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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당 4가구 정도 붙어 있는 긴 복도의 끝이었다. 사이즈가 맞지도 않아 껄떡거리는 커다란 운동화를 질질 끌며 허둥지둥 놈의 집 앞을 벗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파자마 상의를 대충 허리에 둘러 묶었다. 다리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났다. 엉덩이가 휑했지만, 앞이라도 가린 게 어디야. 그래도 밖에 나왔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복도 창문 밖을 힐끔 내려 보자 아찔할 정도로 나무며 자동차들이 작게만 보였다. 벽엔 19층이라는 커다란 숫자가 매달려 있었다. 높기도 하다. 이 발로 1층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를 탈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계단이 나을 것 같았다. 아파도 참아. 다리가 부러져도 움직여야 한다고 했잖아.
쿵쾅거리며 층계를 뛰어내렸다. 2개, 가끔은 3개. 최대한 다치지 않은 쪽으로 착지하려 애썼지만, 가끔 다친 발목을 세게 디딜 때면 정수리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반복적으로 꼬인 계단을 돌고, 돌고 또 돌아서 내려갔다. 8층쯤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어지러워서 잠깐 쉰 걸 빼면 내 인생에 이렇게 빨랐던 적이 있는 싶을 정도였다.
머리가 핑핑 돌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더 쉬었다간 놈이 다시 목을 조르며 그 좆같은 집안으로 날 끌고 갈 것만 같았다.
“허억! 허억!”
1층과 2층 사이에서 벽을 붙잡은 채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에 화들짝 놀라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놈이 깨어났나? 날 잡으러 오고 있는 거 아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보단 놈에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태어나도 죄짓고는 못살 거야. 도망자라는 심리적 부담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탕! 탕! 탕!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느릿하게 열리는 자동문을 손바닥으로 미친 듯이 때리다 다 열리기도 전 그 사이를 비집고 뛰쳐나갔다.
산책 중인 노부부, 엄마와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어쩌지, 이제 어쩌지, 어디로 가야하지.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무작정 아파트 입구를 찾아 움직였다.
햇살은 따뜻했고 이따금 떠다니는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 너무 덥지 않게 배려했다. 평화롭게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분명 햇볕이 닿고 있는데 이상하게 추웠다.
벌어진 옷자락을 연신 여미며 놀이터 옆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 정문으로 빠르게 걸었다. 빌어먹을 아파트. 얼마나 넓은지 아무리 걸어도 주차된 차들만 지겹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엄마, 엄마.”
엄마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멜빵을 입은 남자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품 안에 곤히 잠든 아기를 안고 한 손엔 묵직해 보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바라본 채로 엄마의 옷자락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아, 안 돼…. 위험한 직감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얼결에 붙잡은 트럭은 먼지가 소복했지만 더럽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그 뒤로 몸을 웅크렸다.
“지훈아, 엄마가 동생 안고 있을 때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저 형아 꼬추 보여~.”
“뭐?”
약간은 짜증스레 대답한 엄마가 아이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듯 비닐봉투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장난 치면 못써요.”
“장난 아니야. 저기 뒤에 아빠랑 꼬추 똑같은 형아 있어! 왕꼬추! 왕꼬추!”
“지, 지훈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히잉, 진짠데. 지훈이 거짓말 안 했는데…. 아빠가 지훈이도 백 밤 자면 꼬추 커진댔어~. 앞으로 몇 밤 더 자야 저 형아처럼 돼?”
“허지훈! 너 자꾸 엄마 말 안 들을래?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랬지! 얘가 남들 보기 부끄럽게 왜 그래!”
엄마의 큰소리에 억울한 듯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만다. 누가 들을까 부끄러운지 빈손으로 아이의 손을 붙잡은 엄마가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에 트럭 밖으로 힐끔 고개를 내밀자, 여태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입이 댓 발은 나온 상태로 슬쩍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휴… 다행이다. 적어도 어른한테는 걸리지 않았어. 아니 잠깐. 어차피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어째서 숨었을까?
