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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우울해하는 꼴이 불쌍했는지 놈이 처음으로 물었다.
“주말이니까…. TV 볼래요?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TV라는 소리에 아주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원래 우리 집엔 TV도 없었거니와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 하는 거라곤 사회자도 없는 클래식 라디오를 듣는 게 전부. 가끔은 가요 채널도 틀어 줬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다.
겨우 제대로 된 여흥 거리를 준다는데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있겠어? TV가 아니라 얇은 책을 한 권을 준다 해도 반가웠을 거다.
하지만 선뜻 대답이 없자 놈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눈치를 살피며 “뭐든 괜찮으니까 알려 줘요.”라고 하며 슬쩍 손을 붙잡으려 했다. 닿기도 전 이불 속으로 손을 숨겨 버리자 멋쩍은 얼굴로 이불만 만지작거린다. 며칠 전 일로 마음이 상해 놈과 닿는 걸 한사코 거부하고 있으니, 놈은 풀이 죽은 강아지마냥 계속 옆을 맴돌며 슬쩍 기회를 노렸다.
“아저씨.”
“네?”
“아저씨 보고 싶어.”
“무, 무슨….”
마음이 곱지가 않아서 일부러 비꼬듯 ‘아저씨’를 보고 싶다 했다. 갑작스런 호칭에 놈의 낯이 새파래지더니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었다.
“영화 보고 싶다고.”
“아….”
영화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도대체 그 아저씨가 누구 길래. 정말 놀란 듯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놈이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건 잘생긴 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안 돼요.”라며 밖으로 나갔다.
자기를 놀래킨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30분쯤 후에 놈이 틀어 준 건 ‘아저씨’가 아닌 ‘아가씨’였다.
“이거 다~ 보고… 여기 나온 거 해 봐요. 우리.”
놈은 고소하게 튀겨진 팝콘을 안겨 주며 웃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거라 잘 모르지만… 구시정이 문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놈은 내 발목 구속구를 소파 다리와 묶은 뒤에 영화를 재생했다. 제작사의 이름이 올라가며 오프닝이 시작됐고, 색감 좋은 풍경에 배우들이 등장했다. 진짜 놀랍게도…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가 무려 ‘해리포터’였다. 그 이후로 영화라는 걸 처음 보는데 재미없을 리가 있나. 순식간에 빠져들어 집중해 버렸다.
그렇게 10여 분을 놈과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내 입에 팝콘을 넣어 주던 놈이 슬쩍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놈이 작은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저녁 재료 손질만 할게요. 미리 해 둔다는 게 깜빡했네요. 영화 보고 하면 밥 시간이 늦을 거 같아서….”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이러니 방해만 된다. 벌레를 쫓듯 손을 흔들자 놈이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것 때문에 영화가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영상도 좋고… 저렇게 예쁜 여자들도….
“와 진짜 예쁘네….”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주인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예쁘다 중얼거렸다. 도마와 칼을 꺼내 들던 놈이 화들짝 놀라며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단호박 좋아해요?”
“…….”
“선유 씨, 단호박 좋아하냐구요.”
“아 몰라. 말 시키지 마. 한참 재밌는데.”
“단호박 샐러드 만들려고 하는데, 달게 할까요? 약간 싱겁게 할까요?”
저놈 귀찮아 죽겠네.
“…너무 달게 하지 마.”
“네!”
겨우 얻어 낸 대답에 뭐가 그리 기쁜지 잔뜩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나, 지나가 버렸네. 진짜 예뻤는데…. 리모컨도 주질 않아서 돌려볼 수도 없다. 힐끗 주방을 바라보니 놈이 새파란 단호박을 도마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리모컨… 안 주려나. 앞으로 조금만 돌려 달라고 해도 안 해 주겠지. 일부러 그런 게 뻔한데 해 주겠어.
결국 그 장면을 포기하고 다시 영화에 집중하는데, 부스럭거리기도 하고… 탕- 하고 도마를 치기도 하고. 처음보다 다채로워진 소음이 귀에 거슬렸다. 재료 손질만 하겠다던 놈이 생각보다 오래 있네, 라고 느낄 쯤에 갑자기 “아 씨발….”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놈은 가식적인 얼굴로 웃으며 다시 도마에 시선을 집중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욕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TV로 고개를 돌리는데, 이번엔 제대로 쾅!! 놈이 있는 힘껏 도마를 내리쳤다.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칼이 반쯤 박힌 단호박이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내가 일어난 것도 모르는지, 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호박이 매달린 칼을 그대로 들어 탕!! 하고 도마를 내리쳤다.
