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 리스트 3권
11. 화풀이
1월 6일, 오전 7시 30분, 포도나무 아래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
드디어 내일이 1월 6일이었다. 내가 서재의 빈 메모지 위에서 찾아낸 필기의 흔적과 수첩에서 발견한 일정이 같은 약속이라면 내일 랭던 경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아침 외출을 서두를 확률이 높았다. 괜히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어 깊게 잠들지 못하고 밤새 간간이 눈을 떴다.
새벽 4시쯤, 얕게 잠든 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찾아들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벌써 외출 준비를 마친 랭던 경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랭던 경.”
“저런, 일찍 깼군. 내가 준비하는 소리가 요란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목이 말라 잠시 깼어요.”
“물을 마시고 더 자요.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해가 뜰 때까지 잔다면 점심에야 일어날 수 있는걸요.”
“그건 그렇군. 겨울 해는 짧으니까.”
그는 귀중품을 넣어 두는 서랍에서 은색 회중시계 하나를 골라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른 시간이어서 나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외출하세요? 왕궁이나 철도 회사로 가시기엔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
“노스턴 기차역으로 갑니다. 지난번에 기차가 고장 났다고 한 일 기억해요? 그 기차에 또 말썽이 생겨서 기술자들과 운행 전에 살펴볼 예정이에요.”
“그렇군요. 노스턴 기차역은 꽤 멀죠. 날이 추운데 조심히 다녀오세요.”
랭던 경은 서두르면서도 내 뺨 위에 입술을 눌러 준 후에야 침실을 나섰다. 밖에서 하녀와 집사가 외출 시중을 드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실을 은은하게 밝힌 등을 모두 꺼 어둠으로 실루엣을 가리고, 어제 무리하느라 부은 발목을 끌며 창가로 다가갔다. 계단에서 넘어지며 충격을 받은 근육들이 시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힘차게 딛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정원의 길은 여러 갈래였다. 랭던 경이 탄 마차는 정원을 반 바퀴 돌아 남쪽 숲으로 뻗은 큰길에 진입했다. 마차가 선택한 방향은 그의 말과 달리 노스턴 기차역이 아니라 왕궁이나 센트럴 기차역에 갈 때 주로 사용하는 길이었다. 노스턴 기차역으로 가려면 정반대 편인 북쪽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택해야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로 다가가 등을 털썩 떨어트렸다. 이마에 손등을 올렸는데 열이 약간 있는지 이마가 따끈했다. 어제 몹시 무리해 몸이 다시 고단해진 모양이었다. 이틀째 잠도 거의 못 잤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피곤했다.
“…그 메모가 맞았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랭던 경이 내게 사소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기차가 자꾸 고장이 나서 급히 잡은 회의라면 한 달 전 수첩에 미리 일정을 적어 두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 옆에 쓰여 있던 ‘2M’은 역시 200만 골드를 의미하는 걸까.
그러나 약속이 적힌 수첩을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하찮은 사생활조차 비밀스럽게 다루는 사람들은 많았으니까. 그저 내게 기차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을 한 까닭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회사나 왕궁의 일이길 바랄 뿐이었다.
침대에 눈을 감고 누운 채 마음을 괴롭히는 상념에 잠겼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덥썩 틀어잡았다. 놀라서 몸을 벌떡 세웠는데 실내 가스등 빛을 등진 랭던 경이 침대 맡에 서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로엘, 낙상한 지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몸을 엉망으로 돌보면 어떡합니까. 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침대 밖에 다리를 내리고 잠들었어요?”
랭던 경이 어이없다는 투로 나무랐다. 나는 교양 없이 그 자세로 잠들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눌렀다.
“제가 자고 있었나요?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저택 1층 홀의 괘종시계가 시간을 알렸다. 묵직한 일곱 번의 종소리, 아침 7시였다.
‘수첩에 적힌 약속 시간은 분명 7시 30분이었는데 벌써 들어오다니. 내가 잘못 추측한 걸까.’
랭던 경은 조끼를 벗어 두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흰 셔츠 아래로 보이는 굵은 팔뚝과 근육을 물끄러미 살피다가 눈이 마주쳐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랭던 경은 담백하게 말했다.
“아침은 오랜만에 침실에서 같이 듭시다. 아침을 먹고 왕궁에 바로 가 봐야 해요.”
“네, 랭던 경. 근래에 무척 바쁘신 듯합니다.”
“나라에 여러 가지 시끄러운 일이 많아서요.”
“베버릭 왕국이 자꾸 사우스라인을 침략하는 일 때문인가요?”
“흠… 그건 노르크에게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다소 묘한 반응이었다. 타국이 우리나라를 계속 침범하는 일이 어떻게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걸까. 나는 그의 표정을 잠시 빤히 바라봤으나 놀랍도록 단정하기만 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널찍한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수프와 신선한 사슴 고기, 갓 구운 빵과 커피를 가볍게 즐기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창밖은 아직 캄캄했고 나무들은 저마다 머리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틀에 맺힌 작은 고드름은 물방울을 흘리다 이따금 아래로 떨어졌다.
“하인들에게 혹시 큰 고드름이 있는지 찾아 보라고 해야겠군.”
“그러게요. 오랜만에 날씨가 조금 풀렸나 봅니다. 큰 고드름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몹시 위험하겠어요.”
“그러니 로엘 씨도 최대한 저택 안에만 있어요. 정원에도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겨울에는 잠깐 사이에 사고가 나기 쉬우니까요.”
“외출 금지인가요?”
“그건 진즉부터 금지였습니다. 집에 가게 해 준 건 특별한 경우였어요. 신년이었으니까.”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저도 모르게 에메랄드 저택에 감금되어 있는 건가요?”
“들켰군.”
나는 커피가 쏟아질까 얼른 잔을 내려놓고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랭던 경은 같이 미소를 짓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농담이 아닙니다.”
“감금되는 장소가 에메랄드 저택이라면 저야 좋습니다. 저하께서 저를 굶기지는 않으시겠죠.”
나는 재치 있게 보이려 최대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린 랭던 경의 대답이 몹시 진지해서 그는 조금도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원한다면 호수도 더 만들어 주고 귀한 외국 동물과 꽃을 들여와 그대를 즐겁게 해 주겠습니다. 저택이 또 하나의 세상이 되어야 로엘 씨가 답답하지 않을 테니까요.”
랭던 경이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을 비운 뒤에야 마음을 괴롭히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하녀와 하인들의 눈을 피해 아픈 다리를 끌고 저택을 누벼야 했다. 어제 책에서 찾은 은빛 열쇠로 열 수 있는 물건이나 방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열쇠를 찾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빛 열쇠가 쓰이는 곳을 찾아내는 건 순전히 운에 달린 문제였다.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저택에서 쓰이는 열쇠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랭던 철도사의 금고 열쇠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지팡이를 짚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은 2층 끝에 있는 랭던 경의 비밀 서재였다. 붉은 머리 하녀 샬롯도 아직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장소, 랭던 경 외에 누구의 발길도 닿은 적이 없다는 공간.
“제발.”
이곳이 열리기만 한다면 더는 다른 열쇠를 찾아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떨리는 마음으로 열쇠를 밀어 넣었지만 구멍이 너무 커서 열쇠가 헛돌았다. 실망감에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서튼 남작님.”
등 뒤에서 갑자기 집사가 말을 걸었다.
“아!”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어깨가 위로 들렸다. 그러나 귀족다운 태도를 위해 오랜 세월 행동을 가다듬은 덕택인지 나는 금세 평정을 가장하고 어깨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침착하게 손가락을 접은 뒤 손안에 작은 열쇠를 단단히 감추고 몸을 돌려 집사를 태연히 쳐다봤다.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아래로 기울어진 회색 눈썹 밑에 자리한 작은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감돌았다. 집사는 랭던 경과 달리 나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말을 거시는 바람에 깜짝 놀랐네요.”
나는 태생부터 귀족이었음을 증명하듯 내 불찰을 집사의 탓으로 부드러이 돌렸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머릿속으로 재빨리 2층의 구조를 더듬었다.
“…침실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오랜만에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어서요. 음악실에 들어가려는데 문이 잠겨 있네요.”
집사는 등 뒤에서 다가온 탓에 내가 열쇠를 사용하는 장면은 목격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내 변명을 듣자마자 모으고 있던 회색 눈썹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집사가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인 뒤 손으로 반대편 복도를 가리켰다.
“아, 헷갈리신 모양입니다. 음악실은 침실에서 나오셔서 왼쪽 복도 편 끝에 있습니다,”
“왼쪽이었나요? 여태 오른쪽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1층 계단에서 2층으로 올라오셨을 때의 방향입니다.”
“저런. 저택을 소개받을 때 들은 방향을 찾았더니 이런 실수를 저질렀네요. 침실에서 나올 땐 당연히 반대편 방향이 될 텐데. 발목도 아픈 차에 발걸음만 낭비했네요.”
“크기가 작기는 하지만 이 옆 작은 살롱에도 피아노가 있습니다. 발목이 아프시니 살롱에서 치시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대단한 솜씨가 아니라 작은 피아노면 충분해요.”
자연스럽게 위기를 넘긴 듯해 집사의 등 뒤에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향을 착각했다는 변명이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이다. 집사를 따라가며 고개를 살짝 돌려 닫힌 비밀 서재 문을 바라보았다. 집사가 잠긴 서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한 느낌은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연기를 충실히 해내느라 점심때까지 괜히 피아노를 2시간이나 쳤다. 미열이 있어 손끝이 뜨거웠지만 집사에게 정말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노르크 음악의 어머니인 잉그리드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다른 소품곡들도 연주하고 나서야 뻐근한 손가락을 주무르며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한숨과 함께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살롱에도 잠긴 서랍이 있어 들어온 김에 열쇠를 꽂아 봤으나 열쇠가 워낙 작아 어느 구멍에서나 헛돌기만 했다. 집사에게 의심을 산 일이 마음에 짐이 되어 얼마 찾아 보지 않았는데도 몸이 피로했다. 나는 금세 지친 채로 살롱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는 순간 정체불명의 황금빛 털 뭉치가 지팡이를 쳤다. 휘청하며 쳐다본 곳에 레트리버 ‘새미’가 서 있었다. 새미는 나를 알아보고 꼬리를 치며 짖더니 앞발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이번엔 지팡이를 놓치며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지 않아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허리가 몹시 아팠다. 낙상과 섹스의 후유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새미의 탓으로 돌리긴 미안한 통증이었다.
“아파….”
고통이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굴러간 지팡이를 가리키며 새미에게 명령했다.
“새미, 지팡이 물어 와. 지팡이.”
새미는 내 손끝을 따라 달려가 지팡이를 입에 담고 신이 나서 뛰어왔다. 지팡이를 문 레트리버를 보니 어제 상아로 만든 추잡한 물건을 물고 랭던 경에게 기어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져 손등이 벌겋게 변했다. 나는 지팡이를 받아 들며 새미의 금빛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새미. 이런 건 강아지인 네가 하는 거야. 사람인 내가 아니라. 저하께서도 그걸 아셔야 할 텐데! 그렇지? 심부름을 잘했으니 간식을 줄까?”
