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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숨겨 왔던 본성이 드러나는 사람과 그저 술에 삼켜져 개가 되는 사람. 냉정하게 봤을 때 내가 본 놈의 모습은 전자에 가까웠다. 놈에 대해 잘 알 만큼 관심이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건 내가 보는 놈은 그랬다.
매번 사랑한다 하며 다정한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 놈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놈의 폭력성을 목격한 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딜도를 던져서 박살 낸다거나, 섹스 도중 흥분해서 엉덩이를 내리치거나. 그리고 시늉에 그치긴 했지만 2번이나 나를 죽이려 했던 전적도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놈의 성행위도 그 증거였다.
아닌 척해도 그 빈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어젠 내게 숨겨 왔던 놈의 속내가 술의 힘을 빌려 강하게 두각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아직까진 직접 주먹을 휘두른 적은 없었지만, 한 달 뒤엔 놈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를 폭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태 내가 놈은 단언했던 것은 무엇보다 건방진 판단이었다.
누구처럼 맷집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편도 아니다. 게다가 알몸으로 묶인 나와 자유로운 놈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어린애가 봐도 답이 뻔했다. 놈이 제대로 나에게 고통을 주고자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굴하게 기고 있을 내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아~ 해요.”
잘 차려진 저녁상 앞에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자 놈이 얼른 밥을 한술 떠 내밀었다. 싫어. 고개를 돌려 버리자 울상이 된 놈이 이번엔 젓가락으로 가자미찜을 발라 들었다. 붉은 양념이 올라간 생선 살에서 몽글몽글 수증기가 올라왔다.
“아~. …왜 안 먹는 거예요. 내가 술주정 부려서 화났어요?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죠. 또 이렇게 굶으려 그래요? 응? 이러지 마요. 내가 뭘 어떻게 해 줄까요.”
술에서 깬 놈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수십 번을 싹싹 빌었다. 앞으로는 절대 술 안 마실게요! 선유 씨 허락 없이는 한 방울도 안 마셔요! 대답하지 않았다. 회식도 절대 안 갈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시선조차 돌려 버렸다. 그러자 놈이 울상을 지으며 눈을 감고 소리쳤다. 6일… 아니 이, 일주일 동안 금욕하면서 반성할게요. 그러니까 화 풀어요. 선유 씨! 콧방귀를 뀌었다. 이젠 놈의 모든 게 가식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약, 놈의 주머니에 콘돔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면. 만약, 내가 묶여 있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생각이 거듭될수록 원망과 후회가 커져만 갔다.
놈은 우리가 운명이라 말했다.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이게 내 운명인 걸까. 시발! 평생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아니라 해도 벌써 어느 정도 놈에게 순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배까지 까뒤집고 복종이라도 할지 몰랐다. 그땐 진짜 끝장이야. 내 인생은 놈의 정액받이로 끝나는 거라고. 제발. 한 번만 더 기회가 온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기다리기만 해선 찬스가 오지 않는다는 건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제가 로또만큼 특별한 일이었지. 그나마 남아 있는 의지마저 꺾이기 전에, 그리고 놈의 본성이 이 이상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부디 이 집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선유 씨이, 제발 한 숟가락이라도 먹….”
“술.”
“응?”
“술 마시고 싶어.”
갑작스러운 요구에 놈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젓가락으로 잡고 있던 가자미 살이 바스라지며 깔끔한 식탁 위로 붉은 얼룩을 찍었다.
놈이 겨우 소주 한 병에 섹스 도중 곯아떨어질 정도로 맛이 간 거라면, 이 승부엔 승산이 있었다. 주량은 타고남과 정신력과 꾸준한 반복으로 결정이 난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세 가지 조건 중 내가 어느 하나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출나게 잘 마시진 못해도 처음 술을 배울 때부터 한 병은 거뜬하게 마셨다. 일주일에 못해도 4일은 술자리가 있었고, 챙길 사람이 많았기에 맘 편히 취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비록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게 아득히 오래전처럼 느껴졌지만, 적어도 한 병 이상, 놈보다는 오래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술에 취한 놈이 다시 폭력적으로 돌변할까 걱정은 됐지만, 일단 취하기만 한다면 쓰러질 정도로 마시게 하는 건 간단했다. 술은 마실수록 술을 부르니까. 놈보다 오래 버틸 수만 있다면 무조건 승산이 있는 방법이었다.
“술…이요…?”
“나도 술 마시고 싶어. 어제 네가 그렇게 술 냄새를 풀풀 풍겼는데… 난 술 생각이 안 나겠어? 오늘 반찬도 사실상 술안주잖아. 아…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가… 술 땡기네.”
스트레스를 강조하며 가자미 그릇을 툭 쳤다.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속으론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납치범이어도 술은 절대 안주겠지. 갑자기 돌변해서 헛소리하지 말라며 험한 짓을 할지도 몰라. 하지만 최대한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로 놈을 대했다.
“네가 나를 스토… 지켜봤으니 알겠지만 나 술 좋아해. 회식도 자주 하고, 단골 술집도 있었….”
“채호준 얘기는 하지 마요.”
매니저의 언급에 놈이 젓가락을 탁! 내려 두며 싸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한참 전에 잊고 있던 매니저의 이름을 저 입으로 들으니 좀 놀라웠다. 왜 유독 매니저한테 정색을…. 아, 그러고 보니 매니저도 스토커였잖아. 경쟁의식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했다. 스토커가 둘, 그것도 남자 둘이라니. 난 희대의 나쁜 놈이었을 거야….
“하, 하여튼 나도 술 마시고 싶어.”
“음… 안 돼요.”