아주 조금 더 벌어진 호박에 놈은 탕! 탕탕!! 탕!! 몇 번이고 도마를 내려치길 반복했다. 단단해서 썰리질 않으니 마구잡이로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뾰족하게 선 칼끝과 호박을 붙잡고 있는 놈의 손이 묘하게 가까워서 보고 있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였다. 저러다 잘못하면 다치….
“앗!”
순간 도마 위로 붉은 색이 흘러내렸다. 왈칵 쏟아진 피와 놈의 비명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끼긱-! 구속구와 묶인 소파 다리가 나를 붙잡으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우왁!”
멀리 가지 못하고 발목이 당겨지며 앞으로 넘어졌다. 쿵! 아까 단호박이 도마를 칠 때와 비슷한 타격음에 그제야 놈이 뒤를 돌아 나를 확인했다. 아 젠장, 묶여 있던 걸 까먹었어.
내가 넘어진 걸 보고, 나보다 더 놀라 보이는 놈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들고 뛰어왔다. 놈이 지난 자리에 붉은 핏방울이 길을 만들었다.
“선유 씨! 괜찮아요?! 마, 많이 아파요?!”
내 발목을 붙잡은 놈이 여기저기 다친 곳이 더 없나 살폈다. 구속구에 쓸려 피부가 조금 벗겨지긴 했는데… 그보다 네 손이 더 심각하지 않냐? 피 계속 나는데…. 나한테 다 묻고 있잖아.
“어떡해….”
놈이 울상을 하고 열쇠를 꺼내 다친 쪽의 발목 구속구를 풀어냈다. 구급상자를 가져와 살짝 부어오른 왼쪽 발목에 조심스레 약을 바르는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후후- 약이 마를 때까지 몇 번이고 입김을 부는데, 놈은 정작 제가 다쳤다는 건 잊은 듯 보였다.
어느새 놈의 핏자국으로 낭자한 다리를 보고 있자니 맘이 절로 심란스러웠다.
“됐으니까… 네 상처나 좀 어떻게 해 봐.”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개소리하지 마라. 나한테 계속 피 묻잖아!”
“부끄러워하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거냐며, 놈은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헤… 하고 바보 같은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또 부어오른 발목을 보자 금방 눈꼬리를 축 내리며 속상해, 속상해 하고 중얼거렸다.
놈이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내 다리에 묻은 제 피를 슥슥 닦아 냈다. 소중한 선유 씨에게 또 피가 튈까. 칼에 베인 왼손을 내게 떨어트려 놓고 오른손만 사용하는 게 참… 쓸데없는 정성이다. 보통은 피가 나는 곳을 먼저 지혈하지 않아? 왜 이런 비효율적인….
“야, 손부터 어떻게 하는 게….”
“괜찮아요. 선유 씨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좀 더 아픈 게 나아요.”
“뭔 개소리냐고. …내놔!”
보다보다 답답한 마음에 놈의 다친 손을 붙잡고 뚜껑이 열린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놈이 윽! 하고 신음했지만 무시하며 상처 주변을 닦아 내자 생각보다 크지 않은 상처가 보였다. 단순히 혈관을 건드렸는지 피가 많이 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병원은 가 봐야 할 것 같지만.
더 살펴 봤자 의사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상처 위로 지혈제를 뿌리고 깨끗한 거즈를 올려 밴드로 꾹꾹 누르며 고정시켰다.
“소, 손 잡았어…. 며칠 만에….”
분명 일부러 세게 누르고 있어서 아플 텐데, 놈은 그것보다는 겨우 나와 손을 잡게 된 게 더 기쁜 것 같았다.
“깍지끼지 마라. 상처 더 잡아 벌리기 전에.”
“선유 씨가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심장이 너무 떨려서 죽어 버릴 것 같아요!”
“끼지 말라니까!”
혼자 망상에 빠진 놈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들고 있던 거즈를 내팽개치니 “놈이 왜요? 왜 더 안 해 줘요?” 하고 몸을 밀착해 왔다.
“떨어져! 너 혼자 해!”
“아 왜요. 선유 씨가 해 줘요. 응? 계속 해 줘요.”
“싫어.”
“왜요? 부끄러워서요?”
“착각도 정도껏 해! 짜증 나니까!”
“귀여워! 수줍어하는 것 좀 봐!”
“악!”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던 놈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직 피를 덜 닦았다는 건 잊은 건지, 놈은 연신 귀여워! 귀여워!를 외치며 내 온몸에 입을 맞췄다.
“수줍어하는 선유 씨 완전 최고야…. 나 꼴렸어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내 앞에 있는 게 선유 씨인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요.”
“으읏! 시, 싫어! 영화 보던 중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여 줄게요.”