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트럭 밖으로 슬며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돌리는 찰나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힘없이 부딪혀 왔다.
“앗.”
“어….”
머리를 늘어트린 여학생이 양손 가득 책을 끌어안고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숙인 시선은 묘하게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꺄아아!!”
“자, 잠깐만!”
“살려 주세요!!”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닌데 울음을 터트린 여자아이가 들고 있던 책을 와르르 떨어트리고 도망쳤다.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에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놀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든 경비, 택배 유니폼을 입은 남자, 산책 중이던 부부,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수다를 떨던 중년 부인들…. 몇 안 되긴 했지만 몇 개월 만에 본 것치고는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며 반라의 남자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야, 젊은 새끼가 아침부터 이딴 짓 하는 거냐?!”
그중 가장 체격이 좋은 택배기사가 성큼 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변태! 라는 소리에 몇몇 여성이 몸을 반쯤 돌리며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렸다. 꽉 쥐어진 주먹이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높게 올라간다. 아, 아냐 오해야!
“아니에요! 변태 같은 거 아니에요! 나, 나는 피해자예요!”
시인하며 빠르게 흔드는 손엔 트럭 위에 있던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어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누가 경찰 좀 불러요! 뻔뻔한 걸 보니까 이 새끼 상습범일지도 몰라요!”
“나, 납치됐어요. 납치당했다가 도망쳤단 말이에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훤히 드러난 아래를 숨기는 것보다 이 사람들을 설득해 도움을 얻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가며 애절하게 도와 달라 소리치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에게 손을 뻗자 해코지를 할 거라 생각했는지 경비와 택배기사가 내 팔을 붙잡으며 밀어냈다.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거절하는 듯한 행동에, 그들의 옷을 찢을 듯 움켜쥐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스토커가 절 가둬 뒀어요! 납치 당하고 사, 삼 개월 만에 탈출한 거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납치라는 말에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 집에서 도망쳤어요! 19층 끝 집이요! 도망쳐온 방향을 가리키며 무릎을 꿇고 양손을 싹싹 문질렀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 좀 숨겨 주세요. 그 새끼가 또 잡으러 올 거예요! 말을 하다 보니 참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볼을 적셨다. 미친놈이에요, 진짜 미친놈! 정신병자라구요!!
“19층 끝 집이면 부녀회장님 옆집 아니야?”
“세상에, 우리 아파트에 납치범이?”
“누, 누가 진짜로 경찰 좀 불러요. 총각 일어나. 이거라도 입어.”
경비가 겉옷을 벗어 내 아래를 덮어 줬다. 체온이 가득한 옷에 설움이 북받쳐 더 서럽게 눈물이 쏟아졌다. 뚝, 뚝. 턱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무릎 위에 옷을 적셨다.
중년 부인들은 거리를 조금 벌린 채 속닥거렸고, 누군가 경찰을 부르라는 소리에 나를 막아섰던 택배기사가 주저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침 산보를 나왔던 주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10명도 되지 않는 수였지만 놈 이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안도가 되더라.
“여기 ○○아파트인데요, 납치당했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젊은 남잔데, 옷도 못 입고 밖으로….”
“무슨 일이에요?”
경찰에 신고하던 남성을 팔을 붙잡으며 익숙한 목소리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작고 통통하고 순한 인상의 여성. 목소리만은 몇 번이나 익히 들어왔던 부녀회장이였다. 놈과 친하게 담소를 나눴던… 바로 그 옆집의 부녀회장.
“아이고, 1907호! 큰일 났어! 우리 아파트에 글쎄 납치범이 있데!”
1907호라 불린 부녀회장이 납치범이란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어머머 하고 심각한 얼굴을 한다.
“…우리 아파트에?”
“글쎄, 심지어 자기네 옆집에서….”
“우리 옆집?”
