을 맛봤다.

랭던 경은 평소처럼 나를 깊이 침범했다. 묵직한 혀끝은 치아를 하나하나 건드렸고, 나는 입술을 모아 새가 모이를 쪼듯 그의 혀를 빨았다. 스스로 빨면서 일어나는 야릇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끙끙대며 앓는 신음이 새어 나왔으나, 그가 내 목소리를 남김없이 가져가 객실에는 질척대는 소음만이 남았다.

그의 혀와 체액을 탐하는 데 여념이 없는 나를 랭던 경이 팔뚝을 움켜잡고 살짝 떼어 냈다. 나는 칠칠치 못하게 혀끝을 살짝 빼물고 몽롱한 눈을 들어 랭던 경을 올려다봤다. 조금 더 키스하고 싶었다. 달콤하고 안전한 접촉.

랭던 경이 입술 대신 내 귓불을 핥으며 질척이는 소리를 흘려 넣었다. 음란한 소음에 나도 모르게 옅은 신음이 흘렀다.

“아….”

“신음 조심해요. 저택에서처럼 소리를 지르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기차가 내는 소음이 어느 정도 가려 주긴 하겠지만….”

“…네, 흣… 하지만 침, 소리가 자극적이라….”

그는 신음을 조심하라면서도 내 귓속까지 혀를 집어넣고 핥기를 반복했다. 다시 랭던 경이 덜덜 떨리는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로엘…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곧 잠시 머물 숙소에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무리예요.”

“하지만 저하… 기차에서는….”

“방금 키스할 때 기분 좋았어요? 응?”

랭던 경의 입술이 뺨의 솜털을 쓸 듯 닿을락 말락 피부를 스쳐 지났다. 나는 솜털이 일어나는 느낌에 떨리는 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를 내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랭던 경이 허리를 숙여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신음은 더 참기 힘들어졌다. 입술은 목선을 거칠게 빨며 자신의 흔적을 새겼고, 턱에 닿는 짙은 머리카락은 피부를 간질였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움켜잡으며 하체를 맞붙였다. 단단해진 그의 것이 바지 너머로 느껴져 부끄러움에 몸을 피하려 했으나 좁은 객실 안에서 그에게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등 뒤에 닿은 창문에서 기차의 덜컹거림이 느껴졌다. 랭던 경은 부드러이 입술을 겹쳤다 떼어 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동안 내가 섹스하기 전에 매를 때리거나 거칠게 대하는 일이 무서웠다고 하니 오늘은 부드럽게 해 줄게요. 궁금하지 않아요? 얼마나 맛있을지. 당신은 내 좆을 맛보는 걸 좋아하잖아.”

“그러나 저하, 객실에서는 신음을 참아야 하고….”

“신음은 내가 막아 주겠습니다.”

방금 전의 야릇한 키스가 몸을 달구어 놓아 나도 모르게 잠깐 대답을 주저했다. 랭던 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키스로 다시 내 입을 막았다. 나는 그의 키스에 약했고, 그 입맞춤에 응한 행동이 그대로 동의가 되어 버렸다.

랭던 경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무릎을 꿇고 좆을 빨아요. 그대의 아래를 적셔 줄 정액을 받아 내야지.”

말투만 부드러울 뿐 담겨 있는 내용은 평소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다정히 대해 주겠다더니 바로 무릎을 꿇고 구음을 하라고 하여 배신감에 뺨이 뜨거워졌다. 화가 나서 눈물이 맺히려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내게 화풀이를 한 사건 이후로 부쩍 온화해진 랭던 경은 눈물을 보더니 얼른 나를 달래 주며 다시 목덜미를 핥아 주었다.

“그냥 박으면 로엘 씨가 아파할 테니 뒤를 풀어 주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냥 쑤시면 좋겠어요? 당신은 늘 내 자지를 버거워하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내게 그대의 달콤한 입 속을 휘저을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니겠지? 맛보는 방식이 다를 뿐 그대가 키스할 때 내 혀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나도 구음하는 당신의 혀를 좋아합니다.”

“저, 저는 키스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으나 자존심에 거짓된 소리를 했다는 걸 랭던 경이나 나나 둘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기차의 움직임에 조금 휘청거리다 결국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봤다.

랭던 경은 내 순종적인 모습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곧 직접 바지 여밈 단추를 풀고 발기한 성기를 꺼내 내 뺨을 꾹 눌렀다. 그리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하… 부드럽군.”

나는 지금껏 그래 왔듯 그를 얌전히 올려다보며 그가 성기를 입에 물려 주길 기다렸다. 두툼한 귀두는 뺨과 입술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가며 크기를 더 부풀렸다.

랭던 경은 다시 내 머리채를 움켜잡고 고개를 살짝 젖히게 한 뒤 발기한 페니스로 뺨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랭던 경에게 ‘다정한 섹스’의 정의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다시 분노가 몽글몽글 솟았지만 섹스가 끝난 뒤 물어볼 요량으로 화를 참아 냈다.

그는 내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귀두와 기둥으로 뺨을 두드렸다. 볼이 빨갛게 변한 후에야 아직도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반쯤 벌어져 있는 입 속으로 성기가 들어왔다.

맨 처음 서투르기만 했던 나는 이제 제법 구음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페니스가 너무 거대해 시작할 때면 늘 버거웠다. 성기의 크기에 맞춰 입 속과 목구멍을 억지로 벌리는 동안 잔기침이 계속 튀어나왔다.

“로엘 씨가 직접 움직여요. 그게 더 편할 테니까.”

