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날밤
나는 남는 시간을 노르크의 수도를 구경하는 데 사용했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거창한 나들이는 아니었다. 마부가 없어도 목적지에 찾아갈 수 있도록 수도의 길을 외워 두는 작업에 가까웠다. 근교에 살 때는 걸어 다니거나 직접 말을 타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수도에 온 후 매번 마부를 불러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이 번거롭고 불편했다.
날씨가 몹시 추워 목을 녹일 겸 근처의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작은 소품을 파는 상점이었는데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 수 있는 장식품이 여러 점 있었다. 성탄절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무 바구니에 놓인 물건들을 살피다 베넷 부인에게 선물할 은색 종과 따뜻한 목도리 두 개를 구입했다. 목도리 하나는 도미닉에게 보낼 예정이었다. 편치 않은 형제이기는 하나 나를 생각해 주는 유일한 가족이었으므로 외로운 나는 언제나 도미닉에게 마음이 쓰였다.
다른 목도리 하나는 내 목에 둘렀다. 랭던 경이 목을 깨문 탓에 생긴 울혈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가 남긴 자국은 목선을 따라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다.
물건이 담긴 갈색 종이봉투를 쥐고 나오다 신문을 파는 소년과 마주쳤다. 동전을 주고 신문을 사서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허브티를 주문했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적당히 우려낸 허브차를 음미하며 신문을 폈다.
베버릭(Beverick) 왕국이 노르크 왕국의 남쪽 해안을 불법 점거하여 어부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앨버트 3세께서는 노르크의 해안선을 지킬 수 있도록 수도군을 사우스라인 지역에 추가로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병력을 계속 보내면 수도는 괜찮을까. 저번에도 사우스라인으로 파병했는데….”
왕실은 현재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는 상황이라 군사력을 보강하지 못하고 매번 수도군을 이 지역 저 지역으로 파병하는 상황이었다. 귀족들이 세금을 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특권층의 방어는 단단했다.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우리를 의회로 들여보내 달라는 평민들의 원성은 굳건한 귀족 국가의 성벽 앞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신문은 어디를 펼쳐도 국가의 재정난을 덮기에 급급했다. 희망적인 기사는 앨버트 3세의 사촌인 샤를 대공에 관한 글이 유일했다. 샤를 대공은 왕위 서열 1순위이자 매우 명망 높은 사람으로, 몇 년 전 빈민 구제를 위한 자금 기구를 마련하며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어울린다는 소문도 평민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져 있었는데 그 또한 샤를 대공의 인기가 높아진 요인 중 하나였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귀족들은 샤를 대공을 등에 업은 자유주의자들이 왕권을 교체하는 혁명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그런 샤를 대공에게 자금을 대는 인물이 노르크 철도의 주인, 랭던 공작이라면… 귀족들에게 그보다 끔찍한 가정은 없을 터였다. 새뮤얼 프리데릭이 겁에 질리는 게 당연했다.
랭던 경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평등과 자유를 택할 만한 인격이 있는지를 따지는 건 닥쳐올지 모를 혁명 앞에 큰 의미가 없었다. 빈민 구제 자금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가 샤를 대공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새뮤얼은 나를 이용해 돈의 흐름을 쫓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사를 모두 읽고 신문을 치운 순간 맞은편 소파에 앉은 도미닉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크게 들썩였다. 도미닉은 내 반응이 창피한지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봤다.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형님, 놀랐습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냐, 로엘. 창피하게 소리까지 지르고.”
겨울이 시작되었지만 도미닉은 햇볕을 많이 쬐었는지 피부가 적당히 그을려 안색이 훨씬 좋아 보였다. 어쩌면 그 생기는 어두워진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근교의 작은 집에서 죽어 가던 그의 눈빛에 새뮤얼이 불어넣은 희망 덕인지도 몰랐다.
“기척 없이 갑자기 앞자리에 앉아 계시니까요.”
심장이 소리가 들릴 정도로 뛰어 댔다. 소란한 박동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괜히 신문을 필요 이상 작게 접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새뮤얼이 로엘 네게도 사람을 붙여 놨다.”
“그랬나요? 프리데릭 경은 제가 어디 특별한 데 가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수고를 하네요.”
“그 사람과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니. 목에 남은 자국이 그 사람의 것이냐?”
“…그런 얘기는 형님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불편해서요.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고만 말씀드릴게요.”
도미닉은 이런 종류의 맹랑한 말대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몹시 혼나게 되는 상황만 아니라면 나도 눈치껏 할 말은 하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도미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폈다.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 참아 주는 듯했다. 도미닉이 말했다.
“새뮤얼이 너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더구나. 랭던 경이 너에게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만난다면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지 말이야.”
“어떤 방법을 생각해 두셨는데요?”
“새뮤얼은 네가 그의 집에 있을 때 다쳤으면 한다. 누군가 자신의 집에서 다치면 충분히 나을 때까지 돌봐 주는 것이 귀족의 예의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다쳐야 한다…. 새뮤얼의 제안이었을까? 아니면 도미닉의 제안이었을까?
“…얼마나 오래 머물러야 할까요?”
“한 달은 몸져누워야 할 정도. 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위험하지 않은 부위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거나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사고를 입어야 해.”
“제가 직접 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을 붙여 줄까?”
그렇게 묻는 형의 시선을 물끄러미 살펴봤으나 검은 눈동자엔 아까와 똑같은 생기만이 존재했다. 걱정의 빛을 기대했던 마음이 실망감에 젖어 밑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이 계획이 도미닉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라 해도 상관없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랭던 경의 집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서랍까지 하나하나 다 뒤져야만 끝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도미닉이 자신의 형제가 다쳐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신경 쓰길, 걱정해 주길 바랐을 뿐이다.
새뮤얼의 계획이 하나씩 실행될수록 나는 도미닉에게 조금씩 의심이 싹튼다. 형이 무표정 뒤에서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을 거라는 그간의 믿음이 정말 맞는 걸까, 그런 의심. 그럼 지금까지의 훈육과 체벌은 다 뭐였을까, 그런 의문.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댔다.
“사람까지 붙여 주실 필요는 없을 듯해요.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신경 쓰이니까요.”
“나도 네가 직접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할 수 있겠니?”
“네, 걱정 마세요. 아픈 것은 잘 참는 편이니까요.”
“그래. 나도 네가 잘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참, 베넷의 손자가 다음 주에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도미닉은 랭던 경과 달리 베넷 부인과 같은 평민에겐 절대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윌리엄이 드디어 이모 집에서 돌아오나 보네요?”
“그래. 네가 예뻐하는 아이니 집에 와서 쉴 때 셋이서 같이 말이라도 타러 나갈까? 윌리엄에게 말 타는 법을 알려 주고 싶다며.”
따뜻한 제안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수면 위로 살짝 떠올랐다. 도미닉의 성격이 다소 차갑고 무심하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는 나를 생각한다는 안도감. 저녁 무렵의 굴뚝 연기, 오븐에서 막 꺼낸 따끈한 빵의 온도 같은 포근함.
“저야 좋아요.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실래요?”
“아니. 새뮤얼을 만나기로 해서.”
도미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높이가 있는 화려한 실크해트를 썼다. 서튼가의 형편을 고려해 보면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새 모자였다. 내가 의아함을 드러내기 전에 도미닉이 먼저 코트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새뮤얼의 서신이었다.
“읽어 봐라.”
“네. 아참, 형님. 상점에 들렀다가 형님이 생각나서 목도리를 하나 샀어요.”
나는 낮은 의자에 놓아둔 갈색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도미닉은 봉투 안을 대충 확인했다.
“고맙다.”
“다음 주에 집에 들를게요.”
도미닉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차가운 바람이 잠시 들어왔다가 벽난로의 온기 속에 섞였다. 나는 식은 차를 마저 마시고 책방에 들러 소설 한 권을 구입한 뒤 호텔로 걸어가며 새뮤얼의 서신을 읽었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경에게.
로엘, 지난번에 무례하게 군 일을 사과하기 위해 펜을 들었네.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주었으면 해.
우리는 랭던 경이 최근에 시가 150만 골드의 금괴를 해외로 반출한 사실을 알고 추적했으나 정확한 경로를 쫓는 데는 실패했어. 랭던 철도사와 거래하는 해외 철도사가 여럿 있기 때문에 사업 자금인지 자금 세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해외엔 대표적으로 리스트(List)와 도버(Dover)라는 철도사가 있다네. 그러나 모두 심증뿐, 제대로 된 물증이 없어서 나날이 초조해지는 중이야.
랭던 경은 증거 없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네. 로엘 네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 주길 고대하고 있어. 날이 몹시 추워졌군. 건강에 주의하고 연습도 잘되길 바라네.
당신의 벗, 새뮤얼 프리데릭으로부터.
추신. 랭던 철도사에서 이번 주말에 새로운 기차를 선보일 예정이라 많은 귀족들이 초대받았어. 로엘 너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랭던 경의 초대를 받지 못한 것 같군.
새뮤얼의 사과 따위는 추신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다. 추신의 내용은 랭던 경에게 해 준 구음이 내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그에게는 서툰 창부와 가진 하나의 일화에 불과하다는 증거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랭던 경에게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야 했는데.
호텔방으로 가자마자 새뮤얼의 서신을 찢어서 벽난로의 불길에 던져 버리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서둘러 종이를 꺼내 뻑뻑한 잉크병 뚜껑을 돌렸다. 펜촉을 잉크에 부주의하게 푹 담갔다 꺼내는 바람에 종이 위에 동그란 검은 자국이 떨어져 번졌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노르크의 거리에는 이른 크리스마스의 설렘이….
몇 자 더 적어 넣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실로 쿵쿵 걸어가 벽난로에 종이를 집어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새 종이를 펼치며 심호흡을 깊게 했다. 잉크에 적신 펜으로 그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다시 적어 넣는데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메리가 대답을 하며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 문을 두드렸다.
“서튼 씨, 랭던 공작님께 서신이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바닥을 시끄럽게 긁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불안이 급하게 반응한 것이다. 교양 없이 행동하지 않으려고 애써 침을 꼴깍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간신히 서두르지 않고 걸어가 메리에게 편지를 받았다.
“고마워요, 메리 양.”
조용히 문을 닫고 벽에 기대선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봉투를 급히 뜯지 않고 봉랍에 남은 랭던 가문의 인장 모양을 살펴보았다. 동그란 봉랍에는 ‘Terrance Langdon’이라는 작은 글씨와 나뭇잎 그림이 남아 있었다. 의외로 소박한 랭던가의 상징을 손끝으로 만져 보다 조심히 붉은 봉랍을 뜯어냈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씨에게.
