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서신 (5/27)

5. 서신

랭던 경과의 무리한 관계로 다음 날 아침은 침대에서 간단히 수프를 먹고 낮까지 누워 쉬었다. 쓸리고 부은 밑이 아파 거동이 어렵고 미열까지 있어 메리에게 점심도 침대에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달라 부탁했다.

피부가 약한 편이라 타이로 묶였던 손목과 랭던 경에게 여러 번 맞은 허벅지에 멍이 남았다. 예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따금 서러움이 치밀어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랭던 경과 만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침대 사방에 커튼을 치고 누워서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는데 메리가 노크했다. 점심을 가져온 줄 알고 들어오라 했는데 얇은 커튼에 비친 메리의 그림자는 쟁반을 들고 있지 않았다.

“서튼 씨, 커튼을 젖혀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 손이 커튼 틈을 잡아 벌렸다. 메리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누가 보냈나요?”

“테런스 랭던 공작님이십니다.”

“…주세요.”

봉투에 붙은 봉랍을 뜯고 메리가 보는 자리에서 서신을 빠르게 읽었다.

아름다운 로엘 서튼 씨에게.

어젯밤 노르크에 내린 폭설 때문에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소. 마차가 움직일 수 없다고 하여 하인에게 걸어가서라도 서신을 전달하고 오라 일렀습니다. 오늘 개통되기로 했던 새 기차의 운행도 눈이 녹을 때까지 미뤄졌소. 나는 아침부터 눈 때문에 여러 가지 보고를 받았으나 머릿속에는 어젯밤 당신의 모습만이 가득했습니다.

어젯밤의 아름다운 그대는 아직 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듯 보였으나, 상대가 어여쁘게 느껴지지 않으면 괴롭히고 싶지도 않은 것이 나의 뒤틀린 일면이오. 고통스러운 행위 속에서 순종하는 모습이 내게 기쁨을 준다면, 그대는 나를 잔인한 사람이라 비난하겠소?

나는 로엘 그대가 허락한다면 당신의 발목에 수갑을 채워 내가 일하는 서재 책상다리에 온종일 매어 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 또한 이런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나 당신이 내 비뚤어진 욕망을 경박하다 비난한다면 나는 노르크의 겨울처럼 시리고 어두운 슬픔 속에 깊이 잠길 것이오.

어제 몹시 무리했는데 연약한 그대의 몸이 잘 견뎌 냈을지 걱정이 됩니다. 바로 답신을 주길 바라오.

당신을 깊이 생각하는,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나는 편지를 다 읽고 지친 눈을 들어 메리에게 부탁했다.

“메리 양, 침대에서 답신을 쓸 수 있게 준비를 좀 해 주겠어요?”

“네, 서튼 씨.”

메리는 곧 작은 책상과 고급 종이, 펜과 잉크병을 들고 왔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길 부탁한 뒤 펜을 들었으나 무슨 말을 쓰는 게 좋을지 저어되었다. 예상을 웃도는 수치스러움과 몸의 고통 때문에 이 일에 더 개입하는 것이 두려웠다. 랭던 경의 다정한 편지는 혼란에 빠진 내게 몹시 곤란한 인사였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내 역할에 맞는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나 몸살에 걸렸음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랭던 경이 내 건강을 무척 염려하는 듯 느껴졌으나 가까운 가족이나 애인이 아닌 사람에게 쉽게 병을 알리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손등으로 열이 끓는 이마를 짚다가 겨우 그의 이름을 적었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아침부터 게으르게 호텔 안에만 있어 밖에 많은 눈이 내렸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거리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뒤덮은 하얀 눈 때문이었군요.

저에게는 랭던 경의 본모습을 숨기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어디까지 견디어 낼 수 있을지 확인해 본 적이 없어 혹여 저하께서 실망하시지 않을까 오직 그것이 두렵습니다. 저하의 서신이 끊기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을 아신 듯 하루가 지나기 전에 편지를 보내어 주시니 기쁜 마음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노르크의 사람들이 말하길 에메랄드 저택의 겨울 숲이 왕궁의 숲보다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저는 5년이 넘게 노르크 수도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며 불행히도 공작가의 아름다운 숲을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답니다.

랭던 경께서 괜찮으시다면 저 혼자서라도 숲을 둘러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실 수 있을지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사냥을 배울 기회를 주셔도 좋답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작은 마음을 담아, 로엘 서튼으로부터.

침대 옆에 달려 있는 종을 흔들어 메리를 불렀다. 바로 나타난 메리에게 봉투를 배달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점심으로 수프와 작은 빵을 간신히 먹었다. 음식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입맛이 없어 더는 넘기지 못하고 쟁반을 물렸다.

거친 첫 경험이 남긴 흔적이 몸을 자꾸 달구었다. 강렬한 성감의 열기가 아니라 피부를 쓰라리게 데우는 병마의 열감이라는 것이 어젯밤에 경험한 쾌락과의 차이였다.

열이 오르니 오랜만에 아버지의 잘린 머리가 나를 찾아왔다. 눈을 감으나 뜨나 또렷이 보이는 머리는 피가 돌지 않아 살결이 검푸른 색이었고 눈동자는 하얀 점막으로 덮여 있었다. 공포로 치아가 딱딱 부딪쳤다.

‘로엘, 나의 로니….’

목이 잘린 아버지의 입에서는 숨이 쉭쉭 빠지는 쇳소리가 났다.

‘왜 도미닉과 네 어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냈니.’

이건 아버지가 아니야.

나는 이불을 부여잡고 열병이 만들어 낸 환상을 외면하려 시도했다.

‘나를 그렇게 만들어 프리데릭가에 팔아 놓고 다시 프리데릭의 개가 됐구나.’

죄책감이 팔다리를 묶었다.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공중에 둥둥 뜬 아버지의 머리는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나를 놔주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가 아니야. 악몽이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해 온몸이 뻣뻣해졌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에 떠는 나를 누군가 흔들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걱정에 잠긴 메리의 얼굴이 보였다. 메리가 몸을 흔들어 준 덕분에 간신히 손끝이 움직였다. 메리는 내가 또렷이 잠에서 깨기 전에 먼저 소식을 알렸다.

“서튼 씨, 랭던 공작님께서 의원을 보내셨습니다.”

