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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테런스 랭던 (1) (7/27)

7. 테런스 랭던 (1)

로엘 서튼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동그란 푸른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큼직한 눈동자는 로엘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투명한 푸른색 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하나뿐인 동생을 떠난 보낸 비통한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감히 공작인 내 앞에서 동생을 언급하는 자는 없었다. 본래 가문을 위해 명예 살인 당한 자의 이름을 가족 앞에서 입에 올리는 건 몹시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러할 줄 알았다.

그 기억을 건드리는 자가 제 아비의 머리를 들고 왔던 울보 로엘 서튼이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꿰뚫린 아픈 살점은 그대로 분노가 되어 심장을 불길로 휘감았다. 들불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가 로엘의 팔뚝을 붙든 손에 힘을 실었다. 그는 무척 아픈지 섬세한 미간을 찡그렸지만 도저히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았다.

“말해.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소.”

분노가 드러나는 목소리로 겁박하자 로엘은 내게 잡힌 팔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유약한 성품 때문에 죄송하다고 사과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강단 있는 음성이 정직한 질문을 쏘아 올렸다.

“…정말 죽이셨어요? 평민을 사랑해서요? 저는 당신이 그보다는 다정한 분일 줄 알았어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망각한 줄 알았던 기억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고 증명하듯 즉시 손끝을 찾아왔다.

장총에 손가락을 걸던 순간의 주변 풍경과 동생의 얼굴, 벽난로의 장작이 타던 소리와 서재에 퍼지던 피 냄새.

모든 감각이 집요하게 머릿속을 파고들며 나의 죄책감에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로엘의 팔을 던지듯이 놓으며 떨리는 손끝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

“꺼져.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장총으로 그대의 머리도 갈겨 버릴 테니까.”

여리고 어린 로엘 서튼은 몸을 돌려 그대로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나는 가슴을 막막히 뒤덮는 고통에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엘에게 터트린 분노는 처음부터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조준한 것이었다. 손마디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어 봐도 마음의 고통은 더욱 뜨겁게 치밀었다.

탕- 귀를 찢어 놓을 듯 강렬했던 총성과 여기저기 튀었던 사랑하는 동생의 피.

피범벅이 된 동생을 끌어안았을 때 터진 오열은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울음처럼 낯설게 들렸다.

피비린내 속에서 손에 닿아 있는 동생의 피부는 여전히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며 일어나 ‘테런스’라고 나를 부를 듯했다. 동생의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내어 줄 텐데.

나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애써 다시 마음속에 쓸어 담으며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실언으로 로엘의 아픈 과거를 먼저 헤집어 놓은 사람이 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내 머리는 다행히 이대로 감정이 틀어진 채 로엘을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판단 정도는 간신히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로엘….”

그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리자 분노에 떨리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마차를 타지는 못했을 것이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층계참에서 발을 틀었을 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란 발걸음이 멎고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로엘이었다.

“로엘!”

머리가 인식하기 전에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는 품위 따위는 내던지고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로엘은 그 아름다운 푸른 눈을 숨긴 채 바닥에 모로 쓰러져 있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카펫으로 뚝, 뚝 떨어졌다. 나는 로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품에 안았다.

“로엘! 정신 차려요! 로엘!”

나의 외침에 순식간에 하녀와 하인들이 곳곳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쓰러진 로엘을 보고 놀란 듯 일제히 소스라치며 몸을 멈췄다.

“뭐 하고 있어요! 의원을 부르세요! 어서!”

나의 명령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자리를 떠났다. 하녀들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바삐 복도를 가로질렀다가 물과 수건을 준비해 황급히 나타났다. 다시 내려다본 로엘의 젖은 눈꺼풀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 보여 정신을 잃지 않도록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로엘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녀가 물을 짠 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닦아 냈다. 핏자국이 닦여 나간 이마 안쪽엔 손가락 두 마디가량의 상처가 피부에 길을 낸 상태였다. 내가 왜 멍이 들었냐고 쏘아붙인 자리였다.

