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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누워 눈을 감았다. 사실 뜨나 감으나 깜깜했기에 의미는 없었지만.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됐을까. 시정은, 정태는, 가족들은 뭘 하고 있을까…. 이젠 의미를 잃은 질문이었다. 대답해 줄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반대로 돌아눕자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했다. 밤, 어쩌면 새벽쯤? 그나마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조차 뜸했다. 놈을 통하지 않고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창밖으로 들리는 소리뿐이었다. 사람이 드문 시간이라면 새벽밖에 없지. 그래서 더 조용했구나.
이유를 알았지만 시큰둥했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그래 봤자 여긴데. 누가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갈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놈에 의한 철저한 고립은 내 모든 의지를 꺾어 버렸다.
잠조차 오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는데, 문득 사뿐한 발걸음이 들렸다.
“선유 씨….”
어두운 침묵을 깨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불리는 내 이름…. 자라고 들여보낸 게 한참 전인데 왜 왔지? 하지만 굳이 일어나진 않았다. 뭐 반갑다고 그런 짓까지 해. 그냥 그대로 누워 눈을 꾹 감고, 계속 자는 시늉을 했다.
“자요?”
삐걱…. 놈에 체중에 따라 침대가 기울었다.
“자는구나….”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지 묘하게 바람이 느껴졌다. 뭘 하려는 건진 몰라도 영 수상쩍은 놈의 행동에 지금이라도 눈을 떠야 하나 고민했다.
“헤헤.”
놈이 멍청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부스럭댔다. 그다지 요란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눈을 감고 있으니 청각이 예민해져 평소보다 훨씬 크게 들려왔다. 찌이익-.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퍼를 내리는 소리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설마-. 순간 남자라면 익숙할 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실례합니다….”
탁, 탁, 탁…. 규칙적으로 살을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희롱했다. 닿지는 않았지만, 얼굴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놈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시발, 야밤에 몰래 와서 자위라니! 너무나 익숙한 놈의 행동에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눈을 뜰까? 자는 척을 하면서 몸을 돌려 버릴까? 놈에게 별의별 짓을 다 당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직접적인 성관계는 없었다. 강제적인 현실에 대해 체념했다 해도 그게 내가 놈과 사랑을 하겠다거나, 성행위를 해도 좋다는 인정은 아니었다. 거기엔 당연히 지금 놈이 하는 짓도 포함이었고!
하지만 괜히 놈을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냥 가만히 있자. 괜히 어설프게 대처했다가 놈이 폭주라도 하면 어떡해. 어쩌면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일부러 만들고 싶진 않았….
“흣…!”
놈의 짧은 신음과 동시에 뜨거운 액체가 얼굴 위로 끼얹어졌다. 눈 위로 코로 입술로…. 속절없이 흩뿌려지는 역겨움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이불 속에 있던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찰칵. 단조로운 셔터음이 울리며 놈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사진. 그날 화장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 예뻐….”
한껏 뜨거워진 손이 몇 번 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혹시라도 깰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어 조금 더 부스럭거리더니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시발, 이거 봐. 수건까지 준비해 온 거 보라고. 절대 처음 아니라니까.
놈은 그렇게 자신의 욕구를 처리한 뒤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설픈 타이밍에 일어났다가 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놈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발.”
여전히 남은 찝찝함에 이불에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작게 욕을 읊조렸다. 설마 내가 잠들었을 때마다 이런 건 아니겠지?
놈의 입술이 내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벌써 3번째 입맞춤이었다. 으, 그 부분만 살이 썩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떨어졌던 얼굴이 다시 가까워지기에 신경질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퍽! 일부러 노린 건 아니지만 또 놈의 턱을 쳐올렸다. 몇 번이나 맞아서 퍼렇게 든 멍이 아플 법한데, 이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굳세게 내 몸을 끌어안았다.
“가기 싫은데….”
놈이 한숨을 내쉬며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곳에 온 뒤로 처음 하는 출근이었다. 영상에서 봤던 정장이 우왕좌왕 움직였다. 입에 물린 재갈과 손발의 구속구를 몇 번이나 확인했음에도, 놈은 불안한지 바로 집을 나서지 못했다. 지이이잉-. 결국 휴대폰이 울리고 나서야 놈은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터덜거리는 발걸음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우울한 표정으로 방문을 나가는 놈. 이제야 혼자 있을 수 있게 됐….
