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탄절
새뮤얼, 랭던 경이 서재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작성하였습니다. 글씨를 다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금괴와 관련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어 짧은 서신을 보냅니다.
‘1월 …일, 오전…, 포도나무 아래…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
나머지 글씨는 흐릿해서 읽을 수 없었습니다. R.S.
***
랭던 경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열흘 사이 몸 상태가 부쩍 좋아져 짧은 거리를 직접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밖에 나가는 건 무리여서 집 안에서 가벼운 실내 산책을 하거나 강아지들의 간식을 주는 게 내 주된 소일거리였다.
저택의 강아지들은 성격이 제각각이라 나를 발견하면 낯을 가리며 도망치는 개들도 있었으나 사냥을 같이 다녀온 적이 있는 레트리버 ‘새미’와 어린 보더콜리 ‘아더’, 비숑 ‘루비’는 매우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 거동이 어려워 집에만 있는 내게 작은 생명들은 몹시 큰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도미닉이 강아지를 싫어해서 뒤늦게야 알게 된 기쁨이었다.
그쯤, 나아지는 발목 상태와는 반대로 가슴 한구석에 오래 자리 잡은 지병이 악화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도미닉이 내 마음에 남겨 온 상처와 밤마다 환영에 시달리는 열병이었다.
나는 지난 5년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이유를 그날 거듭됐던 혼절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 왔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시신을 훼손하고 서튼가의 명예를 실추한 일로 도미닉에게 끊임없이 비난받았지만 내 죄의 대가라 생각하고 속으로 꾹꾹 견뎌 왔다.
그런데 이제 와 그 일을 치른 장본인이 도미닉일지도 모른다니.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내 심약한 정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설이었다. 혹시라도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도미닉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유일한 가족인 그가 본인이 아버지의 시신을 훼손해 놓고 내게 잘못을 뒤집어씌운 뒤, 나를 죄책감이란 지옥에 빠트린 장본인이라면.
중압감을 견뎌 내지 못한 마음속을 아버지의 잘린 머리가 쉽게 드나들었다.
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워 서재에서 신문을 읽다가 문득 창밖을 쳐다보았다. 검은 밤하늘에서 함박눈이 떨어졌다. 노르크의 겨울은 눈이 오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에메랄드 저택을 찾는 손님들이 곤욕을 치르면 어쩌나 염려스러울 따름이었다.
반대편에 기척이 느껴져 턱 끝을 비스듬히 틀었다. 랭던 경이 막 문을 열며 들어왔다.
연미복을 입고 머리 손질까지 마친 랭던 경은 고귀하고 기품이 넘치는 신사의 교본이었다. 깔끔히 넘긴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어두웠고 눈빛은 무르익은 들판 같았으며 이목구비는 공들인 조각보다 세련되고 단정했다.
“곧 정찬이 시작됩니다. 얼른 준비해요.”
“제가 크리스마스이브 정찬에 참석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릴 텐데요.”
“로엘 씨가 다쳐서 이 저택에 묵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노르크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수군거리는 일을 말씀드린 거예요.”
“누구 앞. 내 앞에서?”
랭던 경은 별 웃긴 얘기를 다 들어 본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으레 그렇듯 내 뺨이나 이마에 입술을 눌러 줄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는 주머니에서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서랍에 툭, 던져 넣고 닫았다.
랭던 경에게는 열쇠 꾸러미가 여러 개 있었다. 매번 금고에 넣어 두거나 보관하는 장소가 바뀌는데 갑작스레 위치를 알게 되어 흠칫 놀랐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떨떠름한 기회였고, 내 앞에서는 그가 마음을 놓는다는 증거였다. 새뮤얼이 바랐던 그의 방심이었다. 서랍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신문에 눈을 두었다.
‘성탄 세금 징수에 시민들은 반발, 긴급 귀족 의회는 전원 찬성’이라는 기사 제목이 시선을 붙들었다. 성탄 세금이라니…. 추운 겨울, 시민들이 온 마음으로 즐거워야 할 축일에 세금을 부과하는 건 가혹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랭던 저하, 성탄 세금을 걷는다는 소리가 사실인가요? 지난가을 추수 때도 세금이 올랐잖아요.”
“그렇습니다. 지난번 로엘 씨가 다쳤던 밤에 왕궁에 다녀와서 백성들에게 비수를 꽂았다고 말한 것 기억나요?”
“네.”
“그 세금 일이었습니다.”
“…저하께서도 동의하신 거예요?”
“그랬습니다. 왕이 하자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요?”
