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프와 제라늄
온몸이 지끈거리는 끔찍한 통증과 잘린 아버지의 머리가 밤새 나를 끈덕지게 괴롭혔다. 공중에 뜬 머리가 쇳소리로 말을 걸 때마다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몸에 한기가 들어 편안해야 할 잠은 고스란히 고통으로 바뀌었다. 도미닉은 헛꿈일 뿐이라고 했으나 아버지의 모습은 악몽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해 나는 실제로 그를 직접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아버지의 영혼이 안식을 찾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내 곁을 맴도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자결한 그를 연옥에서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밤새 나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머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긴 시간 동안 끝내지 못한 고해 성사였다.
“서튼 남작님!”
날카로운 목소리가 몸을 흔들었다. 가늘게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아버지의 머리와 하녀 샬롯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흐릿한 유령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샬롯이 내가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샬롯 양….”
“몸은 괜찮으세요? 밤새 열에 시달리셔서 퍼렐 의원이 몇 번이나 다녀갔습니다. 이제 목욕하고 아침을 드실 시간이에요.”
지난밤 나를 층계참에서 밀어 떨어트린 사람이 과연 샬롯이 맞았나 의심될 정도로 샬롯의 태도는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밤새 앓아 끈적해진 몸을 씻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발목이 몹시 부어 거동이 어려웠다.
샬롯은 내가 침대에 편히 기대앉을 수 있도록 푹신한 큰 베개를 등 뒤로 밀어 넣었다. 나는 이불 위에 포개 얹은 손을 꼼지락대며 넌지시 물었다.
“이제부터 프리데릭 경에게 전할 소식은 샬롯 양에게 전달하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서튼 남작님. 어제 일은 무척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세요.”
원망의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도 나처럼 새뮤얼의 첩자가 된 사정이 있을 터였다. 나를 다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 새뮤얼이 있는데 하녀의 신분일 뿐인 그녀를 질책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해하고 있어요. 샬롯 양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샬롯 양….”
꽤 오래 망설인 끝에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미닉이 새뮤얼 경에게 25만 골드를 받아 갔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서튼 남작님께서 에메랄드 저택에 장기간 묵는 일이 확실시되면 10만 골드를 더 받으실 예정입니다. 프리데릭 백작님께서 계약 내용을 정확히 전해 주라고 하시더군요.”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떤 금전적인 대가가 있을지 여태껏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지난번 도미닉이 나의 무책임을 비난할 때 털어놓은 8만 골드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내게 얘기도 하지 않고 벌써 17만 골드를 더 수령했다는 사실에 머리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이 일이 제대로 끝나지 않으면 모두 빚이 될 게 분명한 돈이었다.
샬롯은 곧 내 아침 식사가 놓인 침대 트레이를 가져와 옆에 올려놓았다. 나는 비통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바빠 식욕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방을 찾았다.
“랭던 공작님께서 지금 뵙기를 청하십니다.”
“네, 들어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샬롯은 내게 눈짓을 보낸 뒤 침대에서 물러났다. 랭던 경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방에 들어와 고용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흐린 아침이라 방이 어둑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밤새 왕궁에 있다 온 탓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이불을 젖히며 침대 밖으로 나오려 하자 랭던 경이 손을 올리며 급히 만류했다.
“밤새 열에 시달렸다면서 무리하지 마세요. 부디 침대에 앉아 있어요.”
나는 침대 밖으로 내밀었던 다리를 다시 얌전히 이불 아래로 옮기고 간단한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리에 앉아서 저하를 맞아 죄송합니다. 왕궁으로 가신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그랬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비수를 꽂았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백성들에게 비수를 꽂았다 하시고… 표정도 어두워 보이세요.”
랭던 경은 내 곁으로 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무게가 실려 나의 몸도 침대와 함께 밑으로 약간 내려갔다.
랭던 경은 서둘러 입을 열지 않고 잠시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밤을 새웠다 해도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지치고 어두워 보였다. 그의 뺨이 잠시 둥그레지더니 입술 사이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근심 서린 표정의 이유가 어제 백성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는 결정 때문인지, 동생의 기일 때문인지, 쉽게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랭던 경의 입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어제는 여러 가지로 끔찍한 밤이었습니다. 로엘 씨를 잃는 줄만 알았어요.”
“어린애처럼 계단에서 굴러 민망스럽습니다. 밤새 몸도 많이 나았고 랭던 경께 신세를 지기 죄송하니 오늘이라도 호텔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예요.”
“…….”
“나더러 더 죄책감을 느껴 보라는 의도라면,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저택을 떠나지 말아요. 나는 그렇게 몰인정하고 자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엘 씨에게는 더더욱. 내 집에서 다쳤으니 나을 때까지 눈앞에 두고 지켜봐야겠어요.”
미친 소리라는 표현이 가시가 되어 마음속에 콕 박혔다. 말을 좀 곱게 해 주면 좋으련만.
상심한 나는 눈을 옆으로 살짝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쓰린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으나 랭던 경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샬롯이 두고 간 작은 침대 테이블을 자신의 앞으로 옮기고 스푼 가득 수프를 담았다. 스푼은 곧 내 입술 앞에 도착했고, 나는 이번에도 그를 말렸다.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퍼렐 의원이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들었습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입 벌리세요. 평소에는 섹스할 때만큼 통제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행동을 좋아한다는 건 아니오.”
내가 아파 좀 나아졌을까 기대했으나 명령조의 권위적인 말투는 여전했다. 몸이 아프니 타박하는 소리를 견디기가 힘들어 차라리 순종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뾰족한 말로 대꾸하는 것 대신 가만히 입술을 열자 랭던 경이 내 쪽으로 더 가까이 앉았다.
랭던 경은 침상에 반쯤 누워 있는 내게 능숙한 동작으로 수프를 먹여 주었다. 그는 체면을 따지지 않고 매번 수프를 후, 후, 불어 적당한 온도로 식혔다. 고소하고 따뜻한 수프가 입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세심히 챙겨 물었다.
“수프가 너무 뜨겁지는 않아요?”
“괜찮습니다.”
나 역시 랭던 경의 동생처럼 어려서부터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건 후 자주 열병과 악몽에 시달리면서 고열에 시달릴 때가 잦았다. 그럴 때면 보통 차가운 방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식사했다. 외로움은 언제나 고열보다 지독했다.
처음에는 랭던 경의 강요로 탐탁지 않아 하며 받아먹은 수프였으나, 나는 이내 그가 도와주는 식사엔 모진 고독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랭던 경이 음식을 먹여 줄 때마다 왠지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몸이 약한 남동생을 자주 돌보았다는 얘기가 사실임을 증명하듯 랭던 경은 내가 아주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입 속에 수프를 곧잘 옮겨 주었다.
‘늘 나를 창부 취급하지만 조금은 아끼는 마음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지….’
잠시 수치심도 자존심도 잊고 랭던 경의 손길에서 그리운 애정을 탐했다. 이 순간만은 랭던 경이 가족보다 나를 더 염려하는 사람 같았다. 내 병을 담보로 10만 골드를 추가로 받아 갈 도미닉보다 훨씬 더.
도미닉은 내가 몸져누워 며칠이나 앓아도 베넷 부인에게 맡겨 둘 뿐, 방문을 열어 들여다보는 일조차 없었다. 병보다 고독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던 밤과 길었던 악몽. 그 적적함이 선명히 살아났다. 눈동자 뒤편에 먹먹한 열기가 차올랐으나 울음의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 눈물을 참아 냈다.
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접시와 내 입술 사이를 바삐 오가던 숟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수프만 받아먹었을 뿐인데 랭던 경이 부드러이 칭찬했다.
“로엘 씨가 잘 받아먹으니 좋습니다.”
“뭐라고 하면 혼내실까 봐 겁이 나서 그렇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무덤덤하게 말했다. 랭던 경 역시 크게 동요하지 않고 대꾸했다.
“안다니 다행입니다. 수프에 빵도 찍어 줄까요?”
“네, 그러세요.”
나는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잘게 찢은 빵을 수프에 적셔 내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가만히 입을 열고 받아먹던 나는 따뜻한 기분을 가라앉힐 수 없어 결국 실수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내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식사를 돕던 랭던 경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흘끗 쳐다봤다.
“왜 웃나요?”
“랭던 경께서 간호에 능숙하신 것이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했잖아요. 동생이 몸이 안 좋았다고.”
동생이란 단어에 내 입가에 매달려 있던 웃음기가 슬며시 사라졌다. 랭던 경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이 자꾸 그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는 마지막 울타리가 된다. 랭던 경 역시 내 기분이 변한 이유를 눈치챈 듯 놀라울 정도로 얼굴에서 표정을 깔끔히 지워 냈다.
그 후 식사를 마칠 때까지 우리는 다시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아픈 동생에게 수프를 먹여 주었던 다정한 랭던 경과 동생을 총으로 죽인 냉정한 랭던 경의 두 가지 모습을 내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 일치시키지 못했다.
적막한 식사가 끝나고 환약과 시럽을 먹었다. 랭던 경이 도와주어 쑤시는 몸을 다시 큰 베개에 기대고 누웠다. 랭던 경은 나를 빤히 보더니 곧 눈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어제 왜 내 동생 얘기를 꺼냈어요. 로엘 씨는 본인이 귀족치고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라는 걸 알아 둬야겠습니다.”
“…….”
“내게 감히 죽은 동생과 관련하여 자꾸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지 말아요. 방금도 티가 조금 났지만 내가 그대에게 한 잘못이 있어 참는 거예요. 나는 동생에 대한 일에는 무척 예민해서 이 인내심이 언제까지 발휘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내 탓을 하는 걸까.
랭던 경의 말에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었다. 서신에서는 그리 미안하다 하더니 막상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저 아름다운 얼굴에선 고운 소리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역시 나를 한 인격으로서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외면하고 싶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 작게나마 비쳤던 미소를 돌려받고 그에게 애정을 기대한 순간을 철회하고 싶었다. 겨울이라 아직 해가 나지 않은 탓에 널따란 침실의 공기는 우리 둘의 사이처럼 꿉꿉하고 칙칙했다.
“어쨌든 나 역시 실수한 게 있으니 로엘 씨의 질문에 대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왜 그래요, 또.”
랭던 경은 어린애를 나무라듯 한숨을 쉬고 나서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소문대로입니다. 내 동생은 평민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며 가문을 저버리려 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이 혼인하는 일은 불법이라 성당에서 축복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로엘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
“나는 지독하게 반대했습니다. 형으로서 동생의 앞날을 망치는 일을 방임할 수는 없었죠. 내가 어떤 말과 행동으로 동생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인지 로엘 씨는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랭던 경의 말대로 나는 그가 얼마나 지독하게 동생을 상처 주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분명 말하기 힘든 내용임이 분명한데 그는 매정하다 느껴질 만큼 막힘이 없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갈등 끝에 어느 날 싸움이 크게 번져 홧김에 동생을 겁주려고 총을 꺼냈습니다. 나는 총을 든 상태로 동생과 말다툼을 하다 격분해서 이성을 놓치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당연히 살인죄로 처분을 받아야만 했으나 동생이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한 일 때문에 명예 살인으로 인정받아 아무런 죗값도 치르지 않았어요.”
그 잔인한 소문이 진실이었다니….
그동안 나는 내심 랭던 경의 끔찍한 죄과에 다른 사연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섹스할 때 외에 랭던 경은 존경할 만한 부분이 많은 신사였고, 내가 그에게 느낀 긍정적인 감정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가끔 랭던 경과 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찌 되었건 살을 맞대는 사이였으므로.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내 작은 기대를 하나하나 다 짓밟았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불을 꽉 틀어쥔 손이 떨렸다. 침을 삼키며 목구멍 밖으로 넘어오려는 눈물을 억눌러야 했다.
랭던 경은 정말 동생을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그저 평민을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임을 귀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형이라는 자격 아닌 자격에 동생의 행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죽일 권리가 부여되진 않는다.
나는 테런스 랭던을 자유주의자라고 의심하는 프리데릭 백작의 어리석은 판단을 속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경어를 쓰고 평민 아이에게 친절하다고 해서 그가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나의 어리석은 마음도 까 내렸다. 가슴이 이상할 만치 저릿하게 아팠다.
랭던 경은 담담하게 끔찍한 사건을 다 털어놓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게 그 사건의 내막입니다. 있었던 일의 전부예요. 나는 죗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죗값을 치러야만 했어요….”
