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5화 (32/46)

꿈자리가 사납다 했더니, 역시 비가 오고 있었다. 솨아아…. 창밖으로 들리는 굵은 빗소리에 몸이 축 늘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온통 눅눅해서 이불까지 축축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약간 쌀쌀해진 온도에 찝찝하지만 이불을 말아 덮고 힘껏 쭈그려 누웠다.

번데기 같은 모습으로 뚱하게 누워 있다 보니 어느새 놈의 퇴근 시간이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요란하게 우산을 털고 들어온 놈이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가방을 요란하게 쏟아내는 걸 보니 종일 쏟아진 폭우에 안에 있던 물건들이 다 젖은 모양이었다.

“우산을 썼는데도 다 젖었어요.”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다. 옷을 입고 샤워라도 한 건지…. 우산을 썼다는 놈이 어째 머리부터 다 젖어 있다. 가닥가닥 뭉친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놈이 젖은 옷을 벗어 내며 오늘 회사에서 있던 일을 떠들기 시작한다. 신입 경리가 무슨 실수를 했고, 과장님이 또 딸 자랑을 했으며, 옆자리 직원이 바뀌고…. 귀가 따가운 수다에 턱을 괴고 엎드려 있으니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놈에게서 물방울이 튀겼다.

“물 튀잖아! 화장실 가서 해!”

“미안해요. 하지만 보고 싶었는걸.”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입에 발린 말을 한 놈이 배시시 웃으며, 젖은 옷을 빨래통에 던졌다.

“그러고 보니, 선유 씨랑 처음 만날 날에도 이렇게 비가 왔었죠.”

오래된 추억을 회상하듯 놈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저 머릿속에서 어떤 미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놈이 작은 목소리로 “내 인생 최고의 날….” 하고 중얼거렸다. 내 기억이랑 네 기억이랑 다른가 봐? 난 최악의 날이었는데….

확실한 건 한참 장마 시즌이라 오늘처럼 비가 많이 왔었다는 거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 횡단보도에서 저 미친놈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지도 모르지. 벌써 놈에게 납치당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벌써 계절이 바뀌었잖아.

“저기….”

“네, 선유 씨.”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왜요?”

“구… 궁금하니까 그렇지. 밖이 여름인지 가을인지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나가지도 못하는데, 진짜 너무하네!”

놈의 질문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시 멈췄던 손이 다시 젖은 머리를 털며 흐음…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화내지 마요. 알려 줄 테니까. 우리 같이 산 지 석 달쯤 됐어요. 처음 만날 때보다는 많이 시원해졌고… 이제 완전 가을이에요.”

석 달? 겨우? 체감상 반년은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놈을 보며 이불 속에서 손끝을 뜯었다. 씻기 전에 밥부터 할 생각인지 속옷도 입지 않고 침대 위에 던져 둔 바지를 찾는 놈에게 옷을 건넸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되려나.

“그… 있지.”

“뭐가 더 궁금해요?”

놈은 머뭇거리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편하게 물어봐요. 전부 대답해 줄게요.” 하고 속삭였다. 전부라는 놈의 말에 홀린 사람처럼 여태 가슴에 담아 뒀던 질문을 쏟아 냈다.

“우, 우리… 부모님은… 잘 계시지? 건강하셔? 나… 나 때매 어디 아프거나….”

부모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자 눈시울이 울컥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무니 놈이 양손을 붙잡으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었다.

“그럼요. 잘 계세요. 어제도 내가 선유 씨 이름으로 용돈 넣어 드렸는걸요. 선유 씨가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아시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너, 너 우리 부모님 계좌는 어떻게….”

“제가 설마 장인어른 장모님 계좌도 모를까 봐요.”

뻔뻔하게 장인이란 호칭을 입에 담은 놈이 쪽, 하고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뭔가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과일가게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와서 좀 곤란해 하고 계시기는 한데, 그래도 오래된 단골들도 많고, 마트보다 가게 과일들이 더 싱싱한 거야 다들 아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30년이나 해 오셨잖아요. 가끔 저도 배달시키고 있고…. 선유 씨가 먹는 과일들 다 거기서 산 거예요.”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귤이니 사과니 놈이 후식이라며 가져온 과일들을 달다달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다 부모님 과일이었다니. 예상보다 놈이 더 많은 것을 알고, 깊게 엮여 있어서 무섭긴 했지만, 지금은 그리움이란 감정을 이길 수 없었다.

“지, 진짜? 정말로 부모님이 파는 과일이었어?”

“그럼요. 운송장도 다 있는 걸요.”

놈이 어깨를 끌어안으며 제 품에 기대게 했지만, 이미 양손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누르고 있기 바빠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소리 없는 흐느낌에 놈이 조근조근 말을 이어가며 등을 쓸어내렸다.