“…의원을요?”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편지에 아프다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는데 랭던 경이 어떻게 의원을 보낸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다시 문밖으로 나간 메리는 의원과 함께 침실로 들어와 커튼을 젖혔다. 풍성한 흰 수염을 단정하게 손질한 노년의 신사가 왕진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환한 빛에 눈가를 찌푸리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의사는 일어나려는 나를 만류하며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누워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서튼 남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랭던 공작님의 주치의인 히스 퍼렐입니다. 퍼렐이라고 편히 부르십시오.”

“안녕하세요, 퍼렐 씨.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침대에서 맞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랭던 경께서 무슨 일로 퍼렐 씨를 보내셨나요?”

“서튼 남작님께서 편찮으신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군요. 확인해 보고 오라 하셔서 왔습니다. 진찰을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침 몸살기가 있어 감사한 일이긴 한데…. 랭던 경께서 어떻게 제 병을 아셨는지 모르겠네요.”

“편지를 받으셨는데 침대에서 못 일어난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눈이 온 걸 아셨을 거라고요.”

퍼렐 의원은 메리가 가져온 동그란 의자에 앉아 왕진 가방을 펼쳤다. 그는 내 발목과 손목에 남은 멍과 온몸에 번진 열을 확인한 뒤 준비해 온 약을 꺼냈다.

“약초로 만든 환약입니다. 열과 몸살에 좋고 피로를 해소하는 약이니 하루에 세 번 거르지 말고 드세요. 잠들기 전에는 이 시럽을 한 숟가락 드시고, 상처에 연고를 바르시면 멍이 빨리 수그러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퍼렐 씨, 랭던 경께는 제가 아프지 않다고 말씀드려 주실 수 있나요?”

“그러다간 제가 혼납니다.”

퍼렐 의원은 멋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어 보이고 네모난 왕진 가방을 챙겼다. 나는 다급히 메리를 부르려 종을 들었다.

“의원님, 수고비를….”

“아닙니다. 왕진비는 랭던 공작님께서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몇 배로 주셨지요.”

그는 벗어 놓은 납작한 모자를 쓰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메리를 따라 침실을 나섰다. 나는 커다란 베개를 침대 헤드에 대고 기대어 앉았다. 푹신한 베개가 등 모양을 따라 눌렸다. 랭던 경의 뒤틀린 욕망이 남긴 고통과, 자신이 남긴 고통을 돌보는 랭던 경의 성미를 내 부족한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프게 만들고 그 상처를 돌보는 걸까. 애초에 아프게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을.’

랭던 경의 배려에도 아버지는 한동안 열에 시달리는 나를 가끔 찾아왔다. 가까이서 나를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머리를 볼 때마다 팔다리가 통나무같이 뻣뻣해지고 뒷덜미가 굳었다. 그럴 때면 고통에 비명을 질러도 미처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입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리 공이 달린 재갈은 필요하지 않았다. 홀로 침대에 누워 외로이 공포를 삼키는 동안 의원이 주고 간 약이 환영에 시달리는 나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러나 랭던 경이 보낸 친절은 아버지의 환영을 흐릿하게 희석하여 육체의 고통을 무마시켰을 뿐, 상처받은 마음까지 달래 주지는 못했다. 침대 밖에서 몹시 사려 깊기도 한 그의 일면을 발견하면 할수록 나는 랭던 경과 침대에 단둘이 남아 뿌리를 알 수 없는 그의 어둠을 마주할 일이 두렵게 느껴졌다. 나의 고통과 괴로움이 폭군인 그가 정복할 땅이고 올라앉을 왕좌였다.

침대 위의 생경한 내 모습 또한 다시 맞닥트리기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아프기만 했다면 스스로가 이토록 낯설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랭던 경의 품에서 몸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울다가도 때로 남근이 주는 쾌락에 잠겨 흔들렸다. 남자에게 안겨 고통과 쾌락에 신음하는 스스로의 모습은 내가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다시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날것의 육신이었다.

혼란스러움 속에 몸이 절반쯤 회복되었을 때 노르크 수도의 눈도 반절이 녹았다. 겨울 해가 이 땅에 베푼 선의 때문이 아니라 밤낮으로 애쓴 길 위의 노동자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노동 덕에 마차는 눈이 정리된 길을 따라 다시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열이 반쯤 내린 나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호텔 거실에 앉아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간병이 익숙지 않은 도미닉의 돌봄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옆집 베넷 부인이나 어린 윌리엄이 아픈 나를 걱정하며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부드러운 애정에 무척 목말랐다. 수도에 떠도는 내 소문으로 인해 서튼가의 명예는 회복 불능이었고, 어머니의 사치가 남긴 빚으로 집안의 재정 역시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랭던 경과의 섹스에 대한 공포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아 그만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몸의 고통을 마음이 아픈 거라 착각하지 마.’ 도미닉이 자주 하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앞두고 있을 때, 도미닉에게 벌을 받아야 할 때 주문처럼 속삭이는 문장이었다. 늘 효과가 있던 그 문장이 오늘은 벽난로에 쌓인 재처럼 쓸모없게 느껴졌다.

“서튼 씨.”

“네.”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내리며 메리를 쳐다보았다.

“도미닉 서튼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돌연한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등이 쿠션에서 떨어졌다. 몸과 마음이 나약해진 차에 찾아와 준 혈육이 몹시 반가워 창백한 맨발로 카펫을 디디며 일어났다. 도미닉은 메리가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오며 모자에 쌓인 눈을 털었다.

“바람 때문에 눈이 묻었구나.”

“형님!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았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네가 잘 지내나 궁금해서 왔다. 몸이 아프다며.”

어떻게 알았는지 잠깐 의아했으나 하녀 메리가 새뮤얼에게 알렸을 듯해 질문 없이 도미닉을 맞았다.

“저는 괜찮아요.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 의자에 앉으세요. 메리 양에게 커피를 내 달라 할까요?”

“커피는 됐다. 메리, 따뜻한 허브티로 한 잔 가져와.”

도미닉은 영락없는 귀족의 말투로 명령했다. ‘메리 양’이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던 랭던 경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랭던 경과의 섹스가 힘들었다고 해서 그의 존경스러운 점까지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을 존중하고 노동의 대가를 확실히 지불하는 사람이었다.

