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벽의 제안
새벽바람이 덜컹덜컹 흔드는 창문 틈으로 길가에 매인 말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자작의 저택이라고 믿기 어려운 초라한 집 주위엔 서튼가의 몰락이 회색 안개와 함께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귀족의 노동이 수치인 시대였다. 형과 나는 이른 새벽에만 타인의 눈을 피해 몰래 집 안을 관리할 수 있었다. 아침의 태양이 산뜻한 거리에 나타나 우리의 남루함을 드러내기 전에, 저녁의 가스등 빛이 창문으로 우리를 들여다보기 전에.
새벽에 집 안을 오가는 은밀한 두 그림자는 붙박이 하인을 둘 수 없는 자작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가 어제 옆집 베넷 부인이 끓여 둔 멀건 수프를 데우는 동안 형은 벽난로에 먼지를 태웠다. 그때 서늘한 새벽 공기를 뚫고 현관의 종이 짧게 울렸다. 잊힌 지 오래된 맑은 울림이었다. 국자를 돌리던 내 손이 멎고, 도미닉은 벽난로 앞에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로엘.”
형은 나가 보라는 듯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도미닉의 명령에 나는 서둘러 작은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냄비를 식탁 위로 치우고 바닥에 놓인 램프를 들었다. 옅은 불빛이 흔들리는 박자를 따라 낡은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렸다.
문 앞에 당도해 어깨쯤 위치한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옷차림을 한 신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신가요?”
“도미닉 서튼?”
목소리의 주인이 형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와 친분이 있는 사람일까. 흠칫하는 사이 그가 덧붙였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소심한 로엘 서튼이군.”
머나먼 기억 속에 잠든 익숙한 목소리가 문 너머의 나를 알아맞혔다. 신사는 문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짙은 눈썹 밑에 자리한 야비한 눈매, 묘하게 비뚤어진 입술. 10대 시절의 앳됨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나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과 함께 잃어버린 서튼가의 친구, 새뮤얼 프리데릭 백작이었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 떨리는 손으로 걸쇠를 빼냈다. 어두운 새벽 거리에 외로이 선 가스등 빛이 그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번졌다. 대문 앞 길가엔 그의 하인이 발길질하며 우는 갈색 말의 머리를 붙들고 달래려 애쓰는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의 이름이 목에 한 번 걸렸다가 빠져나왔다.
“프리데릭 경.”
“로엘, 나를 뭐 그리 어색하게 불러. 어린 시절부터 친애하는 사이에 경은 무슨. 새뮤얼이라고 불러도 돼.”
서튼가의 몰락 후 철저히 우리를 외면한 사람치고 뻔뻔스러운 인사였다. 어머니의 장례식마저 오지 않았으면서.
나는 주눅 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작은 목소리로 진심을 내비쳤다.
“지척에 살며 5년간 교류가 없었는데 우리가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멀어진 친구라도 친구는 친구지.”
“…….”
“그나저나 나를 계속 문가에 세워 둘 건가? 이름만 남았다지만 그래도 남작이신데 예의를 다 잊은 건 아니겠지.”
새뮤얼은 재밌는 농담을 한 사람처럼 키득대며 웃었다. 나는 모욕감을 티 내는 대신 예의를 갖추며 문을 막고 있던 몸을 옆으로 틀었다. 새뮤얼의 주변 사람들에게 로엘 서튼이 천박해졌더라는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들어오세요, 프리데릭 경.”
새뮤얼은 성큼 안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으며 서튼가의 불행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모자를 받을 하인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릴 수 없는 궁색함이 풍겼다.
어느새 도미닉이 단정한 셔츠 차림을 갖추고 실내에 서 있었다. 나는 새뮤얼과 형에게 공평히 시선을 한 번씩 주었다. 언뜻 본 도미닉은 나보다 새뮤얼과 형제 같았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 올라간 눈꼬리와 얇은 입매가 서로 비슷했다. 도미닉 역시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놀란 표정이었으나 나와 달리 기분 좋은 흥분에 휩싸인 듯 성큼성큼 새뮤얼에게 다가갔다.
“새뮤얼.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나?”
그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자못 반가웠다. 두 사람은 5년간 왕래가 없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반가워하며 악수를 나눴다. 짧았지만 대단히 훌륭한 연기였다.
“도미닉, 못 본 새에 더 늠름해졌군.”
“괜히 칭찬은.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
도미닉은 실내 등의 노란 불빛처럼 부드러이 웃으며 나와 자연스레 눈을 맞췄다. 나는 형의 눈빛을 읽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거실을 나와 부엌으로 갔다. 새뮤얼이 낮에 왔다면 옆집 베넷 부인에게 부엌일을 부탁해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일렀다. 박쥐도 아직 잠들지 않은 때였다.
나는 도미닉과 새뮤얼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으나 차를 끓이는 동안은 불가능했다. 거실과 부엌 사이엔 하인들이 일하는 소리가 귀족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긴 복도가 나 있었다. 예술품이 거의 없고 하인도 없는 우리에겐 의미 없는 공간일 뿐이었지만 복도는 도미닉과 새뮤얼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대체 우리 집에 왜 왔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렇게 친했던 형조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사람이. 우리가 도움을 청해도 외면했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부엌의 바닥 타일을 보며 서 있다가 물이 끓는 소리에 다시 손힘을 풀었다. 나는 찬장에서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셨던 찻잔 세트를 꺼냈다. 200년 전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품이었다. 나머지 수집품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 팔아 버렸으나 이것만은 애써 지켜 냈다. 어머니가 사랑하던 노란 새와 파란 나비가 여전히 아름답게 잔의 표면을 날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천으로 먼지를 훑어 내고 쟁반을 들어 거실로 갔다. 다리를 꼬고 앉은 새뮤얼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둘은 내가 나타나자 갑자기 말을 멈췄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물이 쉽게 끓지 않아 꽤 오래 자리를 비운 터였으므로 자못 궁금했다. 그러나 대화 내용을 물어볼 수는 없었으므로 조용히 형의 옆에 앉았다.
새뮤얼은 대화가 끊긴 틈을 메우려는지 소파에 씌워 놓은 장미 무늬 천을 손끝으로 훑으며 먼지가 있나 비벼 봤다. 검사라도 하는 양 무례한 태도였다. 그는 깨끗하단 사실에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서튼 부인이 좋아하셨던 장미 무늬 천이군.”
“아직 집 안 물건이 대부분 그대로야.”
형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처럼 대꾸했다. 나는 도미닉이 새뮤얼에게 ‘감히 내 어머니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쏘아붙이길 바랐으나 그는 전에 없이 새뮤얼에게 상냥했다.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하녀 한 명 쓰기 어려운 형편인가? 로엘 네가 직접 차를 다 내오고.”
새뮤얼이 예의 없이 물었다. 그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천박한 언사를 서슴지 않는 인간이었단 사실이 기억났다. 과거에는 내가 그 대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포함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희끄무레한 실내등이 수치심에 붉어진 내 뺨을 비추지 않길 바라며 태연히 대꾸했다.
“베넷 부인이 아직 출근하기 전이라서요.”
“그래? 하녀를 쓰긴 한다니 다행이군.”
새뮤얼은 직접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나와 형에게도 권했으나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새뮤얼이 방문한 목적을 어서 듣고 이 모욕적인 친구 놀이를 끝내는 것이었다.
흘끔, 형에게 시선을 던졌으나 도미닉은 무표정이었다. 도미닉은 이 친구 놀이가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프리데릭 경께서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서튼가를 찾으셨나요? 용건이 없으면 방문할 리 없으셨을 텐데요.”
