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리스트 2권- 6. 오두막 (6/27)

리베라 리스트 2권

6. 오두막

며칠 전 폭설 때문에 윌리엄이 수도로 오지 못할까 걱정했으나 마차는 예정대로 호텔 앞에 섰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도미닉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쁘게 문으로 걸어갔다. 깔끔한 정복을 입고 문가에 서 있던 직원이 손잡이를 당겼다. 윌리엄은 도미닉을 뒤따라 내리다 계단을 밟는 나를 보고 눈이 커졌다.

“로엘 도련님!”

윌리엄은 귀를 덮는 털모자에 베넷 부인이 직접 뜨개질해 만든 털코트를 입고 있었다. 도미닉은 윌리엄이 내게 뛰어들지 못하도록 코트 뒷덜미를 재빠르게 잡아챘다. 윌이 말썽을 피우다 혼날까 싶어 돌계단을 성급하게 내려가다 넘어질 뻔했는데 도미닉이 팔을 붙들어 주었다. 나는 그와 친밀함을 느낄 기분이 아니라 얼른 팔을 빼냈다. 도미닉이 담담히 물었다.

“열은 다 내렸니?”

“네, 형님.”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며 윌리엄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번 겨울은 잘 먹으며 지내고 있는지 뺨에 적당히 살이 올라 얼굴이 보기 좋았다.

내가 번 돈이 베넷 일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그 돈이 아니었으면 도미닉이 베넷 부인을 종일 고용하지 못했을 것이고 어린 윌리엄은 작년처럼 겨울에 배를 주렸을 것이다. 도미닉은 시선을 피하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다정히 어깨를 잡았다.

“랭던 저택으로 가면서 얘기 좀 할까?”

“그러세요.”

우리는 윌리엄을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나는 윌리엄이 가능한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안쪽에 앉히고 도미닉과 아이 사이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부가 말의 등을 찰싹 때리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미닉은 꽤 오랜 시간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먼저 눈치 보며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아 불편한 침묵을 참고 있으니 도미닉이 뜸을 들이다 사과했다.

“저번에는 미안하다.”

“…집안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에요. 제 몸을 상하게 하는 무서운 일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왜 모르겠니. 다 무능력한 나의 불찰 때문인걸.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너를 돌본다고 돌봤는데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이제 제가 형님께 갚아야 할 차례인 것을 알고 있어요.”

윌리엄은 마차 밖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심각한 어른들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뒤통수의 신경은 온통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윌리엄을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나는 아이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뒤에서 어깨를 감쌌다. 같이 밖을 내다보며 말을 걸었다.

“윌, 오늘은 공작님 댁에 간다는 얘기 들었지?”

“들었어요, 로엘 도련님.”

“공작님을 뵈면 ‘공작님,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해. 질문도 하지 않으셨는데 먼저 말하거나 시끄럽게 떠들면 크게 혼날 수도 있어. 뛰는 것도 안 되고. 알겠지?”

“걱정 마세요, 로엘 도련님. 저 미사도 잘 드려요, 로엘 도련님.”

매번 ‘로엘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붙이는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이 나왔다. 내게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부르다 베넷 부인에게 호되게 혼난 뒤로 윌은 필요 이상 말을 조심했다.

“말끝마다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하지만 할머니한테 혼나요, 로엘 도련님.”

사랑스러운 윌리엄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꼭 안았다가 놓았다. 도미닉은 내 행동이 탐탁지 않은 듯 헛기침을 하였으나 나를 의식한 듯 그 이상은 눈치를 주지 않았다.

도미닉은 내가 평민인 윌리엄을 예뻐하고 가까이하는 건 윌의 버릇을 망치는 일이라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이 막 걷기 시작할 때부터 이 아이를 알았다.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 첫 어린아이라 남달리 마음이 쓰였다.

윌리엄이 자라는 순간들은 수도의 외곽 마을로 쫓겨난 내 10대 시절의 작은 위안이었다. 어린 윌리엄의 첫걸음마도, 베넷 부인을 엄마라 부르던 모습도, 처음 그네를 탔던 일도, 베넷 부인을 엄마가 아닌 할머니라 고쳐 불렀던 것도 내게는 모두 기억에 남는 뭉클한 순간이었다.

멀리서 랭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화려한 저택은 청록색으로 빛났다. 도미닉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오래도록 소망하던 아름다운 보물을 만난 자의 감탄이었고, 그와 비슷한 위조품이라도 갖길 열망하는 자의 안타까움이었다.

“여기가 전부 랭던 가의 사유지냐?”

“네, 형님. 숲이 전부 랭던 가문의 소유라고 하더군요.”

“정말 대단하군.”

도미닉은 그 후로 말이 없었다. 마차는 나와 윌리엄을 정원 앞 갈림길에서 내려 주었다. 문을 닫기 전 도미닉이 내 손을 잡았다.

“몸조심해라.”

단순한 한마디에 눈물이 뜨겁게 눈꺼풀을 적셨다. 나는 그런 작은 위로조차 절실했다. 하나뿐인 가족이 나를 걱정한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위로의 말에 가슴속에 쌓인 서운함은 양달의 눈처럼 녹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 어떻게 할 거니.”

나는 윌리엄이 듣지 못하도록 아이의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작게 얘기했다.

“사냥할 때 말에서 떨어질 생각이에요. 그게 잘 안 되면 칼에 베이려 해요. 윌리엄이 제가 다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아이는 숲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미리 랭던 경께 말해 놓았어요.”

“알겠다. 내가 새뮤얼에게 전하마. 너무 다치지 않을 정도로 해라. 저택 안을 돌아다녀야 할 테니까.”

“네, 형님.”

나는 그대로 문을 닫으려다 말고 족히 한 달은 보지 못하게 될 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도 나를 걱정해 줄 사람은 유일한 혈육, 나와 평생 같은 성(姓)을 어깨에 이고 살 도미닉밖에 없었다. 지난 몇 주간 가슴 속에서 싹 튼 불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미닉의 모든 태도가 거짓은 아니라고 믿었다.

오랫동안 분명히 나를 아껴 왔으니까. 아버지를 팔아넘긴 동생도 용서했으니까.

“형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날씨가 많이 차요.”

“혹시 힘든 일이 생기면 바로 서신을 보내라.”

“네, 형님.”

“안녕히 가세요, 서튼 자작님.”

윌리엄이 도미닉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나는 윌리엄의 손을 잡고 소복이 쌓인 눈을 밟았다. 사람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길인지 밟히는 눈이 두툼했다. 윌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새하얀 눈 바닥을 골라 기운차게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갔다. 매서운 바람은 머리카락을 휩쓸고 귀 끝을 얼리며 연달아 우리를 지나쳤다.

쪽문을 지나니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윌리엄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가 작은 손으로 입술을 턱, 막았다.

“죄송해요, 로엘 도련님. 깜빡했어요.”

“괜찮아. 아 참, 이거.”

나는 품에서 갈색 종이로 감싼 작은 꾸러미를 꺼내 윌리엄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갖다 드려. 작은 성탄 선물이야. 그리고 이건 네 크리스마스 용돈.”

은화를 꺼내자 윌리엄은 꾸러미는 얼른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동전을 재빨리 받았다.

“매해 감사합니다, 로엘 도련님.”

늘 천방지축인 윌은 엄한 막내 이모 부부와 지내다 오면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꼬마가 되었다. 이번엔 며칠이나 갈지 궁금했다.

부지가 광활하여 정원을 걷고 또 걸어도 저택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절반쯤 지났을 때야 굳게 닫힌 저택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다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에메랄드 저택의 집사였다.

“서튼 남작님, 안녕하십니까.”

한참 뛰어온 집사가 숨을 고르며 인사했다.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얼마 없는 머리가 더 비어 보였다. 그는 황급히 머리를 가다듬으며 윌리엄을 쳐다봤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윌리엄이란 소년인가요?”

“네, 윌리엄이에요. 인사해, 윌.”

“안녕하세요, 윌리엄 베넷이라고 합니다.”

집사는 윌의 이름을 듣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수염 없이 말끔한 얼굴에 서린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 특이한 이름이군요.”

집사가 윌리엄을 빤히 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나는 집사의 반응이 의아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윌리엄 베넷은 노르크에서 족히 천 명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다. 윌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흔해요. 옆 동네에는 윌리엄 프리먼이랑 사라 베넷이 사는걸요.”

우리는 집사와 함께 저택으로 걸어갔다. 윌리엄은 밖에선 숨을 하, 하 내쉬며 입김 만들기에 몰두하다가 저택 내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집사에게 물었다.

“랭던 경께서는요?”

“지금 손님을 맞고 계십니다. 안쪽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집사가 안내하는 응접실은 가는 길이 다소 복잡했다. 구조상 구석진 자리에 은밀히 숨어 있는 방이었다.

우리는 작은 복도를 하나 지나야 했는데 옆쪽에서 수레를 끌고 들어오던 잡역부와 몸을 부딪칠 뻔했다. 잡역부는 몹시 놀란 듯 주춤하며 수레 손잡이를 굳게 꽉 잡았다. 집사는 그를 나무랐다.

“조심하게. 왜 뒷문은 놔두고 여기로 다니는가?”

“죄송합니다, 집사님. 이 물건들은 랭던 공작님 개인 포도주 저장고로 들어가는 것이라 부득이하게 이 복도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아, 포도주 장수인가?”

“네, 그렇습니다. 공작님의 저장고에 포도주를 들일 때를 제외하곤 제가 이 복도를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염려 마십시오.”

그는 낡은 옷에 헐렁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허름한 차림새와 달리 말투와 억양에서 배움의 흔적이 묻어났다. 목소리 역시 상당히 곱상했다. 여러모로 평민의 어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최소한 지식인으로 보였으나 하는 일이 거친 걸 보면 무언가 사연이 있는 사람일 듯했다.

키가 작은 윌리엄은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윌에겐 그의 얼굴이 보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포도주 장수를 지나쳐 집사의 등을 따라 이동했다. 왠지 시선이 느껴져 뒤를 휙 돌아봤는데 그 포도주 장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모자챙을 끌어 얼굴을 가리고 반대편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멈칫했다가 다시 발을 옮기며 윌리엄에게 작게 물었다.

“윌, 아까 그 포도주 장수 얼굴 봤니?”

“네. 봤어요, 로엘 도련님.”

“우리가 아는 사람일까?”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어 주자 훈훈한 실내 공기가 냉랭한 복도로 밀려 나왔다. 따뜻한 공기가 찬 뺨을 간지럽게 어루만졌다. 윌은 보풀이 군데군데 일어난 목도리를 풀며 덧붙였다.

“근데 얼굴이 이모부처럼 깨끗했어요.”

“얼굴이야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지. 또 세수 안 해서 혼난 건 아니겠지?”

“세수 안 해서 혼이 많이 났어요. 하지만 겨울엔 물이 찬 걸요, 로엘 도련님. 아까 그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지만 장갑은 더러웠어요. 이모부가 봤으면 더럽다고 혼냈을 거예요. 스쳤는데 옷에 하얀 가루가 묻었어요.”

“하얀색?”

“네. 여기 팔 보세요. 할머니께 혼나겠어요.”

윌리엄이 불평하며 외투를 털었다. 윌의 옷에는 정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포도주 장수가 흙도 아니고 왜 밀가루 같은 하얀 분진을 묻히고 다니는 걸까?

나는 랭던 경에게 받은 장갑을 빼내고 윌의 옷에 묻은 하얀 가루를 만져 보았다. 손에서 부서지는 감촉이 밀가루와는 사뭇 달랐다.

‘익숙한 느낌이지만 밀가루는 분명 아니야. 어디서 이런 하얀 가루를 봤더라….’

생각이 많아진 채로 외투를 벗어 하녀에게 건넸다.

나는 랭던 경이 나타나기 전에 여기저기 뻗친 윌리엄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아이의 두 뺨은 추위 때문에 으깬 딸기를 바른 듯 붉어 무척 보기 안쓰러웠다. 마찬가지로 빨갛게 언 작은 손을 잡아 벽난로 앞으로 데려갔다.