“왜?!”
“건강에 나빠요.”
조금 주저하다 고개를 흔드는 놈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건강 같은 소리 하네! 시발!
“…그럼 나 밥 안 먹어.”
“네? 어째서?”
휴지를 뽑아 식탁에 떨어진 가자미 얼룩을 닦아 내던 놈이 반문했다. 에이, 그러지 마요~ 곧 능글맞게 웃으며 그냥 얌전히 밥 먹자고 몇 번이나 어르고 달랬지만, 뻣뻣한 내 태도에 결국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 먹으면 저번에 하던 관장을 계속….”
“나가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네 앞에서 마시겠다는데 뭐가 문젠데?”
놈의 입에서 나오는 애먼 소릴 끊어 내며 따지듯 물었다. 놈은 이제 젓가락으로 멀쩡한 가자미를 쿡쿡 찌르며 조각 내고 있었다.
“앞으로 밥투정도 절대 안 하고, 화도 안 낼게.”
“…거짓말. 저번에도 그랬으면서.”
“거짓말 아니야. 진짜 약속해. 조금 마시는 게 뭐가 어때서…. 후…. 거짓말이면 섹…스 하는 거, 이틀에 한 번으로 해도 좋아.”
“진짜요?”
놈이 강수를 두니, 나도 강수를 던졌다. 3일보단 2일이 훨씬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탈출만 한다면, 이딴 약속 지킬 필요도 없지.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놈은 결국 마지못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약속을 깨길 바라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놈이 곧장 나가서 소주를 잔뜩 사 들고 돌아왔다. 얼마나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주병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두 병은 아니라는 걸 짐작게 했다.
한참을 주방에서 부스럭거린 놈이 쟁반 가득 무언가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놈이 내려 둔 쟁반 위엔 잡다한 마른안주들과 종이로 된 소주 컵, 그리고 2ℓ짜리 페트병이 있었다.
“어… 술은?”
“페트병 안에 있는 거 다 소주예요.”
“… 술맛 떨어지게.”
“병 깨지면 위험할까 봐 옮겨 왔어요. 시원한 거니까 맛없진 않을 거예요.”
치밀한 새끼. 뭐가 됐든 내게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놈은 마른안주를 보기 좋게 펼쳐두며 바닥에 자릴 잡았다. 테이블이 없어서 아쉽네요. 지랄. 어차피 줄 생각도 없으면서. 놈이 내 손에 종이컵을 쥐여 주며 페트병을 기울였다. 꼴꼴거리며 잔을 가득 채운 소독약 냄새가 불시에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너는?”
“안 마실래요. 아직 숙취가….”
놈이 잔 안에 가득한 술을 바라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숙취는 개뿔! 이렇게 되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 빈 종이컵을 들어 놈에게 억지로 내밀었다. 계속 고개를 젓는 놈에게 팔 떨어지겠네! 하고 소리를 치자 놈이 마지못해 잔을 받아들었다.
“사람 앞에 두고 혼술하는 취미는 없거든?”
“…알겠어요. 대신 조금만이에요.”
놈과 잔을 부딪칠 의리는 없었다. 놈에게 술을 채워 준 뒤 혼자 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목 넘김에 절로 크- 하고 탄성이 터졌다. 빨간 뚜껑을 사 왔구나…. 도리질을 치며 알콜을 내뱉자 놈이 서둘러 입안에 안주를 넣어 줬다. 술맛이 참 썼다.
너는? 좀 이따가 마실게요. 하지만 두 잔, 세 잔이 넘어가도 여전히 놈은 잔을 들고만 있을 뿐, 입으로 가져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속으론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일단 술판은 만들어졌다. 놈이 전혀 마실 생각이 없어 보여서 문제지. 어떻게 해야 놈에게 술을, 그것도 취할 때까지 먹일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언뜻 놈의 시선이 내 다리 사이로 향하는 걸 느꼈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하도 벗고 지내서 어느새 지금처럼 가리는 것조차 잊을 때가 있었다. 이것도 놈에게 적응했다는 비보겠지.
내 사타구니에서 떠날 줄 모르는 시선에 놈을 노려보자, 놈이 멋쩍어하며 손에 든 잔을 홀짝였다. 빌어먹을. 마치 내 몸을 안주로 삼고 있는 모양새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동시에 놈에게 술을 먹일 만한 최악이자 최선의 방법이 떠올랐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지. 해야 하고말고. 이 집에서 평생 살고 싶은 거야? 싫어도 해야지. 무슨 연약한 소리야. 저 새끼한테 처음 보여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귀에서 연기가 날 것처럼 수치스러웠지만 심호흡을 하고… 후…. 안주를 가져가는 시늉을 하며… 슬쩍 가렸던 다리를 벌렸다. 노골적인 시선이 다리 사이에 꽂히자, 부끄러움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술.”
“아… 네.”
놈이 페트병을 들어 두 명의 잔을 가득 채웠다. 슬쩍 몸을 움직이자 놈의 시선이 급하게 따라붙었다. 시발, 징그러운 새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입에 잔을 털어 넣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긴장한 탓인지 일부가 입 밖으로 흘러넘치고 말았다. 턱을, 가슴을, 배를…. 차가운 소주가 순식간에 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앗, 차가!”
이건 정말 실수였다. 놀라서 허둥지둥 몸을 닦아 냈다. 턱을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가슴과 배 위를 문질렀다. 동시에 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놈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순간 그렇고 그런 스트리퍼가 된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싸늘한 시선을 느낀 놈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잔으로 입술을 적셨다. 아 좆같네. 속으로는 바득바득 이가 갈렸지만,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를 훑으며 잔을 넘기는 놈을 보자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괜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좀 화나서 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마음을 부여잡고 다리를 아주… 살짝 더 벌렸다. 축 늘어진 성기가 마치 내 신세처럼 안쓰러웠다.