랭던 경이 짐짓 다정한 척 말했다. 나는 입을 우악스레 벌린 모습이 창피해서 한참이나 성기를 오물대다가 겨우 느릿느릿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랭던 경은 나직한 숨을 뱉어 내며 머리채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덜컹대는 창문을 짚었다.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시끄럽지 않았다면 적잖이 곤란할 뻔했다. 소음은 성기가 질척이며 입 속을 드나드는 소리와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구역질 소리를 덮어 주었다.

“읏… 으응….”

나는 성기를 제법 깊숙이 물고 혀로 기둥을 정성껏 핥았다. 구석구석 맛보듯이. 초콜릿을 녹여 먹듯 굵은 혈관을 따라 혀끝을 비비고 성기가 빠져나갈 땐 입술을 더 오므리며 기둥을 빨아들였다. 입과 코 속엔 그의 성기에서 흐른 쿠퍼액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랭던 경이 칭찬하듯 머리를 가벼이 토닥였다.

“이제 제법 혀를 잘 쓰는군. 입을 더 벌려 볼까? 그대가 깊이 넣으면 상으로 부드럽게 쑤셔 줄게요.”

랭던 경이 섬세한 손끝으로 내 턱을 간질였다. 더 깊이 넣겠다는 소리에 겁이 나서 눈을 잠시 내리깔았지만 부드럽게 하겠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다시 나를 허물었다. 평소보다는 낫겠지 싶어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더 벌리며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일단 성기를 내 볼 쪽으로 찔러 넣었다. 뺨이 불룩 솟자마자 큰 손바닥이 튀어나온 부근을 둥글게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군. 당신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만 내가 참아야겠지?”

그 말과 함께 성기가 목구멍 안쪽까지 쭉 미끄러져 들어왔다. 한 번에 목구멍까지 들어찬 페니스에 놀라 가쁜 기침을 내뱉으며 랭던 경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굵은 기둥은 내 눈에 귀두가 보일 정도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처박히길 반복했다. 속도만 느릴 뿐, 평소에 박던 강도와 다를 게 없었다. 허벅지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는 눈물이 찰랑거렸다.

“흐읍… 컥, 응….”

“천천히 박아 주니까 안 아프고 좋아요? 입을 쑤셔 줘도 좆을 세우고 느낄 줄 알아야지.”

나는 화가 나서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랭던 경을 올려다봤다. 평소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안 아프고 좋다는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구음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배신감이 솟아올랐지만 다시 화를 참았다.

랭던 경은 내 붉어진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성기를 다시 끝까지 박아 버렸다. 고환이 턱에 문질릴 정도라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국 눈물을 떨어트리며 랭던 경의 다리를 밀어냈다. 그러나 벽처럼 단단한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랭던 경은 심지어 내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눌러 못 움직이게 고정하고는, 자신의 페니스를 목구멍에 이리저리 비비고 문질렀다.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하, 눈물도 이렇게 예뻐서는…. 날 봐요, 로엘. 응?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흐윽, 윽…. 응…”

나는 성기를 가득 물고 있어 흉하게 입을 잔뜩 벌린 상태였다. 침과 눈물로 젖은 얼굴을 힘겹게 들어 랭던 경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랭던 경은 내 뺨과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체액들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다시 나직한 한숨을 내쉬더니 페니스를 더 비비기만 할 뿐, 좀처럼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의 허벅지를 밀어 내며 울다 결국 침을 왈칵 흘리고는 부끄럽고 창피해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윽… 흣, 응….”

“혀 내밀어요.”

목구멍에 한참이나 들어차 있던 페니스가 드디어 빠져나갔다. 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혀를 최대한 길게 빼물며 순종했다. 랭던 경은 그런 나를 감상하며 페니스를 직접 문질러 내 혓바닥 위에 바로 사정했다. 내리깐 시선 아래로 굵게 부푼 성기와 손바닥이 마찰할 때마다 혀 위로 쏟아지는 하얀 액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내 아래를 풀어 주는 데 쓸 액체이기에 나는 울면서도 정액을 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혀를 펼쳤다. 그러고도 넘쳐서 혀 가장자리 밖으로 흘러내리는 정액은 얼굴 아래에 양손을 겹쳐 두고 손바닥으로 받았다.

랭던 경은 정액을 많이 모으려 애쓰는 나를 칭찬하듯 부드러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혀를 빼물고 있는 내게 랭던 경이 온화한 투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참고 있는지 그대가 알아줘야 할 텐데요. 온갖 체액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꼴려서 아래에 당장 처박고 싶거든.”

그는 정액을 얼른 거둬 가 주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숙이고 눈물에 젖은 내 눈꺼풀 주변을 한참이나 핥았다. 정액은 침과 뒤섞이기 시작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손바닥으로 받고는 있었지만 그가 당장 가져가 풀어 주지 않으면 더 견디기 버거울 정도였다.

랭던 경은 내 곤란함을 알고 있을 텐데도 한참이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며 나를 애태우고 괴롭히기만 했다. 정액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참아 낸 끝에 그가 마침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바지 단추를 풀어 주는 손길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랭던 경은 그제야 내 손바닥에 고여 있는 자신의 정액을 가져갔다. 혓바닥에 모아 놓은 정액부터 훑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섹스를 할 때의 그는 날 괴롭히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았다. 오랜 시간 내밀고 있는 혀의 뿌리가 끊어질 듯 아파 눈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커다란 손이 내 등 뒤로 향했다. 그는 곧 내 아래에 정액을 치덕치덕 펴 바르고 손가락 하나를 얕게 집어넣었다.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구멍이 움찔거리는 바람에 나는 스스로 놀라 다리를 떨었다.

“으응….”

“벌써? 이런, 곤란한데…. 그대가 기차에서 싸지르면 나중에 손님들에게 큰 결례가 되지 않겠어요? 당신은 품위를 알고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잖아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터라 난처하여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였다. 혀에는 여전히 정액이 들러붙어 있어 말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이 드디어 내 입에 고여 있는 자신의 정액을 손에 덜어가 아래쪽을 더 질척하게 만들며 말을 이었다.