찢어진 피부는 벌건 속살을 내보였다가 이내 붉은 핏방울을 뿜어내며 상처 주변과 로엘의 눈가를 적셨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하녀가 겁을 먹고 손을 벌벌 떨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내가 하겠습니다. 마른 수건을 줘요.”

“죄, 죄송합니다. 고, 공작님.”

상처를 보고 무서워하는 하녀 대신 수건으로 직접 로엘의 상처를 지혈했다.

“퍼렐 의원은?”

“저는 잘 모, 모릅니다.”

“집사를 불러오시오.”

“네, 공작님.”

하녀가 물러가고 나는 로엘을 끌어안은 채 집사를 기다렸다. 랭던가의 집사인 아서 도프 씨가 은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도록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프 씨는 대대로 랭던가의 집사를 지낸 집안 사람으로, 그의 아내 역시 랭던가의 하녀들을 통솔하는 충직한 관리인이었다.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였다.

“도프 집사님, 의원은요?”

“공작님께서 소리치시는 걸 듣고 바로 하인을 말에 태워 보냈습니다. 퍼렐 의원이 공작님께서 사냥을 마치실 때까지 저택에서 대기하다 부상 소식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막 나갔으니 하인이 금방 따라잡았을 겁니다.”

로엘은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크지 않았으나 속은 어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뼈가 부러졌거나 머리를 심하게 다쳤을 가능성이 있어 걱정이 가누어지질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의원의 지휘 아래 하인들이 로엘을 들것에 실어 가까운 서쪽 건물의 침실로 옮겼다. 로엘은 그렇지 않아도 흰 피부가 유령처럼 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하인들이 로엘을 침대 위로 옮기는 동안 몸이 흔들렸으나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초조하게 손톱 끝을 잠시 물었다가 놓았다. 로엘이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교양 없는 행동을 참아 내기 어려웠다. 퍼렐 의원이 내게 물었다.

“랭던 공작님, 어떻게 다쳤는지 보셨습니까?”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어요. 내가 발견했을 때는 계단 밑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듯합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크게 다쳤습니까?”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평소와 다른 내 태도를 느꼈는지 퍼렐 의원이 나를 흘끔,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일단 촉진을 좀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공작님.”

“맞습니다, 랭던 공작님. 이쪽으로 오셔서 편히 앉아 기다리십시오. 요즘 일정이 많아 무리하셨습니다.”

도프 집사가 권했지만 손을 저어 거절하고 로엘을 보며 서 있었다.

오늘 내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상처를 줘서 계단에서 넘어지게 만들었을까. 동생의 일은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있으니 그 추문에 살만 조금 더 보태 얘기해 주었으면 됐을걸.

한번 폭발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질머리와 사나운 말투는 자주 상대방을 향한 내 마음을 왜곡시켰다. 그런 성정이 나의 사교계 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랭던 가문과 공작이라는 지위 덕택이었다.

의사가 촉진하는 동안 로엘은 의식이 없는데도 이따금 신음을 흘리고 눈물을 떨구었다. 로엘이 알면 의아해하겠지만 나는 모든 요소를 내 통제 아래에 둘 때가 아니면 그가 종이에 손을 베이는 일조차 원치 않았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최대한 초조한 심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점잖게 입을 열었다.

“퍼렐 의원, 촉진이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닙니까? 의식이 없는데도 자꾸 울지 않소.”

“그래도 확인해 봐야 해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아닙니다. 내게 미안할 건 없고… 퍼렐 의원이 알아서 잘해 주겠지.”

퍼렐은 좀 더 조심스럽게 로엘의 상태를 살펴본 뒤 이불을 덮어 주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골절이 된 곳은 없어 보이지만 계단에서 굴렀으니 몸으로 흡수한 충격이 클 겁니다. 골절이 없으니 오히려 근육통이 무척 심해서 한동안 못 움직일 수도 있고 열이 날 수도 있어요. 토를 하지 않고 머리에 부은 데가 없는 걸 보면 머리를 다치진 않으신 것 같지만 일어나면 어지러움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 매일 진료를 보며 상태를 지켜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목숨이나 건강에 큰 지장은 없는 거요?”

