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메랄드 저택
밤새 뒤척이느라 깊게 잠들지 못했다. 밤사이 바람이 더 차가워졌는지 창문이 무섭게 덜컹거려 눈꺼풀이 저절로 들렸다. 노르크의 혹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에는 얼음이 맺혔고 나무와 바람이 음침하게 우는 소리가 한데 엉켰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 몽롱한 시선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엿보았다. 여름 내내 초록빛을 뿌리던 가지는 푸른 나뭇잎을 모두 잃어버리고 상실의 슬픔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인기척이 들려 가볍게 실내복을 차려입었다. 실내에서 입는 얇은 겉옷을 걸치고 나가 보니 베넷 부인이 이미 출근해서 집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로엘 도련님.”
“좋은 아침이에요, 베넷 부인. 일찍 나오셨네요. 어제도 나오셨는데 이제 매일 아침에 출근하세요?”
“아침 8시부터 오후 8시까지요, 로엘 도련님. 도미닉 서튼 자작님께서 감사하게도 후하게 일당을 쳐주셨답니다. 남편이 감사하다고 감자를 몇 알 사 와서 약소한 선물이지만 가져왔어요.”
“감자 가격이 많이 올랐던데. 베넷 씨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저희야말로 겨울을 잘 보내게 돼서 감사하죠. 이번에 농사가 잘 안 되어서 윌리엄에게 세 끼를 다 먹일 수 있을까 걱정했거든요.”
“한창 크는 나이인데 잘 먹어야죠.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이에요.”
“그럼요! 무척이나 안도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베넷 부인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바삐 몸을 움직이며 서튼가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예술 작품과 실내 장식 등을 정성 들여 닦았다.
도미닉은 어제 새뮤얼을 대하는 내 무례한 태도에 실망했는지 오전 내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다 오후에 외출했다. 평소처럼 수도로 나가 친구들을 만날 예정인 듯했다.
도미닉이 집을 비우고 나서야 베넷 부인이 내려 준 커피를 한잔하며 거실에서 편히 책을 보고 쉬었다. 글자 사이 여백에 눈이 머물 때면 이따금 랭던 경의 깊은 눈빛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내 생각보다 랭던 경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공들여 관찰했던 것 같다. 녹색 눈동자와 강인한 턱선은 물론이고 여송연을 피우며 눈꺼풀을 살짝 내렸을 때 얼굴에 지던 긴 속눈썹 그림자 같은 사소한 모습까지 다 기억이 났다.
‘잘생긴 얼굴만큼 성품도 훌륭했다면 좋았으련만.’
랭던 경을 생각하며 몸을 불편하게 뒤척이는 사이 갑자기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한기가 몰아쳤다. 도미닉이 집에 들어와서 문이 열린 탓이었다.
“다녀오셨어요, 형님.”
낮부터 술을 마셨는지 도미닉은 벌게진 얼굴로 비틀비틀 걸어오며 내 인사를 무시했다. 그는 베넷 부인에게 코트를 벗어 주었다. 해도 지기 전인데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베넷 부인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냉기의 정체가 궁금한 듯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으나 오랫동안 하녀로 일한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호기심을 잘 감추었다.
“로엘 서튼, 방에 들어와라.”
“네.”
읽던 책에 말린 단풍잎을 끼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방에 들어가니 도미닉이 편지 봉투를 품에서 꺼냈다. 종이에는 가문의 인장이 찍힌 빨간 봉랍이 동그랗게 붙어 있었다.
“전갈이 왔다.”
“랭던 경께서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분이 한 번 만난 너 따위한테 무슨 전갈을 보내.”
“…….”
“새뮤얼이 보낸 거다.”
도미닉이 편지를 든 손으로 내 가슴팍을 퍽, 치며 봉투를 안겼다. 만취한 탓에 말투와 행동이 몹시 사나웠다. 나는 잠시 비틀대며 기침하다 프리데릭가의 인장이 찍힌 봉랍을 뜯고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다소 교양 없는 필체로 짧은 지시가 쓰여 있었다.
목요일, 오후 4시, 반지.
몇 안 되는 글자를 외우고 도미닉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프리데릭 경은 랭던 공작의 일정을 어떻게 이토록 잘 알고 계신가요?”
“하녀를 한 명 심어 놓은 모양이다.”
“누구인지 들으셨어요?”
“그건 네가 알 바 없고. 연습은 시작했니?”
도미닉은 늘 귀족의 품위에 대해 엄격하게 훈육했다. 그러니 내게 남색을 강요하는 형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 준 태도와 완벽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아니요. 아직….”
“여태 망설이다니. 이 비참한 삶에 익숙해진 거야? 5년 전에 가문을 지켜 내겠다고 그 짓거리를 했으면서 이 일이 그것보다 어려워?”
“…물론 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래서 고민을 했던 거고….”
“네 몸뚱이를 놓고 고민 따위를 해?”
말이 끝나기 전에 컵이 날아와 내 머리통을 때렸다. 내가 휘청거리자 도미닉이 벌떡 일어나 쓰러지지 못하게 멱살을 잡고 내 뺨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커다란 손바닥에 뺨이 감기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 도미닉이 소위 ‘아버지를 대신해 가르치는’ 행위라고 부르는 일을 견뎠다.
“그 인간이 가학적인 짓을 좋아한다고 하더구나.”
나는 입술이 찢어져 나온 피를 닦으며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도미닉을 올려다봤다.
“너는 반드시 잘 버틸 거야. 그러니까 고민이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마. 제대로 네 버릇을 고쳐 주기 전에.”
“…네, 형님.”
만취한 도미닉이 화를 낼 때 반항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나는 더 이상 그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심장이 서럽게 울컥대는 바람에 뺨이 뜨거워지고 얻어맞은 피부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도미닉이 멱살을 놔 주었다. 그는 빨개진 내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보더니 주먹으로 머리통을 탁, 때렸다.
“울기만 해 봐, 로엘.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시퍼런 눈동자 주변이 울어서 붉어지면 얼마나 흉한지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냐.”
“…….”
“귀족은 눈물을 쉽게 흘리지 않는 거야.”
“네, 형님.”
도미닉은 내가 눈물을 흘리는지 확인하듯 눈을 빤히 보다가 문을 열고 베넷 부인을 불렀다.
“베넷 부인.”
“네, 서튼 자작님.”
“백화점에서 사 온 물건 좀 정리해 주시오. 그리고 로엘은 오늘 저녁을 안 먹는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서 조금이라도 깜빡이면 떨어질 것 같았다. 혹여 도미닉 앞에서 실수를 저지를까, 나가라는 명령만을 기다리며 시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도미닉에게 모질게 혼나면서도 나는 그의 모든 행동이 일찍 여읜 부모 대신 나를 위해 주는 일이라 믿고 싶었다.
도미닉은 문을 닫고 나서도 한동안 씩씩대며 머리를 벅벅 문지르더니 진정한 듯 숨을 크게 내쉬고 내게로 다가왔다. 얼굴빛이 아까보다는 차분하게 바뀌어 있었다.
“뺨이 많이 부었네. 그러게 내 성격 알면서 왜 자꾸 화를 내게 하니. 많이 아파?”
“괜찮아요, 형님.”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 갑자기 내가 때려서 놀랐을 텐데 연습은 차차 하고.”
“…아니에요. 가문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 저녁은 베넷 부인에게 간단히 챙겨 주라고 다시 말하마.”
“알겠어요.”
나는 도미닉의 방을 나오고서야 눈을 깜빡였다. 넘실대던 눈물이 투둑-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모였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소매로 문질러 닦고 바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외로이 차가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죽여 울었다. 서글픔이 들끓어 배 속이 요동쳤다. 묵혀 둔 감정들이 울렁거려 점점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모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걸 애써 설득하고 가라앉혔다.
‘도미닉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좌절하고 상처받아 그러는 거야. 아버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정혼자와 성대한 결혼식도 올리고 대학을 졸업해 궁에서 일했을 텐데. 지금은 집에서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마음속의 다른 목소리가 울면서 속삭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로엘. 그렇다고 네가 도미닉을 못살게 구는 건 아니지 않니.’
고통을 잘 견디는 내가 서글프게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나를 다독였다.
‘걱정 마. 도미닉은 네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희망 없는 삶에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생긴 거야. 그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 로엘 네가 최선만 다하면 새뮤얼은 약속을 지킬 거고, 도미닉은 원하는 걸 얻을 거야.’
베갯잇이 젖도록 눈물을 참지 못하는 어린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나는?’
그 말에는 어떠한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단 한마디도….
고통을 잘 견디는 나는 베개가 흐느끼는 소리를 다 빨아들여 문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에게 어떤 약속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족 대신 신념을 선택한 후부터 나는 숲을 관통하는 계곡물에 휩쓸린 나뭇잎 한 장이고, 사막을 움직이는 바람이 들어 올린 모래 한 알이다. 그것이 나였다.
***
목요일 오전에는 집 굴뚝을 청소하는 어린아이 한 명이 새뮤얼의 심부름을 왔다. 나는 그 아이가 굴뚝을 청소하는 동안 새뮤얼이 보낸 쪽지를 읽었다.
오늘 랭던 경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새뮤얼이 준비한 각본이었다. 에메랄드 저택에서 나온 후 새뮤얼을 만나 진행 상황을 보고할 약속 장소도 적혀 있었다. 나는 각본과 약속 장소를 외우고 굴뚝 청소부 소년에게 수고비로 10골드를 쥐여서 내보낸 뒤 깨끗한 벽난로에 그 종이를 태웠다.
오후 3시경, 지난번 정찬 때 탔던 마차에 올라 랭던 공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집사가 동승하지 않았다. 나는 홀로 마차 좌석에 앉아 창문 덮개를 열었다. 지난번 외출보다 바람이 많이 불어 길에는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추위에 뒹굴었다. 숙녀와 신사들은 모두 윤이 흐르는 털목도리를 감고 저마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마차가 랭던가의 사유지로 진입하고 나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마부가 지난번과 다른 길을 택했는지 마차는 넓은 호수를 둘러서 갔다. 초겨울이라 햇볕이 강하지 않은 데도 물 위로 잘게 부서져 번지는 빛이 시리도록 눈부셨다. 셰퍼드를 끌고 지나가던 경비병이 마차를 보고 멈춰 서서 묵례했다. 나 역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숲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큰 흔들림 없이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를 보고 집사가 안에서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다행히 내 성(姓)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튼 남작님.”
“안녕하세요.”
“선약이 없으신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발걸음 하셨습니까?”
“지난번 정찬에서 중요한 반지를 잃어버려 무례하게도 전갈 없이 잠시 들렀습니다. 사파이어 반지인데 혹시 하녀가 청소 중에 발견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말은 전해 들은 적이 없는데…. 혹시 어디서 잃어버리셨는지 짐작 가는 장소는 있으십니까?”