“나야 당신의 아래 입에 싸질러 모아 두면 되지만… 그대는 그럴 수가 없으니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무, 슨 말씀… 이신 지….”

굵은 손가락들이 더듬더듬 말하는 입 속을 파고들어 정액을 마저 훑어 냈다. 그의 젖은 손가락이 다물린 아래를 누르다 내 안을 파고들었다.

“응… 읏….”

나는 벌써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느라 손등으로 입술을 누르며 허리를 떨었다. 그의 뜨거운 혓바닥이 내 뺨을 쓸어 올리고 이로 귓불을 아프게 물었다.

“그러니 기차에서는 사정하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싸지르려면 내게 허락을 구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다정한 섹스는 없던 일로 하고 좆을 함부로 놀린 벌을 주겠습니다. 그대는 맞는 일이 싫다 했지?”

“네, 저하. 하지만… 으응… 그, 그런 명령은… 저는….”

차마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랭던 경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저는, 뭐.”

“저는… 저하와, 섹스를 하면… 참기 어려운걸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군. 무얼 참기 어려운데.”

랭던 경의 괴롭힘에 속이 뜨겁게 끓었으나 객실이라 큰 소리는 낼 수 없었다. 나는 랭던 경이 내가 저질스러운 단어를 사용하여 조르길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단어들을 천천히 뱉어 냈다.

“저하께서 성기로, 제 안쪽을… 해 주시면… 저는 금방, 아… 으응… 저하, 손가락을 제발… 머, 멈춰 주세요. 마, 흐읏, 말을 하기가….”

나는 손을 뒤로 돌려 랭던 경의 팔목을 잡았다. 그는 내가 팔목을 잡았음에도 멈추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마저 깊게 박아 넣었다. 랭던 경은 서 있는 나를 더 끌어안으며 손가락을 끝까지 박고 흔들었다. 굵은 손목을 잡고 덜덜 떨다 쓰러지듯 넓은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흐읏, 읏… 그, 그만… 저하….”

“벌써 자지를 물고 싶어 벌름대는군. 내가 손가락을 박는다기보다 그대의 아래 입이 빨아 먹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으응… 부디, 부, 부드럽게 해 주세요.”

내 폭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결국 자비를 구했다. 랭던 경은 손가락을 하나 더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나도 샤를 대공이나 베넷 부인에게 우리가 섹스한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싶진 않습니다. 내게도 체면이 있으니…. 부드럽게 박아 줄게요. 그대가 크게 소리 내어 울며 나를 망신시키진 않겠지?”

“거, 걱정, 흣, 마세요. 읏….”

그건 나도 바라지 않는 바였다. 나는 아랫입술에 이가 박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힘껏 물며 그의 손가락을 견뎌 냈다.

랭던 경은 몇 번이나 거칠게 흔들던 손가락을 빼내고 기차 의자에 앉으며 나를 허벅지 위로 당겼다. 나는 랭던 경의 다리 위에 어설프게 앉으며 몸을 굳혔다. 그동안 삽입이 된 상태에서 자세를 바꾸다가 랭던 경의 위에 앉은 적은 있으나, 시작부터 그의 품에 오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그의 위에 앉는 것만으로도 은밀한 부분에 단단히 부푼 귀두가 닿았다. 앉아서 스스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되돌리기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당황하여 입술을 깨물고 그를 내려다보자 랭던 경이 타이르듯 등을 쓸어내렸다.

“위에서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떨려요?”

랭던 경이 약속했듯 그의 질문에선 내 과거를 비난하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의 위에서 능동적으로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는 나의 무경험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서투른 티를 내지 않아야 하는데. 침대 위도 아니고 덜컹대는 기차 안에서 경험 없는 자세로 하려니 긴장감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 스스로 허리를 낮춰 보았다. 굵은 귀두가 반도 파고들지 않았는데 몹시 아파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아파요…. 너무, 굵, 흣, 굵어요, 저하….”

“앉아서 하니 로엘 씨의 음란한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려 문제네요. 힘을 풀고… 후으, 천천히 넣어 봐요. 원래 내 것을 위에서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으응… 커요…. 아… 아파요….”

랭던 경이 자신의 기둥을 잡아 삽입을 도와주고서야 겨우 귀두를 절반쯤 품었다. 주름이 다 펴질 정도로 아래가 열리는 느낌이 힘에 겨워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 넣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크기였다.

이 거대한 성기가 좋아하는 데를 쳐올리기 시작하면 과연 신음을 참아 낼 수 있을까. 사정하고 싶은 걸 견뎌 낼 수 있을까.

억지로 허리를 내리는 동안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읏, 응… 흐윽….”

“잘 먹고 있습니다. 이제 귀두는 다 들어갔어요.”

“제, 제가 스스로, 흣, 넣기가… 너, 무 어렵습니다….”

“직접 먹을 줄도 알아야지. 응? 상아를 먹을 때처럼 해 봐요. 허리를 흔들고 아래 입을 벌름대며 빨아야 몸이 맛있는 게 들어오는 줄 알 거요.”

“흐으응… 읏….”

나는 계속 랭던 경을 꼭 끌어안은 채로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더 낮췄다. 상아를 넣을 때처럼 하라는 소리에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들어가다 막히면 허리를 위아래로 얕게 들썩여 아래쪽을 굵은 성기에 적응시켰다. 그러면 이내 밑이 벌름거리며 성기를 좀 더 깊숙이 물었다. 랭던 경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할 때면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셔츠 위로 등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잘하고 있어요. 하… 얼른 박고 싶어서 애가 타는군.”

