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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느지막이 돌아온 놈의 양손이 묵직했다. 휴일 내내 집에만 있었더니 냉장고가 완전히 비어 버려 안 살 수가 없었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맨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움직이진 않으니 살찌는 것도 순식간이겠네…. 사소한 걱정에 왠지 예전보다 볼록해진 것 같은 뱃살을 주물렀다.
놈이 주방에서 몇 번을 달그락거리자 순식간에 고소한 밥 내음이 방까지 퍼져 왔다. 오늘따라 유독 굶주린 느낌에 슬쩍 일어나 주방을 염탐했다. 이제 넥타이에 앞치마를 맨 모습이 익숙하게만 보였다.
“반찬 뭐야?”
“불고기요. 괜찮죠? 금방 한 거라 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젓가락으로 노릇한 고기 한 점을 집어든 놈이 쪼르르 내게 달려와 후후- 하고 식혀 내 앞으로 내민다. 아~ 하고 입이 벌어지는 모양에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마냥 놈을 따라 입을 벌렸다. 뜨끈한 고기와 짭조름한 양념이 밥 한 그릇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어때요?”
“먹을 만해.”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면서도 놈이 식탁 의자를 빼 주자 기다렸단 듯이 엉덩이를 붙였다. 새로 달린 자물쇠가 식탁 의자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수저가 놓이고, 모락모락 김이 솟는 밥과 반찬들이 놓이고. 가운데는 단연 메인인 불고기가 놓였다. 놈이 앉기도 전 젓가락으로 몇 점을 더 집어 먹으니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부장님이 찾아오셨지 뭐예요.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허니문 베이비를 유산했다고 소문이 났나 봐요. 핑계를 그렇게 댔으니 뭐… 할 말은 없지요. 하루 종일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 때문에 웃음 참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있지도 않은 애를 유산 당했다니까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저 혼자 재잘거리는 놈을 무시하며 불고기를 국물 째 떠서 밥그릇에 슥슥 비볐다. 놈은 바쁘게 떠들면서도 내 수저 위로 파절임을 살짝 얹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벌써 밥그릇을 뚝딱 비운 놈이 “선유 씨가 잘 먹어 줘서 그런가, 오늘은 저도 식욕이 돋네요.”라며 반 그릇을 더 떠 왔다.
띵동-
“누구지?”
놈이 새 밥을 한술 뜨려는 찰나 도어 벨이 울렸다. 잡상인이 분명할 방문에 놈이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주방 옆에 붙은 인터폰을 들여다보던 놈이 “뭐야….” 하고 중얼거리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시퍼런 빛의 화면엔 깐깐해 보이는 아줌마가 서 있었다.
“어머~ 저녁식사 중이었나 봐~ 미안해서 어떡해!”
“하하, 아니에요.”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린데.
“맛있는 냄새 나네~ 총각 혼자 먹는 거야?”
“아… 혼자 아니에요. 형이랑, 같이 먹어요.”
형이라는 놈의 말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형이 제정신인가 봐?”
나름 안 들리게 말한다고 소근 거린 모양인데, 어이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제정신’ 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아! 저 사람! 그 부녀회장 아줌마! 갑자기 번뜩 떠오른 처음과 가까운 기억에 들고 있던 수저를 꽉 움켜쥐었다. 난 처음부터 쭉 제정신이거든요?! 정신병자는 아줌마 앞에 있는 그놈이지!
“네, 뭐…. 늘 그렇게 흥분해 있진 않아요.”
“어머 어머, 그럼 인사라도 드려야겠네.”
갑자기 인사를 한다는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지금 알몸이고, 의자에 묶여 있기까지 한데…. 그래도 이걸 보면 이게 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 줄지도….
“안녕하세요~ 옆집 사는 부녀회장이에요~.”
하지만 옆집 아줌마는 현관에 서서 목소리만 높여 인사했을 뿐이다. 묘한 안도감과 아쉬움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아주머니가 인사하시잖아.”
“…안녕하세요.”
현관에서 주방으로 들어오는 코너로 얼굴을 빼쭉 내민 놈이 실실 웃으며 형이라 불렀다. 인상을 팍 쓰고 마지못해 인사를 하자 현관에서 호호호, 하고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번에 관리실에서 생필품 나눠 준 거 모르지? 우리 동에서 이 집만 안 찾아가서 내가 가져다주러 왔어. 공짜라고 나쁜 거 아니니까 이런 나눔 있으면 와서 꼭 챙겨~, 형 뒷바라지하려면 이런 거라도 아껴야지~.”