신문을 든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종이가 구겨졌다. 화가 나서 눈가에는 열이 올랐다. 다시 입술을 열었을 때 랭던 경이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신문을 밑으로 치우며 얼굴을 마주 봤다. 가까이 다가온 보석 같은 눈동자 때문에 잠시 멈칫한 사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빨리 대화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괜히 따져 물으며 힘 빼지 마세요. 왕궁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항은 기밀이오.”
“반대한 사람이 샤를 대공밖에 없다니 정말 슬픈 일이에요. 이러니 백성들이 샤를 대공의 편을 드는 겁니다.”
“평민들이 샤를 대공을 지지하는 건 알지만 당신은 일반 시민이 아닐뿐더러 그 ‘서튼’ 남작님이시니 말을 조심해야죠. 누가 듣겠습니다.”
랭던 경은 내게 “무가치한 호기심은 접어 두고 당장 닥친 정찬 준비나 하라”는 유익한 조언을 남긴 채 잠시 서재를 비웠다.
나는 신문을 고이 접어 책상에 올리고 그가 열쇠 꾸러미를 넣은 서랍을 보며 어떡할지 망설였다. 열쇠 꾸러미의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내가 보는 앞에서 서랍에 넣어 둔 걸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열쇠일 테지만 최근에 새뮤얼에게 보낼 만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 눈치가 보이던 차였다. 중요치 않은 내용이라도 구색을 갖출 게 필요했다.
간을 졸이는 일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책임감이 승기를 잡았다. 결국 서랍을 소리 나지 않게 열어 열쇠 꾸러미를 꺼내고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랭던 경이 들어와 몸을 굽힌 나를 발견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오른 발목을 감은 붕대 상태를 확인 중이었다고 말하면 적절할 듯싶었다.
땀이 나는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늘 잠겨 있는 책상 마지막 서랍에 열쇠를 하나, 하나 집어넣었다. 손이 떨려 열쇠가 구멍에 쇳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맞는 게 있을까? 없을 수도 있어.’
8개쯤 넣었을 때 드디어 열쇠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땀이 비죽 솟았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책상 위로 눈을 빼꼼 내밀었다. 랭던 경도, 하녀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서재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눈을 문에 고정한 채 손만 움직여 서랍을 재빨리 열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안에는 물건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랭던 가의 나뭇잎 모양 인장, 빛바랜 색깔을 띤 두꺼운 메모지들, 그리고 작은 수첩. 메모지를 만져 질감을 확인해 봤는데 내게 사용한 적이 없는 종이였다. 수첩의 속지는 달력이었고 내년 1월 달력에 벌써 여러 가지 일정이 표시되어 있었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날짜는 6일, 10일, 24일, 25일로 날짜별 메모는 다음과 같았다.
1월 6일 7:30, B에게 2M
1월 10일 (메모 없음)
1월 24일 (메모 없음)
1월 25일 기차 시간표 인쇄, 5천 장
급하게 날짜와 내용을 외우고 수첩을 되돌려 놓았다. 열쇠로 재빨리 서랍을 잠그자마자 서재 문고리가 돌아가는 모양이 보였다. 죄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렸을까? 랭던 경이면 어쩌지. 표정에서 티가 날 것 같아….’
덜덜 떨며 되돌려 놓지 못한 열쇠 꾸러미를 쥐고 긴장한 채 허리를 폈다. 랭던 경이 아니기만 빌며 확인한 얼굴은 다행히 하녀 애니였다. 샬롯과 함께 자주 침실을 드나드는 하녀였다.
“서튼 남작님, 안녕하세요. 샬롯이 정찬 준비로 분주하여 제가 올라왔습니다. 랭던 공작님께서 지시하셔서요. 준비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애니 양. 붕대를 단단히 감으려 하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제가 직접 할게요.”
“네, 남작님.”
랭던 경이 들어왔다면 손에 든 열쇠 꾸러미를 되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초조했던 나는 애니의 등장에 한시름 덜었다. 서랍을 살짝 열고 꾸러미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일어나며 서랍을 확실히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의 도움을 받아 옷방으로 갈 때까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연미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1층으로 내려갔는데 일전에 어린 윌리엄과 함께 있을 때 마주쳤던 포도주 장수가 나타났다. 그는 그때보다 큰 수레를 끌며 들어오고 있었다. 윌리엄이 포도주 장수의 장갑은 더럽지만 얼굴은 무척 깨끗하다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났다.
“안녕하세요. 매번 수고 많으시네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가 놀라며 발을 멈추었다. 포도주 장수는 어색할 정도로 길게 망설이다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때문에 오셨나 봐요. 수레가 포도주로 꽉 찼네요.”
“네,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무척 바쁘네요.”