“발코니에서 랭던 경과 여송연을 피울 때만 해도 손가락에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2층 복도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침 공작님께서 저택에 계신데 손님과 함께 있으십니다. 약속이 끝나시면 오셨다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품위 있게 사양했으나 집사는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분명 랭던 경에게 알릴 것이다. 그게 집사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집 안의 모든 사항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것. 물론 집사가 소식을 전한다 해도 나를 보러 나올지 말지는 순전히 랭던 경의 의사에 달린 문제였다.
“서쪽 복도로 올라가시는 게 더 빠르십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사람이 없는 저택 안은 그날 저녁과 달리 고즈넉한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집사를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먼 숲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울렸다. 아까 지나친 셰퍼드가 사냥감을 발견하고 짖는 중일지도 몰랐다.
저택은 서쪽 건물에도 넓은 홀과 다이닝 룸이 여럿 있었다. 홀은 도자기와 그림이 세밀하게 장식되어 있어 랭던 경의 수집 취미를 엿보기 적당했다.
“여기는 공작님께서 수집하시는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타국에서 건너온 것들도 많습니다.”
“해외 문물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나는 난간을 짚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카드 게임을 했던 룸 앞까지 갔다. 주변을 둘러보다 집사에게 조용한 투로 부탁했다.
“혼자 찾아 봐도 될까요?”
“네, 편히 둘러보십시오.”
“감사해요.”
나는 집사가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반지를 찾는 척 복도를 헤집었다. 빠른 시간 내에 랭던 경의 약속이 끝나서 이 한심한 연극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그가 과연 나를 보러 2층까지 올라올지 의문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그만인 걸 굳이 2층으로 찾아오는 수고를 할까.
새뮤얼은 남색가인 랭던 경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건 새뮤얼의 착각에 불과했다. 랭던 경이 내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의미 없이 복도를 몇 번이고 왕복하다가 더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아 기둥 뒤편에 떨어트려 두고 간 반지를 집었다. 먼지를 톡톡 털어 낸 뒤 검지에 끼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억세게 틀어잡았다.
“아!”
기척 없이 내 몸을 잡는 손길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돌았는데 테런스 랭던 경이 서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놀랐습니다, 랭던 저하.”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이 민망하여 손등으로 붉어진 뺨을 누르고 인상을 썼더니 그가 저번처럼 내 미간을 슬쩍 문질렀다. 그 손길에 구기고 있던 눈썹 사이를 반듯이 폈다.
“서튼 씨는 예쁜 얼굴을 구기는 고약한 취미가 있나 보네요.”
“…취미는 아닙니다. 랭던 경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뿐입니다.”
아직 미간에 머물러 있는 그의 손을 피하고 싶었으나 랭던 경과 가까워져야 하는 상황에서 먼저 거리를 두는 건 내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인내했다. 그는 엄지로 몇 번 더 미간을 쓸어내리다 내 얼굴에서 손을 거뒀다. 랭던 경이 제법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 모임 후에는 집에 잘 돌아갔어요?”
“네. 배웅해 주신 덕에 무사히 갔습니다.”
“반지를 잃어버려 들렀다면서요. 그 반지인가 봅니다.”
“저녁에 여송연을 태우고 나오다 흘렸나 봅니다. 기둥 뒤에 굴러가 있더라구요.”
랭던 경은 내 설명을 들으며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턱선을 쓸어내렸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눈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넓은 창을 향했다 다시 돌아왔다.
이어 들리는 랭던 경의 제안은 그가 내게 무관심할 거란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시간이 괜찮다면 같이 차라도 한잔 드는 게 어떨까요?”
“랭던 경과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그날 밤과 다르게 갑자기 태도가 고분고분해졌습니다, 서튼 씨.”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도 저하께서는 저를 서튼 씨라고 부르실 것 같아서요. 생각해 보니 그리 틀린 호칭도 아니구요.”
“나는 정확한 호칭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냥 넘어가 주면 좋겠건만 랭던 경이 콕 집어 약 올리듯 대꾸했다. 호칭으로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첫인상이 나쁘게 남은 듯해 다시 뺨이 홧홧해졌다. 그렇지만 그때는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간절했으니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할 수 있는 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입술을 열었다.
“랭던 경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솜씨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귀족의 덕목이지요.”
랭던 경의 목소리는 몹시 심술궂게 들렸다. 화가 나 냉큼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잘생긴 얼굴에 소년 같은 장난기가 어른대고 있었다. 나를 상처 입히려는 의도로 한 말이라 확신했건만, 막상 눈빛을 보니 추측이 흔들렸다. 그의 표정은 심술이 아니라 즐거움에 가까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나는 입 속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새뮤얼과 도미닉은 내가 그를 유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생각하느라 넋을 놓은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랭던 경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냈다. 한참이나 눈을 들여다본 후에야 비로소 무례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랭던 경은 그때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한가운데 피아노가 놓여 있는 화려한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쿠키, 귀한 과일, 차가 여러 종류 준비되었다. 하녀는 섬세한 무늬가 그려진 잔에 차를 채워 주고 자리를 비켰다.
랭던 경은 하녀가 나가고서야 말문을 뗐다. 저음의 목소리는 둘만 남은 실내에서 더욱 은은하게 들렸다.
“마셔요.”
랭던 경은 잔을 들지 않고 고개만 까닥였다.
“랭던 경께서도 드세요.”
“나는 아까 차를 마셨습니다.”
내게 고정된 랭던 경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차를 마시고 작은 포크로 빵을 집었다. 먼저 애프터눈 티를 제안한 랭던 경은 정작 다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빵을 입에 넣다 실수로 크림이 아랫입술에 묻었다. 나는 혀로 크림을 할짝거렸다. 밖으로 살짝 나왔다 들어가는 혀끝까지 그가 남김없이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교양 없이 입술에 묻히며 먹은 것이 민망해서 그다음부터는 크림이 없는 디저트와 과일을 골라 먹었다.
랭던 경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괸 비스듬한 자세로 내가 먹고 마시는 모습을 감상하듯 내내 빤히 바라봤다. 나는 결국 그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고 계시니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가요?”
“같이 드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어서요.”
“같이 간식을 먹고 수다나 떨자고 서튼 씨와 앉아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왜….”
랭던 경의 답변을 이해하기 어려워 되물었으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돌아왔다.
“그야 서튼 씨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제 얼굴은 왜….”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며칠 전에 가까이서 얼굴을 보기도 했는데 오늘 복도에서 햇빛 아래 서 있는 당신을 보니 느낌이 또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서튼 씨의 얼굴을 보려고 차를 마시자는 핑계를 댄 겁니다.”
“왜….”
“왜라는 소리밖에 못 하나요?”
내가 다시 입을 벌리려 하자 랭던 경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또 왜라고 물어볼 거면 말하지 마세요.”
그 말에 나는 다시 입술을 닫았다. 랭던 경은 긴 다리를 꼬며 느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튼 씨, 바다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직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습니다.”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당신의 눈이 무슨 색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햇살이 비치는 바다는 당신의 눈빛처럼 툭 치면 깨질 것 같은 파란색이고, 파도에 부딪치는 햇살은 그대의 머리카락처럼 백금색으로 빛납니다.”
이목구비를 훑는 적나라한 시선과 외모에 대한 호감 섞인 칭찬에 얼굴엔 금세 붉은 물이 들었다.
‘랭던 경은 왜 이런 칭찬을 하는 걸까….’
남색가가 내게 보이는 관심이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부끄러움을 일으켰다. 그가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혹시라도 내게 관심을 보인다면 그 흥미를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긴장감.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꼼꼼히 보실 가치가 있는 얼굴은 아니에요.”
“그건 서튼 씨의 생각이지. 내가 남색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을 텐데.”
“듣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랭던 저하의 취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랭던 경은 내 대답에 입가를 문지르며 슬쩍 웃었다. 솔직하게 들렸을지 맹랑하게 들렸을지 알 수 없었다. 귀족의 예법에서 멀어진 지 오래라 종종 스쳐 가며 만난 사람들은 내 말투가 여느 귀족의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대체로 그 말 속엔 멸시와 연민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튼 씨가 아름답다는 얘기는 고객들에게 이미 질리도록 들었을 것 같아서 그다지 진심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또다시 튀어나온 고객이라는 단어가 달아오른 가슴 속에 한 줌의 냉기를 퍼트렸다. 나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궁금증과 함께 얇고 구불대는 머리카락이 뺨을 타고 스르륵 흘렀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랭던 경께서 제게 왜 고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장사를 하지 않는걸요. 다른 사람과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남색가라는 소문을 그대가 들었듯 나도 서튼 씨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노르크 수도에서 포도주에 곁들이기 좋은 안주니까.”
“대체 무슨 소문을 들으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랭던 경은 한 번도 입에 대지 않던 찻잔을 들었다. 그의 섬세한 입매가 잔에 닿는 모양과 목울대가 향긋한 차를 넘기며 움직이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유심히 보게 되었다. 응접실을 데우는 뜨거운 겨울 햇볕이 랭던 경의 모습 역시 생생히 비추었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 눈동자. 날렵한 턱선과 힘줄이 불거진 손등.
“…서튼 씨가 부정하고 싶은 모양인데 굳이 모르는 척 연기를 하며 계속 캐물어 볼 필요는 없어요.”
“아니요, 랭던 경. 저는 정말 궁금해서….”
“그야 로엘 서튼, 그대가 창부라는 사실입니다.”
잠시 랭던 경이 내뱉은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내 속눈썹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랭던 경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연기라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들릴 듯 말 듯 혀를 찼다.
“그대가 남창이 아니라면 당신의 고급스러운 정장과 사파이어 반지는 어디서 훔쳤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겠지. 망한 지 오래 아닙니까, 당신 집안. 아무리 몰락한 귀족이라 해도 사치를 하기 위해 가문에 먹칠을 하며 살다니… 실망스럽습니다.”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엉킨 실타래가 되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숨을 쉬기 어려운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대며 소리 없이 꺽꺽대던 나는 결국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찻잔이 덜컥 움직여 테이블이 찻물로 젖었다.
랭던 경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고 내 무례함을 경멸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꽉 쥔 주먹을 떨며 물었다.
“대체,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너무 많아 일일이 얘기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정찬에 왔던 귀족들도 당신이 창부인 건 다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체면이 있어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
나를 두고 수군거리던 여러 입술과 이상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눈빛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나는 그 눈빛들이 비참하게 죽은 자유주의자의 아들을 염탐하는 시선인 줄만 알았다. 노부인의 목소리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당신에 관한 소문들이 사실인가요?’
그 질문 뒤에 따라붙던 키득대는 웃음소리도.