메리는 하대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 없이 도미닉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네, 서튼 자작님. 서튼 씨께서도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아무것도 안 마셔도 돼요, 메리 양.”

메리가 차를 내오고 물러나자 도미닉이 입을 열었다.

“또 너를 서튼 씨라고 부르라 한 거냐.”

“…네.”

“너는 아랫것에게 너무 물러. 베넷이나 윌리엄은 네 이름을 막 부르질 않나.”

“…….”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니.”

“형님…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연락을 드리려고 하던 참이에요.”

“…….”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조급함에 이 일을 제가 너무 준비 없이 맡은 것 같아요. 생각보다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깨진 유리 파편을 모으듯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담았으나 도미닉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억세고 굵은 턱을 비스듬히 돌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약한 동생을 꾸짖는 듯한 반응에 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몸이 쉽게 떨렸다. 하나뿐인 피붙이의 한숨은 내게 혹한보다 두려운 것이다. 두르고 있던 담요를 꼭 여미며 도미닉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제가 몇 번을 더 참아 낸다고 해도 랭던 경에게 무엇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리고 프리데릭 경의 말처럼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라 혁명에 성공한다 해도… 저희에게 해가 될 게 있을까요?”

내 말의 끝자락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도미닉의 찻잔이 날아왔다. 열병으로 몸이 둔해져 평소처럼 피하지 못하고 이마에 잔을 맞았다. 따뜻한 찻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며칠 전 랭던 경과 보냈던 밤처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와 같은 눈물과 땀은 아니었으나 비참함이란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로엘, 우리는 귀족이야. 혁명이 성공하는 게 어떻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냐? 왕과 귀족은 뒷전이 되고 천한 평민들이 국가의 일을 결정한답시고 투표권을 행사할 텐데! 그건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샤를 대공은 그런 거지들에게 투표권을 적선해서라도 왕위에 오르고 싶겠지만 우리의 왕은 앨버트 3세뿐이다. 설마 너까지 아버지의 헛된 망상에 동조하는 건 아니겠지? 인간이 동등하다고.”

“…….”

“더구나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든 아니든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네가 새뮤얼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린 다시 체면치레에 필요한 부를 쥐고 일어날 수 있어. 네 감정 따위가 가문보다 중하다는 거냐?”

“형님, 하지만 랭던 경은…. 형님과 새뮤얼은 랭던 경을 알지 못해요. 저는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뒤틀린 욕망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고 저를 상처 입히길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랭던 경과 침대 위에 남는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해내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아요.”

나는 절박한 마음에 두 손을 꽉 맞잡고 도미닉에게 진심을 전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도미닉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한숨을 뱉었다.

“네 헛소리나 듣자고 먼 길을 달려온 게 아니야. 새뮤얼이 첫날밤 후 네게서 아무런 서신도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 랭던 경에게 그 뒤로 연락이 없는 거냐?”

“…연락은 왔어요. 의원도 보내 주셨구요.”

“그런 좋은 소식은 새뮤얼에게 바로 알려야지!”

“아니에요, 형님. 저는 너무 두려워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어요. 주일 후로 밤마다 열병에 시달리며 헛것을 보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어요.”

도미닉은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고민하듯 눈썹을 찌푸리고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누르다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얼굴에 쏟아진 찻물을 닦기 위해 뒤늦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 랭던 경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흠칫했다. 보드라운 천으로 물을 닦아 내고 죄인처럼 손을 모았다. 도미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우리 가족 전부 죽었어야 해. 다 내 탓이야.”

“형님….”

나는 도미닉의 앞에서 작아진다. 내가 아버지에게 한 짓 때문에.

“네가 아니라 내가 아버지의 목을 들고 프리데릭가로 가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는데. 아니면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자결하거나.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내 탓이야.”

자책하는 그의 말이 나의 죄책감을 칼날로 쑤셨다. 아버지의 머리가 담긴 상자를 껴안고 덜컹대는 마차에 올랐던 열여섯 살의 내가 지독히도 끔찍했다. 그 동냥질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는 해명은 도미닉과 어머니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긴 상흔은 내 상처 역시 덧나게 만들었다. 더는 마음에 슬픔을 담아 둘 공간이 없어 눈물이 넘쳤다. 도미닉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질책했다.

“울지 마라. 품위 없이. 그때 아버지의 목을 들고 가 서튼가를 보호해 달라고 구걸한 건 너야. 자결한 아버지의 목도 잘라 갔으면서 랭던 경과의 잠자리가 무섭다는 투정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버지의 목을 자르는 건 괜찮았나 보구나. 그랬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형님. 제가 엄살을 부렸습니다.”

랭던 경이 없는 자리, 그의 손수건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손끝과 따뜻한 혀 대신 손수건이 젖은 뺨을 훑었다.

“네가 에메랄드 저택으로 들어가 다칠 기회를 하루빨리 마련해. 그리고 새뮤얼에게 장소와 시간을 상세히 알려라. 그 전에 윌리엄을 데리고 한번 보러 오마. 꼴을 보니 몸이 허약해서 직접 와서 말을 타긴 무린 것 같구나.”

“네, 형님.”

도미닉은 아버지의 기억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지 나와 더 마주 앉아 있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도미닉을 호텔 로비까지 배웅 나갔다. 한번 들끓은 죄책감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뜨거운 수프를 엎지른 듯 가슴속이 무척 뜨겁고 괴로웠다.

다 내리지 않은 열 때문에 몸이 매우 쑤셨으나 내색하지 않고 코트를 여민 채 도미닉과 함께 마차가 오길 기다렸다. 우리는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모퉁이에 서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외진 자리였다. 응달이라 녹지 못한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 냄새가 섞인 겨울바람은 눈물이 마른 뺨을 사납게 훑었다.

“약속해 주신 대로 다음엔 윌리엄을 꼭 데리고 와 주세요. 한동안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집에 가긴 무리일 것 같아요.”

“꼭 데리고 오마. 제대로 할 수 있겠니? 또 약속을 어기려 들진 않겠지?”

“…못 하겠다고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거죠?”