“바쁜 일 잘 마치시고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성탄절 보내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신사분께서도 뜻깊은 성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포도주 장수의 얼굴은 모자챙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챙 아래로 희고 깨끗한 뺨이 언뜻 보였다. 다시 들어도 억양이나 사용하는 단어가 무척 교양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말대로 잡일용 면장갑만은 더러운 것을 끼고 있었다. 꼭 다른 사람의 면장갑을 빼앗아 낀 듯 어울리지 않았다. 더 잡아 두면 혹시 관찰하는 티가 날까 싶어 포도주 장수가 곤란하지 않도록 바로 자연스레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는 이만.”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의 셔츠 주머니에서 하얀 분필이 삐죽 튀어나왔다. 분필은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으나 포도주 장수가 허리를 펴 다시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갔다.
그는 이내 수레를 끌고 하인들이 오가는 작은 복도로 사라졌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이나 건축일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분필을 들고 다닐까. 포도주 장수가 분필을 쓸 일이 있나.’
깨끗한 얼굴, 더러운 장갑, 교양 있는 억양, 하얀 가루, 하얀 분필.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포도주 장수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풍겼다. 일전에 그의 옷에 묻어 있던 하얀 분진이 생각났다. 촉감이 분명 밀가루와 달랐는데 혹시 분필 가루였던 걸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곱씹으며 정찬 자리에 참석했다.
내 자리는 상석에 앉은 랭던 경의 오른편이었다. 몇 달 전 에메랄드 저택에 왔을 때 긴 식탁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람들 머리 너머로 랭던 경을 훔쳐보던 처지와 딴판이 된 것이다. 내일이면 노르크 귀족들의 입에 성탄 인사보다 오늘 내 자리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오르내릴 듯했다.
나와 마주 앉은 워맥 장군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람으로 하녀가 머리카락을 손질하느라 무척 애먹었을 것이 분명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좌우에서 건져 올린 몇 줄기의 갈색 머리카락이 텅 빈 가운데를 애써 가리고 있었다. 그는 무척 목소리가 걸걸하고 웃음소리가 호탕했으며 누가 봐도 군인답게 각이 잡힌 태도를 유지했다.
“서튼 경, 몸은 괜찮으십니까? 랭던 경의 저택에서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바보같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한동안 열이 나서 움직이질 못했습니다. 다행히 랭던 경께서 저택에 묵으며 치료하도록 배려해 주셔서 지금은 지팡이를 짚고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됐어요.”
“로엘이….”
랭던 경이 친근히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주변의 대화 소리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내 다시 시작됐다.
“…아직도 간헐적으로 열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긴 어려운 상태입니다.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이니 나을 때까지 묵는 건 당연한 일이오.”
그는 내 쪽으로 손을 뻗어 허벅지를 잡고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애정 어린 손길이었으나 내 것이 수납되어 있는 허벅지 안쪽이었으므로 나는 금세 얼굴이 타는 듯 붉어져서 눈 둘 데를 찾기 어려웠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눈이 흘끗, 내 허벅지에 얹힌 랭던 경의 손을 향했다. 나는 빨개진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단둘이 있을 때처럼 손을 잡고 밀어낼 수도 없어 그가 먼저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주무르고 나서야 랭던 경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이번 모임에서는 겉도는 일 없이 랭던 경의 바로 옆에서 다른 신사들과 여송연을 태우고 같은 테이블에서 카드 게임을 했다. 랭던 경이 장담한 대로 아무도 감히 나를 흘끗대며 쳐다보거나 대놓고 수군거리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예의 발랐고 내 성(姓)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으며 나의 농담에 가슴을 젖히며 웃어 주었다. 오랜만에 진짜 사람들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자정까지 계속되는 모임은 재밌으면서도 몹시 피곤했다. 혼자서 여송연을 태우며 쉴까 해 카드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송연 좀 태우며 쉬다 오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지. 혼자서 거동하기 힘들잖아요.”
랭던 경이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하녀가 가져다준 얇은 코트를 입고 바깥바람을 쐬러 한갓진 발코니로 나갔다. 나는 아픈 발목 때문에 서 있기가 어려워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여송연을 입에 물었다. 랭던 경이 성냥개비를 그었다. 그가 붙여 준 연기를 빠끔빠끔 빨며 여송연 끝을 골고루 태우고 나서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하, 허벅지는 왜 이리 만지십니까? 다른 사람 보기 민망스럽습니다. 귀부인들도 계시는데요.”
랭던 경에게 참고 참았던 불만을 토로했다. 랭던 경은 수치심은커녕 무척 당당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바지 위로 자지를 더듬은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박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예민해요?”
세상에… 자…, 거기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다니….