랭던 경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였으나 이번엔 노골적으로 내 온몸을 훑었다. ‘창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후부터 나를 신사로 대하던 정중한 태도가 그에게서 깔끔히 지워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는 듯한 시선에 등줄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저는 창부가 아닙니다.”
“창부가 아니라면 오늘 내 집에는 왜 왔어요? 나를 유혹해서 한몫 챙겨 보려던 속셈 아닌가요?”
“아니에요. 정찬 후에 반지를 잃어버려서….”
“거짓말.”
랭던 경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게로 걸어오는 그의 실루엣이 점점 커졌다. 딱 벌어진 어깨,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큰 키, 단단한 몸집에는 내가 제압할 수 없는 체격 차가 존재했다.
그는 나와 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내 입술에서 빠져나온 숨이 그의 옷깃을 데울 수 있을 거리였다. 힘줄이 돋은 손이 내 턱을 잡아 들고 자신을 억지로 올려다보게 했다. 나는 겁에 질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문 채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서튼 씨는 그날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잖아요. 하고 있지도 않은 반지를 어떻게 잃어버립니까? 귀한 반지를 심심풀이로 들고 왔다가 잃어버린 거라면 그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걸, 제가 하고 있지 않았는지 어떻게 랭던 경이….”
“식사를 하는 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봤거든, 당신을.”
그날 정찬 내내 집요하게 나를 보던 그의 시선이 떠올랐다.
랭던 경이 내 쪽으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혹여라도 입을 맞출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얼어 반응하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겹치는 대신 숨결로 내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가까이 닿는 따뜻한 타인의 호흡에 뒷덜미의 솜털이 하나하나 다 곤두섰다. 부드러운 억양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당신의 흰 목덜미도,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손가락도 다 빨아 보고 싶었어. 붉은 입술에 내 것을 물려 준다면 이 아름다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지. 나는 본래 창부는 안지 않는데 당신이 로엘 서튼이라는 걸 알기 전에 치밀어 버린 욕정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서도 쉬이 멈추지 않더군.”
“…….”
“그래서 그대가 발코니에서 여송연을 넘겨줄 때 당신 손가락을 만져 봤습니다.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고 싶어서.”
랭던 경의 커다란 손이 부드러이 내 손등을 덮었다. 나는 작은 숨조차 함부로 내쉴 수 없었다. 긴장이 되어 손끝까지 떠는 나를 그의 손바닥이 천천히 쓸어내리고 그날처럼 손가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다른 점은 이번엔 그의 손가락에 반지가 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튼 씨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마차로 모셔다 드리죠.”
그가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나는 랭던 경의 뒤를 따라가면서야 참고 있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거짓말을 들킨 심장이 세차게 뛰며 펌프질을 했다.
홀로 나가자 하녀가 외출 코트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너무 떠느라 소매에 제대로 손을 넣지 못하고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야 하녀의 도움으로 겨우 옷을 꿰입었다. 코트 소매를 빠져나온 손끝이 찬 바람을 맞은 것처럼 빨갰다.
해가 짧아져 어느새 정원에는 노을이 드리웠다. 닫힌 입에서는 입김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나는 이 찬 바람이 볼썽사납게 붉어졌을 얼굴을 제발 식혀 주기 바라며 랭던 경의 뒤를 따라갔다.
‘해명을 할 수가 없어….’
창부라는 오해를 풀고 싶어 이런저런 변명을 고심해 봤으나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첫날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해명을 한다면 반지를 구한 경로와, 거짓 핑계를 만들어 그의 저택을 방문한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받을 터였다. 울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시린 눈동자로 먼 하늘에 번진 붉은빛을 응시했다.
랭던 경이 마차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나는 원치 않게 산 창부라는 오해에 대해 조금도 변명하지 못하고 내게 내민 그의 손을 잡은 채 마차에 올랐다.
랭던 경은 문을 바로 닫지 않고 의자에 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서야 새뮤얼에게 받은 지시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창부라는 오해에 당황해서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랭던 저하, 오늘 연락 없이 들르는 실례를 저질렀는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부스러지는 목소리로 새뮤얼에게 전달받은 대사를 읊었다. 랭던 경은 눈물이 고여 있는 내 눈동자를 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가 몇 주 뒤부터 시내의, 시내의….”
랭던 경에게 창부의 접근으로 보일 거라 생각하자 도저히 다음 단어를 내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눈물을 잘 참도록 도미닉이 교육하지 않았다면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 것이다.
“…센트럴 호텔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이 말이 랭던 경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많이 천박하게 들렸을까. 그렇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냥 호의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도, 도자기가 몇 점 있는데 귀한 화병이라고 합니다. 오늘 집사가 서쪽 홀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래, 랭던 경께서도 도자기를 모으시는 취미가 있으신 듯하여… 괜찮으시면 제 도자기 중 한 점을 선물로 드릴까 합니다. 연락 없이 찾아온 일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본래는 반지를 찾은 답례로 도자기를 선물할 계획이었으나, 거짓임이 들통난 반지 얘기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랭던 경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는 전갈을 보내세요.”
“네.”
랭던 경과 눈이 마주쳤으나 수치스러워서 차마 보고 있기 어려웠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자 코트 밑자락이 벌어져 드러난 내 바지 위로 다가오는 큼직한 손이 보였다.
큰 손바닥이 내 허벅지를 덮었다. 굵은 반지를 여러 개 낀 그의 손가락이 그대로 허벅지 안쪽을 감싸 쥐었다. 하필이면 성기가 수납된 쪽이라 랭던 경의 손에 내 것이 닿았다. 분명 느껴졌을 텐데, 랭던 경은 손길을 물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희롱에 몸이 굳어 손을 내치지 못했다. 얼굴이 불타올랐다. 머리를 숙인 채 떨고 있으니 그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대꾸를 잘하더니 이런 때는 얌전한 척을 하나 봅니다. 서튼 씨의 장사 기술인가요?”
“…그게, 그게 아니라….”
“그럼 잘 들어가세요, 서튼 씨.”
“네…, 랭, 던 저하.”
겨우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문이 닫혔다. 말이 걷기 시작했는지 마차가 조금씩 움직였다. 혼자 남은 마차 안에서도 차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꼼짝없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러운 눈물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묘하게 신경을 긁으며 기억에 보풀을 일으킨 순간들이 갑자기 모두 이해되었다. 내가 몸을 판다는 소문이 퍼져 다들 나를 보며 수군거렸고, 랭던 경은 나를 ‘서튼 씨’라고 부르며 하대한 것이다. ‘서튼 경’이라는 호칭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어쩌다가 그런 소문이 났을까. 어쩌다…. 여기서 더 명예를 잃어버리느니 죽는 것이 나은데.’
사교계와 멀리 떨어진 근교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나로서는 소문의 근원지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서튼가에 대한 불쾌한 호기심과 근거 없는 짐작들이 만들어 낸 상스러운 괴담이라고 생각할 밖에는.
집에 가면 도미닉 때문에 울 수가 없으니 마차에서 미리 울어 두어야 했다. 우는 모습을 들켰다간 귀족이 운다고 호되게 혼이 날 것이다. 나는 마차가 속력을 높여서 바퀴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커지고 나서야 울음소리를 겨우 흘릴 수 있었다.
“흐윽….”
몇 주 뒤 시내 호텔로 나들이를 오니 도자기를 보여 드리겠다는 소리가 오늘 랭던 경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두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질렀다. 막혀 있는 비명은 제대로 터져 나오지 못했으나 그렇게라도 서러움을 털어 내지 않으면 새뮤얼을 만나 태연히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외로이 서러움을 쏟아 냈다. 눈물을 참을 수 있을 만큼 한참 울고 나서야 마차 앞에 난 창문을 두드렸다. 마부가 앞 창문 덮개를 살짝 열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서튼 남작님.”
“약속 장소까지 길을 좀 돌아서 갈 수 있을까요?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도착하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문을 닫고 뒷자리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가끔씩 굴러떨어지는 눈물방울은 손끝으로 무심히 훑어 냈다.
길을 돌아간 덕분에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새뮤얼이 지정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수백 년 된 너도밤나무 아래였다. 멀리 서 있던 마차에서 내리는 새뮤얼의 그림자를 보고 나도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저녁이 되어 더 사나워진 바람 때문에 어깨를 웅크렸다. 우리는 나무 밑 작은 벤치에 앉았다. 그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앞을 보며 작게 대화했다.
“랭던 경과 만나고 왔어요.”
“관심을 보이던가?”
“호텔로 오면 전갈 달라고 하더군요. 같이 차도 마셨습니다.”
“그런 거 말고. 성적인 관심을 보였어?”
“…네, 있었어요.”
랭던 경의 스킨십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나는 새뮤얼의 질문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잘됐군. 다음 지시는 저번처럼 전달하지. 랭던 경과 섹스할 연습이나 해 두라고.”
새뮤얼이 그대로 일어나 가 버리려 해서 나는 급히 그의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새뮤얼이 특유의 야비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왜. 도와줄까? 남자와 자는 것.”
“아니요, 그게 아니라… 수도에 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는 것 알고 계셨어요?”
“무슨 소문?”
“제가….”
혹시 새뮤얼은 모르고 있는데 괜히 벌집을 들쑤시는가 싶어 망설여졌으나 도미닉에게는 더더욱 상의할 수 없는 문제였다. 도미닉 역시 사교계에 발걸음을 돌린 지 오래라 나처럼 아는 게 별로 없을 테고, 소문을 알면 몹시 화를 낼 테니까.
“…차, 창부… 라고….”
다시 눈가에 눈물이 스몄다. 마차 안보다 공기가 훌쩍 차가워 뺨에 닿는 물기가 몹시 뜨거웠다. 잡고 있던 새뮤얼의 코트를 스르륵 놓자 새뮤얼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소문이 있는 건 알았지만 로엘 네가 마음 아플까 봐 말하지 못했어.”
“모두 저를 보며 수군거려요. 프리데릭 경… 새뮤얼. 어떻게 해야 그런 소문을 없앨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도 모르겠구요.”
“로엘… 가여운 것. 그런 건 네가 명예를 회복하면 잊힐 헛소문이야. 알겠지? 그러니까 이번 내 제안은 사실 도미닉보다 네게 더 중요한 기회라고. 서튼가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남작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소문을 내겠나.”
“…….”
“랭던 경에 대해 조사만 제대로 해 주면 도미닉에게도, 로엘 너에게도 과거의 영광을 찾아 줄게. 지금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 소문을 역으로 이용하는 게 방법이 될 거야. 그동안은 차마 로엘 너에 대해 그런 소문이 났다고 얘기할 수 없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어.”
“그래서 저를 찾아왔던 거군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이 일에 제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셨다는 사실이…. 프리데릭 경은 이미 제가 창부라는 헛소문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제가 랭던 경에게 접근해도 그에게 의심받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거군요.”