아까는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뒷바라지라고 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아줌마. 만약에 내가 진짜 정신병자였으면 그거 완전 실례거든요?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가식 가득한 인사로 아줌마를 돌려보낸 놈의 손엔 새빨간 고무장갑 한 쌍이 들려 있었다. 그걸 무심하게 주방 쪽으로 집어 던진 놈이 쪼르르 달려와 내 얼굴을 붙잡고 다짜고짜 입술을 부볐다.
“으악! 뭐 하는 거야!”
“예뻐서요.”
“아, 씨발 안 놔?! 야! 놓으, 웁!”
양 볼을 그리고 이마와 코를 쪽쪽거리던 놈이 흥분을 주체 못하고 양손으로 볼을 꾹 누르며 내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불고기 맛…. 같은 걸 먹고 있었지만 네 입과 내 입이 같아? 찝찝하기 그지없는 키스에 몸서리를 치며 놈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밀어냈다. 혀로 입안을 헤집다 못해 내 혀를 쪽쪽거리며 빨아 대는 걸 겨우 떼어 놨을 때 놈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헤헤….”
“시발, 기분 나쁘게….”
씩씩거리며 손등으로 입을 문지르자 옆에 앉은 놈이 식탁 위로 턱을 괴고 눈웃음을 친다.
“착하게 있었네요. 아줌마랑 만난 건 2번 짼 데… 처음으로 인사도 했잖아요.”
그럼 내가 알몸으로 날뛰기라도 했어야 된다는 소리야? 무슨 미취학 아동한테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징그럽게 왜 이래. 물론 한순간 헛된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만약에 그랬어도 분명 이 새끼가 수를 써 둬서 화만 돋웠을 게 뻔하잖아. 뭐 하러 그런 위험한 짓을.
식사 후. 부른 배를 문지르며 멍하니 앉아 놈이 상 치우는 걸 지켜봤다. 슥슥- 하고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반찬은 물론 식기까지 완전히 정리돼서 깔끔해졌다. 저놈은 청소가 체질이야.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누른 놈이 마른 수건에 손을 슥슥 닦으며 다리 구속구를 풀기 위해 다가왔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약간의 식곤증이 몰려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으니, 자물쇠를 풀던 놈이 내 머리카락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냄새나네. 샤워할래요, 목욕할래요?”
“…아무거나.”
몇 번을 들어도 더럽다 지적받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나빴다. 고개를 돌리고 성의 없이 대답을 던지자 놈이 달래듯 허벅지 사이를 노골적으로 문질렀다.
목욕으로 정한 모양이다. 욕조 가득 따뜻한 물이 콸콸 들어차는 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쭈그려 앉아 물이 차길 기다리고 있으니 반라로 화장실에 들어온 놈이 물속에 손을 넣고 휘휘 저으며 온도를 체크했다.
“찬물 좀 틀까요?”
“지금이 좋아.”
“너무 뜨거우면 피부에 안 좋은데…. 알았어요.”
놈이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욕조에 반쯤 기대 누운 내 두피를 가볍게 문질렀다. 샴푸 거품이 일자 혹여나 눈에 들어갈까, 놈의 손이 조심스레 이마 라인을 따라 그렸다.
가뜩이나 졸렸는데 머리까지 만지니까 미치겠네…. 뻔히 보였는지 놈이 “눈 감고 있어요.”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피 속까지 골고루 헹궈 낸 뒤 린스인지 트리트먼트인지 모를 하얀 걸 머리카락에 펴 바를 때쯤엔 깜빡 졸고 있었다. 놀라 몸을 일으키자 놈이 어어- 하고 움직이지 말라며 이마를 꾹 내리눌렀다.
“졸리면 그냥 자요. 알아서 옮길 테니까.”
“으응….”
그리고 다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언뜻 놈의 핸드폰이 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내 옆에서 씻고 있던 놈이 어느새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뇨, 교수님… 이젠… 선유 씨가 있으니까….”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는 통화 소리에 내 이름이 껴있으니 무의식중에도 귀가 쫑긋 거렸다.
“자꾸 이렇게 강요하시면 불편해요….”
그 정신병원 교수랑 통화하는 건가…. 아 몰라 너무 졸려. 물도 따뜻하고….
“선유 씨랑 저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헉!!”