날씨가 몹시 추워졌는데 그대가 그사이 감기라도 얻었을까 걱정입니다. 주일에는 당신의 몸에 남은 자국에 화가 나서 관계도 제대로 맺지 않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 못 해 준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와 후회했소. 내 입은 자주 사람을 공격하고 못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경향이 있으니 서튼 씨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주길 바랍니다. 너무 이기적인 바람이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자주 서튼 씨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노스턴 역에서 새로운 기차를 공개할 예정인데 많은 사람이 몰릴 듯합니다. 행사에 초대하려고 했으나 고민해 보니 그보다는 밤에 단둘이 기차를 구경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서튼 씨가 수락한다면 주일 밤에 마차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저녁 보내시오.
다시 만나길 고대하며,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추신. 연습은 잘되어 갑니까? 나는 참을성이 없어 또 후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빠르게 읽은 뒤 우아한 글씨체를 다시 한번 정독했다. 특히 ‘후회했다’라는 문구는 철자를 맞게 읽은 건지 의심스러워 유심히 봤다. 독하고 못된 말을 서슴지 않는 공작 저하께서 후회 같은 걸 했다는 소리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서신을 쓸 때만 귀족의 품격을 갖추는 것이지,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나 그래도 듣기 썩 나쁘지 않았다.
편지를 또 읽으며 책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날랬다. 내가 주일에 겪은 모욕적인 일이 헛된 짓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내게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그와의 만남 후, 밤이 되어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있을 때면 수치심과 후회를 참아 내기 어려워 매일 베갯잇을 적시며 잠들었다. 연락까지 오지 않으면 희망을 품고 있을 도미닉에게 무어라 소식을 전해야 하나, 무거운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르던 차였다.
책상에 앉으며 급하게 놓고 일어났던 펜을 들었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노르크 수도의 거리에는 이른 크리스마스의 설렘이 가득하네요. 랭던 경의 저택도 마찬가지일까요?
주일에는 본의 아니게 저하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습니다. 아직 저하의 취향을 배우지 못해 무례를 범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저는 나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재주는 없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혹여 가슴 속에 상처가 쌓이더라도, 저하께서 그 상처를 확인해 보시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실 텐데 과연 그때까지 저를 만나 주실까요?
새로운 기차를 구경하자는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를 다 읽고는 뛸 듯이 기뻤답니다. 그럼 주일 밤에 보내실 마차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마음을 담아, 로엘 서튼으로부터.
추신. 연습을 했는지는 저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봉투는 봉랍으로 밀봉하고 메리를 불러 심부름꾼에게 전해 주길 부탁하였다. 랭던 경의 편지는 맨 위 서랍에 보관하고 열쇠로 잠갔다.
주일에 랭던 경에게 상처를 받은 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었던 나는 아무도 호텔방에 들어오지 않기를 당부한 뒤 침실 문을 잠갔다. 침대의 커튼까지 꼼꼼히 치고 나서야 그 상스러운 물건을 꺼내 볼 용기가 났다. 새뮤얼이 상당한 크기로 구입했음이 분명한 남근의 모조품은 다시 보니 랭던 경의 것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의 크기였다.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외설스러운 행동을 하려니 몹시 창피했으나 이 정도를 쉽게 넣지 못하면 랭던 경에게 구음을 제대로 해 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습은 반드시 필요했다. 실력을 늘리겠다 랭던 경과 약속을 하기도 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허리를 숙여 조각을 입에 넣었다. 딱딱하고 다소 차가운 온도의 물건이 혓바닥과 입천장에 닿았다. 구역질을 참고 절반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랭던 경이 얘기했던 대로 더 삼켜 보려고 애썼으나 목에 힘이 들어가 생각과 달리 자꾸만 튀어나왔다.
침으로 질척해진 모조 성기를 빼내며 입가에서 늘어지는 침을 소매로 문질문질 닦아 냈다. 다시 시도하는 동안 몇 번이나 헛구역이 치밀었으나 이번에는 토해도 넣겠다는 각오로 참았다.
“읏… 흡….”
목 안쪽에 닿는 역겨운 조각을 빼내지 않고 숨을 겨우겨우 들이켰는데 문득 그의 살냄새가 생생히 떠올랐다. 단단히 발기했던 페니스의 온도와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힘 있는 손가락도. 랭던 경의 것처럼 두껍게 튀어나온 혈관이나 굴곡이 없는, 진짜 성기와 확연히 다른 이 모조품은 내 피부를 붉게 물들이던 열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읍….”
깊숙이 들어와 있던 남근의 모조품을 다시 빼냈다. 구역질을 하도 해 눈가가 조금 충혈되었다. 나는 랭던 경의 페니스를 다시 떠올리며 조각을 물었다. 스스로 움직이며 그가 내 머리를 쥐고 흔들던 박자와 강도가 어땠는지 곱씹고 그 손길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라고 했던 명령이 기억났다. 나는 고통에 질끈 감고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떠 봤으나 시야엔 커튼 자락과 흔들리는 가스등의 불빛만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녹색 눈동자를 대신하기엔 턱없이 공허한 풍경이었다.
‘과연 그 큰 것을 내 안에 품을 수 있을까.’
나는 입에 박혀 있던 조각을 빼냈다. 망설이다 손가락에 침을 적셔 엉덩이 근처로 가져가 보았으나 도저히 내 몸에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수치심에 손이 허공만 맴돌 뿐,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말라 버린 손가락을 몇 번이나 다시 빨았으나 결국 한 마디도 밀어 넣어 보지 못하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몸이 아픈 걸 마음이 아프다고 착각하지 마.’ 도미닉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이마에 손등을 올리고 힘없이 누워 내 그림자가 일렁이는 천장에 눈동자를 붙박았다. 모조 성기를 억지로 밀어 넣긴 했지만 주일에 있었던 거친 구음의 후유증에 비하면 목구멍의 통증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실제 구음과 모조 성기를 빠는 통증의 차이를 가늠하다 성교는 미리 연습하지 않기로 했다. 구음을 연습해 보고서야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남자와 미리 연습을 해야 하는지, 모조 성기로라도 혼자 어떻게든 해 봐야 하는지, 그런 고민들.
이런 모조품으로 랭던 경과의 성교를 연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섹스를 경험한 적이 없는 몸이지만 그와 잠시 살을 맞대고 구음해 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떤 남자와 섹스해도 랭던 경과의 섹스와는 다를 것이며, 새뮤얼 따위가 랭던 경의 은밀한 모습을 재현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도구를 사용해 미리 아래쪽을 한두 번 열어 봤자 초보인 나는 그의 페니스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모조 성기의 크기가 일반적이라고 가정한다면 경험이 많은 사람도 랭던 경과는 쉽지 않을 듯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릿속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랭던 경이 했던 말들을 복기했다.
‘나는 원래 창부는 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국이 몸에 있다니 더러운 일이군.’
‘울리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리는 것도.’
랭던 경은 알지 못한다.
로엘 서튼이 창부가 아니고, 랭던 경 외에 다른 사람이 한 번도 성적인 흔적을 남긴 적이 없는 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울리고 괴롭히는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임을.
구음 연습은 랭던 경의 명령이므로 주말까지 혼자서 실력을 늘리겠지만 그 외의 일은 미리 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랭던 경에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어떤 흔적도 없는 몸이 그가 좋아하는 육체였고 괴로워서 우는 얼굴이 그가 내게 바라는 모습일 테니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안길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일 밤에 만날 예정이며 연습은 잘되고 있음. R.S.
나는 짧은 쪽지를 새뮤얼에게 보냈다.
***
성탄절을 몇 주 앞둔 주일 밤, 나는 몸을 깨끗이 씻고 랭던 경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지난번 새뮤얼이 주고 간 트렁크 상자를 열었다. 가죽으로 덮인 네모난 트렁크 안에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나는 상자를 일일이 열어 혹시 내게 필요한 물건이 있나 확인했다.
물건의 생김새가 흉물스러워 열자마자 닫아야 하는 상자도 있었고, 채찍이나 작은 회초리처럼 일상에서 사용되는 물건들도 있었다. 개중엔 어떤 용도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제품도 있었는데 긴 줄에 작은 공이 줄줄이 꿰여 있는 도구가 그중 하나였다. 그림이 곁들여진 사용법을 읽어 본 나는 사람들의 천박한 상상력에 질색을 하며 뚜껑을 닫았다.
“흉하고 저질스러워라. 이런 건 랭던 경 앞에서 꺼내지 말아야지.”
나는 그 상자를 트렁크 맨 밑바닥에 놓아두었다. 동그란 유리 공에 가죽 벨트가 달린 도구 역시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고급스럽게 마감된 가죽 안쪽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니셜이 쓰여 있었다.
이런 부끄러운 물건에 본인의 이름을 남기다니. 내가 모르는 사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잊는 종말의 신호탄이 이미 쏘아 올려진 모양이었다.
사용하는 법을 그려 놓은 쪽지를 보니 다소 특이한 방식이긴 했지만 내가 찾던 재갈이 틀림없었다. 비단 주머니에 그 재갈을 넣고 코트 안 주머니에 넣은 뒤 트렁크를 침대 밑으로 치웠다.
침실 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튼 씨,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침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을 젖히고 나와 프록코트를 걸쳤다.
직원이 호텔 로비 문을 열어 주자마자 칼바람이 피부를 긁었다. 나는 목을 움츠리며 마차로 향했다. 랭던 경이 보낸 검은 마차엔 금빛으로 빛나는 랭던가의 상징이 붙어 있었다. 안정감을 주는 커다란 바퀴는 금색과 붉은색으로 깔끔하게 마감해 무척 고급스러운 태가 났고, 마차를 끄는 두 필의 말 역시 훌륭한 혈통이었다.
나는 랭던 경의 마차를 타고 수도의 중심부를 지나 노스턴 역으로 향했다. 조용한 마을 몇 개와 한적한 숲 하나를 지나고서야 뾰족한 시계탑 지붕이 보였다. 마차는 구부러진 길을 돌아 넓은 광장으로 들어섰다.
사방으로 트인 마차의 창문 덕분에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랭던 경의 모습이 멀리서도 또렷이 보였다. 검은색 프록코트 안에 말끔한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는 겸손하게도 도미닉의 실크해트보다 높이가 낮은 검소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 랭던 경이 다가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서튼 씨, 오는 길이 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좋은 마차를 보내 주셔서 편하게 왔습니다. 날이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새로 설계한 기차에 탑승하실 첫 손님인데 외관부터 안내해 드려야죠.”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먼 곳에서도 기차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높은 시계탑은 커다란 숫자와 시곗바늘로 풍차와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근처에 사는 시민들이 새 기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듯, 역 앞 광장과 근처 상점들은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랭던 경에게 잡힌 손을 금방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빈 손바닥을 허전한 듯 내려다보더니 장갑을 끼며 먼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서튼 씨가 기차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도록 얘기해 놨습니다. 노르크에서 가장 훌륭한 기차 특등석이에요. 서튼 씨는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으니 달리는 모습을 보기보다 직접 들어가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던 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사소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어 조금 놀랐다.