“네가 흔들리는 듯하니 솔직히 말하마. 사실 그 선택지는 이미 내가 지워 버렸어. 네가 한 행위의 대가로 어제 돈을 약간 받았다.”

“그게 무슨… 얼마 정도….”

“백화점에 쌓인 빚이 있었다. 8만 골드. 네가 번 돈으로 그걸 갚았어.”

도미닉이 새뮤얼에게 돈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 행위의 대가. 내가 랭던 경과 자는 데 성공한 걸 빌미로 도미닉은 새뮤얼에게 8만 골드나 받은 것이다.

도미닉이 백화점이나 도박장에 드나드는 건 알았지만 외상을 하는 줄은 몰랐다. 그저 다른 귀족들과 최소한의 친분을 유지하려 방문한다고 알고 있었다. 도미닉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고, 속으로는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도미닉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느라 외상을 8만 골드나 지고 있었다니. 열병에 시달리는 몸에 날아든 절망스러운 소식에 내 마음은 기둥이 썩은 집처럼 주저앉았다.

“어쩌다 빚을 그렇게 지셨어요. 제 몸을 파는 일인데 그 돈을 받아서 상의 없이 다 쓰시면 어떡해요.”

힘없이 따져 봤지만 도미닉은 내 항의에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빚이 더 남아 있어. 그러니까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우리가 일어설 방법은 너뿐이야.”

“형님!”

“남아 있는 빚은 어머니가 남긴 거야. 작년에 다 갚았다고 했지만 네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금전 관계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도미닉이 다시 내 목을 괴로이 틀어잡았다.

어머니 역시 돌아가시는 때까지 귀족 생활을 포기하지 못했다고 도미닉에게 전해 들었다. 서튼가가 몰락하기 전과 같이 드레스와 장신구를 사들였다고.

도미닉은 영지를 팔고 또 팔아 빚을 갚았으나 끝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나를 향한 원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찾을 때까지.

마차가 천천히 우리 앞에 도착했다. 지난 몇 주간 랭던 경의 고급스러운 생활을 가까이서 접한 나는 그제야 도미닉이 빌려 타는 마차가 얼마나 비싼 종류인지 알아차렸다. 랭던 경의 마차보다는 못 하지만 금박 장식과 지붕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의자도 고급 벨벳이었다.

도미닉은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흩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떠나는 도미닉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 유리창에 유령처럼 하얀 내 모습이 길쭉하게 비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마차가 떠난 뒤에도 가만히 서서 겨울바람이 내 눈물을 훑어 가게 두었다. 힘이 없어 바람을 피할 기력마저 생기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기척 없이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라 몸을 떨며 뒤돌았는데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가 서 있었다.

단정히 넘긴 검은색 머리, 에메랄드빛 눈동자. 테런스 랭던 경이었다.

“랭던 경….”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던 사람인데, 도미닉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보니 두려움 대신 서글픔이 뭉글뭉글 밀려왔다.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섬세한 손끝이 눈가를 훑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 몇 번이나 내 눈물을 닦아 준 손이었다.

“로엘 씨, 왜 들어가지 않고 추운 길에서 울며 서 있어요. 자, 들어갑시다. 아픈 사람이 나와 있으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랭던 경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아 호텔 로비까지 부축했다. 그에게 기대어 흔들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걱정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못 걷겠으면 말해요. 눈이 녹아 마차가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당신을 만나러 달려왔는데 아직도 안색이 나쁜 모습을 보니 걱정이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저하.”

랭던 경은 나를 걱정했다. 가식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진심으로 챙기는 랭던 경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신의 성향을 이용해 고의로 접근하는 줄도 모르고, 몸을 섞은 상대를 염려해 의사를 보내 주는 정중함과 직접 들러 보는 사려 깊음에 죄스러웠다. 차라리 나빴던 첫인상대로 나를 침대 밖에서도 막 대하면 좋았을 텐데.

나는 랭던 경과 친분을 쌓을수록 침대 밖에서 눈에 띄게 부드러운 그를 발견할 때가 있었다. 고용인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도 그러했고, 나를 챙겨 주는 모습 또한 그러했다.

내 안위만을 생각하느라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만 했으나 기실 나는 더 일찍 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랭던 경은 내 행동이 능숙한 창부의 연기인 줄 알고 있을 뿐이니까.

랭던 경은 501호로 올라갈 때까지 침묵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얼굴을 확인한 메리가 바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랭던 공작님. 서튼 씨, 몸이 더 안 좋아지셨어요?”

메리가 걱정하며 묻자 그가 나를 소파에 눕히며 말했다.

“메리 양, 당분간 서튼 씨가 방을 나서지 못하도록 해 주시오. 날이 추우니 금세 기력을 잃는 듯합니다.”

“네, 랭던 공작님.”

“따뜻한 수프를 약간 가져와 주세요.”

“네.”

메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배고프지 않아요, 랭던 경.”

“수프를 좀 들고 시럽을 먹는 게 나을 듯해서 그래요.”

틀린 말이 아니라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반쯤 들고 있던 머리를 쿠션에 기댔다. 그는 내 옆에 걸터앉았다.

“아까 그 사람 누굽니까? 얼굴은 제대로 못 보고 뒷모습만 봤는데 로엘 씨가 그 사람과 몇 마디 나누더니 울더군요.”

“혹시… 대화를 들으셨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들었소. 로엘 씨를 찾아가던 길에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간 거라 그만…. 대화가 끝나고 말을 걸려 했습니다.”

랭던 경이 반듯한 이마를 좁혔다. 나는 그의 표정을 잘 읽지 못했지만 그가 언짢은 기분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해 어색한 침묵을 곱씹으며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탐색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서로를 해석하기엔 우린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사이였다.

“수프입니다. 차도 준비했어요.”

메리의 등장에 고요한 공기가 살짝 흔들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메리는 우리가 벗어 둔 코트를 정리해서 옷장에 넣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내가 일어나 앉자 랭던 경이 수프를 떠먹여 주려는지 직접 스푼을 그릇에 가져갔다. 나는 기겁하며 그를 만류했다.

“제가 직접 먹을 수 있습니다.”

“아, 미안해요. 가족에게 해 주던 습관이 있어서 그만.”

랭던 경은 처음으로 약간 당황하며 서둘러 스푼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1인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간병을 받았던 가족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누구를 그렇게 돌봐 주셨던 거예요?”