그는 같은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쓸쓸한 목소리엔 깊은 후회가 깃들었다. 내게 말하지 않은 다른 기억이 묻혀 있는 듯한 아련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느낌은 랭던 경을 향한 호감을 잃고 싶지 않아 방어적으로 지어낸 허상임이 틀림없었다. 자꾸만 어린 윌리엄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눈높이를 맞추고 자신을 ‘테런스’라 소개하던 그의 정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왜 나는 계속 랭던 경의 다정한 모습이 진짜이길 바라는 걸까. 어째서. 그가 다정한 사람이면 대체 뭘 어쩌려고….’
조용히 아릿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그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로엘 당신이 내게 무척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랭던 경.”
그에게 실망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나는 내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도미닉은 프리데릭가에서 총 35만 골드를 끌어다 쓰게 될 것이다.
랭던 경을 향한 나의 사적인 감정들… 호감, 두려움, 친밀감,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 대신 첩자의 역할에 다시 충실해야 할 때였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일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마음을 주어선 안 됐다.
나는 다시 처음 만났던 때처럼 그에게 할 말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꾸며 냈다.
“동생이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러실 만한 일이었어요. 랭던가처럼 명망 높은 집안에서 평민과의 결혼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으셨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의아하게도 랭던 경의 목소리엔 다소 실망한 기색이 감돌았다. 최근 며칠간 내가 랭던 경에게 느낀 감정과 비슷한 색채를 띤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기분에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럼요. 귀족이 평민과 결혼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걸요.”
“…나는 로엘 당신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을 줄 알았습니다. 평민에게도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돌아가신 서튼 경의 아들이기도 하고.”
‘서튼 경’이라는 호칭에 다소 움찔했으나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 바른 표현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랭던 경이 아버지를 존중할 이유가 없었다.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래요? 나는 로엘 씨가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아 실망하셨어요?”
“…아닙니다, 로엘.”
그의 반응이 나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랭던 경은 마치 내가 자유주의자이길 기대한 듯 무덤덤한 표정 사이로 실망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명예 살인까지 했으면서 왜…. 나는 그의 모순적인 행동과 감정을 논리적으로 엮어 낼 수 없었다.
대화하는 동안 우리의 육신은 가까이 앉아 있었지만 서로의 영혼 사이엔 거리를 좁히기 어려운 씁쓸함이 감돌았다. 어제 오두막을 나오며 발생한 말다툼 후로 그동안 주고받았던 특별한 기류와 감정들이 모두 어그러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가슴속이 텅 빈 듯 적막했다.
“…죄송해요, 랭던 경.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데 다시 잠을 자도 될까요?”
“그래요.”
나는 서먹한 대화에서 도망치기 위해 병을 핑계 삼았다. 랭던 경은 내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고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주며 세심히 이부자리를 돌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걱정스러운 감정이 파도쳤다. 랭던 경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무겁게 물었다.
“로엘, 왜 다치기 전 있었던 말다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나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이마에 멍이 든 일로 내가 심한 말을 했잖아요. 신경은 쓰였으나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데 내가 실언했습니다. 어제는 말실수를 여러 번 하고 말았군요. 하필 그 자리를 다쳐 얼마나 마음이 무거운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겠죠. 실제로 가능성이 있구요.”
“…….”
“저는 창부잖아요. 랭던 경이 오해할 만하세요.”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랭던 경이 갑작스레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반듯한 미간이 접혔다.
“…당신 가끔 사람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거 알아요?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는 게 낫겠습니다. 비꼬는지 이해하는지 모를 말투로 그렇게 얘기하는 게 버릇이에요?”
“제가 무얼 잘못했다고 소리를 지르세요. 제가 괜찮다는데 왜 랭던 경의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나요?”
“로엘 그대는 내게 어떻게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며 화를 냈다가, 나중에 내가 기껏 다시 그 화제를 꺼내면 자신은 창부여서 그렇다느니 왜 신경을 쓰냐느니 대충 대답하며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잖소.”
“창부여서 창부라고 하는 건데 왜 랭던 경의 기분이 상하시죠?”
침착하게 대답했는데 랭던 경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에게서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분노에 으스러진 듯했다.
“왜 기분이 상하냐니…. 됐습니다. 내가 로엘 씨와 싸워서 뭘 어쩌겠습니까. 아픈 사람을 데리고.”
랭던 경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화를 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 때문에 찌푸린 눈썹과 화를 씹듯이 일그러트린 표정이 서글퍼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도록 뜀박질 쳤다. 넘어지며 머리를 심하게 찧고 열을 얻은 탓에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정의 내릴 여력이 없었다. 랭던 경은 성마른 목소리를 잇새로 씹어 삼키며 말했다.
“아무튼 쉬고 있어요. 밤을 새워서 눈 좀 붙이고 오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죄책감에 억지로 들르시지 않아도 돼요.”
명예 살인까지 한 사람이 ‘서튼 경’의 아들이자 창부인 나를 진심으로 신경 쓸 리 없다는 생각에 그렇게 얘기했다.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군. 로엘 씨가 아파 내가 참고 넘어가 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요.”
랭던 경은 얼굴까지 붉히더니 결국 인사 없이 몸을 휙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뒷모습조차 싸늘했다. 어제 일을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랭던 경인데 그는 편지로 미안하다며 몇 문장을 써서 보내면 다인 줄 아는 듯했다.
차라리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수프를 먹여 주던 때가 훨씬 나았다. 잠시나마 랭던 경이 나를 아낀다고 착각할 수 있었으니까. 내 영혼의 고독과 육신의 아픔을 그가 진심으로 달래 주고 있다고.
팔다리에 욱신거림이 밀려왔다. 열 때문에 온몸이 떨리는 증상을 뒤늦게 깨닫고 옆으로 누워 다리를 껴안았다. 허리를 동글게 말아 몸을 공처럼 웅크렸다. 또다시 혼자 열이 사그라들길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샬롯은 오후에 퍼렐 의원을 데려왔다. 퍼렐은 퉁퉁 부은 발목의 상태를 살펴본 뒤 부목을 대고 붕대를 동여맸다. 이마를 꿰맨 자리에 붙여 놓은 거즈도 깨끗하게 갈았다. 그는 길고 풍성한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점잖게 말했다.
“신사분들이 쓰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십시오. 부러지진 않았으나 크게 접질려 그냥 다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언제부터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팔다리에 통증도 있고 미열도 계속 있고요. 마음을 편히 두십시오. 마음이 피로하면 몸도 피로한 법입니다.”
퍼렐이 나가고 나서 샬롯은 주변을 살펴본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 나 역시 샬롯과 단둘이 남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할 질문도 있었고, 새뮤얼에게 보낼 서신도 써야 했다.
“샬롯 양, 필기구를 준비해 주세요. 새뮤얼에게 전해 줄 수 있으시죠?”
“네, 남작님.”
나는 침상에서 새뮤얼에게 전할 짧은 쪽지를 썼다.
병이 나을 때까지 머무르게 되었음. 순조롭게 진행 중임. R.S.
쪽지를 간단히 밀봉하여 샬롯에게 건넨 뒤 본격적인 계획 실행을 위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랭던 경 외에 들어가 본 사람이 없다는 방은 어딘가요?”
“2층 가장 안쪽에 있는 비밀 서재입니다. 그런데 그 방 외에도 잠겨 있는 서랍과 금고들이 많아 확인하지 못한 곳은 많습니다.”
“열쇠 꾸러미는요?”
“중요한 곳의 열쇠는 랭던 경만 가지고 계십니다. 오래도록 일한 충성스러운 고용인들이 많아 열쇠공을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대답을 마친 샬롯은 내가 건넨 쪽지를 품에 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지루한 시간을 죽였다. 익숙하지 않은 저택에서 마땅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었다. 좋아하는 책은 전부 호텔과 집에 있었고 다리가 성치 않아 산책도 불가능했다. 계단에서 뒹구는 바람에 여기저기 고장 난 몸은 어떻게 누워도 삐거덕거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잡념만 많아졌다. 겨울 공기처럼 시린 불안은 가슴에 싸락눈을 흩뿌렸다. 머릿속에 밝은 상념이 존재하는 공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이라도 읽으면 외로움을 가라앉힐 수 있을 텐데, 그 책은 호텔에 두고 온 트렁크에 있었다. 책의 맨 앞장이 선명히 그려졌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책이 없는 대신 나와 같은 책을 읽었을 ‘테스’와 ‘윌리엄’을 상상했다.
테스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는 여인이었을까. 윌은 어떤 사람이기에 귀족이면서 자유주의자가 되었을까. 글씨체가 특이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혹시 귀족이 아니라 글을 아는 평민이었을까.
이런저런 실속 없는 질문을 하며 여러 가지 가설을 지어냈다.
노크 소리가 쓸데없는 몽상에 잠긴 나를 깨우고 문가엔 피로에서 회복한 랭던 경이 다시 나타났다. 침대 트레이를 든 샬롯이 랭던 경을 뒤따라 들어왔다. 샬롯이 협탁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아 쳐다보니, 쟁반 위엔 음식과 함께 물이 담긴 빈 화병이 놓여 있었다. 높이가 낮은 유리 화병이었다.
랭던 경은 샬롯이 트레이를 놓고 나갈 때까지 말없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닫힌 문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잘 닫혔는지 확인하는 동작에서 몸에 밴 날카로운 경계심이 느껴졌다. 그가 뒷짐을 진 손을 풀자 놀랍게도 아름다운 꽃이 들려 있었다.
“저하, 겨울에 어떻게 꽃을….”
“실내에 옮겨 둔 제라늄 화분에서 꽃이 피었어요. 겨울만 평온히 지나게 해 주면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꽃입니다. 얼른 나으라는 의미로 몇 송이 꺾어 왔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랭던 경은 무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트레이에 놓인 화병에 제라늄꽃을 꽂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침대와 가까운 둥근 테이블 위에 화병을 올려 두었다. 그가 꺾어 온 제라늄은 빨간색에 분홍색을 몇 방울 떨어트린 듯한 화려하고 생생한 색을 띠었다. 내 뺨도 그와 비슷한 색으로 물들었을 것 같았다.
“꽃이 아름답네요.”
“거동이 어려워서 당분간 외출하기 힘드니 실내에서 꽃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려 깊으신 말씀입니다.”
랭던 경은 다시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직 열이 있다면서요.”
“견딜 만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식사를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꽃에 이어 식사까지….
나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오전에 랭던 경이 화를 내며 나갔기 때문에 이처럼 마음을 빨리 풀어 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내가 그를 너무 나쁜 쪽으로만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오전에도 도와주셨으니 괜찮아요. 팔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손목이며 팔에도 통증이 있다고 퍼렐 의원에게 전해 들었어요. 나도 마침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에 내려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랭던 경은 내 곁에 걸터앉아 오전처럼 다시 스푼을 들었다. 그는 수프를 먹여 주고 고기도 직접 썰어 내 입에 넣어 줬다. 먹다가 떨어진 음식조차 치워 본 적도 없을 랭던 경이 이렇게 매끼 음식을 챙겨 준다는 건, 그 자체로 몹시 영광스러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열이 나서 가누기 어려운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고 얌전히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응석받이처럼 잘 받아먹는군. 간병을 많이 받아 본 것 같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 후로 처음이에요.”
“뭐가요?”
“간병받는 것이요.”
랭던 경은 잠시 놀란 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뚱하게 바꾸었다. 아무래도 오전에 상한 마음이 남아 있어 이 이상 다정히 대해 주긴 싫은 듯했다. 음식을 열심히 떠서 내 입으로 나르는 행동과 상반되는 표정이었다. 꽃을 선물해 준 것과도.
입 속에서 나가려는 스푼을 내가 뒤늦게 꽉 물어 치아에 쇠가 부딪히자 랭던 경이 작게 나무랐다.
“살살 먹어요. 이 다칩니다.”
정말 걱정하는 잔소리라 싫게 들리지 않았다.
“네, 조심할게요.”
“…다시 또 얌전하군. 간병을 받아 본 적 없다니 이참에 실컷 받아 보며 쉬는 것도 로엘 씨에게 기분 전환이 될지 모릅니다. 나 때문에 다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저하 때문이 아니에요.”
랭던 경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입 속으로 부드러운 수프가 들어왔다.
식사를 마친 뒤 랭던 경은 냅킨으로 내 입가를 손수 닦아 주고 약까지 직접 먹여 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도와주는 손길엔 몹시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나를 향한 애정에서 기인한 행동이 아니라 동생에게 하던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싫지 않았다. 처음 하는 응석받이 노릇이 자꾸만 손끝과 발끝을 간질간질하게 달구었다.