“서튼 씨가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어요. 도웨스 해안가에 랭던가의 사유지가 있습니다. 더위를 피해 여름을 종종 그곳 별장에서 보냅니다. 서튼 씨가 언젠가는 도웨스의 아름다운 해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랭던 경은 같이 가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벌써 내게 그런 마음이 생기길 바라는 건 무리한 기대였다.
계단을 올라 매표소를 지나니 강철로 만든 길고 거대한 기차가 가스등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실내 램프를 전부 켜 놓은 듯 창문마다 아름다운 노란 빛이 새어 나왔다. 첩자라는 고통스러운 임무를 떠맡은 후 처음으로 내 가슴 속에 환한 기쁨이 차올랐다.
“세상에. 멀리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랭던 경은 강철의 단단함을 과시하듯 주먹으로 가볍게 기차를 두드렸다. 기차를 보며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고 즐거움과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내가 그동안 본 랭던 경의 표정과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의 얼굴엔 날카로운 경계심과 예민함, 채워지지 않는 권력욕을 향한 갈증 같은 감정들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기차 옆에 선 녹색 눈동자에는 단순한 기쁨이 넘실거렸다. 만약 내가 처음 본 랭던 경의 눈빛이 이런 것이었다면 그라는 사람에게 무척이나 매료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생기와 활력이었다.
“노르크 전역의 기차 중 가장 가벼우면서도 가장 튼튼하게 만든 녀석입니다. 석탄과 돌을 나르고, 수백 명의 손님을 이틀 내에 사우스라인까지 태워 갈 수 있어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생선을 식탁에 올릴 수 있게 될 겁니다.”
“남부까지 이틀 만에. 정말 멋져요. 일등석은 앞쪽에 있나요?”
“이쪽으로 오세요. 이 기차는 일등석도 우수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특등석을 두 칸 만들었습니다. 로열패밀리를 위한 것이죠. 이 특등석이 기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여 줄 겁니다.”
랭던 경과 나는 아무도 없는 겨울밤의 플랫폼을 따라 기차 끝으로 갔다. 바람은 플랫폼을 지나며 길고 쓸쓸하게 울었다.
우리는 정갈하게 정비된 돌바닥을 천천히 밟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에 감탄하고 밤하늘의 둥그런 달이 세상을 축복하듯 부어 주는 빛을 감상했다. 랭던 경을 만난 이래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지난 주일의 행동을 후회했다는 그의 편지와도 부합하는 정중한 만남이었다. 물론, 랭던 경이 잠자리에서도 이와 같이 나를 부드럽게 대하리라는 어리석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랭던 경은 먼저 기차에 올라 특등석 칸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 먼저 들어가라고 부드럽게 손짓했다.
“서튼 씨가 우리 기차에 제일 먼저 탄 손님입니다.”
“영광이에요.”
나는 작은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의 특등석 칸은 마차의 내부와 비슷했다.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와 넓은 창문, 은은한 가스등의 불빛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의자에 풀썩 앉고, 랭던 경이 들어올 수 있도록 프록코트 자락을 챙겨 창가 가까이 붙었다. 문을 닫은 그가 내 곁에 앉자 넓게만 느껴지던 특등석 칸 안이 갑자기 비좁아졌다. 맞붙은 서로의 팔뚝을 의식하자 뺨에 조금 열이 올랐다.
“기차 안이 정말 고급스럽네요. 마차보다 훨씬 멋스러워 놀랐어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손가락들을 웅크렸다. 랭던 경은 왼손의 가죽 장갑을 벗고 발갛게 얼어 있는 내 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손을 녹이는 그의 체온이 너무 뜨거워 손끝이 저절로 움찔댔다.
“왜 장갑을 안 끼고 나왔습니까.”
“깜빡 잊었습니다. 챙겨 나올 것을 그랬네요, 따뜻하게.”
랭던 경은 겹쳐 놓여 있던 내 왼손을 끌어가 들고 있던 가죽 장갑 한 짝을 끼워 주었다. 안을 채운 부드러운 털이 랭던 경의 체온을 머금고 있어 모닥불을 쬐는 듯 손이 간지러웠다. 따끔대며 녹아 가는 손을 구부렸다 펴 본 뒤에야 쑥스러움이 고인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좁은 실내에 몸을 맞대고 앉아 있는 탓인지, 아까부터 눈을 마주치기가 왠지 창피하던 참이었다.
“감사해요. 따뜻합니다.”
“내게도 따뜻한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요?”
“그야 다름 아닌 로엘 서튼 씨죠. 일주일 내내 당신의 따뜻한 입 속을 생각했습니다.”
랭던 경은 장갑을 끼지 않은 쪽 손을 내 뺨 위에 얹었다. 그의 손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뺨의 온도가 더 높은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지 않는 척, 그에게 작게 대답했다.
“오늘 확인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서튼 씨.”
“네.”
“서로 우아한 귀족 행세를 하는 건 특등석 밖, 복도까지만 하기로 할까요.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나뒹구는 추잡한 창부라면 지금쯤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랭던 경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귓불을 깨물고 아직 울혈이 남은 목덜미를 핥았다. 방심한 사이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느끼는 듯한 소리가 부끄러워 아랫입술을 물었으나 생애 처음 기차를 구경하러 나와 들뜬 기분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신음이 잘 눌리지 않았다. 그의 숨결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가 곤두서는 듯해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 으응….”
긴 손가락은 자신이 목덜미에 만들어 놓은 붉은 흔적을 매만졌다.
“이제는 서튼 씨의 하얀 살결에 내 자국이 남아 있군.”
“네, 흐읏…. 온통, 저하가 남기신 흔적뿐이에요.”
가늘게 뜬 시야에 특등석 칸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평범한 시민들은 집에 걸어 두기도 어려운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에선 포도주 잔을 든 여신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금발이고, 한 명은 적발이었다. 그중 금발을 한 여신이 포도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인간 남자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갑자기 금서에 적혀 있는 인사말이 떠올랐다. 그림 속 등장인물이 여자 두 명, 남자 한 명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랭던 경에게 느끼고 있는 육신을 여신들에게 들킨 듯해 그림을 피하려고 눈꺼풀을 닫았다. 랭던 경은 내 등을 받치며 나를 바싹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나는 그의 품에 절박하게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무릎… 꿇기를, 원하세요?”
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울혈이 남은 자리들을 골라 치아를 박아 넣고 살을 빨았다. 견딜 수 없이 아파 피부에 닿는 숨결에서 쾌감을 찾으려 애썼다.
“으읏, 아파요…. 저하, 아….”
밀어 내지 않고 안겨서 아프다고 울먹이기만 하는 나를 그가 더 세게 끌어안았다. 랭던 경은 이번엔 달래듯 울혈이 남은 자리를 핥으며 물었다.
“아픈 게 싫어요?”
“저는, 흣… 저하께서 이러한 행동을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랭던 경의 프록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조끼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조끼 단추에 연결된 회중시계의 차가운 체인이 손끝에 스쳤다.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려 바지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그의 것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니 싫었다면… 제가 일부러 반지를 떨어트리고 저하를 한 번 더 뵈려고 했을까요?”
나는 그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 단추를 하나씩 끌러 냈다. 랭던 경은 달콤한 크림을 핥는 것처럼 내 목선을 따라 혀끝을 움직였다. 그의 속옷 안으로 용감하게 손을 넣었으나 부끄럽고 겁이 나 바로 성기를 만지지는 못했다.
랭던 경은 일부러 애를 태운다 생각했는지 내 손등 위를 눌러 성기를 쥐여 주었다. 모조 성기와는 다른 단단함. 내가 조절할 수 없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나는 주춤주춤 긴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페니스를 입 속에 집어넣었다. 이 행위를 시작으로 오늘은 어떻게든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유명한 남색가이자 바람둥이로 소문난 랭던 경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그를 만족시켜야 했다. 이미 가득 찬 입 속을 더 열어 그의 것을 최대한 밀어 넣었다.
“으응….”
“서튼 씨가, 흣, 연습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내 것은 그만큼 삼키기가 힘든데 창부는 창부로군.”
모조품을 넣던 것처럼 성기를 목구멍 깊숙이 삼켜 보려 했으나 역시 실전은 쉽지 않았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서 일단 넓게 편 혀를 단단한 기둥에 붙이고 고갯짓을 시작했다. 입 속에 퍼지는 쌉싸름한 쿠퍼액과 혀에 닿는 굵은 혈관이 구역질을 자극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깊이 넣으려 턱을 더 떨어트렸다.
“흑, 끅… 으읏….”
입 속에서는 이내 쿠퍼액과 침이 뒤엉켜 질척대는 소리가 났다. 밀려드는 헛구역을 억지로 참는 동안 눈가가 서서히 젖었으나 성기의 끄트머리가 목을 찌르도록 몇 번이고 넣었다. 그의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 내 고통은 다시 방임되었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의 신음 소리와 내 코 속을 파고드는 짙은 살냄새에 매몰되었다.
랭던 경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표정을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하… 서튼 씨가 좆을 물고 우는 모습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데.”
“…읏… 으응… 흣, 윽….”
“맛있어요? 목구멍이 좆을 쭉쭉 빨아 당기는데. 후으, 몇 번만 더하면 좆만 물려 줘도 열리는 천박한 목구멍이 될 것 같습니다. 원래도 너덜너덜했겠지만.”
“흑, 으으응….”
랭던 경은 내가 성기를 빠는 모습이 천박한 남창답다고 했다.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오직 그가 느끼는지만 신경 썼다. 턱에 감각이 사라지도록 페니스를 빨고 있으니 정말 창부가 된 느낌이 들어 눈가가 시렸다.
나는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페니스를 천천히 꺼냈다. 그토록 인내하며 집어넣었는데도 성기를 끝까지 넣는 것은 실패했다. 혀를 내밀어 성기의 뿌리 끝부터 귀두까지 진득하게 몇 번이나 핥아 올렸다. 눈동자를 들어 보니 그의 시선은 성기를 추잡스럽게 핥는 내 붉은 혀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계속 페니스를 핥으며 눈을 마주친 채 속삭였다.
“저하, 제가 제대로 빨아 드릴 수 있게 직접 제 입 속에 넣어 주시겠어요?”
“내가 직접 박으면 아플 텐데.”
“그게 저하께서 원하시는 것이잖아요.”