간식 소리에 커다란 깃털 같은 꼬리가 활발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새미를 데리고 다시 작은 살롱으로 들어갔다. 아까 살롱을 뒤져 보다 피아노 옆에서 쿠키 단지를 발견했었기 때문이다. 쿠키를 꺼내 손바닥에 올리고 허리를 숙여 새미에게 먹여 주었다. 보드라운 금빛 털을 쓰다듬다가 우연히 머문 시선에 피아노 의자 밑에 달린 작은 열쇠 구멍이 들어왔다.
“설마.”
나는 급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주머니에 넣어 둔 은빛 열쇠를 꺼냈다. 애초에 열쇠가 너무 작아 일반적인 서랍이나 금고에 쓰이기 어려운 크기였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열쇠를 넣어 돌리는 순간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홈이 돌아갔다.
저택을 속속들이 아는 가족원이 아니라면 정말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피아노 의자 밑에 열쇠로 여닫을 수 있는 추가 공간이 있다니.
서랍은 겉에 손잡이가 없어 당겨 열기도 어려웠다. 세밀하게 구조를 관찰하고 나서야 의자 밑에 손톱으로 간신히 붙잡을 수 있는 납작한 홈의 존재를 발견했다. 어렵게 손톱을 세워 당기자 높이가 낮은 서랍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서신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편지구나.”
숨을 들이켜며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재빨리 문가로 다가갔다. 혹시 또 집사에게 들킬까 봐 문고리를 단단히 잠갔다. 열쇠가 맞는 곳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새미에게 칭찬의 뜻으로 쿠키를 하나 더 던져 주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재빠르게 넘겼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다양했지만 모든 편지는 ‘친애하는 테런스 랭던 경’ 앞으로 온 서신이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편지는 받은 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지 종이가 노르스름하게 바랬다. 세월의 흔적이었다.
열쇠를 비밀스럽게 보관한 이유가 있을 듯해 모든 서신을 최대한 꼼꼼히 훑었다. 중간에 있는 편지지 한 장이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일하게 손끝에 닿는 느낌이 빳빳한 종이로 이 중에선 가장 최근에 받은 서신으로 보였다.
나는 그 편지만을 챙겨 품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잠그고 살롱에 계속 머무르는 건 하녀나 집사의 주의를 끌 위험이 있었다. 새미를 먼저 내보내고 침실로 돌아가 불편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편지는 중간까지 평범한 내용이었으나 그 뒤부터 알 수 없는 말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지난번의 논쟁 후 사색을 반복하며 육지가 아니라 바다가 중요하다는 랭던 경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통감하였습니다. 저는 가끔 당신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잊어버립니다. 당신의 훌륭한 제안을 훗날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요?
랭던 경의 고견대로 저는 물고기를 먼저 잡으려 합니다. 밀려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밭을 일구던 자들도 땅을 버리고 일손이 필요한 바다로 나갈 것이며, 일손을 잃어버린 농부는 결국 농사를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랭던 경이 바라시는 대로 농부만을 항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농부가 죄 없는 참새를 굶주려 죽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참새가 쭉정이조차 쪼아 먹지 못하도록 밭에 서서 겁을 주었던, 저 무서운 허수아비들 또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참새들은 반드시 어부에게 새 약속의 증표로 허수아비의 목을 받아 내길 원할 것입니다. 어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여운 참새가 바다에서 온 자의 말을 무슨 수로 믿겠습니까?
그러니 테런스, 허수아비에게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다섯이면 됩니다.
나는 ‘테런스’라는 호칭을 보고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지위가 랭던 경보다 높을 거라고 확신했다. 노르크에서 랭던 경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왕족일까?
편지를 다시 이어 읽었다.
제가 생각한 허수아비의 리스트(List)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트, 몬테르, 프리타, 로열 워든, 하인시어스. 핏빛의 붉은 포도주 리스트가 참새의 목마름을 없애 줄 것입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충실한 친구, 하클리스(Harcles)로부터.
안트, 몬테르, 프리타, 로열 워든, 하인시어스…. 나는 이 허수아비의 이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포도주의 상표명이었다. 랭던 경은 포도주 리스트만 보고도 편지를 보낸 사람이 지목하는 이름을 눈치챘겠지만 나는 추리하기 무리였다.
편지 마지막에 쓰인 날짜는 무려 4년 전을 가리켰다. 더구나 하클리스라는 귀족 가문은 들어 본 적도 없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랭던 경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내가 사교계를 멀리하며 지냈어도 생소할 리 없는데.
나는 편지를 쥔 손을 힘없이 내려놓고 어느새 흐릿해진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허수아비를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을까, 아니면 허수아비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시… 아직도 허수아비를 없애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는 중인 걸까?’
앙상한 나뭇가지가 찬 바람에 꺾여 휘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려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급히 편지를 이불 밑에 숨기고 손바닥으로 이불의 주름을 정돈했다.
“서튼 남작님, 샬롯입니다. 편지가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샬롯은 문을 조심스레 닫고 밀봉된 서신 하나를 가져왔다. 다름 아닌 새뮤얼의 편지였다. 샬롯의 앞에서 봉랍을 뜯었다.
일이 진척된 사항을 직접 듣고 싶으니 오늘 만나지. 오후 2시에 센트럴 호텔 501호에서 기다리겠네. S.F.
내용을 확인한 뒤 샬롯에게 말했다.
“바로 외출할 테니 외부 마차를 불러 주세요. 다른 사람들에겐 산책을 가는 것으로 해 주시구요. 랭던 경께서 제가 외출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싫어하실 테니까요.”
“네, 남작님.”
“랭던 저하께서는 오늘 몇 시쯤 왕궁에서 돌아온다고 하시던가요?”
“저녁에 오신다고 기별이 온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샬롯을 내보낸 후 편지와 열쇠를 모두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새뮤얼의 서신을 태웠다.
목도리와 장갑으로 추위에 단단히 대비한 뒤, 마차가 준비된 곳까지 혼자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지난 며칠간 무리하여 당분간은 푹 쉴 계획이었는데. 새뮤얼의 연락으로 요양을 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져 밤에 다시 병세가 심해질까 무척 염려되었다.
마차 문을 열다 우연히 올려다본 흐린 하늘엔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새는 유려한 날개를 펼쳐 바람을 타고, 내 머리 위에 커다란 원을 반복해 그렸다. 랭던 경의 이야기에도 저 새가 그리는 그림처럼 반복되는 이름들이 있다.
‘포도주’와 ‘윌리엄’이다.
***
오랜만에 센트럴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연달아 혹독하게 징수된 성탄 세금과 신년 세금 때문인지 거리를 수놓던 인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도시엔 하인을 거느린 귀족들의 높은 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금의 의무를 진 평민들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졌다.
계단을 올라가려는 내 앞에 납작한 모자를 쓴 한 소년이 나타났다. 그 소년은 낱장 신문을 버거울 정도로 품에 가득 안고 큰 목소리로 호외를 외쳤다.
“호외요, 호외! 남동쪽 멜럼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호외를 샀다. 나도 로비 입구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다시 내려와 품에서 동전을 꺼내 신문을 얻었다. 선 자리에서 빠르게 호외를 읽었다.
과한 세금과 왕궁의 사치에 반발하는 폭동이 멜럼 지방에서 일어났으나 군인들이 금방 진압했다는 소식이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평민들의 정당한 봉기는 혁명이 되지 못하고 폭동으로 폄하되었다. 연루된 자들은 가혹하게 처벌될 거라는 호외의 마지막 문장이 내 심장을 고통스럽게 짓이겼다.
한숨을 쉬며 호외를 접고 고개를 들었는데 멀리서 뾰족이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대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나는 높은 첨탑에 서 있는 성인(聖人)들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잠시 평민들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평민 놈들.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계단을 내려오던 한 노신사가 화를 벌컥 내며 신분제에 반기를 드는 평민들을 비난했다. 그는 평생 끼니를 걸러 본 적이 없는 듯 배가 둥그렇게 나왔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빈곤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봉기를 원치 않으면 세금으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야죠.”
내가 나직이 말하자 그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세게 구기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그대는 귀족이 아닌가?”
노신사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남은 계단을 올라 로비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노르크 귀족에게 평민의 가난은 자연의 섭리와 다를 바 없었다.
낙상한 환자를 상대로 약속 장소를 5층으로 지정하는 건, 가파른 산꼭대기에서 만나자는 제안만큼이나 적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귀족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에 익숙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랭던 경은 무척 독특한 귀족이라 할 수 있었다. 평상시의 오만한 모습들은 물론 제외해야겠지만.
나는 겨우 계단을 올라 잠시 501호 앞에서 가빠 오는 숨을 골랐다. 묵직한 나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새뮤얼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누구시오?”
“서튼입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새뮤얼 프리데릭이 아니라 나의 형, 도미닉 서튼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장소에서 도미닉을 만나 무척 놀랐지만,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도미닉은 인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미닉의 외면에 가슴이 먹먹해져 나는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도미닉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해. 자리에 앉지 않고.”
“…네, 형님.”
나는 소파로 가서 앉으며 새뮤얼 프리데릭에게도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새뮤얼.”
“나야 늘 잘 지내지.”
새뮤얼과 도미닉은 한편인 것처럼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새뮤얼이 이른 새벽에 서튼가를 찾아왔던 일은 도미닉과 그가 미리 준비한 연극일 듯했다. 이전부터 둘이 이 일을 공모해서 나를 첩자로 끌어들인 게 아니라면 새뮤얼이 왜 당사자인 나를 제쳐 놓고 도미닉과 조건을 상의하고, 도미닉에게 대가를 지불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반대편 1인용 소파에 앉는 나를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센트럴 호텔로 오는 내내 서신으로만 연락하던 새뮤얼이 갑자기 만남을 요청한 까닭에 관해 고심했다. 아무래도 도미닉이 내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고 언질을 주었을 듯했다.
‘내가 랭던 경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리를 새뮤얼에게 한 걸까?’
나는 두 사람 몰래 땀이 나는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새뮤얼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랭던 경은 요즘 어떤가?”
“랭던 경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랭던 철도사와 왕궁을 출입하는 데 쓰시는 것 같습니다. 샤를 대공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도 듣지 못했어요.”
“비밀 장부는?”
“비밀 서재로 들어가는 열쇠까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내 화법에 익숙한 도미닉이 눈치를 채고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다른 열쇠는 찾았단 거냐?”
도미닉의 질문에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 찾았습니다. 피아노 의자의 열쇠였어요.”
“피아노 의자?”
이번엔 새뮤얼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되물었다. 나는 그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느꼈지만 표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
“네. 일부러 주문해서 만든 듯한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어요.”
“로엘, 피아노 의자에 공간이 있는 건 흔한 일 아닌가?”
“물론 의자 뚜껑을 열어 악보를 넣어 두는 일반적인 공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은 서랍은 그 밑에 추가로 달린 것이었습니다. 안에는 여러 서신이 들어 있었구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요.”
