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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년 외출 (10/27)

10. 신년 외출

신년을 맞아 랭던 경에게 하룻밤 집에 다녀오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는 겨울에 긴 시간 마차를 타면 몸이 상할 수도 있다며 염려했지만 도미닉을 못 본 지 오래되어 집에 다녀오고 싶다는 내 간청을 결국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도 형이라고 그 멀리까지 다녀온단 말입니까? 사흘 전에 또 열이 났었잖아요. 계속된 눈으로 길이 질척해져 마차 속도가 예전 같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걸려 힘들 겁니다.”

랭던 경은 본인이 외출을 허락해 놓고는 들으라는 듯 계속 투덜거렸으나 나는 대꾸 없이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퍼렐 의원은 내 나들이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한달음에 달려와 위급 시에 먹을 약을 처방하고 발목의 붕대를 풀었다. 이마는 아물어 거즈를 완전히 떼어 냈다.

“외출을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그나마 아름다운 얼굴을 가려 주던 작은 흠마저 사라졌군.”

랭던 경은 퍼렐 의원 앞에서 민망한 불만을 터트렸다. 나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 일관했다. 퍼렐 의원은 랭던 경에게 개의치 않는 듯 이제 제법 부기가 가라앉은 내 발목 부근을 눌러 보며 물었다.

“아프십니까?”

“네, 그쪽은 무척 쑤십니다.”

“이곳은요?”

“거기는 괜찮아요.”

그는 약을 바르고 새 붕대를 다시 단단히 감아 주었다.

“요즘 걸을 때는 어떠신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가끔 근육통과 함께 미열이 오르긴 하지만 견딜 만해요.”

“계단에서 넘어지신 충격도 있지만 겨울이라 날씨가 추운 탓에 더디게 낫는 것입니다. 원래 감기도 자주 앓는 편이라고 하셨죠?”

“네, 겨울에는 열이 나서 자주 앓아누웠어요.”

“겨울엔 바람이 차고 해가 나는 시간이 짧아 사람들이 다양한 병에 시달립니다. 서튼 남작님께서 식욕이 없으신 편이란 건 알지만 억지로라도 드셔서 영양 보충을 하셔야 해요. 랭던 공작님께서는 워낙 강골이시라 잔병치레가 없으시지만요.”

“로엘은 저렇게 몸이 약한데도 다녀오겠다 고집입니다. 어제도 어지럼증이 도져 식사를 제대로 못 했으면서 말이오.”

랭던 경은 침대 발치에 서서 나를 지켜보며 다시 한번 불평했다. 나는 퍼렐 의원에게 부드러이 물었다.

“하룻밤 정도는 괜찮지요?”

“물론입니다.”

퍼렐 의원은 대답하며 랭던 경의 눈치를 흘끗 살폈다.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불만스레 턱을 쓸어내리며 내 발목에 얹힌 퍼렐의 손을 노려봤다. 이젠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있긴 하지만 나를 깊이 애정하는 것은 아닐 텐데 의사의 손이 닿는 걸 어째서 싫어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진료를 마친 후 하인이 내 짐을 마차로 옮겼다. 단둘이 방에 남은 우리는 잠시 서로를 껴안고 키스했다. 랭던 경의 부드러운 혀를 입 속에 가득 머금고 빠는 건 달큰한 일이었다. 뺨이 저절로 따끈해졌다.

그는 달콤한 키스에 잠겨 있던 나를 품에 가두고 양쪽 엉덩이를 틀어잡았다. 하체는 그대로 랭던 경의 허벅지 위로 끌려가 강제로 문질렸다. 아래쪽을 자극하는 행동에 깜짝 놀라 입술을 떼어 내며 그의 팔뚝을 급히 붙들었다.

“읏….”

품 안에서 버둥대는 내게 그가 경고했다.

“이제 외출할 만큼 좋아졌으니 섹스도 할 수 있겠지? 다녀와서는 밤새 울 준비나 해요.”

“아직 몸이 안 좋습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으나 랭던 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봐주길 원했으면 외출을 말았어야죠. 이젠 내가 그대의 뒤를 괴롭혀 병이 나도 로엘 그대의 외출 탓이 되니 상관없습니다.”

랭던 경은 쥐고 있던 엉덩이를 아프게 철썩, 때리는 것으로 긴 인내가 끝났음을 알렸다. 몸 상태가 다 돌아오진 않았지만 섹스를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나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다만 낯설고 무서운 행위에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워 심장이 불안스레 조여들 뿐이었다.

거울을 보며 목덜미가 드러나지 않게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랭던 경이 지난 몇 주 동안 욕정을 참는다며 이로 씹고 빨아 댄 결과 온몸에 울혈이 생기고 붉은 자국이 가득히 남았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실로 민망한 상태였다.

랭던 경은 침실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부드러운 키스를 퍼붓고 직접 배웅을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금세 그와 나의 귀 끝을 빨갛게 얼렸다. 내뱉는 숨은 모두 하얗게 변했다.

나는 랭던 경의 도움을 받아 높은 마차 의자에 올랐다. 막상 랭던 경 없이 에메랄드 저택을 벗어나려니 기분이 싱숭생숭하였으나 내가 고집을 부려 가게 된 외출이라 티는 내지 않았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저하.”

“무슨 일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곧장 연락해요.”

“네, 그럴게요.”

“몸도 안 좋은데 안 갔으면 좋겠건만. 당신 형님이 잘 돌봐 줄지 걱정이에요.”

랭던 경은 끝까지 혀를 쯧, 차며 내 손을 쥐었다 놓고 마차의 문을 직접 닫아 주었다. 말은 천천히 걷다가 이내 빠른 속도로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의 랭던 경이 사라질 때까지 내다보고 있다가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작게 손을 흔들었다. 랭던 경이 멀찍이서 손을 들어 올려 답해 준 순간 빽빽한 나뭇가지가 창문을 가리고 마차는 깊은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등을 털썩 기대며 흔들리는 마차 창문에 이마를 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마차에서 보는 겨울 하늘은 금방이라도 나무 꼭대기와 맞닿을 듯 흐리고 낮았다. 이름 모를 검은 새들은 무리 지어 허공을 활강했다. 랭던 경이 곁에 없으니 미뤄 놓은 복잡한 생각들이 먹구름처럼 머릿속을 덮었다.

‘도미닉에게 그때 일을 다시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 줄까. 내가 미쳤다고 할까.’

나는 물기가 서린 창문에 검지로 ‘Terrance’라는 글씨를 뽀득뽀득 써넣었다. 그의 이름을 보며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다 곧 머리가 어지러워져 눈을 감았다.

괜찮으리라 자신했던 외출 길은 랭던 경의 예고대로 무척 힘겨웠다. 벨벳으로 덮인 마차 의자는 마차치고 푹신한 정도일 뿐, 저택 의자에 비하면 딱딱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니 등이며 허리가 쑤셨지만 귀족의 체면이 있어 몸을 누이지 못했다. 층계참에서 떨어지며 부딪쳤던 머리는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말들 역시 편히 달리지 못했다. 겨우내 쌓인 눈의 방해로 마차는 일정한 속도로 가지 못하고 덜컹거렸다. 결국 집에 도착하는 데 예상한 시간의 두 배가 걸렸다.

오랜만에 마주한 집의 외관은 무척 황량하고 삭막했다. 꼭 처음 보는 곳처럼 낯설었다. 짐을 옮겨 준 마부가 근처 여관에 묵을 수 있도록 충분한 삯을 주고 내일 와 주기를 부탁했다. 베넷 부인은 응접실에서 혼자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베넷 부인.”

베넷 부인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빗자루를 놓쳤다. 막대가 맨바닥에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그보다 훨씬 더 위였다.

“아이고! 로엘 도련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봬요.”

“저야 잘 지냈죠. 몸은 좀 어떠셔요? 계단에서 떨어지셨다면서요! 윌리엄이 엄청 걱정했답니다. 물론 저와 남편도 몹시 걱정했구요!”

베넷 부인과 나는 가벼운 포옹으로 그간의 밀린 인사를 대신했다.

“로엘 도련님, 얼굴이 왜 이리 핼쑥해지셨어요. 좋아하시는 스튜와 레몬파이를 만들어 드려야겠어요. 그렇구 말구요. 아플 땐 푹 끓인 소고기스튜가 최고지요.”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베넷 부인의 요리가 몹시 그리웠는걸요. 형님은요?”

“서튼 자작님께서는 수도로 나가셨답니다. 요즘 친구분들 만나시랴 이사 준비를 하시랴 바쁘셔요.”

“…이사요? 저에겐 그런 말이 없었는데.”

아파서 에메랄드 저택에 누워 있는 동안 서신에 답장 한 통 받지 못하여 집안 소식엔 깜깜했다.

“이 집은 작아서 지내시기 불편하다고 과수원 근처에 비어 있는 저택을 매입하신다던데요. 아시죠? 예전에 소피아 남작 부인님께서 사시던 곳이요. 하녀도 늘리신다는데 감사하게도 저는 계속 출퇴근을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베넷 부인이 별 뜻 없이 알려 주는 소식들이 가슴 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도미닉이 지금 세운 이사 계획은 35만 골드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프리데릭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될 계획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나를 담보로 새뮤얼에게 추가로 뜯어낼 돈이나.

“…도미닉은 언제 돌아오나요?”

“이제 곧 돌아오실 때가 되었어요. 앉아 계세요, 로엘 도련님. 따뜻한 사과 차를 드릴게요. 가을에 담근 사과 청이 아주 맛있게 익었답니다.”

베넷 부인이 전해 준 소식 때문일까. 벽난로 앞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나는 제법 낯설게 변한 집 안을 세세히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아끼던 소파는 요즘 유행하는 가죽 소파로 바뀌어 있었고 못 보던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산 물건들이었다. 큰돈이라면 큰돈이지만, 작다고 하면 작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과수원이나 밭을 사서 소작을 주어야 할 돈을 소비로만 쓰면 대체 이 일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살려는 걸까. 우리는 귀족이라 일을 할 수 없는데.

베넷 부인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아직 가설로만 남아 있는 배신감과 의논 없이 돈을 쓰는 실망감이 뒤엉켜 오랜만에 집에 온 기분이 금세 엉망으로 변했다.

도미닉은 늦은 오후에야 집에 돌아왔다. 뒤따라온 마부는 백화점 상표가 붙은 상자들을 집 안에 들여놓고 수고비를 받아 갔다. 도미닉은 기분 좋은 얼굴로 집에 들어왔으나 곧 벽난로 불을 쬐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얼굴을 사납게 굳혔다.

“왜 집에 와 있니? 설마 몸이 다 나은 거야?”

나를 본 후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도미닉의 반응에 낙심하여 목소리가 금방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아니요. 신년이라 형님이 보고 싶어 잠시 외출을 나왔어요.”

“그러다 랭던 경이 네가 다 나았다고 생각해서 내보내면 어쩌려고! 새뮤얼이 이제야 쓸 만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잔뜩 기대하던 눈치인데.”

도미닉은 쇼핑을 한 뒤 도박장에 들러 포커까지 치고 온 듯했다. 외투에서 여러 종류가 뒤섞인 독한 시가 향이 풍겼다. 덕분에 잠잠해지려 하던 두통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랭던 경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세요. 오늘 외출도 말리셨는데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어리석긴.”

먼 길을 달려온 동생에게 보인 도미닉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베넷 부인처럼 반가워하며 몸은 괜찮냐고 한마디라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도미닉은 계단에서 떨어진 나보다 새뮤얼의 기분을 더 신경 썼다. 가족끼리 나눌 법한 따뜻한 인사는 형식상으로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상처받아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애정을 표현하는데 서툰 도미닉은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베넷 부인은 마부가 쌓아 놓고 간 물건을 익숙하게 정리했다. 눈물이 고여 눈앞이 흐려졌다.

저녁을 먹을 때야 겨우 도미닉의 얼굴을 마주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달간 알고 지낸 랭던 경보다 21년을 함께 산 도미닉과의 식사가 더 어색하다는 사실이 이상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마차에서 생긴 어지럼증이 가라앉지 않아 혼자 식사하는 일이 버거웠으나 도미닉에게 나약하다는 꾸짖음을 들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겁다고 말한다 한들, 도미닉이 해 줄 만한 일도 없었다. 그는 귀족은 아무리 아파도 식탁에 앉아 우아한 식사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식사를 침대로 가져오게 해서 먹여 주는 랭던 경과는 모든 점에서 반대였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 도미닉이 물었다.

“에메랄드 저택은 어떠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음… 굉장히 넓고 강아지가 무척 많아요. 보더콜리만 네 마리가 있거든요.”

별 뜻 없이 순수한 감상을 말했을 뿐인데 도미닉은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짜증스럽게 입술을 문질렀다.

“그 훌륭한 저택에서 지내며 눈여겨본 게 고작 개 따위냐? 한심하긴.”

“…….”

“너는 야망이라곤 없구나.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라고는 없는 거야. 귀족이라면 목표와 의지가 있어야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게 의지인가요?”

동생의 낯선 말대답에 도미닉이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사나운 눈빛이 나를 날카롭게 탐색했다. 동생이 왜 말대꾸를 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찾는 빛이 여실했다. 도미닉은 즉시 자신의 방식대로 내 행동을 분석한 답을 만들어 냈다.

“랭던 경이 돈 좀 쥐여 줬다고 기고만장해졌니? 랭던 경 옆에서 아양을 떨어 보니까 너를 키워 준 형이 우습게 보이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그분은 제 환심을 돈으로 사려고 하지 않으세요.”

“네 환심 따윈 필요가 없는 거겠지. 그 사람이 너에게 원하는 건 몸이고 너는 화대를 쥐여 주지 않아도 가랑이를 벌리잖아. 창부라고 부르는 것도 과대평가지.”

도미닉은 내 가슴 속에 상처를 남기는 데 능숙했다. 어설프게 아문 상처를 또 가르기만 하면 됐으니까.

잔인한 공격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조용히 들고 있던 식기를 꼭 쥐며 분노를 삼켰다. 도미닉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어느새 도미닉의 접시 위엔 고기와 야채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고기를 반도 먹지 못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도무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고, 도미닉이 입힌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손끝과 발끝이 아릿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열이 오르려는 조짐이었다.