윌리엄과 함께 불을 쬐며 추위를 털어 내는 사이 우리가 들어온 반대편 방향에 나 있는 큰 문이 열렸다. 나는 언 몸을 녹이던 것도 까맣게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에메랄드 저택의 주인, 테런스 랭던 경이었다.

장소는 사람을 달라 보이게 만든다. 랭던 경은 에메랄드 저택에서 더욱 빛이 났다. 저렇게 기품 있는 사람이 정말 동생을 쏴 죽이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까. 신전처럼 아름다운 이 에메랄드 저택에서.

“랭던 저하, 잘 지내셨어요?”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만나지 못한 몇 주 동안 서신으로 주고받은 달콤한 언어들이 나를 휘감았다.

저택에서 랭던 경과 조우하니 아우를 죽였다는 얘기를 듣고 거세게 휘몰아쳤던 분노와 배신감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랭던 경에게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 마음을 아프게 하다가도, 다시 보면 결국 기대하게 되는 그런 사람.

그때 귓가에 음침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속지 마. 동생을 죽인 작자야.’

프리데릭 백작이 내 심장 속에 풀어 놓은 검은 뱀이 경고했다. 설레는 감정을 용납하지 않는 어두운 목소리가 익숙했다. 내 속마음을 모르는 랭던 경은 다정히 인사를 받아 주었다.

“잘 지냈습니다. 서튼 씨는 다행히 안색이 좋아졌군요.”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랭던 경이 가까이 다가와 어린 윌리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 아이가 윌리엄입니까?”

“네, 일전에 말씀드린 윌리엄입니다. 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랭던 공작님. 저는 베넷 가의 윌리엄입니다. 만나 뵈어 몹시 영광입니다.”

어린 윌리엄은 베넷 부인이 몇 번이나 연습시켰을 인사를 또박또박 해냈다. 랭던 경은 겸손하게도 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나는 테런스야.”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랭던 경의 모습이 소탈했다. 굳이 신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까지 따질 필요도 없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이름을 얘기해 주는 일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먼저 무릎을 굽혀 주는 일도.

친절한 랭던 경의 인사에 긴장해서 동그랗게 올라가 있던 윌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몹시 영광입니다, 공작님.”

어린 윌리엄은 아까의 인사를 그대로 반복하며 랭던 경과 씩씩하게 악수했다. 랭던 경은 윌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 뒤 몸을 일으켰다. 아이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지끈거렸다.

검은 뱀이 다시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 그는 자신의 동생이 평민을 사랑한다고 총으로 쏴 죽인 짐승 같은 인간이야.’

랭던 경이 준 장갑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침대 밖의 랭던 경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우리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어린 윌은 내 옆에서 꿈에도 못 본 화려한 응접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림을 몇 개 걸어 두는 것이 실내 장식의 전부인 평민층에게 벽마다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과 섬세한 장식물들은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한 광경이었다.

붉은 머리를 가진 하녀 샬롯이 쟁반을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다. 랭던 경은 차를 내온 하녀 샬롯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도 좀 준비해 주세요.”

“네, 공작님.”

하녀는 금방 윌리엄이 좋아할 만한 쿠키와 케이크, 따뜻한 초콜릿 음료를 쟁반 가득 내왔다. 윌은 신이 나서 바로 쿠키를 집어 먹었다. 랭던 경은 편안히 다리를 꼬며 등을 기대앉았다. 턱을 괸 손가락을 까닥대며 나를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보던 그는 손을 내리고 윌리엄에게 질문했다.

“윌리엄, 네가 로엘 씨와 좋은 친구라고 들었다.”

“네, 공작님. 로엘 도련님과 자주 놀아요.”

“언제부터 알고 지냈니?”

“애기 때부터요, 공작님. 로엘 도련님은 저와 같은 해 동네로 이사 왔대요.”

“주로 같이 무엇을 하고 노는데.”

“공놀이도 해 주시고 숫자도 가르쳐 주셨어요, 공작님.”

“이름이 정말 윌리엄이니?”

나는 윌의 이름을 확인하는 그의 질문에 갑자기 기분이 매우 상했다. 굳이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볼 건 없었다. 랭던 경의 고집 때문에 할 수 없이 윌을 데려오기는 했으나 진심으로 나를 의심하는 뜻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를 너무 좋게 평가한 모양이었다. 동생을 죽인 냉혈한을.

불쾌함을 애써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랭던 경은 윌에게 그 질문을 한 후 짐짓 무서운 목소리로 다른 말을 덧붙였다.

“거짓말을 하면 나는 공작이라 네 부모님을 혼내 줄 수도 있어.”

“제 이름은 윌리엄이 맞아요. 부모님은 안 계세요, 공작님.”

랭던 경이 흠칫했다. 부모가 없다는 윌리엄의 급작스러운 대답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붙이고 있던 등까지 떼어 내고 나를 슬쩍 쳐다봤으나 나는 그를 도와줄 마음이 없어 잠깐 미소 짓고 말았다. 어린 윌리엄에게 취조하듯 이것저것 물어보고 부모님을 혼내 준다고 협박했으므로 그 책임은 랭던 경이 지는 게 옳았다.

랭던 경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윌리엄 쪽으로 몸을 약간 내밀었다.

“미안하구나, 윌리엄. 부모님 얘기를 꺼내서.”

“괜찮아요. 얼굴도 몰라서요, 공작님.”

“그러면 지금 누구랑 살고 있니?”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아요. 할머니도 로엘 도련님의 친구예요.”

랭던 경은 윌리엄의 대답에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공작님이라고 할 필요 없단다.”

“네, 공작님.”

“아까 이름이 윌리엄 베넷이라고 했지?”

“네, 공작님.”

“…이름이 특이하구나.”

나는 찻잔을 입술로 가져오다 말고 손가락을 멈췄다.

왜 집사도 랭던 경도 윌리엄의 이름을 특이하다고 하는 걸까. 정말 흔한 이름인데.

나는 시야의 절반을 가린 찻잔 너머로 윌의 이름을 곱씹는 랭던 경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눈꺼풀을 내렸다. 차를 머금자 부드러운 향이 서늘한 몸을 녹였다. 어느새 쿠키를 전부 해치운 윌리엄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까와 같이 대답했다.

“제 이름은 평범해요. 옆 동네에 윌리엄 프리먼도 살고 사라 베넷이라는 애도 있어요.”

랭던 경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는 턱 끝을 위로 살짝 들고 나를 훑어보더니 다시 긴 다리를 꼬았다. 랭던 경은 나만 보면 자신이 공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듯, 자연스레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로엘 씨, 윌리엄은 언제 집에 돌아가야 하나요?”

“오후에 마차가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저하.”

“그럼 윌은 집에서 놀게 하고 우리는 약속한 대로 밖에 나가는 게 어떤가요?”

“좋습니다.”

윌리엄은 낯선 저택에 혼자 있게 되어 걱정스러운지 일어나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윌, 저택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으렴. 간식도 많이 먹고. 잠시 다녀올게.”

“어디로 가요?”

“저택 근처 숲에 다녀올 거야. 금방 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

“…네.”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삼키는 모습이 안쓰러워 머리에 입술을 눌러 주고 고개를 드니 랭던 경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가 내려놨다. 랭던 경은 다소 삐뚜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윌에게 다정한 내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듯했다.

우리는 사냥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고 망토를 둘렀다. 밖으로 나가니 사냥을 도울 사냥개 두 마리가 미리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들은 랭던 경을 보자 반갑게 짖으면서 달려와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개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금빛 털을 가진 레트리버였고, 다른 한 마리는 새하얀 털에 눈 주위와 귀만 밝은 갈색 털이 난 영리하고 귀엽게 생긴 개였다. 그 개 역시 레트리버처럼 사냥개 중에서는 외모가 순하고 귀여운 편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온 간식을 꺼내 주며 이름 모를 개의 짧은 털을 쓰다듬었다. 랭던 경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품종이 어떻게 되나요?”

“포인터요.”

“포인터가 같이 사냥하기 아주 좋은 개라고 들었어요. 개들은 이름이 있어요?”

“물론 이름이 있습니다. 레트리버는 새미고 포인터는 토미예요. 둘 다 나이는 많지만 새 잡는 실력이 아주 훌륭합니다. 훈련을 잘 받은 개들이에요.”

랭던 경은 웃으며 개 두 마리를 번갈아 쓰다듬어 주고 숲으로 걸었다.

지금은 사냥개를 저렇게 귀여워하지만 필요 없어지면 쉽게 죽이는 것이 아닐까.

나는 불길한 상상력을 불태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 주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총과 말은 어디에 있나요?”

“오두막에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로엘 씨는 총을 잘 못 다룬다고 했으니 오늘은 총 대신 그물을 쓰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혹시 다칠까 걱정됩니다.”

랭던 경은 할 말만 하고 눈이 깊이 쌓인 곳으로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본인은 총을 쓰면서 나는 그물을 쓰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으나 총 실력이 형편없으므로 안전한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물로 새 한 마리 못 잡는 망신을 당하는 게 아닐까 염려하며 나는 눈 속에 푹푹 빠지는 발을 힘겹게 내디뎠다. 개들보다 한참 늦은 속도였다.

랭던 경은 나뭇가지를 헤치며 언덕을 올라가다 말고 뒤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뒤처진 내가 한심해 보인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에 대한 얘기를 들어 감정이 좋지 않은 차에 싫은 티를 한껏 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랭던 경 같은 사람과 최대한 스킨십을 피하고 싶어 거절했다. 그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도와주려는데.”

“그다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랭던 저하의 도움을 받을 이유도 없구요.”

“이쪽이 많이 가파르니 그냥 손을 잡아요.”

실랑이를 벌이다 할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이 나를 위쪽으로 당겨 주어 깊은 눈밭에서 쉽게 빠져나왔다. 랭던 경은 전과 부쩍 다른 내 반응을 느꼈는지 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구겼다.

“오늘 기분이 안 좋습니까?”

“아니에요.”

“저택 안에서도 그렇고 표정이나 말투가 영 퉁명스러운 것 같아서요. 내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니 로엘 씨답지 않게 너무 차가운 말이오.”

“저는 평소와 똑같습니다.”

랭던 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말없이 숲으로 들어갔다. 랭던 경은 좋은 의도가 빗나가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이따금 내 털 망토에 떨어진 눈을 털어 주었다. 나는 랭던 경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내 기분을 대신했다. 최대한 그와 마음의 거리를 두고 싶었다.

숲은 소문만큼 아름다웠다. 어릴 적 읽은 신화에 나오던 요정과 괴물들이 살 듯한 몽환적인 땅이었다. 풀과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표면에 얼음이 맺혀 있어 겨울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했다. 많은 동물이 겨울잠을 자러 땅속으로 들어갔겠지만 응달엔 어김없이 토끼 발자국과 새 발자국, 이름 모를 동물의 작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랭던 경, 숲이 정말 크네요. 길을 잃으면 큰일 나겠어요.”

“안 그래도 50년 전에 하인 한 명이 길을 잃어 죽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할아버님이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 두셨다는데 충분하진 않은 것 같아요.”

“할아버님께서 무척 사려 깊으시네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기 쉽지 않으신데요.”

“랭던가의 덕목입니다.”

“…랭던 경도 포함해서 얘기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혹시 기분이 안 좋은 거요?”

“아니에요. 오늘 기분은 좋습니다.”