“감사해요. 랭던 경께서 이렇게 손수 챙겨 주시는 일이 제 분에 넘치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탓에 로엘 씨가 다쳤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의 부주의였어요.”
“감싸 줄 필요 없어요.”
랭던 경은 죄책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치기 직전 그와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다친 건 순전히 프리데릭의 계략 때문이었다. 랭던 경은 샬롯과 프리데릭이 꾸민 일에 휘말린 피해자에 불과하건만 내가 다친 일로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 같아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그의 정성 어린 간호에 어느새 마음이 녹아 버렸는지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덜컥 붙들었다. 커다란 손이 내 손바닥 밑에서 움찔, 미세하게 떨렸다. 그를 무작정 잡은 행동을 후회했으나 손을 거두고 싶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랭던 경의 말씀에 상처를 받았는지와는 별개로 제가 다친 것은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죄책감 느끼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니 다행입니다. 로엘 씨의 너그러운 용서가 내 실수에 대한 유일한 위로예요.”
랭던 경은 내게 잡힌 손바닥을 위로 돌려 나와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굵은 손가락이 들어와 내 손가락들이 옆으로 벌어졌다. 그렇게 잡는 모양새는 부끄러워 뒤늦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손가락끼리 얽혀 있어 벗어날 수 없었다.
“호텔의 짐은 옮겨 오라고 했습니다. 윌리엄 베넷도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합니다.”
“윌에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하. 열 때문에 정신이 없어 저는 챙기질 못했네요.”
“생각해 봤는데 오늘 밤 내 방으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로엘 그대가 혹시 밤에 혼자 아플까 걱정이요.”
“이 방에서 하녀가 돌봐 주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크게 다쳤는데 혼자 있는 것은 내 심정이 편치 않습니다.”
“제게 미안하신 심정은 알겠지만 마음에 없는 일을 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내 대답에 기분이 상했는지 랭던 경은 금세 욱하는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겹쳐 있던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빼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간신히 좋아진 분위기를 망친 듯해 몹시 무안했다.
“…시키는 대로 해요, 좀. 당신이야말로 내가 마음에 없는 티를 그리 낼 필요 없습니다. 아프다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요.”
랭던 경의 엄격한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낙상이 아닌 마편과 섹스의 후유증이었다.
“제가 이렇게 아픈데 때리기라도 하시게요?”
“못 할 것도 없지. 둥그런 엉덩이에 아직 마편 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을 텐데. …혹시 퍼렐 의원이 로엘 씨의 엉덩이를 봤습니까?”
“무슨…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봤다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런…. 랭던 저하 외에 다른 사람이 제 엉덩이를 볼 리가요.”
의식하지 못한 사이 진실이 섞여 나왔지만 랭던 경이 눈치채기엔 너무 사소한 신호였다. 랭던 경은 확답을 받고 나서도 혀를 가볍게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퍼렐 의원이 당신을 만지는 건 짜증이 나요, 짜증이 나…. 로엘 씨가 얼른 나아야겠습니다. 내가 이제 와 의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잘못하면 내가 퍼렐 의원의 손목을 두 동강 내게 생겼습니다.”
“세상에, 아파서 의원이 어쩔 수 없이 저를 만지는 것도 싫으세요?”
랭던 경은 말없이 이불을 뚫을 것처럼 내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그 넘실거리는 색욕이 부끄럽고 수줍어 들릴락 말락 작게 중얼거렸다.
“저를 좋아하시지도 않으면서 그 무슨 이상한 소유욕인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랭던 경은 이번엔 혀를 세게 찼다.
“나를 밀어 내는 건 로엘 씨지.”
그는 내 대답은 듣지 않고 종을 울려 고용인들을 불러들였다.
하녀들이 내 간단한 소지품과 간호에 필요한 물품을 전부 챙겨 랭던 경의 침실로 올라갔다. 랭던 경이 선물해 준 붉은 제라늄이 꽂힌 화병도 물론 옮겨 갔다.
나는 걷는데 쓸 지팡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팡이가 있어야 짚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팡이는 필요 없어요. 로엘 씨는 내가 안고 가면 되니까요.”
랭던 경은 내 무릎과 등 밑에 손을 넣어 손쉽게 나를 공중으로 안아 들었다. 갑자기 생긴 높이감이 무서워서 욱신대는 팔로 그의 목을 급히 감싸며 매달렸다. 랭던 경의 키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이 났다. 그의 품에 안겨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똑바로 섰을 때와 눈높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랭던 경이 방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디뎠다. 샬롯이 밀어서 넘어진 충격이 떠올라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저 목만 껴안고 매달려 있기엔 겁이 나서 턱을 당겨 눈두덩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꽤 가까이서 들렸다.
“무서워요? 괜찮습니다.”
“무,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무서워도 상관없어요. 나중에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답지 않게 상냥한 위로였다. 랭던 경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이 덜컹덜컹 요동쳐서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흡….”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꽉 잡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이라 믿고 싶어 하는 다정한 랭던 경의 일부가 나를 달랬다.
나는 처음으로 랭던 경의 개인 공간에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았다. 그의 방은 가구의 자연스러운 갈색과 소품의 푸른 색감이 우아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는 커튼을 칠 수 있는 큰 침대가 놓여 있었고 값비싼 거울과 가구들이 그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증명했다.
랭던 경은 여태 떨고 있는 나를 포근한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아직 오므라들어 있는 발가락을 그가 서슴없이 잡았다. 놀라 발을 빼려 했으나 랭던 경의 손에서 벗어나기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하.”
“많이 무서웠어요?”
“그렇긴 한데, 부끄럽게 발을….”
“무서우면 발가락을 접는 모양입니다. 매를 맞을 때도 꼭 접고 있더니.”
“그랬나요.”
시치미를 떼며 대답하고 손발을 감추기 위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커다란 손이 발가락을 풀어 주었다. 랭던 경은 몸을 일으켰다.
“잠시 쉬고 있어요. 저녁을 먹고 오겠습니다.”
“네, 저하. 다녀오세요.”
랭던 경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올려다본 천장은 손님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작은 하늘 같았다.
드디어 내가 여기까지 왔다. 랭던 경의 침실까지.
“랭던 경은 나를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어.”
호화로운 침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야 내가 랭던 경의 예외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마음이 놓이자마자 눈꺼풀이 몹시 무거워졌다.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어두운 방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잠들기 전 장소를 옮겼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한참, 랭던 경이 곁에 없다는 걸 깨닫는 데엔 더 한참이 걸렸다. 미열로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앉았다. 피부를 태우는 열기에 몹시 갈증이 났다.
하녀를 부르려고 침대 옆에 달린 종을 흔들려는 찰나, 랭던 경이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스멀스멀 침대까지 흘러들어 왔다. 잡았던 줄을 슬쩍 놓고 소리 나지 않게 이불을 젖혔다. 목소리는 침실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보통 여러 개의 방을 연결한 장소를 개인 공간으로 사용했다. 침실에 서재 하나, 작은 응접실 하나가 이어 붙어 있는 게 일반적인 구조였고 랭던 경의 공간도 그럴 터였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딛는 순간 부어 있는 발목을 칼날처럼 파고드는 통증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겨우 두 발을 디뎠다. 발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눌렸다. 다리를 끌면서 고양이처럼 조용히 이동한 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벽에 기댔다.
닫혀 있는 방 문틈으로 희미한 실내 가스등 불빛과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는 랭던 경의 목소리고 하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쪽으로 정보가 새고 … 같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랭던 경의 음성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대화를 한 자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가 정보를 빼내고 있어요.”
“돈은 철저하게 금괴로만 오가고 있고 장소도 비밀리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의심만 하고 있다는 건 오히려 그들이 정말 중요한 정보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방금은 확실한 랭던 경의 목소리였다. 그에게는 부드럽고 우아한 특유의 억양이 존재했다. 낯선 목소리가 한숨을 쉬며 말을 받았다.
“어떻게 알겠소. 정보를 빼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들은 중요하게 보이는 거짓말 속에서 사소한 진실을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쪽지를 본다 해도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사소한 메모인 줄…. 잠깐, 무언가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인기척을 눈치챈 듯한 랭던 경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내 기척을 느낀 건지 확실치 않았으나 일단 피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만약 그가 깨어 있는 나를 발견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일어났다며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네기엔 서재 근처 벽에 붙어 서 있는 모습이 너무 수상쩍었다.
덜컥 겁이 나 가슴팍을 부여잡고 절뚝이는 다리를 옆으로 슬금슬금 끌고 갔다. 나는 곧 침실 구석 모서리에 소리 없이 몸을 숨겼다. 발목이 아파 더 먼 데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허둥거리며 어둠에 나를 감추자마자 바로 달칵,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날아왔다. 순식간에 온몸에 미지근한 땀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빠르게 쳐다보면 눈에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흘끗 보니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온 랭던 경의 등 뒤에서 실내 가스등의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 옆으로 올라붙었다. 대화를 엿들은 행동을 랭던 경에게 들킬까 떨면서도, 불빛을 등진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긴장한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 내며 뛰는 찰나 그가 내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리며 서재로 다시 들어갔다. 빛이 사라지고 침실이 다시 어둑해졌다. 고요한 방 안에 내 심장 소리가 쿵, 쿵, 울렸다.
“손님이 일어난 것 같아요. 나가서 찾아 봐야겠습니다. 내겐 너무 중요한 손님이라 오늘은 이만….”
나는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소리 나지 않게 벽을 짚으며 침실 문까지 걸었다. 문손잡이가 손가락에 걸리자마자 살살 열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침실로 돌아오는 척 무거운 침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코앞에서 검은 그림자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짧은 비명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내가 비명을 다 쏟아 내기 전에 그가 더 놀라며 큰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붙였다. 그가 막은 입술 밑에서 심장이 묵직하게 목구멍을 두드렸다.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사람들 다 깨겠습니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일어났어요. 종을 흔들지.”
랭던 경은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서히 입을 막은 손을 거뒀다.
“종일 누워 있기가 다, 답답하여… 일어나 보니 랭던 경도 없으시고….”
“나를 찾으러 나왔던 겁니까?”
“네? 네.”
대답을 들은 랭던 경이 급작스레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자연히 그에게 체중을 실으며 안겼다. 커다란 손이 등 뒤편을 부드러이 쓸어내려 터질 것 같던 심장 박동이 간신히 조금 가라앉았다.
“걷기가 힘들 것 같으니 안아서 옮겨 줄게요. 내 몸에 팔과 다리를 둘러요.”
랭던 경은 무릎을 굽히고 내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 팔을 목에 두르자마자 내 몸이 위로 가볍게 솟아올랐다. 다리를 감으며 닫히는 침실 문 사이로 복도 쪽을 흘끗 바라봤으나 옆방에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아직 안 나온 걸까.
“로엘 씨, 열은 좀 어때요?”
조금 전 랭던 경을 찾으러 나왔다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랭던 경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열은, 좀 나아졌는데 목이 마르네요.”
“협탁에 놓인 주전자에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두워서 안 보였나 봅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았건만 긴장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팔다리가 끔찍하게 쑤셨다. 랭던 경이 침대 위에 살포시 나를 앉혔다.
걸터앉아 숨을 고르는 사이 주전자가 쪼로록- 잔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가 들렸다. 랭던 경에게 컵을 받아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긴장해서 말라붙은 입 속에 물이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랭던 경은 내 손에 들린 빈 컵을 다시 가져가며 나를 불렀다.
“로엘.”
“네?”
긴장감이 다 가시지 않아 실수로 화들짝 놀란 티를 냈다. 랭던 경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뭘 그렇게 놀라요.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아, 그냥…. 아직 저하의 방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랭던 경은 적당한 핑계를 쉽게 납득해 주었다. 그는 내가 첩자인 줄 몰랐으므로 내 말을 하나하나 다 따지고 거짓말이라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서재에서 들은 대화가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답답해서 혹시 발코니나 정원에 나가고 싶거든 참지 말고 언제든 얘기해요. 내가 안고 이동하면 됩니다. 지팡이를 짚는 일이 아직은 무리일 테니 내가 없으면 침실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랭던 경. 저를 신경 써 주셔서요.”
“아닙니다. 어서 자요. 그나저나 내가 당신을 옆에 두고 그냥 자는 일이 익숙해질지 모르겠군. 때로 참지 못하고 만지거나 입을 맞출 수도 있어요. 지나치면 알려 줘요.”