내가 성기를 절반쯤 먹었을 때, 랭던 경이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꽉 움켜잡으며 속삭였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습니다. 신음 지르지 말아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이 나를 아래로 주저앉혔다. 성기가 끝까지 안을 파고드는 순간 귀두가 깊은 곳을 찔러 올렸다. 고통과 쾌감이 등줄기를 따라 내달렸다.

나는 충격에 아래로 떨어진 턱을 덜덜 떨며 침까지 길게 늘어트렸으나 간신히 소리는 내지 않았다. 참아 냈다기보단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이었다. 반쯤 강제로 집어넣은 고통에 눈물이 그의 어깨 위로 후두둑, 흘러내렸다.

“아… 아….”

작게 새어 나오는 신음 사이사이 랭던 경이 목덜미를 혀로 진득하게 핥으며 나를 달랬다.

“괜찮아요, 잘 들어갔으니까. 하….”

“아, 흣… 흐윽….”

“안 움직일 테니까 힘 풀어요. 엉덩이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그리 힘을 주면 더 아프지 않을까, 응?”

랭던 경이 내 맨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며 얼렀다. 아래쪽에 힘을 풀려 노력해 봐도 성기의 크기가 너무 버거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덜컹대는 기차에서 신음을 참으며 해야 하는 것도, 랭던 경의 위에서 해야 하는 것도, 사정을 참아야 하는 것도 다 내게 벅차기만 해서 다정한 섹스라는 소리에 흔들렸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아래에 힘을 풀어 보려 애쓰다 서럽고 슬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랭던 경을 마주 보았다. 그가 나를 달래듯 머리카락을 매만졌으나 울컥대는 가슴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는 뺨과 페니스를 품고 있는 아래쪽이 모두 쓰라리고 아팠다.

“저, 저하께서는 대체… 왜 이렇게, 크신, 겁니까.”

나는 울음소리를 참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랭던 경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슨 소리요?”

“조금만… 조금만 더 작았으면, 흑, 좋았을 것을….”

서러움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뺨이 다 젖도록 울며 랭던 경에게 하소연했다.

“대체 왜… 이렇게 커서, 흐읏, 넣을 때마다, 이토록 고생을…. 제발 저하의 것이 작아지면 좋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랭던 경은 눈썹을 문지르며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아파하는데 웃는 모습에 몹시 화가 나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러나 랭던 경은 웃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아래쪽은 여전히 쓰라렸고 밑을 가득 채운 거대한 성기는 배 속까지 짓누르는 지경이라 나는 그의 비웃음을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항의했다.

“우, 웃지 마십시오… 으응…. 나중에, 매, 매를 맞더라도, 흑,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내 좆이 작아지면 좋겠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할 말이에요?”

“시, 신께서 잘못, 만드신 게 아니고서야…. 말도 안 되는 크기 아닙니까. 사람을 죽이려는 휴, 흉기입니다.”

말을 간신히 마친 뒤 아랫배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울었다. 랭던 경은 달래 주기는커녕 웃기만 하고 심지어 내 엉덩이를 철썩 내리치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나는 서러운 눈물을 좀처럼 그치지 못했다.

랭던 경은 큰 손으로 다시 내 허리를 한가득 움켜쥐고는 앞으로 나를 부드러이 잡아당겼다가 뒤로 밀었다. 엉덩이가 그의 손길에 맞춰 물결치듯 움직였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랭던 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성기를 다 삼켜 그의 다리 위에 완전히 앉은 덕분에 우리는 제법 눈높이가 맞았다.

“네 불평을 달래 줄 방법은 이 좆으로 울리는 방법뿐이겠지?”

“으응… 흐윽, 흡….”

“지금보다 작아지면 로엘 씨의 눈물샘은 어떻게 눌러 주겠어요. 고통 탓에 흐르는 눈물이야 싫겠지만 쾌락으로 흐르는 눈물까지 싫은 것은 아닐 텐데? 응? 로엘, 대답해 봐요.”

“그, 그거야… 흐읏, 응… 응….”

대답을 하라더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랭던 경이 아래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넓은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들며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눌렀다. 체중을 싣고 앉아 있는 탓인지 성기는 시작부터 너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내벽을 적신 정액은 기름을 대신할 만한 충분한 윤활유가 되지 못했다.

랭던 경이 허리를 잡아 들었다 내리게 할 때마다 성기가 거칠게 내벽을 긁으며 배 속에 처박혔다. 나는 한쪽 손을 내려 배를 감쌌다. 그가 박아 넣을 때마다 배가 솟았다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 무서우면서도, 깊은 곳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한 쾌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응… 흐으으읏….”

“조심해요, 하…. 샤를 대공이 듣겠습니다.”

“기, 깊습, 니다… 저, 하….”

“당신 아래 입은 좋아하는데. 박아 줄 때마다 움찔거리면서… 뜨겁게도 핥는군.”

“아, 읏… 하아….”

랭던 경은 나를 들어 귀두가 보일 정도로 성기를 빼낸 뒤 몸을 순식간에 주저앉히며 다시 깊숙하게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눈물샘을 파고들며 짓누르는 뭉툭한 귀두와, 움찔대는 내벽을 문지르는 기둥 때문에 힘없이 턱이 떨어졌다.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신음을 참았기 때문이 아니라 차마 신음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릎 쪽에 얹혀 있는 발등이 미친 듯이 떨렸다.

“아… 으응….”

감당하기 어려운 성감에 허리를 젖히며 성기에서 벗어나려 해 보았지만 커다란 손이 내 양쪽 엉덩이를 움켜잡고 놔 주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진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을 랭던 경이 핥으며 물었다.

“그렇게 맛있어?”

“…하읏… 예… 흐으응… 읏… 저, 저하….”