“…누워 보세요.”
누워 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그가 내 허리를 받쳤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머리가 의자에 닿으며 몸이 누웠다. 그는 의자에 눕힌 내 위에 올라타 그대로 입 속에 성기를 박아 버렸다. 어려운 자세였다.
“윽, 흐으읏….”
나는 손가락 관절이 엇나갈 정도로 랭던 경의 프록코트 자락을 세게 쥐었다. 랭던 경은 객실 벽을 짚고 내 가슴팍에 올라탄 채 자신의 것을 입 속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누운 채 비스듬히 들어오는 거대한 성기를 받는 것이 버거워 눈물이 뜨겁게 새어 나왔다. 치아가 스칠 듯해 힘겹게 턱을 벌려 봤으나 성기가 파고들어 고통만 더해 갈 뿐이었다.
“하아, 아파요?”
나는 꺽꺽대며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성기는 입 속을 들락대고 있었다.
“서튼 씨가 아프다니 좋기는 한데, 흣,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건 단점입니다. 하… 혀가 뜨겁고 침이 많군. 좆을 물면 군침이 도는 모양이지? 쑤실 때마다 침이 흘러넘치는데… 질퍽질퍽 끝이 없군.”
“흣… 으응, 끅….”
그는 내 혀와 입천장 구석구석을 성기의 끄트머리로 짓누르며 박아 넣고, 부은 목구멍을 억지로 열려고 시도하며 한참을 괴롭혔다. 성기가 쑤실 때마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봐주지 않고 목구멍을 쑤시던 그가 뜻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속삭였다.
“끝까지 괴롭힐 수가 없네. 그토록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주신 신에게 감사하세요.”
그 말과 함께 랭던 경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지고 굵은 손끝이 젖은 눈가를 매만졌다. 한결 부드러워진 허리 짓에 나는 그제야 눈물범벅이 된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랭던 경은 찢어진 내 입가와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부은 눈꺼풀을 번갈아 만지며 신음을 길게 내쉬었다.
“후으… 아프지 않게 박아 줄 테니 눈 감지 말아요. 눈동자를 보면서 박고 싶습니다.”
목숨을 구걸하듯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랭던 경은 욕망을 억누르듯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천천히 성기를 내 입 속에 왕복시켰다. 나는 그가 오로지 내 눈동자를 보기 위해 속도를 늦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질식하고 싶지 않으면, 목구멍이 더 들쑤셔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랭던 경에게 깔린 채 입 속을 범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시선은 무조건 내 위의 그에게 두었다. 쾌감에 젖은 녹색 눈이 나를 먹어 버리고 싶은 것처럼 내려다봤다. 나는 성기가 주는 고통 대신 랭던 경의 눈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 흣… 평상시의 서튼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 같은데… 이렇게 좆으로 쑤셔 줄 때면 눈물을 떨구는 모습이 음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여운데, 멈추기는 싫은….”
“으응… 읏… 흐으….”
얕게 쑤셔 주는 그의 것을 최대한 추잡스럽게 빨았다. 나는 이 순간만큼의 랭던 경의 창부여야 했다. 그가 다시 섹스하고 싶고 자신의 집 침대로 들이고 싶은 창부. 괴롭히고는 싶지만 조금은 봐주고 싶은 창부.
“그럼 여기서 문제를 내야겠습니다. 아주 쉬운 문제예요.”
랭던 경이 움직임을 멈추고 성기를 빼냈다. 쿠퍼액과 뒤섞인 채 입 속에서 늘어진 침이 거미줄처럼 그의 귀두에 길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침을 삼키길 포기하고 작게 기침했다. 입술을 뒤덮은 체액이 내 숨결에 약하게 진동했다. 젖은 속눈썹 너머에 장난기로 빛나는 녹색 눈이 보였다. 나의 고통에서 쾌락을 찾는 즐거운 눈동자.
“내가 서튼 씨의 어디에다 사정해야 할까?”
“…입, 속입니다.”
“어째서.”
“제가 삼켜야, 씻을 곳이 필요치 않으시니까요.”
나는 계속 그를 올려다보는 채로 질척이는 입술을 벌렸다. 그는 내 위에서 깊숙이,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깊게. 그래도 다 넣지는 못했으나 목구멍으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다. 내가 그의 프록코트를 붙들며 꺽꺽대자 랭던 경은 벽을 짚고 있던 한 손을 내려 마디가 툭 튀어나온 내 마른 손가락들을 움켜잡았다.
랭던 경은 내 입 안에 전부 사정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나는 끝까지 혀를 빼내고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귀두를 핥아야 했다.
랭던 경은 옷을 추스른 뒤 나를 일으키고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테두리에만 자수가 놓인 소박한 손수건이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직접 내 얼굴을 닦아 주고 고개를 숙여 눈물이 덜 마른 뺨에 입술을 눌렀다.
“기분 좋았습니다. 서튼 씨는 내 생각보다 상당히 귀여운 데가 있어요.”
“제가요?”
“푸른 눈이 붉어진 모습도 한없이 예뻐요. 그대가 알면 놀랄 만큼 당신의 눈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가 다시 내 뺨에 키스했다. 지난번 주일과는 사뭇 다른 상냥한 말과 스킨십 덕분에 거친 구음의 비참함이 한결 누그러졌다. 나는 얼굴에 묻은 눈물과 침을 꼼꼼히 닦으며 대답했다.
“…흉합니다.”
“빈말 아니에요. 서튼 씨의 눈은 어느 때든 예쁩니다.”
“울고 난 뒤 거울을 보면 눈동자 색이 분명 흉합니다.”
“…서튼 씨가 이상한 고집이 있네요.”
랭던 경은 눈가를 찡그리더니 내게서 몸을 떨어트리고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좁은 의자에서 둘이 부대끼고 있던 상태가 불편하긴 했지만 자신의 쾌락을 해소하자마자 바로 반대편 자리로 이동하는 행동이 몹시 약삭빠르게 느껴졌다. 속으로 불평하며 흐트러진 옷을 여미고 있는데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울고 나면 눈이 흉하다고? 서튼 씨는 눈알을 달고 거울을 본 게 맞나요?”
“눈알이라니…. 공작님께서 말씀을 고상하게 하셔야죠. 다른 사람이 들으면 흉봅니다.”
“잠자리에서의 반만이라도 말대꾸가 줄면 좋겠군. 다른 사람 핑계 대지 말아요. 여기서 흉을 볼 사람이 서튼 씨밖에 더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대가 속으로 내 흉을 보는 모양입니다.”
맞는 말이라 대답을 피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다 닦아 내고 얼룩진 손수건을 접었다.
“저하, 손수건을 빨아서 돌려 드려도 될까요? 제 눈물로 너무 더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냥 줘도 됩니다.”
“다음에 만나 뵈려고 핑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돌려 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직접 받기 꺼려지시면 심부름꾼을 보내 다시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그럼 그렇게 해요.”
코트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더니 이내 편안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구겨진 옷자락을 펴다 말고 잠시 그 미소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랭던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느새 익숙하게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저녁은 기차 식당 칸에서 먹도록 하죠.”
“벌써 식당 칸에서 식사할 수 있나요?”
“특별히 준비해 놓으라고 일러 두었어요. 내 기차이니 내 마음입니다.”
좁은 기차 통로는 둘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뒤로하여 내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어색하여 바깥에서처럼 슬그머니 빼 보려 했는데 이번에는 꽉 잡혀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남자끼리 서로 손을 잡고 자리 이동을 하다니.
랭던 경은 스킨십에 있어서만큼은 도무지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으로, 할 수만 있다면 내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 싶었다.
식당 칸에는 그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하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반갑게 인사했다. 빨간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있는 하녀 샬롯이었다.
“샬롯 양,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튼 남작님.”
랭던 경은 자리에 앉다 말고 나를 힐끔 쳐다봤다.
“샬롯 양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나요?”
“네. 정찬 때 이름을 들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녀들이 식당 칸 옆 주방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고용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랭던 경께서도 의외로 샬롯 ‘양’이라고 부르시는군요. 전에 메리 양에게도 그러시고…. 함부로 이름만 부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놀랐습니다.”
“누구에게든 예의를 갖춰야죠. 나야말로 놀랐습니다. 고용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호칭을 붙이는 사람은 귀족 중에선 나 외에 처음 봤어요. 서튼 씨의 의외의 모습이군요.”
“신분이 다르다 해도 서로 존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요. 제가 무언가 큰일을 할 수 있는 그릇은 못 되지만 일상에서 작은 노력이라도 하려고 해요.”
랭던 경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한 생각입니다, 서튼 씨. 세상을 바꾸기 위해 꼭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런 작은 생각들이 모여 분위기가 되고, 문화가 되는 것이니까요.”
“…따뜻하고 사려 깊으신 말씀이세요, 랭던 경.”
나는 그의 일상적인 언행과 내 말에 보이는 반응에 속으로 몹시 놀랐다.
랭던 경이 호텔에서 메리에게 호칭을 붙였듯 그는 자신의 고용인에게도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척 존경스러운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평민들의 이름을 호칭 없이 부르고 예의를 갖춘 말투도 사용하지 않았다. 증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새뮤얼이 그토록 찾은 ‘랭던은 자유주의자’라는 가설에 유일하게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녀와 하인에게도 호칭을 붙일 정도로 예의 있는 그가 나를 끝까지 ‘서튼 씨’라고 부르는 건, 창부로 소문난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치스러운 귀족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택한 길로 보일 테니 나는 그런 모욕을 당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었다.
씁쓸한 기분을 지워 내며 말을 돌렸다.
“오늘은 포도주가 어떤 것으로 준비되었나요?”
“1755년산 안트 포도주요.”
“역시 귀한 포도주네요.”
“모으기만 하고 마시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는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멀찍이 물러나 있던 집사가 다가와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우리는 잔을 들고 잠시 서로를 쳐다본 후 포도주를 맛봤다.
육즙이 흘러내리는 소고기와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 신선한 딸기의 맛이 황홀했다. 기차 칸이 주는 낭만 역시 더할 나위 없었다. 각진 창문 너머를 언뜻 쳐다볼 때마다 아무도 없는 플랫폼이 겨울밤의 깊은 어둠을 보여 주었다.
랭던 경은 남은 포도주를 깔끔하게 마시고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의 발이 갑자기 내 구두 끝에 닿았다. 일전에는 떨어지고 말았던 발끝이 생각나 심장이 진동했다.
“서튼 씨, 센트럴 호텔로 갈까요?”
“…호텔로요?”
“생각해 보니 내 집보다는 호텔이 서튼 씨에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서튼 씨의 공간이니까요.”
“저는 저하께서 편하신 곳이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그럼 호텔로 해요.”