옆집이란 소리에 부녀회장이 인파를 해치고 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흠칫. 불안한 마음에 옷깃을 당겨 얼굴을 가리는데, 빤히 날 바라보던 부녀회장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아는 사람이야?”
“어머 세상에! 자기가 납치당했대?! 어휴! 아저씨! 전화 끊어요! 얼른! 어휴, 납치 아니야!”
부녀회장의 난리에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해졌다.
“아, 아니에요. 아줌마, 아니에요! 저 진짜 잡혀 있었단 말이에요!”
“이 사람 미친 사람이야! 우리 옆집에 총각 하나 산다고 했잖아? 그 집 형인데 정신병이 있어서 맨날 이래! 내가 몇 번이나 봤다니까!”
“아니라구요!! 아줌마도 속은 거예요!! 저 그 사람이랑 가족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제발! 저 안 미쳤어요!!”
내 말을 믿어야 하는지 부녀회장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한 여성이 부녀회장의 편을 들고 나섰다.
“자기가 저번에 말했던 그 정신병자? 젊은 총각이 혼자 부양한다는 거기 맞지? 고무장갑 가져다준다 했던 데!”
“맞아, 그 집! 어휴~ 어쩌다 이 사람이 여기까지 나와서…. 총각이 집에 없나?”
부녀회장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주변 분위기가 확연히 변해 버렸다. 동정 가득한 목소리로 어서 경찰을 부르라던 사람들이 갑자기 싸늘하게 돌아서, 날 변태에 정신이상자라 수군거리며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주저하며, 진짜 납치당한 거면 어떻게 해요. 일단 경찰을 불러서… 하고 소심하게 질문했지만, 부녀회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 부르면 괜히 동네만 흉흉해져요! 가뜩이나 동네에 소각장 들어온다는 말 때문에 집값 떨어지고 있는데! 여기 정신병자가 있네 범죄자가 있네 하는 소문이 돌아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그 집 총각이 형 병수발 한 거 1 ,2 년도 아니고 엄청 오래됐어, 내가 다 봤어~!”
시발 보긴 뭘 다 봐!!! 내가 그 집에 있던 게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아니에요! 그거 다 사, 사기란 말이야! 저 안 미쳤어요! 안 미쳤어!! 멀쩡하다고!! 내가 아니라 그 새끼가 정신병자라고!!”
“어머!! 이 사람 날뛰는 것 좀 봐!! 무서워라! 누구 하나 다치겠어! 조심해요!”
“시발, 진짜 아니란 말이야!! 아아아악!! 아줌마 제발 믿어 주세요! 제발!! 저 그 새끼랑 아무 관계도 아니란 말이에요! 갑자기 납치당했단 말이에요!! 아저씨! 아저씨! 제발 경찰 좀 불러 주세요!! 누가 좀 도와줘요!”
“미친 건 총각이지! 아저씨, 사람들 더 보기 전에 얼른 집에 데려다 줘요! 내가 같이 갈 테니까!”
“아, 아냐! 아냐! 안 돼! 아아악!”
엉거주춤 내 팔을 붙들고 있던 경비를 밀쳐 내자 택배 기사가 뒤에서 양팔을 포박하듯 붙잡으며 조였다. 진짜 범죄자를 대하는 듯 인정 없는 행위에 근육과 뼈가 어긋난 것 같은 고통이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자 커다란 운동화 한 짝이 사람들 틈으로 날아가 아스팔트 위를 나뒹굴었다. 신발이 뭐라고. 마치 폭탄이라도 던진 것마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신발을 피해 멀찍이 도망쳤다. 조심해, 정신병이 옮을지도 몰라! 수군거리는 목소리 틈에서 콧방귀도 안 나오는 말이 들려왔다.
“아파!! 놔! 놔주세요! 제발 놔주세요! 아악!”
거칠어진 분위기에 주저하던 사람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젠 도와주려 시늉을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모두가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기 바빴고, 누군가는 나에게 미쳤다며 손가락질까지 했다.