“아, 저번처럼 탈수 나면 안 돼요! 거기 물 떠 놨으니까 마시고 싶을 때 마셔요. 알겠죠? 그리고 이따가 오줌 마려우면 이 안에 싸고….”
쪼르르 돌아온 놈이 벌써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지겨운 새끼 같으니! 좀 꺼져라!
“아아- 너무 가기 싫다….”
뭘 따라 하는 건지, 놈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뭔지 몰라도 안 했음 좋겠다. 꼴보기 싫어…. 휴대폰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거세게 반항하며 또 한 번 알람을 울렸다. 시간을 확인한 놈이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갔다.
“다, 다녀올게요!”
쾅-. 벽 너머로 무거운 현관문이 닫히자 온 집안에 적막이 가득했다.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조용해서 고마울 정도였지. 안 그렇게 생겨서 어찌나 말이 많은지. 재잘거리는 놈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귀가 한결 편해졌다.
몸을 뒤로 누이자 폭신한 침구가 온몸을 감쌌다. 은은한 섬유유연제의 향이 가뜩이나 늘어진 몸을 더 게으르게 만들었다. 놈이 며칠에 한 번 꼴로 침구를 바꾸는 통에 이 포근함이 가실 틈이 없었다. 시간을 몰라서 확신은 없지만 아마 이틀 정도가 아닐까. 이 정도면 놈은 그냥 집안일이 체질인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내가 그냥 내뱉었던 이상형에 적합하고자 애를 쓰는 걸 수도 있고.
뒹굴. 몸을 구르자 한껏 어두운 창 모서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의 붙은 시트지의 끝이 무슨 이유인지 조금 벌어져 있었다. 습기 때문인가? 정말 작은 틈이었지만 방이 그닥 밝지 않았기에 더 눈에 띄었다. 본인이 없을 땐 자란 소린지, 평소보다 어두운 전등을 켜 두고 간 탓이다.
놈이 정상 출근을 한다는 전제하에 짐작하건대, 아마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가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알아낸다 해도 딱히 변하는 건 없다. 째깍째깍. 거실에 있던 거로 기억하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시간이면 나도 회사에 있어야 하는데…. 시정과 가벼운 농담을 나누며 출근하고, 정태와 회의를 준비하고, 엉망으로 자료를 만든 신입사원들을 나무라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당연하고 평범한 내 삶이었을 텐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도대체 어느 쪽이 내가 속한 현실인 걸까.
째깍, 째깍. 멀게만 느껴졌던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느긋한 박자에 맞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어쩌면 놈이 외출한 이 시간이 내겐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구속구를 끊어 낸다면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 또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로 놈이 나를 죽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사는 것과 죽는 게 뭐가 다를까 싶지만, 진짜 죽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나약하다는 걸 경험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구속구를 끊어 낼 무엇도 없었고…. 이런 악조건에서 굳이 위험을 자초하기엔 탈출은 내게 너무나 힘겨운 도박이었다.
이웃의 외면. 진짜 진단서. 침구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방. 놈은 나를 고립시키기 위해 완벽한 준비를 했고, 지금까지 모든 건 놈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밖에선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게 전부였다.
이불을 두르고 누워 선잠에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애초에 온종일 할 수 있는 게 자는 것뿐인걸.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고. 몇 번이나 반복해도 현실은 어둡고 삭막한 방안. 중간에 한 번 일어나 놈이 두고 간 페트병에 소변을 본 것 외엔 움직일 만한 일도 없었다. 그마저도 놈이 없을 때 빨리 누는 게 났다는 생각에서였다.
전에는 자는 것만큼 행복한 휴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겨울 정도로 자보니 그것도 과하면 전혀 휴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깨달으면 뭐해. 의미 없긴….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나마 있던 잠도 완전히 깨버렸다. 묶여 있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윽….”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양쪽 관자놀이가 띵- 하고 아려 왔다.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여전히 뿅뿅거리는 게… 으, 정신을 못 차리겠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이따가 놈이 두고 간 물건들을 내려봤다.