“알겠어요.”
랭던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물러나 있던 고용인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는 모자를 쓰며 코트 주머니에서 검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쉴 시간인데 늦게까지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공작님.”
사람들이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따로 수고비를 챙겨 주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랭던 경은 플랫폼을 걸어가며 남은 장갑 한쪽을 꺼내 내 가슴팍에 툭 안겨 주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서튼 씨에게 직접 끼워 줘야 하나요?”
“그게 아니라 저하께서도 손이 시리실 테니….”
“됐어요.”
퉁명스러운 대꾸가 민망해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다른 한 짝을 마저 꺼내 양손에 장갑을 꼈다. 마차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랭던 경뿐만이 아니라 노르크의 모든 사람에게 나는 몰락 가문의 남창이라는 걸.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문 때문에.
갑자기 눈물이 울컥 치밀었다. 몰래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닦자 찬 바람이 피부에 남은 소금기를 따끔하게 훑고 지나갔다. 랭던 경은 내가 남창이라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상처 주는 건지 궁금했다.
우리는 마차에서도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 듯한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치 않아도 호텔에서 고통으로 울게 될 테니 지금 미리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직접 기차표를 사서 타 봐야겠습니다. 움직이는 기차는 더욱 훌륭하겠죠?”
“너무 빨라서 가까이서 보고 기절한 사람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총알처럼 빠른가 봐요.”
랭던 경은 내 비유에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총알이라고 하니 떠올랐는데 혹시 사냥도 자주 합니까?”
“아니요. 아직 형님께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 서튼 씨에게 형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데도 가만히 두나 봅니다.”
랭던 경은 역시나 말로 나를 베었다. 떨어져 있을 때 그와 주고받는 달콤한 서신이 그의 날카로운 면을 자꾸만 희석했다. 실제로 만나도 편지처럼 나를 다정히 대해 줄 거란 부질 없는 기대감을 키우는 것이다.
서튼 씨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주길 바랍니다. 너무 이기적인 바람이오?
‘네, 이기적이세요.’
나는 속으로 작게 쏘아붙였다. 랭던 경은 대답이 없는 것을 개의치 않는 눈치로 덧붙였다.
“다음번에 숲에서 사냥을 같이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저를 가르치셔야 할 텐데요. 총을 잘 쏘지 못해서요.”
“나는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못한다고 매를 드는 것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랭던 경은 자신의 변태적인 취향을 거리낌 없이 언급했다. 공작의 당당함인지, 수치심이 없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랭던 경과 저에게 다음이 있을까요. 랭던 경께서는 두어 번 이상 만남을 갖지 않으신다고 들었어요.”
“오늘 밤 서튼 씨가 내 마음을 녹일지도 모르지.”
돌에 걸렸는지 갑자기 마차 바퀴가 덜컹 뛰어 엉겁결에 랭던 경의 허벅지를 세게 붙잡았다. 창피하여 몸을 세우고 손을 바로 떼어 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따 몸도 섞을 텐데.”
랭던 경이 허리를 숙여 이마 위에 입술을 눌렀다. 갑작스러운 가벼운 키스에 몹시 놀랐다. 내 기억으론 그가 얼굴에 남긴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아직 내 입술을 누르거나 키스를 한 적은 없었다. 다정한 입맞춤이 불러일으킨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추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는 다시 크게 흔들리는 일 없이 고요하게 도시의 대로를 굴러갔다.
길을 밝힌 촘촘한 가스등으로 노르크의 수도는 대낮처럼 환했다. 시끄러운 행인들의 소음과 말 울음소리, 마차 주변을 둘러싼 빛 무더기 덕분에 수도의 중심가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가올 일이 긴장되어 손끝이 질렸다. 랭던 경이 빌려준 장갑이 아니었으면 차갑다 못해 감각이 없어졌을 정도였다.
호텔 앞에 내려 내가 묵는 501호로 올라갈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계단을 내딛는 발끝이 질퍽대는 진흙을 누르는 듯 울렁거렸다. 발끝에 이상한 감각이 드는 건 내가 현실과 마주치길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객실 앞에 도달한 랭던 경이 난간을 짚은 채 겨우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나를 쳐다봤다. 그의 녹색 눈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증으로 탔다.
“서둘러요.”
“네, 랭던 경.”
몸을 뒤로 돌려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참고 참으며 발을 앞으로 디뎠다. 품에서 객실 열쇠를 꺼내는데 외출 전 미리 준비했던 비단 주머니가 손을 부드러이 스쳤다. 잠시 움찔했다가 키를 열쇠 구멍에 꽂아 놓고 돌렸다. 랭던 경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떨리는 호흡을 숨기며 먼저 침실로 들어가 비단 주머니를 꺼내 침대 위에 놓았다. 분명 시간을 달라 말했건만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두꺼운 손이 내 배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긴장한 탓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웃었다.
“놀랐습니다, 저하.”
그는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나를 그쪽으로 바싹 당겼다. 이 의미 없고 얄팍한, 그러나 다정한 스킨십을 벼랑 끝의 밧줄처럼 잡고 싶었다. 랭던 경이 소문만큼 거칠지 않을 거라는, 그런 헛된 희망.
어깨 위로 턱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침대 위에 저 주머니는 뭐요?”
“제가 준비한 것인데 랭던 경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나를 금세 놓아 주고 침대로 가 비단 주머니를 잡았다. 나는 침대의 기둥에 달린 흰색 커튼을 쳤다. 밖에서 보면 그림자가 비칠 얇은 커튼이었지만 남자와 섹스하는 내 모습을 세상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려 줄 장치가 필요했다. 등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서튼 씨의 소문과 어울리는 물건이네요.”
“마음에 드시나요?”
뒤돌아본 그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엿보였다. 나는 걸치고 있던 재킷과 조끼를 벗고 바지에 셔츠만 입은 차림으로 침대 위에 앉았다. 랭던 경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머리채를 천천히 쥐어 잡고 뒤로 젖혔다. 아래로 턱을 힘없이 벌린 채 그를 올려다봤다.
날카로운 눈빛이 내 뺨 위로 떨어지고 뜨거운 혀끝이 그 위를 핥아 올렸다. 음습하고 더운 숨결에 눈이 질끈 감겼다가 뜨였다. 그가 속삭였다.
“바닥에 무릎 꿇어요.”
“네, 저하.”
지난번 맨바닥에서 구음하느라 옅게 멍이 든 무릎을 모아 꿇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친 기류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태풍 앞에 선 버드나무 가지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요, 서튼 씨. 나는 침실 밖에서는 공작이지만 침실 안에서는 왕이고, 폭군이오. 싫다고 확실히 말하는 게 아니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수 있어요. 이해합니까?”
“…네, 저하.”
랭던 경은 이어 말했다.
“침대 위에선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복종하고 아픈 걸 견디세요. 솔직히 얘기하면 아픔을 즐기는 사람에겐 흥미 없습니다. 특히 당신 같은 창부라면. 고통을 즐기는 사람의 복종을 나는 순종이라고 느끼지 않거든.”
“…저는 아픔을 즐기지 않지만 랭던 경께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하를 왕처럼 섬기고 두려워도 감내할 사람이 필요하신 건가요?”
나는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다 조심히 질문을 하나 더 덧붙였다.
“그러면 제가 침대 위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건 저하인가요?”
“아니…, 두려워해야 하는 건 그대가 나를 잃는 것이지.”
랭던 경은 허리를 숙여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아 떨고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커다란 손이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러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대를 지배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요.”
“…이미 그렇게 하고 계세요.”
단정한 그의 입술이 떨리는 눈꺼풀과 뺨 위에 닿았다. 입술 위에도. 그러나 스치기만 했을 뿐 혀를 섞는 진한 입맞춤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랭던 경에게 순종하겠노라 굳게 결심했지만 그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새뮤얼의 언질이 있었으나 그가 보낸 사람들은 랭던 경과 세 번째 밤을 맞이하는 데 실패했으니 어떤 참고도 되기 어려웠다.
그가 무릎 꿇은 나를 칭찬하듯 내 이마와 눈꺼풀에 다시 입술을 누르는 동안 눈을 감고 왕이 내게 퍼붓는 은혜를 받았다. 교황이나 왕의 키스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키스를 은총으로 여겨야 했다.
“옷을 벗어요.”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뭉근히 문질렀다. 떨리는 손끝으로 셔츠의 단추를 누르며 긴장감에 꼼지락대는 발끝을 진정시켰다.
마지막 단추가 구멍을 빠져나가자마자 랭던 경이 내 셔츠를 뒤로 젖히며 느리게 옷을 벗겨 냈다. 상체를 가릴 만한 건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았다. 우아한 손끝이 아무런 흔적도 없는 살결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얗군. 자국을 남기고 싶은 피부요.”
랭던 경은 내 백금색 머리카락을 훑고 뺨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점점 아래로 움직였다. 조각이나 전리품을 감상하듯 내 몸을 쳐다보는 노골적인 시선과 더듬는 손길이 익숙지 않아 피부에 열감이 번졌다.
그는 허리띠를 풀고 바지 단추를 끌렀다. 몇 번 해 보지 않았지만 이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가 성기를 꺼내자마자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시 한번 빨고 싶어요?”
“네, 저하.”
나는 닫혀 있던 입술을 서서히 열며 입 속에 귀두를 묻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그는 양손으로 내 뒷머리를 잡고 바로 발기한 성기를 그대로 밀어 넣었다. 그동안의 구음은 내게 속도를 맞춘 것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발치에 나를 무릎 꿇어 앉히고 자신은 높은 침대 위에 앉아 직접 성기를 쑤셔 넣는 그는 거침이 없었다.
“흣, 으응… 윽, 읏….”
랭던 경은 내가 구역질을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굵은 기둥은 혀를 누르고 젖은 소리를 내며 입 안을 거칠게 드나들었다.
“하아… 입 더 벌리고. 혀를, 굴려야지.”
나는 무조건 그에게 순종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마비된 건 아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펫의 짧은 털을 부여잡았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머리통을 앞뒤로 움직였다. 어느 때는 귀두로 입 옆쪽을 찌르며 볼을 불룩하게 만들고, 어느 때는 깊게 쑤셔 넣은 채 빼 주지 않고 한참 있었다. 도저히 다 삽입되지 못할 것 같던 성기는 내가 토할 각오로 입을 벌리자 마침내 끝까지 들어왔다.
“끅, 흡… 흡….”
억센 손이 뒤통수를 더 꾹 눌렀다. 랭던 경이 내 행동을 지적했다.
“눈을 뜨세요. 지적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차리질 못하는군.”