왜 놈이 아니라 나한테 이러는 건데? 내가 잘못한 게 아니란 말이야! 미친 건 그 새끼란 말이야!! 개중엔 휴대폰으로 이 난동을 촬영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다짜고짜 들이밀어진 렌즈에 당황했지만… 그래! 찍어! 찍어서 어디든 퍼트려! 차라리 원래의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이 꼴을 보게 된다면 확실하게 내 결백을 믿어 줄 테니까!
“뭘 찍고 있는 거예요! 정신병자가 사는 아파트라고 소문이라도 내려 그래요?!”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영상을 찍던 사람이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좁히다 결국엔 자신도 이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걸 자각했는지 혀를 차며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 안 돼! 싫어! 싫어! 돌아가기 싫어!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제발!”
꺾인 팔이 뒤로 당겨지며 길을 재촉 당했다. 발로 있는 힘껏 바닥을 긁고 난동을 부렸지만, 신발도 없는 맨발이 아스팔트에 거칠게 마찰하며 상처만 늘렸을 뿐이다. 흉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발목보다 더 심하게 욱신거리는 곳이 늘어났다. 질질 끌려가며 놈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내 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더 커졌고, 결국 베란다 창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납치당했어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아아아악!!”
“저 사람 입 좀 막아요! 동네 사람들 다 알겠네!”
내 주변에 진을 치고 따라오던 주민 몇몇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팔을 붙잡고 있던 택배기사는 변태 정신병자를 다루는데 정의로운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순순히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냄새나고 두툼한 손이 얼굴로 다가오는 순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힘껏 그 손을 깨물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른 건 남자였다. 와작- 하는 소리가 골을 통해 들릴 정도로 세게 물었으니 적어도 아까처럼 손을 쓸 순 없겠지. 왠지 비리게 느껴지는 침을 바닥으로 뱉으며 남자의 손을 벗어나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발목은 이미 한계까지 혹사당한 상태였다. 마음은 이미 아파트 밖에 있는데 몸이 따라가질 못해 절뚝거리며 겨우 사람들과 거리를 뒀을 뿐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달렸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며 빠른 뜀박질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선유 씨!!”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손길, 익숙한 체취…. 어느새 나를 따라잡은 놈이 나를 제압하듯 뒤에서 덮쳐 안았다. 속도를 못 이기고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놈의 팔이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은 탓에 바닥 대신 놈의 몸과 부딪쳤다.
“선유 씨! 선유 씨!”
“놔! 놔아아!! 아아악!! 놓으라고!!”
“어, 어떻게 여기, 밖에 왜, 도대체….”
횡설수설 제대로 된 문장 하나도 말하지 못하며 놈은 계속 말을 더듬거렸다. 등에 와 닿은 놈의 심장이 나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형 관리 좀 잘해~! 동네에 소문 안 나게 하겠다며! 어휴!”
부녀회장의 짜증 섞인 생색이 들렸지만, 놈은 계속해서 도망치려는 나를 붙들고 있는 것도 버거운 것 같았다. 놔! 놔! 시발새끼야! 손 떼! 선유 씨! 진정해요 선유 씨! 놈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단단하게 조여진 팔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 일단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집으로 가요! 네?!”
“시발 우리 집이 어디 있어! 개새끼야! 시바알!! 이 새끼가 납치범이라고요! 왜! 왜 아무도 안 믿는 건데!”