“…들이는 돈에 비해 너무 정보가 시원치 않은데.”
새뮤얼이 여송연을 꺼내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내비치자 도미닉이 옆에서 눈치를 보았다. 프리데릭가의 집사처럼 행동하는 도미닉의 모습이 부끄럽고 마음 아파 나는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보며 힘겹게 침을 넘겼다.
35만 골드, 그보다 더 되는 걸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시가가 새뮤얼의 손가락 사이를 오가며 재주를 넘었다. 여송연의 움직임이 멎자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새뮤얼의 검은 눈을 마주 봤다.
“로엘, 계속 이렇게 나를 실망시킨다면 결국 다른 첩자를 보내 미인계를 쓸 수밖에 없어. 그 말인즉슨 네가 랭던 경의 곁을 떠나 줘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거지.”
갑작스러운 새뮤얼의 협박에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어느새 미간이 좁아졌고 긴장한 손가락은 바지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도미닉의 시선이 내 눈썹과 손 위를 뱀처럼 기어갔다. 도미닉은 동생의 불안함을 쉽게 알아봤다. 그는 까끌해 보이는 턱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을 보탰다.
“새뮤얼은 지급한 돈을 내게서 받아 갈 생각은 없다더구나. 대가를 지불하기로 한 건 너라는 입장이야. 나도 네가 정보를 캐낼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그 돈을 받지 않았겠지.”
“하지만 형님, 저는 그 돈은 조금도….”
눈동자가 젖어 들었지만 울지 않고 참아 냈다. 나는 어떻게든 억울함을 호소해 보려 했으나 내가 랭던 경에게 마음이 있다는 귀띔을 미리 들었을 새뮤얼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로엘, 나는 자네가 가져올 정보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급한 거야.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거듭되면 랭던 경에겐 새로운 첩자를 붙이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로엘 자네를 치워 버려야겠지. 단순히 랭던 경의 곁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야. 그에게 눈먼 네가 내 일을 훼방을 놓을 수 있으니 몸뚱이를 온전하게 지켜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로써 형이 이틀도 지나지 않아 새뮤얼에게 내 감정을 모두 까발렸다는 가정은 사실이 되었다.
나를 겁박하는 새뮤얼의 표정은 태연했다. 언성을 높이거나 조롱하지 않는 사무적인 말투였는데 그래서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랭던 경을 위해 고의적으로 정보를 누락하거나 숨겨 온 것이 사실이므로 나는 새뮤얼의 협박에 제대로 항변할 수 없었다.
“네 발을 자를 수도 푸른 눈동자를 지져 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해. 방법이 뭐가 되었든 반드시 결말은 똑같을 거야. 도미닉은 그 결말을 내게서 들었네.”
나는 새뮤얼의 말에 아연실색하여 간신히 도미닉에게 눈을 돌렸다. 도미닉이 이제라도 나를 도와주길 바랐지만 형은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새뮤얼은 네가 몸을 팔아서 돈을 갚았으면 해.”
나는 잇속을 짓씹으며 눈물로 젖은 눈동자를 은폐하기 위해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나 손의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새뮤얼 프리데릭에게는 분명히 잔인한 귀족적 본성이 존재했다. 나를 창부로 만들려는 건 돈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본인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나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새뮤얼은 침묵을 지켰고, 도미닉은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다정히 말을 건넸다. 훈육이 끝나고 나를 달래 주는 때와 비슷한 말투였다.
“로엘, 그러니까 새뮤얼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네가 빠트리지 않고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한 거야.”
“…….”
“그렇지 않으면 로엘 네가 다시는 랭던 경을 볼 수 없게 만들 테니까.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자야 하는 건 물론이고. 알겠니? 너도 랭던 경을 다시 못 보는 건 원치 않겠지?”
랭던 경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가정만으로도 두려움을 참을 수 없어 가슴 속은 달이 없는 겨울밤처럼 깜깜해졌다. 억지로 누른 시린 눈물은 눈가에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겁에 질린 나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제대로 굴리려 노력했지만 새뮤얼의 협박에 급속히 얼어붙은 바퀴들은 주인의 바람대로 철로 위를 달리지 못했다.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겨우 생각을 가다듬고 입술을 열었다.
“…그,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어요. 펴, 편지가 쓰인 지도 족히 4년은 되어서 과연 지금 의미 있는 내용일지도 모르겠구요.”
내 말이 거짓임을 501호 객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은 것임을.
“편지를 보낸 사람 중에 하클리스라는 귀족이 있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이름인가요?”
나는 궁지에 몰렸지만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애썼다. 조금 전 놀라서 감추지 못했던 떨림을 억제하고 가능한 담담한 목소리로 새뮤얼에게 질문했다. 새뮤얼은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하클리스? 처음 듣는 가문이군. 정말 귀족이었나?”
“교양 있는 필체였고 단어도 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어요. 그 편지에 허수아비 다섯 명의 목을 쳐야겠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새뮤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고 들고만 있던 여송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혹시 이름이 있었나?”
“편지엔 장난스러운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안트, 몬테르, 프리타, 로열 워든, 하인시어스. 이 이름들은 아시다시피 모두 포도주 상표명이에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대로 테런스 랭던 경은….”
새뮤얼이 내 마지막 말을 가로채며 턱 끝을 거칠게 문질렀다.
“노르크에서 유명한 포도주 수집가지! 알 수가 없군. 그 포도주 리스트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말 포도주 얘기를 나눈 것인지. 허수아비의 목을 친다니 말이야. 만약 포도주 상표를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면 하클리스라는 사람은 귀족의 말투를 흉내 내는 포도주 장수겠군. 이름이 여럿인데 정확히 외운 것은 맞나?”
이 질문에는 나 대신 도미닉이 답했다.
“로엘은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외운 건 좀처럼 잊지 않지. 웬만한 문장은 한 번만 보면 기억한다네.”
편지의 맥락상 하클리스가 포도주 장수일 리 없었지만 새뮤얼과 도미닉은 내가 알려 주는 정보 이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새뮤얼이 잘못 이해한 부분을 굳이 고쳐 주지 않는 것이 내가 랭던 경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준비된 펜을 들어 잉크에 푹 적셨다. 새뮤얼에게 포도주 리스트를 적어 주면서 랭던 경을 위해 덧붙였다.
“얼마 전에 에메랄드 저택에서 1765년산 하인시어스 포도주를 마셨어요.”
도미닉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 낸 뒤 다시 고개를 숙여 포도주 리스트를 마저 작성했다.
도미닉은 역시 나를 너무 잘 안다. 내게 몹시 나쁜 쪽으로.
랭던 경처럼 내 기분과 몸 상태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도미닉이 눈치채지 않길 바라는 불리한 정보만을 가로챘다. 도미닉은 방금 전 내가 덧붙인 소리가 랭던 경을 위한 변명임을 아는 것이다. 펜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잉크가 번졌다.
허수아비의 이름이라 지칭된 포도주 리스트.
안트, 몬테르, 프리타, 로열 워든, 하인시어스.
4년 전에 랭던 경 앞으로 도착한 편지이며 ‘허수아비’라는 단어는 다른 서신에선 발견되지 않았음. 보낸 사람의 이름은 하클리스(Harkles)였음.
나는 메모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번 더 랭던 경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하클리스(Harcles)의 이름 철자를 ‘c’에서 ‘k’로 바꿔 적은 것이다.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혹시라도 새뮤얼을 방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몰랐다. 눈치 빠른 도미닉 밑에서 자란 탓에 나도 조심성 하나만큼은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메모를 새뮤얼에게 건네며 그의 협박에 일그러진 마지막 자존심을 세웠다.
“이제 제가 에메랄드 저택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겠죠? 오늘 발견한 편지라 막 서신을 쓰려던 참이었어요.”
“로엘, 매번 새뮤얼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도미닉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새뮤얼은 내가 새로 전해 준 정보에 매우 만족한 듯 탁자에 올려놨던 여송연을 입에 다시 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성냥을 그었다. 막대 끝에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괜찮아, 새뮤얼. 드디어 오늘 로엘이 내게 자신이 누구 편인지 확실히 보여 준 것 같군. 내가 첩자를 정말 잘 선택했지. 프리데릭 삼촌이 보낸 첩자들은 이 정보의 반의반도 가져온 사람이 없거든.”
새뮤얼은 여송연에 불을 골고루 붙이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는 로엘이 혹시 다른 마음을 먹을까 싶어 거칠게 말했네만 사실 요즘 자유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매우 뜸해.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걱정한 건지도 모르겠어. 계속 6연발 총이 밀거래되더니 갑자기 수면 위로 드러나는 무기의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야.”
새뮤얼이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새뮤얼 프리데릭은 모른다.
본래 태풍이 불기 직전의 바다가 가장 고요하며, 꺼져 가는 불씨를 스치는 미풍이 제일 위험한 법이다. 떨어진 불씨를 방심하면 몇 해를 공들여 지은 농작물이 다 타서 사라질 때까지 불길은 주저하지 않고 들판을 질주한다.
그는 여송연을 뻐끔뻐끔 빤 뒤 내게도 흡연을 권했으나 시간이 없어 바로 거절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지팡이를 챙기며 새뮤얼에게 물었다.
“이제 그만 가 봐도 될까요?”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왜 이리 서둘러?”
“랭던 경 몰래 외출한 것이어서요.”
내 말에 새뮤얼이 도미닉과 눈을 맞추며 키득키득 품위 없이 웃었다. 나를 두고 둘이서 무슨 농담이라도 하는 것인지, 가벼운 웃음소리 뒤엔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음험한 생각들이 불순물처럼 떠돌았다.
새뮤얼이 평소처럼 능글거렸다.
“그이가 생각보다 집착기가 심한 모양이군. 랭던 경이 잘해 주는 모양이지?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로엘 네 얼굴에서 색기가 낭창낭창 흐르는군.”
“무슨 들은 얘기라도 있으신가요?”
나는 도미닉과 새뮤얼에게 더는 기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까보다 훨씬 태연하게 반응했다. 도미닉은 맨 처음엔 ‘내 동생’에게 그러지 말라며 새뮤얼을 나무라더니 이제는 나를 감싸 주려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그것이 이미 짓밟힌 줄 알았던 내 마음을 한 번 더 짓이겼다. 새뮤얼은 내 무뚝뚝한 반응에도 흥미를 잃지 않고 이죽이죽 웃으며 찢어진 눈꼬리를 구부렸다.
“그 침실에서 네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고 흘러나온다더군. 내가 준 도구들은 잘 사용하고 있어? 목덜미에도 온통 치아 자국이야. 그이가 어지간히 물고 씹는 모양이지?”
“…이건….”
실내에서까지 목도리를 하고 있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드러낸 섹스의 흔적이었다. 나는 섹스에 서툰 만큼 그 이상 새뮤얼의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바람에 되받아치지 못한 조롱은 화살이 되어 다시 내게로 날아왔다. 입술을 꾹 다물고 목도리로 랭던 경의 흔적을 가린 뒤 한 손으로 프록코트의 단추를 채웠다.