어둠이 붉어진 뺨을 감춰 줄 거라 믿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하.”
나는 처음으로 그와 한 이불을 덮었다. 그때까지도 심장의 박동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아픈 내게 잠자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두었다.
우리는 둘 다 잠이 든 듯 말없이 누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떨어져 있던 서로의 손끝이 닿았다. 랭던 경의 손가락이 내 쪽으로 먼저 다가온 것이었다. 딱, 딱, 우리의 손톱 끝이 미세하게 부딪치고 나의 새끼손가락에 랭던 경의 손가락 한 마디가 천천히 닿았다. 몇 번째 손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벌써 참지 못하고 나를 만지는 걸까.’
내 추측이 틀렸음을 입증하듯 랭던 경의 손은 아주 서서히 움직였다. 무척 조심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으면서 체온에 그대로 녹아 버릴까 봐 염려하듯이.
느리게 서로의 손가락 한 마디가 얽히고, 다른 손가락이 내 손등에 얹혔을 때 나는 그가 사실 잠든 게 아닐까 생각했다. 랭던 경이 이렇게 조심히 내 손을 잡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섹스까지 한 남창의 손을.
무거운 어둠이 몸을 짓누르는 오랜 시간을 견뎌 내며 기다린 끝에 랭던 경의 커다란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힘주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놀라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옆을 쳐다봤다.
랭던 경은 여전히 눈꺼풀을 내린 상태였다. 달빛이 그의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내 그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어두운 골짜기 같은 침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내 손등을 덮는 동안, 랭던 경은 대체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사람이 섹스한 상대방의 손을 이렇게 어렵게 잡을까. 그것도 창부라 생각하는 자의 손을.
대체 어떤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조심스럽게.
***
랭던 경은 화병의 꽃이 시들기 전에 매번 다른 아름다운 빛깔의 제라늄을 가져왔다. 밖에 나가지 못하여 답답한 기분이 들 때마다 제라늄을 바라보며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
나는 꽃이 색을 여러 번 바꾸는 동안 쭉 랭던 경의 침실에서 지냈으나 더 이상 낯선 이의 방문을 목격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낯선 이는커녕 랭던 경조차 만나기가 어려웠다. 성탄이 코앞이라 랭던 경은 중요한 약속이 줄을 이어 오전부터 저택을 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일주일 넘게 요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지럼증과 근육통이 심해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랭던 경의 침실에 머물렀다.
그가 외출한 틈을 타 샬롯은 새뮤얼의 서신을 부지런히 날랐다. 나는 평소처럼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봉투를 뜯었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경에게.
로엘 자네가 랭던 경의 마음을 여는 데 정말 성공하다니! 저택에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침실로 입성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네. 잠자리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의 마음을 샀는지 궁금할 지경이야. 나중에 내게 한번 솜씨를 보여 주게(짓궂은 농담일 뿐이니 너무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앞으로 한 달 동안 최대한 유용한 소식을 전해 주었으면 해. 최근에는 샤를 대공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백성들 사이에 나돌고 있어 무척 골치가 아프네. 샤를 대공이 왕이 되었다는 가짜 호외까지 나돌았지! 그는 평민에게 투표권이나 귀족과의 혼인 등을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미친 소리를 떠드는 작자야. 도미닉도 샤를 대공을 무척 혐오하더군.
샤를 대공의 자금줄을 틀어막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야. 로엘 네가 어떻게 해 주느냐에 따라 노르크 귀족들의 운명이 걸려 있어. 산업의 발달로 귀족의 지위도 예전 같지 않으니 역사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 그러나 늘 역사는 귀족의 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네.
그럼 사소한 정보라도 기다리겠네.
당신의 벗, 새뮤얼 프리데릭으로부터.
추신. 편지는 읽자마자 불태워서 증거를 남기지 말도록 하게. 그 뒤로 랭던 경과 키스는 했는지 궁금하군.
새뮤얼의 무례한 편지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침실 벽난로에 편지를 깔끔히 처리하고 새뮤얼에게 전할 답장을 썼다.
새뮤얼 프리데릭 경에게.
며칠 전에 랭던 경은….
랭던 경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새뮤얼에게 넘기는 일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망설임이 자꾸만 펜촉을 멈춰 세웠다. 새뮤얼과 도미닉이 내 편지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더구나 테런스 랭던 경의 사생활을 넘겨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 이 일을 어쩔 수 없이 수락했을 때, 나는 테런스 랭던 경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머릿속 상상의 인물을 상대로 정보를 빼돌리는 일과, 실제 몸을 맞대고 나를 간병해 주는 사람의 정보를 빼돌리는 일 사이엔 하늘과 땅 만큼의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35만 골드의 금액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아니야, 랭던 경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어. 랭던 경에게 해가 될 정보도 아닐 테고, 어차피 그는 동생을 죽인 악인인걸.’
펜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동생을 죽인 작자의 안위를 걱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내 형제인 도미닉이 더 중요하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사람과 새벽에 침실 옆방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랭던 경과 자금에 대해 얘기하고 있더군요. 랭던 경은 다른 사람들이 금괴를 옮기는 장소와 쪽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 확신했습니다.
이 금괴가 어떤 일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철도와 관련된 자금일 수도 있고 다른 개인적인 자금일 수도 있어요. 다만 새뮤얼 당신이 전에도 랭던 경의 금괴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여 적어 보냅니다.
로엘 서튼으로부터.
편지를 밀봉하여 샬롯에게 주었다.
침실에 홀로 남은 나는 손잡이 부분에 은색 사자 머리가 달린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직 멀리 갈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어제부터는 간신히 혼자 걸을 수 있었다. 랭던 경이 낯선 자와 대화를 나눈 옆방이라도 살짝 둘러본다면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았다.
며칠 전 랭던 경이 낯선 사람과 만났던 방은 서재였다. 문을 살며시 닫고 주인 없는 서재에 혼자 방문한 미안함을 삼켰다.
지팡이를 짚어도 부은 발목이 견딜 수 없이 쑤셔 아주 천천히 책장으로 다가가야 했다. 아기가 걸음마를 하는 속도였다.
“책이 많네.”
잠시 이 방으로 건너온 목적을 내려 두고 책장을 훑었다. 책은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저택 생활에 큰 위안이 되는 존재였다. 지팡이를 팔과 옆구리에 사이에 끼워 몸을 지탱하고 익숙한 소설을 몇 권 꺼내 살펴봤다.
<노르크 전쟁사>, <말괄량이 브리의 호숫가 집>, <에드워드 경의 모험> 등 다양한 서적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장에 가득 꽂혀 있었다. 책을 여러 권 꺼내 뒤적이다 <여신의 포도주>라는 낡은 책의 앞장에서 우연히 랭던 경의 글씨를 발견했다. 내게 편지를 보낼 때와 다르게 대충 흘려 쓴 격의 없는 필체였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 윌에게.
지난번 이 책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었지.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네가 찾던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뛸 듯이 기뻤는지 모른다. 하마터면 품위를 잃고 큰 목소리를 낼 뻔했지 뭐니.
네가 책을 사랑하는 신사가 될 거라는 사실이 내게는 언제나 큰 위안이 된단다. 독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휴식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늘 기억하렴. 이 책을 읽으며 독한 감기를 잘 이겨 내길 바란다.
너를 걱정하는, 테런스로부터.
다정한 말투와 애틋한 편지의 내용은 두 형제의 사이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았다. 나는 글씨에 담긴 랭던 경의 애정 위에 손끝을 얹었다. ‘윌’이라는 애칭만 익숙할 뿐, 랭던 경이 글에 담아 놓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가족이란 원래 이런 걸까?
부러움이 가슴 속을 아릿하게 뒤덮었다.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형제애를 향한 동경은 랭던 경이 아우를 죽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추하고 얄팍한 시기심을 힘겹게 삼켜 냈다.
“애칭이 윌인 거 보면 동생의 이름은 윌리엄이었겠지.”
흔한 이름이긴 하지만 내 주변엔 ‘윌리엄’이 참으로 많았다.
옆집의 꼬마 윌, 금서의 인사말에 적힌 윌, 랭던 경의 동생 윌.
사소한 우연을 곱씹으며 랭던 경의 상냥한 편지를 한 번 더 읽고 책을 되돌려 놓았다.
서재엔 내가 그날 밤 혼자 서 있었던 복도로 난 문과, 침실로 이어지는 문 외에 다른 입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낯선 손님은 어디로 빠져나간 걸까? 낯선 손님이 서재에 더 머물다 뒤늦게 나갔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오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약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책상을 살펴볼 차례였다. 부은 다리에 힘을 싣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얼마 걷지 않아 금세 통증이 밀려왔다.
“아프네.”
서재 중간에 서서 지팡이를 짚고 잠시 쉬었다가 널찍한 마호가니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주인 없는 서재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책상까지 뒤져 보려니 양심이 반발했다. 랭던 경에게 몹시 죄스러워 가슴 한편이 무거웠지만 혹시 금괴의 행방이 적힌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책상을 탐색하지 않는 건 35만 골드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는 짓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고 차가워진 손끝을 서랍에 뻗었다.
“죄송해요, 랭던 경.”
듣지 못할 랭던 경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혹시 랭던 경이 저택에 빨리 돌아오진 않을까, 걱정하며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편지지, 봉투, 잉크병 등이 들어 있었다. 내게 서신을 보낼 때마다 사용하는 제품인 듯 검소한 편지지와 봉투의 형태가 무척 낯익었다.
깨끗한 새 편지지 한 장을 꺼내 보았다. 랭던 경의 글씨가 적히지 않은 편지지일 뿐인데, 이 책상에 앉아 나를 생각하며 여백을 채워 나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에 몽글몽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을 따갑게 만드는 해로운 공장의 연기가 아니라 저녁 무렵 굴뚝에서 피어나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따뜻한 연기였다.
나는 편지지에 코를 묻고 깨끗한 종이의 냄새를 맡았다.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러운 향기가 두근대는 심장을 잠시 진정시켰다.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가 뱉은 뒤 편지지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서랍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았다.
나머지 서랍도 하나하나 살펴봤으나 의심스러운 메모는 나오지 않았고, 맨 마지막 서랍은 샬롯의 말대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나는 책상에 놓인 얇은 메모지 더미를 보다 맨 위 장을 한 장 뜯어 주머니에 접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하아….”
침실까지 이동하는 데 다시 한참이 걸렸다. 간신히 침실에 도착한 나는 넓은 창가에 걸터앉아 뻐근해진 발목과 허리를 폈다. 반쯤 열린 커튼을 활짝 젖히고 가져온 메모지를 들어 햇빛에 비춰 보았다.
메모지엔 다행히 눌린 자국이 보였다. 펜촉이 지나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운이 좋으면 내용을 읽을 수 있을 듯했다. 가능하면 거동하지 않고 읽을 수 있길 바랐지만 글씨가 작아 잿가루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젠 지팡이도 아무 소용이 없어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벽난로로 갔다. 불을 피해 종이에 잿가루를 소복이 담은 뒤 입으로 후- 불었다. 검은 재가 지저분하게 날렸다.
종이 위에 남은 재는 아기 뺨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주듯 살살 제거했다. 옅은 글씨의 흔적이 보였다.
1월 …일, 오전 …, 포도나무 아래…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
숫자는 읽기 어려웠으나 글씨는 비교적 또렷이 형태를 드러냈다.
“포도나무 아래에 금발 여인이 기다린다니….”
이게 무슨 소릴까. 언뜻 보기에 이 쪽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용처럼 보였다.
새뮤얼에게 부지런히 작업하고 있다는 티를 내야 했으므로 일단 재빨리 문장을 외우고 벽난로에 종이를 던져 넣었다. 흰 종이는 가장자리부터 붉게 타며 몸을 웅크리더니 곧 검은 재가 되어 불길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로엘.”
갑자기 어깨에 탁, 내려앉는 손길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
온몸이 심장이 된 듯 요동쳤다. 힘없이 넘어지려는 내 몸을 강철처럼 단단한 팔이 붙들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그의 교양있는 목소리가 물었다.
“괜찮아요? 매번 너무 놀라는군. 침대에 누워 있지 왜 나와 있었어요?”
“랭던 저하! 너무 놀랐습니다. 제발 기척 좀 내 주세요.”
불평하면서도 혹시 메모를 읽는 내 목소리를 듣거나 쪽지를 태우는 행동을 본 건 아닐까, 배 속이 서늘해졌다.