“전에 말한 남동생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여 곁에서 많이 돌봐 주었습니다.”

“…다정하시네요.”

랭던 경에게 죽은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떠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흘끗 본 후 직접 간단히 식사하고 시럽도 스스로 챙겨 먹었다. 그 시간 동안 다리를 꼬아 앉은 랭던 경은 턱을 괴고 말없이 찻잔만 쳐다봤다. 내리깐 눈매가 몹시 깊어 단단한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가 몸을 추슬러 앉자마자 그가 침묵을 거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로엘 씨, 몸이 아픈 건 알지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줘요. 내용에 따라 로엘 씨에 대한 내 판단이 아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도미닉과 내가 나눈 대화에 대한 질문일 게 분명했다. 대화에 새뮤얼 프리데릭의 이름이 나왔었나….

나는 열감으로 둔해진 머리를 움직이며 흘러간 대화를 빠르게 곱씹었다.

“아까 로엘 씨와 대화한 사람 누굽니까? 포주요?”

“…저의 친형님이세요.”

랭던 경의 미간은 신경질적이다 싶을 만큼 좁아졌다. 그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살짝 떼어 내고 나와 조금 더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섹스한 이후 처음으로 아름다운 녹색 눈을 가까이서 마주 봤다. 눈동자의 오묘한 색채와 정성 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가 자꾸 시선을 잡아끌어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얼굴의 근육들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지 길을 잃고 방황했다.

“친형이란 사람이 동생이 몸을 팔아 번 돈으로 품위 유지를 한단 말입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도미닉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부질없는 부정이었다.

“당신이 일을 그만두면 빚을 갚을 수 없다며. 동생에게 남창 일을 하라고 떠미는 사람을 형이라고 감싸는 겁니까?”

“…랭던 저하, 말씀이 지나치세요. 이건 저희 집안일입니다.”

나는 랭던 경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몸을 섞었다 해서 랭던 경이 서튼 집안에 참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 몸을 탐하고 나도 몸을 내어 줄 뿐, 다른 무언가를 공유하겠다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매끈한 턱을 만지며 눈을 돌렸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

“그럼 한 가지 더.”

“…네, 물어보세요.”

“윌리엄은 누굽니까. 로엘 당신, 애인 있어요?”

“네?”

윌리엄이 애인이냐는 물음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도미닉이 찾아온 후 버거울 정도로 뛰고 있던 심장 박동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윌리엄은 제 옆집에 사는 여섯 살 꼬마예요.”

“못 믿겠습니다. 창부의 입에서 나온 남자 이름인데 아래를 접붙인 자가 아닌지 어떻게 알죠?”

갑자기 또 울컥, 열이 치밀었다. 나는 랭던 경이 내가 이해하기 불가능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아픈 내가 걱정되어 의원을 보내 주고 직접 찾아오는 남자와, 방금까지 걱정하던 사람을 창부라고 모욕하는 남자의 간극은 내게 밤과 낮처럼 다르고 겨울과 여름처럼 멀었다.

“못 믿으실 거면 어째서 물어보셨어요.”

나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 당신 형이 윌리엄을 데려오면 핑계를 대서 내 저택으로 데려오세요.”

“랭던 경께서 제 애인도 아니신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제가 애인이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나는 처음에 타인과 어떤 것이든 공유하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랭던 경은 몹시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하시오. 그런 사람도 형이라고 감싸는 꼴을 보니 당신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도 못 믿겠습니다.”

“…….”

“로엘 씨도 이젠 잘 알겠지만 내게도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우를 사랑하는 형은 품에서 보호하다 실수로 다치게 하는 경우는 있어도 품에서 떠밀어 상처 입게 하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제가 그렇게 어리지는 않아요.”

“로엘 씨가 몇 살이지?”

“스물한 살입니다.”

“형은.”

“…서른 살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랭던 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랭던 경이 차에 손도 대지 않아 잔은 그대로 식었다. 도미닉이 내 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랭던 경은 화를 삭이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애인도 아닌 나를 왜 이리 신경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섹스하는 사람을 향한 무분별한 독점욕인 것만 같아 혼란스러움이 나를 아프게 에워쌌다.

그는 메리를 부르는 대신 직접 코트를 꺼내 입고 모자를 썼다. 손에는 내게 준 것과 비슷한 가죽 장갑을 꼈다. 그는 열병에 몸을 떠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돌연히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넓은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다 조심스레 그의 허리를 마주 껴안았다. 조용히 서로의 체온이 오갔다.

랭던 경은 안아 줄 때만큼이나 갑작스레 내 몸을 놓았다. 방금 전 뜨거운 포옹을 한 사람답지 않게 냉담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를 안고 있을 때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갑자기 궁금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어 마른침만 넘겼다.

“에메랄드 저택의 숲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다음에 같이 사냥을 합시다. 그 말도 전해 주러 왔어요.”

“친히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저녁에 의원이 다시 올 겁니다.”

“감사해요.”

랭던 경은 그대로 나가려다 다시 뒤돌아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내게 고개 숙여 키스하는 그의 반듯한 이마와 콧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성미를 못 이기고 상처를 준 데에 대한 사과 같은 정중한 손 키스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 보겠습니다. 부디 얼른 몸을 추슬러요.”

“감사해요. 손수건은 숲에서 만날 때 드릴게요.”

“로엘 씨가 가져도 됩니다.”

“…그래도 될까요?”

랭던 경이 없을 때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것이 기억나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머리를 짧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대가 거절하지 않으니 기쁘군요.”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아프니 배웅은 나올 필요 없습니다. 곧 연락하겠습니다.”

랭던 경은 따뜻하게 미소 짓고 문을 닫았다. 나는 이마를 문에 대고 섰다. 눈물이 뺨 위로 떨어졌다.

‘포주요?’ 랭던 경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게 퍼붓는 도미닉의 질책이 랭던 경에겐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미닉의 애정을 의심하지 않으려 솟구치는 질문을 애써 지워 보아도 랭던 경의 목소리가 금세 머릿속에 깃발을 꽂았다.