놈이 남은 잔을 전부 비워 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언제까지 실수인 척 술을 흘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숙취가 있다는 것도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는지, 더는 마실 생각이 없다는 듯 잔을 내려 두기까지 했다. 오히려 놈을 재촉하려 벌컥벌컥 마셔 댄 탓에 내가 먼저 취할 것 같았다. 이건 계획이랑 다른데….
“술.”
대놓고 내 것을 바라보던 놈에게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밀자, 놈이 퍼뜩 놀라며 조신하게 양손으로 술을 따랐다. 병을 내려놓는 놈의 시선이 원래 그 자리인 양 다시 내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후… 시발. 후우….
“야.”
“네?”
“왜 자꾸… 시발. 왜 쳐다봐.”
“보이니까?”
홍시가 홍시 맛인데 왜 그러죠?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놈을 향해 다리를 활짝 벌려줬다. 그마저도 구속구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어쨌건 무릎이 벌어질수록 바라보고 있는 놈의 눈도 함께 커졌다. 으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귓불이 둥! 둥! 울릴 정도로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발, 시발…!
“헉… 선유 씨…!”
“조, 좋냐?”
“네!”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해졌다. 아, 안 되겠어. 이건 내가 못 버텨. 수치심에 다시 다리를 모으려는데, 놈이 다급하게 내 무릎을 붙잡으며 조금만 더요!! 하고 애원했다. 진짜 미친놈 아냐!
“선유 씨는… 술이 들어가면 대담해지는 타입이었네.”
“안 놔?!”
“선유 씨가 먼저 벌려 놓고 왜 그래요.”
그러면서 은근히 다가오는 놈의 콧김이 음모를 간질이며 스쳐 갔다. 흠칫. 내 반응에 놈이 입술을 모아 호~ 하고 성기에 입김을 불어 댔다. 아악 시발! 맨정신에 이런 걸 어떻게 견뎌! 역겨워! 황급히 술잔을 집어 들었다. 술기운이 빌려야 했다. 놈의 말대로 내가 벌렸지만, 그 부담감은 책임질 수가 없었다. 꿀꺽! 한입에 털어 넣은 소주가 화끈거리며 넘어갔다.
“크…. 너도 얼른 마셔!”
“오늘은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혼술하는 취미 없다고 했다. 너 때문에 분위기가 안 살잖아!”
“그래요? 난 완전 사는데. 눈앞에 선유 씨 자지도 있고….”
완전히 M자로 세운 다리에 왠지 퉁퉁 부어오른 구멍까지 서늘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했으나… 아직 술이 모자란 탓일까. 미약하게 다리가 떨려 왔다. 그걸 본 놈이 급하게 제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허억, 선유 씨…. 젠장. 이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놈의 숨이 조금 가빠지며, 그 위를 문지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내 이름을 부르며 신음하는 놈의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봤자 침대에 막혀 더 갈 수도 없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놈이 바지를 내렸다. 반쯤 일어난 놈의 성기가 흔들리며, 놈이 애절하게 나를 올려봤다. 시, 시발. 뭘 봐.
“선유 씨. 나 선유 씨 자지… 빨아도 돼요?”
욕정이 뚝뚝 떨어지는 두 눈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돌려 버린 건 나였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자, 잠깐만. 이선유. 정신 단단히 잡아라. 이건 찬스다.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놈을 힐끔- 바라보자 놈이 네? 제발요. 하고 애원했다. 내 스스로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씨발! 나가기만 해 봐!
내가 봐도 안쓰러울 정도로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두 잔을 새로 채웠다. 그중 내 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크흐! 시발! 조금씩 오르는 술기운을 빌어 찰랑거리는 놈의 잔마저 들어 올렸다.
놈이 확실히 볼 수 있게 천천히… 내 몸 위로 잔을 기울였다. 쇄골을 타고 흐른 차가운 액체가 가슴을 지나 다리 사이로 주르륵-. 완전히 젖어 버린 성기의 끝을 타고 소주가 흘러내렸다.
“…이래도?”
안 마신다며? 도발하듯 놈에게 되물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못 볼 걸 본 듯 완전히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젠장, 너무 무리수였나.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다. 저 새끼가 아무리 변태여도….
“네. 완전.”
놈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콧김을 뿜어 댔다. 처음으로 놈이 변태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치심과 성취감이 엉망으로 뒤섞임을 느끼며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몸에 부었다. 사실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지만, 뻔뻔한 척 놈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명령조로 말했다.
“뭐 해? 빨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놈이 다리 사이로 달려들었다. 어찌나 세게 덤볐는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뒤에 침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놈의 입안으로 성기가 빨려들어 갔다. 허읍! 뜨겁게 조이는 느낌에 숨을 들이켜자, 놈이 쭙쭙거리며 요란하게 내 것을 빨아 댔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겁이 났다. 무서워, 진짜 무서워! 사람이 아니라 개가 한 마리 있는 거 같잖아! 슬쩍 좁아지는 다리에 놈의 손이 턱! 하고 다시 무릎을 붙잡으며 원래보다 더 넓게 다리 사이를 비집었다.
“하, 웁, 우읍, 선유 씨 자지, 너무 좋아요, 맛있어. 하읍.”
“읏!”
강하게 입을 조이며 고개를 흔들던 놈이 은근슬쩍 손을 움직였다. 아윽! 쓰라린 구멍 위로 느껴지는 손가락에 기겁하며 놈에 손등을 쳐 냈다.