집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놈의 고함에 물장구를 치며 상체를 번쩍 일으켰다. 와 씨발, 천하장사가 와도 못 들어 올리는 게 눈꺼풀이랬는데, 그걸 이 새끼가 해내네! 깜짝이야!
“저는 선유 씨만 있으면 돼요!! 그런 말씀만 하실 거면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쿠당탕…!! 뭔가를 집어 던진 듯 둔탁한 게 깨지는 소리가 나고 집안엔 정적이 가득했다. 이미 깨 버린 잠에 오히려 심장이 더 쿵쾅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던 발소리가 화장실을 향해 다가왔다.
“앗, 고개 들지 말라니까. 얼른 다시 누워요. 헹궈 줄게.”
문을 열고 들어온 놈은 평소와 다름없이 방실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네? 뭐가요?”
“큰소리 나던데.”
“아… 별거 아니에요. 핸드폰을 떨어트려서.”
누가 들어도 떨어트린 거랑은 거리가 멀었는데…. 말없이 누워 놈을 올려다보자 어깨를 으쓱거린 놈이 하하- 하고 너털거리며 과장되게 웃었다.
“교수님이 선유 씨 잘 지내냐고 안부 전화하셨어요. 그러다 목소리가 좀 커져서…. 걱정하지 마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진짜예요. 걱정하지 마요. 놈은 내 머리를 헹궈 내는 내내 내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교수의 전화 이후로 놈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멀쩡한 듯 보였지만 조증이 온 사람처럼 과하게 즐거워하거나 하루 종일 흥얼거리거나, 재잘재잘 쉼 없이 말을 했고. 그게 아님 아예 한마디도 없이 시간을 죽이곤 했다. 종잡을 수 없는 놈의 감정은 하루에 3번도 넘게 변했는데, 그 윤곽이 가장 심하게 드러날 때는 어둠이 깊이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으으….”
또다. 괴로운 듯 신음하며 덜덜 떠는 놈 때문에 또 의도치 않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부스럭 거리며 몸을 일으키다 만진 놈의 베개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아저씨… 흐윽… 제발요….”
자다가도 몇 번씩 잠꼬대하며 뭘 그리 잘못했는지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 놈은 끊임없이 빌었다. 잠긴 목소리로 잠꼬대를 하다 곧 훌쩍이며 눈물을 찔끔거렸고, 그 눈물이 땀과 섞여 베개를 적시면 몸을 뒤척이며 끙끙거리곤 했다. 그게 심해지면 발작을 하듯 경련했는데,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면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행동을 하는 놈을, 그것도 캄캄한 방에서 보고 있자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야, 야, 일어나.”
“흐으윽, 흐으… 으… 으아악!!”
겁을 먹고 놈을 흔들어 깨우면 늘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나를 있는 힘껏 끌어 안… 아니 있는 힘껏 내 품을 파고들며 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서- 선유 씨, 흐어어엉, 선유 씨… 선유 씨.”
“아 시발, 땀! 저리 꺼져! 징그럽게 왜 이래!”
“선유 씨! 선유 씨! 나, 나 버리지 마요! 선유 씨! 아악 싫어! 무서워! 무서워요!! 제발! 선유 씨! 아저씨가! 아저씨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 몰골…. 놈은 내게서 떨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을 풀려 하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이만큼 간절할까. 생명줄마냥 움켜쥐는 손아귀가 아파서 결국은 놈을 밀어내지 못하고, 놈이 울다 지쳐 다시 잠들 때까지 짜증스레 놈을 안고 있는 밤이 반복됐다. 마치 얼마 전의 나처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놈이 언제부터 미쳤고, 왜 미쳤는지. 어쩌면 날 때부터 미친놈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쯤 되면 궁금해지잖아. 놈이 매일 밤 애타게 부르짖는 ‘아저씨’가 누구인지.
아저씨라는 호칭은 흔했다. 옆집에 사는 남자도 아저씨, 잡상인도 아저씨, 길 가던 사람도 아저씨, 슈퍼 주인도 아저씨, 모르는 아저씨, 아는 아저씨 그리고 기타 등등…. 적당히 성숙한 남성을 보통 아저씨라 부른다. 어린 애들이 보면 나도 아저씨인걸.
놈의 ‘아저씨’가 어디 사는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뭐 하는 사람인지, 놈과 무슨 관계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놈에게 큰 영향을 주는, 그것도 나쁜 쪽으로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