나는 도미닉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가 마지막 고기 한 점을 다 비워 낼 때까지 참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로서는 무척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형님… 저 사실, 궁금한 일이 있어서 왔어요.”

랭던 경이 심어 놓은 의심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후로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도미닉을 향한 질문. 도미닉이 포도주 잔을 들었다.

“뭔데.”

“5년 전에 있었던 아버지 일이요.”

포도주를 마시던 도미닉이 나를 쳐다보며 눈꼬리를 위로 올렸다. 그는 ‘네가 감히 그 일을 먼저 꺼내냐’는 표정으로 주저 없이 나를 노려봤다. 속으로는 몹시 기가 죽었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 한들 그 일을 직접 겪은 건 나였으므로 랭던 경의 추측이 틀릴 확률이 높았다. 모진 비난의 눈빛을 견뎌 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형님께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 일을 한 기억이 없어요. 상자를 들고 간 부분부터는 확실히 기억나지만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순간부터 집을 나서는 사이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요.”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 얘기를 다시 하지?”

“…제가 아버지의 시신을 훼손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나요?”

“무슨 소리야. 네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냐.”

“제가 그때 아직 어렸는데, 형님이나 어머니가 저를 도와주셨다거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포도주 잔이 날아왔다. 운이 좋게 잔이 나를 비껴갔으나 허공에 흩어진 붉은 포도주를 그대로 머리에 뒤집어썼다. 화가 나면 손에 들고 있는 걸 던지기부터 하는 성미를 모르지 않는데 지금 말을 꺼낸 내 잘못이었다.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온갖 모욕을 겪은 내 앞에서 그런 개소리를 해? 지금 나나 어머니를 의심하는 거냐?”

머리카락을 타고 붉은 포도주가 뚝뚝 떨어졌다. 자주 있던 일이라 심장의 두근거림을 억누르고 태연한 척 뺨을 타고 흐르는 포도주를 손등으로 훔쳐 냈다. 나중에 무서워 빌더라도 무너질 때까진 버텨 보는 게 나의 빈약하고 무른 자존심이었다. 도미닉의 검지가 나를 향했다.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 가족은 명예롭게 다 자결했어.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아냔 말이다!”

“저는 형님을 화나게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낸 게 아니에요. 다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열여섯 살밖에 안 됐던 제가 혼자 하기엔 너무 잔인한 일이지 않나 해서….”

도미닉이 내 말을 끊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그거 네 생각이니?”

“…네?”

“네 생각이야, 아니면 테런스 랭던 경의 생각이야.”

“제 생각이에요. 다만 테런스 랭던 경께서 당시 프리데릭가의 살롱에 있으셨다고 하여 새로 몇 가지 들은 바도 있구요.”

“너 그 사람 좋아하니?”

바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는데 선뜻 부정의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이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려는 순간 도미닉은 더 기다려 주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검지를 까닥거렸다.

“이리 와!”

도미닉의 눈은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실수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무서워 온몸이 떨렸다.

“형님, 그런 게 아니라….”

“일어나, 로엘 서튼.”

떨리는 다리를 일으켜 도미닉에게 다가가자마자 머리카락을 붙잡혀 거실로 질질 끌려갔다. 억세게 쥐어뜯기는 고통에 비명이 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도미닉은 그대로 나를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나는 딱딱한 바닥에 등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계단에서 떨어진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넘어진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이 밀려왔다.

분노로 얼굴이 벌게진 도미닉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평소처럼 벽난로에 걸려 있는 부삽을 집어 들었다. 쇠로 된 부삽은 벽돌을 스치며 무겁게 긁히는 소리를 질렀다. 지금 부삽으로 맞았다간 몸에 흔적이 남을 테고, 멍이 든 상태로 돌아가면 랭던 경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 줄 오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부삽을 들고 다가오는 도미닉의 다리를 급하게 붙들었다.

“형님, 모, 몸에 자국이 남으면 랭던 경이 싫어하실 거예요.”

“그래?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멍든 몸으로 랭던 경과 섹스하는 건 불편하겠지. 그러면 자국이 안 남게 해 주마.”

도미닉이 집어 던진 부삽이 벽돌에 꽝- 맞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내 몸도 요동치며 떨렸다. 도미닉은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내 팔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뒤로 꺾은 뒤 그대로 짓눌렀다. 뼈가 어긋나는 고통에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 아! 형님!”

“내가 랭던 경과 남색을 하라고 했지 남색가가 되라고 했니? 좆에 몇 번 뚫렸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호모 새끼가 된 것도 모자라 그 남자 말을 주워듣고 감히 나를 의심해?”

“아! 아, 아파요! 아!”

나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바닥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도미닉이 팔을 이상하게 눌러 금세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데 몸을 버둥거려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관절이 빠지는 듯한 고통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지만 도미닉은 팔을 더 잔인하게 짓눌렀다.

도미닉은 팔을 몇 번이고 아프게 짓누르다가 놔주더니, 내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그대로 뺨을 내리쳤다. 너무 거칠게 갈긴 탓에 힘없이 바닥으로 다시 나동그라졌다. 또다시 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등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도미닉은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탔다. 그의 다리가 몸통과 팔을 전부 눌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도미닉은 겁이 나서 울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 얼굴만 들어 올린 뒤 뺨을 몇 번이고 때리며 물었다.

“남자 좆에 뚫리고 남색가가 됐어? 네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 그게, 흑, 아니라….”

뺨을 맞느라 머리가 울려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미닉이 뺨을 한 대 더 친 순간 결국 코피가 터졌다. 그제야 거친 손이 내 머리를 바닥으로 내려놨다. 나는 피와 눈물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며 도미닉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도미닉의 화가 풀릴 때까지 훈육을 받아야 하는 공포가 오랜만에 나를 압도했다.

“로엘, 대체 언제쯤에야 내가 널 훈육할 필요가 없어질까.”

“…….”

“집안 망신을 어디까지 시킬 셈이야. 네가 랭던 경을 만나기 전에 이미 노르크에 남창이라고 소문난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그래도 나는 그 소문이 진짜라고는 믿지 않았다. 네가 그 정도로 저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때부터 남자 맛을 본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응?”

도미닉이 또 뺨을 내리쳤다. 너무 아파 이가 흔들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도미닉이 나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수치심이 육체의 고통을 압도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헛소문.

“울지 마.”

“흐읍, 흑….”

“울음 그쳐. 밤새 무릎 꿇고 있을래?”

“아니… 에요.”

“나는 그래도 내가 너를 열심히 가르치고 키우면 사람 노릇은 할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된 게 몸이나 파는 호모 새끼라니…. 더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도미닉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눈물을 참느라 가슴을 헐떡이며 도미닉의 분노를 감내했다.

도미닉의 마지막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나는 랭던 경에게 마음을 내어 주면서 창부가 아니라 남색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내게 따뜻한 애정을 부어 주는 랭던 경에게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애정을 외면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힘겹게 누르느라 가슴팍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으나 슬픔이 고통을 앞섰음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도미닉이 윽박질렀다.

“울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봐.”

“네, 흡, 흑….”

눈물을 애써 붙들고 있는 눈동자를 도미닉에게 고정했다.

“그날 아침 아버지가 자결했다는 사실을 아는 가족은 너뿐이었고 오후까지 시신과 같이 있었던 사람도 너 하나뿐이야. 그런데 나를 의심해? 더러운 남색가 따위에게 의심을 받는 기분이 어떤 줄 아니?”

“…죄, 윽, 죄송해요….”

“남자와 섹스하며 쾌감에 신음하는 창부가 내 동생이라니…. 부끄러워 살아갈 수가 없구나. 목에 그 자국 하며…. 남자에게 뒤를 내주는 일이 그토록 좋았던 거냐?”

랭던 경과 섹스를 하며 좋아서 신음했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도미닉은 이를 갈았다.

“방으로 들어가. 내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새벽에 꺼져라.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면 너 따위는 지금 죽이는 게 나아. 남색가를 죽이는 건 명예 살인에 포함되는 행위임을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형님.”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일어나기 전에 랭던가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서튼가를 위해 새뮤얼이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해. 알겠어?”

“네, 읍….”

“그 일만 똑바로 해내면 나는 너를 충분히 용서할 수 있어. 너의 희생으로 집안의 명예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추락한 가문을 더러운 추문에 휩싸이게 한 집안의 오물일 뿐이야. 내 말 이해하냐?”

“…이해했어요.”

결국 눈가에 고여 있던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귀밑머리를 적셨다.

“일어나. 놀랐을 텐데 쉬어야지.”

“네.”

도미닉은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가슴을 헐떡이며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냈다. 도미닉은 한숨을 쉬더니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남자랑 섹스하는 게 좋을 수도 있지.”

이해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내게 더 모멸감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냥 섹스가 좋은 오물로 남을지, 그걸 가문을 위한 일에 쓸지는 순전히 네 결정에 달린 거야. 내 아우니까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응? 나의 로니. 네가 첫걸음마를 떼고 처음으로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동생인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너는 한없이 순수한 아이였어.”

“걱정, 흡, 마세요. 가문을… 잊지 않을 거니까요.”

도미닉은 평소엔 더럽게 여기는 눈물까지 닦아 주며 나를 달랬다.

“랭던 경이 너와 내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수작에 넘어가지 마. 이제 와 그런 쓸데없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어. 나는 그 사건 후에 아버지의 목을 자른 너를 용서했고, 목숨을 구걸한 너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돌봤잖아. 좌절한 어머니가 목매고 자결한 것도 네 탓으로 돌리지 않았어. 그렇지?”

“네, 알아요.”

“로엘 너만 동생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놀랐을 텐데 얼른 방으로 들어가. 일찍 자고.”

“안녕히 주무세요, 형님.”

나는 도미닉에게 호되게 혼나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방으로 쓸쓸히 들어갔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익숙한 비참함과 외로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오래된 망령처럼 달라붙었다.

도미닉에게 과거에 대해 물어보려다 랭던 경에게 마음을 내준 사실만 들키고 말았다. 도미닉은 남색가가 되어 버린 아우에게 더할 수 없이 실망했겠지만 내 마음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도미닉의 말이 터럭 하나 빠짐없이 잔인했기 때문이다.

5년 전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은 결국 나였다는 것, 도미닉은 내가 창부라는 헛소문이 노르크 수도에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는 것, 내가 랭던 경에게 호감을 느낌으로써 집안의 오점이 될 남색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사이사이 쏟아졌던 나를 향한 비난들….

도미닉이 쏟아부은 모든 말이 끔찍하고 슬퍼 나의 영혼은 고독하고 황폐한 황무지에 던져졌다. 내 가슴 속엔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 황량한 바람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 둔 판자마저 다 뜯어가 버리고 세상에 내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었다.

나의 모든 선택과 판단이 어리석었다. 랭던 경의 확신에 휘말려 도미닉에게 과거를 확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흐읍, 흑….”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소리를 누르며 침대로 숨어들었다. 품위 없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도록 울면 다시 도미닉에게 훈육을 받아야 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모로 누워 몸을 동그마니 웅크렸다. 울음은 서럽게 흔들리며 눈가로 고여 들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랭던 경에게 창부로 알려진 내 처지가 나를 가장 슬프게 했다. 외로운 내겐 랭던 경의 위로가 필요했으나 이곳은 에메랄드 저택이 아니었다.

“…흐윽, 테런스….”

랭던 경이 나를 위로해 주는 상상을 하며 어렵사리 눈물을 끝맺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랭던 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엘 도련님.”

베넷 부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주무셔요? 저녁을 치우러 식당에 가 보니 로엘 도련님 접시의 음식이 그대로지 뭐예요.”

베넷 부인은 친절하게도 도미닉이 깨트려 놓은 포도주 잔이나 엉망이 된 집 안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입맛이 없으셨나 싶어 말씀드렸던 레몬파이를 급히 가져왔어요. 놓고 갈 테니 시장하면 드세요.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시구요.”

무거운 사기 접시가 협탁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베넷 부인의 발소리, 삐걱대며 접히는 경첩, 방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귀를 찾았다. 이불 너머로 옅게 보이던 거실의 불빛이 사라지고 방은 다시 캄캄한 어둠에 잠겼다.

베넷 부인의 고마운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일으켜 레몬파이를 먹을 기운을 내지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밤을 보냈다. 여전히 내 까마득한 어둠 안에는 아버지의 잘린 머리가 망령이 되어 표류했다.

***

슬픔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빛 한점 없는 새벽은 공평하게 모든 집을 찾아왔다. 서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새 선잠을 자며 악몽에 시달린 나는 동이 트기 전에 괴로운 잠자리를 벗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는 일이었다. 어제 도미닉에게 훈육을 받아 뺨이나 몸에 멍이 들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손찌검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외출 준비를 간단히 마치고 지난밤 베넷 부인이 두고 간 레몬파이를 조금 베어 먹었다. 맛이 무척 친근했다. 베넷 부인이 만들어 준 파이라 맛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평소에 느끼던 낯익음과는 어딘가 달랐다.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마을 여관으로 마부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베넷 부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라 예의에 어긋나는 일임은 알지만 꼭 들러야 할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 창문 밖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곧 잠옷 차림에 작은 랜턴을 든 베넷 씨가 현관문을 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가 헝클어진 베넷 씨는 문간에 선 나를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로엘 도련님! 이 새벽에 무슨 일이십니까? 댁에 나쁜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지요!”

“안녕하세요, 베넷 씨. 나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에요.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찾아와 무척 죄송합니다. 잠시 베넷 부인 좀 뵐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급히 수도로 돌아가 봐야 해서요.”

“그러믄요.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트렁크는 저한테 주시구요.”

“괜찮습니다.”

“남작 나리께서 그런 걸 드시다니요!”

베넷 씨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아 가 버렸다. 베넷 씨의 안내로 거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내 목소리를 들고 넓은 숄을 걸친 베넷 부인이 머리를 올려 묶으며 한달음에 침실에서 달려 나왔다. 베넷 부인은 어젯밤 상황을 알기 때문인지 한눈에도 걱정이 그득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로엘 도련님! 밤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에요. 지금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해서 그 전에 잠시 뵙고 가려고 들렀어요.”