“너! 너 일주일 동안 금욕한다며!”
“아.”
“아 같은 소리 하네! 다른 데 건드리기만 해 봐. 일주일로는 안 끝날 거니까.”
놈이 기억하고 있었어요? 하고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잠시 갸웃거리던 놈이 입안에 있던 살덩이를 뱉어 내며 물었다.
“따지면 이것도 금욕이랑은 좀… 거리가 있지 않나요?”
“이건…. 이건 다르지…. 씨, 씨발, 하기 싫음 말든가!”
“아뇨! 할 거예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놈이 허겁지겁 고개를 처박고 늘어진 살덩이를 핥았다. 구멍을 매만지고 있던 놈의 손가락은 순식간에 허벅지 위로 올라와 있었다. 만지기만 해도 아픈데 설마 또 하는 건가- 겁을 먹고 있던 차에 안도가 됐다. 이번에 하면 아프고 피나는 정도로 안 끝날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평생 치질이나 인공장기를 달고 살아야 할걸.
놈은 뒤를 만지지 않는 대신 입술을 더 세게 오므렸다. 쪼옥-. 꽉 조여지는 볼에 읏, 비참하게도 성기가 단단해 지고 있었다. 어쩌다 내가 남자한테, 그것도 이 새끼한테 펠라를 받으면서 앞을 세우는 처지가 됐을까. 하지만 이 짓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아마도….
혀를 잔뜩 내밀고 할짝거리는 놈을 내려다보며 소주가 든 병을 집어 들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놈이 성기를 입안 가득 물고 살짝 입을 벌려 왔다. 쪼르륵. 천천히 흐르는 차가운 술이 내 몸을 타고 놈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물론 바닥에 버려지는 게 더 많았지만, 어쨌든 놈은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며 흐르는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가끔 끝이 찌릿할 정도로 세게 빨아 대는 통에 반사적으로 허리가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놈이 웃는 게 피부로 직접 느껴져서 얼마나 굴욕스러운지. 입술을 꽉 깨물고 놈에게 칼을 갈며 병을 더 기울였다. 놈은 이 난잡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숙취를 핑계로 빼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아, 우움, 할짝. 선유 씨 자지랑 마시니까 술이 너무 달아요.”
“변태 새끼….”
“더 핥게 해 주세요. 네? 너무 맛있어. 더 핥고 싶어. 츕.”
발기된 살덩이를 뱉어 낸 놈이 천천히 위를 향해 입술을 옮겼다. 음모를 간질이고, 아랫배에 입을 맞추고. 이내 배꼽까지 올라와 그 안에 고인 술을 핥는 놈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너무 많은 술을 흘려 시리게 느껴지던 배 위가 놈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병 안에 남은 술이라곤 몇 잔 될까. 바닥에 쏟아 버린 양도 상당했지만, 놈이 마신 양도 꽤 될 터였다. 조금만 더 먹이면 될 것 같은데….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게슴츠레한 눈이 나를 향해 곱게 휘었다.
죽을 만큼 쪽팔린 것만 빼면 아직까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 놈이 술기운에 쓰러졌다 치자. 그 후에 필요한 건 구속구를 끊을 만한 물건이었다. 놈에게 대놓고 풀어 달라고 하거나 가위를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필요했다.
계속 위로 올라오며 쪽쪽거리는 놈이 징그러워 머릴 밀어내다가 문뜩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소주병 하나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병을 깨트려 그 조각으로 구속구를 끊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확실하게 하려면 술도 더 필요하고…. 연신 내 배에 키스하는 놈을 밀치고 남아 있던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처음보다 매우 미지근했지만, 맛은 가히 최고였다.
“더 핥고 싶어?”
“네.”
술보다는 젯밥에 정신이 팔린 놈이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주르륵, 남은 술을 몸 위로 전부 쏟아 버리자, 놈이 내 몸에 매달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소주로 흥건해진 바닥이 놈이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며 물을 튀겼다.
“그런데 어쩌냐. 이게 마지막이야.”
“…어째서?”
“안 보여? 술 떨어졌잖아.”
“벌써여?”
“한 병 더 하자.”
”…….“
”하, 핥고 싶다며.“
고민하듯 눈알을 굴리던 놈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해 사고도 느려진 모양이었다. 뒤늦게 아- 하고 탄식하며 빈 페트병을 꼭 안아 들었다. 아냐, 그거 아냐! 급하게 페트병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냥 병으로 가져와.”
“안 되는데….”
“여기 담아 마시니까 완전 맛없….”
“선유 씨 몸으로 마시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깜짝아! 씨발! 난 전혀 맛없거든?! 싫으면 관두든가!”
놈의 큰소리에 당황해 더 큰소리를 질렀다. 관두라는 윽박에 “아, 아니에요.”하고 변명하며 비틀비틀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운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이제야 주방으로 향했다. 놈의 바지에서 마시지 못한 소주가 뚝뚝, 아니 주르륵- 하고 흘러나왔다.
놈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엔 아직도 소주가 몇 병이나 있었다. 많이도 사 왔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놈은 그중 한 병을 들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고개가 몇 번이고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결국 생각을 포기한 건지, 아니면 어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지…. 놈이 방으로 돌아왔다. 마지못해 내게 병을 내밀며 놈이 나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위험한 짓 하면 안 대여. 진짜 혼내 줄 거야. 떽.”