“네, 운이 무척 좋으셨습니다. 저 정도 층계참에서 떨어지면 잘못해 목에 골절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나는 숨을 뱉으며 머리를 가벼이 쓸어 넘겼다.

“크게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언제든 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세요.”

“네, 공작님. 일단 지금 의식이 없을 때 찢어진 이마를 꿰매도록 하겠습니다.”

퍼렐은 로엘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했다. 피부를 꿰매는 모습이 보기 편하지 않았으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노련한 퍼렐 의원은 순식간에 로엘의 이마를 꿰매고 거즈를 덧댔다.

“흉터가 남을 것 같습니까?”

“흉터는 안 남을 겁니다. 살짝 벌어진 것뿐이라서요.”

퍼렐 의원이 나간 후 사람들을 다 물리고 로엘의 곁에 앉았다. 흰 베개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 백금색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혼자 남을 때까지 간신히 억눌러 뒀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난 곳은 하필이면 내가 그에게 왜 멍이 들었냐며 모욕을 준 위치였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잡았다. 힘을 주어 잡으면 부러질 듯한 손가락이었다.

“로엘….”

나는 그의 손을 쓰다듬고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와 내 동생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누구에게도 얘기해 줄 수가 없어요. 소문을 진실처럼 들려줄 수밖에는…. 미안합니다.”

핏기 하나 없는 여린 입술 위에 입을 맞추고 로엘이 춥지 않게 이불을 더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으려 했는데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인 아서 도프 씨가 들어왔다.

“공작님, 왕궁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베버릭 왕국에서 또 사우스라인을 침범했다고 합니다. 급히 입궁을 청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낸 전갈입니까? 못 간다고 전하세요. 로엘이 혼자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집사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게, 워맥 장군입니다.”

“워맥…? 가야겠군. 왕의 호출이면 가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득 잊고 있던 손님 한 명을 떠올렸다.

“아참, 로엘이 데려온 아이는?”

“마침 아이를 데리러 마차가 와서 태워 보냈습니다. 서튼 남작님까지 다치신 차에 아이까지 있으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잘했습니다.”

집사의 눈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담담히 말했다.

“아이 이름이 윌리엄이더군.”

“네, 공작님. 돌아가신 도련님 존함과 같습니다.”

“흔한 이름인데 베넷이라는 성씨와 눈동자 색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어요. 베넷도 흔한 성이기는 하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공작님. 마침 내일이 도련님 기일이기도 하구요. 주임 신부님께서 잊지 않고 연락을 주셨더군요.”

“올해도 새벽 미사를 드리고 장미꽃을 바치러 갈 겁니다. 준비는 됐나요?”

“네, 공작님. 수입상이 장미를 준비했습니다. 올해는 색깔이 무척 예쁩니다.”

“…윌이 사랑했던 여인과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도통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군.”

“공작님, 천한 여자입니다.”

집사의 눈동자에 냉담한 빛이 스쳤다. 윌리엄과 나를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나는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나 역시 윌을 생각하면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기 어려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집사와 내 분노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집사의 분노는 윌리엄의 여자를, 나의 분노는 윌리엄의 형인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긴, 평민일 뿐이지.”

대답하는 입 속은 마른 모래알이 들어간 듯 서걱거렸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왕궁에 갈 준비를 마쳤다. 마개를 열고 오늘 새로 전달받은 밀서를 병에서 꺼내 확인했다. 돌돌 말려 있는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1월 10일, 1월 24일 예정 / B가 200만 골드의 비용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1월에 두 번, 200만 골드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금액이었다. 날짜를 확인한 뒤 짧은 답장을 썼다.

1월 6일, 오전 7시 30분, 포도나무 아래에서 금발 여인이 기다릴 것이오.

나는 답장을 전하기 위해 혼자 1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잠시 펜을 들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혹시라도 로엘이 먼저 깨어나면 집사가 전해 줄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펜촉을 몇 번이나 잉크에 적시며 뭐라고 적을지 고민하다 겨우 첫인사를 썼다.

애정하는 로엘 서튼 씨에게.