“하… 조르듯이 잘 빨아서… 마음껏 먹여 주고 싶은데 그대가 뭘 맛보고 있는지 기차에 탄 사람들 모두가 알면 안 되니 감질나는군.”

“부디… 처, 천천히… 아….”

“그리 천천히 하고 싶으면 네가 엉덩이를 직접 놀려야지.”

랭던 경이 엉덩이를 소리 나게 내리치며 나무랐다. 나는 아픔과 쾌감 속에서 조금 전 그가 내 허리를 잡고 흔들던 움직임을 간신히 떠올렸다. 서툴러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엉덩이를 앞뒤로 문지르며 내 속을 점령한 굵직한 페니스를 흔들었다. 그가 했듯 성감대가 있는 곳을 자극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읏, 흣….”

“영 서툴게 하네.”

랭던 경은 내 무릎 밑을 잡아 나를 뒤로 젖힌 뒤 시선을 내리깔고 접합부 쪽을 지그시 쳐다봤다. 성기를 물고 잔뜩 벌어진 상태일 텐데. 부끄러움에 손끝이 빨갛게 달았다.

나는 그의 양어깨를 좀 더 꽉 쥐며 주저앉듯 움직여도 보았으나 랭던 경의 말대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랭던 경이 잡고 움직여 주지 않으면 제대로 허리를 흔들지 못했다.

“저하의, 것이… 흐응…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흣….”

랭던 경이 창부라는 사실을 의심할까 봐 내 서투름을 그의 탓으로 돌렸다. 랭던 경은 말없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 입술을 눌렀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순간 그가 눈썹을 꿈틀 올렸다가 내렸다. 섹스할 때 무엇이든 생각대로 즉각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괴롭히고 싶은 욕망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춘 순간이었다.

“입 벌려요. 물려 줄 테니까.”

천천히 벌어지는 입 속으로 손수건이 들어왔다. 물기 하나 없이 버석한 천이 입을 채우는 느낌이 뻑뻑하고 불쾌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신음을 참을 수 없을 것임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나를 돌려 앉혔다. 성기가 몸속에서 돌아가는 느낌이 무척 야릇했다.

랭던 경은 내 무릎 밑에 손을 넣어 나를 손쉽게 들더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창문을 손바닥으로 짚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사정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나를 들었다 내리며 안쪽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흐읏… 으응, 흣, 읏….”

손수건이 신음 소리를 먹지 않았다면 다른 객실까지 들리도록 울었을 것이다. 페니스가 거의 다 보이도록 빠졌다가 안쪽을 쑤시며 거칠게 들어왔다. 체중까지 실려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아래가 한계치까지 벌어졌다.

밑이 쓸리며 퉁퉁 붓기 시작하는 아픔은 페니스가 예민한 곳을 긁는 쾌감에 금세 먹혀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작아지면 좋겠다고 항의했던 그 성기는 굵고 거대한 만큼 내가 느끼는 곳을 남김없이 짓누르며 안쪽을 쳐올렸다.

“하읏, 으으응… 응….”

“고개 들고 당신 표정을, 하, 봐요. 안 그러면 손수건을 빼 버릴 테니까.”

랭던 경의 말에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기차의 창문에 온몸이 벌겋게 익은 내 모습이 훤히 비쳤다. 그와 섹스하는 나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랭던 경이 안을 찔러 올릴 때마다 수건을 물고 있는 입이 벌어지고 속눈썹과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다리에 반쯤 걸쳐 있는 바지와 흐트러진 셔츠도 내가 섹스 중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남자의 것에 흥분하는 남색가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유리창 속의 성기가 안을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랭던 경에게 들려 있는 내 몸이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수치스러워 창문을 보며 떨지 않고 참아 보려 했으나 작은 의지로는 발끝까지 밀려드는 쾌감을 버텨 낼 수 없었다. 퍽, 퍽, 쳐올리는 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흣, 안… 으응, 에… 사, 알….”

벌써 사정할 것 같다고, 제발 쳐올리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었으나 손수건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건지 못 알아듣겠는데.”

랭던 경은 나를 들어 올렸다가 주저앉히며 성기를 최대한 깊숙이 박아 넣고 고환을 밑 쪽에 비비듯 내 몸을 돌리며 문질렀다. 나는 손가락의 마디가 꺾일 정도로 온몸에 힘을 주었다. 창문을 긁어내리는 손가락 사이로 쾌감에 떨어지는 내 눈물이 아릿하게 비쳤다. 사정하지 않으려 나도 모르게 뒤까지 조인 채 떨고 있으니 랭던 경이 내 목덜미를 핥으며 말했다.

“하… 힘 풀어요. 너무 조이면 아프니까. 그대만 내 것이 버거운 게 아니라, 나도 그대의 안쪽이 너무 좁아 쑤시기가 쉽지 않아요. 언제나 잔뜩 엉망으로 박아 줘야 겨우 쑤실 만한 상태가 되거든.”

“으응… 응….”

“박히는 그대의 표정은 충분히 본 것 같으니 이번엔 내가 쑤셔 주는 아래쪽을 봐요. 얼마나 게걸스럽게 좆을 빠는지.”

랭던 경은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내 몸을 자신의 쪽으로 살짝 기울여 창문에 내 엉덩이가 잘 비치도록 만들었다. 무릎 사이로 보이는 창문에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이 정면으로 비쳤다. 랭던 경의 말대로 엉덩이는 거대한 페니스를 가득 머금고 주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벌어진 상태였다. 스스로의 음란한 모습에 놀라 눈물이 찔끔 떨어졌다.

그는 이번엔 내 무릎을 모아서 끌어안고 나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의 팔뚝을 꽉 잡고 쾌감에 가누기 어려운 머리를 뒤로 젖혀 랭던 경의 어깨에 기댔다. 나는 특등석 객실 천장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신음을 내질렀다. 버석했던 손수건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신음을 아슬아슬 가렸다. 아까부터 계속 눌러 온 사정감은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하읏… 으읏….”