나를 마주한 두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확연히 풀려 있었다. 일어난 사이에 취기가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았다. 떽은 무슨, 지랄하네. 완전히 풀린 발음으로 위협해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물론 방심해서 안 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놈이 언제 돌변할지 몰라. 게다가 나도 좀 어지러운 것 같고….
“위험한 짓이 뭔데.”
이제 잔도 필요치 않았다. 까드득. 새 소주의 뚜껑을 까고 병째 들이켰다. 그리고 놈도 마시라 시늉하며 병을 내밀자, 도리도리. 한계를 느꼈는지 놈이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놈의 눈은 벌떡 서 있는 내 성기를 향하고 있었다.
놈이 실실 웃으며 몸을 숙였다. 무릎을 벌리며 그 사이로 떨어지는 고개. 선홍빛 혀가 마중하듯 먼저 나서며 기둥을 핥아 올렸다. 할짝. 아이스크림을 먹듯 징그럽게 할짝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놈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러자 놈이 내 허벅지에 팔을 감으며 오히려 내 것을 더 깊게 머금었다. 흐읏. 끝부터 조이는 느낌에 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완전히 가지도, 그렇다고 멀쩡하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 물론 내가 아니라 놈의 얘기다. 고작 이 한 병을 흘려 보낸다고 놈의 입에 얼마나 들어갈까. 한 모금이나 마시면 다행이다. 어떻게 먹여야 하지. 생각나는 거라곤…. 병을 들어 소주를 한 입 더 머금었다. 시발. 술이 좀 들어갔으니 이런 짓도 하지, 맨정신엔 절대 무리야.
손목에 이어진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에 놈이 시선을 높였다. 양손으로 놈의 얼굴을 감싸 쥐자, 잠시 흠칫거리던 놈이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당기는 대로 따라왔다. 상체를 일으키며 놈이 덮치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발! 후우! 정말 죽을 만큼 싫었지만… 심호흡과 함께 놈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살짝 포갰다.
절대로 키스가 아니야. 이건 단순히 건네주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게 자위하며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놈에게 넘겼다. 갑자기 넘어오는 액체에 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켜 시발! 강요하듯 턱을 움켜쥐자 꿀꺽, 하고 놈의 목대가 움직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대담해여….”
어눌한 발음에 늘어지는 말꼬리까지. 붉게 달아올라 실없이 웃는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역겨웠다. 그 역겨운 놈과 이런 짓 하는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당장 혀를 씻어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선유 씨도 취했구… 읍.”
물 대신 술로 소독하듯 몇 번을 더 놈의 입으로 술을 옮겼다. 그런데 처음엔 꿀꺽꿀꺽 잘 받아먹던 놈이 차례가 늘어날수록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놈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헉하는 순간 다시 입안으로 돌아오는 미지근한 액체에 힘을 주며 혀를 세웠다. 서로를 떠밀 듯 원치 않게 얽히는 혀에 놈이 흥분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내 입에서 놈의 입으로, 놈의 입에서 내 입으로. 취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더 마시면 위험하다는 걸 느낀 걸까? 그게 아니면 그냥 변태 짓이 하고 싶었거나…. 살짝 상체를 들어 놈을 내리누르듯 고개를 꺾자, 체온에 데워진 뜨거운 술이 놈에게 넘어갔다.
“흐음….”
놈이 음미하듯 입술을 꾹 물고 머금은 술을 천천히 삼켰다. 그러며 은근슬쩍 내 엉덩이를 붙잡았다. 후자였군.
“윽, 아파. 만지지 말라니까…!”
“앗, 미안해여. 금욕. 금욕.”
고통 어린 신음에 놈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반 병을 더 비운 놈이 어느새 완전히 풀린 눈으로 내게 기대앉았다. 더 먹이려 하자 놈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못 마셔요. 이제 못 마셔… 으…. 머리를 흔들자 어지러운지 눈을 감고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숨을 내쉴 때마다 놈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왜 안 마셔? 내가 주는 게 싫어?”
“그게 아니라, 나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선유 씨도 코~ 자야 하고.”
두 손을 포개서 자는 시늉을 하던 놈이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했다. 드디어 술기운이 오를 만큼 오른 모양이었다. 게다가 2일 연속 음주가 피곤하기도 하겠지. 시늉만 하는 줄 알았더니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그래! 자자! 내 대답에 놈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컵과 안주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술병까지 챙기는 꼼꼼함에 황급히 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앗, 축축해.
“야, 잠깐, 야!”
“넹?”
“그냥 자자!”
“에이…. 여기서 어떻게 자여. 치워야 선유 씨가 편하게 자지….”
“난 괜찮아.”
“아니에여. 금방 치워 줄게여.”
아, 새끼. 치우면 안 된다니까!
“됐어! 내일 치우고 그냥… 그, 그래. 너도 피곤하잖아. 그냥 여기 누워서 자.”
그래. 차라리 여기서 자라. 술 먹으면 거의 기절하는 거 같던데.
“…진짜루? 우리 같이 자여?”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잘…까? 나도 졸립단 말이야….”
가짜 하품을 하며 졸린 척 눈을 비비자 놈이 들고 있던 것들을 전부 와르르 놓아 버렸다. 아씨, 깜짝이야. 마른안주와 쓰레기들이 술이 흥건한 바닥으로 철퍽철퍽 떨어졌다. 어지간히 졸렸는지 그대로 나를 잡아당긴 놈이 침대로 쓰러졌다.
“맨날….”
“…….”
“선유 씨가 맨날 이러면 좋겠다.”
놈이 눈을 감은 채 나를 품에 안고 누워 헤실헤실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을까. 티 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심장이 이상했다. 놈의 이런 얼굴이라니. 정말이지….
“…좆같네.”