옆에서 부녀회장이 뭐라 뭐라 자꾸 말을 걸었지만, 놈은 안고 있던 내 몸을 그대로 번쩍 들쳐 매고 성큼 성큼 움직였다. 주먹과 무릎으로 무차별하게 놈을 내리쳤다. 하지만 놈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저 빠르게 내가 빠져나온 그곳으로 나를 돌려놨다. 어느새 아래를 가리고 있던 파자마가 벗겨져 엉덩이가 훤히 보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놓아 달라 소리를 질렀지만 높아지는 층에 비례해 두려움도 커져만 갔다. 분명… 분명 엄청 화났을 거야. 도망쳤어야 했는데. 다시 잡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통 정도론 안 끝날 거야.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벌을 받을 거라고. 농담이라 했던 요도플? 피스팅…? 아니 이번엔 정말 약쟁이들한테 돌려질지도 몰라. 어쩌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정없이 맞을 수도 있지…. 그리고 좁고 어두운 곳에 가둬 놓고…. 무서워… 무서워, 젠장….
15층부터 축 늘어진 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놈은 거실에 와서야 나를 바닥에 내려 뒀다. 소파에 살포시 내려진 내 앞으로 놈이 무릎을 꿇고 아픈 발목을 붙잡았다. 움찔.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왜 그랬어요? 내가, 내가 얼마나…. 별생각을 다 했어요. 못 찾으면 어쩌지, 영원히 도망간 거라면 어쩌지….”
나의 부재를 발견하고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온 놈의 발엔 짝도 맞지 않는 슬리퍼 한 짝과 구두 한 짝이 신겨져 있었고, 바지는 여전히 잠옷에, 위에 걸친 셔츠는 단추가 엉망으로 엇갈려 있었다.
내 발목을 쥐고 있던 놈의 손이 강하게 조여졌다. 아아악! 뼈가 잡히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자, 잘못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아아악! 미,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발목에서 손을 뗀 놈이 그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신음했다. 이번엔 정말 부러트릴지도 몰라. 잔뜩 겁을 집어먹고 소파 위로 몸을 웅크리자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놈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떴는데 당신이 내 옆에 없었을 때…. 죽고 싶었어요. 심장이 멎어 버린 것 같았다구요. 꿈을 꾼 줄 알았어요. 한순간 당신과 함께 했다는 달콤한 꿈을…. 너무 끔찍하잖아요, 우리의 시간이 꿈이었다니. 내 품에 안았던 당신이 이렇게 선명한데…!”
덜덜 떠는 손으로 소파를 움켜쥐며 고개를 든 놈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서러운 듯 몇 번이고 어깨를 떨며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그때 가족들 얘기로 괴롭혀서 그래요? 네? 그거 때문이에요? 형 결혼식에 못 가게 해서? 하, 하지만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보내요! 내놓기만 하면 남자가 줄줄 꼬이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내놓냐구요…! 도대체… 왜 그랬어요? 선유 씨. 나한테 왜…그랬어요…?”
“나… 나는….”
“나 노력했잖…잖아요. 흐윽. 우리 잘 맞춰 가고 있었잖아요. 계속 노력했잖아요!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당신은 계속 나한테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건데!!”
흥분한 탓에 놈의 감정이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울해 하다 화를 내고, 또 우울해 하다 내 탓을 하며 분노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놈은 숨쉬기가 답답한 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 퍽! 내리쳤다.
“숨 막혀요. 숨 막혀.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거예요? 나 좀 봐 줘요. 나를 좀 봐 달라구요!! 나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요!!”
“너는… 너는 그걸 이제 느꼈어?”
무조건 잘못했다, 열쇠가 보이기에 충동적으로 그랬다, 내가 정말 미쳤었다,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빌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절할 정도로 이기적인 놈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섞인 대답이 튀어 나갔다. 내 비웃음에 놈은 귀신이라도 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늘 그랬어. 난 늘 숨 쉬는 게 괴롭고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 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죽었을 텐데. 난 너랑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악몽이었고, 지옥 같았어.”
“거짓말… 거짓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어떻게 지옥이야.”
“강간당하고 감금당하는 게 사랑이라고? 이게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해?! 씨발!!”
은근슬쩍 상처로 가득한 내 발을 붙잡으려는 놈의 손을 뿌리쳤다. 허공으로 던져진 손이 그대로 멈춰 굳어 버린다. 이쯤 되니 참는 게 더 어려웠다. 만약 오늘 살해당하더라도 할 말은 다 해야겠어.