“맞아… 그랬어. 하지만 나는 로엘 네가 창부가 아닌 걸 알고 있잖아.”
새뮤얼은 답지 않게 다정히 나를 위로했다. 랭던 경의 차가운 멸시로 상처 입은 마음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새뮤얼의 약속은 더없는 위안이 되었다.
여기서 더 울면 집에 갈 때까지 눈의 붓기를 가라앉히지 못할 듯했다. 울었다는 사실을 도미닉이 알아차릴까 봐 남은 눈물을 꾹꾹 눌러 내며 새뮤얼에게 부탁했다.
“도미닉에겐 얘기하지 마세요. 사실이 아닌 걸 알아도 저에게 실망할 거예요. 안 그래도 가문에 대해 마음을 많이 쓰는 사람인데….”
“알겠어. 나도 명예를 잃은 도미닉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야. …사실 이 싸움은 점점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해지고 있어. 앨버트 3세가 국민의 신임을 급속도로 잃고 있거든. 이 영문 모를 거대한 자본의 출처를 틀어막지 못하면 군사력에서 질 거고, 그러면 귀족들은 의회를 평민들에게 빼앗기고 말 거야. 돈만 있고 명예라곤 없는 벌레 같은 족속들! 그들이 서튼가는 몰락한 귀족이라고 가만둘 것 같나?”
새뮤얼의 제안 아래 나의 비밀스러운 신념과 개인적인 이해가 또다시 충돌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질지도 모를 불투명한 미래와, 로엘 서튼이 창부라는 오명을 벗고 귀족의 이권을 누릴지도 모를 반투명한 평온의 사이에서.
“…이 일의 필요성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저에 대한 헛소문이 아니더라도 서튼가에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일은 없겠죠. 지난 5년간 그랬으니까요. 다만 거짓으로 다른 사람에게 접근해서 친분을 쌓는 일이 떨리고 무서울 뿐이에요.”
“그럼 네가 원하는 건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하는 건가?”
“귀족의 신분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이 소문을 제게서 지워 주세요.”
“계약 성립이네, 로엘. 이제는 벗어날 수 없어.”
새뮤얼이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차가운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어 내고 그와 가볍게 악수한 뒤 말라붙은 눈물을 마저 손등으로 지우고 마차에 올랐다.
집으로 가는 내내 마차는 내 마음과 같이 흔들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덜컹. 덜컹.
나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내 인생을 가누며 살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겨울 하늘의 흐릿한 구름 뒤로 노르크의 달이 기울었다.
***
나는 2주 뒤 거처를 센트럴 호텔로 옮겼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사 와 어머니와 함께 쭉 지내 온 곳이었다. 집을 나와 도미닉과 떨어지는 일은 처음이라 적잖이 긴장이 되었다.
새뮤얼이 보낸 하인들이 내 짐이 담긴 트렁크 상자를 옮겼다. 옆집 베넷 부인은 나를 열여섯 살 때부터 보아 온 터라 내가 한동안 노르크의 수도에 머문다고 하니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서 멀리 나가시니 아쉬워서 어째요, 로엘 도련님. 윌리엄이 이모네서 돌아오면 도련님을 찾을 텐데!”
“종종 집에 들를 테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 윌에게 숫자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전해 주시구요.”
“아예 가시는 건 아니죠, 도련님?”
“그럼요. 몇 주 나들이 가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냥 호칭 없이 로엘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이구, 서튼 자작님께서 아시면 저 목 달아나요. 로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만 해도 큰 죄인걸요! 남작님이시잖아요.”
나는 같은 귀족이 나를 깔보는 경우가 아니면 상대방이 어떻게 호칭을 붙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베넷 부인과 내가 평등한 한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베넷 부인은 내 이름을 그냥 부르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편히 부르라고 해도 단 한 번도 호칭 없이 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얼룩진 흰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고 내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나는 애정을 담아 베넷 부인을 껴안고 등을 다독였다.
“잘 다녀올게요.”
“그래요. 수도로 가시는 거니 좋은 일인 거지요?”
“네, 아마도. 좋은 일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도미닉은 나와 같이 마차에 올랐다.
우리는 수도 중심지에 있는 센트럴 호텔에 도착해 501호에 짐을 풀었다. 가장 높은 층이었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는 동안 도미닉은 고급스러운 방을 부러운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이런 데를 마련해 주다니. 새뮤얼이 너와 우리 가문을 꽤 신경 써 주는 것 같구나.”
나는 우리의 대화를 듣는 귀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침대에 놓인 트렁크를 열며 무심히 답했다.
“랭던 경을 신경 쓰는 거죠. 그분이 들르실 곳이니까요.”
“새뮤얼이 너를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다니. 네가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더구나.”
“…형님, 과연 좋은 기회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앞으로 있을 일이 무서워요.”
“너는 잘 해낼 거야.”
도미닉의 목소리는 고목나무 밑동처럼 건조했다. 꺼내던 옷가지를 침대에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도미닉은 이미 내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얼굴에 표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위로받고 싶다는 나약한 욕망에 져서 형에게 무섭다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그러니까 심약한 소리는 하지 말아라, 로엘.”
도미닉은 엄격한 사람이라 내게 귀족의 예의를 가르치는 데 능숙했으나, 그 외의 일엔 서툴렀다. 아플 때도 간병 한번 해 준 적이 없어 베넷 부인에게 나를 맡겨 놓고 들여다보는 일도 꺼렸다.
형은 그런 유의 돌봄이 익숙하지 않은 유형이다. 스무 살에 해외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이라 성격도 무뚝뚝했다. 도미닉이 엄격한 방식으로만 사랑을 표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응석을 부린 것이 미안했다.
“죄송해요, 형님. 제가 하겠다고 프리데릭 경에게 확답을 드려 호텔까지 구해 주셨으니 이제 어떻게든 책임을 질게요. 한두 사람이 관련된 것이 아니니까요. 저도 약속받은 게 있구요.”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괴로운 순간이 있더라도 그때만 참아 내면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걸 알고 있겠지? 섹스로 몸이 아픈 것은 순간이야. 마음까지 아픈 거라고 착각하면 안 돼. 아무리 긴 전쟁도 언젠가는 끝나는 법인데 섹스쯤이야.”
“…네.”
도미닉은 호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호텔방으로 올라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에는 노르크의 겨울 햇볕이 따뜻하게 깔려 있었고 장작 타는 소리가 공기를 데우는 중이었다. 짐을 정리해 준 하인에게 수고비를 쥐여 주고 서재로 가 두꺼운 고급 종이를 꺼냈다. 검은 잉크에 펜촉을 담갔다.
테런스 랭던 경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센트럴 호텔에서 묵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도자기를 다섯 점 가져왔는데 주일에 미사를 드린 후 방문해 주시겠어요? 바쁘신 것은 알지만 지난번 일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수도에서 지내는 적적한 시간을 달랠 수 있도록 저의 작은 초대를 받아 주신다면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작은 마음을 담아, 로엘 서튼으로부터.
마호가니 책상의 서랍을 열어 금박 장식을 입힌 봉투를 꺼냈다. 종이를 접어 넣고 촛농을 부어 서튼가의 인장을 찍은 뒤 작은 종을 흔들었다. 거실을 정리하고 있던 하녀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가 랭던 경의 정찬에 참석하던 날 새뮤얼이 보냈던 하녀였다.
“테런스 랭던 경에게 보낼 서신이에요. 1층에 있는 배달부에게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서튼 남작님.”
“고마워요. 이름이?”
“메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메리 양. 서튼 씨라고 부르셔도 돼요.”
메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그게 더 편하시면 서튼 씨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나는 배달부가 돌아올 때까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랭던 경이 저택에 있을지, 있다면 바로 답을 주었을지 궁금해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화려한 무늬의 양산을 들고 가는 숙녀들과 혼잡한 인파를 뚫고 나가려는 마차, 하인을 대동하고 다니는 신사들로 넓은 대로는 인산인해였다. 길가에는 바닥에 앉아 물건을 파는 가난한 시민들과 노동을 하는 아이들이 도시의 그림자처럼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얼마 후 노크를 하고 들어온 메리의 손에 배달부가 전해 준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살펴봤다. 랭던가의 인장이 찍힌 붉은 봉랍이 붙어 있었으나 의외로 봉투 자체는 무늬도 없이 소박했다. 사치스러운 여느 귀족들의 취향과 사뭇 달랐다.
“고마워요, 메리 양. 이제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서튼 씨.”
메리가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비켰다. 봉랍을 뜯고 펼친 종이 위로 랭던 경의 유려한 필기체가 드러났다.
친애하는 로엘 서튼 씨에게.
주일에 아침 미사를 드리고 센트럴 호텔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이 호텔 근처에 문을 열었으니 나와 점심을 같이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비워 두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도자기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 주시오. 벌써부터 당신을 만날 주일이 몹시 기다려집니다.
그대를 생각하는, 테런스 랭던으로부터.
랭던 경의 예의 바른 서신을 읽고 너무 놀라는 바람에 입에서 그만 진심이 톡, 튀어나왔다.
“서신을 쓸 때는 인격이 바뀌나….”
집사가 대필을 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편지였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우아한 필기체는 어릴 때부터 좋은 선생에게 교육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서튼가의 몰락 후 가정 교사를 둘 형편이 되지 못했으나 나는 도미닉에게 손등을 맞아 가며 연습해 다행히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필기체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랭던 경의 글씨만큼 고상하지는 않았지만.
필기체 덕분에 간신히 대필의 의심을 떨쳐 내고 침실로 갔다. 나는 새뮤얼이 주었던 모조 성기가 든 상자를 꺼낸 후 모서리마다 기둥이 붙어 있는 캐노피 침대의 커튼을 쳤다. 나 혼자 묵는 방이라지만 훤히 드러난 데서 이런 상스러운 물건을 꺼낼 수는 없었다.
상자를 열자 모조 성기가 드러났다. 그때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크기가 상당했다.
“어쩌지.”
상자 안에는 민망한 그림을 곁들여 가며 사용법을 적은 종이와 삽입에 필요하다는 기름병이 나왔다. 나는 도구로 손을 뻗었지만 쉽게 만지지 못했다. 모조 성기의 감촉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손가락이 자꾸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쑥스러움을 겨우 삼키고 마침내 용기를 내 직접 도구를 쥐었지만 그것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
나는 도구를 든 채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연습할 용기가 나지 않아 조각을 다시 상자 안에 되돌려 놓았다. 이걸 도미닉이 말한 부위에 삽입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이 일을 회피하기 위해 미리 연습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부지런히 찾기 시작했다.