새뮤얼은 너그러운 웃음을 가장하며 찻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로엘, 말이 심하군. 친구가 친구를 찾아오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 나와 도미닉은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 너는 알 수 없는 유대감이 있지.”
“…….”
“물론 오늘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게 맞지만. …로니, 테런스 랭던 공작을 알고 있겠지?”
“…새뮤얼, 제 이름을 부르시는 건 상관없지만 아명(兒名)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새뮤얼이 아명을 마음대로 부르는 게 불쾌해 나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새뮤얼은 내 반응이 불편했는지 몸을 잠시 뒤척이며 혀를 찼다.
“전에는 로엘이 좀 더 순한 성미였던 것 같은데 성격이 많이 바뀌었군. 내가 여태껏 로니라고 부른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로엘 대신 사과하지. 로엘이 이제 막 성년이 되어 성정이 다소 예민한 편이야.”
도미닉이 마음대로 사과했다. 그 사과 때문에 아명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정당한 요청은 어린애의 투정이 되어 버렸다. 몹시 기분이 상해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으나 새뮤얼 앞에서 형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일이라 입을 닫았다.
나는 5년 전의 사건을 잊은 것처럼 새뮤얼을 따뜻이 대하는 형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미닉은 나를 대신해 새뮤얼의 질문에 대답까지 했다.
“당연히 로엘도 테런스 랭던 공작을 알고 있지. 노르크에 랭던 공작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철도 사업가에다 왕실과 가까운 분인데.”
“도미닉, 로엘…. 사실 프리데릭가를 비롯한 몇몇 귀족 가문은 그 랭던 경이 반(反) 귀족 세력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혁명에 필요한 자본을 대 주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네.”
자유주의자. 그 단어가 내 심장을 짓이겼다.
도미닉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랭던 경이?”
“최근에 혁명군과 자유주의자들 쪽으로 흘러가는 자금이 너무 많아. 그 정도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가문은 귀족 중에서도 극히 소수야. 몇몇 가문이 후보에 올라 내부에 첩자를 심었고 대부분이 혐의를 벗은 상태네. 그러나 랭던 공작만은 그렇지 못했어. 자유주의자라는 증거도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는 애매한 상황인 거지.”
새뮤얼이 쉴 새 없이 떠들었으나 내 귀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단어만이 위험한 말벌처럼 윙윙대며 맴돌았다. 독침에 쏘인 심장이 울렁대며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도미닉은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고 새뮤얼에게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만 서튼 가문 사람 같았고, 내게만 새뮤얼의 언행이 모욕으로 들리는 듯했다.
나는 흥분한 티를 내지 않도록 애쓰며 입을 열었다. 새뮤얼의 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새뮤얼, 왜 서튼가에서 자유주의자들 얘기를 꺼내시죠? 자유주의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한 분뿐, 아버지 외에 서튼가는 그들과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분명히 증명해 드렸을 텐데요.”
“로엘, 새뮤얼이 우리가 자유주의자라는 뜻으로 그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닐 거야.”
“하지만 형님….”
“랭던 공작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지레 겁먹은 사람처럼 흉하게 나서는 거냐. 매사 너의 그런 경솔한 반응이 서튼가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거다.”
거실에 드리운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 붉어진 뺨을 가려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손끝까지 벌겋게 물든 채로 나를 향한 형의 부당한 질책을 가슴에 쓸어 담았다. 도미닉은 사과하라는 듯 턱 끝으로 새뮤얼을 작게 가리켰다.
“…제 반응이 경솔했다면 죄송합니다, 프리데릭 경.”
나는 새뮤얼이 내 앞에서 ‘자유주의’를 입에 올리는 일 자체가 가혹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자유주의에 가담한 덕에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말 못 할 일들 때문이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과 잔인한 경험으로 영혼을 상처 입히며 가문을 위해 목숨과 같은 자작 작위를 보호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영혼은 그 고통을 버텨 내지 못했다.
새뮤얼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들어 나를 진정시켰다. 밖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는 말들이나 그런 식으로 진정시키라며 톡 쏘아 주고 싶었으나 도미닉이 가혹하게 질책할까 참았다.
“알고 있어, 로엘. 두 사람이 자유주의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특히 도미닉은 그럴 리 없지.”
나는 그럴 리 있다는 건가.
새뮤얼을 보호하는 듯한 형의 태도 때문에 오히려 새뮤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슬렸다. 그 얄팍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가 손가락을 찌르는 장미 덤불 같았다.
“하지만 로엘. 한번 가볍게 생각해 봐. 서튼가를 향한 다른 귀족들의 믿음 역시 확고할까? 서튼 가문이 자유주의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 천국을 걸 사람은 없을 거야.”
“…….”
“그래서 다름 아닌 로엘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왔네. 로엘 서튼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거든.”
“제가 프리데릭 경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다구요?”
“아까 말했듯 우리는 최근 혁명군 쪽에 흘러 들어간 거액의 자금 출처를 추적 중이야. 랭던 공작이 뒷배인지 알아내려고 스파이를 여럿 심었지만 모두 실패했네. 섹스를 이용한 미인계도 먹히지 않았지. 모두 랭던 공작과는 두 번 이상 만남을 갖지 못했어. 잠자리는 한 번으로 끝난 경우도 수두룩해.”
나는 새뮤얼이 말하는 모든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미닉은 이해하고 있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나를 흘끔 쳐다봤다. 마치 다 알아들었지 않느냐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기실 나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생각했네. 랭던 경에게 훈련된 첩자는 통하지 않아. 괜찮은 섹스 파트너이기만 하면 돼. 허나 랭던 경이 빈틈을 보일 여지는 있어야 하지. 그래서 자네가 생각났어. 로엘 서튼은 두 가지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거든. 귀족을 배신한 서튼이라는 이름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나는 그때까지도 새뮤얼이 내게 무엇을 제안하고 도미닉이 나를 어떻게 방임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새벽은 끔찍이 길었다. 말들은 무거운 안개를 걷어 내고 싶은 듯 쉼 없이 울었고, 실내등이 거실에 드리운 내 그림자는 비뚜름하게 휘어 있었다. 불빛이 너울처럼 일렁였다.
“로엘, 자네의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서 랭던 공작과 가까워졌으면 해. 남색가인 랭던이 만약에 자유주의자라면 누구 앞에서 빗장을 풀고 허술하게 행동하겠나. 다름 아닌 서튼이지. 배신의 이름.”
새뮤얼은 일어나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내 뺨을 쓸어내리며 턱 끝을 잡아 들었다.
“로엘 서튼이 실패하면 아무도 할 수 없을 거야.”
“새뮤얼, 저는….”
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말문을 뗐으나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들이 엮이지 않았다.
“도미닉과 상의해서 조건을 제시하면 조율하도록 하겠네. 자네가 얼마면 몸을 팔까. 그리 비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거기까지 해, 새뮤얼. 그래도 내 동생이야.”
마침내 도미닉이 내 편을 들어 주자 새뮤얼이 잡은 턱을 놔 주었다.
“알겠어, 도미닉. 미안하군.”
새뮤얼은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비정한 뱀의 눈매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서렸다.
“로엘, 자네가 랭던 경에게 접근해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하면 원하는 무엇이라도 주겠네. 아버지를 팔고 자작인 형에게 빌붙어 남작 노릇을 했으니 그대는 한 번이라도 도미닉에게 도움이 돼 보도록 해.”
“새뮤얼.”
도미닉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왜. 내 말이 틀린가, 도미닉?”
도미닉은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새뮤얼은 터벅터벅 걸어가 무거운 문을 잡아당겼다. 새벽의 그늘이 걷히고 있었다. 어느새 일어난 도미닉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 하니. 인사해야지.”