“로엘 씨가 너무 담이 작은 게 아닐까?”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랭던 경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가지런한 치아 끝이 윗입술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미소였다. 랭던 경이 웃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이자 두툼한 엄지 끝마디가 내 코를 문질렀다.
“얼굴에 재가 묻었습니다. 누가 보면 로엘 씨가 굴뚝 청소부인 줄 알겠어요.”
“잿가루가요?”
“코가 까맣습니다.”
랭던 경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살가웠다. 내가 한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태연한 표정을 위장했다. 자연스러웠는지는 랭던 경만이 알 일이지만.
“제가 너무 벽난로 가까이 있었나 봅니다. 아까 깨끗이 씻었는데 지저분한 얼굴을 보였네요.”
“괜찮습니다. 재가 묻은 얼굴도 몹시 사랑스러워요.”
랭던 경은 별다른 애정도 없으면서 잘도 그런 칭찬을 했다. 진심이었으면 행복했겠지만 내게 키스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착각을 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랭던 경이 물었다.
“로엘 씨, 내일이 주일인데 미사는 갈 수 있어요?”
“퍼렐 의원이 아직 성당까지 외출은 무리라고 하더군요. 저… 랭던 경.”
“네.”
“쉴 때 읽을 수 있게 책을 몇 권 가져다 봐도 될까요?”
“그런 건 불편해하지 말고 샬롯 양에게 언제든 얘기하세요. 바로 옆 방이 서재니까 로엘 씨가 직접 가져와도 됩니다. 원하면 아무 때나 들어가도 상관없어요.”
아무 때나 들어가도 된다는 말에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죄책감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긴장감이 누그러지자 입꼬리가 풀려 그대로 미소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랭던 경은 미소 짓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번엔 웃음기 없이 나직이 한숨을 뱉어 냈다.
“…미치겠군.”
“왜 그러세요?”
“로엘 씨가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그렇습니다.”
“제가 웃는데 왜 랭던 경께서 기분이 안 좋아지셨죠?”
랭던 경의 표정을 보니 방금 질문이 그에게 무척 한심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랭던 경은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안 좋아진 듯 인상을 잔뜩 구겼다.
“로엘 그대가 내 언행에 담긴 의미를 반이나마 이해해 주는지 의문이군. 방금 내가 미치겠다고 한 소리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왜….”
“열은 좀 내렸습니까?”
“네, 저하. 발목과 근육이 아픈 것 말고는 많이….”
랭던 경은 또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나머지 팔을 둘러 나를 더 단단히 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자 단단해진 그의 것이 내 아랫배 부근에 닿았다. 깜짝 놀라 모른 척 허리를 비스듬히 틀며 피했으나 그에게서 도망갈 수 없었다. 랭던 경은 단단해진 성기를 내 몸에 더 꾹 눌렀다.
“저하, 저는….”
“미치겠다는 건, 이런 소리예요.”
랭던 경은 내 귓불을 잘근대며 등 가운데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그 커다란 손이 주는 공포와 쾌감을 학습한 피부가 저릿하게 떨렸다. 상반된 느낌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두려운 섹스를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몸이 멀쩡할 때도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데.
“…로엘 그대가 밤새 내 곁에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참는 일이 얼마나 고문 같은지 압니까? 내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벌써 당신을 어떻게든 범하고 울렸을 거요.”
그는 내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었다. 나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랭던 경에게 안겼다. 자연스레 넓은 어깨에 턱을 괴고 두 다리로 두꺼운 몸을 감쌌다. 연미복 너머로 근육질의 몸이 느껴졌다.
랭던 경은 서재를 오가느라 지친 나를 소파에 눕혔다. 침대가 아니라 몹시 당황하여 둥그렇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단단한 페니스가 내 배에 닿은 감각이 아직 남아 있어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기는 부끄러웠다. 시선을 내리깔자 반쯤 감긴 눈꺼풀 위로 푹신한 입술이 닿았다. 그의 숨결이 눈썹과 관자놀이를 스쳤다.
“오늘 하인들이 호텔에서 당신 짐을 찾아왔는데 재미있는 트렁크가 있더군.”
금서를 넣어 놓은 트렁크인가 싶어 깜짝 놀라 어깨가 굳었다. 거기엔 자물쇠가 달려 있어 열어 볼 수 없었을 텐데.
“무슨, 트렁크를 말씀하시는 건지….”
“당신 장난감이 들어 있는 트렁크 말이에요.”
랭던 경이 품에서 꺼낸 작은 상자를 보고서야 나는 그것이 새뮤얼이 준비한 변태적인 물건임을 눈치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상스러운 물건의 등장에 얼굴이 화들짝 탔다.
랭던 경은 우리가 다투기 전처럼 짓궂게 웃으며 내게로 몸을 숙였다. 가슴팍에 그의 무게가 실렸다. 내 목과 가슴께에는 아직 오두막에서 그가 남겨 놓은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그 자국들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의문이었다. 랭던 경은 내 목덜미를 핥으며 손을 잡아끌어다 단단해진 자신의 것을 쥐여 주었다.
‘내가 아픈 상황에서도….’
침실에서 묵으라고 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며칠간 세심히 돌봐 주다가 갑작스레 접촉을 시도하니 서운한 마음이 밀물처럼 들이찼다. 눈물이 고인 눈을 옆으로 힘없이 돌렸다. 랭던 경이 뺨을 핥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저하. 저하의 마음에 든 자, 장난감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요.”
“귀여운 목줄이더군. 병이 나으면 목에 걸고 개가 접붙듯이 박아 주겠소. 뭐, 그 트렁크에 있는 건 다 로엘 씨 취향이겠지만.”
랭던 경 몰래 서랍을 열어 보고 메모의 흔적을 찾아낸 죄책감이 있어 감히 거절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에게 아까 열이 내렸다고 한 대답도 있어 뿌리치기 애매한 느낌도 있었다. 다만 도구를 쓰는 섹스를 하게 될까 두려울 뿐이었다.
랭던 경은 다정히 얼굴에 입술을 눌렀다. 촉, 촉, 랭던 경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몇 번이나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배꼽 밑을 조금씩 덥혔다. 새뮤얼이 심어 놓은 생각 때문이었다.
‘다음 입맞춤은 키스일까, 아닐까.’
랭던 경이 혹시 키스를 해 주려는 건가 싶어 입술을 미지근하게 열어 봤으나 우리의 접촉은 이상하게도 입맞춤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새뮤얼의 질문과 비웃음이 당황한 머릿속을 더럽혔다.
‘역시 새뮤얼의 말대로 남창과는 키스하지 않는 걸까. 그런데… 나는 그게 왜 서운한 걸까.’
랭던 경이 일으키는 감정들은 모두 혼란스럽고 낯설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봤다면, 누군가와 섹스를 연습해 봤다면 이 뒤죽박죽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눈가의 뜨거움을 외면하며 계속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을 받았다. 어느새 젖은 서로의 입술이 촉, 끈적하게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두 입술 사이를 침이 가늘게 이었다가 끊겼다. 결국 랭던 경의 입술이 뺨 위로 옮겨 왔다.
랭던 경은 내 헐렁한 잠옷 안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겁을 먹고 떨리는 아랫배를 커다란 손바닥이 부드러이 덮었다. 내가 숨을 들이마시고 뱉을 때마다, 배에 얹혀 있는 그의 손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다감한 빛을 띤 녹색 눈이 겁먹은 나를 달랬다.
“내 성벽이 거칠지만 아픈 사람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대 곁에서 며칠을 참은 내 인내심을 생각해서 열기만 해소하게 해 줘요. 당신의 표정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성벽을 고려했을 때 꽤나 정중한 요청이었다. 처음 받아 보는 예의 바른 부탁에 랭던 경의 창부인 나는 고개를 쉽게 끄덕이고 말았다
“저하께서 바라는 대로 하세요.”
“그런 말은 쉽게 하지 말아요. 로엘 씨가 아파하며 비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부은 발목을 쥐어 잡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말대꾸를 하려 입을 벌렸다가 힘없이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랭던 경이 동생을 죽였다는 확답을 듣기 전이라면 ‘그러시면 안 된다’며 대꾸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픈 내게 아무리 잘해 줘도 동생을 죽인 냉혈한일 뿐이야. 아픈 나를 상대로 성욕을 풀려는 것뿐이고.’
랭던 경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한쪽 눈가를 희미하게 일그러트렸다.
예민한 그가 내 시선에서 비난의 기색을 읽은 걸까?
또 랭던 경의 동생의 일을 떠올린 속마음을 들킨 듯해 뒤늦게 눈을 피했지만 너무 늦은 방어일 뿐이었다. 몸에 닿는 랭던 경의 손길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랭던 경은 조금 전에 정중히 다가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심히 내 몸을 뒤집었다. 배려 없는 손길에 부은 발목이 소파에 스쳤다. 통증에 발목이 빳빳하게 굳었으나 아픔을 속으로만 삼켜 냈다. 랭던 경은 소파에 엎어 놓은 내 허리춤 아래로 손을 밀어 넣으며 속옷 위로 아직 서지 않은 내 것을 쥐었다.
“흐읏….”
그의 손이 닿기가 무섭게 하반신으로 열기가 몰렸다. 잘생긴 입술이 뒷덜미를 누를 때마다 스스로 놀랄 만큼 숨소리가 가빠졌다. 기분이 약간 나빠진 듯한 랭던 경은 다소 거칠게 내 페니스를 주무르며 속삭였다.
“사실 참고 있었던 건 로엘 당신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좆을 세우고…. 내가 건드리지 않아 속으로 무척 서운했겠군.”
“…읏…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팔을 포개어 머리를 묻었다. 랭던 경의 말을 부정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육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환자의 몸이라고 하긴 지나치게 음탕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 랭던 경의 손길에 내 몸이 반응할 줄 몰랐다. 몹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만 랭던 경은 내 등 뒤에서 단단해진 성기를 여유롭게 주물렀다. 그리고 다른 팔로 떨리는 내 엉덩이를 자신의 고간으로 끌어당겼다. 엉덩이 골 사이에 무섭도록 부푼 그의 페니스가 닿자 나도 모르게 허리가 잘게 흔들렸다.
“흐읍, 흣….”
어느덧 등에는 랭던 경의 무게가 실렸다. 그는 계속 내 것을 쥔 채 자신의 페니스를 엉덩이에 문지르며 속삭였다.
“엉덩이 사이에 내 자지가 문질리는 것만으로도 좋아? 응?”
습한 숨결이 귓속을 파고들자 으스스한 소름이 등줄기를 기었다. 야릇했다.
나는 그의 페니스가 준 고통뿐 아니라 쾌감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랭던 경에게 잡혀 있는 내 것에선 쿠퍼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성기는 점점 젖은 소리를 내며 그의 손안에서 미끄러지듯 마찰했다.
“그런, 아… 저하… 그런 게 아닙, 니다.”
“그러면. 이걸로 쑤셔 주니 좋다고 울던 때가 기억났어요? 로엘 씨의 천한 몸에 섹스 없는 몇 주는 너무 길었을 것 같은데.”
“흣, 아, 아니에요….”
옷감 너머로 나를 누르는 거대한 페니스가 금방이라도 엉덩이 속을 파고들 것 같았다. 나는 오두막에서 그와 섹스하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목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등에 실린 랭던 경의 무게가 테이블에 엎어져 박히던 기억을 자꾸 자극했다.
“로엘 당신은 아픈 게 괴롭고 싫다고 생각하겠지? 내게 채찍으로 맞고, 타이로 묶이고, 거칠게 범해질 때마다 밑이 바짝 서는 줄도 모르고 말이요. 그때마다 난잡한 아래 입이 쫀득하게 내 좆을 쥐어짜거든. 정액을 마시고 싶은 것처럼.”
“…으응, 읏… 저하….”
“그만하면 이제 고통과 쾌감을 연결 지을 때도 됐지 않았어요? 몸은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
목덜미와 귓가를 자극하는 저음의 목소리와 거친 손길, 음탕한 말들을 견딜 수가 없어 랭던 경에게 깔린 다리를 뒤챘으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그의 손에 사정할 듯해 허리도 비틀어 봤지만 그럴수록 페니스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질 뿐이었다. 랭던 경은 내가 발버둥 치는 것이 귀찮았는지 내 다리를 붙잡아 와 겹치고 몸 밑에 깔았다.
“하읏, 흑… 아, 아픕니다.”