‘어린 아우를 사랑하는 형은 품에서 보호하다 실수로 다치게 하는 경우는 있어도 품에서 떠밀어 상처 입게 하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턱 끝에 고인 눈물들이 방울져 발등 위로 떨어졌다.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은 랭던 경이 나열한 단어 아래서 힘없이 허물어졌다.

도미닉을 향한 내 믿음은 이제 태풍에 휩쓸린 낡은 집에 불과했다. 애정에 목마른 나를 숨기려 지은 허술한 집이 거친 바람에 휘말려 부서질 듯 덜컹거린다. 창문을 깨고 들어온 흙이 눈꺼풀 밑에서 서걱거리고 태풍이 하나씩 뜯어 가는 나무판자 아래 초라한 내가 세상에 드러날 것만 같다.

‘아니야, 형님은….’

나는 계속 문에 머리를 기대선 채로 도미닉을 위한 변명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세상에 맨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석양이 방 안을 물들일 때까지 생각했으나 랭던 경이 납득할 만한 변명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것도.

결국 노르크의 해가 졌다.

***

랭던 경과 도미닉이 내 마음을 부수어 놓고 가자 차라리 아프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나는 한동안 조금만 음식을 먹어도 게워 내고 열이 올라 헛소리를 했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몸이 낫는 것이 오히려 더 아팠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종종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오늘 저녁에는 새뮤얼의 초대가 있었다. 랭던 경이 아픈 내게 의원을 세 번이나 보내 주고 사냥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린 뒤였다. 이 계획에 돈을 대고 있는 새뮤얼의 삼촌, 프리데릭 백작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다.

프리데릭 백작은 랭던 경이 사냥 약속을 잡고 병문안까지 직접 간 창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노르크에 남창으로 소문난 지 오래였고, 그 거짓은 우리 형제의 결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프리데릭가로 향하는 밤은 5년 전처럼 추웠다. 의원은 찬 바람을 쐬지 말라고 했지만 다시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거리낌은 없었다. 새뮤얼에겐 물어볼 것이 많았다. 도미닉이 돈을 받은 일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새뮤얼은 ‘그 살롱’에서 나를 맞았다. 상자를 들고 찾아왔던 날, 나를 보던 신사들의 눈빛이 생각나 가슴속이 메슥거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가구와 장식이 모두 최근에 유행한 스타일로 바뀌어 저택의 내부가 그날의 기억과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새뮤얼, 오랜만이에요.”

그는 데면데면한 얼굴이더니 내가 이름을 불러 주자 입꼬리를 저질스럽게 씰룩였다.

“잘 지냈나, 로엘.”

“보시다시피 잘 지내고 있어요.”

“고생깨나 했다고 들었어. 수도에 로엘 서튼이 랭던 경과 잤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내가 연습시켜 준다니까.”

새뮤얼이 또 내 허리를 감싸며 치근대듯 말해 가볍게 팔을 밀어 냈다.

“랭던 경이 아니면 싫어요.”

“빌어먹을. 또 앵무새 같은 소리군.”

이 일로 소득 없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아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프리데릭가의 정찬에는 내가 잊고 있었던 낯익은 이름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모두 명망 높은 귀족이었다. 또한 가문의 위치를 과시하느라 평생 갚을 수 없을 금액의 차용증을 떠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실 노르크의 모든 귀족이 그랬다. 앨버트 3세가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 도미닉이 진 8만 골드의 빚은 저자들의 사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귀족들 사이에 앉아 힘없이 정찬을 들며 도미닉을 위해 간신히 찾아낸 작은 변명을 반복해서 뇌까렸다.

마지막 디저트로 케이크와 파이, 쿠키를 들기까지 식사는 길고 지루했다. 불편한 식사의 원인은 나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었다. 랭던 경의 정찬에 초대되었을 때와 달리 이제 나는 그들의 눈빛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무시, 멸시, 호기심, 색욕.

맞은편에 앉은 남작이라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내게 관심을 보이며 집적거렸다. 초점 없이 흐린 변태 같은 눈빛과 음식으로 채운 두툼한 볼이 나를 기분 상하게 했다.

어느 가문이든 노르크의 저녁 풍경은 비슷했다. 포커 게임을 하고 여송연을 태웠다. 나는 새뮤얼의 삼촌과 같은 테이블에서 카드를 들었다. 그는 중년의 남자로 뾰족하게 올린 콧수염이 매우 경망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게임을 한 시간 정도 진행했을 때 프리데릭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튼 경, 잠깐 같이 여송연을 태우며 얘기를 나누실까요?”

“네, 좋습니다.”

새뮤얼과 나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가 백작과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여송연을 천천히 빨며 프리데릭가의 서재를 훑어봤다. 랭던 경과 발코니에서 처음 얘기를 나눴던 날이 생각났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밤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시렸었다. 나를 보던 그의 눈빛도.

“랭던 경과 약속은 정했다고 들었소.”

“네. 다음 주일에 랭던 경과 숲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랭던 경이 의원까지 보내 주었다고?”

“감사하게도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 차가운 랭던 경도 서튼 경의 외모엔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오.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군.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점만 닮았어.”

백작은 꼬부라진 콧수염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부모님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의 칭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을 내게서 선물로 받아 간 프리데릭 가문이 부모님을 입에 올리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그 일이 벌어졌던 본인들의 저택에서.

프리데릭 백작이 물었다.

“의심스러운 건 못 찾았나?”

“네,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저택 밖에서만 만나는 사이일 뿐입니다.”

“이번에 자유주의자가 조직한 혁명군이 새로운 무기를 들여왔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무려 6연발 총이. 들어 본 적 있나, 서튼 경?”

“4연발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

“1분에 두 발을 더 쏠 수 있으니 가격이 4연발 총의 열 배요. 무기는 수표로는 거래하지 않소. 오직 현금이지. 그 총을 들고 혁명군이 수도로 진군하면 아무리 수가 적다 해도 앨버트 3세의 수도군은 꼼짝도 못 하고 당할 거요. 요즘은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전쟁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게 우리가 자유주의자들의 돈줄을 자르려는 이유요. 귀족들 대부분이 빚더미 위에 앉은 지 오래라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사업가인 랭던 경뿐이오.”

“랭던 경께 그런 재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분은 부르주아를 아주 경멸하세요.”