“미친 새끼. 난… 너처럼 미친 상태로는 못 살아. 못 견뎌, 이렇게는 더 못 산다고…!”
“나, 난 미치지 않았어요. 이제 병원도 안 가도 된단 말이에요…. 난 이상하지 않아요.”
“3개월이나 어울렸음 됐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더럽게 굴렀잖아! 매일같이 끔찍하게 시발, 네 정액도 먹고, 하루가 멀다고 섹스하고, 생전 보지도 못했던 기구도 사용해 줬잖아!! 이제 됐잖아!! 이제 놔줘도 되는 거잖아!!”
내지른 비명이 공허한 거실을 울리다 사라졌다. 순간의 소란이 침식되며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놈은 내가 한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던 놈이 다짜고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선유 씨.”
“씨발.”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닥쳐! 시발, 이게 무슨 사랑이야! 좆같은 논리 들이대지 마! 이 세상에 누가 시발, 너 같은 새끼 마음을 알아주겠어!”
아무리 뿌리쳐도 놈은 필사적으로 내 손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몸을 반쯤 일으켜 소파 뒤로 손을 숨기자 놈이 광적으로 손을 잡기 위해 몸을 던졌다. 결국은 제 품에 나를 가두고 내 양손을 틀어쥔 뒤 움직이지 못하게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선유 씨가 알아줘요. 선유 씨가 알아주면 되잖아요!”
“비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 나는 선유 씨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날 사랑해 줘요! 제발 날 사랑해 줘요! 어떻게 해야 날 이해해 줄 건데요? 네? 어떻게 해야 날 사랑해 줄 수 있는데요?! 난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데요…! 내가 뭘 어떻게 해 줄까요? 당신이 떠나는 것 빼고는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요! 죽을 것 같아요…. 당신이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난 죽는다구요!”
“그럼 뒈져, 이 새끼야!!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뒈지라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 준다고?! 그럼 뒈져!!”
놈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놈은 아주 조금의 표정도 없이 위에서 날 내려보며 되물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사랑해 달라며 흥분해서 엉엉 울던 놈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당황스런 태도 변화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번엔 또 왜 이러는 거야….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손목을 틀어쥔 놈의 손에 힘이 풀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놈은 여전히 ‘선유 씨가 원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약속했어요.”
“뭐?”
“당신이 원하는 것…, 내가 죽으면 날 사랑해 주기로, 약속한 거예요.”
“무… 무슨 개소리야.”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이 활짝 웃으며 행복을 과시했다. 놈은 순수하게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앞머리 사이로 초승달처럼 접힌 눈이 환하게 드러났다.
“좋아요!”
놈은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너, 뭐 해…?”
놈은 박수를 치며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얇은 방충망까지 모두 열자 창밖으로 맑고 높은 하늘이 펼쳐졌다.
“시발, 너 뭐 하는 거냐고!”
얇고 연약해 보이는 베란다 난간을 붙잡은 놈이 펄쩍 뛰어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훅 넘어갈 것 같은 불안감에 오히려 소파 위에 있는 내 손이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설레요. 이제야 당신이 날 사랑해 준다니….”
“야… 씨발, 장난치지 마…!”
“나도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아저씨 말고 드디어….”
수줍게 접힌 눈은 처음부터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저씨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할 땐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싸늘한 눈으로 웃었다. 마치 내가 아니라 그 ‘아저씨’에게 하는 말같이….
“내려와, 내려와서 얘기… 다시 얘기하자. 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는 알고 있어?!”
“선유 씨”
“내려오라고!!”
“영원히 사랑해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놈이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놈은 요지부동 그대로 앉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3걸음. 딱 3걸음 앞에 놈이 있었다.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
“약속 꼭 지켜요.”
“아….”
순식간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눈을 깜빡일 순간도 없이… 놈의 푸른 파자마가 하늘 속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