성의 없는 말투를 느꼈는지 앞서 걷던 랭던 경이 나를 슬쩍 돌아봤다. 나는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하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랭던 경이 동생에게 저지른 일을 알게 된 후 그에게 실망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그러나 내 결심은 호텔에서 혼자 편지를 적을 때나 효력이 있었다. 막상 응접실에서 랭던 경과 얼굴을 마주하고부터는 혼란스럽게 충돌하는 내면의 감정들이 통제되질 않았다. 내심 랭던 경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랭던 경의 넓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너진 결심을 다잡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실망한 내 마음을 알아 봤자 서로에게 조금도 좋을 것이 없음을. 감정적으로 미숙하게 행동하여 그와 내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은 심호흡을 반복하며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가까운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 밖에 있는 작은 마구간엔 윤기 있는 갈기를 가진 멋있는 말 두 필이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랭던 경은 오두막 문에 열쇠를 꽂았다. 끽, 무거운 나무 문이 힘겹게 열렸다.

오두막 역시 하인들이 모든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벽난로에는 수프가 한가득 팔팔 끓고 있었고 공기는 포근했다. 나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손으로 잠시 끌어 내려 숨통을 틔우고 잘 따라온 개들에게 상으로 간식을 내밀었다. 손이 금세 침으로 축축해졌다.

랭던 경은 벽에 걸린 장총을 살펴보다가 하나를 집었다. 나는 개들을 쓰다듬어 주면서도 신경은 온통 총을 든 그에게 가 있었다.

‘저런 총으로 동생을 죽였을까.’

평민을 사랑했다던 그의 아우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다. 랭던 경은 총을 든 채 내게 그물을 건넸다. 나는 허리에 맨 가방 중 하나에 그물을 말아 넣었다.

“그물로는 어떻게 사냥하나요?”

“새 사냥은 총보다 그물이 쉽습니다. 초보자가 새를 맞히는 게 쉽지가 않아서요. 토미가 포인터니까 근처에 새가 있으면 멈춰 서서 앞발을 들고 표시를 해 줄 겁니다. 그러면 살금살금 다가가 그물을 던져요.”

“알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로엘 씨가 총을 잘 못 다뤄서 그물이 적당합니다.”

랭던 경이 굳이 다시 강조했다. 나는 몰래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가 넣었다.

햇빛을 반사하는 눈 덕분에 숲속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타고 사냥개들과 함께 사냥감을 물색했다.

포인터 토미는 소문난 사냥개답게 무척 영리했다. 새를 찾아내면 랭던 경이 말한 자세로 근처에서 꼼짝 않고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길 기다렸다. 한쪽 발을 들고 새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듯한 포즈였다. 나는 말에서 내리는 수고를 몇 번이나 하며 그물을 던졌지만 재빠른 새들은 매번 그물을 피해 날아갔다.

“새를 잡는 건지 쫓아내는 건지.”

랭던 경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방금 전 결심을 다잡은 대로 그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물을 챙겼다. 예전 같으면 그와 농담을 주고받았겠지만 아직 그렇게 자연스레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그와 친해지려면 좀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프리데릭 백작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와 하는 사냥에 몰두하기가 어려웠다.

토미가 다시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어가더니 살금살금 걸어가 멈춘 곳에서 왼발을 슬쩍 들었다. 나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그물을 꺼내다 주저하며 랭던 경에게 말했다.

“랭던 경께서 쏘세요. 저는 매번 놓치니까요.”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한번 해 보세요. 내가 도와줄게요.”

랭던 경은 직접 말에서 내려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받아 높은 말 위에서 쉽게 내려왔다.

나는 그물을 쥐고 토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눈이 뽀득거려 새가 날아갈까 걱정했으나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이름 모를 새는 내게 아무런 관심 없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재빨리 그물을 던지는 순간 새가 덮였다.

“와!”

나도 모르게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보다 더 신이 난 건 내 사냥 실력 덕분에 그동안 아무런 활약도 보이지 못한 레트리버 새미였다. 새미는 금색 털을 휘날리며 눈밭을 달려가 자랑스레 새를 물어 가져왔다.

랭던 경은 그물을 걷어 내고 새미가 물어 온 새를 빼낸 뒤 허리에 찬 작은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애초에 사냥이 목적이었음을 알면서도 새를 향해 칼을 겨눈 그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져 속이 끓었다.

“놓아주고 싶어요?”

랭던 경이 부드러이 물었다. 당연히 새를 죽여 손질을 할 줄 알았던 나는 의외의 사려 깊은 질문에 제법 놀라 되물었다.

“그래도 될까요?”

“나도 처음 사냥할 때 아버지께 놓아 달라고 부탁드렸지.”

“놓아주셨나요?”

“그랬어요. 변덕이 심하긴 해도 다정한 분이셨거든.”

랭던 경은 새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새는 그의 손에서 태어난 것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나타나 말간 하늘로 푸드득 날아갔다. 토미와 새미는 아쉬운 듯 눈밭을 뛰어다녔다. 나는 새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랭던 경은 내 뺨에 가벼이 키스했다. 뺨 위에 부드럽게 남은 촉감에 나도 모르게 손끝을 가져다 댔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 뒤로 키가 큰 침엽수들이 하늘에 닿을 듯 높게 뻗어 있었다.

그는 늘 짧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낼 뿐,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키스는 하지 않았다. 새뮤얼의 말이 옳을 것이다. 나는 그저 랭던 경의 하룻밤 상대이고 다른 사람과 달리 몇 번 더 만나 주는 예외일 뿐, 특별히 마음을 준 사람은 아니다.

랭던 경은 나의 상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요즘 가끔 로엘 씨가 무척 여려 보입니다.”

“…새를 놔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저하께 너무 유약해 보였나요?”

“어쩌면. 하지만 싫지 않아요. 유약한 것이 아니라 다정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생각됩니다.”

나약한 모습이 싫지 않다는 말에 내내 굳어 있던 몸에 힘이 빠졌다. 랭던 경은 부드러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윌리엄이 당신을 로엘 도련님이라고 부르더군요. 아이가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끼는 아이니 제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윌이 호칭을 제대로 붙이지 않는 것도 아니구요.”

“당신은 평민 아이에게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이니 새도 살려 주고 싶은 거겠죠. 가끔 그대에게서 보이는 따뜻한 마음과 관대한 처사에 놀라곤 합니다. 내가 로엘 씨가 하는 일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로엘 씨의 장점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아요.”

다른 귀족이었다면 백이면 백 나를 유약하고 품위도 모르는 작자라고 나무랐을 것이다. 새를 풀어 주고 평민에게 이름을 부르도록 한다고. 그러나 랭던 경은 나를 비난하는 대신 오히려 새로운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의 말은 여태 들어 본 적 없는 편안한 칭찬이었고, 그의 언어가 내게 찾아 준 작은 신대륙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사냥에 한두 번 더 성공했다. 새미가 금빛 털을 휘날리며 떨어진 새를 그물째 물어 올 때마다 잘했다고 간식을 주고 하늘로 다시 새를 날려 보냈다.

랭던 경은 총을 쏠 때마다 새를 놓쳤다. 처음엔 실수라고 생각했으나 매번 새를 비껴가는 총알의 방향과 거리가 일정해 고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가까이서 피를 보길 원하지 않는 내 마음을 배려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동생을 죽인 랭던 경보다 그 정보를 내게 건네준 프리데릭 백작이 더 원망스러워졌다. 프리데릭 백작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배려 아래 내 마음을 평화로이 놓아둘 수 있었을 텐데. 기분이 다시 지독히 가라앉았다.

“오늘은 영 총이 잘 안 나가는군. 로엘 씨 앞에서 큰 망신입니다.”

랭던 경은 같이 말을 타고 걷는 내내 크게 불평했다. 일부러 불만을 터트리는 티가 나서 고급 오페라에 출연하기는 틀린 연기 실력이었다. 나는 겨우 웃으며 나직이 대꾸했다.

“같이 그물을 던지시는 게 좋았겠어요.”

“다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총 사냥은 친구분들과 편하게 하세요. 제가 사냥을 잘 못 하니 쏘기 신경 쓰이셨나 봐요. 새도 잡지 못하고 재미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재밌었어요. 그리고 사냥을 시작할 때보다 마음이 풀린 듯한 로엘 씨의 말투를 들으니 기분이 한결 낫습니다. 당신의 편지보다도 훨씬 상냥하구요.”

“제 편지가 그렇게 쌀쌀한가요?”

“내가 하는 짓이 있으니 지레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요.”

하긴, 침대 위에서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찔릴 만도 했다.

우리는 짧아진 겨울 해가 지기 전에 개들을 데리고 오두막으로 출발했다. 그건 내가 이제 다쳐야 할 타이밍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말의 고삐를 쥐고 바닥을 몇 번이나 내려다봤으나 막상 상황이 닥치니 뛰어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천히 달릴 때는 일부러 떨어지는 게 티가 날까 봐 할 수가 없었고, 빠르게 달릴 때는 목숨을 잃을까 저어되었다. 달리는 말에서 내려다보는 눈 바닥은 칼날이 솟구친 땅처럼 위험해 보였다. 낙마로 죽는 일은 겨울에 특히 흔한 사건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을 방치하고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질 기회를 노렸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말은 내가 놓친 기회들을 비웃듯 금세 오두막에 도달했다. 나는 랭던 경 몰래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나를 나무라는 도미닉의 말이 맞았다. 새를 놔줄 때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나는 유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다. 랭던 경을 향한 마음도, 스스로 세운 계획도… 전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다칠 기회를 다시 엿보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랭던 경은 수고한 말들에게 직접 먹이를 주고 개들은 안으로 데려가 목줄을 맨 뒤 밥을 줬다. 나는 조용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장갑과 목도리를 풀고 준비된 접시에 따뜻한 수프를 담았다. 추운 날씨에 말을 타고 숲을 휘저으며 다녀서 찬 바람에 온통 얼굴이 긁혀 따끔거렸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드세요, 저하.”

“같이 먹읍시다.”

“저도 바로 들겠습니다.”

랭던 경은 가지고 나갔던 장총을 벽에 되돌려 놓고 마편은 널찍한 테이블에 던졌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옆모습에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언제봐도 잘생긴 옆선이었다.

랭던 경은 옆으로 널찍한 2인용 나무 의자를 직접 끌어다 벽난로 앞에 놓았다. 우리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신발을 벗고 꽁꽁 언 발을 녹였다. 추운 겨울 사냥 후 불을 쬐며 먹는 수프는 잊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이 혀를 적셨다.

“오늘 로엘 씨를 너무 힘들게 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열이 나서 힘들었는데.”

“아니에요.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활력이 생겼어요.”

나는 수프를 적당히 먹고 그릇에 남은 큼직한 고기 건더기를 덜어 새미와 토미에게 던져 주었다. 랭던 경은 개들이 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웃다가 새미와 토미가 심심하지 않도록 커다란 뼈다귀를 꺼내 던져 주고 왔다. 내게는 좀처럼 지어 주지 않는 다정한 표정을 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윌리엄에게 다정히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하께서 아이와 동물들에게 다정하신 것 같아 무척 보기 좋습니다”

이건 그와 친해지거나 호감을 얻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라 나의 진심이었다. 과거에 대해 떠도는 소문을 듣고 초반에 날카로운 태도를 보인 행동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다.

“아이가 아주 영특해서 즐거웠습니다.”

랭던 경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다 덧붙였다.

“눈이 초록색이더군.”

“네, 윌리엄의 눈은 저하의 눈동자처럼 에메랄드빛이에요. 저하의 눈 색깔보다 조금 더 밝은 초록색이지요.”

“내 눈동자 색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분명 성격이 바뀌고 있었다. 머리를 써서 지어낸 얘기들보다 내 진솔한 감정이 담긴 말들이 부쩍 늘어났다. 무대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이 연극은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선을 나누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하의 눈동자 색깔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

“처음부터… 우아한 당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어요.”

“…로엘.”

이름만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돌부리에 걸려 굴렀다. 랭던 경은 긴 의자에 놓여 있는 내 손등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불을 쬐며 녹였는데도 차기만 한 내 손과 달리 그의 손은 훨씬 체온이 높았다. 손가락을 오므리며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지그시 힘주어 손을 쥐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달아오른 귀 끝을 불꽃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불빛이 원인이었다면 반대편 귀까지 뜨거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실, 로엘 씨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

“…당신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나는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벽난로의 붉은빛이 비쳐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눈에도 그와 같은 불빛이 비치고 있을까. 나는 동생을 죽인 자에게 감정을 내맡기지 않으려, 마음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흰 눈이 쌓인 숲, 오두막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마주 잡고 있으니 도저히 랭던 경의 눈빛을 잔인한 살인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체온이 내 마음을 허물고, 나약한 내 마음은 안전지대를 찾아 헤맨다.