백작은 시가 연기를 오래도록 입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 냈다. 그는 서재 한구석으로 가 검은색 가죽으로 덮인 책을 하나 꺼냈다. 수백 장의 종이가 엮인 책은 무게감 있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알고 있소. 테런스 랭던 공작은 귀족 중의 귀족이지. 남동생이 평민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의지를 꺾지 않자 결국 총으로 쏴서 죽여 버렸거든.”

“…네?”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크게 열린 내 동공의 떨림이 느껴졌다.

“자신의… 동생을요?”

“몰랐소? 하긴 그 일이 있었을 땐 서튼 경이 어렸겠군. 그래서 우리도 랭던 경이 정말 자유주의자인지 확실히 확인하려는 겁니다. 만약에라도 자유주의자라면 증거가 필요해요. 증거 없이 건드리기엔 너무 힘 있는 사람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왕인 앨버트 3세보다도 부담스럽고, 서열 1순위인 샤를 대공보다도 껄끄러운 사람입니다. 잘못 건드리면 어떤 가문이든 끝장을 내 버리겠지.”

“랭던 경께서… 동생을요?”

프리데릭 백작이 내뱉는 다른 얘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랭던 경이 도미닉보다 훨씬 더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었을 거라고 내심 생각해 왔다. 갑작스레 깨진 믿음에 랭던 경을 향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랭던 경은 도미닉과 내 사이를 걱정하며 진지하게 형제 관계에 대해 충고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중해서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나는 떨리는 입술로 여송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뱉으며 스스로를 설득하듯 작게 읊조렸다.

“그저 소문이겠죠.”

“소문이라니. 그 일은 한낱 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입니다. 테런스 랭던은 자신이 아우를 죽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그 일로 재판까지 열릴 뻔했지만 바로 직전에 명예 살인인 것을 인정받아 법정에 회부되지 않았소.”

“랭던 경이… 그런….”

형은 어린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자신은 아우가 평민을 사랑한다고 총으로 쏴 죽였단 말인가? 자신이 형이기 때문에 아우의 목숨 따위는 직접 거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점점 커지는 배신감에 시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본인은 직접 아우를 죽였으면서 도미닉을 그토록 비난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랭던 경의 동생에 대해 곱씹던 나는 이내 새뮤얼이 나를 고른 이유가 하나 더 존재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목구멍이 바싹 당겼다.

“그것이 랭던 경과 저의 공통점이라 생각하신 거군요.”

백작이 새뮤얼을 흘끗 쳐다봤다. 새뮤얼이 야비한 표정으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인정했다.

“새뮤얼에게 들은 대로 상당히 영리하군요. 맞소. 당신은 자유주의자의 핏줄이고, 그의 둘째 아들이며, 서튼의 목을 직접 잘라 남작 지위를 유지한 사람이지. 당신이 랭던 경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인계는 그만두고 차라리 샤를 대공을 치려 합니다.”

“랭던 경이 대공보다 더 중요한 모양이네요.”

“당연하오. 그는 왕족보다 더 귀중한 노르크의 공작이고 철도 부호입니다. 처음 그가 철도사를 세웠을 때 귀족들은 공작이 사업을 시작했다며 비웃었지만 알다시피 결과는 이렇게 되었어요. 세상은 짧은 시간 안에 바뀌었고 랭던 경의 선택이 옳았소.”

“하지만 남동생을 죽인 사람이 자유주의자일 리가 없지 않나요. 이미 귀족들의 편이 분명한데 어째서 자유주의자인지 의심하고 확인을 하려는 건가요?”

프리데릭 백작은 내 질문이 불편한 듯 타이를 잡아당기며 약간 느슨하게 만들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건 마음에 걸리는 부분 또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명망 높은 가문과 달리 랭던가는 혁명군을 막으려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협조한 적이 없어요. 재정적으로는 물론이고 아예 관심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거요.”

겉보기엔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 같지만, 자유주의자들을 막으려는 귀족 세력에게 협조한 적도 없다.

스스로가 공작이면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를 택했다는 사실이 어떤 점에선 참으로 테런스 랭던 경다웠다. 귀족이면서 사업가이고, 공작가의 장남이면서 남색가인 그의 기행과 맞아떨어지는 처신이었다. 프리데릭 백작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다시 깊은숨을 뱉었다.

“랭던 경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오. 그가 자유주의자라면 우리는 하루빨리 그를 막아야 하고,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 편으로 반드시 포섭해야 합니다. 그래야 혁명군에 대적할 자금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랭던 경과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지금처럼 꺼려지지도 않겠죠. 그러니 우리가 랭던 경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당신이 증거를 찾아 줘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에메랄드 저택에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해 주었으면 하지만 특별히 이와 비슷한 물건을 찾아 주었으면 하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가 조금 전 꺼낸 책을 내려다봤다. 검은색 가죽에는 랭던가의 나뭇잎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가죽을 넘기고 빳빳한 수백 장의 종이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거기엔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장마다 필체가 달랐다.

“랭던 경의 개인 장부로군요.”

“저택에 혹시 비밀 장부가 있다면 그가 개인적으로 돈을 어디에 쓰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거요.”

“이건 어디서 구하셨어요?”

“심어 둔 하녀가 훔쳤습니다. 저택 밖으로 몰래 빼돌려 몇 시간 동안 수십 명이 베껴 적고 되돌려 놓았소.”

“장부에 이상이 없었나 보네요.”

“아주 깔끔합니다. 본인에게 해가 될 내용까지 다 쓰여 있지.”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고요히 타들어 가고 있는 여송연을 물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이 계획에서 제일 겉돌고 있는 건 가장 몸을 깊숙이 담고 있는 나 자신이다. 귀족들도, 앨버트 3세도, 샤를 대공도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이 일은 점점 내게 사적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백작이 알려 준 고통스러운 정보가 알싸한 여송연 연기와 함께 입 속에서 까끌거렸다.

‘테런스 랭던 경은 동생을 죽였어. 자신의 아우를, 그것도 직접.’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듯 보였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연기력에 치가 떨렸다. 배신감이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듯했으나 벌어진 입술 틈에선 여송연 연기만이 뿌옇게 흘러나왔다.