의식을 잃은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려고 했으나 왕궁에서 중요한 연락이 와 급히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돌아오려 하나 혹시 시간이 늦어 로엘 그대가 혼자 깨어날 때를 대비해 편지를 남기오. 혹여나 내가 다친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 외출했다는 끔찍한 오해를 할까 봐 염려되는 탓도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다친 것을 발견하고, 내가 그대에게 쏟아 낸 모진 말들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것 같아 슬픈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소.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의 일부를 팔아 그대에게 화를 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이 크게 다친 곳 없이 일어나 주기만 한다면 동생에 관한 질문에 성의껏 대답하기로 못된 마음을 고쳐먹었소. 진작 그랬어야 하는 일인데 내 성미가 이러한 모양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나 역시 로엘 씨의 아버지에 대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대가 너그러운 관용으로 허락한다면 서로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으로 마음속 앙금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오.

로엘 그대가 일어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봉랍으로 봉투를 밀봉하여 집사에게 주고 로엘이 누워 있는 방에 한 번 더 들렀다. 혹시 몸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곁에 앉아 직접 손으로 로엘의 이마를 짚었다. 그에게 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국왕 앨버트 3세는 포도주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워맥 장군과 집무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시녀들이 달라붙어 취한 국왕에게 겨우 옷을 입혔는지 망신스럽게도 옷차림이 단정치 않았다. 나는 넓은 의자에 비뚜름하게 누워 있는 그에게 짧게 인사한 후 워맥의 곁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폐하, 샤를 대공이 빈민 구제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때에 세금을 더 징수하시면 시민들의 반발이 거셀 겁니다.”

국왕은 손에서 떼어 놓지 않는 포도주 잔을 들며 반쯤 누운 채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쩌겠소, 친애하는 랭던 경. 사우스라인에 매번 병력을 보내야 하는걸. 내가 문제가 아니라 베버릭 왕국이 문제요. 한심한 야만인들! 선조들이 그 섬에 폭탄을 날려 그자들을 몽땅 쓸어버렸어야 했소!”

폭탄이 없던 시대에 어떻게 폭탄을 날린단 말인가.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깔끔히 무시하고 옆에 있는 워맥을 쳐다보았다. 워맥 장군은 왕족으로 앨버트 3세에게 힘을 실어 주는 실세였다.

“워맥 장군, 이번에도 피해가 심각합니까?”

“네, 랭던 경. 베버릭 왕국에서 또 해안을 건드려 소규모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소규모라지만 매번 수십, 수백 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일이 숨 쉬듯 발생하니 병사가 모자랍니다. 병사를 충원할 자금이 없어 또 수도군에서 지원을 보내야 해요.”

워맥은 널찍한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르크의 지도 위에 작은 깃발로 접전 지역을 추가로 표시했다. 남쪽 해안엔 그동안 놓인 크고 작은 깃발이 다닥다닥 해안선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찌푸린 미간을 잡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추가로 급파해야 할 병력을 계산하는 척했다. 국왕과 워맥 장군은 알지 못하지만 오늘 받은 밀서에 쓰인 대로 베버릭 왕국은 1월에 두 번 더 작은 교전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베버릭 왕국은 5년 전부터 사우스라인을 침범하는 방식으로 노르크 수도의 병력을 조금씩, 조금씩 비워 나가고 있다. 밀서에 실려 온 모든 계획이 순항 중이었다.

“워맥 장군은 숫자를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1천 명 정도요.”

“너무 수가 작습니다. 최근에 교전이 잦았는데 1월에도 두세 번은 더 침범할 거라 봐야 합니다. 적어도 3천은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랭던 경, 그보다 더 보내면 수도는 대체 누가 지킵니까. 젠장, 빌어먹을 베버릭을 지금이라도 당장 쳐야….”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사우스라인을 지킬 세금도 바닥났습니다. 병력 충원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전쟁을 어떻게 치릅니까.”

국왕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니 성탄과 신년에 세금을 더 걷어야 하오!”

앨버트가 포도주 잔을 돌리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불같은 성격인 워맥 장군의 굵은 수염 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처음엔 워맥 장군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던 꼭두각시 앨버트 3세는 어느덧 장군의 통제를 벗어나 정신 나간 경주마가 된 지 오래였다.