내게 보인 배려와 윌리엄을 대하는 격의 없는 모습 역시 랭던 경의 진실한 일부이기를. 내 마음을 흔드는 랭던 경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위험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랭던 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시대를 살고 있다 해서 그 시간 위에 놓인 사람들 모두가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는 건 아닙니다. 역사가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에 미래를 맡겨야만 하지. 그대와 나는 이미 역사에 휩쓸린 사람들이고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과 엮이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저는 역사에 휩쓸린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랭던 경의 물음에 입술을 닫았다. 벽난로의 불이 뜨겁다. 나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진 얼굴을 그의 손가락이 들어 올렸다. 기다란 손이 뺨과 귀를 어루만지고 단정한 입술은 뺨과 눈두덩이를 스쳤다.

“우리는 이미 5년 전에 만났습니다. 프리데릭가의 살롱에서.”

그의 가라앉은 음성은 더할 수 없이 고요하고 쓸쓸했다. 5년 전 그날의 겨울바람처럼.

심장의 박동이 잠시 사라졌다가 이내 온몸을 거세게 울렸다. 눈물이 고인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랭던 경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랭던 경은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이 살롱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비의 목을 가져온 그대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지. 그때는 그 소년이 창부의 삶을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그 서튼이 5년 후에 내가 만날 아름다운 미인이 될 줄도 몰랐습니다.”

“…그날의 저를 보신 거예요?”

내 인생의 가장 비참한 날,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픈 날, 테런스 랭던 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지워 버리고픈 경멸의 날이었다. 랭던 경이 그 순간을 목도했다는 사실에 당장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바로 그날이 지금의 나를 랭던 경의 오두막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랭던 경의 말대로, 역사에 휩쓸린 사람처럼.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팔을 밀어냈다. 랭던 경의 앞에서 가공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날을 떠올리면 침착할 수도, 감정을 지어낼 수도 없는 상처받은 한 소년에 불과했다. 아무리 팔을 밀어내도 그는 물러나지 않고 다시 내 뺨의 눈물을 닦았다. 내 음성은 목구멍을 묵직하게 짓누르며 힘겹게 빠져나왔다.

“제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에요.”

“어째서 후회합니까, 로엘 씨. 후회하지 말아요… 절대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겹쳐 들렸다. 흐릿해진 음성.

내 눈앞에 실존하는 그의 목소리는 훨씬 더 부드럽고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면 어쩌나, 가끔 두렵습니다. 우연이라면 좋을 텐데. 로엘 그대와 다시 만난 것이.”

나는 뺨을 적시는 눈물을 틀어막지 못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확인해 보세요, 랭던 경. 랭던 저하와 제가 만난 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시간이 지나 저에게 질리신다면 당신과 저의 만남은 그저 인생을 스쳐 가는 산들바람일 뿐이고 저는 랭던 저하의 기억 속에 잊힌 많은 얼굴 중 하나가 되겠지요.”

“그때부터… 그다지 잊은 적이 없소.”

랭던 경의 입술이 부드럽게 얼굴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눈물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반칙이었다. 5년 전 프리데릭가의 살롱에서 아버지의 머리를 들고 온 나를 봤고, 그때 나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 사람 중 하나였음을 밝히는 건. 이번엔 내 인생을 상자에 담아 들고 랭던 경을 찾아온 이 중요한 때에.

랭던 경의 입술은 점점 더 농밀하게 피부 위를 스쳤다. 뺨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목덜미로. 목선에 새긴 연해진 울혈을 빨고 어깨에 둘린 무거운 망토를 풀어냈다. 털 망토는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지만 둘 중 누구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흣….”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이 야릇했다. 목덜미를 할짝대던 그가 위로 올라와 다시 내 눈물을 닦았다. 말간 눈물이 그의 손끝을 적셨다.

“괜히 그 얘기를 꺼내서 로엘 씨를 울렸군.”

“…원래 눈물이, 흡, 많아서 꾸중을 자주 들었는데도 고치지 못했어요. 약한 모습을 보여 죄송스럽습니다.”

“아니, 내 앞에서는 자주 울어도 돼요. 전에도 말했듯 나는 당신의 우는 얼굴을 좋아하니까. 정확히는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아파서 우는 얼굴을 좋아하긴 하지만.”

“…정말 고약한 취미세요. 어째서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이 좋으신가요.”

“편지에도 썼듯 그것이 나의 비틀어진 성벽입니다. 오늘은 마편으로 때리려 했는데 어떤가요? 맞고 나서 박히면 기분 좋을 거요.”

웃으면서 권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하, 마편이라니. 그건 너무 무섭습니다.”

“직접 맞고 얼마나 아픈지 확인해 보세요. 못 맞겠다고 울며 빌면 그만 때릴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편으로 맞는 정도쯤은 로엘 씨가 충분히 경험해 봤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랭던 경의 입술이 다시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움푹한 곳에 묻혔다. 말 채찍으로 때리겠다고 하여 겁이 났지만 한번 터진 뒤 그치지 않는 눈물이 곤란해 차라리 아파서 우는 것으로 보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처럼 아파서 흘리는 눈물이 슬퍼서 끊지 못하는 눈물보다는 보여 주기 나았다.

나는 이내 그가 고통스러운 섹스를 시작해 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프고 아픈 섹스를.

내 목덜미에 키스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넓은 어깨를 붙들었다. 단정한 입술이 목덜미를 머금고 쇄골 부근을 빨아올릴 때마다 그의 곧은 코끝이 내 몸에 눌려 휘었다. 긴 속눈썹이 내게 스치는 모양새가 간지러웠다.

새어 나오는 뜨거운 신음을 막기 위해 이로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흐트러진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놀라서 숨을 들이켜자 배가 납작해진 모양을 따라 그가 피부를 살살 쓰다듬었다.

“…흐읏….”

열이 몰린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자극이 야릇하게 느껴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고개를 들며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 내렸다. 아직 눈물이 떨어지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자 랭던 경이 눈썹을 찌푸리며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씹었다. 울혈이 아물어 가던 자리라 몹시 아파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 으응… 아, 아픕니다. 저하….”

“허락 없이 입을 막지 마세요. 버릇이 없군.”

“…죄, 죄송해요.”

배에서 미끄러진 커다란 손은 그대로 배려 없이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아!”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내 것을 쥐어 잡는 거친 손길에 놀라 바지 위로 그의 손등을 붙잡았다. 그러나 내가 밀어 보며 다리를 뒤척여도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의 굵은 손목과 손등을 양손으로 붙든 채 눈꺼풀을 감고 신음하며 몸을 뒤챘다. 발가락을 꼭 오므리고 신음을 최대한 참았지만 손으로 입을 막지 못하니 소용없었다.

“하읏… 으응….”

랭던 경이 몹시 난폭하게 주무르고 있는데도 그 손길 아래 단단해지는 내 것이 부끄러워 눈물이 깜빡 떨어졌다. 잠시 걷힌 시야에 문가에 얌전히 앉아 뼈를 씹고 있는 사냥개 두 마리가 보였다. 동그란 눈 두 쌍과 시선이 마주쳐 나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하, 개들이….”

“개가 왜.”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내 목덜미 곳곳에 잇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목도리를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 밖에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유두를 이로 씹는 찌릿한 아픔 너머로 밑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뒤섞였다. 고통과 쾌감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 읏, 그것이… 개가, 흣… 보고 있어서….”

“개를 데려와 접붙일까 싶어서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개와 사람을 접붙인다니…. 사람이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그의 괴상한 발상에 경악하여 급작스레 놀란 숨이 차올랐다.

“저하! 그게 대체 무슨, 말, 씀… 으응….”

랭던 경은 내 성기의 기둥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허리가 들리고 발가락 끝이 긴 의자의 팔걸이에 닿았다.

“…아… 흐읍….”

랭던 경은 어느새 자신의 것을 꺼내 바지가 반쯤 걸친 내 엉덩이에 가져다 댔다. 골을 파고들려는 굵은 귀두가 두려워 뒷무릎을 잡아 젖히는 그의 양쪽 손목을 붙들었다. 무릎 사이로 랭던 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머리를 흔들 때마다 눈물이 튀었다.

“저하, 안 됩니다. 그, 그렇게는 넣으실 수가 없어요.”

“귀찮은데. 로엘 씨는 좆을 받는 데 충분히 능숙하지 않소.”

“그러나, 지금은 전혀 풀어 주시지도…. 지난, 번에… 흡, 아시잖아요.”

내 반응을 보고 싶어서 겁박하는 건지, 정말 삽입하려는 건지 진심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섹스에서 경험도 여유도 없는 나는 랭던 경이 이 상태로 삽입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 불안감에 굵은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떨어졌다. 붉은 모닥불이 우는 나를 비췄다. 랭던 경은 내 눈물을 닦아 주면서도 허리를 움직여 입구에 귀두를 꾹 눌렀다.

“저하, 제발….”

나는 탄탄한 그의 배를 손바닥으로 밀어 내며 다시 한번 사정했다.

“귀찮다고 말했잖아요. 아니면 무언가 재미있는 제안이라도 있어요?”

랭던 경의 질문에 그가 내 입에서 직접 듣고 싶은 요청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무섭다고 한 행위를 더 무서운 행위 대신 해 달라고 간청하게 만들려는 야비한 속셈.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서러운 눈물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바로 하지 마시고 마편으로, 때리시는 것은 어떠세요, 저하.”

“흠….”

“풀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실 때까지….”

“싫습니다.”

다시 귀두가 꾹 입구를 누르며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분명히 아까 마편으로 때리고 싶으시다고 하셨으면서….”

“그동안 로엘 씨가 잘못한 것이 많긴 하지. 당신은 좆을 빨 때 눈을 보라는 단순한 요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입을 틀어막아 신음을 참으며 섹스를 망쳐 놓으니까.”

서툰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망쳐 놓았다는 말은 몹시 가혹한 비난이었다. 눈물이 고인 채로 더 빌지 못하고 좌절하여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바지를 추슬러 올렸다.

“로엘 씨가 그렇게 사정하니 할 수 없군요. 테이블에 엎드려요.”

나는 흐트러진 옷을 여미며 재빨리 의자에서 내려왔다. 눈물을 매단 채 맨발로 걸어가 테이블에 상체를 대고 둥근 엉덩이를 내밀었다. 뒤에서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맞지도 않았는데 놀라 엉덩이가 들썩였다. 가쁜 숨이 쌕쌕 새어 나왔다.

“흐읍, 흑….”

“그렇게 겁먹을 거 없습니다. 가볍게 다섯 대만 때릴 테니까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네, 저하.”

“피하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면 카운트하지 않을 거요.”

“네….”

개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묻었다. 어설프게 등을 둥글게 말고 엎드려 있는 나를 그가 잡아 테이블 위로 더 끌어 올렸다. 상체가 완전히 걸치자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 상태가 됐다.

도미닉에게는 주로 옷 위로, 회초리를 사용해 맞았던 터라 마편으로 맨살을 맞는 것은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편 끝에는 두 겹으로 된 세모난 가죽이 달려 있었다. 랭던 경은 그 가죽으로 내 등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숫자 세는 것 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숫자는 한 번도….”

“맞을 때마다 입으로 소리 내어 세요. 잊지 말고.”

“네, 저하.”

나는 랭던 경이 매를 때리고 나서는 아래를 풀어 주길 바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프지 않기를. 섹스는 기분 좋은 것이라 들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무섭기만 할까.

발끝이 달달 떨려 도망가고 싶었지만 주먹을 꼭 쥐고 두려움을 견뎠다. 이어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휙, 채찍이 떨어졌다.