“차를 한 잔 내올게요.”

“괜찮아요. 지금 바로 가려고 해서요.”

내 대답에 이번에도 베넷 씨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요! 제가 내올 테니 아내와 얘기하고 계십시오. 중요한 일이신 것 같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응당 대접해야 하는 일인걸요.”

베넷 씨는 랜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서둘러 부엌으로 가 버렸고 베넷 부인은 숄을 여미며 맞은편에 앉았다. 랜턴의 희미한 불빛이 몇 년 새에 많이 희끗하게 바랜 부인의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베넷 부인, 제가 윌리엄을 많이 예뻐하는 건 아시죠?”

“네, 그럼요. 제가 도련님의 다정한 마음을 모를 리가요.”

“최근에 제가 수입이 조금 생겼는데 윌리엄의 후원자가 되고 싶어요. 윌이 학교에 가서 보통 교육은 마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싶습니다.”

“에구머니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로엘 도련님. 윌은 그냥 평민 아이인걸요! 글자만 알면 되지 더 배워서 어디에 쓰겠어요. 가게 간판과 음식 상표 이름만 읽을 수 있으면 되지요.”

“그렇지가 않아요, 부인. 노르크의 산업은 점점 더 발달할 거고 나라에 공부를 한 기술자들이 필요해질 거예요. 윌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차 기관사가 된다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윌이 영특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후원을 하려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나는 코트 안에 넣어 둔 돈 봉투를 조심히 꺼내 베넷 부인에게 건넸다. 랭던 경이 하룻밤 여행 경비라며 준비해 준 1만 골드였다.

나는 그가 처음에 주었던 5만 골드짜리 수표는 모든 일이 끝난 후 돌려주기 위해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 1만 골드만큼은 윌리엄을 도와주고픈 욕심을 떨치지 못했다. 베넷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곧 눈물이 글썽글썽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받아 들었다.

“베넷 씨에겐 제가 가고 나면 얘기하세요. 제가 말씀드리면 거절하려 하실 테니까요.”

“정말 감사해요, 로엘 도련님. 저라고 윌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지 않았겠어요? 다만 저희 형편으로는 해 줄 수가 없으니 작년에 농사를 망친 후에 그냥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아직 내가 찾아온 이유를 듣지 못한 베넷 씨가 서둘러 차를 내왔다. 나는 베넷 부부와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차를 반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에 찾아와 실례가 많았습니다.”

베넷 씨가 트렁크를 여관으로 들어다 주겠다고 또 고집을 부려 그와 함께 길을 걸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새벽길이었으나 지금은 가스등 덕분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건 노르크의 추위뿐이었다. 얼어붙은 숨결은 바람에 흩날리고 나뭇가지들은 스산하게 울었다.

마부는 다행히 이른 새벽부터 말에게 먹이를 주고 갈기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바로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트렁크를 나르느라 고생한 베넷 씨를 집 앞에 내려 주며 불이 꺼진 우리 집을 내다보았다. 도미닉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불 꺼진 어두운 창문이 먹먹했다. 갑자기… 에메랄드 저택을 나오면 나는 더 이상 돌아갈 데가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짙은 고독이 나를 삼켰다.

에메랄드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늘에 어슴푸레한 빛이 떠올랐다. 세상이 태양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저택 앞에서 눈을 쓸고 있던 하인이 깜짝 놀라며 나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서튼 남작님. 일찍 도착하셨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랭던 저하께서는 일어나셨나요?”

홀에 들어와 외투를 벗어 주며 묻자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셔서 응접실에서 신문을 보고 계십니다.”

“저하께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응접실이 한두 개가 아니라 랭던 경을 찾아가려면 하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인은 나를 포도주 저장고 근처에 있는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일전에 윌리엄과 가 본 곳이었다. 지나가면서 포도주 창고를 슬쩍 쳐다보았다. 특별히 잠가 두지 않는지 저장고의 문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려 있었다.

다리를 꼰 채 신문을 읽던 랭던 경은 나의 이른 등장에 눈썹을 잔뜩 모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저하.”

랭던 경은 테이블에 신문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하인에게 나가 있으라고 일렀다. 둘만 남자 랭던 경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울었군.”

“…조금 울었습니다.”

“왜.”

“새벽 풍경을 보니 조금 감상적이 되어서요. 서튼가 사람들은 5년 전부터 웃을 일이 별로 없답니다.”

“…그대의 입에서는 솔직한 대답을 듣기가 무척 어렵네요.”

랭던 경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에게 위로받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견뎌 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솔직한 대답이에요.”

“내가 로엘 씨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는 없겠죠.”

도미닉에게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수치를 당한 일을 숨기는 건 귀족의 당연한 덕목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도미닉의 훈육 방식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넘실거렸다.

당장에라도 톡 건들면 쉽게 떨어질 눈물이었으나 랭던 경 앞에서 이유 없이 울 수는 없었다. 내게는 랭던 경 앞에서 울 수 있는 이유와 그에게 위로받을 만한 핑계가 절실했다.

나는 내가 댈 수 있는 핑계가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발꿈치를 들어 랭던 경에게 먼저 입술을 누르고 양손으로 그의 널찍한 등을 감싸며 몸을 기댔다.

“저하, 어제 말씀하셨던 대로 저를 거칠게 다뤄 주시겠어요? 아침이어도 괜찮으시겠지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올려다본 랭던 경의 녹색 눈동자에 쓸쓸한 내가 담겼다. 어쩌면 그의 고독일지도 모를 감정이었다. 눈빛을 통해 서로의 외로움을 상대방에게 부지런히 옮기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내며 그에게 빌었다.

“네? 저하. 전에 보여 주신 목줄을 사용하셔도 좋고 아파도 좋습니다.”

“몸도 안 좋으면서….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나는 일단 시작하고 나면 적당히는 못 합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저하께 이 부탁을 드릴 생각만 했는걸요.”

랭던 경은 내 손을 거칠게 잡아끌고 응접실을 나섰다. 급한 걸음에 어제 넘어지며 부딪친 등과 미세하게 부은 발목이 뻐근하게 아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서 마주친 아서 도프 집사에게 랭던 경이 말했다.

“집사님, 오전 일정은 다 취소하세요.”

잘못 들으면 다소 화가 난 듯 들리는 말투였다. 나는 이제 그 음성이 화가 아니라 욕정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사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공작님, 중요한 회의들이 있는데….”

“다 취소요. 하녀에게 서튼 씨의 아침은 바로 들이라고 해요. 수프로 준비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부끄러워 집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다시피 2층 침실에 도착해 바로 침대에 내던져졌다. 두려워서 몸이 떨렸으나 어제 도미닉에게 마구잡이로 폭행당하던 공포와는 같지 않았다. 랭던 경에겐 울면서 응석을 부리고 때론 못 견디게 아프다고 애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내가 감당하기 지나친 공포는 적당히 조절해 주었다.

랭던 경은 침대 기둥에 달린 레이스 커튼을 쳤다. 침실 문과 발치 쪽이 가렸다. 레이스 커튼 너머로 회색 실루엣이 뚜벅뚜벅 침대를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실루엣은 커튼과 벽지의 경계선을 지나며 수려한 신사로 변모했다. 랭던 경은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고매한 자태로 담백하게 명령을 내렸다.

“로엘 씨가 스스로 목줄을 걸겠다고 했으니 무릎 꿇어요. 이제부터 개처럼 행동해야 할 테니까.”

나는 랭던 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개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섹스에 문외한인 티를 낼 수 없어 시키는 대로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랭던 경은 상자를 열어 가죽으로 된 목줄을 꺼낸 뒤 내 목둘레에 딱 맞게 채우고 줄을 잡았다. 숲에서 말을 탈 때 가죽 고삐를 쥐고 당기던 섬세한 손놀림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인기척에 허리뼈를 따라 근육이 꼿꼿하게 굳었다.

“들어와요.”

랭던 경은 줄을 내려놓았다. 그는 나를 흘끗 본 후 침대 기둥에 줄을 묶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정말 개에게 말하는 듯한 언사와 줄을 묶는 행동에 당황하여 피부에 열이 번졌다. 무릎 꿇은 다리에 얹은 손이 빨갰다. 그가 주는 수치를 다 견뎌 내면 마음껏 품에 안겨 울 수 있다는 일념으로 어젯밤부터 모아 둔 눈물을 붙들었다.

등 뒤에서 랭던 경이 하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트레이를 테이블 바로 옆 바닥에 놓고 나가세요.”

“바닥에요?”

“네, 애니 양.”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애니의 목소리와 잘그락대는 식기의 소음이 들렸다. 무거운 문이 탁, 닫히자 랭던 경이 다시 내 앞으로 와서 기둥에 묶어 두고 간 줄을 느긋하게 풀었다. 그의 쪽으로 목줄이 당겨 갔다. 이런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랭던 경이 줄을 더 세게 잡아끌었다.

“내려와, 밥 먹을 시간이니까.”

섹스 중에 가끔, 아니 자주 지나치게 무례한 말을 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랭던 경이 나를 하대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어린애나 개에게 말하듯 가감 없이 건네는 하대에 놀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섹스를 하기로 했고 목줄까지 맸는데. 바로 섹스하는 게 아닌지 물어보고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랭던 저하….”

“회초리를 한 대 맞아야겠군. 개가 말을 할 줄 알까요? 지금까지 당신이 본 개들은 입을 열어 말을 했어요?”

“죄송….”

“두 대. 오늘 내 개새끼의 엉덩이가 부어터지겠군.”

목줄의 의미가 목줄을 달고 섹스하는 게 아닌 걸까. 목줄을 매자마자 시작된 개 취급에 나는 몹시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당혹감은 곧장 놀란 배 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일단 벌써 두 대나 매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에 겁이 잔뜩 나서 입부터 굳게 닫았다.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 랭던 경 쪽으로 기어갔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먼저 내리려 하자 랭던 경이 한숨을 쉬며 매를 늘렸다.

“세 대. 내 개가 이렇게 멍청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꾸만 매가 늘어나는 게 겁이 나 바로 뻗었던 다리를 거뒀다. 침대의 높이가 만만치 않았지만 개처럼 행동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떨어질 듯 몸을 내밀어 손을 먼저 바닥에 대고 다리는 간신히 나중에 내렸다. 자세가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아 차마 랭던 경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나는 랭던 경이 줄을 이끄는 대로 눈치껏 손바닥과 무릎을 번갈아 앞으로 내디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수치스러움에 숨이 가빠 오고 내딛는 손등은 점점 더 진한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넓은 침실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벌판 같았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간신히 도착한 소파 옆 바닥에 애니가 두고 간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애니 양이 개밥인 줄 모르고 필요 없는 도구를 가져왔군.”

랭던 경은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뒤 트레이에 놓인 스푼과 포크를 수거했다. 달각, 식기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행위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매가 늘어날까 봐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함이 배 속에 똬리를 틀었다.

정말 창부라면 이런 것쯤은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걸까? 모른다고 하면 그를 속였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까?

거짓말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초조함까지 더해져 심장이 어그러질 듯 뛰기 시작했다. 내가 목줄을 매겠다며 자초한 일이라 못 하겠다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랭던 경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거칠게 쓰다듬은 뒤 뺨 위로 손을 미끄러트리며 턱 끝을 간질였다. 사뭇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먹어. 좋아하는 밥 먹어야지.”

나는 그의 명령에 입술을 꾹 닫고 쟁반을 내려다봤다. 이제야 그가 스푼을 치워 버린 의도를 이해했다. 눈가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꾹 다문 입술 사이에 고였다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이 도구 없이 식사를 해야 하다니. 정말 동물이 된 거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침대 위도 아닌데 나를 짐승 취급을 하다니…. 왜 이런 일을 시키는지도 전혀 모르겠어.’

나는 억지로 손바닥을 트레이 앞으로 옮기고 접시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생전 처음 겪는 낯선 모욕감에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온몸에 힘을 주며 꾹꾹 눈물을 참고 용기를 내어 입술을 수프 그릇에 묻었다.

작게 한 모금, 두 모금. 고소하고 따뜻한 수프를 입 속에 머금고 넘겼다. 랭던 경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먹네.”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트레이 위로 몇 방울 떨어졌다. 내가 목줄의 의미를 잘 몰라 벌어진 일이니 얼른 수습하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꼭 오므리며 수프를 계속 넘겼다. 랭던 경은 몸을 숙이고 급하게 수프를 먹는 내 턱을 잡아들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칠칠찮게. 주둥이 주변에 다 묻히고 먹었군.”

‘주둥이’란 소리에 다시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 주변에 음식을 묻히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내 상황이 몹시 부끄러웠다. 감춰 보려 해도 수프가 묻은 입술 주변이 서럽게 울컥울컥 떨렸다.

랭던 경은 우는 내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입 주변에 묻은 수프를 핥아 주었다. 그의 혓바닥은 내 입술 위를 몇 번이나 지나가며 질척하고 끈적한 수프를 모두 씻겨 냈다. 혀의 온도가 무척 뜨거웠다.

“착하지. 더 먹어.”

나는 붉어진 손으로 얌전히 바닥을 짚고 다시 수프를 먹었다. 랭던 경은 수프 그릇에 빵도 잘게 찢어 떨어트렸다. 엎드려 입으로만 먹으니 수프가 잘 줄지 않았다. 랭던 경은 중간중간 고개를 들게 하고 입 주변에 묻은 수프를 계속 혓바닥으로 핥아 주었으나 그만 먹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목줄을 잡고 턱을 괸 채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따금 입 주변을 핥아 줄 따름이었다.

빈 그릇까지 혀로 깨끗이 닦고 나서야 수치스러운 식사가 끝났다. 랭던 경은 트레이를 밖에 내놓고 문고리를 돌려 잠갔다.

“내 강아지가 뭘 하고 놀아야 즐거울까.”

“…….”

“뼈다귀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겠지. 응?”