‘연습을 하지 않아도 처음이 아닌 척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티만 내지 않으면…. ’
그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랭던 경은 나를 이미 창부로 알았다. 그래서 내가 보이는 부끄러움과 어설픈 행동들을 모두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저 랭던 경의 대범한 행동과 깊이 있는 눈빛이 나를 수줍게 만들 뿐이었는데.
도미닉은 내가 랭던 경이 보내는 성적인 신호를 파악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았지만 둔한 나 역시 긴장감을 느끼는 때가 있었다. 랭던 경이 자신의 페니스를 내 입에 물리고 싶었다던 말이나, 내 손등을 더듬고 목덜미에 숨결을 남기는 순간이 그랬다.
내게 내비치는 랭던 경의 욕정은 상상보다 훨씬 생생하고 상스러운, 날것 그 자체였다. 새뮤얼의 계획대로 그는 나의 겉모습에 끌린 것이다. 내가 그 서튼이고, 소문난 창부임에도 불구하고.
“…못 하겠어.”
조각일 뿐인데도 뒤에 쓰는 건 물론이고 입에 넣어 보는 행동조차 천박하게 느껴졌다. 도미닉이 알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겠지만 내게 귀족의 품위를 가르친 사람도 형이었다. 나는 결국 상자를 다시 협탁에 되돌려 놓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밤에 잠을 잘 때도 협탁에 든 그 물건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저 도자기와 관련된 정보만 열심히 외우며 랭던 경과의 약속을 준비했다.
주일을 며칠 앞두고 새뮤얼이 호텔에 들렀다. 내가 혼자 연습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할 겸, 랭던 경과의 섹스에 필요한 물건을 전달할 겸 방문한 것이다. 하인이 작은 트렁크 하나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갔다.
“지금 열어 볼래?”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창부라면 이런 물건들은 가지고 있어야 해.”
나는 창부의 생활에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새뮤얼 앞에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연습은 잘하고 있나?”
새뮤얼은 내 연습이 어디까지 진행이 됐는지 궁금해했다. 희롱하듯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묻길래 담담히 속였다.
“하고 있어요.”
“창부처럼 보이려면 아파해서는 안 돼. 잠자리에서 랭던 경이 요청하는 것은 거절하지 말고.”
“그 사람… 많이 거칠다고 하던가요?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이요.”
“그렇다고 하더군. 침대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변태적인 명령을 즐겨 하는 사람이야.”
“…….”
“잠자리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말을 훈련할 때 쓰는 채찍처럼 거칠지 않으니 너무 겁먹지 마. 랭던 경이 누굴 다치게 한 적은 없으니까.”
새뮤얼이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하는 거짓말인지 제대로 된 정보인지 헷갈렸다. 사실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울 듯해 진실이 무엇인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저도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제 느낌엔 랭던 경이 이번에는 잠자리를 같이하려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걸 로엘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이에요.”
나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고, 새뮤얼은 조용히 시가를 태웠다. 꿍꿍이가 있는 눈치였으나 망설이는 듯했고 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아 묻지 않고 외면했다.
결국 새뮤얼은 호텔방을 떠나기 전에야 급작스럽게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내 어깨를 잡아 벽에 밀어붙이고 내 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짜증이 나서 붉어진 얼굴로 힘껏 그의 손목을 잡고 밀어 냈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새뮤얼에게 속삭였다.
“저는 남창이 아니에요. 랭던 경이 아니면 하지 않을 거예요.”
“뭐야. 이미 랭던 경에게 마음이라도 준 거야?”
새뮤얼이 비열하게 웃으며 나를 조롱하려 들었지만 그의 비웃음은 내 마음에 어떤 파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새뮤얼은 상스러운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할 남색, 나랑 미리 해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새뮤얼이 길게 찢어진 눈을 찌푸렸다. 나는 그를 막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며 새뮤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구겨진 옷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정리하고, 그의 폭력에 담담한 척 표정을 가장했다.
“랭던 경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그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게 아니면…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해야 하는 경우에만 하게 해 주세요.”
“결국 소문대로 돈 받고 일하는 창부가 된 주제에 고급스러운 척 굴긴. 더러운 서튼가 잡종 주제에.”
새뮤얼은 욕을 지껄이며 벽을 걷어찬 뒤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새뮤얼이 배려 없이 밀쳤던 어깨를 문지르며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두어 번 떨어졌지만 그 이상은 울지 않았다.
***
주일 아침엔 첫눈이 노르크의 수도에 인사를 건넸다. 첫눈이 으레 그렇듯 눈발은 약했고 땅에 닿자마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바닥을 내밀어 눈송이를 확인하기 바빴다.
춥기로 유명한 노르크 겨울의 서막치고는 미미한 눈이었으나 꽝꽝 언 공기가 앞으로 닥칠 추위를 예고했다. 나는 평소 집에서 입던 수수한 차림에 단정한 외투를 입고 작은 성당에서 조용히 미사를 드린 뒤 호텔로 돌아왔다.
랭던 경이 나를 방문했을 때는 메리가 내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를 보기 좋게 정리해 준 뒤였다. 랭던 경은 높이가 적당한 실크해트를 쓰고 조끼에 프록코트를 갖춰 입은 완벽한 신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끼 단추에 걸린 회중시계의 금빛 체인이 아래로 둥근 선을 그렸다. 에메랄드 저택을 벗어난 초록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몇 번을 봐도 우아한 랭던 경의 자태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가 한 박자 늦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랭던 경은 실크해트를 벗으며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낮은 목소리가 기분 좋은 울림을 일으켰다.
“오랜만입니다, 서튼 씨.”
“안녕하세요, 랭던 경.”
“무척 좋은 향수 냄새가 나는군요.”
“로열 센트사에서 새로 나온 제품이라고 해요.”
새뮤얼의 대본에 맞춰 나는 모든 물품을 고급 브랜드로 조달받았다. 최근 신사들에게 유행하는 향수, 옷, 마차, 경마 게임… 랭던 경과 대화 수준을 조금이라도 맞추기 위해 외워야 할 목록은 끝이 없었다. 최신 문화에 무지한 상태는 내가 남창이라는 루머와 모순되는 것이었고, 그에게 접근하는 이유에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랭던 경과 나는 레스토랑 근처까지 눈을 맞으며 걸어갔다. 흩날리듯 내리는 싸락눈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산 없이 옷깃만 여민 채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랭던 경과 나는 다소 어색하게 거리를 둔 채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나는 발걸음이 빠른 랭던 경을 놓치지 않고 쫓아가기 위해 행인들 사이에 솟아 있는 실크해트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앉고 나서야 훈훈한 공기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점원은 우리 둘의 프록코트를 받아 귀퉁이에 놓인 16세기 왕실풍 옷장 안에 걸어 두었다. 랭던 경이 내게 메뉴를 권했다.
“요리사가 양고기를 상당히 잘 손질하는 편입니다.”
“그럼 저도 양고기를 먹어 볼게요. 랭던 저하께서는 포도주는 어떤 것으로 드세요? 추천해 주실 만한 것이 있으신가요?”
“내가 포도주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따로 맡겨 둔 것이 있습니다. 1727년산 몬테르 포도주인데 한번 마셔 보세요. 양고기와도 잘 어울립니다.”
“저야 좋습니다. 랭던 저하 덕분에 오랜만에 몬테르 포도주를 마셔 보겠어요.”
“마셔 본 적 있나요? 생산이 중단되어 구하기가 어려운데.”
“60년인가, 70년산으로 마셔 봤어요.”
대본에 맞춰 나는 포도주에 대해 최대한 아는 척을 했지만 기실 싸구려 포도주 말고는 맛본 경험이 없었다. 중간중간 거짓을 섞어 말하느라 긴장감에 속이 죄였다. 대화하는 내내 목소리도 약하게 진동했으나 랭던 경은 다행히 내 떨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양고기에 곁들여 먹는 몬테르 포도주의 맛은 훌륭했다. 우리는 가끔 서로를 쳐다보는 것 말고는 꽤 조용히 식사했다. 랭던 경은 보통의 신사들과 달리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아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새뮤얼의 추측대로라면 정치에 관심이 많아야 할 텐데. 그는 그저 성당에 새로 부임한 주임 신부님과 얼마 전 열린 경마 대회에 대해 간단히 얘기했을 뿐이다.
“랭던 경께서는 신앙심이 깊으신가 봐요.”
“딱히 신앙심은 없습니다. 죽은 남동생이 신심이 깊었어요. 동생이 내가 성당을 열심히 다니길 원했고 또 공작의 신분으로 미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어 가는 것뿐이에요.”
“죄송해요. 남동생이 있으셨나 봐요.”
“있었습니다. 6년 전까진.”
죽은 남동생의 뜻을 아직까지 지키는 걸 보면 상당히 귀애했을 테니 슬픔이 몹시 컸을 듯했다. 그에게 좀 더 편한 대화 주제인 포도주 쪽으로 말을 돌렸다. 불편한 소재로 대화하기에 우린 아직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새뮤얼은 내가 랭던 경의 사생활을 두더지처럼 요목조목 파헤치길 원했으나 그의 계획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은 결국 랭던 경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나는 내 방식으로 랭던 경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막역한 관계가 되지 않고서야 그가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나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평민이 의회에서 표를 행사하는 세상을 지지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포도주가 정말 풍미가 좋네요. 오래전부터 수집하셨어요?”
“저택에 포도주 저장고가 크게 있습니다. 매주 새로운 포도주를 들여와 요리에도 쓰고 내가 마시기도 하는데 귀한 것들은 따로 모아 두거든요.”
“오늘 마신 것도 개인 저장고에 보관하셨던 귀한 포도주인가요?”
“그렇습니다. 서튼 씨는 내 손님이니 귀한 걸 대접해야죠.”
우연인지 그가 말을 마칠 때쯤 내 구두코에 묵직한 움직임이 닿았다. 그의 구두 끝이었다.
서로의 신발이 닿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그가 당연히 바로 물릴 줄 알았는데 구두의 묵직한 무게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기를 택했다.
긴 테이블보가 식탁 아래 맞닿아 있는 우리의 비밀스러운 발끝을 가렸다. 맨살이 만난 것도 아닌데 묘한 긴장감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스멀스멀 기었다. 목이 바싹 말라 포도주 대신 물을 한 모금 넘겼다.
랭던 경은 공중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두어 번 구부리며 간단한 제스처로 지배인을 불렀다.
“포도주.”
“네, 공작님.”
지배인이 재빨리 다가와 한 손을 뒷짐 지고 능숙한 자세로 다시 포도주 잔을 채웠다. 투명한 잔으로 떨어지던 붉은 술이 쪼로록- 소리와 함께 그치고 지배인이 병을 거두었다.
포도주 도수가 높아 나는 이미 취기가 살짝 오른 상태였다. 다시 채워진 포도주를 보니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취한 상태가 나을지, 멀쩡한 상태로 있는 게 나을지 저울질했다.