그의 페니스가 내 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듯했으나 발가락을 저리도록 꽉 접으며 참았다.

“응, 아, 으읏….”

“후으… 한 번 싸 줄 테니 다시 창문 봐. 엉덩이 쳐들고.”

랭던 경은 나를 내려놓고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겼다.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쳐들었다. 내 엉덩이에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내가 약한 자세였다.

‘안 돼… 사정할 것 같아….’

나는 견딜 수가 없어 뒤로 손을 돌려 랭던 경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명령했다.

“참아.”

커다란 그의 손이 바짝 서 있는 내 성기를 움켜잡으며 엄지로 입구를 틀어막았다. 급작스러운 손길에 허리가 비틀린 순간 그가 내 안쪽에 성기를 끝까지 처넣고 정액을 쏟아 냈다. 느끼는 곳으로 끈적하게 부어지는 정액에 허벅지가 미친 듯이 떨렸다.

“읏, 으응… 흣….”

금방이라도 자세가 무너질 듯했지만 나는 그가 시킨 대로 끝까지 창문을 보며 인내했다. 손수건을 문 채 입을 벌리고 다 풀린 동공으로 간신히 창문을 응시하는 내가 유리에 적나라하게 비쳤다. 외설스러운 모습.

사정을 다 마친 랭던 경은 내 앞을 막고 있던 손을 거두고 입 속에 들어 있던 손수건마저 빼내 버렸다. 몸을 숙인 그가 평소처럼 눈꼬리와 젖은 뺨을 핥아 주는 감각조차 모두 성감으로 돌변했다.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랭던 경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래, 랭던 저하… 더, 더는 못 참겠습니다….”

“뭐를?”

“사정, 흣, 하고 싶어요.”

“표현이 너무 곱상하여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군.”

야속한 외면이었다. 저속한 단어를 쓰라는 요청.

평소 같으면 예의를 좀 더 차렸겠지만 나는 이미 한계치였고, 밀려오는 사정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떨리는 허벅지를 맞비비며 빌었다.

“싸고, 싶, 어요, 저하. 흣… 제발…. 제 몸이, 으, 음란하여….”

“그대가 음란하여 쉽게 싸지르고 싶어지는 거겠지?”

“네, 그, 그렇습니다…. 으응… 저하… 음란, 하고, 아… 처, 천합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막아 주는 수밖에 없겠군. 귀족답게 기차 바닥이 아니라 숙소에 가서 해결해야지.”

서러움에 굵은 눈물이 뺨으로 몇 줄기나 흘러내렸다. 결국 허락을 받아 내지 못했다.

랭던 경은 꼼짝도 못 하는 나를 안아 소파에 눕히고 내 목에 리본 매듭으로 묶인 얇은 타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잔뜩 서 있는 내 것을 묶기 시작했다.

나는 울면서 그가 우아한 손짓으로 성기에 타이를 동여매는 모습을 지켜봤다. 뿌리부터 귀두 아래까지 단단히 매듭을 지은 랭던 경은 이내 다정한 얼굴로 내 성기 끝에 살짝 입을 맞춰 주고 뺨에도 키스하며 울고 있는 나를 달랬다. 젖은 양쪽 뺨을 커다란 손이 넉넉히 감쌌다.

“로엘, 울지 말아요. 곧 내려야 합니다.”

“저하, 제가 이 상태로… 거,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숙소에 가면 하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봐요. 지금 당신 표정이 얼마나 예쁜지 창문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으, 음란하기 짝이 없어 수,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하… 당신의 말 그대로요. 그림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지금 그대의 머릿속에는 내 좆에 박히며 싸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잖아요.”

랭던 경은 벌써 또 반쯤 서기 시작한 자신의 것을 다시 내 안에 밀어 넣었다. 그의 페니스가 점점 단단하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랭던 경은 계속 키스하며 우는 나를 달랬다. 아랫입술을 빨아 주고 내 혀를 자신의 입 속에 부드러이 머금었다. 그는 내가 놀란 마음을 진정할 때까지 키스를 해 주다 엉덩이를 토닥이며 어르듯 말했다.

“의자 사이 바닥에 무릎을 꿇어 봐요. 내 쪽으로 엉덩이 들어서 내밀고. 엎어 놓고 쑤셔 줄 테니까.”

랭던 경이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하며 내 몸을 안아 일으켰다. 나는 의자 사이의 비좁은 바닥에, 랭던 경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뒤에서 박아 주는 쾌감에 약한 나는 벌써부터 절정에 다다를 걱정으로 온몸을 떨었다.

앞이 묶인 채 맞는 절정은 어떤 느낌일까. 랭던 경은 풀려 있는 아래쪽에 다시 성기를 푹, 박아 넣고 둥그렇게 솟아 있는 맨엉덩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명령했다.

“직접 엉덩이를 움직여요.”

“저, 저하…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 주세요.”

바닥에 머리를 묻은 채로 간신히 부탁했다.

“이번엔 그대가 참아 보도록 해요. 인내심이 있어야지. 점점 좆 맛에 환장해서는….”

랭던 경이 엉덩이를 찰싹 내리치며 나무랐다.

대체 어디가 다정한 섹스인 걸까. 억울함이 다시금 밀려왔으나 섹스할 때의 그는 독선적이고 강압적이라 순종하지 않으면 빳빳해진 내가 꺾일 뿐이었다.

나는 치켜든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며 랭던 경이 뒤에서 박아 넣는 동작을 따라 했다. 안에 사정해 놓은 정액 때문에 접합부에서 금세 질척한 소리가 났다.