차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불경하고 상스러운 예시에 놀라 하마터면 시가 연기를 삼킬 뻔했다. 랭던 경은 아기 천사 조각상이 달린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대며 섰다. 나는 붉힌 얼굴을 비스듬히 숙이며 추운 바깥 공기에 살짝 몸을 떨었다. 랭던 경은 여송연을 입에 문 채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밤마다 당신 옆에서 욕정을 억누르는 사람을 변태 취급 하는군.”
“…저하께서 욕정을 참으시다니요?”
나는 깜짝 놀라 덧붙였다.
“어젯밤 새벽에 허벅지 사이로 들어온… 그건 무엇입니까. 그래서 제가 깨지 않았습니까.”
“곤히 잠든 흰 뒷덜미를 보니 박고 싶은 욕정이 치밀어 최대한 인내한 겁니다. 그대도 자다 말고 깨서 내 손에 싸질렀잖아요.”
더 대화를 이어 나가도 내가 이길 수 없음이 확실했다. 수치스러운 언사에 어느새 뜨거워진 눈꺼풀을 깜빡였다. 랭던 경은 삽입만 하지 않을 뿐 내 몸에 자신의 것을 문지르고 비비며 수치 주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았다. 욕정이 치밀 때면 내 피부 곳곳에 성기를 문대고 사정하여 그의 정액이 묻지 않은 데가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키스만은 하지 않았다. 새뮤얼의 말대로 그에게 나는 애정 없이 욕구를 푸는 대상일 뿐이었다.
랭던 경은 내 곁으로 다가와 옆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 허벅지를 쥐고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를 만난 뒤 내 목덜미엔 붉은 흔적이 가시지 않았다. 가슴과 배꼽 주변은 온통 입술에 빨리고 이에 씹힌 자국으로 군데군데가 붉었다. 그가 목덜미에 이를 쑤셔 박는 야릇한 고통이 결국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흣, 아….”
“수납된 좆을 주무를 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하니… 만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저하, 읏… 제가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 응… 소문이….”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혀가 어젯밤 랭던 경이 내 엉덩이를 핥아 주던 느낌을 되살렸다. 나는 그의 손을 치우려 노력했으나 랭던 경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예의가 중요치 않으니 그대가 허락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당신과 접붙고 싶어요. 그래야 저들이 눈알을 굴리며 아름다운 그대를 저질스럽게 훑지 않겠지. 그들의 눈을 도려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아, 무도… 흣, 저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으응….”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손길에 나는 굵은 손목을 잡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말고 나, 나중에 하시는 게 어떠세요.”
“언제.”
“…밤에, 해 주세요, 저하. 밤에, 그만해 달라 빌 때까지… 흔적을 남기시고 허벅지 사이에, 흣….”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하며 애원하는 것이 랭던 경이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저택에 머물며 그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랭던 경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간청하니 할 수 없군. 그럼 밤에 당신의 허벅지 사이를 하얗게 적시겠습니다. 그대도 내 손을 정액으로 적셔 주겠지? 응?”
“…무, 물론입니다.”
그때 테라스 문가에 워맥 장군이 나타났다. 그가 문을 여는 소리에 랭던 경은 내게서 고개를 떨어트렸지만, 허벅지에 얹은 손은 바로 무르지 않았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떨구며 랭던 경이 목덜미를 빨아 주는 바람에 흐트러진 호흡을 애써 다듬었다. 워맥은 아무것도 목격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랭던 경, 저는 이만 저택을 나서야겠습니다.”
“그래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워맥 장군이 돌아간다면 그만 모임을 끝내야겠습니다. 나도 슬슬 피곤하던 차였어요.”
랭던 경은 그제야 손을 느릿느릿 거두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간신히 몸을 폈다.
랭던 경이 밖에서 손님들을 다 배웅하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홀에 앉아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홀에서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코와 귀 끝만 조금 붉게 얼었을 뿐, 달빛을 받아 유난히 깨끗하고 희어 보였다. 저 단정하고 완벽한 얼굴에 그런 색욕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묘했다.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랭던 경이 들어오길 기다렸으나 그는 여전히 밖에 서 있었다. 집사가 랭던 경에게 무언가 지시를 듣더니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서튼 남작님, 랭던 공작님께서 밖으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밤이 늦었는데요?”
“네.”
집사는 밖으론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부은 발목을 끌고 바깥에 나갔다. 랭던 경은 노란 가스등 불빛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눈이 그쳤던 하늘에서 다시 옅은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저하, 추운데 바로 들어오시지 않구요.”
“메리 크리스마스.”