“…네, 형님.”
나는 겨우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뼈 속을 스몄다. 길에서는 잡역부가 집 앞의 어둠을 밝히던 가스등의 노란빛을 끄고 있었다. 빛이 죽은 순간 새뮤얼과 도미닉, 두 사람의 얼굴이 그림자처럼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새뮤얼은 목이 간지러운 듯 기침을 하다 집 마룻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가 꿇어앉아 직접 닦아야 할 바닥이었다.
“아, 밖에다 뱉는다는 게 실수로. 미안하네, 도미닉.”
“괜찮아.”
도미닉이 다시 마음대로 새뮤얼의 말뿐인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러면 둘이 상의해 보고 이틀 내로 연락을 주면 좋겠네. 모레 저녁에 랭던 경이 정찬에 여러 사람을 초대했는데 그때 로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 그때를 놓치면 또 한동안 기다려야 해. 시끄러운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거든.”
“알겠어. 연락하지.”
도미닉이 닫는 무거운 문틈으로 마차에 올라타는 새뮤얼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이 닫히고 마차의 말 울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 소리가 도시의 다른 말 울음과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서 있었다.
도미닉은 실내등을 등지고 있어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로엘 서튼.”
어둠 속에서 들리는 도미닉의 목소리가 칠흑보다 더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하는 거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었듯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하라는 거다. 너는 랭던 공작과 섹스를 하고 그가 자유주의자인지 염탐하면 돼.”
도미닉은 유령에게 홀린 듯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도미닉의 모습이 낯설어 뒷덜미에 스산한 소름이 끼쳤다.
“남자끼리 그게 무슨…. 고해를 해도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어둠 속에 서서 비현실적인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잠시 이 모든 일이 새벽녘의 악몽인가 생각했다. 용서받지 못할 거란 내 말이 도미닉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내 팔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으나 나는 익숙하게 고통을 삼켰다.
“로엘, 너는 이미 5년 전에 고해를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어. 알고 있지? 너는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도미닉은 늘 쉽게 심연에서 나의 죄를 끌어 올렸다. 내 죄는 어둠 속에서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도미닉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죽은 아버지의 머리가 둥둥 떠올라 뒤집힌 흰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그 흰자위를 똑바로 보며 굳은 몸을 떨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밝은 데서 기억할 수 없었다. 오직 심연 속에서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가장 끔찍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입이 빠끔 벌어지는 순간 눈을 질끈 구겼다. 숨이 거칠게 차올랐다. 도미닉은 쥐고 있던 내 팔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자 나의 이상을 눈치챘는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5년 전부터 시작된 나의 열병을 도미닉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움직이려면 열병의 죄책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도.
“로엘, 왜 그러니. 또 아버지가 보여?”
“…흐읍….”
가쁜 숨이 차올라 도미닉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흙더미 속에서 구더기에게 파먹힌 아버지께 말씀드려야지. 다시 서튼 가문이 일어설 기회가 찾아왔다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운 백금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팔아서.”
도미닉이 잔인하게 속삭였다. 남아 있는 양심 또한 지난날 내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은 도미닉에게 속죄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말대로 지옥에서 불탈 영혼을 조금만 더 더럽혀 형제에게 영광을 되찾아 주라고.
거칠어진 호흡이 간신히 가라앉고 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형님, 프리데릭 경이 도와준다면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랭던 공작과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순진한 나의 로엘.”
팔뚝을 쥐지 않은 손이 얼굴 근처로 올라와서 나는 습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도미닉은 훈육 대신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며 뺨을 감쌌다. 긴장으로 올라갔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로엘, 남자에게 섹스가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 따위를 해. 귀족은 노동을 할 수 없고 우리는 모든 영지를 팔았다.”
“그렇지만….”
“네가 운이 좋아야 랭던 공작과 섹스할 수 있는 처지인 걸 알아야지. 그 난잡한 인간이 너를 취하지 않고도 가까이 둘 거라 착각하는 거냐? 그렇게 해서 그가 너에게 무얼 얻을 수 있는데. 네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몸밖에 없어.”
“…그렇지만 저의 그런 행동이 서튼의 이름에 더 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형님.”
“무슨 소리냐. 너는 이미 서튼가의 수치인걸.”
도미닉의 계속되는 비난에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혹여 울었다가 몇 주 전처럼 훈육을 받아야 할까 봐 잇속을 잘근잘근 씹어 가며 슬픔을 겨우 삼켰다. 벽을 보고 몇 시간씩 서 있거나 뺨을 맞는 일은 무척이나 견뎌 내기 가혹했다.
“로엘, 네 첩자 노릇을 성공시켜 나는 프리데릭가의 양자가 되고 싶다.”
도미닉이 마치 오래전부터 품어 온 꿈을 털어놓듯 그 문장을 뭉근하게 내 귓속에 쑤셔 넣었다. 방금 들은 제안에 대한 바람치고는 아주 구체적이고 농밀한 염원이었다. 형은 내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풀고 멍이 들었을 그 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내가 때로 너를 엄하게 훈육하는 건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는 일이란 걸 알고 있지?”
“…네, 형님.”
“그러니 너의 미래를 해칠 수 있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해.”
어둠을 뚫고 나오는 그의 음성에 희붐한 빛이 스몄다. 해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도미닉의 갈색 눈동자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나는 탁한 그 눈동자에 내 모습이 유령처럼 서리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고통이 끝나면 너와 나는 서튼가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내가 부를 때까지 방에 들어가서 생각이란 걸 해 봐. 내가 한 말을 잘 곱씹어 보면 답이 나올 테니.”
“…알겠어요.”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마.”
“네, 형님.”
도미닉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의 유령도 떠나갔다. 나는 문 앞에 떨어진 새뮤얼의 침을 헝겊으로 닦아 내고 썰렁한 방으로 향했다.
도미닉이 불러내지 않아 아침 식사는 하지 못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방 안에 갇혀 그간 인이 박이도록 들어 온 형의 말을 곱씹었다.
‘서튼가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거야.’
‘우리 둘 다 끝난 인생이야.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 볼 텐데.’
‘로엘, 나는 당장 죽고 싶구나. 죽고 싶어. 네가 나를 죽여 다오.’
저녁까지 끼니도 들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도미닉의 말들을 되뇌었다. 그리고 노을이 드리우기 전에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금발 머리, 파란 눈. 나와 닮은 그 얼굴을 역시나 빛 속에서는 기억할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점심에 베넷 부인이 준비하고 간 식사를 첫 끼로 들었다. 마른 빵과 얇게 썬 햄, 묽은 수프가 전부였다. 나는 퍼석한 빵을 뜯어 수프에 적신 뒤 까끌까끌한 입 안에 집어넣었다. 형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식사보다는 글 읽기에 심취한 듯 보였다. 신문의 머리기사가 시선을 잡아챘다.
랭던 공작이 수도에 기차역을 추가 신설하기로 발표하다.
신문 앞면엔 공중에 연기를 내뿜는 위풍당당한 기차의 사진과 랭던 가문의 인장이 실려 있었다. ‘랭던 철도사(LangdonRail Co.)’는 랭던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철도 회사로 노르크 국가 전역의 철도를 책임지고 있었다. 문맹인 사람도 ‘랭던’이라는 단어는 읽고 쓸 줄 알 정도였다.
도미닉도 그 기사를 봤겠지만 랭던 공작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벌을 주었으니 내게 더 이상 압력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도미닉이 어떤 언질도 하지 않자 오히려 가슴속에 죄책감이 날뛰었다. 도미닉이 몰아붙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는 순간, 그때 나는 꼭 약해지고 말았다.