나는 장군 대신 침착하게 대답했다. 성질머리가 급한 나도 다혈질인 워맥 장군에 비하면 로엘처럼 점잖은 편이었다.

“폐하, 성탄과 신년엔 세금을 감면해 주어야 하지 더 걷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노르크는 겨울이 길고 혹독합니다.”

“흥, 내가 샤를 대공을 편드는 그깟 종이 쪼가리를 무서워할 줄 아시오? 프리데릭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여러 가지 산업들이 호황이라 오히려 전보다 백성들의 수입이 늘었다더군. 랭던 경도 철도를 소유하고 있으니 알 것 아니오!”

앨버트 3세의 말대로 나는 철도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반 백성이 아닌 귀족이었다. 산업 발전 후 랭던가의 재산은 가문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으나 가난한 백성들의 삶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빈민들은 몸을 누일 집이 없어 좁은 방에서 여럿이 몸을 겹쳐 자는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마른 빵 몇 쪽을 먹으며 지내다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는 일이 허다했다.

나는 짐짓 궁금한 투로 질문했다.

“종이 쪼가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앨버트는 포도주 잔을 들고 일어나 배를 내밀고 책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젠 최소한의 운동마저 하지 않는지 늘어진 뱃살 때문에 40대가 아니라 60대 노인으로 보였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와 내게 던지고 직접 잔에 포도주를 더 따랐다. 워맥 장군이 국왕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종이 쪼가리는 얼마 전에 뿌려진 가짜 호외입니다. 노르크 수도의 빈민가에 뿌린 것이라고 하오.”

“가짜 호외를 종이에 인쇄하는 미친 자가 있습니까? 종잇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말이오! 대체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데릭 백작이 철저히 알아보았는데 샤를 대공 쪽 소행은 아니라고 합니다.”

구겨진 종이를 펼치니 인쇄된 글씨가 나타났다.

샤를 대공이 새로운 국왕이 되다.

나는 첫 줄을 읽자마자 종이를 그대로 찢어 버렸다.

“폐하, 이런 헛소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노르크의 주인은 앨버트 폐하 한 분뿐입니다.”

“경의 말이 진심이라면 이번 세금 인상에 찬성해 주시오.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랭던 경이 반대한다는 소문이 나돌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소!”

“…그러면 제가 세금 인상에 동의하는 대신 사우스라인에 병력 3천을 보내도록 해 주십시오, 폐하. 베버릭 왕국에 우습게 보이면 그들은 노르크를 침략할 겁니다.”

워맥은 수도가 비게 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지만 사우스라인을 그냥 놔두었다가 단순 교전이 아닌 침략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워맥이 동의했다.

“폐하, 저도 랭던 경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랭던 경, 오늘 밤 시간은 괜찮습니까? 곧 다른 귀족들도 입궁해 회의를 열 예정이니 결론을 짓고 문서로 남겨 놓는 게 좋겠소.”

“…네, 할 수 없죠.”

나는 조끼 단추에 걸린 금색 체인을 잡아당겨 주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꺼냈다. 곧 자정이었다. 로엘이 일어났을 듯하여 몸 상태가 걱정됐다. 다른 귀족들이 모여 회의하기 전까지 잠깐 시간의 여유가 있어 같이 입궁한 하인에게 에메랄드 저택으로 보낼 쪽지를 전달했다.

로엘 서튼 씨가 일어나면 상태를 알려주길 바람. T.L.

긴 회의를 끝내고 새벽에 궁을 나설 때쯤에야 하인이 집사에게 받아 온 편지를 전달받았다.

“답장이 몇 시쯤 왔습니까?”

“자정이 조금 지나 연락이 왔습니다, 공작님.”

“바로 성당으로 갑시다. 미사가 있어요.”

“네.”

흔들리는 마차에서 펼친 편지엔 뜻밖에도 집사가 아닌 로엘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의 얼굴처럼 아름답고 유려한 서체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다 한 자 한 자 아끼며 읽었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늦은 밤 왕궁으로 발걸음 하신 일은 잘 마무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고 가신 편지와 저를 걱정하여 왕궁에서 추가로 주신 연락도 집사님께 잘 전달받았습니다.