침실엔 다행히 뼈다귀가 없었다. 안심하려는 찰나 랭던 경이 문 옆쪽에 놓인 큰 옷장에서 비단으로 감싼 물건을 꺼내 왔다. 매듭을 풀고 한쪽 비단보를 제쳤을 때 하얀 물건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상아로 만든 장난감이야. 개는 개답게 뼈를 가지고 놀아야지.”

기다랗고 굵은 손가락이 천을 한 겹 한 겹 다 열고 나서야 나는 상아로 만들었다는 장난감의 실체를 확인했다. 눈이 동그랗게 열리고 다시 입가가 떨렸다. 보드라운 비단 위에 놓인 물건은 상아로 된 모조 성기였다. 모조 성기는 랭던 경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모양이 무척 흉물스러웠다.

“아래 입으로 먹기 전에 위에 달린 입으로도 먹어야 섭섭하지 않겠지? 내 개는 욕심 많은 구멍이 위아래로 두 개나 달려 있으니.”

“…….”

“네 대. 주인이 놀아 주는 게 좋으면 엉덩이를 흔들든가, 짖어야지.”

엉덩이를 흔들거나 짖으라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온몸이 모욕으로 뜨거워졌다.

‘엎드려 밥을 먹는 게 끝이 아니라니….’

눈물로 뿌옇게 변한 눈동자를 아래로 깔고 고민하다 발꿈치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작게 좌우로 한 번씩 움직였다. 차마 입으로 개가 짖는 소리를 흉내 낼 수는 없어서였다.

랭던 경은 상아를 근처에 던졌다. 나는 곤란함을 감당할 수 없어 어깨에 눈물이 떨어지는 뺨을 비볐다. 그는 내가 우는 걸 빤히 보면서도 외면하고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져와.”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눈물이 떨어져 젖은 카펫이 손바닥에 스쳤다. 상아의 굵기는 제법 거대해 가로로 물기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끄트머리를 머금고 무거운 조각을 들어 올렸다. 모양일 뿐이지만 귀두 부분을 물기는 부끄러워 반대쪽을 입 속에 넣었다.

나는 조각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이로 상아를 꽉 붙들었고, 때로는 흐르는 침을 삼키기 위해 조각을 빨아야 했다. 겨우 랭던 경에게 되돌아가자 그는 무심히 내 입에서 하얀 조각을 빼냈다.

“잠깐 새에도 놀잇감을 빨아 대느라 침으로 질척해졌군.”

무심한 조롱과 함께 잘했다는 칭찬이 들리더니 그가 다시 상아를 집어 던졌다. 두 눈은 책을 향했다. 랭던 경이 책을 읽으며 집 안의 강아지들과 이런 식으로 자주 놀아 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뺨이 뜨겁다 못해 잿더미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 못 하겠다고 소리 내며 빌고 싶은 마음을 다시 한번 참았다.

두 번을 물어 오고, 세 번째 상아가 던져졌을 때 명령대로 좋은 척 엉덩이를 좌우로 휘저었더니 그의 입술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본인이 시킨 행동이면서 비웃다니…. 지금까지 내린 이상한 명령들보다 그 비웃음 한 번이 더 화가 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상아를 물고 기어 돌아오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왔음에도 랭던 경이 다시 상아를 던지려 했다. 나는 화가 나고 서러워 랭던 경의 무릎을 젖은 뺨으로 힘껏 밀었다. 커다란 손이 멈칫하는 게 보여 뺨으로 다리를 더 세게 밀며 화를 내고 눈두덩을 무릎에 파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으윽, 흑….”

“귀여운 내 강아지가 왜 이리 화가 났을까. 잘 먹여 주고 잘 놀아 줬더니.”

랭던 경은 이상한 짓을 시켰던 사람 같지 않게 내 머리카락을 다정히 흐트러트리고 정수리에 입을 맞춰 주었다. 보드라운 스킨십에도 눈물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소리치며 따지고 싶었다.

‘저하, 제가 목줄을 걸고 섹스를 하겠다고 했지, 이상한 개 흉내를 내겠다고 했나요. 왜 이리 이상한 일을 시키세요. 이런 건 섹스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지금 말을 하는 건 랭던 경이 금지한 행위였다. 매의 대수가 늘어나는 일이 무서워 말은 할 수 없고 울음소리를 누르기도 쉽지 않아 나는 계속 무릎에 눈물을 쏟아 냈다.

“침대에서 달래 줄까? 응?”

랭던 경의 다정한 목소리에 긍정의 표시로 뺨을 다시 바지 위에 비볐다. 고개를 끄덕였다간 개가 사람 말을 어떻게 알아듣냐며 매의 대수를 늘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랭던 경은 내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는 행위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줄을 잡고 일어섰다. 또 기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했으나 차라리 침대 위로 가서 섹스를 하면 이보다 상황이 나아질 듯해 말없이 줄이 끄는 대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손바닥과 무릎으로 카펫을 누르며 가는 걸음이 더뎌 한참을 가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음이 급해 얼른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깨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랭던 경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다정한 투로 말을 건넸다.

“아프게 만들지도 않았고 충분히 예뻐해 주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울까. 개 흉내를 내게 해서 서러웠어요? 이제 말을 해도 되니까 말해 봐요.”

허락을 받았음에도 바로 얘기를 할 수가 없어 눈물을 그치느라 애를 먹었다. 랭던 경은 젖은 뺨에 입술을 맞춰 주며 나를 달랬다. 그의 위로에 간신히 눈물이 잦아들어 겨우 입을 열었다.

“저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예뻐하는 사람을 바닥에 기어 다니게 하는 분이 어디 있나요? 이런 모욕은, 흡, 태어나 처음입니다.”

“목줄을 걸고 하자며. 뜻도 모르고 한 소리였어요? 무슨 창부가 이렇게 모르는 게 많습니까.”

“창부라고, 흑,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저하.”

랭던 경은 내 말에 이마를 긁적이며 설핏 웃었다. 그의 웃음엔 내가 갖지 못한 어른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고 비교하기 어려운 경험의 누적치를 갖고 있었다.

“하긴, 로엘 씨가 아직 스물한 살이지.”

“흑… 저하께서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 테니 개 흉내를 시키지만 말아 주세요. 잘못한 네 대도 얌전히 맞겠습니다.”

“아주 아프게 때릴 겁니다.”

“알고 있어요.”

“상아로 만든 좆도 쑤셔 박을 거요.”

“…그것도 견딜 수 있으니 제발 개 흉내만 내라 하지 말아 주세요.”

랭던 경은 줄을 놓고 내 턱을 세게 틀어잡아 키스했다. 성탄절에 나눈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려는 입맞춤이었다. 묵직한 혀가 내 입 속을 채우고 혀를 거칠게 빨아 당겼다. 숨이 모자라 벗어나서 공기를 들이마시려 하면 그는 아직 목에 달린 줄을 거칠게 자신의 쪽으로 당겨 내 입술을 강제로 열었다.

목줄의 고통에 벌어진 입 속을 그의 혀가 배려 없이 침범할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찼다. 오랫동안 아파 살뜰한 돌봄을 받은 탓에 망각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나를 지배하려는 그의 무자비한 욕망을.

키스하는 동안 옷이 한 겹씩 벗겨지고 아래쪽을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굵은 손가락에 내벽이 달라붙는 순간 그와 나는 동시에 더운 숨을 내쉬었다.

“아, 읏….”

“하, 뜨겁게 빨아 대는 건 여전하군…. 이 음탕한 아래 입을 내 것으로 막아 주고 싶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는 내 뒷머리를 잡아당겨 머리를 젖힌 뒤 목선을 혓바닥으로 핥고 이로 씹었다. 거친 애무에 익숙해졌는지 울혈이 만들어지는 아픔보다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히는 느낌과 두꺼운 혀가 피부를 적시는 감각이 더 야릇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물며 벌써 밑을 세우지 않으려 애썼다.

랭던 경은 곧 내 입에 상아로 된 모조 성기의 끝부분을 박아 넣고 서랍을 열었다. 귀두 부분이 바깥쪽을 향했다. 곧 몸을 일으킨 그의 손엔 기름병이 들려 있었다. 병을 기울여 조각의 귀두 부분에 미끈한 기름을 붓자 끈적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며 달큰한 향을 풍겼다. 랭던 경은 기름병 뚜껑을 닫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꺼풀 위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스스로 넣어요. 강아지 흉내는 싫다고 했으니 사람답게 손을 써서 스스로 쑤셔 보시오.”

모조 성기를 문 채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부은 눈가를 매만졌다. 랭던 경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속삭였다.

“왜. 개 짓을 계속할 걸 그랬나 후회라도 됩니까?”

아직 후회까지 되는 건 아니지만 턱에 벌써 뻐근함이 느껴져 겁이 나기 시작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야 상아의 둘레가 제법 굵다는 걸 알아차렸다.

랭던 경은 줄을 쥐고 침대 쪽으로 놓인 1인용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괬다. 그의 태도엔 내 상스러운 행동을 감상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배어났다.

나는 입에 문 모조 성기를 조심히 빼냈다. 기름이 묻은 쪽이 들어가야 했으므로 내 침으로 질척한 데를 틀어잡았다. 나는 스스로 아래쪽에 모형을 넣어 본 적이 없어 한참 망설이다가 미끈하게 젖은 부분을 다물린 입구에 가져갔다. 랭던 경이 손으로 풀어 주긴 했으나 잠깐이라 충분히 부드러워진 상태는 아니었다.

끄트머리를 밀어 넣어 봤으나 귀두 모양 부분도 채 다 넣지 못하고 아픔에 고개를 떨궜다. 랭던 경이 자비 없이 목줄을 탁, 당겨 몸이 휘청했다. 거친 손짓에 겁먹은 눈동자를 들어 올리니 그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들어가겠어요? 나는 그대가 일부러 서툰 척을 하는 게 싫습니다. 그럴수록 창부라는 사실이 상기되어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요. 나는 로엘 씨의 손님이 아닙니다. 혹시 평소에도 나를 손님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다정한 주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를 따뜻하게 대하는 랭던 경을 좀 더 유심히 보아 둘걸, 개 흉내를 그냥 더 낼걸. 작은 후회가 머리를 들었다.

“…저하를, 손님이라니…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니 내 앞에서 필요 없는 연기는 하지 말아요. 할 줄 아는 건 똑바로 해요.”

서툰 모습이 기분 나쁘다는 랭던 경의 말이 진심이란 건 녹색 눈동자만 바라봐도 알 수 있었다. 섹스를 할 줄 모르는 내가 진짜 나인데.

“…네, 저하.”

나는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랭던 경과 관계를 맺으며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섹스에 능숙한 사람으로 보이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섹스는 서로의 피부와 호흡을 맞댄 채 상대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행위였고 랭던 경은 늘 나의 서투름을 알아봤다. 떠도는 소문이 그의 눈을 가려 주지 않았다면 이미 처음이란 사실을 들켰을 것이다.

스스로 상아를 넣는 일이 무서웠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랭던 경은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울며 위로를 받으려면 명령하는 일은 제대로 해내야 했다.

나는 어설프게 밀어 넣었던 모조 성기를 다시 빼냈다. 쪼그려 앉아 상아의 기둥에 묻은 기름을 손가락에 치덕댔다. 그리고 뜨거워진 얼굴을 숙이고 손가락을 밑으로 가져갔다. 스스로 푸는 일이 몹시 낯설어 주저되었으나 그를 속였다는 사실을 들킬 수 없어 손가락을 간신히 밀어 넣었다.

“흣….”.

조금 전 랭던 경이 손가락 두 개로 아래를 풀어 주었기 때문에 두 손가락을 넣고 휘저어 봤으나 부족했다. 손가락 굵기에 차이가 있어 내 것은 세 개쯤 들어가야 했다. 이를 악물고 점점 손가락을 늘리며 쑤시는 동안 서러움에 배 아래쪽이 뜨겁게 끓었다.

“…으응… 아….”

“보세요. 잘하면서.”

랭던 경의 무심한 한마디가 살갗을 찔렀다. 매서운 모욕에 도미닉이 입힌 마음의 상처가 잠시 흐릿해졌다. 이 고통이 내게 주는 은총을 생각하며 이번엔 단단한 상아를 아래쪽에 쑤셔 넣었다.

“아읏, 응….”

쪼그려 앉은 다리가 달달 떨렸지만 억지로 조금씩, 조금씩 밀었다.

“…으응, 윽….”

“급하게도 먹는군. 힘 빼요. 그러다 찢어지겠습니다.”

“네, 흣, 아… 아….”

손을 멈추고 밭은 숨을 내쉬며 랭던 경을 쳐다봤다. 그는 조끼까지 입은 단정한 차림으로 나를 빤히 보다가 재촉하듯 목줄을 잡아당겼다. 거친 손놀림에 목이 눌려 작은 기침이 터졌다.

“끄, 끝까지 넣어야 하나요, 저하?”

“내 것도 삼키는데 그 정도야 쉽게 넣지. 다 못 넣으면 매가 두 대 더 늘어날 줄 알아요. 분명히 못하는 척 엄살떨고 연기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는 비난과 체벌에 약했다. 상아를 다 집어넣기 위해 오랜 시간 발버둥을 쳤다.

허리를 흔들기도 했고 자세를 바꾸기도 했다. 엎드려 넣을 때는 랭던 경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고 해야 했다. 온몸이 벌겋게 익고 피부가 미지근한 땀으로 젖는 동안 애썼으나 밑이 잘 열리지 않았다. 혼자서 도구를 밑에 넣어 보는 건 아예 처음이고, 삽입은 두 번을 해 봤다. 아무리 애써도 절반을 넣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랭던 경이 일어나 긴 회초리를 가져왔다. 겁이 나서 서둘렀으나 랭던 경은 회초리로 침대를 휙, 내리쳤다. 매섭게 공중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회초리가 침대를 내려치는 진동이 무릎을 울렸다. 그 모든 감각이 공포심에 힘을 불어넣었다. 나는 상아를 밀어 넣던 손을 멈추고 오들오들 떨며 그를 올려다봤으나 랭던 경은 차가운 눈빛을 띤 채 회초리로 침대를 꾹 눌렀다.

“다 못 넣었으니 엉덩이 내밀어요. 상아를 넣고 맞아야겠군.”

“저하, 죄송해요….”