“아! 아아… 흐윽….”

엉덩이에 뻣뻣한 통증이 느껴지고 뜨거움이 천천히 피부 위로 번졌다. 나는 목구멍을 턱, 치는 숨을 억지로 뱉어 내고 손을 앞으로 뻗어 테이블 끝을 붙들었다. 손마디가 비틀릴 정도로 나무 상판을 세게 틀어잡아 봐도 아픔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 아파… 아파….”

“로엘 씨, 뭐 잊은 거 없어요?”

“아프, 흑, 아픕니다. 저하….”

“숫자 세는 걸 빼먹었잖아요. 방금 맞은 건 무효입니다.”

이렇게 아팠는데 무효라니.

나는 팔뚝에 입술을 묻고 흐느꼈다. 맨살을 내리치는 가죽이 주는 고통은 도미닉이 휘두르는 회초리와 비교할 수 없었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 놓고 맞아야 한다는 수치심 역시 고통을 더해 주었다.

차라리 그냥 바로 삽입으로 넘어가는 게 나았을까. 밑이 찢어지더라도.

다시 또 채찍이 반대편 엉덩이를 휘갈겼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묻고 있던 입술을 떼어 내 겨우 숫자를 셌다.

“하나, 하나….”

“엉덩이가 비틀렸는데. 다시.”

“저하… 하지만….”

엉덩이를 가만히 둔 것 같은데 비틀렸다는 소리에 상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 자세가 잘못된 건지 그가 트집을 잡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나는 섹스할 때는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사람이오. 나와 섹스하는 것이 어떤 건지, 내 취향이 무엇인지 로엘 씨가 똑바로 알아야 할 겁니다. 당신 같은 창부를 상대로 취향을 억눌러 가며 할 생각은 없어요.”

엄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섹스하지 않을 때의 다정한 모습이나 내게 표현하는 애정 때문에 그의 성벽을 너무 만만히 보았다.

나는 유일하게 바닥에 닿는 엄지발가락으로 밑을 단단히 짚고 테이블을 더 세게 붙들었다. 채찍 끝이 엉덩이의 다른 곳을 호되게 내리쳤다.

“하, 하나….”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숫자를 세자 그제야 겨우 랭던 경이 아무런 트집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휙- 다시 가죽이 엉덩이를 갈겼다.

“…둘, 두울… 흑….”

마편은 두 번 더 내 엉덩이를 내리쳤다. 엉덩이가 둥그렇게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마에 미지근한 식은땀이 맺혔다. 맞을 때마다 피부가 굳으며 퍼지는 작열감에 엉덩이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자세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어 애초에 다섯 대만 맞기로 했는데 벌써 여덟 대가 되었다. 마지막 한 대를 남겨 놓고 랭던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것도 무효로 해야겠어요. 엉덩이를 너무 크게 흔드니 맞으면서 즐기는 것 같아 천박함에 비위가 상하는군.”

“…죄, 죄송해요….”

너무 아프니 나도 모르게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랭던 경은 채찍에 달린 가죽으로 땀이 송글송글 맺힌 내 등을 쓸어내렸다. 엉덩이를 그렇게 뜨겁게 달구어 놓은 물건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죽은 차가웠다. 혹시 등도 때릴까 싶어 뼈가 튀어나오도록 등에 힘을 주었다.

“무엇이 죄송한데.”

“마, 맞으면서 엉덩이를 흔든 행동이요. 아파서, 아파서 그런 것이지 즐긴 것은….”

말을 하는 도중 등에서 가죽이 떨어지고 예고 없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질긴 가죽이 엉덩이를 다시 내리쳤다. 엉덩이는 물론이고 허벅지와 허리의 피부까지 덩달아 통증으로 굳어 버릴 정도여서 나는 칠칠하지 못하게 입을 벌린 채로 눈을 감고 떨었다.

“아읏, 읏… 아프, 아….”

축축한 뺨을 문지르는 가죽의 감촉에 젖은 눈꺼풀을 드니 랭던 경이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었다. 단단히 다문 입술에서 실망한 기색이 읽혔다. 그러나 엉덩이에서 계속 샘솟는 통증이 해결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탐색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숫자를 또 빼먹었으니 무효입니다.”

“흐윽, 윽….”

예고 없이 맞아서 카운트를 잊었다는 억울함은 목구멍을 막았다가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나는 하얗게 질려 핏줄이 보이는 손을 겨우 뻗었다. 내 앞에 선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봐주지 않으면 이 매질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맡은 역할이 있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선택지는 그 속에 없으니 랭던 경이 원하는 대로 그는 나의 폭군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빌어야 했다.

“흐읍, 랭던 경… 너무 아픕니다. 엉덩이가….”

“한 대 남았습니다.”

“조금만, 살살….”

“얼굴을 보여 주세요.”

나는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는 찡그린 채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섬세한 손끝이 내 얼굴 윤곽을 쓸어내리고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우아한 손가락은 아픔에 짓씹느라 부푼 입술을 만지고 입 속을 침범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손가락을 빨았다. 혓바닥을 누르는 손가락 두 개를 빨다 그 손가락을 입에 담은 채로 다시 울었다.

“저하….”

“…눈물이 흐르는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은 모르겠지.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요.”

순식간에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가 내 뒤에 섰다.

“마지막이니 잘 세요.”

“네, 네에….”

채찍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이제 고통은 엉덩이와 허리를 지나 뒷덜미까지 밀고 올라왔다. 온몸에 퍼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울음소리가 섞인 마지막 숫자를 내뱉었다.

“다섯….”

불과 몇 분 전 울음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카운트를 취소한 적이 있어 나는 또 그가 매를 무효로 만들까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채찍을 옆에 내려놓고 내 엉덩이 위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마지막 매가 취소되지 않은 건 손가락을 빨고 울면서 빈 덕분일 것이다.

홧홧한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손길에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그는 마편 자국대로 붉게 부푼 엉덩이를 살살 쓸어내리고 그 자국 위에 입을 맞췄다.

“예뻐요.”

그의 입술은 허벅지 뒤와 등 위에도 닿았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 제가 잘 못 맞아서 화가 나신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엉덩이에 남은 매 자국과 붉어진 피부가… 정말 미치겠군.”

뜨거워서 진정이 되지 않는 엉덩이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그는 테이블을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뒤로 끌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당신의 좁은 안쪽을 박아 대고 싶어서 커진 거 느껴져요? 꼴려서 바로 쑤시고 싶은 걸 참느라 애쓰는 중입니다. 당장이라도 처박고 당신이 아프다고 울면서 비는 모습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지만, 하… 먼저 맞겠다고 빌었으니 내가 양보해야겠지. 약속을 지켜야 그대가 또 우는 모습을 보여 줄 거 아니요.”

짓눌린 가슴팍 안에 자리한 심장이 테이블을 울릴 정도로 뛰었다. 랭던 경은 손가락 하나를 내 아래에 집어넣었다. 놀라서 밭은 숨을 들이켰으나 마편으로 맞은 피부가 너무 쓰라려 손가락으로 밑을 벌리는 일이 첫날밤만큼 아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등 뒤에 그의 체중이 실렸다.

랭던 경은 테이블에 엎드린 내 몸을 덮고 손으로 안쪽을 쑤시며 뒷덜미를 핥았다. 발기한 그의 페니스가 매를 맞아 붉게 부푼 엉덩이와 허벅지에 이리저리 비벼졌다. 내게 욕정을 해소하는 행동에 울컥 서러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하께서는 왜 이리 저를 미워하세요. 창부인데 섹스를 잘 못하는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요.”

서글픔을 토로하자마자 뒷덜미에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왜 그렇게 억울한 목소리요?”

“매가 아파요, 흣, 너무….”

“그리 투정하는 소리에도 웃어 주는데 내가 그대를 미워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좋아서 울음이 터지도록 좆을 박아 주면 그런 말을 안 할거요?”

“저하의 것은 너무, 으응… 커서 몹시 아픈걸요. 아….”

“내 자지에 길들면 앞으로 다른 것은 아래 입으로 빨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세상에, 자… 라니.

아직 엉덩이에 남아 있는 고통보다 그가 사용하는 불경하고 외설스러운 단어가 나를 더 경악하게 만들었다. 랭던 경은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계속 내게 자신의 페니스를 비볐다. 새어 나온 쿠퍼액에 마편의 흔적이 젖어 따끔거렸다. 내 안을 휘젓는 손길은 매질과 달리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으응… 흣….”

랭던 경은 내 몸과 테이블 사이에 손을 넣어 어느새 다시 선 내 것을 잡았다. 마편으로 맞는 동안 수그러들었던 성기가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쑤셔 준 지 몇 번 되지 않아 벌써 발기했다는 사실에 팔뚝이 발갛게 익었다.

“봐요. 맞으니 더 단단해졌군.”

“마, 맞아서 그런 것이, 흐, 아, 아닙니다….”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저릿한 느낌과 함께 솜털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몸을 겹치고 있어 랭던 경의 심장 울림과 숨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사실이 안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만큼이나 나를 달구었다. 랭던 경이 열이 오른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오늘은 바로 네 눈물샘부터 쑤셔 주지. 더 박아 달라고, 좆을 물려 달라고 음탕한 말을 지껄이게 될 거야.”

“기름도 없이, 흐응… 그렇게 깊게는….”

“정액으로 빨리 적시면 충분할 겁니다. 아픈 건 곧 잊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아래쪽을 귀두가 파고들었다.

“하… 박아 주자마자 질척하게 들러붙는군.”

“흐읍… 윽….”

“힘 풀어요. 좋아하는 걸 물게 해 주려는 거니까.”

“네, 흣….”

허리와 엉덩이에 들어간 힘을 풀수록 귀두가 안을 침범했다. 두려움이 몸을 울렸다. 그는 내 위에 몸을 겹친 상태로 입 속에 손가락을 물려 주었다. 나는 굵고 단단한 손가락을 매달리듯 빨며 귀두를 받아들였다. 잔뜩 벌어진 밑이 뜨거웠다.

랭던 경은 조금씩 허리를 들썩이며 성기를 얕게 치댔다. 찢어질 듯이 아래가 열리는 느낌이 들어 못 하겠다고 빌고 싶었다. 오늘은 입에 재갈도 물지 않아 무섭다는 말이 쉽게 튀어나오려 했다. 나는 재갈을 준비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으응… 찌, 찢어질 것 같, 아요….”

삽입을 오래 참고서도 랭던 경은 얕게 묻은 성기를 한참이나 들썩이다 내 안에 사정했다. 뜨거운 느낌이 내벽을 적시고 질척하게 안으로 흘러들어 테이블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정액이 끝도 없이 울컥울컥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정액을 받는 느낌이 저릿해 온몸이 진동했다. 랭던 경은 갑자기 손으로 엉덩이를 호되게 내리쳤다. 마편으로 맞은 자리가 아파 나는 길게 신음을 질렀다.

“아! 아… 아파….”

“박아 달라고 천하게 조르지 말고. 제대로 박아 주지도 않았는데 허리부터 흔들면 좆질을 할 맛이 나겠어요?”

그래서 흔든 것이 아닌데. 억울하게 엉덩이를 맞아 서러움마저 코끝을 찌르르 울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랭던 경은 귀두만 박혀 있던 성기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풀어 주었다고는 해도 페니스가 너무 커서 내 안을 파고드는 뻑뻑한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윤활유 대신 싸 준 정액과 쿠퍼액이 질척질척 펴 발렸다. 끈적한 액체들이 커다란 성기가 내 안을 침범하도록 도왔다.

“흣, 읏….”

“하아… 오물오물, 좋아서 난리가 났군. 남자를 밝히는 뒷구멍이오.”

“그것이, 흐응… 아니라… 아! 흣…. 래, 랭던 경… 밑이 찌, 찢어질 것 같습니다. 으응… 조금만 더 천, 천히….”