“좋은 오후 되세요, 새뮤얼. 형님도요.”
문을 닫고 나오는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뮤얼이 나를 희롱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었을 때 자존심을 굽히고 그냥 나오지 못한 내 치기 어린 마음이 후회스러웠다.
난간을 짚고 내려오며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혼자 슬픔을 추스르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내 가슴속에 욱여넣은 고통이 너무 많아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에서 발목이 아파 주저앉을 뻔했다. 비틀거리는 나를 호텔 로비의 직원이 부축했다. 랭던 경의 말대로 한동안 움직임을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신년에 몸이 많이 나았다고 방심하여 긴 시간 마차를 타고 도미닉을 보러 간 일이 실수였다. 가서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뺨을 맞으며 훈육을 받았는데 아직도 나는 내심으로 하나뿐인 혈육을 붙들고 있나 보다. 새뮤얼보다 도미닉의 비웃음이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고통만 남은 외출을 마치고 에메랄드 저택의 숲길에 몰래 마차를 세웠다. 마부에게 삯을 주고 지팡이를 짚으며 외진 곳에서 힘겹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숲에 쌓여 있는 눈이 흩날려 코트에 얼음 조각이 촘촘히 박혔다.
눈밭을 한참이나 가로지른 후에야 광장처럼 넓은 정원에 도착했는데 하인들이 저택 밖에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는 하인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나요?”
“서튼 남작님을… 남작님!”
하인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을 하자마자 제자리에서 뛰며 무척 놀랐다. 그러더니 저택을 향해 몸을 돌리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팔을 흔들었다.
“남작님 여기 계십니다!”
나는 하인의 반응이 당황스러워 쭈뼛거리다 목도리를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거위가 몸을 숨기려 얼굴만 짚단에 밀어 넣는 것처럼 소용없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낯익은 그 하인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했다.
“홀 앞에 서 있는 마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남작님.”
“알겠어요.”
하인의 말대로 저택 바로 앞에는 랭던 가문의 마차가 서 있었다. 그 마차는 곧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대체 무슨 소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넓은 정원을 걸어서 가로지르는 일이 매우 걱정되던 차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인이 마차 문을 열어 주자마자 고마운 마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안에 랭던 경이 앉아 있었다.
“저하.”
랭던 경은 표정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그 얼굴에서 화난 기색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의 주변을 떠도는 냉기에 잠시 주춤하다 마차에 올랐다.
“허락도 없이 어딜 다녀왔어요?”
“잠시 산책을….”
나는 머뭇대며 그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랭던 경은 잠시 내 눈을 빤히 보다가 시선을 내리며 옷차림을 살폈다. 햇볕을 받아 빛나는 녹색 눈이 목도리와 장갑에 머물렀다.
‘추위에 잘 대비하고 나갔는지 점검하는 걸까?’
다행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는 듯 신경질적인 눈매가 나를 떠나 창가로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멈춰 선 뒤에도 랭던 경은 바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창밖만 쳐다봤다. 나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저하… 안 내리시나요?”
“내릴 줄 몰라 안 내리겠어요? 로엘,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봐요. 어떻게 된 사람이 내 기분이 상한 걸 알면서 변명조차 안 합니까?”
그의 반응이 당황스러워 바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여태까지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변명은 늘 상대방을 더 화나게 만들고, 내게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다, 답답하여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그래? 내게 허락은 구했어요?”
“…예?”
“내게 허락받았는지 물었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했을 것 같아요?”
“…….”
“벌로 오늘 밤까지 침대에 묶어 두겠습니다. 로엘 당신 몸 상태가 어떤지는 상관없어요. 내 말이 농담인 줄 아는 것 같으니 버릇을 고쳐 놔야겠소.”
도미닉과 새뮤얼에게 조롱을 당하고 온 터라 랭던 경의 쌀쌀한 반응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서글픔을 억누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참느라 씰룩거리는 입가에 랭던 경의 시선이 머물렀다.
눈빛에서 분노가 잠시 사라졌다. 그는 대신 욕정을 억누르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한 번 쓰다듬고 마차 문을 열었다.
며칠간 무리한 덕분에 발목이 부어올랐으나 돌아다녀서 아프다는 사실이 랭던 경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것 같아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땅에 발을 붙였다. 도미닉과 레트리버 때문에 이틀을 연달아 넘어져 등과 허리는 막 낙상했을 때처럼 뼈가 어긋나는 감각마저 들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단단한 팔뚝이 어깨 밑으로 들어왔다. 부축해 주는 손길에 기대감을 안고 조심스레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작게 속삭였으나 그의 눈은 차갑게 식은 채 서쪽 홀을 향해 있었다. 잘못한 줄 알면서도 차가운 외면에 눈가엔 서러움이 몽글몽글 고였다.
계단에 도착해서 보는 눈이 줄어들자 랭던 경이 나를 번쩍 안아 들고 2층 침실로 올라갔다. 나는 이제 익숙하게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맨살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을 위안 삼아 서러움을 추슬렀다. 따뜻한 품속에서 간신히 용기를 얻어 물었다.
“죄송해요. 답답하여 잠시 산책을…. 오래 찾으셨어요?”
랭던 경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 질문을 무시했다. 배 속에 긴장감을 넘어서는 아릿한 아픔이 찾아들었다.
침실에는 이미 퍼렐 의원이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퍼렐 의원에게도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행동에 대한 따끔한 주의를 들었다. 촉진을 받다가 등에 통증이 심해졌다는 사실까지 들켜 레트리버 ‘새미’ 때문에 넘어졌다는 사실 또한 털어놓아야 했다. 도미닉이 밀쳤던 일은 당연히 함구했다.
퍼렐 의원이 나간 뒤에 랭던 경이 하녀를 들이지 않고 친히 잠옷을 찾아서 내 쪽으로 던졌다. 랭던 경이 손수 옷을 챙겨 주다니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나, 던지는 걸 보면 화가 나서 곱게 챙겨 주긴 싫은 듯했다. 얼결에 날아온 옷을 받아 들고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어요.”
“여기서요?”
“내 앞에서 갈아입어요.”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셔츠 단추를 풀었다. 랭던 경의 눈길이 단추를 푸는 손가락 위를 훑었다. 목덜미까지 덥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잠옷을 다 입자마자 랭던 경은 서랍에서 가죽으로 된 족쇄를 꺼냈다. 오늘은 말뿐인 겁박이 아니었다. 정말 나를 묶으려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 떨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차가워지는 몸을 웅크리며 랭던 경을 올려다봤다.
“저하, 왜, 왜 그러세요.”
나는 늘 그렇듯 훈육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행위에 쉽게 겁을 먹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랭던 경에게 빌었다.
“자, 잘못했어요.”
“그래서 벌을 주는 거요.”
말문을 막는 대답이었다. 랭던 경은 떨리는 내 두 발목에 가죽 족쇄를 채우고 끝을 침대 양쪽 기둥에 각각 묶은 뒤 손목에도 족쇄를 채웠다.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손목에 채워진 족쇄의 가죽 줄에 걸렸다. 나는 양손을 가슴 한가운데 모은 채 그가 사지를 다 묶지 못하도록 애썼다.
“저하, 팔다리를 모두 무, 묶이는 건 무섭습니다. 부, 부디 손목이라도 매지 말아 주세요.”
“하기 싫으니까 벌이 되는 겁니다. 더 혼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요.”
“저하, 제발…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그러나 랭던 경은 가차 없이 줄을 잡아당겼다. 가슴 위에 모으고 있던 손이 강제로 머리 위까지 차례차례 딸려 갔다. 머리맡 침대 기둥엔 단단히 끈이 감겼다.
팔다리를 다 기둥 쪽으로 뻗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된 나는 겁이 나서 흔들리는 속눈썹을 깜빡대며 랭던 경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마차에서 그를 만났을 때 좀 더 사근사근하게 잘못을 빌었다면 이런 벌을 내리지 않았을까? 도미닉이 평소 말한 대로 내가 좀 더 제대로 빌었다면….
“랭던 저하, 정원에 산책을 나가는 일도 이렇게 싫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부디,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반드시 허, 허락을 받고 나가겠습니다.”
“나는 내가 예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걸 싫어해요. 만약 로엘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요. 침실에 없는 로엘 씨가 정원을 포함한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겠지. 그런 경우엔 산책을 나갔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
“하지만 발목이 아픈 로엘 씨가 없다면 나는 그대가 2층 어딘가에 있다고 믿을 겁니다. 발목이 아픈데 무리해서 1층까지 내려가는 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현재 당신에게 허용된 곳은 2층이 전부요. 이해했어요?”
“네, 저하. 무슨 말씀인지 이, 이해했습니다. 1층으로 가는 일도 허락을 받길 원하신다는 걸….”
“정말 이해했다면 내 화가 풀릴 때까지 벌을 받아요. 내가 제대로 무섭게 경고를 하지 않은 듯해 매는 들지 않겠습니다.”
랭던 경이 화를 삼키는 것이 보여 나는 결국 싫은 내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지가 침대 기둥에 묶인 채 누워 있는 일이 몹시 비참하였지만, 그저 랭던 경의 눈치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이 침대 위에서 거듭되었던 일련의 거친 섹스가 나를 이미 길들인 모양이었다. 슬픔에 메는 목구멍을 움직여 간신히 물었다.
“언제까지… 묶여 있어야 할지….”
“자정까지요.”
그렇게 오래….
결국 비어져 나온 눈물이 눈가를 뜨겁게 적시며 귓바퀴 안으로 떨어졌다. 코끝이 아릿했다. 랭던 경은 가까이 다가와 내 젖은 눈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물이 지나간 자리 위로 입을 맞췄다.
“로엘 씨, 부디 그렇게 어여쁘게 울지 말아요. 지금 그렇게 우는 건 당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래쪽에 있는 눈물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푸른 눈동자를 맑게 적시는 눈물샘 역시 좋아해요.”
“저는, 흑… 제가 저택의 영지 내에 있기만 하면 저하께서 화를 내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대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봐주기엔 내가 침실에 있으라는 얘기를 너무 여러 번 했어요. 내 마음 같아서는 그대의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싶은데 그나마 타협 지점을 찾은 거예요.”
랭던 경은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잠시 멈칫했다. 그는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더 숙이며 귓가에 다시 냉랭해진 음성을 불어 넣었다.
“서튼 씨, 하나만 묻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해요.”
“네, 네.”
“손님 앞에서 이렇게 묶인 적이 있어요? 겉으로 울고는 있지만 혹시 이 자세가 서튼 씨에게 벌이 아니라 상이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낯설어진 ‘서튼 씨’라는 호칭 역시 불안감을 고조시키며 긴장한 머릿속을 더 아둔해지게 하는 데 일조했다.
‘어떡하지… 무서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정말 모르겠어.’