“선유 씨 형님은 곧 결혼하실 것 같아요. 여자친구분이 임신한 것 같더라구요.”

형이 벌써 결혼을?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언제 할 거라고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혼전 임신이라니. 내가 그랬듯 형도 여자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부모님이 꽤나 걱정을 하셨던 시절이 있었다. 장성한 두 아들이 여자보단 일을 더 열심히 하니, 손주 하나 못 보고 떠나시는 거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는소리를 하셨었는데…. 결국 애가 생겼구나.

“배가 더 부르기 전에 할 것 같으니까… 아마 식은 급하게 치를 것 같아요. 선유 씨는 못 가겠지만 제가 대신 가서 인사하고 올 테니까 걱정은….”

“내, 내가 가게 해 줘. 말 잘 들을 테니까…. 결혼식엔 제발….”

우리 형 결혼식을 네가 왜 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고 놈을 바라봤다.

“여태 시키는 대로 잘 해 왔잖아. 나갈 생각도 안 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잖아. 놔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형의 결혼식이야. 가서 축하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라. 응? 제발. 저, 전에 의사가 왔을 때처럼 뭘 넣고 있으라고 해도 괜찮아. 정조대도 하고 있을게. 너랑 같이 가면 되잖아! 부, 부탁이야…. 제발….”

“서, 선유 씨.”

수치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양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제발, 제발, 제발. 남한테 들키면 인생이 끝장날 걸 알면서도 스스로 뒤를 막고 다니겠다고 할 정도로 간절했다.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으니까 가족들을 보게 해 줘!

“뭘 할까. 내가 뭘 하면 되겠어? 응? 그, 그렇지. 자지 빨아 줄까? 아니 자지 빨게 해 줘. 난 음란한 변태니까 그러니까 자지 빨게 해 줘. 조, 좆물도 마실게. 윗입으로도 아랫입으로도 배부를 때까지 마실 수 있으니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놈의 무릎을 붙잡아 벌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놈이 당황한 듯 손을 붙잡았지만, 있는 힘껏 뿌리치며 바지 속에서 놈의 성기를 끄집어 다짜고짜 입에 물었다. 놈의 음모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맛있어, 맛있어- 하고 멍청한 얼굴로 헤헤거리자 순식간의 손안에 쥔 것이 단단해졌다.

“이러지 마요. 선유 씨.”

발기한 주제에 이러면 곤란하다며 놈이 내 얼굴을 밀어냈다. 이런 거 좋아하잖아. 왜 말리는 거야! 내, 내 펠라가 별로라 그래? 연습할게, 목구멍까지 넣을 수 있게 연습할 테니까….

“선유 씨…. 이러지 않아도 돼요. 어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람 많은 야외에서 장난감으로 놀아 보고 싶었구나? 게다가 자지도 그렇게 빨고 싶었어요? 하하. 밝히기는.”

기분 좋은 듯 웃는 놈을 보자 갑자기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다. 역시… 너한테도 아직 인성이라는 게 남아 있긴 하구나!

“그, 그럼 보내 줄….”

“좋죠. 야외플도 펠라도 좋은데…, 근데 안 되는 거 알잖아요.”

“……!”

“알면서 왜 그럴까. 한동안 안 하던 짓을 하네. 하하.”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순간 욱하는 마음에 꽉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퍽! 있는 힘껏 내려친 주먹에 놈이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술이 터진 건지 입을 감싼 놈의 손 사이로 살짝 피가 비쳤다. 슥- 피를 닦아 낸 놈이 여전히 얼굴을 감싸고 누워 있었다.

아차. 갑자기 휘발됐던 이성이 돌아왔다. 이선유 이 멍청아! 기어도 모자랄 판에 어쩌자고 주먹질을…!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정말 미안해. 미안해….”

먼저 때려 놓고는 놀라서 쓰러져 있는 놈을 무릎 위로 눕혀 상처를 살폈다. 볼 안쪽이 치아에 찍혀 피가 나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며 계속 놈의 몸을 보듬자 놈이 어리광을 부리듯 안겨서 이마를 부벼 왔다.

“아파요. 아파요 선유 씨.”

“잘못했어…, 실수야. 다신 안 그럴게….”

“정말요?”

“으응, 약속해. 그, 그러니까… 결혼식… 한 번만 더 생각해 주….”

“선유 씨.”

내 성기에 얼굴을 비비고 있던 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로 쪽, 하고 성기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떼쓰지 마요. 한 번만 더 말 꺼내면 앞으로 다른 가족들 소식은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결혼식은커녕 놈은 날 집 앞 슈퍼라도 데리고 나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 나는 앞으로 다시는 가족들을 못 보는 거구나…. 잠시 들어갔던 눈물이 다시 떨어지며 놈의 얼굴을 적셨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신 물어보지 않을게…. 소식이라도, 그거라도 알려 줘….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아래서 기분 좋은 듯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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