밑이 한껏 벌어지고 성기가 끝도 없이 파고드는 게 무서워 떨며 애원했다.

“그대는 눈물샘이 깊이 있어서 자지를 다 받아먹어야 합니다. 후으… 너무 빨아 대서 욕지거리가 나오는군.”

“아읏… 흣, 으응….”

정말 내 아래쪽이 그렇게 천박하게 움직이는 걸까. 조절하려 해 봐도 나는 그저 큰 성기를 품는 게 아프고 버거워 밑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말대로 내 몸이 너무 천박하지는 않길, 외설스럽지는 않길 빌 뿐이었다. 나는 삽입의 아픔을 참고 참다 겨우 용기를 내 물었다.

“아, 아직… 흐읏, 멀었나요… 저하….”

“반 조금 넘게 들어갔어요.”

이제야 반이 들어왔다는 말에 테이블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랭던 경은 테이블에 엎드린 내 머리채를 거세게 쥐어 잡고 그대로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들어오기만 하던 성기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치받으며 내벽을 문지르니 입에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물은 덤이었다. 사냥개 두 마리는 여전히 문가에 앉아 뼈를 씹으며 쉬고 있었다.

“흐읏, 읏… 빠르, 빠릅니다…. 저하, 으으응….”

“아직 절반밖에, 하, 안 박고 있습니다.”

“…하응, 읏, 아파… 아파요….”

“힘을 풀어야지.”

두꺼운 손바닥이 냉정하게 엉덩이를 갈겼다. 아파서 소리를 지르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처음보다 랭던 경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하기가 좀 더 쉬워졌을 뿐, 섹스는 여전히 무섭고 고통스럽게 나를 잠식했다.

땀이 밴 손으로 식탁을 겨우 붙들고 바들바들 떨며 그의 허리 짓을 인내했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당기는 손,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엉덩이를 때리는 손.

겁이 나서 눈물이 시큰하게 코끝에 맺혔다.

“으읏, 으응… 흐읏….”

“거의 다 들어갔어요. 하….”

랭던 경은 단단한 페니스를 안쪽에 꾹 밀어 넣었다. 몸이 갈라지는 것만 같아 손끝에 힘을 줘 봤으나 이젠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겨우 닿아 있는 엄지발가락 역시 나를 지탱하지 못했다.

간신히 허벅지 뒤편에 그의 바지 자락이 닿고, 옷감 너머로 탄탄한 허벅지 살이 부딪쳤다. 성기가 완전히 다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테이블 상판에 이마를 묻었다. 아래를 꽉 채운 살 기둥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뜀박질을 한 듯 가슴이 뻐근했다. 랭던 경은 다행히 바로 움직이지 않고 흐느껴 우는 내 등을 쓸어내리고 어깨와 등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안 찢어지고 잘 물고 있습니다.”

“흐윽, 흣… 제, 제발… 저, 정액을 더 뿌려 주세요, 저하…. 더 저, 젖게… 하읍, 흡….”

“그건 말 안 해도 시간이 지나면 해 줄 테니 걱정 말아요. 하, 그대가 진정하면 기분 좋은 데를 자극해 줄 테니까. 숨을 너무 거칠게 쉬는군. 편하게 호흡하도록 도와줄게요.”

랭던 경의 손이 뒤에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모았다가 그가 손을 살짝 떼어 주면 손가락 사이로 공기를 뱉어 냈다. 턱까지 뭉쳐 있던 숨 덩어리가 입 밖으로, 폐 안으로 흩어졌다.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다. 랭던 경은 페니스를 짧게 뺐다가 내벽을 치대며 깊숙한 데에 박아 넣었다. 허리와 엉덩이가 크게 흔들렸다.

“아으응, 흣, 으읏….”

아픔에 잠식되기 전에 페니스가 뭉근히 깊은 곳을 눌렀다. 눈앞에 까만 별이 흩어졌다. 처음 섹스했을 때 자극받은 곳이었다.

깊은 지점을 나른히 누르는 살덩이가 머릿속까지 뭉개 버릴 것만 같아 나는 팔을 버둥대며 앞으로 기었다. 그러나 테이블에 몸이 걸친 상태라 얼마 도망가지 못한 채 랭던 경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스스로 몸을 앞쪽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그나마 바닥에 닿던 엄지발가락마저 완전히 공중으로 떠 버렸다.

“여기요. 좆으로 쑤셔 주면 로엘 당신이 질질 싸는 데가. 그대의 눈물도 정액도 흘러내리게 해 주는 눈물샘이지.”

“저는, 흣, 모, 몰라요. 아… 그, 그런 것은….”

“그래요? 오늘 다시 확인해 봐요. 그동안 여기를 찔러 준 좆이 없었을 테니 또 느껴 봐야 알겠지.”

“바로 움, 움직이시면, 흐응, 아파요, 저하.”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을 거요.”

랭던 경은 내 뒷머리와 허리를 각각 손바닥으로 짓누르고 나를 완전히 고정한 채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도 나만 발가벗겨 테이블에 엎어 놓은 채로 봐주지 않고 밑을 거칠게 쳐올렸다. 정액과 쿠퍼액이 찌걱대는 소리와 함께 뭉툭한 귀두가 그가 말한 지점을 찧어 댔다.

“흐앗, 흐읏… 아! 으으응….”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커다란 손이 누르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다물 수 없는 입에서 침이 천박하게 흘러내렸다.

입을 다물어 보려 젖은 아랫입술을 깨물어도 이는 금방 입술을 놓쳤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허리를 고정한 굵은 손목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아흣, 저하… 아, 안 돼…. 으응….”

“뭐가, 안 됩니까?”

“미, 밑이, 저리고… 하응, 흣, 저려서….”

“좆으로 쑤셔 줄 때?”

“네, 흐읍… 처, 천천히… 아! 아….”

단순히 쾌감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강렬하고 생경한 느낌이었다. 깊숙한 데 귀두가 처박힐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공중에 뜬 다리가 덜렁거렸다. 단단한 몸이 나를 쳐올릴 때마다 테이블에 살이 이리저리 부딪치는 데도 이상하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몸이 아니었다. 밑에 남자의 것을 물었다고 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몸은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난잡한 말을 지껄여 보세요. 흣… 그럼 잠깐 천천히 해 주겠습니다.”

내 애원에도 살 맞는 소리는 커지기만 했다. 그가 허리 짓을 하며 거칠게 박을 때마다 나는 큰 테이블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밀렸다. 끽, 끽, 테이블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엎드린 채 짓눌린 상태라 그의 말을 듣는 것 말고는 이 쾌감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무, 흐윽… 무슨 말, 아읏, 으응….”

“좆이 어떻게, 느껴지기에 천천히 해 줬으면 좋겠는지.”

“…서, 성기가, 아래, 흣, 쑤시는… 엉덩이, 가 저리고, 흡, 눈물이….”

“여기가 그대의 눈물샘이라 그렇겠지?”

“네, 흐읏… 차, 창부의 눈, 흐윽… 누, 눈물샘이라, 아! 흐으응… 그렇, 흑, 습니다….”

랭던 경이 깊은 신음 소리를 내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페니스는 여전히 나를 가득 채우고 눈물샘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살 것 같았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침이 흘렀지만 나를 부숴 놓을 듯한 강렬한 쾌감과 테이블째 몸이 덜컥대는 두려운 상태가 멈추어서.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숨을 쌕쌕 내쉬며 몸을 달달 떨고 있는데 그가 등 위로 엎드리며 내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따뜻한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위로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내 부은 눈꺼풀과 눈물을 핥으며 속삭였다.

“로엘, 하… 그대의 안이 너무 달콤해서 조절이 안 되는군. 섹스를 하면서 이렇게 자제하지 못한 일은 처음입니다.”

“저하, 흡… 흐읏….”

“그거 압니까? 좆을 눈물샘에 처박을 때마다 당신의 등이 붉게 물들어요. 마편 자국이 남은 엉덩이는 요란하게 흔들리고. 하… 이다음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천천히 해 주겠습니다.”

“…다, 다음이라면….”

“지금은 못 참겠으니 무릎 꿇어요.”

랭던 경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나를 들어 테이블 위에 무릎을 꿇렸다.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무릎을 꿇고 다음 행위를 기다렸다.

그는 내 엉덩이만 상판 바깥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페니스를 아래서 위로 그대로 박아 넣었다. 생경한 방향에 깊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읏, 흣….”

그는 내 양쪽 팔꿈치를 뒤에서 잡아 손쉽게 몸을 구속했다. 랭던 경은 그대로 눈물샘을 거칠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데우는 쾌감에 어김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박아 넣는 것만으로도 감각의 모양이 바뀌었다. 성기가 안쪽을 찧으면 앉아 있는 내 체중이 실려 살덩이가 더 깊숙이 박혔다. 그때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신음만 내질렀다.

랭던 경은 연신 욕을 하다가 쥐고 있던 내 팔꿈치를 아래로 당겨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랭던 경이 박아 넣는 것인지 스스로 집어넣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점점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붕 떠올랐다.

“하윽, 흣….”

“기분, 하, 좋아요?”

“네…. 으읏… 아으으응….”

“내가 당신 뒷구멍이 어떻다고 했지? 응? 말해 봐요, 로엘.”

그는 이미 벌어져 있는 내 입 속에 손가락을 쑤시며 혀를 잡아당겼다.

“…남자, 으으응… 남자를 밝, 히는… 힉, 뒤, 뒷구멍이라고… 흣….”

“그리고.”

성기가 다른 데를 비스듬히 찔러 올리는 순간 내 몸이 앞으로 기울며 파르르 떨렸다. 랭던 경이 팔꿈치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져 경련을 일으킬 뻔했다. 나는 몸이 반쯤 기운 채 떨며 간신히 입을 벌려 대답했다.

“아읏, 다, 달라붙어 빠는… 아, 저하… 거기, 거기….”

“여기가 좋아?”

“…네, 아아, 아….”

“후으… 어딜 쑤셔도 느끼는군.”

떨리는 목소리가 끊겨 나왔다. 이런 행위로 쾌감을 느끼는 몸이 무척 수치스러웠으나 나약한 육체는 적나라하게 반응했다.

“래, 랭던, 저하… 으응….”

막아 보려 해도 내 성기에서 정액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부끄러워 어떻게든 다리로 가리고 싶었으나 자세를 바꿀 수 없어 숨길 도리가 없었다.

랭던 경이 눈치채지 않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사정하는 기색을 숨겼다. 신음이 더 크게 터지지 않도록 아랫입술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이로 씹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눈물과 흘러내린 정액이 꿇어앉은 허벅지 위를 흥건하게 적셨을 때쯤, 기어이 랭던 경이 뒤에서 목덜미를 물며 속삭였다.

“그렇게 좋아요? 손으로 문지르지 않아도 질질 쌀 만큼?”

랭던 경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흐읏, 차, 참을 수가, 아… 없어서….”

“테이블이 그대의 타액으로 다 젖었습니다. 하, 조금만 익숙해지면 물을 지리겠어요.”

“…그, 그런 것은… 아!”

“저기 앉아 있는 사냥개들이 씹질을 해도 로엘 그대보다는 점잖게 지릴 겁니다. 허벅지도 테이블도 침과 정액으로 온통 번들대는군.”

쾌감에 랭던 경이 준 모욕이 뒤섞였다. 뺨이 다 젖도록 눈물을 떨구어 내고 나서야 마침내 랭던 경도 사정했다.

정액이 뿌려진 눈물샘에는 교묘하고 야릇한 쾌감이 있었다. 그곳이 젖는 감각에 고개를 다시 떨구었다. 온몸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쾌감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정액을 싸 주는 거에도 환장하는군.”

“읏… 흐응… 응….”

랭던 경의 말이 사실이라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정액을 다 쏟아 낼 때까지 허리와 엉덩이의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테이블에 무릎 꿇은 채 팔이 뒤로 잡힌 상태로는 랭던 경에게 어떤 것도 숨기기 어려웠다. 몸의 반응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 내게 몹시 좌절할 만한 일이었다.