저번처럼 탈수 나면 안 돼요! 거기 물 떠다 놨으니까 마시고 싶을 때 마셔요. 알겠죠?
내가 보는 앞에서 정수기 물을 떠다 놨으니 깨끗한 물은 맞다. 그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 문제였지. 스테인리스로 된 오목한 개밥그릇. 놈이 날 위해 준비했다며 야심차게 내놓은 물그릇이었다. 내가 개처럼 엎드려 할짝거리길 바라는 건가. 재갈을 물고 있지만, 공에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어서 마시고자 하면 못 마실 것도 없었다.
마셔요. 개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마셔 봐요. 귀엽게 굴면 더 줄게요.
소름 돋을 정도로 놈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순간 욱하고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모순적이지만, 탈출은 포기한 주제에 자존심은 아주 쌩쌩하게 살아 있었다.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순순히 놈이 시키는 대로 하긴 싫어! 누가 네놈 원하는 대로 해 줄 것 같아? 저딴 개밥그릇…!
“욱!”
쿵! 끼익-. 요란한 소리가 났다. 분명 있는 힘껏 발로 차버릴 요령이었다. 발이 자유로웠다면 성공했겠지. 아 젠장! 아파! 벌떡 일어난 것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내가 듣기에도 아픈 소릴 내며 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발목이랑 연결돼 있던 사슬이 당겨지며 침대가 조금 끌려오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침대를 뭐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거야!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발목까지. 시큰거리고 쓰라린 통증에 코끝이 찡해졌다.
멍청한 짓을 했다는 수치심이 화를 더 돋웠다. 놈이 이 꼴을 본 것도 아니지만, 괜히 쪽팔리고 열이 받았다. 시발!! 화풀이를 하듯 앞에 놓인 그릇을 들어 문 쪽으로 있는 힘껏 내던졌다. 챙그랑-. 그릇이 나뒹구는 소리와 함께 벽지의 한구석이 진하게 물들었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시큰거리는 발목을 매만지고 있으니 서러움만 커졌다. 언제 쓸린 건지 팔꿈치는 붉게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 망할 놈의 구속구. 이것만 끊어 내면 당장 여기서 뛰쳐나갈 수 있을 텐데. 겨우 가죽끈 하나에 이렇게 매여 있으니, 새삼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깨닫게 된다.
원망스럽게 끈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문뜩, 조금 틀어진 침대에 시선이 갔다. 정확히는 침대의 아래에…. 방음 공사를 하러 왔던 사람들이 흘렸나? 아님 침대 부품이 빠진 것일까. 침대 밑엔 2마디 정도 길이의 뾰족한 못이 떨어져 있었다.
방 안엔 필요 이상의 가구도, 내게 필요 이상의 도움이 될 그 어떠한 물건도 들여놓지 않았던 놈이다. 나갈 방법이 없으니 체념해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못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순순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가? 분명 위험한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다녀왔습니다!”
놈이 돌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발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선유 씨!”
헐떡이며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나는 얌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놈은 대놓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침대 맡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엎어진 흥건한 물이 놈의 옷을 적셨지만, 놈은 그런 것 따윈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손등에 놈의 이마가 문질러졌다.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놈은 늘 입던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나를 안아 들었다. 몇 번이나 해 왔듯이 놈이 보는 앞에서 배설하고, 놈이 만든 음식을 먹고, 놈의 손에 씻겨졌다. 놈은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이 가장 즐거워 보였다.
“종일 선유 씨 생각만 했어요. 뭐 하고 있을까, 배는 고프지 않을까, 화장실 가고 싶진 않을까…. 머릿속이 당신 생각으로 가득해서 일을 안 잡히지 뭐예요. 선유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근데 물은 왜 엎었어요. 넘어지기까지 하고…. 속상하게 왜 다치고 그래요. 바닥에 매트라도 깔아야 하나…. 당신이 다쳐서 너무 속상해요. 멍든 것 좀 봐….”