랭던 경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의 다정한 인사에 나는 잠시 발을 멈칫했다. 자정이 지나 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입술 역시 잔잔한 호선을 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는 눈이 내리는 밤하늘 아래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첫 성탄 인사를 주고받았다. 노란 불빛이 서로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함께 맞이한 첫 성탄을 기념하여 마차를 타고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게 어떻습니까? 밤의 호수도 제법 운치 있습니다.”
“저야 좋습니다. 오래 밖에 나오질 못해 무척 답답했어요.”
랭던 경의 부축을 받으며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랐다. 사방에 유리창이 달린 마차로 바깥 풍경이 잘 보였으며 공기 또한 훈훈하게 데워진 상태였다.
마부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잘 정비된 정원의 길을 따라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걷기 좋은 부드러운 길바닥 주변엔 가스등이 은하수처럼 촘촘히 서 있었다. 에메랄드 저택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빛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밤에 정원을 구경하는 일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다친 후 첫 외출이라 몹시 기분이 상쾌했다.
“밤의 정원도 운치가 있어 너무 좋습니다, 저하.”
“몸이 불편하진 않습니까? 오늘 꽤 늦게까지 무리했잖아요. 내일 퍼렐 의원에게 당신을 파티에 참석시켰다고 혼나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로엘 씨가 계단에서 기다린 일로도 나를 잡더군. 로엘 씨가 아파서 더 성이 나는 건 나인데 말입니다.”
랭던 경은 내 이마를 짚고 잠시 열을 쟀다. 이젠 익숙한 손길이었다.
“괜찮습니다, 저하. 이제 열은 잘 오르지 않아요. 다리와 허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오늘 많이 걷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마에 얹힌 커다란 손이 애틋함을 남기고 떨어졌다.
랭던 경은 눈이 잠시 걷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빛이 투명하게 내려앉은 그의 옆모습은 마차가 덜컹일 때도 흔들림 없이 곧았다.
나는 밤이 안겨 준 어둠을 가림막 삼아 랭던 경을 염탐했다. 그는 할 말을 생각하는 듯 창문에 눈을 둔 채로 입술을 작게 달싹이기도 하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기도 했다. 랭던 경은 자신의 표정에 일고 있는 미묘한 변화를 모를 것 같았다.
사색 끝에 어둠을 비집고 그의 신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엘, 처음에 당신이 내가 그대를 계속 만나려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던 것 기억하나요?”
그가 아직 창문을 보고 있어 유리에 잠시 하얀 김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랭던 경의 말투는 평소보다 차분하고 묵직했다. 나 역시 그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저하.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저하께서 다친 저를 저택에 머무르게 해 주셨을 때 깨졌어요.”
“당신이 얘기했던 대로 나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관계를 오래 지속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로엘 그대가 처음이에요.”
이번엔 그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옮겨 왔다. 조금 전 발코니에서 내게 장난을 치고 희롱을 걸던 가벼운 분위기는 달빛에 녹아 사라졌다. 녹색 눈에 오롯이 담긴 진실한 무게감이 마차 안의 공기를 치밀하게 만들어 숨을 쉬기가 벅찼다. 부드러운 음성과 달각대는 말발굽 소리가 고즈넉한 새벽 공기를 채웠다.
“로엘 씨는 처음부터 내 마음이 돌변할까 걱정이 되었겠지만 나는 그 반대였습니다. 얼마 전에 당신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나는 그 후 내 감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엘 씨를 향한 마음이 식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갈등을 겪다가 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상대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런 애정 어린 관계를 지속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당신처럼 내 심부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오.”
랭던 경이 담담히 말하는 동안 심장이 여러 번 흠칫 뛰었다. 그때 나는 랭던 경의 기분만 염려하느라 내가 하마터면 그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넘어갔다. 다시 심장이 벌렁, 몸 안에 뜨거운 액체를 흩뿌렸다.
“그런데 나는 로엘 당신에게 식고 싶지 않았어요. 계속 뜨겁고 싶었소.”
랭던 경의 말이 심장을 꿰뚫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가슴께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손톱 밑으로 요란히 뛰는 나의 박동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하께서, 저를 향한 감정을 잃고 싶지 않으셨던 건가요?”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내게 당신을 돌보는 일은 오랜만에 경험하는 감정적 유대였고, 고용인이 아닌 당신이 집에서 나를 맞아주는 것 역시 잃고 싶지 않은 애정이었어요.”
그날의 다툼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니…. 랭던 경 역시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일어난 나에 대한 애정을 잃고 싶지 않아 두려웠던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손끝이 떨렸다.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녹색 눈동자에 깊숙이 숨어 있던 고독이 처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길 허락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랭던 경은 내 뺨에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내고, 손끝으로 머리카락과 뺨을 부드러이 훑어내렸다. 달빛이 천천히 사라진 창문엔 어느덧 다시 굵은 눈송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는 내 목소리 사이로 유리에 부딪치는 눈 소리가 스몄다.