사정을 마친 랭던 경은 페니스를 빼내지 않고 내 무릎 뒤쪽을 잡아 나를 손쉽게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가 방향을 틀자 따뜻한 벽난로의 불빛이 시야에 어른댔다.

랭던 경은 쾌감을 누그러트리지 못하는 내 뒷머리에 계속 키스하며 바닥에 떨어진 망토 위에 나를 천천히 뉘었다. 그가 퉁퉁 부은 눈가에 키스했으나 나는 랭던 경과 애정 어린 스킨십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난롯불을 바라봤다.

“왜 피해요, 응?”

랭던 경이 뺨을 감싸며 내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가져왔으나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또 고개를 꺾어 난롯불을 응시했다.

“대체 왜 화가 났어요? 좆으로 찔러 주기만 했는데도 질질 싸서 기분이 좋을 줄 알았더니.”

달래려는 건지 화를 부채질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발언이었다.

“…랭던 경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뭐가. 그대가 느끼는 곳을 잘 알고 자지러지도록 쑤셔 주는 것이 죄요?”

“그,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관계를 맺을 때 하시는 말씀이 너무, 너무 외설스러우니 고해를 보세요. 입에, 흣, 담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말에 익숙할 텐데 뭘 그리 정색을 해요.”

“처, 천벌을 받습니다.”

랭던 경은 ‘천벌’이라는 표현이 웃겼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흘끗 눈동자를 돌렸다. 그리고 랭던 경의 웃는 얼굴을 잘생겼다고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쾌감을 느끼지 않는 데 실패한 것처럼 잘생긴 얼굴을 잘생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랭던 경이 내 안에 두 번이나 싸 놓은 정액 때문에 그가 웃을 때마다 그사이 반쯤 발기한 그의 것이 부드러이 속을 문대기까지 했다.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했으나 그것만은 어떻게든 꾹 참으며 말없이 다시 벽난로를 쳐다봤다.

랭던 경이 내 얼굴 옆을 손으로 짚었다. 갑자기 나타난 굵은 팔뚝이 커다란 기둥이 되어 시야를 차단했다. 랭던 경은 보이지도 않는 벽난로를 향해 놓여 있는 내 고집스러운 얼굴을 다시 붙잡아와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랭던 경의 가지런한 치아를 넋 놓고 바라봤다.

“천벌을 받아도 로엘 당신과 같이 받겠지. 그대는 좆을 박아 주는 게 좋아 울며 엉덩이를 흔들지 않았습니까.”

“…저, 저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로엘 씨는 좆이 박힐 때만 입이 순하군. 아직 박는 게 끝나지 않았으니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거예요. 마음을 바꿔 다시 거칠게 할 수도 있소.”

그는 자비 없이 내 엉덩이를 틀어잡았다.

“아읏, 흣… 아픕니다….”

“마편으로 다시 갈겨 줄까. 가슴에도, 배에도… 붉은 자국을 남겨 주고 싶은데.”

가슴과 배를 때린다니, 몹시 무서운 말이었다. 겁이 나서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건, 그건… 아….”

고개를 옆으로 비틀자 랭던 경이 눈물이 마른 뺨을 혀로 진득하게 핥고 목덜미를 깨물며 속삭였다.

“고개 돌리지 말아요. 아파하는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

“귀엽다 해 주니 버릇없이 고집스럽게 구는군.”

눈꼬리 끝에 머문 랭던 경이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그 짜증은 바로 고통이 되어 날아왔다. 그는 내 무릎 뒤를 잡아 젖혀 엉덩이를 띄우고 거대한 페니스를 위에서 아래로 박아 넣었다.

“아!”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나는 밑으로 떨어진 턱을 덜덜 떨며 젖힌 다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눈썹이 좁아지고 신음은 목구멍에 걸렸다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아… 아….”

랭던 경은 신음하는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 표정이지.”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찧듯이 페니스를 박아 넣으며 나를 범했다. 묵직한 살 기둥은 구멍이 오므라드는 걸, 내벽이 좁아지는 걸 허락지 않았다. 내벽을 가르며 들어와 눈물샘을 찧고 뭉갰다. 내 안은 난잡하게도 뭉툭한 귀두를 감싸며 벌렁대고 빨았다.

“흐앗, 흣… 아응, 아…!”

“하, 눈 감지 말고. 벌 받고 싶어요? 살려 달라고 질질 울면서 빌게 해 줄까? 묶어 놓고 마편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때려 줄 수도 있어요.”

“아, 아니에요, 응, 흣… 잘못….”

나는 두려움에 달달 떨며 눈물이 흐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열감과 냉정한 빛이 섞인 짙은 녹색 눈이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체중을 실어 박는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다리를 누르고 있는 굵은 팔뚝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쾌감이 다시 나를 먹어 치우려 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섹스가 끝나지 않았는데 랭던 경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흑, 흡, 거기는… 응… 아….”

“너무 좁군. 흣.”

그때 문가에 앉아 있던 레트리버 새미가 목줄을 길게 늘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놀라 그의 팔을 더 절박하게 부여잡았다.

“저하, 흣… 새미가, 개가….”

랭던 경은 개를 흘끗 봤으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의 거친 허리 짓에 몸이 이리저리 밀려 망토 밖에 반쯤 나와 있었다.

“…부, 끄러워요, 으응….”

“하… 뭐가 부끄러운 거요.”

“개가, 응, 봐서요. 아!”

랭던 경은 그제야 허리 짓을 멈추어 주었다. 드러난 내 배가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랭던 경은 내내 젖히고 있던 다리를 놓아 주고 성기를 슬쩍 빼낸 뒤 배꼽 근처에 입을 맞췄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숨결이 배꼽 주변을 간지럽혔다.

“개가 쳐다보는 게 신경 쓰여요? 귀여운 남창이군.”

자꾸 남창이라 말씀하시지 말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울컥 올라왔으나 좀 전처럼 혼이 날까 봐 퉁퉁 부은 눈꺼풀만 깜빡였다.

랭던 경은 다시 성기를 깊숙이 쑤셔 넣으며 누워 있는 내 등을 커다란 손으로 받쳐 일으켰다. 솟아오르는 시야에 벽난로의 불빛이 빨갛게 차올랐다. 나는 랭던 경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붉은 불길에 휩싸인 나무 장작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개가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겁니다. 이제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다정한 처사에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다 넓은 어깨에 걸친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 경은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나를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 페니스를 넣었다가 다시 박아 넣는 방식이 아니라, 깊숙이 집어넣은 채 흔드는 낯선 동작이었다. 랭던 경은 이내 손을 내려 마편 자국이 남은 두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아응….”

“내 어깨를 짚고 눈을 봐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어깨를 잡고 랭던 경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틀어쥔 내 엉덩이를 계속 천천히 움직였다. 안쪽에 박혀 있는 귀두가 쾌감에 약한 곳을 느리고 묵직하게 눌렀다.

“…아, 으응….”

“기분 좋아요?”

“네…. 흐응… 부드러워요….”

“아까 약속했으니 부드럽게 해 줄게요. 그대를 너무 속상하게 만들면 내게 보내는 서신의 길이가 짧아질 것 아니요. 응? 그대는 그렇게 성을 내니까.”

랭던 경은 나와 시선을 겹친 상태로 밑을 부드러이 비볐다. 나는 두 다리로 그의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밀려드는 쾌감에 몸을 실었다. 몸과 마음을 다 부수어 놓을 듯 거칠기만 했던 섹스가 처음으로 보드라워졌다. 늘 랭던 경의 체중을 견뎌 내기 급급했던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의탁했다.

“흣, 랭던 경… 아….”

“로엘 씨는 이게 더 좋은가 봅니다. 좆이 바짝 섰군.”

“예…. 이것이, 좋아요….”

나는 그의 품에서 손길을 따라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면서 섹스하는 랭던 경의 얼굴을 처음으로 찬찬히 뜯어봤다. 내가 쾌감을 느낄 때마다 그의 미간도 좁아지고, 내가 앓는 신음을 흘릴 때마다 그의 입술도 벌어지며 거친 숨소리를 뱉어 냈다. 서로가 느끼는 순간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달콤함을 안겼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랭던 경의 뺨 위에 입술을 댔다가 놀라서 화들짝 떼어 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발가락을 꼼지락대다 고개를 숙였다. 랭던 경이 얼굴을 들고 눈을 보라며 혼낼 줄 알았는데 그는 말없이 나를 꽉 끌어안고 안을 부드럽게 눌러 주었다.

“으응, 읏….”

“…하.”

우리는 귓가에 서로의 신음을 흘려 넣었다. 랭던 경이 허리를 끌어당기는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어설프게 놀렸다.

랭던 경은 부드럽게 하는 동안에는 나를 창부라고 모욕하지도, 엉덩이를 때리는 거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 느낄 수 있도록 깊숙한 곳을 문질러 주고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춰 줬다. 그와 나의 잔잔한 신음 너머로 모닥불이 타닥, 타닥 타는 소리가 깔렸다.

우리는 동시에 사정했다. 행위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과 쾌감이 뒤엉켜 그의 옷자락을 눈물로 조금 적셨다.

랭던 경은 내 안에서 성기를 천천히 빼낸 뒤 갑자기 명령조로 말했다.

“정액 흘리지 말고 구멍 단단히 오므려요.”

잠깐의 다정한 섹스로 방심한 심장 위를 차갑게 덮는 명령이었다.

“…네.”

몇 번이나 삽입되어 연해진 아래를 힘껏 조이며 허리를 떨었다. 랭던 경의 어투는 섹스를 시작할 때처럼 확연한 명령조였다. 그는 섹스할 때 내 행동을 지배하길 즐겼다. 몇 번 해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고분고분 순종했다.

“무릎 꿇고 핥아요.”

“…네, 저하.”

처음 섹스했을 때처럼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기를 핥았다. 엎드려 핥는 것은 랭던 경이 멈추라고 명령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만.”

나는 핥던 행동을 멈추고 상체를 일으켰지만 꿇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랭던 경은 일어나서 먼저 자신의 옷을 추스르고 나는 무릎 꿇은 채 두었다. 혼자 벌거벗은 채 망토 위에 앉아 있으려니 등에 느껴지는 벽난로의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랭던 경은 옷을 다 갖춰 입고 내 앞에 서서 무릎 꿇은 채 복종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명령했다.

“엎드려서 엉덩이 치켜들고 싸요.”

“…저하, 뭐를….”

“정액.”

심장을 찬 공기가 둘러쌌다. 그는 내 행동이 의아하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내 말 안 들려요?”

“…죄송합니다, 저하.”

주춤주춤 망토 위에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나는 결국 그에겐 창부에 불과한 걸까.’

서운함이 해일처럼 일었다. 어느새 그에게 여러 가지 기대감이 생겨 버렸다. 그러면 나만 상처받을 뿐인데.

슬픔을 짓누르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밑이 여러 번 벌름거리고 나서야 그가 세 번이나 싸 놓은 정액이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그는 내가 뱉어 내는 동안 아무 말이 없다 간단한 소감을 전했다.

“싸는 것도 요란하군요.”

숨 막힐 정도로 냉정한 말에 입가가 온통 수치로 떨렸다. 랭던 경은 섹스를 모욕적으로 마무리한 뒤 내게 수건과 옷을 건네주었다.

“입어요.”

“네, 저하.”

나는 등을 돌리고 앉아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옷을 재빨리 꿰입으며 몰래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더러워진 망토를 주우려는데 랭던 경이 살며시 내 손을 붙들었다. 다시 다정해진 손길에 퉁퉁 부은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눈을 마주쳤다. 랭던 경은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러워졌으니 그건 버려두고 내 것을 두르고 가세요.”

“…날이 추운데.”

“나는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라 괜찮습니다. 이 정도 옷이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내 호의를 당연하게 여겨도 괜찮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할 필요 없어요.”