나는 포도주를 더 마시는 쪽을 택했다. 이 작은 선택들은 중요한 갈림길일 수도 있고 같은 목적지로 통하는 별거 아닌 외길일 수도 있었다. 내가 어떤 길을 택한 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포도주 향을 맡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혀 위에 남은 쌉쌀한 맛을 음미했다.
“조금, 취기가 오르네요.”
“술에 약한 편인가요?”
“잘 마시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튼 씨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술 마실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네, 랭던 경. 그래야 하는데 저에겐 쉽지 않더라구요.”
취기가 뻔뻔한 답변을 하도록 도왔다. 내 소문을 처음으로 긍정하자 여태 매너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랭던 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동자 속에 반짝이던 별들의 뾰족한 끝이 일제히 나를 겨누는 느낌이었다.
랭던 경은 잠깐 포도주 잔을 돌렸다. 포도주 향이 짙어지는 동안 그는 잔을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그렇게 부정하더니.”
“…랭던 저하께서 소문을 들으신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의도를 오해하실까 걱정도 되었구요.”
“차라리 부정하던 때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랭던 경은 내 눈을 마주 보지 않고 답했다. 그는 술을 마시려다 말고 잔을 내려놓은 뒤 냅킨으로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우아한 손끝이 테이블을 약하게 두드렸다.
나를 창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왜 부정하던 때가 나았다고 말하는 걸까.
랭던 경은 내가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혹여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나요?”
“뭐라고 해야 할까. 부정하는 모습이 서튼 씨에게 더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서튼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정찬에서 내 시선을 빼앗았던 당신의 느낌과 일치한다고 해야 하나.”
내내 닿아 있던 랭던 경의 구두코가 물러났다. 무게가 떨어지자 발끝이 이내 허전해졌다. 나는 무게가 사라진 발끝을 같은 자리에 두지 못하고 결국 내 의자 밑으로 천천히 끌고 왔다.
랭던 경에게서 느껴지는 실망의 기색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사적인 감정이 없는데도 계곡물에 휩쓸린 종이배처럼 마음이 힘없이 침몰한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내가 맡은 역할에 따라 다가가고 상황에 따라 감정을 연기하는 것뿐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이제 막 성년이 되어 모든 경험이 부족한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나온 거리에는 여전히 싸락눈이 내렸다. 우리는 식당으로 왔을 때처럼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호텔로 돌아갔다. 서로 닿아 있던 발끝의 감각은 돌바닥에 떨어진 싸락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일을 맞은 호텔 로비는 북적였다. 우리는 각자 머리에 얹힌 눈을 털어 내고 계단을 밟았다. 위층으로 갈수록 손님이 줄었다. 한산한 5층에 도착해 그를 내 뒤에 세워 두고 열쇠를 돌리면서도 사실 나는 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다 실감하지 못했다.
“들어오세요, 랭던 경.”
“고맙습니다.”
랭던 경은 들어오며 실크해트를 벗고 다시 여유 있는 표정으로 호텔방을 훑어봤다. 널찍한 호텔 장식장엔 메리가 신경 써서 전시해 놓은 도자기와 찻잔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식장으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잡으며 나를 흘끗 쳐다봤다.
“열어 봐도 될까요?”
“언제든지요.”
랭던 경은 양쪽 문을 열고 도자기를 유심히 보다가 백색의 긴 병을 꺼냈다. 도자기를 쥔 그의 손가락은 마디가 무척 굵었지만 섬세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찬찬히 훑었다. 도자기를 진지하게 보고 있는 그의 눈빛도.
랭던 경은 지난번 그런 상스러운 말을 했던 사람답지 않게 둘만 남은 호텔방에서도 내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와 찻잔을 유심히 살펴볼 뿐이었다. 반면 나는 온몸으로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랭던 경이 날 건드리면 어쩌나, 혹은 건드리지 않으면 어쩌나. 제대로 못 하면 도미닉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섹스를 하고도 마음을 얻지 못하면 어떡할까. 나를 괴롭히는 다양한 상념들.
나는 긴장을 풀려고 근처에 놓인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태연히 제안했다.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서튼 씨에게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반지는 정말 잃어버린 게 아니었으니 인사치레는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
“서튼 씨만 괜찮다면 구입을 하고 싶습니다.”
“편지로도 말씀드렸지만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한 데 대한 사과의 의미로 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랭던 경에게 한 거짓말을 들켰다는 사실은 새뮤얼에게도 도미닉에게도 비밀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인정한 걸 알면 둘 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며 화를 내겠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나는 한편으로 그를 속인 일을 진실되게 사과하고 싶었다. 술기운 탓인지, 이 연기에 진실이 섞이지 않으면 랭던 경의 마음을 엿볼 수 없을 거란 미약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새뮤얼이 경고했던 대로 랭던 경은 분명히 오만하고, 권위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그를 너무 단순하고 편리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랭던 경에 대한 새뮤얼의 과소평가였다. 그의 눈빛에는 영민하고 진실한 데가 있었다.
랭던 경이 도자기를 장식장에 되돌려 놓으며 되물었다.
“내 집에 와서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뭡니까? 내 후원을 받고 싶었나요?”
“아니요, 후원을 받으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저는 그저 에메랄드 저택으로 돌아가 랭던 저하를 다시 한번 뵐 기회를 얻고 싶었습니다.”
“후원을 바랐던 것은 아니라고 하니 거창한 표현은 정정하겠습니다. 내게 저급한 몸을 팔아 화대를 받고 싶었던 건가요?”
그의 말이 나를 거칠게 할퀴었다. 내가 거친 말을 삼켜 내는 방법을 몰랐다면 화를 내고 울었을 텐데, 나는 도미닉 덕분에 다행히 그런 언어를 소화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화대는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랭던 저하께서 저를 안고 싶으실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창부의 경박한 호기심이었어요.”
“…….”
“저를 서튼 씨라고 하대하셔서 오기가 생기기도 했구요. 창부라는 소문도 이미 알고 계셔서 속이 상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그보다는 다시 뵙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귀족 중의 귀족이신 랭던 저하께서 제게 관심을 보이셨으니 혹시 저를 그냥 안아 주시지는 않을까…. 제 주제에 너무 과한 욕심이었을까요?”
나는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그가 믿고 있는 잘못된 소문으로 한 겹 포장한 진실을 그에게 내밀었다. 로엘 서튼이라는 남창은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거짓말을 핑계로 테런스 랭던 공작에게 안겨 보고 싶었다고.
랭던 경이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긴장한 채 랭던 경의 표정을 더듬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공작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고귀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쳐다봤다. 그 눈빛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애써 두려움을 목 뒤로 넘겨 내고 남창인 로엘 서튼이 할 만한 말을 지어냈다.
“랭던 저하께서 제 몸에 끌리셨다는 말씀은요. 그 말씀은 이제 유효하지 않나요? 고귀한 저하께 저의 천한 인격은 당연히 흠이겠지만… 몸이 천한 것도 싫으실까요?”
그에게 묻는 음성이 싸락눈처럼 희미하게 떨렸다. 스스로 내뱉는 모욕이 켜켜이 가슴 안쪽에 쌓여 눈가에서 흘러내릴 듯 넘실거렸다.
랭던 경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 쪽으로 발을 성큼 디뎠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 벽이 다가오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으나 발을 뒤로 물리지 않고 참았다. 의자 등받이를 더 세게 움켜쥐고 눈물이 고이려는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내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하자 커다란 손이 턱을 세게 잡아 고정했다. 랭던 경은 허리를 낮추어 가까이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발코니에서 내게 서튼 경이라고 불러 달라 요청할 때는 당신이 너무 당당해 소문이 거짓인가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정체를 들키고 나니 줄 하나 잡아 보려고 버둥대는 창부의 인생이 비참하기 짝이 없군.”
내 턱을 잡은 그의 손길에서 힘이 살짝 빠지고, 긴 손가락이 이내 턱선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하지만 정체를 알고 나서도…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욕정이 가시지 않습니다. 살이 얼마나 부드러울지, 신음하는 모습은 어떨지… 성기를 쑤셔 박으면 그 아름다운 얼굴이 어떻게 흐트러질지 보고 싶어서.”
내 가슴을 덮고 있는 프록코트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그 밑의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음을 드러냈다. 호흡을 정리해 보려고 해도 입 속의 공기가 부서지는 얼음처럼 튀어 올랐다. 능숙해 보여야 하는데, 턱을 부러트릴 듯 억세게 잡고 있는 커다란 손과 가까이서 맞대고 있는 흥분한 녹색 눈이 나를 긴장시켰다.
랭던 경은 의자 등받이를 잡은 내 손목까지 마저 쥐어 잡고 그대로 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으나 몸이 떨려 쉽지 않았다. 나의 떨림을 그가 의아해하지 않길 빌었다.
랭던 경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키스를 하려는 줄 알았으나 그는 바로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단단한 이가 살을 파고드는 동시에 피부 위로 그의 뜨거운 혀가 닿았다.
“아!”
치아는 목덜미를 씹으면서 어깨로 이어지는 움푹한 데까지 내려왔다. 멍울이 맺힐 정도로 짓씹는 행위에 아무리 입술을 물어 봐도 앓는 소리가 흘러내렸다. 습한 숨결과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이상한 느낌이 고통의 틈을 파고들었으나 통증을 덮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읏, 흑….”
섹스에는 원래 이런 행위가 동반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창부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걸까?
나는 아프다는 말을 고통과 함께 삼켜 냈다. 몸을 달달 떨면서 장신의 그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발끝을 들었다. 그는 계속 내 목을 여기저기 빨고 이를 박았다. 몸에 실리는 무게에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렸던 걸음이 모여 몸 뒤편에 소파가 닿았다.
랭던 경은 나를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트리고 셔츠를 반쯤 밀어 올렸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시선 아래 훤히 드러난 내 배가 경련하듯 떨리는 것이 보였다. 랭던 경은 내 몸에 올라타 재킷을 벗고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면 안 되는 행위나 규칙이 있나요? 아니면 돈만 받으면 어떤 거라도 다 합니까?”
“…저는, 어떤 거라도….”
“남창 중에서도 갈 데까지 간 남창이군.”
경멸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지 못하도록 애썼다. 모욕감보다는 목에 남은 통증이 차라리 견뎌 내기 쉬웠으니까.
랭던 경은 허리를 숙여 조금 전까지 목덜미에 머물렀던 두꺼운 혀로 내 배 위를 뜨겁게 쓸어 올렸다.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 뜨거움에 오히려 더 놀라 버린 몸이 펄떡거렸다.
“흐읏… 아….”