“…제가 랭던 경께서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을 지켜 냈을까요?”
“로엘 씨, 나는 당신이 내게 한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가 나를 소문 속에 떠도는 살인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빛을 거듭 확인하며….”
“…….”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내리고 있는 눈이 언젠가 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랭던 경은 조심스레 내 손을 쥐었다. 나는 그의 마음에 오랜 시간 내렸을 먹먹한 눈의 깊이를 생각했다.
우리는 마차에 나란히 앉아 연인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호젓한 성탄의 새벽에 잠겼다.
어느덧 다다른 호숫가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옅은 눈이 내리는 밤의 호수엔 신화에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호수 위를 덮은 아지랑이는 요정처럼 춤을 췄다.
말들이 호수 주변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을 때 랭던 경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당황하여 쉽게 받아들지 못하고 랭던 경을 빤히 올려다봤다.
“저하, 선물까지…. 저는 죄송스럽게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쩌죠.”
“다쳐서 집에만 있는데 선물 준비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걱정 말고 열어 봐요. 조금 전에 털어놓은 내 마음을 로엘 그대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습니다.”
마차에서 계속 잡고 있었던 랭던 경의 손을 조심히 놓고, 작은 상자를 받아 매듭을 풀었다. 열어 본 상자 안에는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금색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사려 깊은 선물이었다.
양손으로 소중한 선물을 꺼내 들고 그를 올려다보자 랭던 경이 더 살펴보라는 듯 가벼이 눈짓했다. 혹여 흠집이라도 날까, 나뭇잎이 촘촘히 조각된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 시계를 살펴봤다. 나뭇잎은 랭던가의 인장 같기도, 겨우살이 같기도 했다.
회중시계는 장인이 만든 듯 섬세한 시곗바늘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였고 뚜껑 뒷면엔 어떤 문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작고 빽빽한 글자는 어둡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네요.”
“그래도 한번 읽어 보세요.”
랭던 경의 권유에 나는 그에게 등까지 돌리고 마차의 창가에 바짝 붙었다. 유리 창문에 입김이 뽀얗게 어려 손으로 훔쳐 내고 회중시계의 글씨를 가스등의 불빛에 비춰 보았다. 회중시계 뚜껑의 뒷면이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며 몸에 새겨진 글자를 세상에 드러냈다.
성탄의 밤,
그대에게 드리는 첫 입맞춤을 기억해 주시오.
나는 문장을 읽자마자 너무 놀라 “아!” 소리를 내며 회중시계를 떨어트렸다. 체인이 손가락에 걸려서 귀한 회중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간신히 면했다. 그러나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이 굳어 회중시계를 추스르지는 못했다.
랭던 경은 뒤에서 내 허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나를 그에게로 깊게 끌어당겼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체인이 흔들려 회중시계는 그네처럼 공중을 오갔다. 좌우로 움직이던 시계는 랭던 경이 체인이 감긴 내 손을 부드러이 잡고서야 흔들림을 멈췄다.
나는 그의 품에 등을 기대 안긴 채 몸을 비스듬히 틀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랭던 경의 눈빛에 밤의 호수와 같은 고요한 열기가 어렸다.
“로엘, 그대와 첫 키스를 나눌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 주겠어요?”
무척이나 정중한 부탁이었다. 나는 뜨거워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랭던 경의 얼굴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고 나는 떨리는 눈꺼풀을 내렸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숨결이 맞닿는 순간, 나는 생애 첫 키스까지 모두 테런스 랭던 경에게 주었다,
랭던 경에게 이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선뜻 그에게 먼저 키스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우리가 나누는 입맞춤은 나를 향한 감정이 지속되리라는 랭던 경의 확신이었고, 그가 알아본 내 진심의 증거였다.
랭던 경은 겹친 입술을 움직이며 몇 번이나 가볍게 입을 포개고 그에게 안긴 채 떨리는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나는 떨림을 참을 수가 없어 그만 그의 품에서 도망치고 싶어졌으나 좁은 마차 안, 밤이 깊은 호숫가에서 랭던 경에게 벗어날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촉, 부드럽게 입술을 누른 랭던 경이 얼굴을 멀리 떼어 냈는지 갑자기 뺨 주변의 체온이 낮아졌다.
