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리스트 1권-1. 프롤로그: 16살, 로엘 서튼 (1/27)

리베라 리스트 1권

1. 프롤로그: 16살, 로엘 서튼

로엘 서튼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프리데릭 백작가를 방문한 것은 어느 초겨울 늦은 오후였다. 열여섯 살 소년은 이미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린 듯 눈꺼풀이 퉁퉁 붓고 뺨이 붉게 익어 몰골이 엉망이었으나 한눈에 봐도 눈물 자국으로 감출 수 없는 훌륭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백금색 머리카락과 파란 눈이 그 아름다운 얼굴의 빛나는 증거였다.

프리데릭 백작가의 집사는 추위에 떨며 나타난 로엘 서튼을 알아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로엘을 갓난아기일 때부터 봐 온 자였으나 잔인하게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로엘 서튼입니다.”

소년의 목소리에선 열여섯 살답지 않은 체념이 음울하게 묻어났다. 로엘 서튼은 덧붙였다.

“프리데릭 경께 필요한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안내받은 살롱에는 프리데릭을 비롯한 노르크의 이름난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엔 짙은 녹색 눈을 가진 26살의 청년 테런스 랭던 공작도 있었다.

귀족들은 로엘 서튼이 가져온 선물을 열었다. 그 선물은 살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몇몇은 소리 지르고, 몇몇은 수군대기 시작했으나 테런스 랭던은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그저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죄수처럼 앉아 있는 소년을 보고 있었다. 가여운 소년은 제가 들고 온 선물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고개도 들지 못했다. 다만 서튼 자작가에 자비와 선처를 구할 뿐이었다. 찬 바람에 튼 뺨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귀족들은 로엘 서튼을 잠시 내보내고 언쟁했다.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격론 끝에 그들은 서튼 일가를 노르크 수도의 외곽으로 쫓아내고 재산의 3분의 2를 몰수하기로 결론지었다. 이 자비로운 결정은 로엘 서튼이 직접 가져온 선물 덕분이기도 했지만, 테런스 랭던 공작이 소년의 행동이 본이 될 수 있도록 목숨만은 살려 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결과라고 보는 쪽이 옳았다.

내내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소년은 마침내 어른들이 있는 방으로 도축되는 송아지처럼 끌려갔다.

귀족에게 맞서 평민에게 의회를 넘기려 공모한 서튼 일가는 재산의 3분의 2를 몰수하고 수도 밖으로 추방한다.

가족을 살린 판결문을 받아 든 소년은 눈물을 떨구며 붉은 노을 아래로 걸어 나왔다. 노을빛이 아버지의 핏빛으로 보여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차에서 울다 지친 소년은 곧 비워 줘야 할 자신의 저택으로 향하는 대신 한적한 거리에 놓인 의자에 덩그러니 앉았다. 황량한 바람이 길가의 낙엽을 거칠게 쓸어 갔다. 둥그런 눈물이 뺨을 타고 코트 위로 굴러떨어져 옷가지를 적셨다.

찬 바람이 잠시 멎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서튼 경은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희생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로엘 서튼은 반역자인 아버지를 편드는 목소리에 놀라 숨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의 뒤편에 놓인 벤치에 등을 돌리고 앉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낯선 목소리가 귀를 지나쳐서 공기를 타고 빙 돌아왔기 때문이다. 굳이 제 뒤를 따라와 아버지를 칭찬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걸 보면 아버지와 같은 사상을 나눈 동지인 듯했다.

“나는 로엘 서튼 씨가 서튼 경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마세요. 티끌만큼도. 그대는 실패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빚을 지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가문을 살린 것뿐입니다.”

“…….”

“노르크에 자유를! 내가 돌아가신 서튼 경 대신 반드시 샤를 대공을 왕위에 올리고 평민들에게 투표권을 쥐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기척이 사라진 뒤에야 가여운 로엘 서튼은 뒤를 돌아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신사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뒤쪽의 벤치에는 가죽 장갑이 한 켤레 남아 있었다. 그 신사가 저에게 주고 간 것인가 싶어 얼어붙은 손에 잠시 껴 봤으나 혹시 누가 잃어버린 물건일까,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놨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가져가더라도 자신보다 더 춥고 가난한 이가 줍기를.

로엘 서튼은 후회하지 말라는 이름 모를 신사의 말을 되새기며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터벅터벅 저택으로 걸어가며 다짐했다.

자신은 오늘 일에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살겠노라고.

그것은 어린 로엘 서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