혀의 온도와 피부에 닿는 랭던 경의 숨결 때문에 아랫배가 너무 뜨거웠으나 떨림을 감추느라 그 촉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몸 옆에 붙이고 있던 손을 꽉 오므렸다. 랭던 경은 셔츠를 마저 걷어 올리며 내 바지춤에 손을 뻗었다가 갑자기 인상을 쓰며 몸을 떨어트렸다.
“하.”
그는 몸을 펴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찍어 내렸다. 어떻게 봐도 짜증이 가득 찬 시선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아내고 싶었으나 이 행위의 모든 것이 낯설어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쯧. 랭던 경은 혀를 차며 내 바지와 속옷을 배려 없이 잡아 내렸다. 단추를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고 옷만 거칠게 내린 탓에 바지가 허리 부분에 걸려 살이 볼록하게 솟았다. 그는 더러운 물건의 먼지를 닦아 내듯 검지로 몸에 남아 있는 길고 붉은 멍을 쓸어내렸다.
“아! 아….”
멍이 눌리자 더없이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은 못 하고 소리만 내질렀다. 허리와 엉덩이 사이쯤 남아 있는 회초리의 흔적이었다.
“나는 몸에 다른 사람 흔적이 남아 있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이건… 그런 게….”
“그래도 서튼 씨 인상이 여려 보여 부드럽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제는 고민할 필요 없겠어요. 나도 좋아합니다. 때리는 것도, 울리고 괴롭히는 것도.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자국이 남은 몸에 박는 취미는 없으니까 다시 간수 제대로 해 놓으세요. 손님을 받지 않아 손해 보는 화대는 내가 지불하겠습니다.”
“…부, 불쾌해하실 줄 몰랐습니다, 랭던 경.”
“남창을 안으려니 쓸데없이 더러운 일이 많군.”
랭던 경의 비난에 온몸이 벌겋게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벗길 때처럼 거칠게 내 바지를 위로 다시 대충 끌어 올렸다. 나는 셔츠를 움켜잡고 오한이 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다시 혀를 차며 고민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과 몸을 훑어 내렸다. 나와 섹스하고 싶은 욕정과 창부와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보였다.
멍은 형에게 훈육을 받은 후 생긴 회초리 자국이었으나 얘기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내 랭던 경이 멍 자국을 섹스의 흔적으로 오해하게 두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은 랭던 경이 불쾌하겠지만 오해를 놔두어야 내가 서투른 티를 내도 소문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다른 그럴싸한 변명조차 지어내지 못한 건 내가 성(性)적으로 백지장인 탓이었다. 민망함과 그가 몸에 남겨 놓은 열기가 뒤섞였다. 흐트러진 셔츠를 쥐고 푸르르 떨기만 하는 내 손을 그가 거칠게 끌고 가 자신의 바지춤에 댔다. 단단하고 커다란 페니스가 손바닥 밑으로 느껴져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건 그대가 식혀야지.”
“…네, 저하. 저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짐짓 어떤 요청 사항이라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물었다. 차마 눈도 못 마주치면서 입으로는 그럴듯하게. 시야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는 그가 허리띠를 풀어내며 고갯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꿇어요.”
낯선 명령에 잠시 망설이다가 소파 밑으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으면서야 하필 카펫이 없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한 뼘만 더 옆으로 움직이면 카펫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자리를 옮겨도 되냐고 부탁하지 못했다.
진짜 창부는 그 정도의 부탁은 청하기도 하는지, 그런 부탁은 청할 수 없는 처지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댔다. 랭던 경은 나를 내려다볼 뿐,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앞으로 살짝 기어가자 랭던 경은 내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랭던 경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붉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뻗어 바지 여밈 단추를 풀었다. 차마 더 손을 대지 못하고 주저하자 냉랭한 목소리가 나를 비웃었다.
“그렇게 내숭을 떨면 손님들이 좋아하나요?”
랭던 경은 얼어붙은 나 대신 자신의 것을 꺼내서 손으로 감싸고 느릿하게 문질렀다. 처음으로 그의 성기를 마주한 내 눈이 저절로 커다랗게 열렸다. 단단하게 선 그의 것은 성에 무지한 사람이 봐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그의 커다란 손으로도 길이가 다 잡히지 않았다.
놀란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랭던 경은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느긋하게 웃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 잡아 자신의 성기로 끌어갔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당기는 것은 아팠지만 처음 뺨에 닿는 남근의 외설스러운 느낌이 아픔을 압도했다. 뺨이 성기의 굴곡을 문지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흠칫 떨었다.
“너무 커서 겁납니까? 그래도 다 삼켜야 합니다. 넣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상당히 싫어해서요. 특히 서튼 씨의 목구멍에는 끝까지 처박아 주고 싶어요.”
“저하, 이렇게 큰 건, 처음이라….”
역시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몰라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계속 내 머리를 쥐고 움직이며 뺨 위에 계속 성기를 비볐다.
“창부들은 다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편견이오? 아니면 능숙해지지는 않는 게 서튼 씨의 영업 전략인가요?”
“저하… 저는….”
“서튼 씨는 돈을 받고 하는 사람이니 안 되면 될 때까지 연습이라도 해 오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뺨으로 문지를수록 성기는 점점 단단해졌다. 처음 본 크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좀 더 부푸는 것이 느껴져 무섭고 두려웠다. 입 속에 반은 넣을 수 있을까 싶었다. 다 넣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가 모욕을 주며 몰아붙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울음이 터질 뻔했지만 도미닉에게 교육받은 게 있어 억지로 참아 냈다.
마침내 그가 쥐고 있던 내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히며 귀두로 입술 위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천천히 입을 벌리며 성기를 머금었으나 끄트머리를 겨우 입에 담은 정도였다. 귀두가 입천장과 혓바닥을 누르며 안을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구역질이 나서 억지로 입에 넣고 있는 수준이었다.
랭던 경은 반도 넣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감쌌다.
“서튼 씨, 고개 들고 눈 마주쳐요. 그 예쁜 얼굴이 좆을 물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힘들어하는 것까지 샅샅이.”
“…흐읍, 흣….”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그의 성기를 문 채로 눈꺼풀을 들었다. 눈과 뺨에 붉은 열감이 느껴졌다.
랭던 경은 움직이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엄지로 이마, 눈꺼풀, 뺨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나는 입술을 벙긋대며 토기를 참고 성기를 조금 더 안쪽으로 넣었으나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바가 없었다. 삼키지 못한 침이 턱을 적시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하… 표정은 꼴려서 좋지만 놀지 말고 혀로 문지르면서 빨아 봐요. 내가 그대의 물컹하고 작은 혓바닥이 어디 있는지 항상 느낄 수 있도록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침대 위에선 성미가 급하고 난폭해 화가 나면 매를 들고 싶어지거든.”
입 속을 누르는 성기가 버거워서 웅크리듯 감추고 있던 혓바닥을 폈다. 억지로 혀를 기둥에 가져다 붙이자 성기가 혓바닥 전체를 짓눌렀다. 소리 없이 구역질을 하며 성기를 뺐다가 다시 그 정도 깊이로 집어넣었다.
“흣, 흡… 끅….”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랭던 경이 내가 구역질을 참고 뻣뻣한 목울대를 움직여 겨우 침을 삼킬 때마다 아쉬운 듯 숨을 내쉬는 게 정확히 보였다. 나로서는 최선인데 그에게는 불만스러운 것이 확실했다.
혀의 뿌리가 당길 정도로 혀를 빼고 살 기둥을 문질렀다. 진한 살냄새가 입 속을 뒤덮는 내내 애를 썼다. 입 주변이 침으로 다 젖도록 고개를 움직여 봐도 넣은 깊이 자체가 얕기 때문인지 그는 사정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흐응… 흣….”
“후으… 안 되겠어요. 내가 움직이겠습니다.”
랭던 경은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받쳐 표정이 잘 보이는 각도를 만든 후 성기를 내 입 속에 직접 박아 넣었다가 뺐다. 내가 구음을 잘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성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말대로 흐트러진 얼굴을 감상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페니스는 반쯤 들어와 박혔다가 빠져나갔다. 나는 몇 번이나 구역질을 참느라 눈에 핏발이 서고 턱에 침이 고여 떨어졌다. 남자의 것을 빨고 있다는 수치심과 성기가 입 속을 범하고 있다는 모욕감은 현재 몰아치고 있는 고통에 밀려 후 순위가 되었다.
“흡, 으응… 응….”
“서튼 씨, 흣… 입이 너무 작으니, 더 크게 벌려 보세요. 반도 못 넣었는데 사정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꿇고 있는 다리가 저리고 턱은 뻐근하다 못해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 랭던 경이 시키는 대로 해야 구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해 고통을 참으며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그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성기를 좀 더 집어넣었다. 목구멍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 직전까지 꽉 찰 정도가 되었다. 성기가 입 속을 가득 메우자 그가 내 목을 조르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만큼 숨을 쉬기 어려웠다.
나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해 본능적으로 그의 무릎을 붙들었다. 제발 그가 움직이지는 말아 주었으면 해서 빌듯이 잡은 거였는데 랭던 경은 그대로 입 속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성기가 박힐 때마다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윽, 흐읍… 컥….”
성기를 반쯤 넣고 스스로 빠는 것과 목구멍 직전까지 거칠게 박히는 것은 고통의 수준이 달랐다. 호흡이 힘들어지자 본능이 이성을 조금씩 넘어섰다. 나는 버거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꿇고 있는 무릎을 맨바닥에 동동대며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랭던 경은 내가 침을 흘리거나 울어도 상관없다는 듯 배려 없이 성기로 혀를 짓누르고 귀두를 비비며 나를 농락했다. 조금만 얼굴이 자세히 안 보여도 내 턱을 손으로 받쳐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내가 성기를 빨며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겠지만 처음 구음을 하는 내게는 그의 눈을 보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입을 잔뜩 벌린 채 그의 지시대로 계속 페니스에 혓바닥을 붙였다.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숨기려 해 봐도 자꾸 입 속이 그의 것을 밀어 내는 게 느껴졌다. 성기는 밖으로 밀려 나가고 나는 계속 무릎을 동동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랭던 경이 한숨을 쉬며 페니스를 빼냈다. 나는 그가 턱을 놓아 주자마자 발아래 엎드려서 목을 부여잡고 컥컥대며 울었다. 수치심과 서러움이 뒤섞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못하겠어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눈물을 더 뜨겁게 데웠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떡하나. 싸기 직전이었는데.”
야속하다 못해 가슴이 저며 오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끝났던 걸까? 진작 얘기해 주지. 또 못 하겠는데… 너무 아파….’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흡, 흐윽….”
“서튼 씨가 내 좆을 더 빨고 싶었나 봅니다. 창부의 일용할 양식이겠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했다. 부정은 진심이었고 긍정은 거짓이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대답도 허락할 수 없었다.