흐르는 눈물 때문에 들러붙은 눈꺼풀은 내 의도와 달리 한쪽만 어설프게 뜨였다. 그는 계속 내 뒤통수를 짓누르며 아파서 떠는 나를 질책했다.
“자꾸 눈을 보는 것을 잊으니 다음엔 매를 들고 가르쳐야겠습니다. 서튼 씨는 매를 대야 습관이 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대의 그런 점이 앞으로 나를 즐겁게 해 주겠군.”
“흣, 윽, 으응….”
따가운 눈을 깜빡대며 다른 눈꺼풀까지 겨우 들어 올리고서야 그의 손이 나를 놔주었고 남근이 목에서 빠져나갔다. 거친 구음에 시달린 나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정신없이 기침을 쏟아 냈다. 입 속에는 그가 남긴 쿠퍼액이 질척거렸다. 목구멍까지 흔적을 남긴 짙은 살냄새는 페니스를 빨지 않아도 성기를 물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는 자비 없이 나를 독촉했다.
“창부가 정신 차리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흡… 죄송합니다, 저하.”
“혀를 내밀어 보세요.”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고 붉은 혀를 내밀었다. 오늘 여러 번 구음을 한 탓에 입 속은 까끌까끌했고 목구멍뿐만이 아니라 혀까지 통통하게 부푼 느낌이었다. 랭던 경은 직접 자신의 성기를 잡고 내 혀 위에 귀두를 한참이나 비비다 속삭였다.
“삼키지 말아요, 흣….”
“에….”
분명한 신음의 끄트머리쯤 굵은 귀두에서 정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랭던 경과 시선을 맞추고 쏟아지는 정액을 받기 위해 혀를 더 넓게 펴려 애썼다.
“…표정이 꼴리는군. 혀를 계속 빼고 있어요.”
그는 작게 욕을 뇌까리며 혓바닥 위를 정액으로 듬뿍 적셨다. 랭던 경은 몇 번이고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내 얼굴을 보고 자위했다. 나는 생애 처음 나를 욕정의 대상으로 삼는 적나라한 상대의 눈빛을 봤다. 여태까지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시선은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예의로 한 겹 가공된 것이었다.
랭던 경은 정액을 다 쏟아 내고도 귀두 끝으로 내 눈꺼풀과 뺨 위를 비비며 이전에 입 맞춘 흔적을 정액으로 더럽혔다. 나는 혀를 빼문 채 모욕감으로 온몸을 달달 떨었다. 구음만을 할 때는 그에게서 최소한의 신사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침대 위의 그는 지배 욕구를 숨기지 않는 고압적인 귀족 그 자체였다.
정액은 내 침과 뒤섞여 자꾸 뒤로 넘어가려 했다. 혓바닥에 모은 채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랭던 경은 혀를 뺀 채 순종하는 내 모습을 보며 성기를 손으로 직접 문질러 다시 세웠다. 그런 뒤에야 내 입가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 정액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 내고, 혓바닥 위에 쌓인 정액을 전부 훑어 갔다.
나는 이 모든 행위가 어디까지 평범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가학적인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도미닉의 희망을 송두리째 부술 수 없어 처음이라 무섭다는 말을 삼키고 삼켰다.
“뒤돌아 엎드려서 엉덩이를 치켜드세요.”
“어, 엉덩이를요?”
그의 말을 알아들었으나 시간을 끌기 위해 되물었다. 밀부를 보여야 하는 상황이 막상 닥치니 수치스러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깐 채 쉽게 뒤돌지 못했다. 그러나 길게 망설일수록 한 치의 의심 없이 나를 창부라 믿고 있는 랭던 경의 눈빛엔 불쾌감만 짙어졌다.
“엉덩이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는 창부도 있습니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연기할 필요 없어요. 설마 겁이 나서 그러는 건가요?”
“…창피, 해서….”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서 주춤주춤 몸을 돌린 뒤 바지 단추를 최대한 천천히 풀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 시간을 지연하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도 빨리 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엉거주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체중을 싣자 카펫이 눌렸다. 랭던 경의 긴 한숨이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내 뒤통수를 밀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치켜들어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남창이군. 이래서야 화대는 제대로 받겠어요?”
“…그게, 제가… 죄송합니다.”
처음이라는 말이 치아 뒤쪽에 부딪쳤으나 입술을 열고 나오지는 못했다. 나는 말없이 카펫에 머리를 묻고 주저하다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랭던 경이 내 속옷을 끌러 내고 한쪽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순간 부끄러움이 숨을 틀어막았다. 바닥에 놓인 팔뚝은 발갛게 변하다 못해 피부가 터질 듯 붉게 익은 상태였다.
끈적한 느낌이 밀부에 닿았다. 섬세한 손가락이 정액을 치덕거리는 것이 느껴져 나는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치켜든 엉덩이를 달달 떨었다. 정액을 바르던 랭던 경이 훤히 드러난 둥근 엉덩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벌써 흔들지 말고. 천박하게 흔들어 대는 걸 보니 박아 주면 어떨지 뻔하군.”
“죄송, 합니다. 천박하게… 굴어서….”
겁에 질린 탓에 목소리가 가슴에 얹혀 문장이 드문드문 끊겼다. 나는 그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툼한 손바닥과 곧게 뻗은 손가락, 마디가 굵고 힘줄이 돋은 손등. 우아한 그 손가락이 정액을 내 아래쪽에 펴 바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생생히 떠올라 어깨의 떨림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마침내 손가락 하나가 안쪽을 파고든 순간 나는 놀라 앞으로 도망가듯 기었다. 그러나 무릎걸음조차 제대로 몇 번 딛지 못하고 허리를 잡혀 뒤쪽으로 끌려갔다. 내가 마음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그가 뒤에서 단단한 팔로 내 배를 받쳐 껴안아 들었다. 몸이 쉽게 떠올랐다. 손발만 바닥에 닿은 상태로 무릎은 공중에 들려 자의로 움직이기 어려운 자세가 됐다. 그는 바로 손가락을 다시 내 안에 밀어 넣었다.
“길이 덜 든 것처럼 좁군. 모르는 사람이 쑤셨으면 경험이 별로 없는 줄 알았겠습니다.”
“…윽, 아….”
하체가 위로 들리자 균형을 잡기 힘들어 급하게 바닥을 짚으며 신음했다. 그러나 기다란 손가락이 더 깊숙이 안을 밀고 들어왔다. 좁은 내벽이 그 손가락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져 창피함에 심장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숙이고 있는 이마와 머리카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 벌써 박아 주고 싶은데.”
“흐읏, 저하… 기, 기름병이 서랍에….”
“정액을 발랐으니 남창의 아래 입을 열기는 충분합니다. 봐서 말을 잘 들으면 기름을 발라 줄 수도 있는데, 글쎄. 필요할 것 같진 않군.”
랭던 경의 반응은 두려움에 질린 내게 너무 잔인하고 가혹했다. 몸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가슴 속에 상흔을 남기는 그의 말들이 전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쓰라렸다.
“부디… 흣… 저하….”
나는 울면서 한참이나 빌었으나 엄격한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멍한 머릿속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길 원한다는 그의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나는 공포에서 벗어나길 포기하고 애원을 멈췄다.
랭던 경은 내 배를 위쪽으로 더 당겨 들며 손가락으로 안을 농락했다. 어떤 쾌감도 느낄 수 없었다. 아픔과 모욕밖에는.
눈물이 막을 새 없이 이마를 타고 카펫으로 떨어지길 반복하는 동안 얼굴이 온통 젖었다. 손가락이 좁은 안쪽을 벌리며 하나 더 파고들었다.
“…아읏, 흐읏….”
아프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치아로 아랫입술을 세게 눌렀다. 손가락을 삽입한 것조차 아파서 견디지 못하면 처음인 티가 날 게 분명해 요동치는 단어들을 혀 밑에 묻었다.
랭던 경은 그를 향해 치켜든 엉덩이를 마음껏 감상하는 중이었다. 느껴졌다. 좁은 입구를 벌리며 아래쪽을 쳐다보는 눈길이, 손가락으로 안을 들쑤시며 어떻게 움찔대고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시선이.
그의 손에 배가 붙들린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입구는 점점 녹진해졌다. 두 손가락은 쉽게 드나들 정도로 풀고 난 후에야 랭던 경은 나를 침대로 눕히고 올라탔다. 그가 아직 발목에 걸친 내 바지까지 다 벗겨 냈을 때, 나는 난생처음 타인 앞에서 알몸을 내보이게 되었다. 랭던 경은 손가락으로 안을 푸는 동안 내내 울어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연기라는 걸 다 아는데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얼굴입니다. 당신이 그럴수록 더 울리고 싶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걸 알아야죠.”
“…랭던 경… 흣….”
손가락 두 개가 깊은 곳을 파고들려 할 때마다 무릎이 저절로 닫혔다. 그는 혀를 차며 자신의 셔츠에 걸려 있는 타이를 풀었다. 그리고는 내 오른 다리를 옆으로 활짝 벌려 오른 손목과 오른 발목을 한데 모아 타이로 꽉 동여맸다. 함부로 무릎을 모으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야말로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아직 조끼까지 옷을 갖춰 입은 신사와 그 앞에서 발목과 손목이 묶인 채 나체로 누워 있는 사람.
그게 나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이 얼얼하도록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으면 했다. 랭던 경은 내 위로 몸을 숙여 유두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혀가 닿자 허리가 들렸다.
“으응….”
“내밀며 조르지 않아도 빨아 줄 테니 점잖게 좀 행동해요.”
랭던 경이 천박한 내 행동거지를 혼내며 허벅지 옆쪽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갈겼다. 내가 괴로워하면 그의 표정엔 즐거움이 묻어났다. 습한 혀끝이 젖꼭지를 누르고 혓바닥 전체가 진득하게 유두를 밀며 압력을 줄 때마다 배 속에 미약한 열이 번졌다. 허리를 들지 않으려 애써도 유두에 닿는 미묘한 자극이 배 속의 온도를 올려 가슴팍을 내밀게 되었다.
“천박합니다.”
“으응… 저하의 혀가, 너무 뜨거워서….”
그에게 맞은 허벅지 역시 가슴만큼 홧홧했다. 자꾸 가슴을 내민다고 소리가 방에 울릴 정도로 여러 번 허벅지를 맞았다. 허벅지 살이 발갛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맞고서야 가슴도 아래쪽도 그에게 적응했다. 손가락 두 개를 문 내벽이 움찔대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박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나 구멍이나 전부 점잖지를 못해서…. 내가 다 창피스럽군.”
“흐윽, 아!”