“형님.”
식사를 마친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도미닉이 눈만 위쪽으로 움직여 신문 너머로 나를 내다봤다.
“모레… 랭던 공작의 정찬에 참석하도록 할게요.”
“그러겠니?”
“네. 하지만 프리데릭 경의 제안대로 하겠다, 확답을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다녀와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요.”
“그거면 일단 됐다.”
도미닉은 신문으로 눈을 돌렸고, 나는 도미닉이 화를 풀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점심에만 들러 집안일을 해 주던 이웃집 베넷 부인이 다음 날부터 갑자기 이른 아침에 서튼가로 출근했다. 식탁에는 두툼한 고기와 신선한 샐러드가 올랐다. 내가 랭던 공작과 만나겠다고 한 약속을 새뮤얼이 전해 듣고 벌써 생활비를 보낸 것이다. 불과 어제 그런 일을 제안한 사람치고 너무 빠른 지불이라 가슴 속에 뭉근한 의구심이 싹텄다.
형은 익숙하게 베넷 부인을 부렸으나 나는 가문이 몰락한 후 혼자 몸을 돌보는 평민 생활에 적응해 대부분의 일을 혼자 처리했다. 벽난로 주변에 날린 재를 정리하고 있으니 옷에 풀을 먹이고 있던 베넷 부인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제가 할게요, 로엘 도련님.”
“괜찮아요.”
“괜찮긴요! 남작님께서 집안일이라니요.”
내 만류에도 베넷 부인은 빗자루를 힘주어 빼앗았다.
베넷 부인은 올해 60세로 성실한 베넷 씨와 마을에서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슬하에 5남매를 두었는데 4명은 모두 출가시켰고 아이를 낳다가 죽은 넷째 딸을 대신해 손자 윌리엄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윌리엄은 내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막 걸음마를 시작한 꼬마로 매우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베넷 부인, 윌리엄은 집에 언제 돌아오나요? 막내 이모 집에 놀러 간 지 꽤 된 것 같은데요.”
“아직 닷새밖에 안 됐어요. 몇 주는 더 있다 올걸요.”
“꼬마 윌이 안 보이니 적적하여 오래된 줄 알았네요. 내년에 보낼 학교는 정하셨어요?”
“요즘 밥 먹고 살기도 바빠서 공부를 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집에서 글자나 조금 가르치고 농사일이나 시켜야죠. 손이 모자라요.”
영특한 윌리엄이 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내 일처럼 가슴 언저리가 아렸다. 물론 귀족 출신이 아니라 고등 교육 기관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막연히 윌리엄이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내게 윌리엄의 학비를 후원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도미닉 몰래 가끔 간식을 쥐여 주고 글이나 산수를 알려 주는 게 내가 윌리엄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제가 윌을 후원해 주지 못한다니 너무 아쉽네요, 부인.”
“평민 아이가 공부를 해서 뭘 하겠어요. 몸 튼튼하고 농사일만 똑바로 배우면 되지요.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거예요.”
베넷 부인이 아쉬움을 감추며 쾌활하게 대꾸했다.
발 빠른 새뮤얼 프리데릭은 다음 날 바로 정찬 참석에 필요한 준비를 해 주었다. 연회복과 마차, 하루 동안 내 시중을 들 하녀와 집사가 서튼가를 방문했다. 하녀가 연회복 차림을 다듬어 주고 머리를 손질해 주며 물었다.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서튼 남작님?”
“네, 괜찮아요.”
어린 시절 후 오랜만에 들어 보는 존칭이었다. 깨끗하게 다린 흰 블라우스와 짧은 타이, 우아하게 떨어지는 프록코트가 남루한 5년의 세월을 외모에서 지워 냈다. 하녀는 은은한 향수를 꺼내 뿌려 주고 내게 모자를 댔다가 내리며 말했다.
“얼굴을 가려서 안 쓰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눈동자 색이 돋보여서 드러내시는 게 더 잘 어울리십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요?”
“요즘은 신사분들께서 모자 없이 가벼운 차림을 하시는 것도 유행이랍니다.”
하녀가 마무리를 하고 작게 종을 흔든 뒤 나가자 도미닉과 새뮤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뮤얼의 시선이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거울 앞에 돌려세운 뒤, 허리를 굽혀 내 어깨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렸다. 소름 끼치는 행동이었다. 거울 너머로 새뮤얼과 눈이 마주쳤다.
“랭던 경이 오늘 너를 건드리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저는 정찬에만 참석하기로 한 거예요. 아직 아무런 확답도 드리지 않았고 랭던 경과 어떤 일도 없을 겁니다.”
“글쎄. 로엘 네가 랭던 경을 보고 색욕을 참지 못할 수도 있지. 랭던 공작은 대단한 미남이거든. 남색가인 걸 뻔히 아는 귀부인들도 침을 질질 흘릴 정도이지.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보기 드문 녹색 눈을 가지고 있어. 네 푸른 눈만큼이나 귀한 색이지.”
새뮤얼은 내게 기대 있던 몸을 떼어 내고 품에서 기다란 상자를 꺼냈다. 상자 가운데엔 금색 수가 놓인 푸른 리본이 묶여 있었다.
“이건 내 선물. 오늘 랭던 공작을 보고 마음이 동하면 미리 연습하라고. 연습 파트너를 붙여 주려고 했는데 도미닉이 네가 거절할 게 뻔하다더군. 열어 봐.”
대체 나 몰래 언제 둘이서 그런 얘기를 나눴을까…. 다시 한번 가슴속에 도미닉과 새뮤얼을 향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백지장처럼 질린 손끝으로 리본을 당기고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 남근을 본 딴 굵은 막대가 들어 있었다. 생김새를 보고 놀란 나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상자를 닫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꼭 쥐고만 있으니 새뮤얼이 상자를 빼앗아 마음대로 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내 가슴께의 셔츠 자락을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희롱에 놀라 들이켠 숨을 채 뱉기도 전에 그가 달큰히 속삭였다.
“오늘 가져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랭던 경이 동하는 기미가 보이면 미리 써 보라고.”
“…….”
“정찬에서 할 일은 마차에 동승하는 집사가 알려 줄 거야. 그럼 이따 보자고, 로엘. 머저리처럼 알은체는 하지 말고.”
얼어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린 뒤 새뮤얼이 먼저 자리를 떴다.
도미닉은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 무표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형과 둘이 남은 뒤에야 간신히 입술을 벙긋댔으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남근 모양의 조각을 어디에 쓰라는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수치심이 입을 틀어막았다. 도미닉이 뜨거워진 내 뺨을 물끄러미 보다가 코트 단추를 채워 주며 무표정으로 물었다.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
“…네.”
도미닉의 목소리는 꼭 신문을 읽어 주듯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네가 버릇없이 굴 때 내가 종종 어디를 때리지.”
“종아리를….”
“거기 말고. 네가 아주 잘못했을 때.”
“…엉덩이요, 형님.”
“그 골에 자리한 구멍에 랭던 경이 성기를 쑤셔 넣을 수 있도록 해. 네 입 속도 괜찮고. 남자끼리는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런….”
동성 간의 섹스가 서로의 쾌락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나는 남색이 무슨 행위인지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황망하여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끼리도 삽입이라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니 거울 속 얼굴이 너무 붉어 피부에 석양이 비치는 듯했다.