고통에 동동대던 무릎이 자꾸 바깥쪽으로 휘며 얼른 일어나 도망가자고 나를 졸랐다. 무섭고 아파서 못 하겠다고 애걸하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상체를 들었다.
“손을, 손을 같이, 흡… 써서 해도, 될지….”
“나는 안 된다고 한 적 없습니다.”
랭던 경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고 틀린 말이 아니라 나는 다른 대꾸는 하지 못했다. 다만 사정 직전이었다는 사실에 너무 속이 상해 눈물을 닦아 내며 작게 덧붙였다.
“사정, 하실 것 같으면 말씀해 주세요. 힘들어도 참고 더 할게요.”
“화났습니까? 말투가 차갑군.”
“…조금요.”
“어떡합니까. 사실이 그랬는걸.”
“말씀해 주셨으면 조금 더 참았을 텐데…. 저하의 것이 너무 버거워서요.”
“그에 비해 서튼 씨의 입 속은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서투르게 빨아도 기분은 좋아요. 연기인지 내 좆이 너무 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도 녹일 것 같은 달콤한 입 속이오.”
기분이 좋다는 랭던 경의 다정한 위로가 한 가닥 간절한 위안이 되었다.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만이 내가 이 행위를 하는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랭던 경과 친밀해지고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얻어 정보를 캐내는 것.
힘든 마음을 최대한 추스르고 성기에 조심히 손을 가져갔다. 다른 사람의 페니스를 만져 보는 일도 처음이라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잴 때처럼 손끝을 댔다 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겨우 성기를 쥐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랭던 경의 사정감이 가시지 않도록 혀를 빼서 성기를 진득하게 문지르고 비비며 핥았다. 랭던 경을 올려다보면서 하니 그가 작게 신음을 내쉬었다. 나는 이내 그의 고간에 얼굴을 처박고 성기를 할짝대며 물었다.
“입 속에 하실 건가요?”
“얼굴 위. 얼굴 전체에 뿌리고 싶으니까 성기를 빼내면 입술을 닫으세요.”
“…네, 저하.”
이미 한참 전에 감각이 사라진 턱을 벌려 성기를 급히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남근을 빨아야 하는 수치심은 혓바닥이 눌리는 고통에 곧 잊혔다.
나는 요령 없이 무턱대고 혀를 문지르고 고개를 열심히 앞뒤로 움직이며 페니스를 빨고 또 빨았다. 다시 머리카락 틈에 땀이 촘촘히 차고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구음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 줄 상상도 못 했다.
랭던 경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은 내 머리를 쥐어 잡으며 알렸다.
“다시 직접 박겠습니다. 서튼 씨가 영 힘들어해서.”
“…흣,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꽉 붙들고 다시 입 안에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내가 다 넣지 못하는 걸 알아 반쯤 들락이는 게 전부였으나 그마저도 너무 커서 아까처럼 그의 무릎을 잡은 채 구역질을 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의 성기 주변과 바지 자락 여기저기에 눈물이 튀었다.
성기가 입 속을 비비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한참을 더 문지르고서야 그가 성기를 빼냈다. 나는 그의 명령을 기억하고 입술을 닫은 채 얼굴을 들었다. 끈적하고 뜨거운 정액이 얼굴에 뿌려졌다.
“하아….”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리고 이마와 눈꺼풀을 덮은 뿌연 액체가 뺨과 입술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끈적한 정액 때문에 뜰 수가 없었다. 랭던 경이 자신의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며 내 얼굴에 정액을 뿌리는 모습만 언뜻 봤을 뿐이다. 그는 깊은 숨을 토해 내고 귀두를 내 뺨에 문지르며 마지막 정액 한 방울까지도 내 얼굴에 묻혔다.
뺨, 눈꺼풀, 턱, 입술… 정액이 묻은 귀두가 미끄덩 스쳐 지나가며 온 얼굴을 그의 흔적으로 덮었다. 랭던 경이 자신의 정액을 펴 바르는 동안 나는 수치심에 온몸을 떨었다.
눈을 뜨지 못하고 입을 벌리지 못할 정도로 얼굴에 정액을 치덕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행위라 모욕감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가슴에 담겼다.
랭던 경이 소파에서 일어나 옷을 갖춰 입는 기척이 들렸다. 정액을 바로 닦아 내도 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흥분감이 남은 저음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다른 남자의 자국이 보여 기분이 상했는데 구음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좆을 빠는 내내 얼굴이 다 젖도록 울던데 좋아서 울었어요?”
“…….”
“질문에는 대답을 해야 예의 아닌가요?”
“…좋아서, 울었습니다.”
나는 그가 의도한 대로 수치심을 느끼며 얌전히 대답했다. 말을 시키는 바람에 입술을 적시고 있던 정액의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침과 함께 삼켰다.
“하긴, 이러고 싶어 내 저택에 기어들어 온 것일 테니까.”
랭던 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려는 건가 싶어 어깨가 굳었다. 저린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앉아서 기다리는 사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랭던 경이 나간 듯했다. 무릎을 짚은 채로 떨다가 뻣뻣해진 다리를 조심스레 펴고 손을 더듬어 소파 위로 올라앉았다.
숨도 쉬지 못하고 눈물과 침을 흘려 대며 구음을 하던 때가 비참함의 정점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혼자 남은 지금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던 순간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정액을 닦아 내야 했으나 손이나 옷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저린 다리를 힘없이 뻗고 앉아 있는데 갑작스러운 기척과 함께 얼굴에 수건이 닿았다.
“왜 죽을상을 하고 있어요? 닦으세요.”
그의 목소리였다. 아무런 인사 없이 가 버린 줄 알았는데….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자 순간의 오해로 인해 최대치로 쌓였던 비참함의 더미가 무너졌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정액을 최대한 꼼꼼히 닦아 내고 고개를 들어 랭던 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물수건도 내게 건네주었다. 의외의 다정한 배려였다. 사실 그냥 나가 버리는 쪽이 내가 생각한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지만 홀로 남는 것보단 추측이 틀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랭던 경이 옆에 걸터앉자 푹신한 소파가 푹 들어갔다. 그는 아직 몸을 떨며 얼굴을 닦고 있는 나 대신 셔츠 단추를 여며 주었다. 기운이 없어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단추를 끼우는 걸 어린애처럼 보고만 있었다. 랭던 경은 내 옷차림을 점검한 뒤 작은 종을 흔들어 메리를 불렀다.
“메리 양, 물을 한 잔 가져다주겠어요?”
그는 아까 강압적인 구음을 시킨 사람답지 않게 메리에게 예의 바른 부탁을 건넸다. 하녀에게 ‘양’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귀족은 몹시 드물었다. 같은 귀족끼리는 서열을 따지고 무시해도 평민에게까지 그러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네, 랭던 공작님.”
메리가 바로 물을 한 잔 가져왔다. 그 덕에 나는 내가 몹시 목이 마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많이 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몸 상태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급하게 물을 들이켜고 있으니 랭던 경이 점잖게 잔을 빼앗았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합니다.”
“죄송해요. 너무 목이 말라서 품위를 잊었습니다.”
그가 다시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한 달에 보통 수입이 어느 정도 됩니까?”
“네?”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튼 씨와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보통 오래 만나지 않는 편이지만…. 어쨌든 그동안은 다른 사람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 주변 것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익숙해질 생각도 없고. 그러니 수입을 얘기하세요.”
“…그냥 적당히.”
“적당히라.”
랭던 경은 재킷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에 5만 골드를 적어 넣었다. 평민 노동자들의 3년 치 봉급이라 놀랐지만 창부다운 태도를 유지하고자 조용히 수표를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나는 내가 버릴 때까지는 독점하길 택하는 편입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상대가 서튼 씨처럼 아름다운 사람인 경우에는 생각해 볼 것도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과 몸을 섞다가 들키는 경우 다시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을 테니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랭던 저하에게 안기고 싶었을 뿐이라 수표를 주시지 않았어도 저하를 뵙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원한 건 그저 대가 없이 저하께 안기는 일이었어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음성이 한결 나긋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섹스 중에 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생각해 두고 거절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말하세요. 그대가 좋아하는 도구가 있으면 미리 준비하고 비용을 청구해요. 다른 사람과 사용했던 물건은 안 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새 제품이에요.”
랭던 경이 오늘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미리 구입해 뒀나 봅니다.”
“…네, 저하.”
나는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은 언제 만날까요?”
“저하께서 편하신 시간으로요.”
나는 메리를 불러 랭던 경에게 줄 도자기 포장을 부탁하고 호텔 로비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까지 배웅을 나갔다.
마부는 메리가 건네준 상자를 짐칸에 싣고 말 위에 올랐다. 나는 열린 마차의 문을 잡고 좌석에 앉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신 보내겠습니다.”
“내가 먼저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서튼 씨.”
“네, 랭던 경.”
랭던 경은 문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구음과 같은 은밀한 접촉을 하고 난 뒤에야 내 손을 만지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농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송연을 건넸을 때도 이런 손길이었을 텐데. 도미닉의 말대로 나는 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깊은 의심이 솟구쳤다.
랭던 경은 문을 닫고 창문 덮개를 열었다. 큼직한 녹색 눈이 그가 주었던 아픔을 잠시 망각하게 만들고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다시 느릿하게 잡아당겼다. 랭던 경은 내게 시선을 둔 채로 마부에게 말했다.
“출발하시오.”
“네, 공작님.”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구음과 손가락에 남은 따뜻한 감촉을 번갈아 되새기며 복잡한 심경으로 사라지는 마차의 꽁무니를 쳐다보았다. 길거리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호텔 옆에서 성냥을 파는 아이를 발견했다. 소녀에게 넉넉한 돈을 쥐여 주고 성냥갑을 사서 방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씻은 뒤 서재에 앉아 펜에 잉크를 적셨다. 새뮤얼 프리데릭에게 짧은 보고를 해야 했다.
진전이 있었음. 다음 만남에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임. R.S.
새뮤얼이 보낸 배달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테런스 랭던 경이 준 수표는 <평등론>의 중간 페이지에 끼워 두었다. 책을 넣으려는데 책장이 손가락에 걸렸다. 금서의 맨 앞, 친숙한 인사말이 쓰여 있는 페이지였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금서는 내 트렁크 안에 넣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따로 자물쇠를 달았다. 나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나는 결코 창부가 아니었으므로 랭던 경은 내게 섹스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하는 섹스가 설사 고통스럽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첩자 노릇은 도미닉의 강요로 떠맡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랭던 경이 아니라 주모자인 새뮤얼에게 정당한 대가를 받아 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도미닉에게 자결한 아버지의 목을 자른 죄를 갚고 다시 과거의 영광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랭던 경에게 창부일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그 날이 오면 랭던 경에게 나는 창부가 아니었노라고 말하며 이 수표를 돌려줄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