손가락 두 개도 버겁다고 생각했는데 하나가 더 들어왔다. 입구가 한껏 열리는 느낌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주는 수치심이 눈물을 거들었다. 잔뜩 울면서도 그가 젖꼭지를 빠는 느낌이 간지러워 가슴팍 밑에 자리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그 박동을 느꼈는지 랭던 경은 유두를 빨다 말고 올라와 내 젖은 뺨을 핥으며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나는 젖은 눈을 들며 그에게 다시 부탁했다.
“저하, 뻑뻑하니 기름병을… 아, 흐으응….”
“좆을 빨 때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마음대로 엉덩이를 흔들어 댔으니 벌을 받아야죠. 기름을 붓고 편하게 해 줘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하, 제발.”
다시 부탁해도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핥아 줄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못 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듯해 나는 차악을 선택했다.
“그러면 재갈이라도, 으응… 재갈을, 물리고 저하의 마음대로 해 주세요.”
“재갈을 물리면 하기 싫다는 말을 못 할 텐데.”
“괘, 괜찮… 습니다.”
사실 내게 말은 필요치 않았다. 애초에 그만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려, 아프다고 애원하지 않으려 준비한 재갈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생각해 낸 도구. 처음을 자백하지 않기 위해 꺼내 놓은 도구.
정액으로는 충분히 젖지 못한 뻑뻑한 밑을 벌리며 손가락이 드나들었다. 부끄럽게도 내 아래쪽은 손가락이 채운 너비가 점점 넓어질수록 내벽이 달라붙듯 움직였다.
“서튼 씨, 다시 무릎을 꿇어 보세요.”
내벽을 헤집던 손가락이 간신히 빠져나갔다. 몰래 밭은 숨을 고르며 무릎을 꿇었다. 한쪽 손목과 발목이 묶여 있어 다소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야 했다. 손으로 맞아 부푼 허벅지가 따끔거렸다.
재갈을 챙겨 든 그는 고개를 숙여 다정히 뺨에 입술을 눌러 주었다. 우아한 손끝이 유리 공을 내 입 속에 밀어 넣고 뒤에 달린 작은 가죽 벨트를 뒤통수에 채웠다. 유리 공은 꽤 컸다. 물고 있으니 입술을 완전히 닫을 수 없었다. 단단한 재갈이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끌어안고 얌전히 침대에 눕자 랭던 경이 기름병을 들었다. 안도감에 눈물이 다시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울어요. 원래 눈물이 많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재갈이 없어도 처음이라거나 그만하고 싶다는 얘기는 못 했겠지만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괜히 더 서러워 코끝이 아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이런 짓을 좋아하는 사람답지 않게 몹시 단정하고 멋있었다. 날렵한 턱선과 코끝, 시원하게 뻗은 눈매까지. 모든 이목구비에 고귀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랭던 경은 재갈을 문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에 내 살결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는 옷을 벗지 않고 성기만 꺼내 귀두를 아래쪽에 가져다 댔다.
‘나만 벗고 하는 걸까.’
새삼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처사였으나 그 치욕감마저도 귀두가 좁은 입구를 벌리며 들어오는 고통에 곧 잊혔다.
“흐읏, 읏! 으응….”
내지르는 비명은 입 속 점막에 달라붙은 유리 공을 비집고 터져 나오지 못했다. 랭던 경은 조금 전 호되게 맞아서 부어 있는 옆쪽 허벅지를 다시 두꺼운 손바닥으로 냉정히 갈겼다.
“하… 엉덩이에 힘 풀어요.”
‘아파…, 아파….’
아프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멍해졌다. 여전히 손목과 묶여 있는 발목 때문에 다리를 모으며 피할 수도 없었다. 랭던 경이 허벅지를 더 때리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예상외로 귀두를 빼내고 자신의 성기와 내 아래쪽에 기름을 흠뻑 발랐다. 워낙 거근이라 삽입이 어려운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흐읍….”
“놀랐어요?”
그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 경은 붓기 시작한 눈꺼풀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달랬다.
“천천히 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래도 커서 아프겠지만… 내가 참을 수 있는 선에서 더디게 넣겠습니다.”
랭던 경은 묶여 있지 않은 내 발목을 잡아 젖히며 엉덩이를 위로 조금 띄웠다. 그리고 힘겹게 내 안에 귀두를 파묻었다. 힘주어 기둥을 조금 더 밀어 넣는 순간 열 개의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으응, 응!… 흐읍….”
견딜 수 없이 아파 입을 벌리며 고개를 젖혔다. 유리 공이 혀를 누르고 있어 단 한 글자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힘 푸세요. 처음부터 다 넣으려는 욕심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하아….”
랭던 경은 접합부에 기름을 더 부은 뒤 귀두를 머금고 있는 내 입구를 더듬었다.
“지금 밑이 어떤 줄 압니까? 주름 하나 없이 쫙 펴진 채 좆을 물고 기대감으로 벌렁대고 있어요.”
“…흣….”
“안쪽에는 서튼 씨를 더욱 미치게 할 만한 지점이 많겠지만 입구 근처에도 좋은 지점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난잡한 구멍을 쑤셔 줄 테니 힘만 풀면 돼요. 자신의 몸이 얼마나 음란한지는 알아야지.”
랭던 경은 박혀 있는 자신의 것을 천천히 빼냈다. 그의 말대로 내 밑은 가득 벌어져 있었다. 틈 하나 없이, 그의 성기로 꽉 찬 채.
페니스를 그대로 빼 주었으면 했지만 랭던 경은 다시 귀두를 집어넣으며 짧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에 엉덩이가 저절로 뒤로 물러났으나 랭던 경이 허리를 잡아 와 소용없었다. 열기가 번지기 시작한 녹색 눈동자는 아래쪽에 붙박여 있었다.
“으응, 흣… 으윽….”
입은 유리 공으로, 밑은 그의 성기로 채워진 채 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유리 공을 빨지 않으면 고이는 침을 삼키기 어려워 그가 성기를 세게 박아 넣을 때마다 침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귓바퀴 속에 고여 몸이 흔들릴 때마다 물소리가 찌걱댔다.
“표정이 야하군. 하지만 좆을 오물대는 구멍만큼은 아닙니다.”
“…흑, 읏… 아….”
“하… 거칠게 쑤셔 박고 싶어서 못 참겠는데. 흣….”
허리를 붙든 굵은 손가락이 나를 그에게로 잡아당겼다. 성기가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 아픔밖에 느껴지지 않는 낯선 행위는 나를 반쯤 미치게 했다. 몸에 힘을 빼지 못해 끈으로 한데 묶여 있는 발목과 손목도 아팠지만 성기가 안을 쑤시는 격통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내 몸을 당기는 걸 막을 수 없어 남는 한 손으로 랭던 경의 굵은 손목을 붙들었다. 고통에 몸이 자꾸 휘어 고개는 점점 뒤로 젖혀졌다. 페니스는 약속과 달리 빠르게 안을 파고들었다. 이제 절반쯤 삽입이 된 듯했으나 그는 만족하지 못한 듯 자꾸만 안을 넓혔다.
“서튼 씨 구멍 안이 너무 뻑뻑하고 좁아서 쑤시기가 불편합니다. 어떤 의미론 타고났네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지금까지 중 가장 깊게 성기를 집어넣었다.
“하읏, 으으응….”
밑이 한껏 벌어지는 느낌과 함께 안쪽 깊숙한 곳에 무언가가 쏟아졌다. 평생 느껴 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질척한 액체가 어떤 지점에 고이자 여태까지와는 다른, 저릿한 느낌이 밀려와 다리가 벌벌 떨렸다. 동공이 크게 열리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랭던 경은 사정하는 중이었다. 그는 약하게 허리 짓을 하며 갑자기 내 것을 손에 쥐었다.
‘안 돼, 안 돼….’
누군가 중요한 부분에 손댔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일어 몸을 비틀었으나 거부감은 그의 다음 말과 함께 사라졌다.
“하, 좆물을 싸 주니 서는군.”
나는 눈물로 충혈된 눈동자를 굴려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정말로 그의 손에 잡힌 내 것이 단단해져 있었다. 아까 느낀 저릿함 때문인 듯했다.
랭던 경은 성기를 조금 흔들어 주다 내 머릿밑에 손을 넣어 재갈의 벨트를 풀었다. 여태 비명을 잘 막아 주던 유리 공이 입 속을 빠져나갔다. 그는 엎드려 침으로 젖은 내 입가와 눈물로 퉁퉁 부은 눈꺼풀을 핥아 주었다.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그가 나를 핥게 두었다.
“흣… 으… 랭던 경….”
랭던 경의 사정과 함께 괴로운 정사가 다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기대감 때문에 그가 나를 핥는 행위마저 부드럽게 생각됐다. 마치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동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고 그가 나를 돌보는 느낌에 집중했다. 서 있는 내 것을 흔들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과 땀과 눈물로 젖은 머리카락을 빗겨 주는 손가락.
“서튼 씨의 안이 좆물로 범벅이 되어 축축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저하… 흣, 이제 끝내시는 건지….”
“깊게 박으려고 좆물을 싸 준 것뿐이에요. 질척해져야, 하, 제대로 들어가니까.”
그는 어느새 반쯤 단단해진 성기를 거의 끝까지 집어넣었다. 완전히 발기했을 때보다 크기가 줄어든 데다 내벽을 적신 정액 때문에 꽤 부드럽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흐으응….”
예상외로 미끄러운 삽입에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는 성기를 끝까지 넣은 채로 여태 손목과 발목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 주었다.
“멍이 생기겠군.”
내가 고통을 참아 내느라 힘을 자꾸 주었는지 손목에는 벌써 붉은 자국이 또렷이 남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 어설픈 섹스로는 랭던 경의 마음을 잡지 못할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밀려와 다시 눈가가 뜨거워졌다.
랭던 경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의아한 눈빛으로 시선을 겹쳤다. 내 위에 있는 그는 어느 때보다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몸이 연결되어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고 내 가슴 속에 담긴 어떤 것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는 밤하늘의 달처럼 외로워졌다.
“왜 웁니까?”
그가 물었다. 극심한 정사의 고통을 겪고도 일을 다 망쳤다는 실망감에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랭던 경에게 속삭였다.
“저하께서 저를 다시 안 찾으실 것 같아서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저하는 한두 번 안으시면 늘 사람을 떠나시는데 저는 오늘 울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일이 고작이에요. 그저 저하의 품 안에서 힘없이 뭉개지고 있을 뿐입니다.”
“서튼 씨는 아직 나를 알지 못하는군.”
랭던 경은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원하는 게 그겁니다.”
그가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성기는 몹시 단단해진 상태였다. 여전히 너무 큰 페니스가 드나들 때마다 고통이 밀려와 떨어진 턱이 달달 떨렸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다 성기를 빼냈다.
“엎드려서 엉덩이 치켜들어요. 손을 뒤로 묶을 테니까.”