내 거짓말을 유지하면서 랭던 경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진실과 거짓을 얼기설기 엮었다. 말하면서도 현명한 대답이라는 확신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묶인 적은 있지만 사, 상은 아닙니다. 벌이에요.”
“…기분이 정말 더럽군.”
내가 급히 엮어 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랭던 경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묶인 적이 있다고 대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랭던 경은 내가 창부라고 생각할 텐데 내 말의 어떤 점이 그렇게까지 랭던 경의 기분을 더럽힌 걸까….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발가락을 꼭 접은 순간 랭던 경의 눈이 내 발끝에 머물렀다. 겁이 난다는 사실을 들켜 버렸지만 무서워서 발가락을 펼 수가 없었다.
그는 커튼을 쳐 침실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품에서 짙은 색의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덮었다. 커튼을 친 데다 눈을 덮은 손수건의 직물이 촘촘해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변했다. 시야가 차단되자 청각이 예민해졌는지 두려움에 떨리는 내 숨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크게 들렸다.
“아, 하아….”
“이건 내 더러운 기분에 대한 벌. 떨어트리면 시간을 더 늘리겠습니다.”
“…네, 저하.”
“…미치겠군.”
랭던 경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무언가 삐걱,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하, 저하…. 나, 나가셨어요?”
조용히 기다려 봐도 돌아오는 건 깜깜한 침묵뿐이었다.
“흐윽, 윽… 저하, 흡….”
팔다리가 침대에 묶인 채 방치된 서러움과 혼자 어둠 속에 남겨진 두려움이 뒤섞여 눈물이 터져 나왔다. 랭던 경의 목소리가 들리고 앞이 보일 때만 해도 어떻게든 묶여 있는 벌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혼자 너른 침실에 버려지자 참기 어려운 고독이 나를 삼켰다.
혼자 산책을 간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싶다가도, 새뮤얼을 만나러 호텔에 다녀온 사실을 숨긴 죄책감이 내 모든 변명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랭던 경을 무조건 원망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호텔에서부터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상황이 쉼 없이 이어지다 보니 내 미약한 영혼은 가혹한 하루를 견디기 버거워했다.
“저하… 래, 랭던 저하… 흐윽….”
그치지 못하고 서럽게 흘러나오는 눈물이 손수건을 적셨다. 이윽고 눈물에 흠뻑 젖어 버린 천이 눈가에 달라붙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두렵기도 하고 갑갑하여 족쇄에 묶인 손목과 발목을 아프도록 흔들고 계속 랭던 경을 불렀다.
“…랭, 랭던 경… 묶여 있어도 좋으니 저를 호, 혼자 두지 마세요. 저하….”
분명히 부어 있는 발목이 아파야 했지만 아무리 발을 흔들어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잠식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아버지의 잘린 머리가 나타나 나를 공포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듯했다.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숨소리와 쉬어 버린 목소리.
다시 밀려드는 공포심에 지칠 때까지 손목과 발목을 버둥댔지만 결국 벗어나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워서 생각만으로 가죽 줄을 끊어 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도살장에 끌려온 양처럼 침대에 얌전히 누워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시계도, 창문도 보이질 않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저하… 너, 너무 무서워요. 저하….”
어둠 속에 사지가 묶인 채 누워 보내는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눈물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귀족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도미닉의 말을 지키고 싶었으나 랭던 경 앞에서는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고 심약했다.
“랭던 저하! 저하… 어, 얼굴을 보여 주세요.”
나는 목이 쉬도록 랭던 경을 부르다가 포기하고, 다시 부르다가 포기하길 반복했다. 손목을 흔들다가 또 눈물이 뜨겁게 비어져 나와 손수건과 뺨을 적셨다. 겁을 먹고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천 조각을 데웠다. 공포에 질린 머릿속을 아버지의 머리가 찾아오려 했다.
“저하, 잘못했어요. 매, 매를 맞을게요, 저하…. 제발, 테런스….”
갑자기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이 치워졌다.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랭던 경의 모습이 보였다. 뺨을 적시는 눈물이 더욱 뜨거워졌다. 내내 애타게 부르짖으며 찾았던 랭던 경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내 쪽으로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테런스….”
나는 랭던 경이 내 쪽으로 더 몸을 굽혀 나를 달래 주길 바랐으나 그는 애매한 위치에서 내려다볼 뿐,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목과 등에 힘을 주고 그를 향해 최대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아슬아슬 그에게 닿지 못했다.
나는 랭던 경의 체온을 찾아 혀를 뾰족하게 내밀었다. 닿을 듯 닿지 않던 그의 입술을 혀끝으로 느리게 핥고, 어깨가 빠질 정도로 가슴을 내밀어 겨우 내 코끝을 그의 코끝에 가져갔다. 나는 맞닿은 코끝을 비비며 애원했다.
“저하, 자정이 아니라 밤새 묶여 있어도 좋으니 제 곁에만 있어 주세요. 어둠 속에 저를 버려두고 나가지 마세요. 제발… 저하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로엘, 나는 침실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대가 괴로워하며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어요.”
랭던 경은 애원하는 내 쪽으로 얼굴을 좀 더 숙여 주었다. 나는 계속 머리를 들어 올린 채 그의 입술을 핥고, 내 입술을 비비고, 젖은 뺨을 그의 뺨에 문지르며 매달렸다. 묶인 팔다리가 뻐근하고 불편했으나 상관없었다.
랭던 경은 말없이 한참이나 내 애원을 들었을 뿐, 어떤 약속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애가 탔다.
랭던 경은 내가 혀끝으로 그를 더듬는 동안 몇 번이나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로엘, 발목이 아프지는 않습니까? 퉁퉁 부어 있는데 계속 묶인 발을 흔들며 괴로워했잖아요. 붕대로 감아 놨다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저하께서 침실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저에겐 훨씬 다행인걸요. 저하… 부디 나가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테런스….”
나는 지칠 때까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핥다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쓰러지듯 침대에 뒷머리를 대고 누웠다. 침실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내내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져 있던 내 눈은 어떻게든 미세한 빛을 찾아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정원의 가스등 불빛이 랭던 경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랭던 경의 얼굴 중앙엔 흐릿한 빛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폭의 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그 옅은 불빛은 예상과 달리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을 비췄다. 랭던 경은 먼저 부은 발목의 족쇄부터 풀어 주었다.
나는 억지로 몇 시간이나 뻗고 있던 무릎을 천천히 구부려 세웠다. 굳은 근육이 접히는 게 아파 고통스러운 숨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족쇄가 한쪽이라도 풀렸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두려움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나를 외롭게 내버려 둔 랭던 경을 향한 원망이 빠르게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공포가 비운 자리를 서글픈 원망이 서둘러 차지했다. 자꾸만 눈물이 복받쳤으나 더는 울 기운조차 없었다.
부은 발목 위엔 랭던 경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닿았다. 다정한 손길은 내 아픈 발목을 쓸고 저린 종아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나를 평소처럼 위로했으나 내 심정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 그가 내게 한 일은 다른 때와 분명히 본질을 달리했다. 그는 여태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고 나를 이토록 외로운 고통에 빠트린 적은 없었다. 섹스를 하기 전에 엉덩이에 매를 맞으며 혼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커다란 손에 잡혀 있는 다리를 슬그머니 빼내며 눈물로 젖은 뺨을 창가로 돌렸다. 눈꼬리 끝에 나를 따라오는 그의 시선이 보였다.
“로엘.”
저음의 음성이 잠시 멈칫한 뒤 물었다.
“화났어요?”
“…….”
“하긴, 화가 났겠지. 그럴 만해요.”
랭던 경은 남은 족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그를 외면하는 내 젖은 속눈썹을 핥고 부은 눈두덩과 뺨 여기저기에 입술을 눌렀다. 나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저미듯 누르며 작은 위로에 마음을 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저 별 의미 없을 입맞춤과 손길에도 내 연약한 영혼은 요동쳤다. 랭던 경을 만나고, 그가 이렇게 내 영혼을 뒤흔들 때마다 나는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외로움의 깊이를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고서는 나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기둥에 묶인 손목과 발목이 다 놓여나자마자 침대에서 지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수건에 가려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진 눈은 정원에서 들어오는 옅은 빛에 의지해 손목에 남은 가죽의 흔적을 읽어 냈다. 혼자 남은 공포로 발버둥 친 까닭에 손목에는 작은 생채기들이 나 있었다.
“로엘 씨.”
랭던 경이 내 손을 잡으려 했으나 나는 다시 손가락을 빼내며 고개를 창가 쪽으로 더 돌렸다.
“이제 더는 무섭지도 않고 충분히 괜찮아졌습니다. 혼자 쉬게 해 주세요, 저하. 이제 묶여 있지 않으니 혼자 있을 수 있습니다.”
“로엘, 그대에게 잘못을 빌 수 있도록 옆에 있게 해 줘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하께 화가 난 게 아니라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제가 잘못해서 받은 벌인데 어째서 화가 나겠어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차라리 화를 내요. 내가 당신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잖아요.”
“저는 어차피 저하에겐 이러나저러나 부족한 사람인걸요. 랭던 경과 말다툼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만큼 식견이 높은 사람도 아니고 풍비박산 난 서튼가의 둘째일 뿐이니…. 잘못해서 혼내시면 혼날 뿐이에요. 그러니 저하께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나는 랭던 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아무런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들을 내키는 대로 쏟아 냈다. 랭던 경이 일전에 꿰뚫어 봤던 대로 영혼 없이 떠들며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내 저급한 공격성이었다. 그는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은 내게 이런 식으로 혼날 일은 아니라는 것, 로엘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이런 식으로 혼날 일은 아니라’는 소리에 갑자기 화가 삐죽 솟구쳤다. 아랫입술을 힘껏 물며 혀 밑에 요동치는 목소리를 가두고, 내 손을 잡으려는 굵은 손가락들을 밀어냈다. 차디찬 거부에 랭던 경의 굵직한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곧 묵직한 한숨이 내려앉았다. 랭던 경은 괴로운 듯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믿기 힘든 소리에 내 동공이 둥그렇게 열렸다. 랭던 경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로엘 그대에게 자제력을 잃고 화풀이를 했어요.”
나는 손발이 풀려난 뒤 처음으로 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제대로 마주 보았다. 랭던 경의 콧등엔 여전히 커튼 틈이 만들어 낸 흐릿한 빛줄기가 지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감정, 눈꺼풀과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이 낱낱이 보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오늘 잘못한 사람은 제가 아닌 랭던 경이라는 건가요?”
“그래요. 내가 일방적으로 로엘 씨에게 화풀이를 한 거니까 오늘 잘못한 사람은 나요.”
“…….”
“내 기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당신을 침대에 묶어 두고 눈을 가려 가혹하게 혼을 냈습니다. 그리고 저열하게도 밖으로 나간 척 어둠 속에 앉아 로엘 그대가 울면서 나를 찾고, 용서를 구하며 비는 모습을 샅샅이 봤어요. 그렇게 폭군 노릇을 했소.”
“저하께서 침실에서만 하시겠다 말씀했던 폭군의 행동이셨죠. 침실이란 게, 공간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라 행위를 비유하신 거였을 텐데요.”