“별로 봐주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발목이 아파 애원했지만 랭던 경은 개의치 않았다. 역시 시작할 때 내 표정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게 맞는 듯했다.
나는 랭던 경이 내게 동생의 일과 관련한 불쾌한 감정을 더는 비추지 말라고 경고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실수였다.
나는 겹쳐 놓인 발바닥을 웅크리며 사정감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는 잔뜩 부푼 내 것을 거칠게 주물렀다. 발목의 통증과 성기에서 밀려오는 쾌감이 뒤섞였다. 랭던 경이 내 몸에 일으키는 모든 느낌이 곧장 모욕이 되어 나를 덮쳤다.
“쌀 것 같아요?”
“저하의, 손에… 흣, 하기가…. 제발….”
“내 손에 하기 싫어요?”
“네, 흡….”
“그러면 내 손에 해요.”
랭던 경은 한껏 빳빳해진 내 것을 문지르며 뒤에서 잠옷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허벅지 사이를 그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그는 그대로 내 허벅지 안쪽에 자신의 것을 비비며 허리 짓을 했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회음부를 문지르는 굵은 귀두 때문에 페니스가 내 안을 파고드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아… 저하….”
랭던 경의 손에 사정하지 않고 참아 보고자 얼굴을 묻고 있던 팔을 뻗어 소파 팔걸이를 쥐었다. 손가락이 비틀리도록 팔걸이를 잡고 온몸에 힘을 줬으나 계속되는 자극과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마찰열에 사정감이 눌러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랭던 경의 손안에 쾌감을 배출했다.
“아읏, 으응… 래, 랭던 경… 흣….”
사정을 하느라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더 모아 붙이며 몸을 떨었다. 랭던 경은 낮은 신음 소리를 뱉어 내며 내 정액으로 더러워진 손을 빼냈다.
랭던 경이 내 양쪽 엉덩이를 찢어 버릴 듯 두 손으로 세게 잡아 벌렸다. 커다란 손에 배출했던 정액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묻었다. 랭던 경은 내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치대고 박아 넣으면서도 끝까지 엉덩이를 벌린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삽입을 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엉덩이를 벌려 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내 아래 구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눈요기 삼기 위해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려워 뒤로 손을 뻗어 랭던 경의 팔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 눈물이 자욱하게 차올랐다.
“랭던 경, 거기를 왜… 보시면서….”
“다리 더 붙여요. 하, 빨리 싸 줄 테니까.”
“읏….”
나는 허벅지 사이를 더 모아 붙이며 랭던 경을 손목을 꼭 쥐고 수치심을 버텨 냈다. 허벅지 안쪽 여린 살에 닿는 그의 것은 몹시 단단했다. 정말 내 몸에 들어왔던 것이 맞을까 싶을 만큼 굵고 뜨거운 페니스였다. 자꾸만 샘솟는 야릇한 기분에 다시 앞을 세우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하….”
허벅지 사이를 꽉 채우고 있던 페니스가 빠져나가고 그는 손으로 계속 잡아 벌리고 있던 내 엉덩이 골에 사정했다. 꽉 다물린 구멍 위로 정액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적나라해 허리가 크게 떨렸다.
“흣, 읏….”
랭던 경은 귀두를 엉덩이 사이에 비비며 정액을 전부 다 쏟아 냈다. 두 사람분의 정액으로 범벅이 된 내 엉덩이가 온통 끈적거렸다.
그의 행위는 언제나 지나치게 날것이었다. 이번에도 정중한 부탁과 달리 결국 언행은 거칠게 흘러갔다. 내가 요양이 필요한 환자임에도 성(性)적으로 보며 탐하는 시선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초반에 저지른 내 잘못이 행위가 과격해지도록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괜스레 서운함이 밀려왔다. 낯선 감정이었다. 삽입을 한 것도 아니고, 때린 것도 아닌데…. 더구나 내가 저지른 실수도 있는데….
랭던 경이 나를 이보다 더 아껴 주길 바라는 건 내 사적인 욕심이었다.
“괜찮아요?”
“…네.”
“조금 거칠게 대했습니다. 발목이 아프지는 않아요?.”
“네. 중간에 조금 아팠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저하, 혹시 처음 제 태도가 별로셨어요?”
랭던 경은 대답 없이 나를 안아 들고 욕조로 데려갔다. 랭던 경이 끝내 대답을 해 주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로 몸을 씻었다.
스킨십을 시작하기 전에 속으로 그가 살인자임을 잠시 상기했었다. 그 순간이 삐죽 튀어나온 보풀처럼 거슬렸다.
랭던 경은 내 몸에 묻은 물을 꼼꼼히 닦아 준 후 침대로 향했다. 평소보다 다소 털썩 눕히는 듯한 느낌도, 스킨십을 한 직후인데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순간들도 모두 다 보풀이 되어 남았다.
랭던 경은 내 트렁크에서 꺼냈다는 목줄 상자를 서랍 안에 대충 쑤셔 넣고 자신의 옷차림을 다듬었다. 다시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노크 소리가 우리를 방해했다.
“들어오세요.”
랭던 경이 무심한 투로 답했다. 쟁반을 든 붉은 머리 하녀 샬롯이 문가에 섰다.
“공작님, 말씀하신 디저트 가져왔습니다.”
“고맙소. 로엘 씨에게 주세요.”
샬롯이 가져온 쟁반엔 놀랍게도 먹음직스러운 배가 놓여 있었다. 겨울이 한창이라 과일은 절인 것이 아니면 구경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 몹시 놀라 쟁반을 받아 들었다. 입맛이 없는데도 입에 침이 고였다. 샬롯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저하, 이 귀한 배를 어디서….”
“철도를 통해 따뜻한 지방에서 들여왔습니다. 몸에 좋으니 먹어요.”
“감사합니다. 저하께서 먼저 드시겠어요? 너무 귀한 과일이라 혼자 먹기가 아깝습니다.”
“나는 점심에 디저트로 먹었습니다.”
랭던 경은 직접 포크로 하얀 배를 푹 찔러서 내 입 안에 끄트머리를 밀어 넣었다. 요즘은 그가 옆에 있으면 늘 음식을 먹여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익숙하게 입만 살짝 움직여 배를 베어 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하고 시원한 배의 풍미가 입 안의 세포를 하나하나 자극했다.
“지금껏 먹어 본 배 중 가장 맛있는 것 같습니다, 저하.”
“겨울에 먹어서 더 그렇습니다. 로엘 씨가 늘 입맛이 없어 보였는데 과일은 좋아하나 봅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네요.”
“원래도 많이 먹질 못하는데 요즘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먹도록 하겠습니다, 저하. 오전부터 바쁘셨는데 이만 책이라도 보시며 쉬세요.”
나는 랭던 경에게서 포크를 가져왔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짚으며 체온을 확인했다. 잠깐 나를 서운하게 하더니 그는 어느새 다정해졌다.
랭던 경은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와서 내 옆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는 책을 펼쳤지만 글자는 들여다보지 않고 내가 배를 베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식욕이 없어 며칠이나 식사를 제대로 못 했는데 오랜만에 먹는 행위에 흥미를 느꼈다. 내가 배를 먹는 모습을 내내 지켜만 보던 랭던 경이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설마 또 욕정을 풀려는 건가 싶어 랭던 경을 피하는 척하려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몸짓이 다소 거칠게 나왔다. 머리가 다 돌아가기도 전에 내가 랭던 경을 혐오해서 뿌리치는 행동으로 보이리라는 걸 직감했다.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아닌데…. 어쩌지.’
맨 처음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가슴팍에서 실렸던 랭던 경의 체중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겁이 나서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차갑게 식은 눈빛이 내 시선을 건조하게 맞이했다.
어둡게 변한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움찔, 몸이 떨리고 낭패감이 심장을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힘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하, 그런 게 아니라 제가 피하는 시늉만 한다는 것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단정히 올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분 잡치는군.”
랭던 경의 반응에 나는 더욱 겁이 나서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한 뱃속을 검은 손이 움켜잡았다.
얼어붙은 입술을 겨우 더듬더듬 움직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하시려는 줄 알고….”
“서튼 씨가 계단에서 다친 뒤로 내가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한 일이 있습니까?”
서튼 씨.
처음으로 되돌아간 호칭에 심장이 배 속으로 깊게 떨어졌다. 최근엔 서튼이란 성(姓) 대신 내 이름, ‘로엘’을 다정히 불러 주는 목소리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손끝까지 차갑게 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혀가 굳어 버렸다. 랭던 경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단어 사이사이 화난 감정을 쑤셔 넣었다.
“서튼 씨가 열이 내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면 방금 전 스킨십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까 말한 대로 서튼 씨를 옆에 두고 무작정 참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아픈 당신을 해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아요. 그러니 말해 보세요, 서튼 씨. 내가 지난 며칠간 당신을 살핀 게 시간이 남아돌아 그랬던 것 같나요?”
“…….”
“당신이 나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거 알고 있어요. 서튼 씨가 일부러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늘 매번 티를 냅니다. 오두막에 갔던 그날 이후로 하루도 티를 내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지. 아까도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서 비위가 상했지만 아픈 사람 붙들고 싸우기 싫어 참았습니다.”
“래, 랭던 경… 방금 전, 랭던 경이 싫어서 피했던 것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내게 섹스가 얼마나 두려운 행위인지 랭던 경은 알지 못했고, 그에게 알려 줄 수도 없었다. 이따금 랭던 경이 동생을 죽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랭던 경을 싫어하는 것 역시 아니었다.
“나를 혐오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건 할 만한 일이 아니군.”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흘끗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설원처럼 광활히 차가웠고, 목소리는 메마른 땅처럼 상처가 나 있었다. 내가 낸 상처였다. 나는 랭던 경의 냉정한 눈빛에 속절없이 떨며 맞잡은 손가락을 꽉 비틀었다.
동생과의 사건을 안 뒤로 랭던 경에게 냉랭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한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려 애썼다. 다정한 모습을 진짜라고 믿었다가 더 상처받을까 봐 겁이 나서, 첩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내 진실한 모습 또한 보여 주기가 두려워서.
그러나 나는 결국 빗장을 완전히 닫는 데 실패했다. 아픈 나를 정성껏 돌봐 준 랭던 경에게 상처를 준 것이 죄스러워 나는 급하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랭던 경… 정말 죄, 죄송합니다. 변명할 기회를 주세요.”
내 손가락이 팔에 닿기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를 잃은 손이 허공에서 정처 없이 헤매다 떨어졌다. 위압적인 눈길만이 텅 빈 공중을 가로질러 나를 사납게 꿰뚫었다. 긴 눈매에 자리한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랭던 경은 조끼 단추에 걸린 회중시계 체인을 빼내 주머니에 넣고 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내가 당신을 정말로 창부 취급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 줄까? 애초에 서로 동의해서 맺은 관계였고 내 제안을 수락한 건 서튼 씨인데 왜 피해자처럼 구느냐 이 말입니다.”
굳어 버린 내 다리에 얹힌 쟁반을 랭던 경이 거칠게 옆으로 밀어 떨어트리고 내 위에 올라탔다. 쟁반은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랭던 경은 겁먹은 내 머리채를 쥐어 잡고 고개를 억지로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그의 바지 단추를 풀고는 묵직한 살덩이를 꺼냈다. 그는 성기를 내 뺨에 문질렀다. 나는 온몸이 굳어 그저 덜덜 떨며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부터 로엘 씨의 의견은 필요 없어요. 가격을 지불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처박을 테니까.”
손끝에 차가운 피가 고였다. 내 뺨에 성기를 문지르며 그는 아무런 열기도 없는 냉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살 기둥으로 몇 번이고 내 뺨을 찰싹 쳤다. 고통이 아니라 모욕을 주기 위한 행위였다. 나는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처음 섹스를 할 때보다 더 겁에 질려 딱딱 부딪치는 이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여기 화대요.”
그는 재킷을 집어 안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고, 떠느라 제대로 벌리지도 못하는 내 입 속에 돈을 쑤셔 넣었다. 나는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지폐 덩어리를 입에 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차라리 그가 돈이 아니라 성기를 물려 주는 게 나았을 것이다.
랭던 경은 처음에 5만 골드를 줄 때도 내게 화대는 ‘아니’라고 못을 박았었다. 5만 골드는 나와의 섹스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지 않는 대가였다. 내 성(性)에 실제로 값을 매긴 사람은 나의 형 도미닉과 새뮤얼, 두 사람이었다.