나는 빌면서도 회초리가 가리키는 자리까지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오두막에서 배웠던 대로 엎드려서 떨리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둥근 산을 만들었다. 휙, 사나운 소리와 함께 회초리가 엉덩이를 내리치는 순간 빳빳한 고통이 피부를 마비시켰다.

“아! 아읏….”

놀라서 시트를 쥐어 잡고 부르르 떨었다. 상아를 넣은 상태로 맞으니 자연스레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서 회초리가 두 배, 세 배는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랭던 경은 자비 없이 말했다.

“숫자 세는 걸 잊었습니다. 여섯 대를 어떻게 맞으려고 처음부터 실수를 해요. 로엘 씨가 매 맞는 데 재미가 들렸나 봅니다. 방금 건 무효요.”

무효라는 소리에 눈앞이 깜깜해지는가 싶더니 곧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어젯밤부터 참았던 눈물이 힘겹게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도미닉이 얼려 놓은 마음이 다 느슨해지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을 참으며 입술을 열었다.

“깜빡하고….”

대답하는 중간에 갑자기 매가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뜨끔한 아픔이 엉덩이에 작렬했다. 엉덩이가 경련을 일으키듯 떨림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허리가 펴져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억지로 다시 엉덩이를 쳐들며 빌듯이 숫자를 셌다.

“아! 하, 하나… 저하….”

“무효. 엉덩이 좀 천박하게 흔들지 말아요.”

“흔든, 흔든 게 아니라, 흐윽, 흑… 아파서….”

나는 셋까지 세기 위해 매를 열대나 맞아야 했다. 이유는 다양했으나 주로 엉덩이가 내려갔다거나, 맞으면서 너무 흔들어 천박해 보인다는 것이 랭던 경의 주된 트집이었다. 회초리가 피부를 후려치는 고통 때문에 일어나는 경련이라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웠으나 그는 좀처럼 봐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아플 때 간호를 해 주고 다정히 첫 키스를 해 주는 랭던 경은 침대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회초리가 공중을 갈랐고 엉덩이엔 가늘고 긴 붉은 줄이 겹겹이 남았다. 나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맞자마자 발등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겨우 숫자를 셌다.

“넷, 흐윽, 흑… 저하, 너무 아픕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아프다는 사람이 그렇게 엉덩이를 움직이며 상아를 삼켜 댑니까? 이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대가 맞으면서 밑을 하도 추잡하게 벌렁거려 상아가 손가락 한 마디는 더 들어갔어요.”

“…흐읍, 조, 좋아서 벌렁거린 것이 아닙니다.”

“과연 그럴까? ”

랭던 경이 엉덩이 골 사이에 박혀 있던 상아를 살짝 뺐다 안으로 집어넣었다. 매를 맞는 동안 오래 물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토록 삽입하기 어렵던 물건이 맞나 놀라울 정도로 상아가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두툼한 끄트머리가 내벽을 짓누르며 안쪽을 뭉근히 눌렀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허리가 동글게 말려 올라갔다.

“응… 읍….”

“그대가 음탕한 사람이 아니라면 매를 좀 때렸다고 상아가 이렇게 부드러이 움직이진 않았겠지. 몸속에 더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을 테고. 로엘 씨가 느끼는 데가 여기였지?”

랭던 경은 상아를 다시 약간 뺀 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지점에 비스듬히 박아 넣었다. 저릿함에 놀란 허리가 위로 또 튕기듯 솟아오르고 나는 시트를 급히 움켜쥐며 몸을 말았다.

“으응… 저, 저하….”

“아니면 여기?”

그가 찔러 넣은 다른 방향조차 달콤한 자극에 온몸이 전율했다. 회초리가 남긴 고통 속에서도 허리가 덜덜 떨렸다. 아직 날카롭게 피부를 울리는 통증이 남아 있는데 쾌감을 느끼는 내 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음탕한 게 아니고서야.

랭던 경이 상아로 여러 방향을 찔러 가며 마구잡이로 쑤셨다. 그런데도 입술에서는 난잡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아… 으으응….”

“솔직히 말하면 로엘 씨는 어디를 찔러 주어도 느껴요. 남은 두 대는 상아를 끝까지 박고 맞게 해 주겠습니다. 아파서 힘들어하는 거 같으니까요.”

“저하, 제발… 저 더는 못 마, 맞습니다…. 부, 부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더 맞을 수 있어요.”

“…흐윽, 저하….”

랭던 경은 상아를 뺐다가 다시 천천히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왜냐하면 상아를 그대가 아주 좋아하는 지점에 박아 줄 테니까.”

상아가 내벽을 짓누르는 순간 입에서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아으으응….”

랭던 경은 상아를 부드럽게 돌리며 내 표정을 가까이서 쳐다보고 귓가를 잘근대며 씹었다. 귓바퀴를 휘도는 숨이 뜨거웠다.

“아파하는 그대의 얼굴이 내가 지금껏 본 무엇보다 외설스럽고 아름다워요.”

“으응… 그것은 치, 칭찬이 아닙니다… 흐읏….”

“하… 얼른 상아가 아니라 내 좆으로 구멍을 막아 주고 싶군. 아직 닿지 않지? 그대가 제일 느끼는 곳은 더 안쪽에 있으니까. 내가 눌러 주면 자지러지는 당신의 눈물샘 말이에요.”

랭던 경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상아를 문 밑을 벌렁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꼭 내벽이 더 안쪽으로 상아를 끌어당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랭던 경이 내 저급한 갈증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그의 말대로 나는 성기가 랭던 경만이 아는 눈물샘을 짓누르고 나를 펑펑 울려 주길 바랐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품에 안겨 울면서 도미닉이 남긴 상처를 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내게 바라는 걸 말해 봐요. 그대가 내가 쓰는 더러운 말들을 따라 하며 빌면 어떤 일이라도 들어줄 테니까.”

“…흐응, 읏… 빨리 두 대를, 응, 마저 때려 주시고… 상아 대신 다, 당신의… 당신의 성기를 물려 주세요.”

“성기? 아직 고상한 로엘 서튼을 못 버렸어요? 당신 몸은 훨씬 천박하고 음탕한걸.”

“…성기가 아, 아니라… 다, 당신의… 당신의….”

“…….”

“…조, 좆을요.”

랭던 경은 다시 허리를 펴고 회초리로 엉덩이를 갈겼다. 쉬었다가 맞는 매는 끊기지 않고 맞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아팠다. 다시 터진 눈물 때문에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해서 네 대를 더 맞고서야 대 수를 다 채웠다.

랭던 경은 그대로 상아를 거칠게 빼내고 엉덩이가 아파 꼼짝도 못 하는 내 몸을 뒤집어 침대에 눕혔다. 천에 닿는 피부가 끔찍하게 쓰라렸다.

“아흣, 아, 아파요, 아파요.”

랭던 경은 침대로 올라왔다. 내 두 발목이 커다란 손안에 얌전히 잡히고, 내 몸은 랭던 경에게로 쉽게 끌려갔다.

랭던 경은 나를 내려다보며 손바닥에 침을 퉤, 뱉고 잔뜩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문질렀다. 침을 바르는 행동이 몹시 모욕적으로 느껴졌으나 얌전히 있었다. 상아 모형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굵은 귀두가 아래쪽을 꾹 눌렀다. 나는 다시 기름병을 찾았다.

“저하, 기름병….”

“이만하면 잘 풀어 준 것 같은데. 기름칠된 상아를 끝까지 품고 씹어 댄 아래 입에 기름칠을 더 해 줘야 하나?”

여섯 대만 맞기로 한 것을 이리저리 트집 잡혀 열다섯 대나 맞았는데 돌아오는 건 모진 비난뿐이었다. 그는 늘 내게 기름을 더 발라 달라고 빌게 만들었다. 침대 위에서의 랭던 경은 뭐하나 그냥 해 주는 법이 없어서, 성기를 넣어 달라는 내 간청 역시 매번 교묘하게 얻어 냈다. 서러움에 입가를 씰룩이자 그가 웃으면서 눈꺼풀에 입술을 눌러 주고 부은 눈가를 핥으며 속삭였다.

“지금 더 울면 이따 눈을 못 뜰 겁니다.”

“하지만 거친 말로 타박만 하시니 서러운걸요.”

랭던 경은 내 말의 어디가 웃긴 건지 입꼬리 한쪽을 슬그머니 올렸다가 내리며 물었다.

“서운했어요? 음탕한 아래 입을 기름으로 더 적셔 주면 그대의 기분이 풀릴까?”

“그, 그건….”

“금방 밑이 연해져 입을 가득 벌리고 자지를 빨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면 좋아요?”

“…네, 저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 경은 손을 뻗어 병을 가져와 내 아래쪽을 더 질척하게 적셨다. 풀려 있는 밑을 끈적하게 적시는 느낌이 저릿해 나도 모르게 허리를 떨자 그가 피식 웃었다.

“타고나길 야한 몸이오.”

“느낌이, 이상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렇게 뺨을 붉히고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는데.”

랭던 경은 내 뒷무릎을 잡아 얼굴 쪽으로 밀어젖히며 매 맞은 자국이 가득한 엉덩이를 띄웠다. 두 무릎 사이로 랭던 경의 얼굴이 보여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나 가만히 있으면 그가 키스를 해 줄 듯해 참았다.

랭던 경은 기대대로 내 입술을 핥고, 살짝 열린 입술 틈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굵은 귀두를 내 속에 파묻었다. 입 속에 들어와 있는 그의 혀 때문에 제대로 신음을 지를 수 없었다. 이내 굵은 귀두가 완전히 안쪽을 파고들었다. 나는 두툼한 그의 혀를 문 채 신음하며 몸을 달달 떨었다.

“으응… 흣….”

물컹하고 부드러운 그의 혀가 입 속에 야릇한 감각을 선사했다. 키스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왜곡시켜 쾌감의 언저리까지 끌어당겼다. 랭던 경은 혀를 조금 더 집어넣으며 페니스로 안을 꾸욱, 짓눌렀다.

“…하읍, 읍….”

붕 뜬 엉덩이 안으로 내리꽂듯 들어오는 단단한 성기와 입에 물려 있는 부드러운 혀의 느낌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랭던 경은 무릎을 더 짓눌러 내 엉덩이를 솟게 하고 혀를 완전히 밀어 넣으며 키스했다. 뜨거운 혀가 입 속을 끈적하게 훑어 내렸다.

진득한 키스는 온몸을 달콤한 열기로 물들였다. 회초리를 맞은 엉덩이가 여전히 몹시 아팠으나 그에게 키스를 받고 있으니 그마저도 참을 만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약간 들어 랭던 경의 혀를 더 깊이 머금었다. 매달리듯 혀를 빠는 내게 랭던 경이 나직이 속삭였다.

“장난감이 내 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했으니 처음은 봐주는 것 없이 박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무슨 소릴까,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성기가 그대로 내리꽂혔다.

“아!”

나는 그의 혀를 놓고 긴 신음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그 신음을 시작으로 랭던 경이 성기를 위에서 아래로 거칠게 박아 넣었다. 입에서 정신없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응, 아! 흐읏… 읏!”

“하, 들러붙어서 음탕하게도 빨아 먹는군.”

랭던 경은 계속 성기를 내리꽂듯 허리 짓을 했다. 오두막에서도 이 자세로 했었지만 그때와는 강도가 달랐다. 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를 아래로 찧었다. 엉덩이엔 아직 회초리 모양대로 발갛게 부푼 선들이 수없이 남아 있었다.

성기가 깊숙이 들어오면 랭던 경의 몸과 침대 사이에 갇혀 매 자국이 앞뒤로 모두 눌렸다. 아픔과 쾌감이 뒤죽박죽 뒤섞여 나는 감각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었다.

“아, 흣, 너무, 흡, 거, 거칠어요, 저하, 아!”

“로엘 그대의 아래 입이 내 좆에 익숙해질 때까지 짓이겨 놓을 거요. 흣, 지금은 상아가 벌려 놓은 대로 좆을 빨려 하거든.”

“그, 게, 대체, 아! 으으응….”

체중이 실린 성기가 점점 깊숙이 안을 파고들었다. 내 엉덩이는 그가 삽입하면 침대에 납작하게 짓눌렸다가 빼내면 다시 공중으로 둥글게 떠올랐다. 랭던 경은 욕지거리가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내 얼굴을 계속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나는 다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신음하다가, 때로는 부끄러워 눈을 내리깐 채 울고, 때로는 그에게 혀를 내밀며 키스를 갈구했다. 입술 밖으로 혀를 빼물 때마다 랭던 경은 어김없이 내 혀를 자신의 입 속에 담고 몇 번이나 녹일 듯이 빨아 주었다.

상아로 만든 장난감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그의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으나 허리 짓이 거듭될수록 몸이 알아서 깨달았다. 그가 거칠게 쑤셔 박아서 벌어진 내벽은 완전히 다물리지 못하고 페니스를 다시 받아들였다.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랭던 경이 똑같이 박는 것 같았지만 허리 짓이 거듭될수록 성기는 점점 더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장난감은 닿지 못하는 깊숙한 곳이었다.

“으응, 읏… 흣… 아!”

“후으….”

내 뒷무릎을 누르고 있는 굵은 팔뚝을 부여잡은 채 몸에 떨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손바닥 밑으로 랭던 경의 열기와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나와 몸을 섞으며 격정을 향해 달려가는 육신이었다.

“저, 하… 머, 먹히는 것, 흣, 같습, 응, 니다….”

“그 말대로 내가, 당신을 먹고, 하… 점령하는 중이지.”

서두가 길었던 우리는 동시에 사정에 이르렀다. 랭던 경은 최대한 깊숙이 박아 넣은 상태로 허리를 흔들며 안쪽에 정액을 흩뿌렸다. 뜨거운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지며 내벽을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그의 팔뚝을 꽉 붙잡고 발가락을 폈다. 발가락 끝 하나, 하나에 쾌감이 모여 뜨겁게 춤을 추는 듯했다.

“흐으으응… 저, 하… 아, 흡….”

입가로 침이 흘러내렸다. 정액이 끝도 없이 퍼부어지는 느낌이었다. 랭던 경은 흘러내린 침을 혀로 진득하게 핥으며 속삭였다.