어느새 내 목소리는 지나친 흥분으로 떨려 나왔고 조금 전보다 반 옥타브는 올라가 있었다. 화를 내며 잘못을 따지는, 누가 들어도 충분히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같은 귀족이라 한들 용납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랭던 경은 너그럽게도 말투를 지적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잘못을 인정했다.
“맞습니다. 내가 약속을 어겼어요.”
“지금까지 중 가장 잔인하셨는데, 저하께서 제게 주신 벌은 섹스를 위한 것이 아니었잖아요.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
“제발 저를 혼자 있게 해 주세요.”
괴로움에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랭던 경이 다시 위로하듯 손을 잡으려 해 나는 아까와 똑같이 그를 거절했다. 랭던 경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모으며 속삭였다.
“로엘, 곁에 있을 시간을 주면 내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 혼자 있겠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제발, 저하, 혼자 있게 해 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상대가 내게 준 상처를 솔직히 인정했을 때 오히려 화를 참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랭던 경이 나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자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점점 흔들리고 높아졌다. 돌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빗줄기처럼 통제되지 않았다.
“저는, 저하께 혼자 있고 싶다는 부탁도 못 드리나요? 제가 감히 창부 주제에 너무 큰 바람을 말씀드린 건가요?”
“로엘, 흥분하지 말아요. 내가 그대를 무시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잖습니까. 나는 그저 내가 상처 입힌 당신을 혼자 두는 건 걱정이 되어….”
“저하께서 저를 무시하지 않으신다구요? 제가 걱정이 되세요?”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틀어쥔 채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 간청대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넘어갔을 텐데. 그에게 지금처럼 초라한 나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울며 소리 지르지도 않았을 텐데.
떨리는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가슴속에 진 뜨거운 응어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범람을 막을 힘이 없었다.
“저하께서야 말로 부디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오늘 제가 정말 산책을 다녀온 행동에 대해서만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그런 벌을 주신 건가요? 몇 주 전에 제게 화를 내며 나가셨을 때는요. 그때도 제가 저하의 과거를 의식하며 밀어 낸 행동에 대해서만 순수하게 화가 나셨었나요? 제가 당신을 창부의 손님이라 여기고 거절한 걸까 봐 불쾌한 마음이 드셨던 건 아니구요?”
나는 울고 싶지도, 솔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내 얼굴은 어둠 속에서 족쇄를 차고 묶여 있을 때처럼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끊어질 듯 나약한 목소리는 마음대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뛰쳐나왔다.
이불을 틀어쥔 손과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잘못하면 심장이 이대로 멎어 버릴 것만 같아서 왼쪽 가슴팍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창부여서, 그래서 더 화가 나시는 거잖아요. 제가 창부여서, 제가…. 저하께서는 제 행동과 말실수 뒤에서 자꾸만 창부의 흔적을 보시니까….”
나는 이내 머리를 깊이 숙이고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여전히, 저는 창부가 아니라는 그 말 한마디를 랭던 경에게 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의 기척과 함께 침대가 밑으로 약간 내려갔다. 그는 내 옆으로 올라앉아 머리를 묻고 우는 내 몸을 덮듯이 안았다. 위로 동그랗게 솟은 등 뒤에 랭던 경의 가슴팍이 닿았다. 땀과 눈물로 습해진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 그의 음성이 머릿속을 나직이 파고들었다.
“미안해요, 로엘…. 내가 잘못했습니다.”
“흐윽….”
“나 역시 어리석은 영혼이긴 마찬가지요. 그대의 과거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을 나 혼자 독점하지 못했다는… 이미 실패한 욕망이 계속 내 화를 부추겨요. 그대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그대를 보고 창부라 생각하는 일도 싫고, 내 스스로 당신이 창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도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당신이 산책을 다녀온 일과 이미 팔다리를 묶여 본 적이 있다는 소리에 지나치게 화를 냈습니다….”
랭던 경은 나직이 사과했다. 그의 태도엔 꾸밈이 없었고 음성은 진실했다. 진심에는 다른 진심을 끄집어내는 힘이 있었다. 나는 흐느끼며 그에게 내 공포심을 털어놓았다.
“저하, 그러나 저는 제 잘못보다 더 무섭게 혼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랭던 경께서는 저의 사소한 언행 속에서 추잡한 과거의 흔적을 보시고 실망하시니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흔적을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로엘, 당신이 고쳐야 할 건 없습니다. 잘못한 건 나요. 오늘은 내가 정말 지나쳤습니다. 당신의 고통으로 내 실패한 욕망을 보상받으려 했어요.”
“저는 너무 괴로워 이대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 버리고만 싶어요.”
가슴을 들썩이며 우는 나를 그가 힘주어 품으로 끌어당겼다. 등 뒤에 닿아 있는 랭던 경의 가슴팍 너머로 거칠게 뛰는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로엘, 내가 당신을 찾아다니느라 미쳐 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아요.”
랭던 경의 심장은 고통스럽도록 세게 뛰고 있었다. 비슷한 박동으로 뛰고 있는 내 심장 역시 가슴 언저리를 몹시 괴롭게 만들고 있었으므로 그도 같은 통증이 느껴질 게 분명했다.
나를 창부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 들이려니 랭던 경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이 괴로울까. 도미닉의 말대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오물일 것이다.
랭던 경의 심적인 고통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지자 나는 당장 무너질 듯 위태로워졌다. 어서 다시 나를 숨겨야 했다. 그러나 발목이 아픈 내가 방을 뛰쳐나갈 순 없으니 랭던 경이 자리를 비워 주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랭던 경에게 또 한 번 간절히 빌었다.
“저하, 저를 조금이라도 존중하신다면 제발 지금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마음을 털어놓는 일을 몹시 어려워합니다.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대화는 귀족답지도, 저답지도 않은 일인걸요.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발 혼자 있게 해 주세요.”
흐느끼는 목소리 사이사이를 랭던 경의 무거운 침묵이 메웠다. 랭던 경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결심한 듯 힘껏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을 천천히 놔 주었다.
“…알겠어요. 그러나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나를 만나 줘야 합니다. 약속해 줘요, 로엘. 내가 그대를 여기 가둬 놓는다 한들, 당신이 나를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나를 세상에 가둬 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약속드릴게요. 아침에는 반드시 저하를 뵙겠습니다.”
“부디 언제든 나를 불러요. 용서는 나중에 해도 좋습니다.”
랭던 경은 작별을 고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바로 나가지 않고 허리를 숙여 내 목덜미와 머리카락 위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렇게 애정을 표시한 뒤에야 침실을 떠났다.
나는 잠시 랭던 경이 닫고 나간 방문을 보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토록 혼자 있고 싶더니 랭던 경이 침실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독이 밀려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외로움과 눈물을 천천히 삼켜 냈다. 눈물이 그친 후 침대에 다시 누워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그러고서야 겨우 가슴 한편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달랠 시간이 생겼다. 나는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랭던 경이 화풀이를 한 건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작게나마 애정이 있기 때문이야. 랭던 경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뿐인걸. 내가 저하를 속여서 생긴 오해이니 화풀이를 당하더라도 스스로 감당하는 게 당연해.’
잘 참는 내가 열심히 다독여 봤지만, 현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린 내가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그럼 도미닉에게 가. 가서 새뮤얼의 돈을 돌려주라고 말해. 일이 잘못되면 내가 몸을 팔아 갚아야 할지도 몰라. 랭던 경에게 창부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없잖아. 랭던 경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싶은 거야? 왜 그래야 해. 어째서 그에게 상처를 줘야만 하는 거야….’
잘 참는 내가 다시 눈가로 밀려온 눈물을 쓸어 담으며 맹세를 속삭였다.
‘도미닉에게 새뮤얼 프리데릭의 돈을 돌려주라고 다시 한번 설득해 볼게. 어떻게든 랭던 경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그거야말로 내가 제일 바라지 않는 일이거든.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야…. ’
창문 너머로 부러질 듯 가냘픈 초승달이 보였다. 가늘게 휜 얇은 달이 꼭 밤하늘에 난 상처 같았다.
나는 차마 그 상처를 더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
이른 새벽, 지평선에 엉덩이를 누르고 앉은 무거운 안개는 아침이 되도록 걷히지 않았다. 밤새 악몽에 시달린 나는 랭던 경이 아침까지 약속을 지켜 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몸단장을 마치자 랭던 경이 기다렸다는 듯 퍼렐 의원과 함께 침실로 들어왔다. 나는 랭던 경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촉진을 받기 위해 침대에 올랐다. 퍼렐 의원은 촉진을 보다 말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약하신데 나을 때마다 움직이시니 발목과 등이 낫기가 어렵군요. 손목과 발목에는 왜 이런 생채기와 멍 자국이….”
퍼렐 의원은 중얼거리다 말고 짐작 가는 바가 생겼는지 침대 발치에 서 있는 랭던 경을 흘끗 쳐다보았다. 랭던 경은 내가 촉진을 받는 동안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있다가, 퍼렐 의원의 시선에 양심이 찔렸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퍼렐 의원은 내게 필요한 약을 주고 왕진 가방을 챙겼다. 그는 랭던 경에게 정중히 면담을 요청했다.
“랭던 공작님, 잠시만 응접실에서 따로….”
랭던 경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곧 퍼렐 의원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번엔 그의 녹색 눈동자에 짜증 대신 약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무척 궁금했다. 생채기가 난 이유를 물었을까? 그러나 랭던 경과 담소를 나누기는 아직 분위기가 서먹했다.
랭던 경이 나를 안고 내려가 주어 오랜만에 1층 식당에서 같이 아침을 들었다. 넓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꽤 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지난번에도 먹었던 레몬파이가 디저트로 나왔을 때야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랭던 경이 사과했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멀찍이 서 있던 하녀 세 명과 집사가 흠칫 동요하는 모습이 시야 변두리에 또렷이 걸렸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그들의 직업의식을 고려하면 무척 보기 드문 실수였다. 사과하는 랭던 경의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이란 뜻이었다.
나는 잠시 어제 일을 되새기며 뜸을 들이다가 작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군.”
“나쁠 거야 없습니다.”
겉으로는 순순하지만 감정 없는 내 대답에 랭던 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어 참기는 하지만 나의 대답 방식이 무척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혀를 가볍게 찼다.
“정말… 당신의 그 말투가 나를 미치게 합니다. 도무지 내 성미에 안 맞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랭던 경은 또 하늘처럼 높은 저택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순순한 말투는 도미닉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굳은 것인데, 랭던 경에게는 도리어 화가 나는 요소가 될 뿐이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매번 예의를 차리며 기분이 상했음을 조용히 드러낼 수 있었다.
랭던 경을 따라 얌전히 레몬파이를 한 입 먹었다. 순간, 익숙한 맛이 입 속 가득 퍼지며 머릿속 한 지점을 뾰족하게 찔러 올렸다.
“아!”