자신은 범죄랑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순진한 낯짝이 혐오스러웠다. 누가 이놈이 타인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놨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피해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놈이 내 위로 이불을 당겨 덮었다. 시트도 매트도 전부 교체했기에 전날 같은 지린내는 나지 않았다. 이불을 펄럭일 때마다 오히려 좋은 향이 풍겨 왔다. 내 꿈 꿔요. 선유 씨. 하품하며 내 뒷머리에 얼굴을 비비던 놈이 순식간에 코를 골았다. 쌕… 쌕…. 규칙적인 숨소리엔 지독한 술 냄새가 섞여 나왔다.
한참을 그대로 누워 놈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나 역시 술기운이 돌고 있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잠들 뻔한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뭐, 결국엔 해냈다.
놈이 곯아떨어졌다는 확신이 섰을 때, 슬쩍 몸을 일으켜 놈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살랑거리는 수준을 넘어서 붕붕! 세차게 흔들었지만, 구속구의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도 놈은 꿈쩍하지 않았다. 놈의 팔을 치우며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빈자리에 잠시 허우적거리던 손이 베개 밑을 파고들었다.
찰박, 절그럭, 찰박, 절그럭. 구속구를 끌고 흥건한 바닥을 건너, 그 끝에 있던 빈 술병을 주워 들었다. 젖은 소주병에서 술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참으로 듬직하게 단단하고 반짝거리는구나.
유리병을 들고 있자니… 이걸 탈출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흉기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의 머리를 내리치거나, 병을 깨트려 찌르거나…. 하지만 저번처럼 어설프게 상처만 입힐 거라면 그냥 자게 두는 편이 더 났겠지. 퉤! 뒤늦게 바닥에 침을 뱉으며, 놈의 혀가 기어 다니던 끔찍한 느낌을 털어 냈다.
놈이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자, 놈이 몸을 웅크리며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잘했지. 그 모습이 주정인지 아닌지 본심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겐 득이 되는 결과였다.
혹시 몰라 놈이 잠든 걸 확실히 확인한 뒤야 소주병을 이불로 둘둘 감쌌다. 그리고 힘껏…! 그 뭉치를 바닥에 내리쳤다. 콰직-. 작은 파열음과 함께 이불 속에서 병이 조각 나는 게 느껴졌다.
“됐다….”
뭉쳐 있던 이불을 펼치자 그 안에서 초록빛의 유리 조각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크고 뾰족한 조각을 골라 들었다. 반짝반짝. 날카롭게 빛나는 병 조각이 마치 곧 다시 만날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파편을 피해 쭈그려 앉아 발목을 붙잡고 있는 구속구를 세게 그었다. 못에 비하면 훨씬 날카로웠기에 한 번 그을 때마다 훨씬 깊은 자국이 새겨졌다. 가죽 위를 벅벅 긁다 어느 순간 힘을 주자, 저번과 같이 투둑- 터지는 소릴 내며 구속구가 끊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많은 힘이 들지도 않았다. 시발. 이렇게 간단한데….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후우…. 진정하자. 아직 발만 풀었을 뿐이잖아.
유리 조각을 고쳐 쥔 손안엔 땀이 가득했다. 오른 손목을 꺾어 왼손의 구속구 위를 그었다. 이제 정말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진정하려 애를 쓰고 있지만 정작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어쩌면 취기가 오르는 걸 수도 있고.
이것만 끊어 내면…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놈의 옷 중 아무거나 주워 입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 그리고 내가 사라진 걸 눈치채기도 전에 도망가는 거야. 놈이 영원히 날 찾지 못할 곳으로…. 아예 해외로 나가는 것도 좋겠다. 거기서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거지. 제대로 된 애인도 만들고, 회사도 새로 구하고…. 정착하면 부모님도 모셔와서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놈이 없는 곳에서…!
점점 선명해져 가는 미래에 손목을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나갈 수 있어. 나갈 수 있어, 이제 나갈 수 있어…. 나가면, 나가기만 하면…! 더 이상 강간당하지도, 억지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등 뒤에서 들린 애교 섞인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전신의 피가 싹 마르는 것 같았다. 시발…. 어쩐지 일이 잘 풀리더라.
“으응…. 안 자고 뭐 해여?”
언제 일어났는지 놈이 침대에 우뚝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걸 보니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어떻게 하지…. 왜, 왜 일어난 거야. 어째서…. 덜덜 떨며 반쯤 뜯긴 구속구를 힘껏 잡아당겼다. 뜯겨! 뜯겨! 뜯기라고 시발!!
“어, 어어? 선유 씨!!”
뒤늦게 흩어진 병 조각을 발견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싫어! 다가오지 마! 곧 나갈 수 있었단 말이야! 이럴 순 없어!!
“씨발!! 오지 마!!”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손에 들고 있는 유리 조각을 휘둘렀다. 하지만 빠르게 달려온 놈은 그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내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윽! 놈이 내 귓가에 억눌린 신음을 내질렀다.
“위험하잖아요!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요!”
내 어깨를 부실 듯 잡아 흔드는 손이 경련하고 있었다. 놈이 내 손에 있던 조각을 빼앗아 멀리 던지고, 위아래로 내 몸을 살피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딱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바닥은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다친 건 놈이었다. 뒤에 병 조각이 있는 걸 잊고 뒷걸음질 치는 나를 감싸며, 놈의 왼손이 대신 그곳을 디딘 것 같았다. 더불어 내가 휘두른 조각도 놈의 배 위에 얇은 선을 그었다. 쩌적-. 놈이 손을 떼자 끈적한 소리와 함께 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어느새 흘러온 술 웅덩이가 놈의 피와 희미하게 섞여 갔다.