“그대도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맛보는군. 맛있어요?”

“…흣, 으응… 마, 맛있… 습, 니다…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귀로 들리는 말보다 랭던 경의 체온, 숨소리, 피부의 습기가 더 생생했다. 내 안을 채우는 정액은 더 적나라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의 페니스가 내 안을 길게 적시고서야 간신히 사정이 끝났다. 안쪽을 채운 끈적한 정액이 배 속에서 출렁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서 정신없이 헐떡대는 내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다 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공중에 몸이 붕 떴지만 이전처럼 품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랭던 경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명령했다.

“의자 잡아요.”

“…읏….”

랭던 경이 내가 상아를 넣는 모습을 감상하며 앉아 있었던 1인용 소파였다. 나는 등받이를 붙잡고 서서 경련하는 다리를 간신히 폈다. 랭던 경은 아직 내 목에 달려 있는 줄을 뒤에서 쥐어 잡았다. 어느새 단단해진 페니스가 밑을 틀어막아 그가 안에 싸 놓은 정액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기다란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에 남아 있는 매 자국을 더듬었다.

“아직도 살이 오돌토돌 붉게 솟아 있습니다. 멍이 들지도 모르겠군. 하얗고 고운 피부에 내가 남겨 준 멍만 달고 다녀요. 그대의 살은 쥐었다 놓기만 해도 붉어질 만큼 여리니 조심해야 합니다.”

다정한 당부와 달리 랭던 경이 내 목줄을 짧게 감아 잡으며 뒤로 팽팽히 당겼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바람에 의자를 잡고 서 있는 자세가 무척 아슬아슬해졌다. 그는 그대로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꼭 말을 타는 것 같군.”

“…흐읏, 그, 그런, 응, 말씀을….”

“허리를 더 내리고 발끝을 들어요. 하… 그래야 좆을 깊숙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로엘 그대가 울게 되는 곳에 박히고 싶지 않아요? 생각보다 별로 눌러 주지 않아서 아쉬울 텐데.”

그의 말대로 나는 그곳이 쑤셔지고픈 욕망에 몸이 달아 있었다. 달콤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안쪽의 눈물샘.

방금 전 느낀 쾌감을 다시 맛보고 싶었으나 자세를 잡기가 어려웠다. 시키는 대로 허리를 내리고 엉덩이를 치켜들어 봤으나 그가 안쪽을 쑤셔 주면 나도 모르게 허리가 솟았다. 그런데도 너무 좋아서 의자를 잡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아… 읏… 저하, 제 몸이 이상, 한 것 같습니다….”

“다친 데가 아파요?”

“그게, 아니라… 너무, 아, 느끼는 듯해서….”

“지금보다 더 잘 느껴야지. 내 몸에 길들어서, 후으… 나중에는 내 좆만 봐도 아래 입으로 빨고 싶어서 침을 삼켜야 합니다.”

랭던 경은 허리 짓이 좀 더 커졌으나 처음처럼 무자비하진 않았다. 내벽이 모조 성기가 아닌 그의 페니스에 익숙해져 소유욕을 자극받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내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이라면 다른 사람이 때린 자국이 아니라 내 손으로 모조 성기를 쑤신 감각조차 싫은 모양이었다. 서재 책상 다리에 내 몸을 매어 두겠다는 소리가 빈말이 아닌 듯했다.

“로엘, 하아, 엉덩이 더 치켜들어요.”

“흣… 허, 허벅지가… 떨려서….”

“어서.”

손바닥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따끔하게 아파 서러움에 고개를 뒤로 돌렸는데 그가 목줄을 세게 잡아당겨 얼굴이 강제로 제자리에 돌아갔다.

“서운하다는 소리는 나중에 해요. 지금은 박느라 바쁘니까.”

랭던 경의 명령대로 다시 엉덩이를 치켜들며 허리를 내리자 순식간에 내벽이 성기를 깊숙하게 물었다. 나는 두툼한 귀두에 눌린 엉덩이를 파들파들 떨며 무릎을 펴려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랭던 경이 거칠게 쑤셔 넣을 줄 알았는데 페니스는 의외로 뭉근하게 안쪽을 누르며 움직였다. 부드럽고 깊은 움직임이었다. 입에서 다시 침이 길게 늘어졌다. 그는 여전히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발가벗은 채 목줄까지 한 상태로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읏, 으응… 갑, 자기, 부드럽게 하시니….”

“갑자기 부드럽게 해서. 왜. 좋아요?”

“아… 네, 조, 좋습니다… 너무…. 저하, 아….”

랭던 경은 줄을 당기며 점점 묵직하게 안을 쳐올렸다. 페니스가 안을 쑤시는 소리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목줄을 당기는 움직임 역시 강해져서 꼭 가죽 줄이 내 목을 움켜쥐고 조르는 듯했다. 성기를 박을 때면 줄이 당겨 숨이 막혔다가, 빠져나갈 때면 느슨해져 호흡이 자유로워졌다.

랭던 경은 일전에 눌러 주었던 곳에 다시 한번 성기를 처넣었다.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아… 흣….”

“하, 지금부턴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목줄이 뒤로 확 당겨지는 순간 아파서 짚고 있던 의자를 놓쳤다. 의자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이제 잡을 것도 없이 다리를 겨우 편 상태로 서서 랭던 경의 성기를 받았다.

랭던 경은 내가 다른 가구를 짚을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목줄을 당기며 내벽을 짓이겼다. 아무것도 짚지 못하고 서서 엉덩이를 내밀고 있던 나는 허리 짓을 하는 랭던 경의 무게를 버텨 내지 못하고 결국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을 짚었다.

“아, 흐읏, 읏….”

“무릎 대지 말고, 하….”

“…아응, 아… 아!”

무릎을 대지 말라는 소리에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버텼다. 발가락부터 엉덩이까지 두 다리가 쾌감 때문에 미친 듯이 떨려서 펴고 있기가 버거웠다. 랭던 경은 상을 주듯 내가 좋아하는 데를 찍어 내려 주었다.

“흣, 응….”

“벌써 이렇게 잘 받아먹어서야…. 엉덩이 치켜들라고 했을 텐데.”

랭던 경이 흥분했는지 욕지기를 내뱉으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매 자국 위를 손으로 맞는 건 아팠다. 나는 개처럼 네발로 선 채 더 맞지 않기 위해 엉덩이를 최대한 치켜들었다.

“으응, 아, 저, 저하, 흣….”

그는 약속한 대로 예민한 곳을 짓누르고 쑤셔 주었다. 목줄을 하고 개처럼 엎드려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힐 만큼 쾌감은 강렬했다. 침과 눈물이 카펫으로 뚝뚝 떨어졌으나 목줄이 당기는 대로 입을 벌리며 울었다. 머릿속엔 점점 도미닉이 사라졌다. 다른 비참한 기억들도, 어깨에 지고 있는 책임감도, 슬픈 느낌들도.

나는 그저 엉덩이를 치켜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면 랭던 경은 내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지점을 찾아 내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가 목줄을 당길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신음 역시 자제할 수가 없었다. 엉덩이에 매가 남긴 아픔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아, 응, 흐응….”

“하, 미치게 잘 빠는군.”

겨우 힘겨운 자세를 유지하던 나는 그가 박는 힘에 못 이겨 결국 앞으로 쓰러졌다. 랭던 경은 카펫에 쓰러진 내 다리를 자신의 다리로 얽어 강제로 옆으로 활짝 벌렸다.

“엉덩이만 살짝 들어요. 개가 접붙을 때처럼 박아 줄 테니까.”

“네, 흣… 아….”

완전히 엎드린 자세로 랭던 경의 것을 끝까지 물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정확히 내가 느끼는 지점만을 찧고, 누르고, 문지르며 나를 하얗게 점멸시켰다. 눈앞은 깜빡대고 머리가 녹아 아무런 사고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약한 부분이 눌릴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랭던 경은 이번엔 목줄을 살짝만 잡아당겨 내 얼굴을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그는 내 등 위에 완전히 엎드리며 몸을 겹쳤다. 내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 채, 뒤에서 젖은 뺨을 핥아 주며 절정을 향해 나를 몰았다.

“로엘, 하… 그대의 몸이 너무 달아 허리 짓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으응, 흐윽… 윽… 저하….”

“아름다운 로엘… 흣… 더 울어요, 더…. 푸른 눈동자에 차올랐다 떨어지는 눈물이 사랑스러우니까.”

랭던 경의 손이 바닥과 내 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먼저 정액이 흐르기 시작한 내 것을 잡고 문지르며 귓가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찬사를 몇 번이고 속삭여 주었다. 나는 랭던 경이 나중에 그 말을 철회한다 해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이 진심이기만 하다면….

내 눈물을 더럽다고 비난하지 않고 매번 거리낌 없이 핥는 행위도, 단단한 두 팔로 내 몸이 으스러지도록 안아 누르는 행위도 전부 기뻤다. 랭던 경은 정말로 내 우는 모습을 좋아했으니까. 누군가 나를 애정 어린 눈길로 봐 준다는 사실이 내 영혼을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 안았다.

랭던 경은 다시 한번 성기를 끝까지 집어넣고 사정했다. 이번에도 내가 가장 느끼는 데에 박으며 사정한 탓에 예민한 곳이 정액으로 질척하게 젖으며 문질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아! 흐으윽… 아, 저하, 안, 됩니다…. 거, 거긴….”

이미 사정을 마친 나는 그곳이 젖는 걸 느끼며 그에게 잡힌 온몸을 떨었다. 성기를 물고 있는 아래쪽이 꽉, 조여들었다가 펴지며 성기를 벌름벌름 빨아 댔다. 꼭 뒤로 가는 것만 같아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뒤챘으나 랭던 경이 위에서 온몸을 누르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가락으로 카펫을 밀며 쾌감을 버텨 내는 일이 고작이었다.

“아, 저하, 아… 아, 제발, 흐윽… 무, 물려 주, 힉, 주세요….”

“그러지는 못하겠는데. 후으… 당신 밑이 달라붙어 내 좆을 빨아 대느라 정신이 없거든.”

랭던 경은 땀으로 미끈해진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춰 주며 끝까지 나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랭던 경의 정액을 모두 뒤로 받은 뒤에야 거친 섹스를 끝낼 수 있었다. 그의 건장한 몸 밑에 깔린 다리가 아직 남아 있는 쾌감 탓에 경련하며 끊임없이 떨렸다.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흐윽….”

랭던 경은 내 떨림이 그칠 때까지 목덜미와 머리카락 위,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가 겨우 진정한 나를 토닥이며 물었다.

“로엘, 내 좆을 물고 뒤로만 가니 그렇게 좋아요? 응? 좆을 요란히도 빠는군.”

“그, 그런….”

혹여나 했는데 그것이 뒤만으로 절정에 오르는 증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도미닉의 말대로 마음도 몸도 남색가가 된 것이다. 남자의 성기가 쑤시는 걸 좋아하다 못해 그런 증상까지 겪다니…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랭던 경은 집요하게 질문했다.

“좋은지 말해 줘야 알 거 아니요.”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아 카펫에 묻은 얼굴을 끄덕이자 낮은 웃음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의 숨결은 꼭 봄 햇살처럼 살랑거렸다.

“우는 건 좋지만 나머지 눈물은 침대에서 흘리도록 해요. 바닥이 딱딱해서 계속 누워 있으면 몸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오늘 랭던 경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이상한 소리였다. 섹스를 시작할 때 스푼 없이 수프를 먹으라던 명령보다 더 기묘한 걱정이었다.

나는 따끔대는 눈을 번쩍 뜨고 랭던 경을 돌아보았다. 랭던 경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가 내린 뒤 나를 들어 올려 천천히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목에 차고 있는 목줄도 풀어 주며 그 주변을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런, 목줄 자국이 다 났군. 여기 멍이 들 수도 있겠어요.”

만지는 게 아파 어깨를 움츠렸으나 나의 그런 반응은 랭던 경을 더 즐겁게 만들었다. 본인이 남긴 자국이 내게 주는 고통은 그에게 기쁨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뺨에 남은 눈물을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흡, 바닥에서 그, 그리 거칠게 다루시고 이제 와 몸이 상하는 걸 걱정하시면 이상합니다.”

“내 기준에선 이상할 게 조금도 없습니다. 내가 상하게 하는 것과 섹스가 끝나고 널브러져 있다 건강이 상하는 건 경우가 다른 거예요.”

“저하의 매질에 비하면 카펫 위에 누워 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담요만 주시면 밤새라도 할 수 있지만 매는 두세 대만 맞아도 몹시 아파 견디기가 어려운걸요. 그런데 오늘은 열다섯 대나 때리셨잖아요.”

눈물을 훌쩍대며 대답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 편히 몸을 말고 누웠다. 랭던 경은 모로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젖은 머리를 부드러이 쓸어 넘겨 주었다. 턱을 괴고 있는 섬세한 손가락과 그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우아한 균형을 이루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조차 그를 더 멋있어 보이게 하려고 그 자리에 있으려 결정한 것 같았다. 그는 아직 간헐적으로 눈물을 떨구는 내 눈가를 매만졌다.

“로엘 씨, 원하던 대로 마음껏 울었어요?”

마음을 읽힌 듯한 질문에 놀라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울기를 원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은 더 솔직하지 못하군. 울어서 눈이 부은 채 들어와서는, 미열이 남은 몸으로 섹스를 하자며 내게 치근댔잖아요. 몸도 아직 다 회복이 안 되었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자극하면 안 되죠.”

“…….”

“조금만 쉬다 일어납시다. 하녀들이 씻을 준비를 해 놨을 테니까.”

나는 곧 랭던 경의 도움으로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와 편한 잠옷을 꿰입었다. 침대로 걸어가는데 무릎이 살짝 꺾였다. 랭던 경은 다리가 풀린 나를 다시 말없이 안아 들었다. 단단한 팔이 지친 몸을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그의 손길에 왠지 눈물이 나서 나는 먼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몇 발자국 안 걸어도 되어서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있는데 로엘 씨가 힘들게 걸을 필요가 있을까요? 원한다면 한 걸음이라도 안아서 데려가겠습니다.”