랭던 경은 자신의 털 망토를 내게 둘러 주고 바닥에 끌리지 않게 길이를 조정해 주었다. 망토의 끈을 매는 다감한 손길이 스칠 때마다 예민해진 몸이 흠칫 떨렸다. 랭던 경은 떨림을 눈치챘겠지만 다행히 나를 무안 주지 않았다. 섹스가 끝나자 그는 다시 예의 바른 공작으로 돌아왔다.

묶어 놓은 개들을 챙기는 랭던 경의 뒤에 서서 그가 지어 준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섹스를 하지 않을 때의 랭던 경은 다정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기는 면이 있었다. 귀족답지 않게 겸손하고 소탈한 그의 평소 모습이 싫지 않았다.

뺨에 번진 열감을 식히기 위해 손등으로 피부를 눌렀다. 그러나 섹스를 막 마친 터라 늘 차갑기만 하던 손이 뜨거워 열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우리는 토미와 새미를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 겨울 해가 짧아 어느새 숲은 흐릿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숲으로 들어갔던 두 사람의 발자국 곁에, 숲을 빠져나오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모양을 남겼다.

랭던 경은 걷다 말고 약간 흘러내린 내 망토를 세심히 여며 주었다. 섹스가 끝나고 한결 다감해진 그의 행동에 적잖이 안심이 되어 그제야 살풋 미소가 나왔다. 랭던 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춥지는 않아요?”

“괜찮습니다, 랭던 경.”

“또 무리하게 만든 것 같아 걱정이에요. 로엘 씨에게 미안하게도 자제가 안 됐습니다. 혹시라도 몸이 안 좋아지면 얘기해요.”

“걱정 마세요.”

다정한 당부의 말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툭, 질문했다.

“몸도 약한데 어쩌다 남창 짓을 하게 됐습니까?”

“그게….”

“그대는 어릴 때 일이 후회된다고 했지만 나는 어렸을 적의 그대가 훨씬 나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랭던 경이 지금껏 입에 담지 못할 수많은 모욕과 천박한 언어를 내게 퍼부었지만 이 정도로 굴욕감을 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목구멍이 죄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랭던 경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흘끗 나를 보더니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 끝을 문질렀다.

“실언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의도와 다르게 말이 나왔어요.”

“…….”

실언이라는 말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진심임이 분명했으므로. 그리고 나는 랭던 경에게 당신이 나의 처음이라고 말할 수 없었으므로.

도미닉이 새뮤얼에게 받았다는 돈만 아니면 그대로 랭던 경의 곁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두려운 마음을 견디며 해내고 있는 섹스였다. 그때마다 랭던 경에겐 그저 내가 남창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아픔에 마음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나는 대답 없이 눈물 고인 눈을 숲길에 두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가슴이 돌이킬 수 없이 무거웠다. 신발 밑으로 눌리는 하얀 눈보다 마음이 더 깊게 바닥 속으로 꺼졌다. 랭던 경은 한 번의 사과 후, 그 이상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창에게 한 말이니 사과도 한 번으로 족한 것이겠지.’

나는 망토 속에 둔 두 손을 아프도록 부여잡았다.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 거라면 차라리 다정히 망토를 둘러 주지 않는 게 좋았다. 첫 만남처럼 나를 계속 서튼 집안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했다면, 그랬다면 이토록 충격적으로 들리지 않았을 텐데.

마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윌리엄은 저택에 있었다. 하녀와 나무 장난감으로 놀며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는지 윌의 표정은 나와 달리 햇살처럼 밝았다. 베넷 부부가 생계 때문에 바빠서 놀아 줄 여유가 없다 보니 윌리엄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런 윌에게 하녀와 단둘이 놀이를 하며 보낸 시간은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윌리엄!”

나는 빠른 걸음으로 랭던 경의 곁을 지나치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윌리엄을 불렀다. 친숙한 목소리에 자동으로 몸을 일으킨 윌리엄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몸을 굳혔다.

“로엘 도련님… 울었어요?”

윌리엄의 반응에 손끝으로 눈두덩 근처를 더듬었다. 아직도 붓기가 느껴졌다. 한참이나 섹스를 하며 운 탓에 얼굴이 엉망일 텐데.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섹스한 티가 나는 낯이 몹시 부끄러웠으나 윌리엄이 놀랄까 봐 급히 고개를 저었다.

“울지 않았어. 숲이 너무 추운데 오래 사냥을 하느라 얼굴이 상해서 그래. 윌, 공작님께 다시 인사드려야지.”

“다녀오셨어요, 공작님.”

윌은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추워서 얼굴이 상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 느껴져 괜히 마음이 아팠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허술한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랭던 경은 인사하는 윌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도 그렇고 인사를 참 잘하는구나. 재밌게 놀고 있었니?”

“네, 공작님.”

“맛있는 건 마음껏 먹었고?”

“네.”

랭던 경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계속 눈길을 피하고 있는 내게 찬찬히 말했다.

“눈 때문에 마차가 못 들어오는 수도 있습니다. 쌓아 놓은 눈이 무너져 길이 막히는 경우가 잦으니까요. 해가 다 져도 마차가 오지 않으면 아이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새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저하.”

“잠깐 2층 응접실에서 차 한잔할까요?”

“…좋습니다. 윌, 랭던 공작님과 차를 마시고 내려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네, 로엘 도련님.”

윌리엄은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부은 눈을 움직여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우리는 거리를 두고 서먹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랭던 경이 한 번 더 사과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사과를 했는데도 자신에게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는 나를 나무라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어색하지 않았다.

서튼가의 둘째 아들 따위가 상한 감정을 드러내며 랭던가에 자존심을 세우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랭던 경은 의외의 면에서 권위적이지 않았으니까.

불길한 예감에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그의 등을 쫓았다. 저 넓은 가슴 속에 무슨 생각을 담아두고 있는지 알면 편하련만. 심장이 두근대는 느낌이 힘겨울 정도라 랭던 경 몰래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우리가 응접실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하녀가 다과를 내왔다. 기차에서 저녁을 먹었을 때 시중을 들었던 하녀 샬롯이었다. 나는 에메랄드 저택에서도 한 번 마주쳤던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고마워요, 샬롯 양.”

나는 샬롯에게 다정히 인사하고 잔을 들어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랭던 경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샬롯이 응접실을 나갈 때까지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다가 그녀가 문을 닫고 나서야 나를 흘끗 봤다.

“로엘 씨, 기분 나쁜 티를 너무 내는 것 아닙니까?”

약간이나마 사과의 말을 기대하고 있던 심장이 힘없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아랫사람에게 소탈하고 겸손한 그의 인격은 서튼가의 창부인 내게는 늘 해당되지 않는 사항인 듯했다.

가슴이 아파 목이 메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창부 주제에 기분 나쁜 티를 내서 죄송하다고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가가 금세 뜨거워졌다.

“…저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안 되는 건가요. 제게 먼저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으신 건 저하세요.”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까?”

“…….”

“내가 로엘 그대의 과거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런 말실수를 한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수는 없어요? 나는 분명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의 표면적인 부분만 보고 그렇게 예의 없이 굴어야 합니까?”

“어째서 제가 랭던 경이 하시는 말씀의 표면적인 부분만 본다고 하세요. 저를 보며 남창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건 저하세요. 그 남창을 안기로 하신 건 저하시면서 꼭 그렇게 아버지와 얽힌 과거까지 들먹이며 모욕하셔야 하나요? 저에게 아픈 과거인 걸 아시면서… 제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다 보셨으면서….”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차근차근 말했지만 음성이 떨려 나오는 것까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랭던 경은 꼬고 있던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풀며 내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내가 당신이 남창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내게 자신이 남창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바로 로엘 당신이에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마의 멍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매번 당신 몸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봐야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멍이라니….”

그제야 도미닉이 컵을 던져 머리카락으로 이어지는 이마 위쪽에 멍이 든 일이 떠올랐다.

“폭설 때문에 나를 못 만나는 잠깐을 참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잔 거 아니요? 뒤 치기로 박히다 침대에 이마라도 찧었어요? 당신 형이 받았다는 돈이 그 비용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저는 랭던 경이 아닌 사람과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다툼의 원인은 제 과거를 함부로 언급한 저하의 언행이에요. 만약 제가 랭던 경이 죽인 동생을 언급한다면 랭던 경은 기분이….”

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순간 랭던 경의 눈빛이 짐승처럼 냉정하게 바뀌었다. 섹스할 때의 지배욕과는 전혀 다른 차가움이었다.

실수했다.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하. 제가 지나쳤습니다.”

“감히 로엘 서튼이 내 동생 일을 당신 집안일 따위와 비교하며 들먹이는 거요?”

랭던 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이블을 그대로 옆으로 뒤집어엎어 버리고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묵직한 테이블과 그릇이 나동그라지며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에게 팔을 잡혀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센 손길에 팔뼈가 부러질 듯 아파 오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나는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죽은 남동생을 언급한 건 내 실수지만 랭던 경이 먼저 나를 모욕했으니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고 싶지 않아서였다.

살벌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어떻게 언급하고 싶은데. 말해 봐요.”

나는 그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었다.

“말해.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소.”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정말 죽이셨어요? 평민을 사랑해서요? 저는 당신이 그보다는 다정한 분일 줄 알았어요.”

“…나가.”

“…….”

“꺼져.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장총으로 그대의 머리도 갈겨 버릴 테니까.”

억센 손이 팔을 놔주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응접실을 뛰쳐나왔다. 문을 닫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터트렸다.

비루한 남작의 자존심을 붙드느라 새뮤얼과 도미닉의 계획을 다 망친 건 그리 속상하지 않았다. 그보다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랭던 경과의 특별한 기류를 모두 어그러트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깜깜히 무너져 내렸다. 질끈 감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부서진 마음의 조각이 같이 흘러나왔다.

내가 다 망쳤다. 언젠가 랭던 경에게 당신이 나의 처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지 모를 기회도,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다. 나는 그에게 영원히 천박한 창부로 남을 것이다.

“흐윽… 윽….”

가슴이 뻐근하고 눈물로 앞이 흐릿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난간을 부여잡고 천천히 계단을 절반쯤 내려왔다. 층계참에서 몸을 틀었을 때 무언가 내 등 뒤를 거세게 떠밀었다. 사냥개가 와서 들이받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개들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공중으로 붕- 떴다. 눈 아래로 보이는 계단과 홀의 풍경엔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난간에 머리를 찧고 계단으로 떨어졌다. 귓가에 쿵, 쿵, 무거운 자루를 굴리는 소리가 무섭도록 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약한 육신은 바닥에 닿고서야 구르기를 멈췄다.

“으… 읏….”

온몸이 부서진 듯한 격통에 비명은 명치에 고였다. 위에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나를 민 사람의 그림자라는 걸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검은색 치마는 옆에 앉아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그 얼굴을 확인했다. 붉은 머리 하녀, 샬롯이었다.

샬롯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택에서 다치기로 프리데릭 백작님에게 약속하셨잖아요, 서튼 남작님. 계약을 지키셔야죠. 두 다리로 걸어 나가시게는 못합니다. 도미닉 서튼 자작이 당신의 부상을 대가로 받아 간 돈이 벌써 25만 골드랍니다.”

음침한 음성이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잔인한 소식을 귓가에 털어놓고 곁을 떠났다.

“…도… 와….”

단어들은 마저 입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얼마가 지났는지,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랭던 경의 외침이 들렸다.

“로엘!”

랭던 경이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진동이 바닥에 닿아 있는 피부에 미세하게 감지됐다. 랭던 경은 쓰러져 있는 내 뺨을 약하게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로엘! 정신 차려요! 로엘!”

주변이 시끄러워지고 랭던 경이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뭐 하고 있어요! 의원을 부르세요! 어서! 로엘, 정신 차려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저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글대는 시야 너머로 랭던 경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미간과 눈가를 찌푸린 랭던 경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꼭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랭던 경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하,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세요.’

팔을 올려 랭던 경의 뺨을 감싸려 했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랭던 경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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