놈이 나를 속인 걸까?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하며 이번에도 나를 가지고 논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놈에게선 지독할 정도로 술 냄새가 풍겼고,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진짜 같았다. 또 한가지 확신은 또다시 드러나고 있는 놈의 폭력적인 모습이었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또 왜!”
내가 묻고 싶어! 왜 일어났어. 왜! 그대로 계속 자지 왜 일어났어!! 너만 아니면 나갈 수 있었는데…. 너만 아니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을 텐데!
뼈를 부러트릴 셈인가 보다. 내 팔을 붙잡은 놈의 힘이 무서울 정도로 강해졌다. 앗 하는 사이 놈에게 끌려가 벽에 밀쳐졌다. 퍽! 팔뚝을 붙잡고 미는 놈 때문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놈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놔, 놔! 아파! 놓으라고!”
“실수라며! 저번은 실수라고 했잖아! 나랑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고 했잖아요! 나가서 뭐 할 건데. 나 말고 어떤 놈이랑 붙어먹으려고…!”
“시발! 착각하지 마!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착각은 당신이 하고 있잖아요!!”
고막을 찢을 듯 소리치는 놈 때문에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던 놈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놔!!”
“싫어요.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가요. 내가 분명 다음은 없다고 했잖아.”
“놔, 씨발 새끼야!! 놓으라고!! 씨바알!!”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정말 인간의 힘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때리고, 차고, 문턱을 붙잡으며 버티고.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던 구속구가 놈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퍽! 터지며 찢겨나갔다. 손발이 다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식탁 의자를 넘어트리고 주방을 지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놈의 방으로 향했다. 놈이 쾅쾅거리며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엔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거 놔! 개새끼야!! 힘으로 이길 수가 없어 발악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자, 놈은 내 몸을 짐짝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힘껏 내 몸을 틀어쥔 손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벌컥! 놈의 방문이 열렸다. 내가 있던 방과 다르게 가구가 꽉 찬 멀쩡한 방.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컴퓨터였다. 2대의 커다란 듀얼 모니터 중 한 대에 화면 분할로 3개의 영상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 안에 보이는 건 엉망이 된 방과 침대…. 나를 감시하고 있는 카메라의 영상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역시 좀 충격이었다. 이 정도로 본격적인 감시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놈이 내 양손을 틀어쥔 채로 문 옆에 있던 커다란 서랍장을 뒤여 이상한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언뜻 본 안쪽엔 보기만 해도 끔찍한 성인용품들이 가득했다.
“으윽! 악!”
“시끄러워!”
제 침대 위로 내 몸을 힘껏 내던져졌다. 그리고 일어날 틈도 없이 내 위에 올라타 평소보다 더 타이트하고 복잡한 구속구로 나를 묶기 시작했다. 손목, 발목, 팔꿈치, 무릎, 그리고 목까지. 모든 부분이 연결되고 가운데 체인을 걸어 고리를 잠가 버리자 허리를 전혀 펼 수가 없었다. 애매한 부자유에 답답함이 배로 느껴지는 기묘한 물건이었다.
“씨발!!”
“시끄러워!”
“이 미친 새ㄲ… 윽! 우웁!”
재갈을 억지로 욱여넣는 거친 행동에 치아와 재갈이 부딪히며 따닥!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어찌나 세게 밀어 넣는지, 잇몸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나와는 반대로, 놈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고 손이고, 내 손이 닿았던 곳에 전부 붉은 손톱자국이 선명했는데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 간혹 피가 흐르는 곳도 있었지만, 주먹으로 턱을 쳐올려도 그저 묵묵히 벨트를 더 단단하게 조일 뿐이었다.
“우으읍!!”
이제 표정까지 없어진 놈이 버둥거리는 나를 번쩍 들어 안쪽에 있는 파우더룸으로 향했다. 깔끔함을 넘어 허전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에서 가장 끝에 있던 옷장을 벌컥 열었다. 일부러 비워둔 것처럼 옷이 단 한 벌도 걸려 있지 않았다. 언젠가를 대비하고 있던 걸까.
놈이 그 안에 나를 던지듯 내려 뒀다. 쿠당탕! 발작하듯 움직이며 밖으로 굴러 나오려 하자 놈이 과격하게 내 몸을 안으로 밀었다. 구속구에 묶여 웅크린 몸이 꽉 낄 정도로 좁은 옷장이었다. 벌써 답답해서 숨통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어쩌려는 거지?!
“당신이 잘못했어. 나한테 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우으!!”
“벌이에요. 반성할 때까지 여기 있어요.”
“우읍!!”
끼이익. 나를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이 멀어지며 옷장 문이 닫혔다.
문에 무언가를 걸어 두는 소리가 들렸다. 잠그려는 건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며 어깨와 발로 문을 밀쳤다. 하지만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놈 때문에 덜컹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문 열어 개새끼야! 웅얼거리는 비명이 옷장 안을 울렸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작은 빛이 잠깐 가려지더니, 쩍- 쩍-, 피 묻은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쾅. 멀리서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를 이렇게 두고…. 나를 가둬 놓고 나간 거야? 이 집도 넓어서 이젠 옷장에? 씨발 새끼! 이 개자식!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러면서 같이 행복하자고? 다른 새끼랑 붙어먹을까 봐 못 내보내겠다고?! 시발! 다른 새끼랑 붙어먹어서 여길 나갈 수 있다면 몇 명이든 상대할 수 있어! 네놈 행복 때문에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돼야 하는 건데!!
“으으!”