랭던 경은 나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힌 뒤 곁에 앉았다. 그는 나를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끌리는 감정을 모두 들킬 듯해 급히 눈을 돌렸다.

나는 얼른 정보를 부지런히 찾아내어 무대와 현실의 선이 불분명한 이 연극을 서둘러 끝내고 싶었다. 랭던 경의 곁에 머무는 것은 되도록 연극이 아닌 현실 속이길 바랐다. 잠자리에서 거칠긴 하지만 내 눈물을 예뻐하고 아픈 나를 돌봐 주는 랭던 경을 속이는 일이 싫었고… 가능하면 먼 훗날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받길 원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랭던 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은 로엘 씨의 질문에 뭐라고 답했죠?”

“예?”

“보나 마나 형에게 내 말을 확인하러 간 거겠지. 로엘 씨는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형인지 물어봤을 테고 당신의 형은 성을 내며 아니라고 했을 테고. 그러니 울면서 이른 아침에 돌아온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도미닉에겐 신년 인사를 하러 간 것뿐이에요.”

“순진한 거요, 바보인 거요? 지금까지 당신을 속인 형이 내가 아버지의 목을 뎅강 자른 게 맞다고 순순히 인정해 줄 것 같았어요?”

“…….”

“…그 사람은 당신이 원하는 가족이 될 수 없어요, 로엘.”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랭던 경에게 기대어 위로를 받았으면서, 나는 내 과거가 모두 도미닉의 학대로 점철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왜 마음대로 추측하시고 도미닉을 모욕하세요. 모욕은 제게 주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 사람을 버려요. 그러면 모든 게 간단해집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 없이 홀로 남는 게 랭던 경에겐 간단한 일인가요? 저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도미닉뿐이에요.”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해요, 로엘. 이번에도 가서 도미닉에게 상처받고 왔으면서.”

“…….”

“당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랭던 경의 마지막 말이 나의 가난한 영혼을 뒤흔들었다. 숨이 차올라 가슴께를 들썩이며 그를 다시 밀어 냈다.

“그런 말씀 가볍게 하지 마세요, 랭던 경.”

“가볍게 하는 게 아니에요.”

“저하께서 저를 가지고 노시는 건 원치 않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지금 당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요?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 당신을 내 방에 들여서 간호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것 같습니까? 아침에 내가 누구와의 만남을 취소한 줄이나 알아요?”

“하녀에게 맡기면 되는 일을 저하께서 직접 해 주시는 일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잘 알아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랭던 경이 나를 다감하게 대해 주는 건 사실이었고 나도 그의 따뜻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욕정을 충족해 주지 못한다면 사라질 친절함이었다.

우리는 벼랑 끝에 피어난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를 향해 날아갈지 알 수 없는 관계였다. 허공을 떠도는 씨앗에게 랭던 경의 애정은 언제까지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처럼 아슬아슬했다. 바람이 멈췄을 때 떨어지는 곳이,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하고 죽어 갈 데일까 봐 두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랭던 경께서 마음과 욕정을 착각하시면 저만 괴롭고 상처받게 되어 있어요.”

나도 모르게 날것의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랭던 경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누가 누구를 상처 준다는지 모르겠군. 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기에 매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까? 로엘 그대야말로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보이는 그대로예요. 저하께서 감정을 착각하시면 제게 얼마나 위험이 되는지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만 일방적으로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로엘 씨가 내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제가 저하께 어떻게 감히 상처를 드리겠어요.”

내가 감정 없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랭던 경의 반듯한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이 내뱉었다.

“마음을 드러내기 싫을 때마다 인형처럼 영혼 없이 떠드는 그 입 좀 닥쳐요. 로엘 당신이 어려운 사람인 거 잘 알겠으니 그만하면 됐습니다.”

랭던 경은 욕을 꾹 눌러 참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실수로 시작된 말다툼이라 랭던 경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미룬 약속을 가야겠습니다. 돌아다니지 말고 침실에서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요. 밤에 또 열이 올라 고생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창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섹스를 하며 다 운 줄 알았건만, 끈질기게 남아 있던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나는 랭던 경에게 얼마나 이상한 사람일까. 심지가 없는 초이고, 관이 없는 가스등이며, 바퀴가 없는 마차일 것이다. 불을 붙이려 해도 타오를 데가 없는 초, 마음이 제구실을 못 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누구도 얻길 바라지 않았던 내 마음은 기름칠이 안 된 녹슨 톱니바퀴처럼 꽉 물려 작동하지 않았다.

가슴 속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나는 여전히 새뮤얼 프리데릭의 첩자였고 랭던 경이 외출한 기회를 놓쳐선 안 되는 처지였다. 도미닉은 새뮤얼에게 숱한 돈을 받아 냈고, 내겐 서튼가를 위해 그 금액만큼의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나는 새 붕대를 꺼내 발목을 꽉 동여매고 지팡이를 들었지만 예전처럼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주저하는 마음이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아랫입술을 물고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으나 첩자로서의 의지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나는 결국 지팡이를 침대 기둥에 다시 세워 놓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와서 첩자인 내 처지를 돌이킬 수는 없어. 하지만… 계속 이런 짓을 하다가 랭던 경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조금 전 말다툼 끝에 내게 화를 내며 나가 버린 랭던 경의 표정이 생생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냉정하게 변한 눈빛. 의도치 않게 랭던 경의 기분을 거스른 후인데 그를 속이는 첩자 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얼굴을 묻은 손바닥에 뜨거운 숨이 길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몇 번이나 깊은 호흡을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두려움에 떨리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차라리 오늘의 몫을 얼른 끝내자고 스스로를 어렵게 설득했다.

“열쇠나 편지가….”

급한 마음으로 열쇠나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찾기 시작했으나 침실은 무척 넓었다. 랭던 경의 키보다 큰 장식장과 서랍장만 해도 여러 개였다. 그 밖에 소품, 용도가 다양한 크고 작은 책상, 실내복을 넣어 두는 옷장까지 전부 찾아보려면 침실 하나에만 족히 몇 시간은 할애해야 할 듯했다.

장식장 위를 찾기 위해 발끝을 들자 통통하게 부푼 발목 뒤가 늘어나며 뻐근하게 아파 왔다. 이를 악물고 팔을 최대한 뻗어 보이지 않는 곳을 더듬었다. 장식장 위엔 열쇠나 편지는커녕 먼지 한 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녀들이 집 안 곳곳을 매우 꼼꼼히 청소하고 있어 랭던 경이 물건을 숨기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꿈치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나라면 어디다 숨겼을까. 아주 중요한 열쇠나 편지가 있다면….’

도자기를 꺼내 안에 든 물건이 있는지 흔들어 보고, 서랍들을 하나하나 다 열어 보며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침실을 이리저리 헤맸다. 베개 속, 침대 밑, 그림 뒤, 장식장, 옷장…. 찾아볼 곳은 끝없이 많았고, 있을지 없을지 모를 열쇠와 편지를 찾기 위해 들이는 긴 시간이 육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내 손이 닿는 한도 내에서 모든 곳을 찾았지만 수상한 점은 없었다. 양쪽 손등을 허리에 얹으며 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제 남은 건 벽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과 그림뿐이었다.

무거운 의자를 벽 가까이 붙이기 위해 질질 끌기 시작했다. 랭던 경이 몇 번이나 쉽게 든 의자라 가벼운 줄 알았더니 무게감이 어린나무 한 그루는 족히 되었다. 하긴, 나 정도는 가볍게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인데 의자를 옮기는 일쯤이야 그다지 벅차지 않았을 것이다.

랭던 경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나는 옮기던 의자를 내려놓고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잠시 서서 호흡을 정리했다.

랭던 경이 화를 내는 상황이 버거워 그의 마지막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나 하고 말았지만 나라고 그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내 말실수로 다쳤을 랭던 경의 마음이 걱정되어 가슴 언저리가 저렸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한참이 지나서야 가슴팍에 올려 둔 손을 겨우 떼어 낼 수 있었다.

무거운 의자를 끌고 침실의 가장자리를 돌며 벽에 붙은 장식물까지 남김없이 더듬고 뒤져 봤으나 열쇠도, 중요해 보이는 물건도 나오지 않았다. 침실을 찾아보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려 무릎과 발목이 몹시 아팠다.

같은 방식으로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응접실과 서재를 뒤졌다. 실로 파렴치한 짓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며 남의 것이라면 바닥에 떨어진 단추 한 개도 줍지 않았다. 16살 겨울, 프리데릭가를 다녀와 혼자 울며 추위에 떨었던 날도 어느 신사가 의자에 두고 간 장갑을 내 손에 끼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랭던 경의 물건에 몰래 손을 대고 있다니….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덧 부끄러운 인간이 되어 버렸다.

결국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이 바닥에 소복이 깔릴 만큼 시간이 흐르고서야 물건을 뒤지는 행위를 멈췄다. 도미닉의 집에서 도망치듯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와 랭던 경에게 상처를 주고, 그의 물건을 몰래 뒤적이며 보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긴 한숨과 함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고였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걸까. 처음엔 그저, 서튼가와 도미닉의 새로운 삶을 위해… 내 유일한 가족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워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젠 그냥 어서 이 연극을 끝내고 싶어.’

랭던 경을 향한 내 감정을 가누지 못한 탓에 모든 상황이 복잡하게만 느껴졌고 머릿속은 견딜 수 없이 어지러웠다. 상념에 잠긴 채 점점 짙어지는 붉은빛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천 권의 책이 꽂힌 책장이 서재의 한쪽 벽면을 수놓고 있었다.

“윌리엄….”

나는 눈물을 떨구며 하루 종일 서 있느라 다시 퉁퉁 부어 버린 발목을 내디뎠다.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날카로이 파고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다가간 곳은 랭던 경이 동생에게 선물한, <여신의 포도주>가 꽂힌 책장 앞이었다. 나는 <여신의 포도주> 주변의 책들을 꺼내 책 속과 책장 바닥을 샅샅이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왜 윌리엄은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던 걸까? 한 번도 못 들어 본 제목인데.’

나는 붉은 노을빛에 의지하여 저자가 적은 책의 서문을 읽었다.

<나는 신이 주신 음료, 포도주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엮어 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긴 시간 자료를 모았다. 이 책은 풍요의 여신 리베라(Libera)가 포도주의 신 리버(Liber)와 혼인한 뒤, 리베라가 포도주의 여신으로 불리게 된 신화에서 시작하여….>

서문에는 저자가 쓸 포도주와 얽힌 잡다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다. 책장을 넘겨 보다가 어딘가 낯익은 판화를 발견했다. 포도나무 아래에 서 있는 여신이 자신의 머리 위에 탐스럽게 맺힌 포도를 아끼듯 만져 보며 시선을 정면에 두고 있는 그림이었다.

각주에는 그녀에 관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포도주의 여신, 리베라>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서 여신과 꼭 닮은 얼굴을 하나를 찾아냈다. 그녀는 랭던 경의 기차 특등석 천장에 그려진 그림 속 두 여신 중 한 명의 모습과 꼭 닮은 얼굴이었다.

“리베라, 포도주의 여신….”

나는 흩어 놓은 책들을 전부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다시 책장을 둘러보는 시선 끝에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책들이 하나하나 걸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사로잡은 건 랭던 경이 주로 사용하는 책상과 가까운 곳에 꽂혀 있는 포도주 총서 목록이었다. 총 20권이 넘는 방대한 연작이었다.

나는 두근대는 심장 박동 사이사이 걸음을 내디뎌 총서 앞에 섰다. 저자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봤으나 윌리엄이나 테런스, 랭던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작은 글씨를 더듬으며 다시 살펴보고서야 총서의 13권에서 리암(Liam)이라는 작가명을 발견했다. 윌리엄(William)의 외국식 이름이었다.

지팡이를 벽에 기대 세우고 종이 케이스에 보관된 두꺼운 책을 힘겹게 꺼내 책상에 올렸다. 속지를 한 번에 움켜쥐고 첫 장부터 차르륵- 종이를 넘겼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종이가 일으키는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포근한 종이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그쳤을 때, 손가락에 몇 장 남지 않은 종이 더미 사이에서 반짝이는 물건이 붉은 노을빛을 반사했다. 나는 천천히 그 물건을 꺼내 들었다. 빛나는 은색의 보물, 내게 어떤 문을 열어 줄지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열쇠였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책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떨었다. 팔에서 돋아난 소름이 목덜미까지 치밀었다. <평등론>의 한 문단이 떠올랐다.

귀족이 쥔 성(城)문의 열쇠는 인간이 만든 제도에 따라 상속된 산물일 뿐, 전능하신 천부의 뜻이 아니다. 불합리한 신분 제도를 해체한다면 열쇠는 쓸모없어지고 각 개인의 능력과 고결성만이 어느 성(城)문을 열지 결정할 것이다.

열쇠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놀라서 이마에 땀이 바짝 솟았으나 떨리는 목소리로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누구신가요?”

“서튼 남작님, 랭던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혼비백산하여 열쇠를 종이가 파인 홈에 되돌려 놓고 책을 케이스에 꽂아 제자리에 두었다. 막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난 순간 랭던 경이 문을 열며 서재로 들어왔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심장이 귀 옆으로 올라붙은 듯 북 치는 소리 같은 박동이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다녀오셨어요.”

목소리가 나풀나풀 흔들리며 작게 새어 나왔다. 놀란 마음에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짧아져 이른 시간에 붉은 노을이 서재를 드리웠다. 노을이 낯빛을 가려 주기만을 바랐다. 랭던 경은 장갑을 벗으며 나를 흘끔 쳐다봤다.

“침대에서 쉬어야지 왜 돌아다니고 있어요? 나는 내 명령을 어기는 걸 싫어합니다. 내가 분명히 쉬라고 말했을 텐데?”

나로 인한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랭던 경의 목소리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서재에선 뭘 하고 있었어요?”

“책을, 좀 읽으려고.”

“책도 되도록 하녀에게 가져다 달라고 하세요. 나는 침실에서 쉬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딱딱하고 서늘한 말투가 몸을 떨리게 했다. 나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네, 저하. 그런데… 제가 랭던 경에게 일일이 허락받고 돌아다녀야 하는 건가요?”