나는 혼자 남고서야 책상 서랍 깊숙이 그 상자를 숨겨 두었다. 남근을 본뜬 조각이 흉물스러워 다시 확인할 용기는 낼 수 없었다. 그런 물건을 지니고 정찬에 참석할 생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아 오랜만에 마차에 올랐다. 아무런 특징 없이 생긴 집사가 맞은편에 앉아 둥근 창문 덮개를 열었다. 마차는 서튼가가 있는 한적한 노르크 근교를 지나 활기찬 수도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돌에 부딪치는 반동 너머로 사람들의 밝은 목소리가 시끌벅적했다. 빽빽이 서 있는 가스등이 도시의 번영을 환히 비추었다.
“집사님, 저 커다란 건물은 뭐길래 사람이 저렇게 많나요?”
“새로 생긴 상점인데 사람들이 백화점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판다고 합니다.”
“건물이 무척 화려하네요.”
“숙녀분들의 맞춤옷을 일주일 내로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신사분들의 옷도요.”
“그렇게 빨리!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고 있어요.”
“네. 덕분에 요즘 왕궁 근처에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와 총각이 바글바글합니다. 백화점에서 직원을 여럿 쓰니 돈을 벌러 올라오는 모양입니다.”
집사가 알려 주는 바깥소식은 흥미로웠지만 내가 속한 세계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 내 현실로 돌아와 물었다.
“오늘은 무얼 하면 되나요?”
“먼저 랭던 공작님께 눈도장을 찍으셔야 합니다. 랭던 공작님께서는 카드 게임을 할 때 초반에 자리를 여러 번 비우시는 편이니 그때가 좋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랭던 저택을 방문할 구실도 만들어 두셔야 하고요.”
집사는 내게 고급 여송연과 사파이어 반지를 건네며 자세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외웠다.
“여기서부터 랭던 저택 남쪽 사유지입니다.”
마차는 집사가 말한 남문에서부터 20분을 달리고서야 멈췄다. 문을 열고 내리자 초겨울 밤공기가 쌀쌀해 순식간에 귀 끝이 얼었다. 노르크의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빽빽한 나뭇잎들이 찬 바람에 서로 부대끼며 잘게 울었다. 뒤따라온 마차에서 새뮤얼이 내렸고 그와 나는 랭던 저택의 계단을 밟았다.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가끔 고개를 뒤로 돌려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봤다.
홀에 들어서고야 나는 도미닉이 그리워하던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여실히 마주했다. 높이 솟은 천장에 매달린 빛나는 샹들리에와 푹신한 카펫, 대리석 바닥과 벽에 걸린 품격 있는 그림들.
파티에 초대한 손님을 맞으며 웃음 짓던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기억에서 튀어 올랐다. 서튼 가문이 몰락하기 전이었다.
나는 익숙히 슬픔을 눌러 내고 유약한 눈물이 눈동자를 적시지 않도록 노력했다. 랭던가의 하녀가 내 코트를 받아 가 옷장에 걸었다.
“숙녀, 신사 여러분.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작은 종을 흔들자 신사들이 곁에 있는 숙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희미해진 예법에 잠시 당황하다 눈치껏 곁에 서 있는 노부인의 손을 잡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노부인이 물었다.
“처음 보는 신사분이신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로엘 서튼이라고 합니다, 부인.”
순간 그녀의 눈매에 호기심이 번지고 주변의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염탐했다.
“그 서튼?”
“네, 그 서튼입니다.”
나의 순순한 반응이 재밌었는지 노부인은 키득키득 웃다가 작은 부채를 펴서 입을 가리고 은밀히 속닥였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무슨 소문 말씀이신지….”
“당신에 관해 수도에 퍼진 이야기들이요.”
“저에 관해서요?”
사교계에 데뷔도 못 한 내 소문이 노르크 수도에 돌고 있다는 정보는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게 들렸다. 어디서부터 질문해야 할지 출발점조차 찾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대는 사이 노부인이 재빨리 식탁에 앉아 버려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뜨거운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랭던 공작으로 보이는 이를 찾았으나 검은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이라는 정보밖에 없어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 등 뒤에서 기척과 함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오래 준비된 포도주처럼 깊이가 있는 음성이었다.
“모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인해야 할 서신이 있어 조금 늦었습니다.”
등 뒤에 머물렀다가 멀어지는 은은한 향수 냄새에 심장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품위 있는 목소리와 어울리는 향기였다.
랭던 공작은 어떤 사람일까,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고개를 조심스레 옆으로 돌려 봤으나 그는 아직 상석으로 걸어가는 중이라 훤칠한 뒤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사가 의자를 빼자 랭던 경이 앉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순간 그는 많은 손님 중에서 뒤쪽에 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는 한 뼘이 더 컸으며 눈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그의 눈동자 색은 봄날 젖은 땅에서 움트는 여린 초록빛이 아니라 겨울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우는 빽빽한 녹음의 초록빛이었다. 짙은 녹색.
랭던 경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을 때까지 나와 진득이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 깊은 눈빛이 이곳에 자리한 많은 사람 중 그와 나의 시간만을 붙들고 느리게 걷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옆에 앉은 숙녀가 랭던 경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그의 시선이 곧 내게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왠지 모를 아쉬움에 숨을 삼키며 조금 전 대화를 나눴던 노부인에게 조심히 질문했다.
“저분이 랭던 공작님이신가요?”
“맞아요. 에메랄드 저택의 주인이세요.”
에메랄드 저택.
나는 이 아름다운 성의 별명이 랭던 공작의 눈빛에서 비롯되었을 거라 확신했다.
정찬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선율이 시간을 녹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몇 년 만에 듣는 생생한 음악이 너무도 달콤하여 대단한 식사조차 악기 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입 속을 적시는 육즙의 풍미와 혀를 자극하는 달콤한 파이도 바이올린 현의 우아한 음색을 넘어서지 못했다.
나는 식탁 밑에서 몰래 발을 까닥이며 카펫을 자근자근 눌렀다. 어릴 적 배웠던 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나의 사교계 데뷔는 초라했다. 서튼이라는 이름은 랭던 저택에 떨어진 먼지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고개만 돌리면 여러 목소리가 분주하게 남들의 귓속을 오갔다. 로엘 서튼에 대해 떠도는 얘기가 있다는 노부인의 말이 신빙성을 더해 갔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랭던 경이 이따금… 아니, 자주 제일 끝에 앉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너무 정확하게 시선을 맞춰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거라는 착각은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온몸으로 의식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랭던 경의 우아한 녹색 눈이 그에게 접근하려는 내 불순한 의도를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랭던 경은 새뮤얼에게 들은 추문과 달리 점잖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면도 있었다. 상석에 앉아 편히 테이블에 몸을 기대기도 하고 우스운 농담에는 크게 웃기도 하며 서슴없는 태도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런 소탈한 모습은 도리어 그가 귀족 계급의 정점에 있는 사람임을 부각했다.
나는 디저트를 먹는 말미에야 용기를 내 랭던 공작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옆 사람과 대화하고 있던 그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바로 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할 수 있는 한 자연스레 눈을 내리깔았지만 눈꺼풀이 몹시 떨려 피하는 기색이 느껴졌을 듯했다. 나의 세련되지 못한 처신이 민망했으나 그 후로도 종종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신사분들은 가볍게 카드 게임을 할까요?”
랭던 경이 제안하여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소그룹으로 무리 지었다. 귀부인들은 따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포커를 칠 때도 나는 랭던 경의 그룹에는 끼어들지 못했다. 마차에서 집사에게 받은 고급 여송연과 사파이어 반지가 재킷 안에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집사가 전달한 랭던 경의 흡연 장소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복도를 왼쪽으로 두 번 돌아 세 번째 테라스로.’