탄탄한 손이 잠옷 안으로 들어와 유두를 아프게 잡아 비틀고 바지를 무작정 끌어 내렸다. 허벅지 사이로 랭던 경의 페니스가 들어왔다. 나는 겁에 질려 옴짝달싹 못 하고 지폐를 문 채 손을 가슴팍에 웅크려 모았다. 랭던 경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는데 그의 화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두려움에 온몸의 근육이 다 뒤틀리는 듯했다. 나는 그의 밑에서 눈물을 떨구며 덜덜 떨었다. 자존심이 긁힌 랭던 경이 겁박하며 속삭였다.
“이 정도 돈이면 피가 터질 때까지 채찍으로 갈길 권리도 살 수 있는 거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고 했잖아.”
“랭… 던, 경….”
나는 지폐가 물린 입술을 움직여 겨우 그를 불렀다.
“왜.”
그가 무섭게 물었다.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굵은 눈물이 속눈썹과 관자놀이를 적셨다. 지폐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하게 흘러나왔지만 울음소리를 삼키며 겨우 빌었다.
“잘, 못… 해, 어요….”
“…젠장, 정말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는군.”
랭던 경은 내 입에 물린 지폐 다발을 꺼내 바닥에 내팽개치고 내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옷을 추스른 뒤 방을 그대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으나 이내 몸을 일으켰다.
“래, 랭던 경….”
부은 발목을 힘겹게 내딛고 일어났는데 카펫에 널브러진 배와 지폐가 보였다. 발목 때문에 쪼그리는 자세가 불가능해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떨어진 배를 쟁반에 주워 담았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배가 랭던 경의 자존심 같았다.
랭던 경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보살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랭던 경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살인자라는 생각을 되새겼고, 그가 삽입 섹스를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싫은 내색을 하며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비정하고 냉정하게 군 쪽은 랭던 경이 아니라 나인지도 몰랐다. 죽은 아버지의 목을 잘라 팔아넘긴 내게 타인을 재단할 권리가 어디 있다고.
금보다 값비싼 배를 쟁반에 추스른 후 협탁에 올려 두었다.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최대한 빨리 발을 움직였지만 한 번에 반걸음 이상은 내딛기가 어려웠다. 흥분해서 열이 올랐는지 머리도 핑글핑글 돌았다.
“랭던 경!”
긴장감에 좁아진 목구멍에서 간신히 목소리가 크게 빠져나왔다. 침실이 넓어 걸어 나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지나가던 하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울어서 발갛게 부은 내 얼굴을 발견하고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서튼 남작님.”
“랭던 경이 어디 계신지 알아요? 방금 나가셨는데.”
“랭던 공작님께서는 나오시자마자 저택 밖으로 외출하셨습니다.”
“약속이 있으셔서 외출하신 건가요?”
“그러신 것 같은데 정확히 확인해 드릴까요?”
“네, 부탁해요.”
나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벽에 기대선 채 하인이 다시 돌아오길 초조히 기다렸다.
숨이 차서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발목에 푹신한 게 닿았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생김새를 보니 어린 보더콜리였다.
허리를 숙여 손 냄새를 맡게 해 주는 동안에도 랭던 경과의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간헐적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하인이 급하게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공작님께서 약속이 있으셔서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언제쯤 돌아오세요?”
“늦으신다고 합니다.”
“담요 좀 한 장 가져다주겠어요?”
“예, 남작님.”
나는 하인이 가져다준 담요를 두르고 계단 바닥에 앉았다. 계단에서 떨어진 기억 때문에 앉아 있기 조금 무서웠지만 이곳은 꽤나 랭던 경을 기다리기 적당한 장소였다. 이 층은 랭던 경이 외출하고 나면 하녀와 하인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고 주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무척 고요한 편이었다.
대리석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지만 이대로 랭던 경이 없는 침실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용서를 받는 게 옳은 순서였다. 적어도 도미닉이었다면 잘못을 해 놓고 침대에 누워 쉬는 걸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몸이 아프다 해도.
강아지는 몸이 무거운 나와 달리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지러운 머리를 난간에 기댄 채 조심스럽지 못했던 스스로의 행동을 질책했다.
몸이 아프고 무서워도 참으면 될 걸, 섹스가 뭐 그리 무섭다고 랭던 경을 피했을까. 그가 경고를 했는데도 왜 불쾌한 감정을 자꾸 내비쳤을까.
모든 게 내 미숙함 탓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해가 지는지 1층 바닥엔 석양의 붉은빛이 드리웠다. 딱딱한 바닥에 앉은 엉덩이가 견디기 어렵게 배겼다. 아래에서 기척이 들려 랭던 경인가 싶어 내려다봤으나 오후 진료를 보러온 퍼렐 의원의 정수리가 보였다. 퍼렐은 나를 보고 몹시 놀라 체통도 잊고 성큼성큼 뛰어 올라왔다. 풍성한 수염이 흔들렸다.
“아니! 서튼 남작님, 나와 계시면 어떡합니까. 공기는 훈훈해도 대리석 바닥에 앉아 있기는 추운 날씨입니다. 근육이 아플 때 찬 기운은 해롭습니다.”
“의원님… 저 언제쯤 아픈 것이 낫나요? 몸이 좋지 않으니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듯해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말도 행동도 조심성이 없어졌어요. 자꾸만 실수를 해요….”
퍼렐 의원은 몇 시간이나 계단에 주저앉아 랭던 경을 기다린 나를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랭던 경 앞에선 참을 수 없던 눈물이 퍼렐 의원의 앞에선 도미닉이 교육한 대로 잘만 눌렸다. 눈물이 헤퍼진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의원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 랭던 경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이러지 마시고 일단 침실로 들어가십시오. 진료를 복도에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료는 보셔야지요. 랭던 공작님께서 더 화를 내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응접실에서 진료를 좀 봐 주시겠어요?”
“네, 남작님.”
퍼렐 의원은 오랫동안 귀족 집안의 의원 노릇을 한 사람답게 세세한 이유를 캐묻지 않고 나를 복도 안쪽에 있는 작은 응접실에 데려갔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열린 문틈으로 아까 봤던 어린 보더콜리가 웰시코기와 함께 들어왔다.
둘은 퍼렐 의원을 잘 아는 듯 달려와 꼬리를 치고 반가운 티를 내며 주변을 소란스레 만들었다. 귀여운 강아지들의 재롱에 나는 간신히 부은 눈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 강아지가 많은가 봐요. 아프고 나서는 침실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오늘에야 봤습니다.”
“개를 좋아하셔서 여러 마리 기르십니다. 남작님께서 편찮으시니 방해가 될까 봐 침실에 들이시지 않았나 보군요.”
“…원래는 침실에도 들이시나요?”
“네, 그러신 걸로 압니다. 손님들에게 잘 안 보여 주시는 데다 저택이 넓어서 티가 안 날 뿐 실내에 개들이 많답니다. 저택 뒤편에 있는 양 목장도 기르시는 강아지들 놀라고 지어 주신 걸요. 이 녀석들 엄마 개들이 양을 몰면서 자주 놀곤 하죠.”
“세심하시네요.”
“성정이 워낙 다정하십니다.”
내가 모르는 랭던 경의 또 다른 섬밀한 모습이었다.
퍼렐 의원은 내가 먹어야 하는 약을 챙겨 주고 발목에 감긴 붕대를 새것으로 갈았다. 이마의 상처를 가린 거즈 역시 교체했다.
“열이 또 올라오셨네요.”
“괜찮습니다.”
“돌아다니기엔 무리십니다. 침대든 소파든 움직이지 마시고 몸을 따뜻이 하고 계세요.”
퍼렐 의원은 품에서 작은 육포 조각을 꺼내 보더콜리와 웰시코기에게 간식을 주고는 진료를 마쳤다.
나는 퍼렐 의원이 저택을 떠나길 기다렸다가 다시 복도로 나가 담요를 두르고 앉았다. 호기심이 많은 보더콜리가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알짱거리다 복도를 달려 사라졌다.
집사의 지시를 받고 찾아온 하녀들이 밖에 나와 있는 나를 말렸지만 랭던 경에게 용서받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 있을 마음이 없어 거절했다. 집사에게도 확실히 말해 두었다.
나는 랭던 경이 아직 내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그의 질문에 정성껏 답할 것이다. 그리고 첩자 노릇을 하면서 감히 그를 재단하고 공작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처음에 마음먹었듯, 고통스러운 잠자리도 어떻게든 견뎌 내고 랭던 경을 속이는 것 외에 다른 일로는 그를 상처 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금 상황에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도의였다.
늦은 밤까지 랭던 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자리에서 반나절이 넘게 기다렸다. 열이 좀 더 심해졌다. 그러나 랭던 경이 당장 나가라고 한다면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10만 골드를 추가로 받은 도미닉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중 문제였다.
문이 열렸는지 휑한 겨울바람이 저택의 홀에 들르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밑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공작님, 다녀오셨습니까.”
집사의 인사에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담요를 내렸다. 몇 시간 만에 일어나려고 보니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붕대 너머로 복숭아뼈 주변이 퉁퉁 부은 게 보였다.
“로엘이?”
집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랭던 경이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튼 씨’가 아니라 다시 ‘로엘’이란 호칭이 되돌아온 것을 깨닫자마자 눈 주변이 뜨거워졌다. 앞니로 떨리는 입술을 누르며 난간을 붙들고 저린 다리를 간신히 폈다.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랭던 경이 층계참에 다다랐다.
랭던 경은 층계참에서 바로 올라오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는 흰 셔츠에 풍성한 타이를 매고, 프록코트 안에 검은색 조끼를 차려입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딱 맞게 날렵히 재단된 옷들이 몸 선을 우아하게 드러냈다. 조끼 단추에 걸려 있는 회중시계의 체인이 가스등 빛을 반사했다. 랭던 경은 비스듬히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랭던 저하.”
랭던 경은 내 쪽으로 터벅터벅 올라오며 대답했다.
“…왜 미련하게 나와 있었어요. 몸도 안 좋으면서.”
“오후에 있었던 일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붙잡으려 했는데 바로 외출을 하셔서 계단에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내가 있는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왔다. 오랜만에 서서 마주하는 랭던 경은 이렇게 키가 컸나 싶을 정도로 시선이 위쪽에 있었다.
랭던 경은 무표정이었다. 그는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오후만?”
“…아니요. 최근에 있었던 일 전부에 관해서요.”
“그대가 나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건 상관없어요. 사실이니까. 하지만 티는 내지 말아야지. 아니면 내게 애정을 갈구하지 말든가.”
내가 랭던 경에게 애정을 갈구했다는 마지막 말에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가 났던 걸까? 그에게 안겨 자리를 이동하고 그가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그가 키스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티가 났을 것이다. 목이 마른 사람이 갈증을 표 내지 않고 물을 마시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랭던 경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로엘 씨의 두 가지 생각에 휘둘리며 다 충족시켜 줄 수는 없어요. 나는 그러기엔 자긍심이 높은 사람이요. 사람은 상대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지. 때로는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선택할지는 상대방에게 달린 거예요, 로엘.”
“…….”
“내 말이 틀렸나요?”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온몸에 들끓기 시작한 열 때문에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숨이 뜨거웠다.
“…서 있기가 힘들 테니 침실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랭던 경은 나를 평소처럼 안아 들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침실 문을 열었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내가 혼자 다가오길 기다렸다. 나는 그 깊은 녹색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나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랭던 경을 살인자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든지, 살인자라는 생각은 묻어 두고 그저 애정을 바라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고.
나는 그를 차가운 살인자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아픈 나를 안아 침실로 데려가 주는 따뜻한 사람이길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이… 선택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을 뿐, 곧 떨리는 입술을 열고 그에게 부탁했다.
“랭던 저하, 제가 아직 발목이 몹시 아프고 열이 나서 움직이질 못하겠으니 제가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그래요? 혼자서는 걸어오기 힘듭니까?”
랭던 경이 확답을 얻듯 되물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꺼풀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하께서 도움을 주시길 원해요. 오늘 제가 어리석게 굴다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나중에 혼을 내 주세요. 그러나 지금은 부디 아픈 저를 가엾게 생각하시고 침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랭던 경은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큰 걸음으로 다가와 내 엉덩이를 받치며 나를 한 번에 안아 들었다. 나는 조심히 그의 팔뚝을 붙들고 어설프게 이마를 기댔다. 랭던 경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독였다.
“괜히 그러고 있지 말고 편히 기대요. 그러다 떨어집니다.”