성기를 스스로 박아 넣는 일이 어렵진 않았지만 문제는 그만큼 내가 느끼기 쉽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아랫입술을 씹는 행동만으론 신음을 막을 수 없어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아야 했다. 성감으로 뜨거워진 손바닥 안에 흘러나온 신음이 고이기 시작했다.

“흐읏, 으응….”

“잘 움직이는군. 하… 이제야 밑이 좀 부드러워져서….”

랭던 경은 내 엉덩이 양쪽을 잡아 벌리며 접합부를 감상했다. 한참이나 내가 흔드는 모양새를 보기만 하던 그가 접합부를 매만지며 직접 성기를 깊게 쑤셔 넣었다. 성기를 깊숙이 물자마자 엉덩이가 크게 튀어 오르더니 그만 아래쪽에서 힘이 풀려 버렸다.

나는 분명히 사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지금까지의 경험이 만들어 낸 거짓된 감각일 뿐, 묶여 있는 내 페니스에선 아무것도 흘러내리지 못했다.

정액을 배출해 내지 못한 채 사정감이 멈추자 온몸이 망가진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다가 한순간에 아래쪽이 조여들었다. 내벽은 그대로 성기에 들러붙어 엉덩이를 쾌감에 저며 버렸다.

“아, 흐으응… 아응….”

“뒤로 갔어?”

랭던 경이 두툼한 귀두로 내가 잘 느끼는 쪽을 비벼 주며 무심히 물었다. 그 단순한 반응이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알아냈다는 사실도.

쾌감이 가시지 않아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힘껏 누른 손가락을 벌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나는 뒤늦게 겨우 대답했다.

“아… 흐읏… 네, 저하….”

“신음 조심해요. 손으로 막고 있는데도 꽤 들리니까.”

“갔는데… 흡… 무, 묶여 있어서….”

“후으… 뒤로만 가는 쾌감도 그대가 익숙해져야 할 것이지.”

랭던 경은 아무런 여유도 주지 않고 내 엉덩이 살을 움켜잡은 후 뒤에서 나를 움직이며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 사이 좁은 바닥에 엎드린 채 랭던 경이 주는 쾌감에 퍼덕였다.

밑에서 느껴지는 기차 바퀴의 진동과 소란스러운 잡음도 내 귀에 들리는 스스로의 신음을 가려 주지 못했다. 랭던 경이 성기를 처박을 때마다 나는 질척대는 소리도.

“아, 안, 돼… 흐읏, 다시….”

“묶여 있으니, 후… 마음껏 가도 됩니다.”

“저하, 제발… 으으응….”

더는 힘이 안 들어가는 손가락으로 입을 힘껏 틀어막은 순간 나는 다시 또 절정에 올라 그의 다리 사이에서 온몸을 경련하듯 떨었다.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엔 흘러내린 침과 신음이 고이고, 뒤에서는 커다란 손가락이 접합부를 잡아 벌리며 성기를 더,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안을 자극했다. 나는 떨리는 한 손을 내려 배를 움켜잡았다. 깊게 들어온 성기 때문에 배가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들어갔어?”

랭던 경이 물어보더니 내 몸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그대로 내 손바닥을 짓눌렀다.

“하읏, 윽….”

“하, 그대의 온몸에 경련이 났군. 가장 심한 건 내벽이에요. 자지를 문지르느라 요란히도 움직이는군.”

랭던 경은 젖은 안쪽을 몇 번이고 헤집으며 나를 한 번 더 절정에 올리고 나서야 안에 사정했다. 나는 엉덩이만 겨우 치켜든 채 그의 다리 사이에 늘어졌다. 신음도 제대로 못 지르고 사정도 못 하여 온몸이 성감에 절여진 것 같았다.

그때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몹시 놀라 엎드린 상태로 몸을 달달 떨었다. 아직 아래쪽은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중이었다. 혹여라도 집사가 들어올까 긴장하는 바람에 심장이 목구멍 밑까지 내려와 뛰어 댔다.

“랭던 공작님, 곧 숙소에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집사는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랭던 경은 내 안쪽에 박혀 있는 성기를 몇 번 더 흔들어서 정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낸 뒤 그의 것을 빼내 주었다. 떨리는 엉덩이 위에 그의 입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칭찬하는 입맞춤에도 예민해진 엉덩이는 부들부들 흔들리기만 했다.

“정액이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해요. 일으켜 줄 테니까.”

“저하….”

뒤에서 랭던 경이 나를 들어 올려 품에 앉혔다. 그는 내 어깨 너머로 타이에 묶여 빳빳해진 성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이어 약간 흥분한 듯한 숨소리와 함께 섬세한 손가락이 퉁퉁 부은 귀두를 어루만졌다.

“무척 아프겠군.”

“저하, 께서는… 제가 아파하는 걸 좋아하시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정말, 너무하십니다.”

울먹이며 항의하자 그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춰 주며 속삭였다.

“그 말이 맞아요. 미안합니다. 숙소까지만 참아 줘요.”

예전과 비교하면 한결 부드러워진 부탁이었다. 정중한 태도에 마음이 약해져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 경은 흘러내린 내 속옷과 바지를 끌어 올린 후 겉으로 티가 안 나게 옷을 정돈하고 셔츠와 조끼의 매무새를 잡아 주었다. 그가 프록코트까지 입혀 주고 나자 나는 제법 멀쩡한 외관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박히느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은 쉽게 수습이 되지 않았다. 결국 큰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러 가능한 한 눈을 많이 가렸다.

“티가 날 것 같습니다, 저하. 흣….”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옆에 있어요. 이렇게 예쁜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됩니다. 알았죠?”

“…네, 아….”