서튼가를 향한 신사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느라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면서도 랭던 경이 처음 카드 테이블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앞에 놓인 카드를 집으면서 나를 훑는 랭던 경의 미묘한 시선도 느꼈다. 태어나 받아 본 적이 없는 눈빛이라 해석할 수 없는 시그널이었다.
랭던 경이 두 번째로 포커에 흥미를 잃은 듯 보였을 때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 손님 없이 한적한 통로로 진입했다. 저택의 다른 곳과 달리 실내등이 밝지 않아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복도를 한 번 더 돌아 세 번째 테라스로 향하는 발걸음이 떨렸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여송연을 꺼냈다.
과연 그가 올까. 너무 떨려 차라리 랭던 경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테라스는 비어 있었다. 나는 여신의 조각이 붙은 화려한 난간에 기대서서 조명이 밝히는 나무 꼭대기를 내려다봤다. 잘 정돈된 정원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가 있었다. 분수에서 떨어지는 잔잔한 물소리가 바람을 타고 저택의 2층까지 밀려왔다.
성냥을 그어 여송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얇은 코트를 걸친 테런스 랭던 경이 발코니에 나타났다. 멀리서 보았던 녹색의 시선과 등 뒤에서 풍겼던 은은한 향이 동시에 밀물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몰래 접근 중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방망이질 쳤는데, 코앞에서 맞닥뜨린 그의 우아하고 멋있는 자태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뛰어 댔다.
나는 손끝의 떨림을 숨기려고 애쓰며 태연한 척 여송연의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천천히 난간에 기댔던 팔을 떼어 내고 허리를 폈다.
“테런스 랭던 저하, 처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엘 서튼이라고 합니다.”
‘저하’는 왕족을 제외한 귀족에게 쓸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호칭이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에게만 종종 사용했다. 정찬에서는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자주 쳐다보던 랭던 경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 서튼이군.”
가까이서 본 랭던 경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묘한 눈빛에 시선을 빼앗긴 채 조각처럼 섬세한 얼굴을 빤히 보다가 겨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네, 그 서튼입니다.”
랭던 경은 ‘그 서튼’이라는 나의 대답에 빙긋이 웃었다. 차갑던 표정이 순식간에 온화한 빛으로 물들었다. 랭던 경은 그 미소를 유지한 채 천천히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을 딛는 가죽 구두의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몇 배나 되는 강도로 내 심장이 쿵, 쿵 가슴께를 찧었다. 그 짙은 녹색 눈이 내 속마음을 읽어 내고, 자신에게 고의로 접근하려는 계획을 알아챌 듯해서 몰래 잇속을 아프도록 물어야 했다. 정신을 차린 건 랭던 경의 그다음 말 때문이었다.
“여기는 내 은신처인데 어린 서튼 씨에게 자리를 뺏겼군.”
“저택을 구경하다 정원 풍경이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발이 멎었습니다. 그런데 랭던 저하….”
망설이다가 용기를 쥐어짜 내 덧붙였다.
“…서튼 경이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아직 귀족 신분인 내게 ‘서튼 씨’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았다. 집안이 몰락한 후 세상 사람들과 도미닉에 의해 수없이 짓밟힌 자존심이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정도로 품위를 다 잃은 건 아니었다. 랭던 경은 나와의 거리를 좁히며 내 손가락 사이에 자리한 여송연을 말없이 가져갔다.
“내가 서튼 씨라고 불러서 기분이 나쁜가요?”
“정중히 요청드릴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튼 남작이고 랭던 저하의 정찬에 참석한 사람이니까요.”
그는 여송연을 한 모금 빨고 공중에 연기를 길게 뱉었다. 하얀 연기가 녹색 눈가에 자욱이 앉았다가 걷힐 때 밤하늘의 달빛이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높은 콧대는 반듯했고 깊은 눈은 진실해 보였으며 다물린 입술은 금방이라도 시를 낭송할 듯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다운 입술에서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당신에겐 서튼 씨라는 호칭도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배신자니까. 당신 아버지는 평민들을 위한답시고 천박한 부르주아들에게 붙었어요. 부르주아가 진정한 의미의 평민입니까? 그들은 푼돈 좀 쥐었다고 으스대는 천박한 잡종에 불과하고 서튼 가문 역시 맥락상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
돌아가신 아버지를 겨눈 모욕에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한 번도 표출해 본 적이 없는 분노가 부글댔으나 내게 반박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에 관한 논쟁만큼은. 아버지의 편을 드는 건 귀족을 다시 한번 배반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그가 모욕을 멈춰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랭던 경의 목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계급을 무너트리려 했던 서튼가 사람에게 경이라는 호칭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나는 그럴 거라 생각하지 않는데요.”
랭던 경은 내가 상한 마음을 누그러트리지 못하고 힘겹게 표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더니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자신의 엄지로 내 미간을 천천히 문질렀다. 밤바람이 식힌 피부에 닿는 그의 손끝이 태양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예쁜 얼굴 상합니다. 그렇게 찡그리지 마세요.”
“…….”
“정찬에서 처음 당신의 얼굴을 본 순간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외모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아까운 노릇 아닙니까. 물론 그 모든 감상은 당신이 서튼가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이었지만.”
미간을 문지르는 손길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과 비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을 만지는 것 또한 귀족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섬세한 손끝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이마에 허전한 느낌이 밀려왔다. 서늘한 밤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튼 씨에게 아름다운 얼굴은 중요한 재산 아닙니까.”
“저는 제 얼굴이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처지가 어쨌든 저는 랭던 저하에게 존중받을 만한 명예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그건 서튼 씨의 처신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랭던 경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내 여송연을 살펴보더니 다시 굵은 대를 입에 물었다.
“이 귀한 여송연은 어디서 구했습니까? 요즘 카일랜드산 여송연은 수입이 되질 않거든요. 카일랜드에 혁명이 일어나 생산이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혁명이 끼치는 해악이지.”
자유를 위한 평민들의 투쟁을 부정적으로만 일컫는 귀족들의 태도에 넌덜머리가 났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여송연입니다.”
“당신의 고객에게?”
“…네?”
새뮤얼이 내게 스파이 노릇을 제안한 걸 이미 알고 있나 싶어 심장이 대리석 바닥까지 떨어졌다 올라왔다. 그러나 한적한 교외에서 존재감 없이 사는 나를 그가 미리 조사해 봤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간신히 당황스러움을 눌러 냈다.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제가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고객이 있겠습니까, 저하.”
“나는 서튼 씨가 꽤 대단한 장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착각?”
랭던 경은 다시 한번 나를 보며 빙그레 웃더니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의 따뜻한 온기가 서늘한 뺨 위에 전해졌다.
“여송연은 잘 빌려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에 물었던 여송연을 나의 입술에 되돌려 놓았다. 남자끼리 시가를 주고받으며 피우는 건 흔한 일인데 시가 끝에서 얽히는 서로의 질척한 타액이 괜히 혀끝에 야릇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새뮤얼이 랭던 경과 섹스하라는 헛소리를 지껄여서 머릿속이 그를 과하게 의식한 탓이다.
랭던 경은 나와 달리 시가를 나눠 피운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정원으로 몸을 돌리며 이제 내게 관심이 없어진 듯 나른히 말했다.
“이만 나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서튼 씨.”
“…자리를 비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몇 모금 피우지 못한 여송연을 문질러 껐다. 랭던 경의 잘생긴 외모와 우아한 자태에 홀려 마음대로 그가 신사다운 사람일 거라 짐작했었다.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했던 대화 때문에 흘러내린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가락을 꼭 접은 채 발코니를 나오다 다시 몸을 돌려 랭던 경을 쳐다보니 그는 코트 안 주머니에서 자신의 시가 케이스를 꺼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 새뮤얼이 구해 준 카일랜드산 여송연을 품에서 꺼내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면 이것을 태우며 쉬세요, 랭던 경.”