입술을 뭉개며 입을 맞추던 놈의 손이 자연스레 사타구니로 향한다. 성기를 주물거리던 놈이 점점 손가락을 안쪽으로 움직이며 익숙하게 구멍을 꾹- 눌렀다. 놈을 거부하듯 구멍을 꽉 조이자 동시에 삐이이이- 하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뒀던 냄비가 끓으며 소리를 질렀다.
“무, 물 끓는다.”
“괜찮아요, 밥도 나중에….”
“나 배고픈데.”
“…….”
“굶기게?”
“…아뇨….”
선유 씨를 굶길 순 없죠….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일어난 놈이 원망스럽게 가스레인지의 버튼을 잠갔다. 입 주변에 범벅이 된 놈의 침을 닦아 소파에 문질렀다. 우악스럽게 희롱당했던 사타구니가 저릿거리는 바람에 양손으로 감싸며 쭈그려 앉았다. 난리를 치는 사이 한참이나 지나간 영화에선 한 여자가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새벽에 몸을 뒤척이다 욱신거리는 발목을 부여잡고 눈을 떴다. 밥 먹을 때까지만 해도 별로 아프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근육이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확연히 부어오른 발목이 구속구에 꽉 눌려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어떻게든 덜 아프게 해 보려 구속구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하지만 퉁퉁 부어오른 탓에 어떻게 해도 불편하고 아프기만 했다.
“야. 일어나 봐.”
“으응… 왜…?”
“발목이 아파.”
아프단 소리에 비몽사몽 잠에 취해 있던 놈이 벌떡 일어났다. 방 불을 켜고 보니 꼴이 더 참혹했다. 멍까지 들어서 빨갛고 퍼렇고…. 놈이 거실에서 열쇠를 가져와 다친 발목의 구속구만 풀어냈다.
다행히 앞뒤로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는 걸 보니 부러지거나 금이 간 건 아닌 것 같았다. 파스를 붙이고 누워 있자, 놈이 따뜻하게 만들어온 스팀 타월을 얹어 줬다. 노곤한 찜질에 순간적으로 고통이 좀 덜하게 느껴졌다.
“해 뜨자마자 병원 가서 약 타올게요. 조금만 참아 줄래요?”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계속 아프다고 해 봤자 병원에 데려가 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구겨져 있던 이불을 조심스레 펼쳐 어깨까지 덮어 줬다.
방 안 가득한 파스 냄새에 코끝을 찡그리다 보니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비록 타월이 식으면서 얕게 들었던 잠이 다 깨버렸지만.
뼈가 징- 징- 울리는 것 같은 느낌에 다시 몸을 일으키자 차가운 가슴 위로 올라와 있던 놈의 손이 툭- 떨어졌다. 피곤한 모양이었는지 깊게도 잠들었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커어- 하고 숨소리만 낼뿐 반응이 없다.
안 일어날 것 같네. 아까보다 아픈 것도 덜 하니까 그냥 잘까. 축축한 타월을 바닥으로 내려놓고 다시 머리를 뉘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들의 꿈을 꿨다. 잔소리를 들으며 출근하고, 형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회사에 내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시정과 농담을 하며 사무실로 들어가 정든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퇴근 후엔 예쁜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도 시키고, 살짝 취기가 올랐을 땐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야경까지 더해져 최고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감탄하는 그녀를 보고 수줍게 일어나 안주머니에 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나와 결혼해 줄….’
‘안 돼요!’
완벽했던 프러포즈 도중 누군가가 난입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끼워질 뻔한 반지를 순식간에 채 가며 제 손에 끼우고 웃었다.
‘이건 내 반지잖아요.’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이 반쯤 가려진… 놈이었다. 놈의 등장에 그녀는 화가 난 듯 일어나 물 잔을 내 머리 위로 끼얹고 사라져 버렸다.
‘자, 잠깐만, 오해야!’
붙잡으려 했지만 갑자기 철컹, 하고 발목이 당겨지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목을 내려다보니 놈의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족쇄가 내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어딜 가려고 그래요. 선유 씨는 나랑 이미 결혼했는데.’
‘아, 아냐, 난 결혼한 적 없어!’
그런 적 없어, 난 남자랑 결혼한 적 없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헉!”
놈에게 붙잡힘과 동시에 잠이 번쩍 깼다. 진창을 맨발로 돌아다닌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턱 하니 막히는 숨에 헉헉거리며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닦아 냈다. 뭐 이런 개 같은 꿈을….