여기서 끝인 걸까, 의아함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 랭던 경의 짙은 녹색 눈동자에 내 새파란 눈이 맞닿았다. 그는 내 팔을 부드러이 잡고 비스듬히 안겨 있던 내 몸을 바로 끌어당겨 품에 고쳐 안았다. 어느새 나는 랭던 경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긴 모양새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랭던 경이 고개를 숙이며 내 턱 끝을 잡았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야 입을 맞춰 미안합니다. 이상하게도… 당신에겐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키스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하….”
나만 우리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랭던 경 역시 그와 나의 키스를 신경 쓰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이 같았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떨림이 되어 심장에 남았다. 떨리는 입술 위로 다시 랭던 경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겹쳐오는 그의 입술은 정중하고 따뜻했다. 부드러운 혀가 입 속을 침범했을 때는 심장이 덜컹거려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첫 입맞춤의 어수룩함인지, 오래도록 의식해 온 키스여서 그런지, 나는 그의 혀가 입 속을 조금 문질렀을 뿐인데 숨이 가빠 제대로 호흡하기조차 어려웠다. 가슴께를 들썩이며 넓은 어깨를 붙들었다.
랭던 경은 이내 엉켰던 혀를 떼어 내고 내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혀끝을 자신의 입 속으로 가져가 빨았다. 그 틈에 겨우 모자란 숨을 들이켰다. 흔들리는 숨소리에서 여지없이 떨림이 묻어났으나 가쁜 호흡을 숨길 여유는 없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등 전체를 감싸며 내 심장을 그의 가슴 위로 붙였다.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으응….”
랭던 경은 나의 혀끝을 조심히 빨아 주다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 질척하게 혀를 맞비볐다. 두 혀는 녹진하게 엉켰다가 풀리고, 다시 젖은 숨소리와 함께 끈적하게 뒤엉켰다가 간신히 서로를 놓아 주길 반복했다.
눈가에 미열이 올랐고 숨은 늘 한 모금씩 부족했다. 그런데도 치열을 세세히 훑고 입 속의 여린 살을 문지르는 그의 모든 움직임이 꽃잎 끝에 맺힌 꿀처럼 달콤했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은 랭던 경의 가슴팍 위에 그대로 전달됐다. 그 떨림이 그를 향한 나의 연서(戀書)였다.
어느새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 매달려 키스를 갈구하고 있었다. 키스는 고통이란 없는 행위였다. 서로의 입 속에 젖은 혀를 집어넣어 상대방의 타액에 나를 적시고, 은밀한 숨결과 고요한 신음을 주고받는 달콤한 호흡이었다. 랭던 경이 내 혀를 빨아 당겨 그의 입 속에 가둔 채 빨 때마다 신음과 함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흣… 응….”
“로엘, 나의 로엘….”
랭던 경은 이따금 키스를 멈추고 뺨과 목덜미에 젖은 입술을 눌러 주었다. 숨이 가빠 키스하는 내내 가슴께를 들썩이는 내가 호흡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작은 배려였으나, 그 작은 스킨십마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설 만큼 저릿했다. 뜨거운 혀가 목선을 핥을 때는 그가 내 혀를 다시 맛볼 거라는 흥분이 달뜬 열이 되어 뺨에 내려앉았다.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다면,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면, 랭던 경에게 붉어진 몸을 드러내며 첫 입맞춤의 전율을 낱낱이 들켰을 것이다. 흩날리는 눈이 덜컹대는 마차의 창문에 온몸을 부딪치며 유리에 얼음꽃이 되어 남았다.
좁은 마차 안에서 나누는 키스는 끝을 모르고 점점 더 뜨거워졌다. 랭던 경에게 매달려 있던 나는 어느새 그의 열렬한 키스에 몸이 뒤로 밀려 마차의 창문에 뒷머리를 찧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맞추면서도 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랭던 경은 흔들리는 마차에서 내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 읏….”
부드럽게만 키스하던 랭던 경이 이번엔 혀를 내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나를 먹어 버릴 듯 거칠게 움직였다. 그의 혀가 깊게 침범하여 내 좁은 입 안은 두툼하고 물컹한 혀에 가득 짓눌렸다. 나는 구음할 때처럼 그의 혀를 빨고, 그가 내게 해 준 것처럼 가볍게 혀를 물었다가 놓았다.
랭던 경의 큼직한 손이 그에게 두르고 있던 내 양손을 한 번에 잡아 마차 벽에 밀어붙였다. 손등에 차가운 창문이 닿고, 냉기를 만난 우리의 열기는 곧 찬 물방울이 되어 손등을 적셨다. 랭던 경은 창문에 닿아 젖어 가는 내 손을 감싸며, 몇 번이고 질척한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맛보고 혀를 문질렀다.
“랭던 경… 아….”