“고맙습니다.”
그는 산뜻하게 대답하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랭던 경의 손끝이 자연스레 내 손가락을 포개듯 감겼다가 여송연을 데려갔다.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의뭉스러운 마지막 스킨십 때문에 얼굴에 평정을 가장할 수 없었다. 랭던 경에게 감정을 전부 들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나는 태연한 척 복도를 걸었으나 걸음이 어찌할 도리 없이 빨라졌다. 랭던 경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뒤늦게 눈물이 가슴께에 넘실거렸다.
그는 나를 끝까지 서튼 씨라고 부르고 처음 본 내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난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아버지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예의였다.
랭던 경이 없는 복도로 방향을 꺾은 뒤 나는 한동안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푹신한 카펫 위를 서성였다. 분노를 진정시키지 않고서는 카드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랭던 경뿐만 아니라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며 수군대고 속뜻이 보이지 않는 아리송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지금처럼 감정이 동요한 상태로는 서튼가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낼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로엘, 너는 감정이 얼굴에 늘 그대로 드러나는구나. 고귀한 사람은 표정에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돌아가신 어머니가 상냥히 타이르던 음성이 가슴 속을 메웠다.
‘또 어린애처럼 우는 거냐? 한심하긴.’
심약한 아우를 비난하는 도미닉의 목소리도 메아리쳤다.
나는 너절하게 흩어진 서글픈 감정을 끌어모아 뱃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제 나도 스물한 살이 되었으니 성년으로서 스스로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고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어찌 됐건 오늘 정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혹여 나를 보는 눈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조심히 꺼내 복도 기둥 뒤편에 떨어트리고 어지러운 호흡을 고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마차에 오를 때까지 랭던 경의 존재가 끊임없이 내 신경을 찔러 올렸다. 포커를 치는 내내 다른 테이블에 앉은 랭던 경을 흘끔흘끔 바라봤으나,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속 내게 눈길을 던지던 그는 갑자기 내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고 말했으면서…. 랭던 경은 내가 로엘 서튼이라는 게 그렇게도 싫은 걸까, 그렇게도.’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늦은 저녁에야 모임이 끝났다. 손님들은 정원에서 랭던 경의 배웅을 받으며 각자의 마차에 올랐다. 새뮤얼 프리데릭은 나와 모르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먼저 에메랄드 저택을 떠났고, 나는 사람들에게 밀려 마지막에야 랭던 경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내 비루한 자존심을 세워 보기로 했다.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고 관심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며 대충 랭던 경의 손을 잡았다가 놓아 버리려는 찰나,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올무처럼 나를 그에게 가뒀다. 덕분에 내가 계획한 무례한 악수는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정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어서 고맙습니다.”
랭던 경이 내게 건네는 인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았다. 마지막에 덧붙인 호칭을 제외하고는.
“조심히 가세요, 서튼 씨.”
“…오늘 저녁은 즐거웠습니다, 랭던 경.”
나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 마차로 가려다 분한 마음에 다시 발을 랭던 경의 앞으로 돌려놨다.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큰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랭던 경, 혹시 저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한사코 나를 ‘서튼 씨’라고 부르는 그의 앞에서 바보처럼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경을 긁어 보려 아무 질문이나 던졌는데 랭던 경의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을 한 번 열었다가 망설이며 다시 닫고, 그러고서도 좀 더 뜸을 들였다. 거침없이 말을 내뱉던 오만한 저녁의 태도와 괴리감이 깊었다. 그와 내가 정말 만난 적이 있나, 어두운 기억 속을 탐색하게 만드는 반응이었다.
랭던 경은 한참 만에야 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 서튼 씨는 뭐 기억나는 거라도 있습니까?”
나는 눈꺼풀을 내린 뒤 그에게 쏘아붙이려고 속으로 정리해 둔 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랭던 저하를 예전에 뵌 적이 있는 듯해 잠시 고민해 봤으나 저를 서튼 씨라고 부르는 무례한 분을 만났다면 기억해 내지 못할 리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불손한 태도를 잊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어쨌든 아름다운 저택에서 정찬을 같이 들 기회를 얻어 영광이었습니다, 저하.”
“다 했나요?”
“…네.”
랭던 경의 태연한 물음에 얼결에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오고 말했다. 그는 느긋하게 덧붙였다.
“또 쏘아 대고 싶은 말이 생각나면 언제든 전갈을 보내세요.”
“…….”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모욕을 주고 싶다면 서튼 씨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방향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롱 조의 질문에 고분고분 답하는 모습 역시 우습게 보일 수 있으니까요.”
랭던 경의 조언대로 이번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으나 대답을 하나 안 하나 그에게 내가 우습게 비치긴 마찬가지일 듯했다. 그의 오만함은 내 무례를 자근자근 밟아 부수고 ‘서튼 씨’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무안함을 감추려고 애쓰며 흘끗 그를 올려다봤다. 냉담한 표정의 랭던 경이 자신의 한쪽 입꼬리를 위로 약간 당겼다.
“그럼 이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랭던 경이 몸을 돌리고 나는 집사가 문을 열어 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조금씩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걸. 랭던 경에게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나는 후회에 휩싸여 있다가 문득 미묘한 느낌이 솟구쳐 둥근 창문 덮개를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랭던 경이 저택으로 들어가다 말고 내 마차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갑자기 서로 눈빛을 맞닥트렸다. 거리는 멀었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놀라고 당황하여 창문을 덜컹 닫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망설이다 다시 창문 덮개를 살짝 열었을 때는 랭던 경이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그제야 긴장해서 둥글게 올라가 있던 어깨가 피곤함을 호소하며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은 몹시 피곤하고 멀게 느껴졌다. 새뮤얼은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도미닉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내가 에메랄드 저택에서 지시를 잘 수행했는지 궁금했겠지만 나는 얼른 갑갑한 옷을 탈의한 후 홀로 적막 속에 쉬고 싶었다.
실내복을 입고 거실로 나가자 새뮤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가 먼저 질문하기 전에 말했다.
“랭던 경은 자유주의자일 리 없어요. 무례하고 오만하고 본인이 공작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익숙한 인간이더군요. 프리데릭 경, 시간만 낭비하신 거예요.”
새뮤얼과 도미닉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나를 배제하고 일을 모의하는 듯한 둘의 태도가 계속 눈에 띄어 느낌이 편치 않았다. 새뮤얼 프리데릭이 물었다.
“발코니에서는 마주쳤나?”
“네, 마주쳤어요. 저를 서튼 씨라고 부르며 함부로 대하더군요. 남색가인지도 모르겠어요. 악수를 하거나 얘기할 때 다소 무례하게 스킨십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성(性)적으로 느껴지는 건 없었어요.”
“그건 랭던 경이 신호를 보냈어도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도미닉이 나직이 얘기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말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랭던 경에게 짓밟히고 와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탓이었다.
“아무튼 자유주의자는 절대 아니에요.”
“그건 도미닉과 내가 판단할 거야, 로엘.”
새뮤얼이 말했다. 형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새뮤얼이 시킨 다른 일은 제대로 하고 왔니?”
“…네. 반지는 발코니 근처 복도에 떨어트리고 왔어요.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랭던 경은 자유주의자도 아닌 듯한데 굳이 제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도미닉은 내 말문을 막을 때면 으레 그렇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빛이 역력해 문장을 마무리 짓지 않고 입을 잠갔다. 도미닉이 혀를 찼다.