“네, 저하.”
나는 그의 몸을 다리로 감싸고 눈물이 나올 듯 씰룩대는 입술을 넓은 어깨에 푹 파묻었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애정을 선택한 나를 그가 꼭 안고 침실로 데려갔다.
관심과 애정에 목마른 사람이 스스로 미움받길 택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랭던 경의 품에 기대는 법을 배워 버려 더 그랬다.
그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그가 다정한 자신을 선택하게 하려면… 나는 랭던 경의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그의 선한 면을 깎아내리지 않아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한 사람으로서 랭던 경에게 갖춰야 할 예의일지도 몰랐다. 내게 애정을 보여 주고 아플 때 돌봐 주는 사람을 현재에 머무르며 바라봐 주는 건.
잔인한 과거를 들춰내고 차갑게 비판하는 것은 그가 정말 내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라.
나는 그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과거의 랭던 경을 아버지의 기억 옆에 묻었다.
나는 이 애정 뒤에 또 다른 어떤 애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식사를 도와주고, 이마의 열을 확인하고, 목이 마른지 물어보고, 식욕이 없냐며 과일을 가져오는 랭던 경. 퍼렐 의원이 나를 만지는 게 싫다던 랭던 경. 그에게는 더 많은 다정한 모습이 있을 것이다.
랭던 경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바닥의 찬 기운에 냉골이 된 몸을 따뜻한 온도가 감쌌다. 벽난로 안에선 타닥, 타닥 따뜻한 소리를 내며 밝은 불꽃이 움직였다.
나는 이불을 입술 부근까지 끌어 올려 까칠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이불 너머로 빼꼼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랭던 경이 내 가지런한 눈썹을 조심조심 만지작대며 물었다.
“내가 나간 뒤부터 쭉 기다렸다고 들었습니다. 6시간이 넘게 그러고 있다니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오? 그러다 병이 심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떻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는걸요. 벌을 주고 가시지도 않았잖아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로엘 씨는 따박따박 대답하는 모습 하나는 항상 귀족답군. 찬 바닥에 앉아 있는 동안 로엘 씨의 입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나는 괜히 이불 속에서 몰래 내 입술을 더듬더듬 만졌다. 랭던 경은 하녀를 호출하는 종을 흔들었다. 곧 샬롯이 나타나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로엘 씨가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오.”
“네, 공작님.”
샬롯이 나가자마자 랭던 경이 무심히 말했다.
“벌은 섹스할 때 말고는 받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벌을 받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나이와 지위에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사람일 뿐이요.”
나는 ‘같은 사람’이라는 랭던 경의 말에 얼굴에 뜨거운 피가 몰릴 정도로 놀랐다. ‘나이와 지위에 상관없이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실로 ‘자유주의자’ 같은 생각이었고 랭던 경을 권위적이라 봤던 내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리였다.
‘혹시… 동생을 죽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던 걸까?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면 어떡하지.’
랭던 경은 생각이 많아진 내 이마를 한 번 더 짚었다.
“일단 식사하고 약부터 챙겨요. 열 때문에 얼굴이 빨갛습니다.”
“그럴게요, 랭던 경. 오늘은 무슨 일로 나갔다 오셨어요?”
“고장 난 기차가 생겨 회사에서 보고를 받았고 다른 공작과 정찬 약속도 있었습니다.”
샬롯은 바로 식사를 준비해 왔다. 랭던 경은 당연한 듯 직접 빵에 수프를 적셔 먹여 주고, 구운 연어를 잘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열 때문에 어지러운 머리를 기대고 힘없이 앉아 얌전히 입을 열고 받아먹었다. 마지막으로 먹은 레몬파이가 무척이나 맛있어 랭던 경에게도 권했다.
“저하, 파이를 드셔 보세요. 어딘가 매우 익숙한 맛인데 그래서 더욱 입맛에 맞네요. 파이가 달콤해서 혼자 먹기 무척 아깝습니다.”
“나는 많이 먹어 봤습니다. 동생이 예전에 구해 온 레시피인데 요리라고는 모르는 녀석이 어디서 구해 왔던 건지 모르겠어요. 요리사가 그때부터 종종 만들어서 냅니다.”
하마터면 내 입에서 랭던 경의 동생의 이름인 ‘윌리엄’이 튀어나올 뻔했다. 책을 뒤져 본 사실을 들키는 게 큰일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내가 몰래 알게 된 사실과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을 구분해 놓을 필요가 있을 듯했다.
“동생분께서 레몬파이가 무척 마음에 드셨었나 봐요. 레시피까지 따로 구해 오신 걸 보면요.”
나는 주춤대거나 그의 과거를 곱씹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랭던 경도 아무렇지 않게 포크로 파이를 베어 내 입에 넣어 주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가 나의 잘못을 질책하지 않고 식사를 도와주어 고마운 마음이 문득문득 눈동자 뒤편을 데웠다.
식사가 끝나자 랭던 경은 하녀가 준비해 온 물수건으로 땀이 밴 내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 주었다. 으슬으슬 추웠지만 열이 심하다 보니 피부에는 땀이 맺혔다.
“로엘 씨, 얼른 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밖에 나와 있어 열이 심해졌어요.”
“미련하게 병을 악화시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로엘 씨도 알다시피 나는 성미가 급하고 이기적인 편이에요.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로엘 씨가 밖에 나와 고생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쉽게 풀렸습니다. 이번엔 당신이 나를 못돼 먹었다고 욕해도 할 말이 없겠군. 어쨌든 몸이 무척 고단했을 텐데 로엘 씨가 머리의 결정을 따르는 현명한 판단을 했네요.”
랭던 경은 이번엔 이성(理性)을 신봉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는 늦게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프록코트, 조끼, 풍성한 타이, 흰 셔츠… 하나하나 벗겨질수록 근육질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승마와 펜싱 같은, 각종 운동으로 단련된 신체가 우아한 굴곡을 빛냈다.
그는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내 곁으로 와서 다시 한번 이마에 손을 올려 체온을 확인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열이 오른 피부가 욱신댔지만 따뜻한 손길에 마음만은 편해졌다.
“랭던 경,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 봐요.”
“제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던 것 기억하세요? 그 뒤로 아직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저만 저하의 동생분에 대해 여쭤봤구요. 제가 저하께 보인 무례한 태도를 사과하고 싶으니 무엇이든 편히 질문하시면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는 내용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괜찮겠어요? 질문 자체는 사소한 것이지만 어쨌든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일이니 로엘 씨 마음이 편치 않을 듯합니다.”
“저는 저하의 과거에 집착하느라 지나치게 개인적인 부분들도 여쭈었으니 저하께선 물어보실 자격이 충분하세요. 저에겐 랭던 경의 질문에 답해 드릴 개인적 의무가 있어요.”
랭던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여송연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그는 여송연을 한 대만 가져오며 물었다.
“같이 피우겠어요?”
“좋습니다.”
함께 여송연을 태우며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듯해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 경은 먼저 입에 시가를 물고 성냥갑을 꺼냈다. 칙, 긁는 소리와 함께 작은 막대기 끝에 환한 불꽃이 일어나고, 성냥불이 여송연 끝을 골고루 태웠다.
그는 시가 연기를 여러 번 빨아들였다 뱉으며 불을 제대로 붙인 뒤, 내게 그 여송연을 물려 주었다. 나는 말없이 여송연을 들고 연기를 마셨다. 랭던 경은 여송연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옮겨 가며 내 손을 부드러이 훑었다. 사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어서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옛날, 프리데릭가의 살롱에서 로엘 씨를 본 후로 항상 궁금했던 점이 있습니다. 왜 장남인 도미닉 대신 어린 그대가 상자를 들고 왔나요?”
한 번도 스스로 해 본 적이 없는 질문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살롱에서 그 사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나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고 불합리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일은 무조건 장남이 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시 도미닉은 성인이었고 로엘 그대는 열여섯 살에 불과했어요. 도미닉이 상자를 가져오는 게 상식에 맞는 일이요. 그래서 나는 늘 당신이 도미닉 대신 그 일을 맡은 사연이 있나 궁금했습니다.”
랭던 경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떠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여송연을 물려 주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젖은 여송연 끝을 입 속에 담고 연기를 빨았다. 입 속에서 독한 연기가 굴렀다.
나는 연기를 천천히 뱉으며 당시의 집안 사정을 회상했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그림으로 시선을 느릿느릿 옮겼다. 발가락 끝이 이불을 들어 올려 침대 발치엔 작은 산이 두 개 생겨나 있었다.
“그야….”
나는 여송연 연기를 한 번 더 빨아들였다가 내쉬며 그에게 시가를 넘겼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게 저였으니까요. 제가 아버지의 유언장을 보고 혼자 한 일이었고 그래서 끝까지 책임을 진 거예요.”
“당신이 아버지 목을 벴다는 소리요?”
“…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노르크에 돌았던 그 소문은 헛소리라 믿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헛소문이 아니에요. 저였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열여섯 밖에 안 되는 당신이 죽은 아버지의 목도 베고 머리도 상자에 넣어 왔다는 얘기예요?”
직설적으로 물어보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랭던 경은 내 예상보다 늘 더 노골적이었다. 돌려 말하는 법이라고는 없는 질문에 얼굴에 열이 몰려 머리가 다시금 핑 돌았다.
나는 랭던 경이 내뿜은 연기를 보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그에게 약속한 게 있기 때문에 솔직히 답하려 기억하고 있는 진실을 말했다.
“사실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몹시 충격을 받아 중간에 기억을 잃은 구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닫힌 방엔 돌아가신 아버지와 저만 있었고 처음에는 시신이 온전했어요. 유언장에는 프리데릭가에 아버지의 목을 들고 가 가문을 지키라고 적혀 있었고요.”
나는 손끝으로 눈물을 조용히 훔쳐 냈다.
“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던 데다 시신을 감히 훼손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했는지는 충격으로 또렷이 기억 못 합니다.”
어느새 뺨이 눈물로 젖었다.
“가여운 로엘.”
랭던 경은 흥건히 젖은 뺨에 입을 맞춰 주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울먹이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눈물로 손이 더러워져요, 저하.”
“당신의 눈물인데 이제 와 무슨 상관이요. 그동안 눈물로 젖은 보드라운 뺨을 몇 번이나 빨고 핥으며 그대를 울렸는걸.”
랭던 경은 젖은 채 떨리는 눈꺼풀 위에도 살며시 입술을 눌러 주었다. 그가 직접 여송연을 들고 끄트머리를 물려 주어 나는 떨리는 입술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삼키지 말고 천천히.”
그는 밀려오는 슬픔을 조절하지 못하고 연기를 급하게 들이켜는 나를 달랬다. 연기는 입 속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떨리는 숨과 함께 입 밖으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잘하고 있어요.”
랭던 경은 내가 숨을 편안히 쉴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각처럼 단정한 입술로 시가를 물었다.
“결국, 로엘 씨의 기억 속에는 없다는 거죠? 아버지의 머리를 벤 기억이….”
“…기억은 없지만 제가 한 건 확실해요. 손과 옷이 전부 피투성이였는걸요.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족을 살린다고 애쓰다가 기억을 여러 번 잃은 것 같아요.”
“내가 그때 왜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는지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나요?”
랭던 경의 질문이 과거의 기억에 떠는 나를 정지시켰다. 차마 랭던 경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물만 떨어트리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랭던 경의 고요한 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나는 요 몇 주간 랭던 경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도 그를 거짓말쟁이라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슴속에 이상한 예감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그에게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질문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완전히 결심하기 전에 입술이 먼저 떨어졌다.
“…이유가, 무엇인데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당시 그대가 가져온 머리가 서튼 경이 맞는지 직접 확인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상자에 담아 온 잘린 머리를 살펴봤어요, 로엘. 눈, 코, 입뿐만 아니라 목의 절단면까지.”
심장이 한 번, 묵직하게 뛰었다.
“절단면은 날카로웠고 한 번에 베어 낸 듯 깨끗했습니다. 군인이나 정육업자, 아니면 사냥꾼의 솜씨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대는 아직까지도 사냥을 할 줄 모르지.”
심장이 두 번, 거칠게 나를 움켜쥐었다.
“…당신의 형인 도미닉이 해외에서 군에 복무한 적이 있지 않소?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말입니다.”
심장이 세 번, 어느새 박동 소리가 랭던 경의 목소리보다 커졌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도미닉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당신이 아니라.”
네 번, 랭던 경의 마지막 말과 함께 세상이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