촉,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과 함께 커다란 손이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는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의 로엘… 그대의 입술을 탐하느라 내가 어디 있는지도 그만 잊었습니다.”
젖은 입술이 제멋대로 벙긋대며 랭던 경을 불렀다.
“테런스, 저는 당신이 제게 키스해 주길 내내 기다렸어요.”
키스로 머릿속이 녹은 탓인지, 그만 랭던 경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랭던 경은 내 입에서 흘러나온 ‘테런스’라는 이름에 흥분한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입술을 맞대고 문질렀다. 랭던 경의 격정이 나를 떨리게 했다.
그는 입술을 거칠게 맞비비며 내 숨이 모자랄 정도로 혀를 빨아 당기고 짓눌렀다. 그러나 키스는 한없이 애정 섞인 행위로 느껴졌기에 이대로 그에게 먹힐 듯한 압박감조차 달고 달았다. 랭던 경은 격정적인 입맞춤 끝에 나의 젖은 눈가를 핥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이름을 불러 줘요, 로엘.”
“…저의, 읏… 무례한 실수는 부디 한 번으로 참아 주세요, 저하.”
“어째서 무례한 실수라고 합니까.”
“공작 저하의 이름을 허락도 받지 않고 불렀으니 무례한 실수입니다.”
“내가 허락합니다.”
“존함을… 함부로 계속 부르기 어려운 저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세요.”
그는 다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짧게 입술을 겹쳤다가 놓았다. 랭던 경은 어느새 그의 몸 아래 깔려 마차 의자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로엘 당신도 그대와의 첫 입맞춤을 침대 위에서 나누지 않고, 특별한 날 당신의 기억에 새겨 넣고 싶었던 내 욕망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오.”
우리는 마차가 호수를 지나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서로의 입술만을 탐했다. 그는 내 손을 가져가 자신의 것을 주무르게 하지도, 내 몸 위에 문지르지도 않았다. 이따금 단단해진 그의 것이 허벅지에 닿았지만 그뿐이었다. 랭던 경은 그저 내 손을 잡거나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쓸어내리며 성탄의 거룩한 밤을 뒤덮은 고요한 눈송이처럼 정중히 키스했다.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진실로 서로와 애정 어린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내 몸이 아닌, 내 마음을 탐하는 테런스 랭던 경과의 조우였다.
랭던 경 역시 그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을 내어 주는 로엘 서튼을 만났음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마차 안에서 키스하는 그 순간만큼은 마차 밖의 세상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 순간이 테런스 랭던 경에게도 외롭지 않은 밤이길, 내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작은 염탐들이 부디 그를 다치게 하지 않길…. 나는 랭던 경에게 결코 내어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마음과 애정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다.
성탄의 밤, 달콤한 첫 키스 아래 나의 설익은 맹세가 깨어졌다.
***
나는 펜촉을 잉크에 적셔 랭던 경의 수첩을 보고 외워 두었던 일정을 편지지에 적어 넣었다. 새뮤얼에게 보낼 서신이었는데 처음으로 정보를 누락시켰다. 며칠 전 새뮤얼에게 금괴와 관련 있어 보인다며 전달했던 ‘포도나무’ 메모의 내용인 ‘1월 …일, 오전 …, 포도나무 아래…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1월 6일, 7:30, B에게 2M’을 ‘포도나무’ 메모에 채워 넣으면 ‘1월 6일, 오전 7시 30분, 포도나무 아래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라는 문장이 되었다. 여전히 해석하기 불가능했지만 이 일정이 사실이라면 랭던 경이 금발 여인을 통해 B라는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돈은 무려 200만 골드(2 Million Gold)나 되는 것이었다.
랭던 경을 곤란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 정보는 되도록 보내고 싶지 않아 마음에 걸리는 1월 6일 자 일정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사실대로 적어 보냈다. 랭던 경에게 싹트기 시작한 애정과 도미닉이 받은 새뮤얼의 돈 사이에서 내 양심으로 조율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이었다.
새뮤얼, 랭던 경이 제가 보는 데서 열쇠 꾸러미를 놔두고 갔습니다. 그 열쇠 꾸러미를 사용해서 그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잠긴 서랍을 열었습니다. 그 안엔 속지가 달력인 수첩이 있었습니다. 수첩에 적혀 있었던 1월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10일 (메모 없음)’
‘1월 24일 (메모 없음)’
‘1월 25일 기차 시간표 인쇄, 5천 장’
각 날짜는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R.S.
새뮤얼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랭던 경이 확실히 방심하고 있군. 새로운 정보들이지만 퍼즐을 맞추기엔 조각이 한없이 부족해. 더 힘내 주길 바라네. 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