“네, 흣… 저하.”
나는 엉금엉금 뒤돌아 머리를 묻고 엉덩이를 치켜든 뒤 손을 허리 뒤에 모았다. 그는 자국이 남은 손목도 봐주지 않고 끈으로 세게 당겨 매듭을 짓고 내 뒷머리를 짓눌렀다. 성기가 다시 안쪽을 파고들 때는 더 이상 느린 속도가 아니어서 시트에 입술을 파묻고 치미는 비명을 삼켰다.
“아! 저하, 흐윽… 응….”
“좆이 어느 정도 들어온 것 같은지 설명해 보세요.”
묵직한 성기를 계속 안으로 집어넣으며 그가 명령했다.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잠시 나를 놔주었다. 나는 허벅지 뒤쪽에 실리는 무게감에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애쓰며 간신히 답했다.
“흡, 서, 성기는… 아… 귀, 귀두가 다 들어왔고, 흣… 안쪽으로 점, 점….”
“서튼 씨 안쪽은 어떤 것 같아요?”
“…굵은 기, 기둥, 으응… 때, 문에 펴져서, 흣, 달, 라 붙어서… 저하….”
“서튼 씨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큰 착각입니다. 아래 입은 좆을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 것을 놔 주질 않으니… 욕심이 많은 구멍이요.”
“…으응… 다, 들어왔… 안이 젖어서….”
“울지 말아요.”
뒷덜미에 랭던 경의 숨결이 느껴졌다. 도미닉의 말대로 흰자위가 붉게 물든 파란 눈이 흉했나 싶어 눈꺼풀을 질끈 닫았다. 랭던 경이 내 등 위로 몸을 숙이자 금속 단추의 서늘한 온도와 조끼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내 귓불을 앞니로 물었다 놓으며 속삭였다.
“서튼 씨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흥분해서 세게 박게 되니까.”
흥분…. 어째서 사람의 울음소리를 듣고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급하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 닿았던 차가운 단추가 떨어지고 그는 다시 내 뒷머리를 짓누른 채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묵직하게 성기를 끝까지 박아 넣어 내 엉덩이와 그의 몸이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읏, 흑… 으응… 래, 랭던 경… 저하….”
“젠장… 진작에 좆물을 싸 줄 걸 그랬군. 하, 더러운 창부를 흥분시키는 게 무엇인지 뻔한데 내가 생각을 못 했습니다.”
“…너무, 빠, 빠릅니다…. 으응, 읏… 아! 흐윽.”
“좆을 씹듯이 달라붙는 아래 입이나 진정시키고 말하세요.”
랭던 경이 퍽, 소리가 나게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고통과 미묘한 느낌이 뒤섞인 소리가 시트를 데웠다. 정액으로 젖은 내벽을 가르며 문지르는 기둥이 아까의 아픔을 희석했다. 등 뒤에서 그의 신음 소리와 내 밑이 찌걱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싸고 싶었으나 손이 묶여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침대 위에서 왕이고 폭군이었다. 나는 그가 묶으면 묶이고, 성기로 안을 찔러 주면 울고, 머리를 짓눌러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묵직해질수록 그의 것은 조금 더, 조금 더 깊이 나를 침범했다.
도저히 들어올 것 같지 않았던 살 기둥이 안을 내리누를 때마다 엉덩이와 배 속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목구멍까지 졸리는 기분이었다.
“흣, 으응….”
그러다 귀두가 깊숙한 데에 처박혔을 때 입에서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섹스를 통해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 없는 낯선 쾌감에 발가락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귀두가 박힌 곳에서는 여태 맛보지 못한 아릿한 쾌감이 퍼져 나와 온몸을 감전시키듯 울렸다. 나는 팔로 시트를 잡아 비틀고 싶었으나 묶여서 그러지 못하고 허리를 들썩대며 이마를 침대에 문질렀다.
“아읏, 아… 아….”
“여기가 기분이 좋아요?”
“…흣, 네… 네…. 저하….”
“내 창부의 눈물샘이 여기였군.”
눈물샘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랭던 경은 내 등에 키스해 주고 묶인 양손을 잡은 다음 잡아당기며 안을 힘 있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팔이 빠질 듯 아팠다.
쾌감이 느껴지는 지점에 귀두가 박혔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반복될수록 쾌감 위에 쾌감이 쌓였다. 그곳은 귀두로 눌릴 때마다 예민함을 더해 갔다. 내벽이 귀두를 감싸고 조이며 움직이느라 안에 든 정액이 찌걱대며 새어 나왔다.
“흐읏, 응… 흑….”
“하아….”
등 뒤에서는 랭던 경의 신음과 요란하게 살 맞는 소리가 커져 내 귀를 자극했다. 그가 찔러 올릴 때마다 성감에 발이 덜덜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 시트를 적셨다. 점점 몽롱해지는 머릿속은 거듭되는 허리 짓에 몇 번이나 뺨을 적시고서야 그곳이 눈물샘이라는 랭던 경의 말을 이해했다.
다시 페니스가 그곳을 짓누르며 뭉근히 비볐다. 성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엉덩이를 비틀었더니 그가 나무라듯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살이 손바닥에 감겼다.
“하읏, 저하….”
그는 묶여 있는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안에 다시 정액을 뿌렸다. 눈물샘에 찐득한 정액이 가득 쏟아져 나는 묶인 손목과 다리를 버둥대며 울었다. 손끝으로는 내게 닿은 랭던 경의 굵은 손가락을 찾아 더듬었다. 서 있던 내 것에서 정액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으응… 읏, 아….”
“하아….”
등에 그의 무게가 다시 실리며 차가운 단추와 회중시계의 체인이 피부를 짓눌렀다. 랭던 경은 깊게 신음을 내쉰 뒤 정액을 흘리는 내 것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흐읏, 으응….”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정을 마쳤다. 정액을 전부 흩뿌린 랭던 경은 나를 돌려 눕히고 내 정액으로 젖은 자신의 손을 빨게 했다. 혀를 내밀어 정액이 묻은 손을 핥았다. 손가락 사이에 혀를 넣어 비비고 손끝을 입 속에 넣어 문질렀다.
“서튼 씨, 이제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빠는 게 어때요.”
나는 눈물을 매단 채 그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일어나서 랭던 경의 고간에 머리를 묻었다. 여전히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서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엎드려 그의 성기까지 구석구석 할짝대고서야 그가 묶여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드디어 고통스러운 섹스가 끝이 났다. 긴장이 풀려 그대로 모로 쓰러지며 침대에 몸을 털썩 눕혔다. 랭던 경은 턱을 괴고 옆에 누워 나를 내려다봤다.
“봐주면서 했는데도 서튼 씨 눈이 퉁퉁 부었군요.”
“…저하께서 거칠게 하신 탓입니다.”
나는 아직도 두려움에 질린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랭던 경이 대꾸했다.
“방금까지 울면서 엉덩이를 흔들더니 그새 입이 살았네요.”
“말대꾸가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 손목을 묶으시는 바람에 온통 멍이 든걸요.”
“나는 그 멍이 마음에 듭니다. 내 밑에서 울던 로엘 씨의 아름다운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힘이 없는 와중에도 로엘 씨라는 말에 무거운 눈꺼풀이 바짝 들렸다. 랭던 경은 뻔뻔할 정도로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 코를 잡았다가 놓았다.
“밑을 겹친 사이에 이름도 못 부릅니까?”
“이름을 부르시다니…. 무례하세요, 랭던 경.”
“그 말은 내가 로엘 씨 구멍에 좆을 쑤셨을 때 했어야지.”
“단어 선택도, 정말…. 저하의 품위를 생각하셔야죠.”
나는 속으로만 생각하던 불평을 내뱉으면서야 오늘의 고통스러운 섹스 덕에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음을 실감했다. 섹스는 부질없는 짓이 아니었다. 랭던 경이 ‘로엘’이란 이름으로 나를 부르도록 만들고, 내가 그에게 투덜거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였다. 다만 이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내가 에메랄드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랭던 경과 나는 침대에서 여송연을 태우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여송연을 태우는 내내 그가 호텔을 떠날 순간을 기다렸다. 섹스가 준 모욕이 자꾸만 눈가를 뜨겁게 덥혔기 때문이다. 섹스하는 중이 아닌데 랭던 경에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 콧날의 시큰함을 몇 번이나 참아 냈다.
그는 밤늦게야 호텔을 나설 준비를 했다. 프록코트를 입던 그가 물었다.
“종이와 펜 있습니까?”
“네, 랭던 경.”
나는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랭던 경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주소를 하나 써 주었다.
“철도 회사 주소입니다. 혹시 급한 일이 있는데 내가 저택에 없으면 이리로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저하. …저도 하나 써 드릴 게 있어요.”
랭던 경이 의자에서 비켜났다. 나는 자리에 앉아 펜촉에 검은 잉크를 적셨다. 그리고 오늘 그에게 들려주지 못한 진실을 종이에 써넣었다. 그는 책상을 한 손으로 짚고 옆에 비스듬히 서서 내가 무슨 글을 쓰는지 지켜보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를 적시며 흔적을 남겼다.
랭던 경, 저는 사실 저하와 보낸 오늘이 첫날밤이랍니다.
그는 내가 쓴 문장을 읽고 소리 내어 웃더니 내게서 펜을 가져가 다른 종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엘, 나 역시 그대가 처음이오.
랭던 경은 내 말이 농담인 줄 알고 똑같은 거짓으로 응수한 것이다. 나는 랭던 경을 힐끔 올려다보고 옅게 웃었다. 랭던 경은 좀 더 웃더니 내 메모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로엘 씨의 농담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내려오지는 말아요. 오늘 무리했으니.”
“아니에요. 랭던 경을 무례하게 배웅해 드릴 수는 없어요.”
나는 그의 메모가 적힌 종이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마차는 이미 호텔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랭던 경은 문을 닫기 전 내 손을 잡고 묶였던 자국 위에 키스했다. 나는 손목에 입 맞추는 그의 섬세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랭던 경이 허리를 펴며 가볍게 말했다.
“연락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저하.”
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도 랭던 경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화려한 대로를 따라 마차의 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늘어나는 마차와 호텔 사이의 거리가 랭던 경과 나의 간격 같았다. 고통이 가시니 홀로 남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마차의 뒤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코트에 넣어 둔 종이를 꺼냈다. 우아한 필체를 다시 한번 읽었다.
로엘, 나 역시 그대가 처음이오.
밤하늘의 별빛을 받으며 ‘로엘’이라는 이름을 조심히 쓰다듬은 뒤 호텔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달래 줄 사람 없는 이른 눈물이 뺨을 타고 쓸쓸히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