나는 먼저 서재를 빠져나왔다. 곧바로 등 뒤에서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새뮤얼이 뒤따라 나와 있었다. 새뮤얼은 물었다.

“로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랭던 경과 키스는 했나?”

뜻밖의 질문에 머리가 멍해졌다.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 들어 침을 힘겹게 삼키고 최대한 태연히 답했다.

“아니요.”

“아직 키스도 안 하다니…. 젠장, 랭던 경이 과연 너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 정도로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로엘, 너는 키스의 의미를 모르는구나. 그건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에겐 반드시 하는 거야. 섹스할 때 키스조차 하지 않는다면 네가 애써 다친다 해도 랭던 경이 에메랄드 저택 밖으로 내보낼지도 모르겠군.”

“그럴 리가 없어요. 그분은….”

내가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이 새뮤얼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복도에 홀로 먹먹히 서 있다 등을 돌렸다.

마저 다른 귀족들과 어울려 포커를 치고 늦은 시간 마차에 올랐다.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돌바닥을 치는 소리가 귓전을 시끄럽게 울렸다.

호텔에는 예상대로 랭던 경의 편지가 와 있었다. 서신은 끊임없이 주고받고 있었으므로 오늘쯤 편지를 보내올 거라 예상했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바로 편지를 뜯어 넓은 창가로 갔다. 붉은 커튼 사이로 밤하늘의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아름다운 서체를 비췄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씨에게.

매서운 바람에 걱정이 쌓여만 가던 요즘, 병마가 그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지난번 호텔에서 만난 뒤로 내게 보내는 당신의 편지글이 부쩍 냉담해진 것 같소. 그때 내가 했던 말들은 오직 당신을 위한 마음에서 나온 염려였음을 알아주길 바라오.

나는 불같은 성격으로 로엘 그대를 상처 입힐 때가 있지만 서신으로는 내 성미를 죽이려 애쓰고 있습니다. 편지의 로엘 씨는 나와 정반대인 듯하니 우리는 북과 남, 동과 서처럼 균형이 맞는지도 모르겠소.

그대와 숲에서 만나기로 한 날도 어느덧 사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요즘 부쩍 주일을 기다리고 있어요. 주임 신부님의 지루한 강론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 믿소(질문하며 이미 언급했다는 사실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길 바랍니다. 당신이 소개해 줄 윌리엄이라는 아이와의 만남도 몹시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깊은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로엘, 그대는 손이 차니 어디를 가든 내가 준 장갑을 잊지 않길 바라오.

매일 당신을 걱정하는,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나는 창가를 서성이며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동생을 총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달콤한 문장들이 가식으로만 보였다.

나도 모르게 편지를 구겼다. 벽난로로 타박타박 걸어가 던져 버리려다 불 앞에서 간신히 손이 멈췄다. 심호흡을 하며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편지를 다시 폈다.

서재를 향해 가는 내 발소리가 외로이 울리다 멎었다. 나는 구겨진 그의 편지를 최대한 판판하게 펴서 서신이 보관된 서랍에 넣었다. 차마 태워 버리지 못했다.

“하….”

두통이 일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잠시 서 있다가 잉크병을 들었다. 잉크가 말라붙었는지 오늘따라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힘껏 돌리다 갑자기 병이 열리는 바람에 검은색 잉크가 절반이나 책상에 쏟아졌다. 다행히 책상 깔개 위였지만 난처했다.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메리를 부를 기분이 아니라 잉크를 훔치려 직접 마른 헝겊을 들었는데 고인 잉크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뚝, 뚝…. 잉크 위로 번지는 빗방울은 내 눈물이었다. 나는 눈물을 무시하고 담담히 잉크를 닦아 낸 후 깔개를 치웠다.

늘 입으로는 랭던 경이 오만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며 흉봤으나 어떻게 자주 만나는 사람에게서 나쁜 점만을 봤겠는가. 내게도 그를 향한 기대와 신뢰가 없지 않았고, 그중 하나는 랭던 경이 도미닉의 폭력 앞에 놓인 나를 진심으로 염려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우를 사랑하는 형이었을 거라는 짐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랭던 경과의 만남까지 마음을 추스르고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도록 연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민한 그는 내게 일어난 동요를 쉽사리 눈치챌 것이다.

병을 기울여 절반도 남지 않은 잉크에 펜을 담갔다가 뺐다. 랭던 경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제 몸은 이제 깨끗이 나았으니 더는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숲에서 뵙기로 한 약속은 저도 몹시 기다리고 있어요. 에메랄드 저택의 아름다운 숲을 구경하며 사냥을 할 주일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는 중입니다. 제가 총을 잘 다루지 못해….

‘총’이라는 단어를 쓰고 나는 잠시 떨리는 호흡을 정리했다. 랭던 경이 동생을 총으로 죽였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랭던 경께서 답답하시지는 않을까 무척 걱정됩니다. 윌리엄은 숲에서 사냥을 하기 전에 실내에서 잠시 만나 주세요. 다들 어린 남자아이에겐 총을 보여 줘도 괜찮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물건을 가까이서 봐도 되는지 항상 의문을 품고 있답니다.

그럼 숲에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작은 마음을 담아, 로엘 서튼으로부터.

편지를 봉투에 넣고 몸을 깨끗이 씻은 뒤 침실로 가 누웠다. 무척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 창문으로 눈을 두었다.

유리에 작은 점이 콕 날아들었다. 처음엔 드물게 날아오던 하얀 점은 이내 보송한 눈이 되어 노르크의 검은 밤하늘을 하얗게 덮었다.

랭던 경과 그의 동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눈을 응시했지만 잡념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나는 여태 랭던 경의 말만 듣고 그가 도미닉보다 더 자상한 형이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랭던 경은 결코 도미닉보다 나은 형이 아니었고, 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도미닉에게 죄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랭던 경이 동생에게 저지른 짓을 곱씹는 내내 가슴 속에 이유 모를 쓸쓸한 바람이 휘돌았다. 수도의 화려한 호텔에 머물고 있지만 나의 기분은 외곽에 두고 온 내 집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은 감정이 명치에 먹먹하게 고였다.

‘…외롭다.’

나는 어둠에 잠겨 나를 외롭게 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처럼 내 가슴에도 테런스 랭던이라는 이름이 시리게 쌓였다.

<2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