랭던 경은 사정감 때문에 차분히 있지 못하는 나를 달래다 기차가 멈추자 손수 문을 열었다. 나는 랭던 경에게 기댄 채 제일 먼저 기차에서 몸을 내렸다. 밤바람이 차가워 입김이 풀풀 새어 나오는데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숙소에 들어갔으면, 랭던 경이 사정감을 해소시켜 주었으면.

내 머릿속은 랭던 경의 손길에 대한 간절함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후, 기차에서 내린 샤를 대공이 랭던 경과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곧 내 쪽으로 다가왔다.

“랭던 경과 먼저 들어가시오. 멀미를 했다면서요.”

“네, 전하.”

그 이상은 목소리를 내어 대답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은 자연스럽게 나를 부축하며 샤를 대공에게 인사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하. 4시간 뒤에 뵙지요.”

“그래요, 랭던 경.”

나는 갖은 인내심으로 신음을 참으며 랭던 경에게 기대 기차역을 나섰다. 뒤에 머금고 있는 정액이 쏟아지지 않도록 뒤를 꽉 조일 때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성감이 일렁였다. 벌름대는 아래를 억지로 단속했다.

우리가 머물 곳은 도웨스 기차역 근처에 있는 저택으로 랭던 가문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방은 우아한 가구와 소품으로 고급스럽고 깨끗하게 치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하녀들이 잠자리 준비를 봐 줄 때까지 기다리며 한쪽에 서 있다가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랭던 경에게 매달렸다. 뺨이 터질 듯 뜨거웠다.

“저하….”

“침대에 엎드려.”

그가 턱 끝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코트와 재킷을 벗었다. 나는 스스로 얼른 바지 단추를 푼 뒤 무조건 그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올라 엎드렸다.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랭던 경은 뒤에서 아프게 부푼 내 성기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묶여 있는 타이를 풀어 주었다.

“이제 모아 둔 정액을 앞뒤로 싸면 됩니다. 손은 대지 말아요.”

“네, 저하…. 얼른… 부디, 무, 문질러 주세요.”

그야말로 내 입에서 나올 거라 상상도 못 해 본 치욕스러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랭던 경은 성기를 만져 주는 대신 벌어진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움직이며 다른 손으로 맨엉덩이를 내리쳤다. 성감이 고인 피부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어나 금세 눈 주변이 붉어졌다.

“아! 아, 아픕니다…. 흐읏… 아….”

오래도록 참은 탓인지 오히려 쉽게 사정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은 손가락을 세 개나 밀어 넣어서 내 안쪽에 쌓인 자신의 정액을 휘젓다가 빼냈다.

“가고 싶어서 애가 타겠지? 이제 내가 싸 놓은 정액을 내보내 봐요.”

나는 내 성기를 직접 문지르고 싶은 욕망을 참아 내며 밑에 힘을 주었다. 조급한 마음에 엎드린 채 다리 사이를 바라보며 내벽을 여러 번 조였다. 끈적한 액체가 아래로 밀려 나는 감각이 낯설었다.

“흣….”

주루룩, 하얀 정액이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내 것에서도 액체가 가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해방감이었다.

“아아… 아, 으응….”

랭던 경은 자신의 흔적으로 젖은 입구를 느리게 문지르다 다시 내 엉덩이를 갈겼다. 그 순간 고통과 함께 힘이 풀리며 성기에서 정액이 막을 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엉덩이를 맞으며 가고 있었다. 고통과 쾌감이 이상하게 뒤엉켰으나 젖은 아래를 만져 주는 손길과 엉덩이를 거칠게 갈기는 손길 아래 사정은 멈추지 않았다.

“아! 흐읏, 윽… 아파요… 아….”

“맞으면서도 잘 느끼고 싸는군. 그렇지? 로엘 그대의 몸이 이렇게 음란합니다.”

“그런… 흐으응… 아!”

두꺼운 손바닥이 내 엉덩이를 내려치는 고통 사이로 참고 참았던 정액이 다 흘러내렸다. 나는 시트를 움켜잡고 엎드린 채 성기에서 늘어지던 정액이 끊기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머릿속은 녹진해졌다. 몸을 닦아 주는 랭던 경의 손길에 긴장이 풀려 서럽게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시는 겁니까, 저하. 차라리 괴롭히겠다고 미리 경고를 해 주실 때가 나은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몇 대 갈긴 것 말고는 아프게 하지도 않았는데. 흰 피부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남아 아주 예쁩니다.”

“…예쁘게 봐 주시는 거야 감사하지만 대체 오늘 섹스의 어디가 다정한가요. 저는 긴장이 되고 심장이 벌렁거려 기차에서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예뻐해 주며 박아 줘도 난리군. 당신도 성미가 까다로워요.”

랭던 경이 더러워진 이불을 밀어 내고 깨끗한 이불을 덮어 주며 훌쩍이는 내 팔을 토닥였다. 잠깐 얼러 주었을 뿐인데 긴 기차 여행과 섹스에 지친 눈두덩에 잠이 눈사태처럼 몰려들었다. 잠기운이 쌓인 눈꺼풀이 순식간에 눈동자를 덮었다.

“불평 그만하고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요. 처음으로 탄 기차에 윌리엄과 베넷 부인도 초대하고 즐거운 저녁 아니었습니까. 물론 나는 그 후가 훨씬 맛있었지만.”

“너무… 배신, 감… 힘이 들… 불평, 못… 니다. 저아….”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너무 웅얼거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랭던 경은 가스등을 끄고 말없이 내 몸에 손을 올린 뒤 부드러이 나를 토닥였다. 반드시 불평하리라 다짐했던 말과 기억들이 어둠 뒤로 아득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나를 덮고, 본 적도 없는 바다 위로 의식이 햇볕처럼 부서지며 깊은 잠 속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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