“로엘, 책임감이라고는 없구나. 그런 말을 지껄일 거면 처음부터 안 한다고 했어야지. 오늘 일을 시작했으니 발을 빼는 건 안 돼. 알겠어?”
일단 정찬만 참석해 보기로 했던 것인데 형의 말이 바뀌었다. 도미닉이 잔인하도록 차갑게 나를 노려봤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그 눈빛 아래 자주 가혹하게 혼나곤 했다. 마음은 저항하길 원했지만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형님….”
“새뮤얼과 얘기했다. 네가 원하면 새뮤얼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하더구나. 도구로 혼자 연습하기 무리면 새뮤얼이 직접 너와 할 수도 있고, 새뮤얼이 부담스럽다면 다른 이름 모를 청년을 붙여 줄 수도 있어.”
“형님, 어떻게 저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세요. 고민할 시간도 없이요.”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으나 역시 내 괴로움은 도미닉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내가 과연 모를까. 몰락한 서튼가에선 결국 도미닉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걸. 다만 내가 현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도미닉은 예전부터 기다리지 않고 나를 밀어붙이는 데 능숙했다.
“서서히 연습을 시작하도록 해라, 로엘. 네가 몇 가지 지시만 제대로 수행해 주면 새뮤얼이 서튼가를 도와주기로 했다. 일단 자작 가문답게 세간살이를 다듬을 수 있도록 금전적인 후원부터 해 줄 거야.”
도미닉의 지지를 등에 업은 새뮤얼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훑었다.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도미닉의 도움을 받아 나를 방으로 끌고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울렁대기 시작했으나 겁이 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주먹을 꼭 쥐었다. 새뮤얼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남색가는 아니지만 로엘 너와 하는 거라면… 그건 환영이지. 창부와 성교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고.”
새뮤얼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랭던 경과…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제가 모두 알아서 하겠어요. 프리데릭 경이 상관하실 바 아니에요. 당신과 해야 하는 아무런 이유도 없어요.”
“로엘! 말투 주의해라.”
나무라는 도미닉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정찬에 다녀와 몹시 지친 상태인데 도미닉에게 책까지 잡히고 싶지 않았다. 서러움에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할 수 없이 새뮤얼에게 사과했다.
“이해해 주세요, 프리데릭 경.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이만 쉬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새뮤얼에게 대충 인사한 뒤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잠을 자는 척 불을 끄고 침대에 걸터앉아 밖의 기척을 살폈다. 새뮤얼은 앞으로의 계획을 도미닉과 상의하는지 한 시간쯤 더 얘기를 나누다 집을 떠났다.
분침이 한 바퀴를 회전할 동안 나는 어둠을 응시하며 지난 5년의 세월과 최근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너덜너덜해질 만큼 곱씹었다. 도미닉의 좌절된 야망과 서튼가의 불행을. 5년 전 내가 저지른 죄를.
각자 지고 있는 좌절의 무게 때문에 프리데릭 경의 제안은 도미닉과 나, 둘 모두에게 절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난 5년간 우리에게 어떤 구제의 손길도 내민 이가 없다는 비극의 궁핍 또한 프리데릭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내 한 몸뚱어리만 사적인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문 아래 빈틈으로 도미닉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로엘, 자니?”
대답하지 않았다. 도미닉의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아버지의 머리가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죽어 가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폐에 구멍이 뚫린 듯 쉭쉭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로엘, 내 로니… 잘 들어라. 나는 실패했다. 그러니 남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네가 나를 팔아야 해. 당장 프리데릭에게 가야 한다….’
아버지의 유언이 살아서 귓가를 맴돌았다. 죽음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머릿속에 뿌리박힌 죄책감이 아버지의 영혼인 척 나를 설득했다.
‘로니, 부탁이다. 나를 위해 도미닉을 도와주렴. 너는 서튼가에 죄가 있잖아.’
“로엘, 정말 자는 거야?”
‘이대로라면 너희 둘 다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어떤 작은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이 집에서 외롭게 늙다 죽어 흙더미 속에서 썩어 버릴 것이다.’
가쁜 내 숨소리가 문턱을 넘지 않도록 억지로 침을 삼키며 몸을 가누는 동안 바닥을 기어들어 왔던 형의 그림자가 빠져나갔다. 도미닉이 침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실내등과 촛불을 끄는 소리, 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 취침 전 기도를 바치는 소리. 나는 가지 못할 천국을 염원하는 기도.
그 모든 소음이 매듭지어진 후에야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작은 램프에 불을 붙였다. 책상 맨 아래 서랍의 이중 바닥을 열어 닳고 닳도록 읽은 책을 꺼냈다.
<평등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금서 중 하나로 어린 내가 아버지의 죽음 후 겁 없이 몰래 빼돌린 책이었다. 보물을 품에 안고 차가운 침대로 들어가 엎드려 누웠다. 램프는 머리맡에 두었다. 예나 지금이나 구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금서를 소지하고 있다가 걸리면 보통 태형을 받았다. 하지만 로엘 서튼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다가 들킨다면 태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서튼 가문의 마지막 벽돌 한 장까지 부수어질 것이다.
오래된 책이 상하지 않도록 표지를 조심스레 넘겼다. 누렇게 바랜 첫 페이지에는 누군가가 펜으로 쓴 짧은 인사말이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로즈를 사랑하는 윌로부터.
모두 알지 못하는 이름인 데다 필체 또한 아버지의 글씨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중고 책을 구입했거나, 누군가가 자신이 받은 책을 다시 아버지에게 선물한 듯했다.
언제 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사말이었다. 테스, 로즈, 윌.
이 세 사람이 어떤 관계였을지 나는 종종 몽상하곤 했다. 테스라는 여인과 무슨 관계였기에 윌은 굳이 로즈를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넣었을까?
나는 목차를 지나 이 책의 시작점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매혹한 첫 장의 문구가 내 마음에도 내려앉았다.
모든 인간은 천부 앞에서 평등하다.
나는 나의 성경을 읽으며 랭던 경을 생각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많지만, 신의 뜻을 땅 위에서 이루고자 행동하는 선지자는 사막의 푸른 나무처럼 드물었다.
과연 테런스 랭던이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이미 불공평한 세상에 태어났으니 체제가 무너지기 전엔 귀족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누군가 혁명을 일으키고 피를 흘리기 전에 내 목숨을 먼저 내놓기는 두려웠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작은 그릇이었다.
귀족 계급의 최저점에 속한 나도 이러한데 그 오만한 랭던 공작이 과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을 각오로 선지자들을 돕고 있을까. 아니라면 나는 남색으로 몸을 더럽히겠지만 자유주의자들을 돕는 자를 해치지 않고 도미닉에게 빛나는 미래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여라도 맞는다면… 만약에 랭던 경이 선지자라면. 그게 더 문제였다.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것보다도 더. 나는 그자를 새뮤얼에게 밀고해야 할 것이고 내 신념과 가문 사이에서 다시 가족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비겁하게도, 혹은 인간적이게도.
하긴, 내게 신념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금서를 읽고 마음으로 지지하는 것 말고는 여태 실천한 일이 없으니.
랭던 경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계급을 무너트리려 했던 서튼가에게 경이라는 호칭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당신은 절대로 아니야, 절대로….”
나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랭던 경이 자유주의자가 아닐 거라는 사실이, 적어도 내가 아버지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을 밀고하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속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램프의 불빛이 비추는 글자들 역시 나를 다독여 주었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존귀하고, 너의 아버지는 옳은 신념을 따랐으니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 오만한 랭던 경이 너를 어떻게 무시하든, 그는 너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사람이라고.
오늘도 나는 책에서 위로를 구하며 고통스럽게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