지난 저녁엔 저하와 말다툼을 하며 몹시 마음이 아팠으나 랭던 경께서 제게 상처를 주셨다고 해서 돌아가신 동생분을 함부로 언급한 제 실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 역시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건강을 염려하실 것 같아 말씀을 올리자면 보시다시피 오른손과 머리는 멀쩡한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씨를 이렇게 똑바로 적을 수 없었겠지요. 다만 오른쪽 다리를 다쳐 거동이 여의치가 않고 낙상의 충격으로 몸에 알 수 없는 통증과 미열이 있는 상태입니다.

새벽에 동생분을 위한 미사가 있다고 들어 저하와 함께하고 싶었으나 퍼렐 의원이 외출을 말리네요. 몸은 곁에 없더라도 마음으로 저하와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애도의 마음을 담아, 로엘 서튼으로부터.

추신. 낙상은 저의 부주의로 인한 창피한 실수이니 마음에 담지 말아 주세요.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씨가 묻어나는 편지였다. 로엘이 고심 끝에 적었을 모든 단어가 새벽에 홀로 있는 외로운 나를 위로했다.

편지에서 눈을 떼어 내고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봤다. 눈이 쌓인 겨울인데 어두운 골목마다 낡은 담요를 몇 장 두르고 밖에서 잠을 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다. 광장을 지날 때 특히 눈에 띄는 사람이 보여 나는 앞 유리창을 두드렸다.

“멈추시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가 몸을 흔들어 잠을 깨우고 금화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호의를 이해하지 못한 여인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방을 구하세요. 조금만 견뎌요. 이번 겨울이 지나면 노르크에 곧 봄이 올 겁니다.”

떨리는 손에 금화를 쥐여 주고 마차에 다시 올랐다.

나는 사람이 몇 명 참석하지 않은 작은 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드리고 주임 신부와 인사를 나눈 뒤 동생의 묘를 찾았다. 겨울의 해는 일찍 떠오르는 법이 없다. 어두운 밤만큼이나 어슴푸레한 새벽도 오랜 시간 하늘을 덮었다. 시린 새벽하늘 아래 휘몰아치는 찬 바람이 코와 귀 끝을 붉게 얼렸다.

나는 홀로 장미꽃을 들고 동생의 묘 앞에 섰다. 동생은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묘지 옆에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안락한 성당은 근처에서 동생의 묘를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동생은 신실한 신자였다. 성당 바로 옆에 묻힌 것이 동생의 영혼을 평안하게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윌리엄, 오늘도 로즈 없이 장미꽃을 대신 들고 와 미안하다. 로즈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구나.”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입김이 뿌연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하긴, 로즈를 찾는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너는 살아서 로즈와 함께하고 싶었을 텐데 목숨을 건 나의 반대로 연약한 너를 절망에 빠트린 것을.”

동생의 묘에 빨간 장미꽃을 바치고 허리를 굽혀 ‘William Patrick Langdon’이라는 이름을 쓰다듬었다. 나는 이내 몸을 일으켜 묘비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쓰다듬은 동생의 머리엔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묘비가 된 회색 돌은 손끝을 차갑게 얼릴 뿐이다.

“내가 로엘에게 보낸 편지를 보았다면 네가 몹시 걱정할 것 같구나. 네 죽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진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부모님의 곁에서 편히 쉬어라. 그리고… 내가 죄를 갚기 전까진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마.”

나는 어두운 겨울의 새벽을 뒤로하고 성당의 묘지를 떠났다. 성당 앞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아들이 태어난 날, 사우스라인에 병력을 파병하는 조건으로 성탄 세금에 동의한 나를 가엾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나는 동생이 사랑했던 또 다른 여인인 그녀에게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성모께서도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나는 외로이 마차에 올랐다. 새벽은 아직 어두웠지만 길을 서둘러야 했다. 에메랄드 저택에 다쳐서 누워 있는 로엘 서튼을 어서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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