생각보다 오래 잤는지 어느새 창문 시트지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힐끔 옆을 보니 놈이 세상 편한 얼굴로 숙면중이다. 하아… 꿈에서도 좆같은 놈. 괜한 심보에 자고 있던 놈을 발로 쭉 밀어내니 발바닥에 서늘한 맨살이 닿아왔다. 으 시발. 왜 옷을 안 입고 있데.
지독한 꿈을 꿔서 그런지 요의가 일었다. 일어난 김에 화장실이나 다녀올까. 침대에서 일어나자 놈이 으응… 하고 작게 잠투정을 하며 목덜미를 벅벅 긁고 창가 쪽으로 돌아누웠다.
발목이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못 걸어 다닐 정돈 아니었다. 스트레칭을 하듯 가볍게 발목 움직여본 뒤, 구속구를 끌고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콰르르르-
변기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손을 씻고 수건이 보이질 않아 대충 털며 침대로 돌아왔다. 커어어…. 곤히 잠든 놈의 몸에 손을 닦았다. 그때, 놈의 옆에 반짝이는 물건에 시선이 갔다. 베개 밑에 살짝 눌린, 반짝이는….
“…….”
열쇠였다. 뒷목이 쭈뼛거리며 전신의 털이 바짝 일어났다. 두근, 두근.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커진 심장소리가 놈에게 들릴까 젖은 주먹으로 가슴을 꽉 눌렀다.
숨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어쩌면 숨을 안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놈과 열쇠를 향해 다가갈수록 심장이 쿵! 쿵! 거리며 더 심하게 뛰고 있었다.
저건 분명 구속구의 열쇠였다. 늘 사용한 다음에 놈만 손이 닿는 거실 보관함에 넣어 두는데…. 새벽에 잠이 덜 깬 놈이 열쇠를 치우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님 요즘 내가 순종적이라 생각해서 방심했거나. 난 그게 내가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열쇠가 지금 눈앞에 있다면? 손도 발도 다 풀리고 단 한쪽 발목만 묶여 있는 상황에, 그것마저 풀 수 있는 열쇠가 내게 있다면? 게다가 놈은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온 신경을 놈에게 집중했다. 한 걸음을 옮기고 놈을 살피고, 또 한 걸음을 옮기고 놈을 살폈다. 끼익…. 침대가 울 땐 나도 같이 울 뻔했다.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손이 벌벌 떨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갔지만 결국은 작고 차가운 열쇠를 집어 들었다.
놈은 여전히 도롱도롱 잠에 빠져 있었다. 시선을 놈에게 고정한 채 손끝으로 열쇠 끝을 자물쇠에 맞춰 밀어 넣었다. 긴장한 탓일까, 위아래도 구별가지 않았고, 열쇠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도 혼돈이 왔다. 자꾸만 열쇠가 땀에 미끄러져 헛돌았다.
시발, 진정 좀 해 봐! 2번이나 열쇠를 떨어트릴 뻔한 뒤에야 드디어… 딸칵. 오랫동안 발목을 묶고 있던 족쇄가 풀렸다.
“아… 헉.”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으며 놈을 돌아봤다. 대신 바닥에 있던 놈의 잠옷을 움켜쥐고 그대로 뒷걸음질 쳐 거실로 나왔다. 벽에 걸린 시계는 8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째깍, 째깍. 현관까지 가는 동안 시계 바늘이 곧 터질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재촉했다.
부어오른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리가 부러졌더라도 지금은 움직여야 했다. 놈의 운동화를 구겨 신고 현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이 문만 나가면….
어제도 내가 선유 씨 이름으로 용돈 넣어 드렸는걸요. 제가 설마 장인어른 장모님 계좌도 모를까 봐요. 가끔 저도 배달시키고 있어요. 운송장도 있는 걸요? 선유 씨 형님은 곧 결혼하실 것 같아요. 임신한 모양이에요. 한 번만 더 말 꺼내면 앞으로 다른 가족들 소식은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왜 하필 이때 이런 게 떠오르는 걸까. 문만 열면 밖인데… 선뜻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놈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내 가족들, 내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처럼 잡히지 않았을 뿐, 그들은 인질이었다. 만약 내가 사라진 걸 알고 가족들한테 대신 해코지를 한다면? 나한테 했던 것처럼 형을 가두고, 부모님을 괴롭히고 우리 가족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뭐가 됐든 끔찍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나갈지도 몰라. 나는… 나는….
아버지, 엄마… 미안해요. 형 정말 미안해. 나… 그래도 나가고 싶어.
띠리리-. 작은 버튼으로 도어락을 해제하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보다 서늘한 바람이 손에 쥐고 있는 파자마를 펄럭였다. 혹시 이 소리에 놈이 일어날까, 문도 닫지 않고 서둘러 아파트 복도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