나는 깜짝 놀라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내 반응에 놀란 랭던 경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의 그릇과 포크가 차가운 소리를 내며 몸을 요란히 부딪쳤다.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하.”
“혹시 몸이라도 아파요?”
“아니에요. 그게… 제가 그만 바보처럼 혀를 씹었습니다.”
간신히 변명을 둘러댔다. 랭던 경은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하녀가 다가와 흐트러진 식기와 그릇을 다시 정갈하게 정리해 주었다.
“조심해요. 피가 나면 어쩌려고.”
키스할 때 내 혀에 피 맛이 나도록 짓씹은 적도 있으면서 랭던 경은 정말 걱정스러운 듯 당부했다.
자신이 의도를 갖고 만든 아픔과 그렇지 않은 아픔. 랭던 경에겐 그 차이가 몹시 중요한 듯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모든 걸 통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게 테런스 랭던 이란 사람이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셔 입가심을 하고 다시 한번 레몬파이를 베어 물었다. 확실했다. 얼마 전에 먹었기 때문에 기억이 틀릴 리 없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 레몬파이는 분명히 베넷 부인의 레시피였다. 베넷 부인이 내게 준 파이와 똑같았다. 분명히 랭던 경의 동생이 구해 온 레몬파이 레시피라고 했었는데.
윌리엄 랭던 경이 베넷 부인을 알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비슷한 레몬파이 레시피인 걸까?
나는 이 연결 고리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베넷 부인에게 레시피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할 도리밖에는. 레몬파이를 절반 정도 먹고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랭던 경의 품에 안겨 다시 침실로 돌아간 후에도, 우리는 데면데면하게 앉아 각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만 독서를 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랭던 경은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놓았을 뿐, 내 쪽으로 고정한 눈동자를 돌리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결국 신문 읽기로 아침 휴식을 마무리하고 침실을 비웠다. 그는 대개 오전에 랭던가에서 경영하는 철도 회사에 들렀다가, 왕궁으로 가서 중요한 국무를 보고 저녁에 귀가했다.
나는 랭던 경이 나갈 시간이 됐다는 걸 알았지만 잠이 든 척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밖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 중인지 말들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로엘 씨.”
그냥 외출할 줄 알았던 랭던 경이 다시 침실로 돌아와 나를 찾았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랭던 경은 곧장 침대로 다가와 기다란 상자와 밀봉된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와 달리 랭던 경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미안한 마음에 작은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선물부터 열어 보세요.”
“선물을요?”
나는 그가 주는 상자를 조심히 받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나무 상자 안에는 노란 다이아몬드로 만든 아름다운 소매 단추가 들어 있었다. 정말 진귀한 보석이었다.
좋은 때였다면 갑작스러운 선물이 반가웠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커서 편히 기뻐하지 못했다. 나는 랭던 경을 올려다봤다.
“저하, 진심 어린 행동이 아니라 비싼 선물로 제 마음을 풀려고 하시는 건 옳은 일이라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상대방을 생각하며 준비한 아름다운 선물도 없이 무슨 진실된 사과를 한다는 겁니까?”
랭던 경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도리어 이상한 듯 되물었다. 그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니 괜한 자존심을 세웠나 싶어 약간 무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작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내가 앞으로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 선물도 없이 그대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즉시 퍼렐 의원을 부르도록 해요. 어딘가 크게 탈이 난 것이 분명할 겁니다.”
랭던 경은 편지를 자세히 읽어 달라는 말을 남긴 후 바삐 침실을 떠났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턱에 걸터앉아 랭던 경이 탄 마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차가 빽빽한 나무 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나는 소중히 들고 있던 봉투의 봉랍을 뜯었다. 밝은 아침 햇살이 오랜만에 보는 그의 우아한 서체를 비췄다.
애정하는 로엘 서튼 씨에게.
나는 지금 늦은 새벽 서재에 앉아 로엘 씨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부끄러운 나의 죄과를 그대에게 낱낱이 털어놓고 당신의 넓은 인내심에 기대 용서를 구하려 합니다. 내 편지가 과연 상심에 빠진 로엘 씨의 마음을 달래고, 나를 향한 그대의 부드러운 눈빛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라도 편지를 적어 당신에게 고해를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로엘 당신이 빛나는 통찰력과 예리한 직감으로 꿰뚫어 본 것처럼 그대의 과거가 나를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로엘, 예민한 당신이라면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요즘 당신과의 잠자리에서 창부라는 호칭을 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소.
처음에는 내가 창부라고 부를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수치스러워하는 로엘 씨의 아름다운 표정에서 기쁨을 얻었으나, 어느덧 그 단어가 내게 주는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근원이 당신을 향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깊은 애정’이라는 말에 나는 창가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어 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랭던 경이 내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니.
편지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달아오르는 뺨과 눈가를 가렸다. 고통스러웠던 마음속에 찬란한 기쁨이 싹텄다는 사실을 나 역시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을 내리고 꽉 쥔 주먹을 심장 위에 올린 채 남은 글자 위로 눈을 옮겼다.
일전에 당신이 나를 혐오하듯 바라보며 입맞춤을 밀어낸 적이 있었죠. 그때 나는 혹시 로엘 씨가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끔찍한 상상에 빠져 홀로 긴 시간 속앓이를 했습니다. 손님을 좋아하는 창부가 어디 있겠소? 그대가 나를 손님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내 마음을 언제나 깊은 두려움에 잠기게 합니다.
내가 로엘 씨의 곁에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고 치근댈지도 모른다는 걱정 또한 나를 두려움에 빠트리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자존심 강한 랭던 가문의 사람인 내가 이러한 걱정에 잠긴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때때로 견딜 수 없이 화가 납니다.
내가 신이 되어 로엘 씨의 과거를 바꿔 놓을 수 없다는 부질없는 질투심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는 그때만큼은 폭군이 아니라 나라를 잃어버린 왕이고, 쭉정이를 빼앗긴 배고픈 참새일 뿐이오. 그래서 결국 어제는 잠자리에서만 내 권력욕을 충족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어둠 속에서 당신의 고통과 공포를 지배하면서 그대에게 신 노릇을 하였습니다.
로엘, 부디 내 어리석은 좌절과 번민을 이해해 주시오. 그대를 향한 연모의 마음이 점점 깊어지고 당신의 절제 없는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길수록, 로엘 서튼의 갖가지 처음을 본 사람이 내가 아니라 익명의 손님들이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좌절감이 듭니다.(부디 신께서 내 이 어리석은 질투심을 비웃지 마시길!).
이 편지 몇 장이 당신의 화를 다 풀어 주지는 못하겠죠. 그저 나를 향한 미움을 조금이라도 거둬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펜을 내려놓습니다.
깊은 사죄의 마음을 담아, 당신의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나는 랭던 경이 준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내가 랭던 경을 ‘손님’으로 대할까 겁이 났다는 부분에서는, 랭던 경이 나를 ‘창부’로 대할까 두려워했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비겁하기 그지없는 벅찬 감정이 치솟기까지 했다. 랭던 경의 애정을 확인한 기쁨과 내 처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상념이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나는 곧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실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깨끗한 종이를 꺼냈다. 평소처럼 편지의 서두(序頭)를 ‘테런스 랭던 경에게’라고 시작하려다, 내 감정이 드러나도록 문장을 고쳤다. 간단한 일이지만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결심이었다.
친애하는 테런스 랭던 경에게.
랭던 경, 저는 당신이 자리를 비운 에메랄드 저택에 홀로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철도 회사에 도착해 노르크의 산업을 이끌어 갈 미래를 보고 계신 중일까요? 저는 그사이 간밤에 써 주신 편지를 읽으며 가늠하기 어려웠던 당신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랭던 경, 신께 맹세코 제가 감히 당신을 ‘손님’으로 대한 적이 없다는 진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창부’라는 소문에 대해 저하께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죄책감’은 창부가 손님에게 가질 만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민한 저하께서는 알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야말로 랭던 경께서 저를 창부로만 생각하실까, 속으로 몹시 두려워하며 저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제의 공포가 너무 심했던 까닭에 지금으로서는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랭던 경께서는 제가 서서히 마음을 풀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제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고결한 자긍심에 상처가 되는 일이 아닐까요? 저는 그 상처들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진 않을까, 몹시 두렵고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나는 잉크병에 마른 펜촉을 담갔다. 유리병에 펜대를 가벼이 두드리며 넘치게 묻은 잉크를 덜어 냈다. 뾰족한 펜 끝은 다시 편지지 위로 옮겨 갔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가벼운 화해의 말로 위기를 모면하기보다는, 랭던 경께서 제게 하셨던 질문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저의 최선일 듯합니다. 랭던 경, 저는 당신에게 평범한 로엘 서튼일 수 있을까요?
제가 저하를 보는 눈빛에서 동생에 대한 당신의 과거를 지워 냈듯, 당신께서도 저를 보는 눈빛에서 제 과거를 지워 내실 수 있을까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당신에게 가혹하게 혼나며 공포에 떨고 자비를 구해야만 하겠죠.
저는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이니 처음에는 괜찮을 겁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고 해서 꽃들이 바로 꽃잎을 떨어트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세월이 거듭되고 마침내 겨울이 온다면 꽃들이 봄을 연모하는 마음만으로 겨울의 혹한을 견뎌 낼 수 있을까요?
깊어진 마음을 담아, 당신의 로엘 서튼으로부터.
편지를 마무리 짓고 실링 왁스를 녹여 서튼가의 인장을 찍었다.
답장을 쓰느라 생각을 깊게 한 탓에 머릿속이 무척 시끄러웠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책상에 팔을 기대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으나 감정이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노르크는 겨울이 1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길다지만, 겨울을 보내면서 서로의 마음이 이토록 깊어졌다는 사실이 신의 잔인한 장난처럼 느껴졌다.
나는 충동적으로 다시 편지지를 꺼냈다. 이번엔 도미닉에게 보낼 편지였다. 편지 앞부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내용을 써 내려갔다. 편지지의 절반을 채우고 나서야 본론을 쓸 용기가 아주 조금 생겼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글씨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정중히 용건을 꺼냈다.
형님, 금전을 주제로 삼는 일이 예의에 벗어나는 줄은 알지만 새뮤얼이 지금까지 서튼가에 지급한 금액이 정확히 얼마일까요? 그리고 형님의 수중에는 어느 정도 남아 있으실까요?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남은 금액을 새뮤얼 프리데릭 경에게 돌려주고 그동안 사들이신 물건을 팔아 작은 땅을 사서 소작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랭던 저하께서는 분명히 자유주의자가 아니에요. 저는 확신합니다.
사실, 나는 조금도 확신하지 않았다.
소작을 주어 수입이 생기면 저는 동전 한 닢 필요치 않으니 형님께서 모두 사용하세요. 그리고 공부를 하여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물론 서튼가 사람을 받아 줄 명문 대학교가 드물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집안에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형님께서 제가 저지른 일 때문에 퇴학을 당하셨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지금까지 랭던 경을 만나며 감내한 일들로 형님께 속죄를 할 수는 없을까요? 형님의 하나뿐인 동생을 부디 가엾게 여겨 주시고 이 일을 그만 끝내도록 해 주세요.