“사실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로엘 씨가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묶어 두고 나갈 수도 있어요. 그리고 솔직한 말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만 한다면, 나를 제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왕을 포함해서 하는 소리요.”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병이 나아야 나를 에메랄드 저택에서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인 걸까?

한순간이었지만 마지막 추측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고통을 선사했다. 나는 이상하게 그동안 랭던 경이 내가 나가길 바란다고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제가 빨리 낫지 않아 랭던 경의 침실에 있는 게 불편하시다면 저는 다른 방을 써도 됩니다.”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랭던 경이 눈가를 또 사납게 찌푸렸다.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오전에도 그렇고…. 로엘 씨가 내 말을 얼마나 꼬아 듣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랭던 경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제가요? 방금 제 말이 혹시 저하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나요? 저는, 제가 저택에 오래 머물고 있으니 혹시 불편하신가 해서….”

랭던 경은 내가 서 있는 창가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로엘 씨는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지. 내 감정을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로엘 씨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로엘 씨가 나 외에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제대로 알고 있을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분명히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명했고, 간접적으로도 많은 걸 드러냈지만 당신은 그대로 믿어 준 적이 별로 없어요. 반면에 실수로 내뱉은 나쁜 말들은 모두 그대로 믿더군.”

그랬을까. 내가 정말 그렇게 골라 들었을까.

노을 속에 담긴 어둠이 짙어져 랭던 경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게로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나쁜 말들은 거짓이고 좋은 말들은 진실이라는 건가요?”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어떨 때는 나쁜 말이 진심일 때도 있지. 나는 내 기분이 상하면 진실을 얘기해서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망쳐 놓기도 해요. 욱하는 성미를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로엘 그대는 그 이상으로 복잡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을 알 수 없어요.”

무거운 음성으로 쏟아붓는 말들이 나를 두렵게 짓눌렀다. 나야말로 랭던 경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고 있으나 그에게 자꾸 실망감을 안기곤 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질문을 하기도 겁이 났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자 랭던 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 위로 흘렀다.

나는 그가 화가 나서 도미닉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손가락을 맞잡아 얽었다. 겁에 질려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끝에 힘을 주고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랭던 경은 고함을 치는 대신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로엘 씨,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내 오랜 침묵이 답답했을 텐데도 랭던 경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인내심을 무색게 하는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져 몰래 잇속을 짓씹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랭던 경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저하께 복잡한 사람이라니.”

“내가 아침부터 종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씀은 무슨 뜻인지 도저히….”

문장을 완전히 끝맺기 전에 이번엔 랭던 경이 참지 못하고 한쪽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 뒷말은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여 떨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려 무던히 애썼다. 어렵사리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뺨과 눈가에 몰린 열기가 내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오전에 내가 로엘 씨를 위해 주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해요? 조금 전 내가 로엘 씨가 돌아다니는 게 싫다고 하니까 그때는 또 어떻게 말했습니까?”

“…….”

“내가 대신 답을 들려주려고 물어본 게 아닙니다. 로엘 씨가 다시 말해 봐요. 내가 한 말이 뭐였는지, 그에 관해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랭던 경은 순순히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종종 마주하는, 태생부터 공작인 자의 권위적인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오전부터 지금까지 서로 나눴던 대화를 더듬었다. 겁먹고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내 머릿속은 그가 했던 말들을 빠짐없이 되살려 냈다. 어려서부터 사소한 일도 잘 기억하는 편이라 특정 시점의 대화를 그대로 떠올리는 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힘든 것은 오히려 그다음 과정이었다. 감정적인 해석. 랭던 경의 요구는 단순히 대화를 복기하는 게 아니라 그가 했던 말과 내 대답을 연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랭던 경의 엄격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쉽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게는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이 있었고, 그것이 도미닉에게서 나를 지켜 낸 힘이었다. 무너질 때까지는 버텨 보는 것.

“랭던 경께서 저를 위한다고 하셨을 때 저는….”

막상 내가 했던 대답을 다시 내뱉으려니 참으로 너무한 반응이라고 생각되었다. 경솔하기 그지없는 단어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 밑을 배회했다.

랭던 경은 팔짱을 끼고 있던 한쪽 손을 살짝 풀어 재촉하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나 그 무례함을 지적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시 떠올린 오전의 내 대답이 훨씬 불손하기 때문이었다. 힘겹게 침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저를 가지고 노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하께서 애정과… 욕정을 착각하신다는 말도 했구요.”

“조금 전엔.”

“방금은… 허락을 받고 돌아다니라고 하셔서 저와 있는 것이 불편하시면… 다른 방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로엘 씨의 생각엔 내가 했던 말들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할 소리 같아요? 대체 어떻게 하면 돌아다니지 말고 침실에 있으라는 얘기를 당신과 같이 있기 싫다는 말로 알아듣는 겁니까? 정말 그렇게 꼬아 들은 건지, 아니면 내 진심을 알면서도 상처 주려고 빈정대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에요.”

“…….”

랭던 경이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는 동안 서재의 유리창이 겨울바람에 소란스럽게 흔들렸다. 랭던 경의 목소리도 소음을 따라 가파르게 커졌다.

“로엘 당신에게 키스한 후가 아니라면 하지도 않았을 말들이었어요. 알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당신이 어렵다는 겁니다. 로엘 씨는 내 마음을 알아주질 않으니까.”

그는 마지막에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자제했다.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양손은 허리에 신경질적으로 얹혔다.

나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를 더는 정면으로 볼 수 없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노을마저 거의 사라진 시간, 어두워진 눈앞에 그의 구두가 보였다.

검은 가죽은 내 발보다 훨씬 크고 굳건한 그의 발을 견고히 감싸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그를 지탱하고 단단히 서 있는 두 발. 발목에 붕대가 감긴 내 발은 나를 그렇게 붙들어 주지 못했다.

아래로 떨어진 내 머리 위에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오늘만 그런 줄 알아요? 나는 좋은 의도로 한 말을 당신이 꼬아 들어 마음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중 최악은 당신이 의식조차 못 한다는 거예요.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당장의 상황을 피하려고 대충 대답하는 습관도 마찬가지요. 다른 사람은 로엘 씨가 그렇게 말하면 고분고분 답한다고 좋아했을지 몰라도 내게는 순간을 모면하려는 무성의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심장을 꿰었다. 바늘이 지나가는 자리가 선명히 아팠다. 나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저하. 제가 그런 식으로 곡해하여 대답하는 줄은….”

“로엘.”

섬세한 손끝이 내 턱을 잡아 들었다. 내 예상과 달리 거칠지 않은 손길이었다. 내게 힘을 행사하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두려웠다. 억지로 눈을 내리깔고 버티니 랭던 경의 입술이 눈꺼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를 쳐다보세요.”

“…네, 저하.”

짧은 키스에 힘입어 간신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은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타이르듯 속삭였다.

“로엘, 내가 그대를 알아주듯 당신도 나를 알아줘야 해요.”

“…….”

“왜 내가 그대에게 애정을 줄 리 없다는 듯 생각하고 말합니까.”

마지막 말에 입 속을 깨물어 봤지만 한참 전부터 뜨거워진 눈가에서 결국 눈물이 솟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참으려 아랫입술을 악물어 봐도 입술 사이에 숨결이 부딪치고, 내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과 피부 틈으로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간 상대의 말에 나쁜 뜻이 숨어 있다 여기고 불손하게 군 사람은 랭던 경이 아니라 어리석은 나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랭던 경, 어쩌면 좋을까요. 당신의 마음을 잃을까 봐 혼자서 매일 두려워했는데 저하께서 지금까지 제게 보여 주신 애정을 모두 놓치고 있던 것뿐이면… 당신의 감정에 흠집을 내면서….”

눈꺼풀을 내리기도 전에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는 얼굴을 계속 내보이고 있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다시 숙이려 했으나 랭던 경이 허락할 리 없었다. 젖은 눈꼬리와 뺨에 닿는 따뜻한 손끝의 온기가 느껴졌지만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해 주기 전엔 일말의 눈치도 채지 못했다. 내가 랭던 경의 말을 곡해하여 알아듣고 그에게 상처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자신 없어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이 치밀었다.

나는 흐느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는,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저하.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받는 일에요.”

그가 잠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저하께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해도 저하께 그리 어리석게 굴지는 않았겠죠. 저는 왜 랭던 경께서 이젠 저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며 행동하게 될까요.”

내 속에 자리한 깊은 불안감이 눈물을 뜨겁게 데웠다. 애정에 대한 이 끝없는 불안은 어릴 적부터 나를 쉼 없이 갉아 먹고 있었고, 기어코 언젠가는 나를 무너트릴지 모를 만성적인 병이었다.

그 병이 나를 도미닉의 꾐에 빠진 첩자로 만들고, 염탐해야 할 랭던 경에게 마음을 주는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으며, 원하던 애정을 받아도 눈치채지 못하는 눈먼 사람으로 만들었다.

눈가를 적시는 눈물이 뜨거웠다. 불안이 나를 더 괴롭히기 전에 이대로 녹아 없어지고만 싶었다.

“불손하게만 보일 제 어리석은 반응이 저하께 악(惡)함으로 비치면 어떡할까요. 결국 랭던 경께서 제게 실망하고 정말 저를 미워하게 되시면요. 저를 더 이상 용서하고 싶지 않으시면 어떡할까요.”

나는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며 붓기 시작한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우리 사이엔 깊고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서재엔 창문이 바람에 덜컹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랭던 경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숨결엔 비난이 아니라 나를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묻어났다. 랭던 경은 이내 우는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내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로엘, 그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내 뜻을 곡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손이 살며시 내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냥 아직 어린 것뿐이오.”

랭던 경의 말에 여태 도미닉에게 받아 온 괴로운 훈육이 떠올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넓은 품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뺨을 맞으며 훈계를 들었던 어두운 밤들이 지금껏 어린 나를 두려움에 빠트렸다.

랭던 경은 화가 완전히 누그러진 듯 계속 내 등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내게 당신은 낯선 감정이고 미지의 영역입니다. 나는 로엘 씨에게 자주 마음의 여유를 빼앗겨요.”

등을 쓰다듬어 주는 커다란 손바닥과 다정해진 그의 목소리가 불안에 질린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로엘 씨의 언행에 섭섭함을 느끼느라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아직 유년 시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엔 당신이 너무 어리다는 걸…. 물론 그대에게 말을 곱게 하지 못하는 내 탓도 있겠지. 내 말투가 워낙 성마르다 보니 그 점이 로엘 씨의 잘못된 생각을 더 부추긴 듯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내가 흐느끼며 긍정하자 랭던 경은 몹시 어이없어하며 사납게 대꾸했다.

“달래 주려 하는 말에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말아요. 잘못한 게 누군지는 분명한 상황이오.”

그 역시 옳은 소리라 나는 이번엔 대답 없이 잠자코 있었다. 랭던 경은 방금 전 또 벌컥 화를 낸 것을 의식한 듯 목을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튼 내 성미 때문에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은 못 하지만 내가 용서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용서는 하겠습니다. 약속해요, 로엘.”

몹시 위로가 되는 약속이었다. 나는 밀려왔던 서글픔을 삭이며 간신히 목소리에서 울음기를 지워 내고 말했다.

“그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저하. 지켜 주시기만 한다면요.”

“약속합니다.”

나를 안고 토닥이던 랭던 경이 갑자기 작게 웃었다. 그는 나를 어르듯 고개를 숙여 뺨과 머리카락 위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춰 주고 속삭였다.

“오늘 기어코 로엘 씨의 말버릇을 뜯어고치겠다고 벼르며 왔는데 어느새 우는 걸 달래 주고 있군. 조금만 나무라도 엉엉 울어 버리니. 이래서 어린 사람은….”

랭던 경의 뉘앙스가 어쩐지 무례하게 들려 나는 젖은 뺨을 문지르며 그를 힐끔 올려다봤다. 노을이 다 지고 서재 안에 겨울의 어둠이 드리웠지만 벽난로의 불빛 덕에 랭던 경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어째서 어린애인가요? 처음 말씀은 달래 주시는 거 같아 좋았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은 유쾌하지 않은 듯합니다.”

“울기나 해요. 어린애답게.”

“남작에게 어린애라 하시면 안 됩니다. 스물한 살이니 엄연한 성년입니다.”

“…침실로 갑시다. 또 짜증이 나려고 하니까. 아침에 당신이 나더러 아래 입에 좆을 박아 달라고 조를 때는 개 취급을 해도 엉덩이나 흔들더니 이깟 어린애 취급도 못 하오?”

“세상에… 저하,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듣는 귀가 없을 때도 그런 품위 없는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오전에 저하께서 시키신 그 일이 얼마나,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부디 너무 이상한 성벽은 고치는 걸 고려해 보세요.”

“유모인 마틸다나 도프 집사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아주 듣기가 지겨우니 입 다물어요. 또 화내기 전에.”

랭던 경은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나를 휙 안아 들고 성큼성큼 침실로 걸었다. 나는 가스등이 환히 켜진 침실로 들어가며 열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은빛 열쇠가 잠들어 있는 책장 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으나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랭던 경을 향한 나의 죄책감 역시 그 은색 열쇠처럼 책 속에 넣어 숨겨 두고 싶었으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랭던 경을 향한 내 바람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를 향한 감정도…. 마음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했지만, 머리가 가지는 바람은 단순한 것이었다.

‘테런스 랭던 경은 자유주의자가 아니어야만 해.’

그래야 내가 찾아낼 비밀들이 그를 상처 주지 않을 것이고 그가 쥐고 태어난 성(城)의 열쇠를 빼앗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신념과 별개로 나는 스스로가 랭던 경의 열쇠를 직접 빼앗는 사람이 되길 바라진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여전히 너무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랭던 경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역사에 휩쓸리는 사람은 따로 있고, 역사가 랭던 경과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미약한 우리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첩자가 되어 아름다운 에메랄드 저택을 훔쳐보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나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이 나의 단순한 불안이길 바라며 두려움에 떨리는 뺨을 그의 어깨에 기대자 랭던 경이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춰 주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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