과한 흥분이 몸을 집어삼켰다. 놈에 대한 분노와 원망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왜 하필 그날 비가 왔을까, 왜 하필 같은 횡단보도에 있었을까, 왜 하필…! 그중 나였을까! 원망 어린 질문이 전에 놈이 그랬듯 서서히 목을 졸라왔다. 못내 지른 비명은 재갈을 통해 짐승 같은 소리로 변해 버렸다.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화가 분탕질을 치며 내 모든 것을 빠르게 잠식했다.
치아가 부러져도 상관없었다. 있는 힘껏 재갈을 물고 몸을 흔들었다. 쾅! 쾅! 옷장 문을 치는 어깨엔 이미 놈의 손자국이 가득했지만, 아픔도 잊고 놈에게 저항했다. 과격한 움직임에 구속구가 살을 거칠게 쓸며 피부를 파고들었다. 시발! 열려! 열리라고…! 꿈쩍도 하지 않는 벽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한참을 그러다 숨이 벅찰 지경이 돼서야 발악을 멈췄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 속에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가득 찼다.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 소리뿐. 쾅!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벽에 박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장은 여전히 쿵쿵거리며 아프게 뛰었다. 더불어 전신이 욱신거렸다. 구속구가 묶인 곳도, 놈에게 잡혔던 곳도, 어깨도 어디도 전부! 이젠 머리까지 아픈 것 같았다. 술기운이 왜 지금 올라오고 지랄인데. 격한 흥분 탓인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벌이에요. 반성할 때까지 여기 있어요- 라고? 하!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놈이 뭔데 나에게 벌을 주고 내가 반성을 해야 해? 놈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의향도, 의무도 내겐 없었다.
다시 몸을 움직였다. 쾅! 열려! 열리라고! 몇 번이고 묶인 몸을 흔들다가 턱까지 차오르는 숨에 멈추고, 다시 힘을 주다 근육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또 멈췄다. 옷장이 부서지기 전에 내 어깨가 먼저 부서질 것 같았다. 부딪히고, 쉬고, 부딪히고, 쉬고. 반복되는 행동에 지친 몸이 고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삐걱거렸다.
헉, 어느새 잠이 든거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술기운도 있고, 최근 제대로 잔 적도 없었기에 잠시 쉬는 사이에 의식을 놓았던 모양이다. 여전한 정적과 어둠 속에서 구겨진 몸을 조금 움직였다. 정말이지… 불편하고 괴로웠다. 으윽. 마음껏 펼수 없는 관절에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슬쩍 문을 다시 밀었다. 여전히 굳게 닫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발…. 놈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도, 이 깜깜한 옷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쓰린 어깨와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문을 세게 밀었다.
두 번째로 잠에서 깼을 땐 갈증이 덮쳐왔다. 으… 아파…. 재갈을 물고 있는 입에선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지만, 목구멍부터 몸속까지 바싹 말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숙취였다. 너무 목이 말랐다. 침이라도 삼키는 게 낫지 않을까. 고개를 들어 밖으로 흐르는 침이라도 삼켜보려 했지만, 목이 펴지질 않아 불가능했다. 개새끼….
이어 갈증과 함께 찾아온 배고픔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내가 여기 언제부터 있었더라? 5분 전? 30분 전? 아니면 몇 시간 이상? 마지막으로 먹은 게 고작 마른오징어라는 게 떠올랐다.
그리고 너무 지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즈음엔… 배설이 문제였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시발, 이놈의 오줌은 왜 시도 때도 없이 마려운 걸까. 남들보다 방광이 반토막인 것 아닐까? 속을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몸속에 있는 수분이 전부 오줌으로 변한 것이 느껴졌다.
무릎을 힘껏 당겨 안으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성기를 손으로 꽉 붙잡았다. 젠장. 좆같은 생리 활동 같으니. 어떻게 하지. 화장실 가고 싶어…. 놈에 대한 격분은 어느새 우선순위에 밀려 그 열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놈은 아직인가? 혹시라도 내가 자는 사이 돌아온 건 아닐까. 워낙 음흉한 놈이니 지금도 이 밖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지. 이 옷장 안에도 카메라가 있을걸? 놈은, 놈은 언제 오는 거지? 여기서 언제 꺼내 주는 건데.
“흐우욱, 흐윽…흑.”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좁은 옷장 안이 지독한 냄새로 가득했고, 피부마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배가 아플 정도로 참다 참다 터져 버린 오줌이 옷장 틈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벌써 3번째.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개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시발, 비참해. 죽고 싶어….
어쩌면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각도 청각도 차단당했고, 말을 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모조리 불가능했다. 배고픔이나 화장실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이 되질 않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할까. 수면을 제외하고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꼬르르륵-. 한층 더 심해진 배고픔이 너무나 괴로웠다.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콧속도 눈도 모조리 따가워…. 이제 제발 좀 꺼내 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단어들이 재갈에 막혀 웅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잠이 드는 게 아니라 기절을 한 것 같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느끼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도 너무 아프고 힘에 부쳤다.
반성할 때까지 여기 있어요. 이쯤 되니 내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아서 놈이 오지 않는 건가,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멍청했던 생각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했다. 혹시 나갔다가 사고가 났거나,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생겼거나…. 아니면 나를 잊었거나…? 놈도 술에 취해 나갔으니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자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다.
만약 놈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좁고 어둡고 더러운 이곳에 계속 혼자 있어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익사와 아사라고 하던데…. 뼈만 남을 때까지 말라서 고통스럽게 죽어 갈 내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겠지. 시체도 발견되지 못하고 혼자 영원히 이곳에….
싫어…. 그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