지난번의 만남이 짧아 형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제대로 여쭙지 못했네요. 저는 이제 몸이 많이 나았으니 혹여라도 염려하지는 마세요. 노르크의 추위는 마지막이 가장 무서우니 제겐 늘 서튼가의 기둥인 형님의 건강이 제일 걱정입니다. 답장을 바로 보내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의 막냇동생, 로엘 서튼으로부터.
봉투를 더 신경 써서 밀봉하고 줄을 당겨 종을 울렸다. 침실엔 샬롯이 아니라 다행히 애니가 찾아왔다. 나는 서튼가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애니에게 건네주며 특별히 수고비로 50골드를 쥐여 주었다. 애니는 뜻밖의 수고비에 몹시 좋아하며 앞치마에 봉투를 넣었다. 나는 애니에게 부탁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 편지에 대해 말하지 말고 마구간에서 일하는 피터에게 직접 배달을 하라고 부탁해 줘요. 기다렸다가 답장을 바로 받아 오도록 말해 주고요.”
“네, 서튼 남작님. 바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애니가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흘리지 않고 바로 전달하는지 확인하러 급히 창가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충직한 애니가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애니는 약속대로 정원 바깥쪽을 가로질러 마구간으로 뛰어가 피터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곤 바람이 세게 부는지 머리에 뒤집어쓴 하얀 모자를 누르며 저택으로 뛰어 돌아왔다.
말을 타고 노르크의 외곽으로 떠난 피터는 저녁이 되기 전에 저택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답장을 직접 들고 온 피터에게 수고비 100골드를 주고 감사를 표했다. 피터는 아직 10대 후반의 소년이라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침실을 달려 나갔다.
나는 달빛 아래 앉았다. 봉투를 쥔 채 떨리는 마음으로 성호를 긋고 서튼가의 봉랍을 뜯었다. 안에는 간단한 쪽지가 들어 있었다.
살던 집을 팔고 새뮤얼의 도움을 받아 과수원 근처에 있는 저택을 100만 골드에 매입하였다. 랭던 경이 네 화대로 70만 골드를 쳐주지 않는 이상 이딴 편지는 다시 보내지 말아라.
도미닉 서튼으로부터.
편지를 든 내 손이 무릎 위로 눈물처럼 떨어졌다.
나는 유령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목이 낫기 전엔 1층 밑으로 내려가지 말라던 랭던 경의 꾸짖음이 생각나 2층 동쪽 응접실에서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냈다. 자꾸 눈물이 나서 도저히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보더콜리 ‘아더’와 비숑 ‘루비’에게 공과 뼈다귀를 번갈아 던져 주고 육포도 잘라서 먹여 줬다. 루비는 공놀이를 하다 혼자 신이 났는지 희고 동글동글한 털을 휘날리며 응접실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한참을 뛰어다니던 비숑은 충분히 힘을 쓰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내 곁에 와서 얌전히 앉았다. 아더는 솜 인형 하나를 찢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머금은 채 루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루비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저하께서는 네게 손도 안 가르쳐 주셨어? 아더는 잘하던데.”
간식을 주며 루비에게 몇 가지 재주를 가르쳤다. 루비는 ‘손’이라고 했을 때 앞발을 내미는 건 금방 배웠지만 ‘앉아’는 도무지 익히지 못했다. 강아지와 놀아 주는 사이사이에도 도미닉의 편지, 아니, 쪽지가 생각나 자꾸만 눈동자 뒤편이 더워졌다.
랭던 경은 늦은 밤 저택으로 돌아왔다. 애니에게 랭던 경에게 쓴 편지를 주고 내가 있는 위치를 미리 말해 놨기 때문에 나는 움직이지 않고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랭던 경이 내 답장을 읽어 본 후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랭던 경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가 있는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어요, 저하.”
인사가 생각보다 서먹하게 나왔다. 어제 강제로 묶였던 두려움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손목에 남은 생채기를 만지작거렸다. 겁먹은 나와 달리 응접실에서 놀고 있던 강아지들은 전부 랭던 경에게 달려가 꼬리를 치고 뛰어오르며 애교를 부렸다.
랭던 경은 강아지들을 한 마리씩 다정히 쓰다듬어 주며 간식을 주었다. 그는 강아지들을 좋아하여 늘 품에 작은 육포 꾸러미를 가지고 다녔다. 그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앉았다.
“오늘은 잘 쉬었어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입맛은. 로엘 씨가 점심에 고기를 별로 못 먹었다던데. 몸이 약하면 고기를 든든히 먹어야 합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 그랬는데….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써서 먹을게요.”
랭던 경은 내 건강과 하루 동안 있었던 소일거리들을 다 챙겨 물은 후에야 편지 얘기를 꺼냈다.
“사실 로엘 씨가 준 답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느라 늦게 왔습니다.”
“짧은 편지였는걸요.”
“아니, 현명한 편지였어요.”
편지 얘기가 나오자 그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일이 조금 불편해졌다.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괜히 주변을 맴도는 강아지들을 만지작댔다. 반면 랭던 경은 놀아 달라며 반기는 강아지들을 고집스레 외면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만 분위기가 심각할 뿐, 넓은 응접실은 어느덧 저택 곳곳에서 나타난 강아지들로 복작거리고 시끄러워졌다. 다른 데 있던 강아지들이 랭던 경의 기척을 느끼고 몰려든 탓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 나는 강아지들에게 부지런히 공을 던져 주며 딴청을 부렸다. 두껍고 커다란 손이 다시 공을 던지려는 내 손을 잡아 쥐었다.
“로엘 씨.”
다정한 음색에 그제야 나는 간신히 그와 눈을 맞추고 대답했다.
“네, 저하.”
“편지를 읽고 나 역시 한참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대를 잃고 싶지 않으니 질문에 답을 내리긴 간단했지만 내가 정말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 나는 침대 위의 당신을 지배하고 싶을 뿐, 그대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그림자에서 과거의 일을 계속 찾아내지 않겠습니다. 내게는 로엘 씨의 현재가 더 중요해요.”
“…….”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과거가 신경 쓰이는 일이 또 생긴다면 차라리 내 집요한 질투심을 인정하고 바로 로엘 씨에게 털어놓겠소. 이제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요?”
“저의 용서는 이미 드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하. 다만 성격이 소심하고 겁이 많은 탓에 잊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어젯밤 일이 없었던 것처럼…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랭던 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괴로운 듯 미간을 모았다가 폈다. 어제의 일에 대한 후회와 나를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이 뒤엉켜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랭던 경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로엘 씨가 천천히 기분을 푸는 동안 나도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당신에게 확신을 심어 주겠어요. 다만 내 질투심이 대단하니 혹여라도 일부러 자극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 줘요.”
“알고 있습니다, 저하. 랭던 경께서 제가 창부라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꼭 약속이 완벽할 필요는 없는걸요. 저하께서 저를 이처럼 깊이 생각해 주시는 만큼, 저도 침대 위에서의 고통만은 계속 견뎌 내 보도록 노력할게요.”
“그 대답으로 충분합니다.”
랭던 경은 부드러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나는 화해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았다.
강아지들이 공을 던져 주지 않는다고 짖는 소리는 따가웠지만, 우리의 키스는 겨울밤의 호수처럼 호젓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물리고 따뜻한 혀가 내 입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랭던 경은 평소보다 가벼이 혀를 섞었다가 입술을 살짝 떼어 내더니 내게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외출은 계속 허락받아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랭던 경은 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 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눈썹 밑에 자리한 녹색 눈이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랭던 경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싶은 듯 한참이나 나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다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로엘 씨가 아까 한 얘기 말입니다.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침대 위에서 내가 그대에게 하는 짓들… 설마 전부 안 좋아하는 겁니까? 박는 것 말고. 그거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니 말할 필요 없어요.”
직설적인 질문이 당황스러워 고개를 살짝 숙였으나, 곧 커다란 손에 잡혀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모르셨어요? 제가 맨날 아프다고 울었는데….”
“그야 엉덩이를 때리면 그대가 울긴 하지만…. 하지만 조금도?”
“네.”
너무 대답이 빨랐는지 랭던 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랭던 경은 갑자기 개들이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몹시 짜증을 냈다.
그는 잠시 후 내게 조심스레 다시 확인했다.
“맞는 걸 싫어합니까?”
“…네.”
“한두 대도?”
“…그 정도는 싫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복종하고 나면 충족감이 느껴져요?”
“…아니, 요?”
“아닌 거 맞습니까? 나는 그대가 복종을 많이 한 날에는 더 잘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도요?”
복종하는 행위에 더 느낄 수도 있다는 얘기 자체가 낯설어 나는 부끄러움에 붉어진 뺨을 눌렀다. 한 번도 복종하는 행위와 그날의 쾌감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기실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랭던 경은 내 표정을 보더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신을 처음 때린 놈이 그대를 마구잡이로 다뤘어요?”
랭던 경이 버럭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주춤대자 그는 내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투를 부드러이 바꿨다.
“질투심으로 당신의 과거를 캐묻거나 화를 내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말투가 조금 거칠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괴물 같은 놈들이 당신을 아프게만 해서, 그래서 싫어하게 된 거요? 당신을 흉포하게 다뤘습니까?”
“…아마도, 요? 하지만 괴물이라고 할 것까지는….”
“내 앞에서 그 작자 편을 드는 거예요? 당신에게 침대 위의 매질을 공포로 가르친 놈을 찾아내서 사지를 썰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오.”
“…….”
“하… 금방 또 화를 내서 미안합니다.”
“화를, 화를 내시는 건 상관없는데… 그게….”
그가 지칭하는 나를 처음 때린 괴물 같은 사람이 바로 랭던 경이었으므로 나는 당황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랭던 경은 화를 더 내면 내가 상처받으리라 생각했는지 다소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로엘 당신이 기억이 희미해져서 나를 예전과 같이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랭던 경. 제가 감정을 정리하는 속도가 느린 탓이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괜찮습니다. 내 잘못을 고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이오.”
랭던 경은 무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비로소 시끄럽게 짖는 강아지들에게 다시 공을 던져 주었다. 나는 큰 강아지들을 피해 내 품으로 온 루비를 쓰다듬으면서 바로 옆에 있는 랭던 경의 모습을 계속 곁눈질로 살폈다.
소파 위엔 상처받은 나를 존중하느라 내 몸에 놓아두지 않은 그의 한쪽 손이 외로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랭던 경은 둘이 있을 땐 늘 나를 만지며 쉬었던 듯했다. 그가 나를 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색한 걸 보면.
나는 루비의 하얀 털을 계속 만지며 다른 쪽 손을 천천히 그에게로 옮겨 갔다. 그리고 먼저 랭던 경의 손등 위에 손을 포갰다. 마디가 굵지만 투박한 느낌 없이 우아한 랭던 경의 손가락. 그 아름다운 손가락들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만 잡은 채 각자 강아지들과 놀아 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