시끄러워…. 없던 시간만큼 못 떠든 걸 채울 생각인지, 놈은 쉼 없이 재잘거리며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단 한 번의 대답도 없었지만 그래도 놈은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며 기뻐하고, 또 속상해했다. 무슨 일 없었어요? 응? 응? 나 없을 때 뭐 했어요? 시발, 이 방에서 뭘 하겠냐! 이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드는 놈 때문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1시간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한마디만 더 하면 팔꿈치로 주둥이를 찍어 버릴 거라고 다짐했는데, 때마침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아쉽지만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회사에서 못 끝낸 업무를 가져왔거든요…. 선유 씨랑 좀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대화는 둘이 같이 하는 거 아니었냐? 여태 너 혼자 떠들어 놓고 무슨 대화.
“아! 그래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저는 괜찮으니까 선유 씨 먼저 자고 있어요.”
마치 내가 먼저 기다리겠다고 말한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놈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버렸다. 그러자 놈이 말도 잘 들어서 예쁘다며 내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아 소름. 질색하며 몸부림을 치자 놈이 애교도 귀엽다는 망언을 하며 키득키득 방을 나섰다. 씨발, 또라이 아냐? 중간에 화 한 번 내지 않은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했다.
뭘 챙기는지 거실을 돌아다니던 놈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천천히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놈의 인기척을 살폈다. 업무인지 뭔지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바닥으로 기어 내려왔다.
못은 발견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놈이 없는 내내 저걸 꺼내보려 난리를 쳤지만, 미묘하게 손이 닿질 않아 꺼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침대 프레임 밑에 억지로 구겨 넣었던 손목만 팅팅 부어올랐다. 씻길 때 그걸 발견한 놈이 넘어지며 손목까지 다친 거냐며 눈시울까지 붉혔었다. 양 손목이 묶여 있지만 않았어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은 못의 존재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놈이 알아채기 전에 빼내기만 하면 돼. 조금만 더 긴 물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내일을 기약하자. 놈이 돌아와 있는 시간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잖아. 언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지 몰라.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못이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한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종일 잤으니 금방 잠이 올 리가 있나.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날의 밤은 특히 시간이 더 더디게 흐르지. 양이라도 세야 하나.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리고 어느새 사천육백팔십… 아씨, 몇 마린지 까먹었다…. 다시, 한 마리….
“선유 씨….”
애써 잠이 드려 노력하는 찰나에 놈이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시간을 모르기에 갑자기 찾아온 놈 때문에 꽤나 놀라고 말았다.
“선유 씨, 자요?”
목소리를 잔뜩 죽인 놈이 소곤거리듯 내 이름을 불렀다. 왠지 그날 밤이 떠올라 버렸다. 불안한 마음에 눈을 뜨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놈 때문에 그럴 타이밍조차 놓쳐 버렸다.
“자나 보네.”
침대 위로 걸터앉은 놈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는 것도 예뻐.”
히히, 내 선유 씨. 징그러운 놈의 웃음소리에 귓구멍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 실례.”
찌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정신이 확 깼다. 설마 또….
“하아, 하악….”
탁, 탁, 탁…. 사내 특유의 살 내음과 열기가 느껴졌다. 긴장을 하자 몸이 부자연스럽게 굳어 버린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점점 더 크게 쿵쿵거렸다. 너무 크게 뛰어서 놈에게 내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지금 와서 일어나기엔 너무 늦었겠지? 괜히 눈떴다가 놈이 이상한 짓을 시키면 어쩌지…. 상상만 해도 역겨워. 시발, 이러려고 일찍 자라 그랬냐?
“선유 씨, 선유 씨, 하아….”
투둑. 또다시 얼굴 위로 뜨거운 액이 끼얹어졌다. 입 주변에 잔뜩 뿌려진 비린내에 숨을 멈추려다 아차 싶었다. 그럼 안 자는 게 티가 나잖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숨을 쉬려 했지만 어떤 게 자연스러운 건지 벌써 잊어버렸다. 쓰읍. 숨을 들이켜자 놈의 정액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욱!
“하아, 하아… 선유 씨 얼굴 야해….”
놈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에 더러운 정액을 문질렀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전보다 훨씬 과감한 행동이었다.
“헤, 헤헤….”
천천히 움직이던 놈의 손이 점점 대담해지더니, 아랫입술을 꾹 눌러 왔다. 힘을 빼고 있던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어어, 입에 들어가네.”
자신이 의도한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놈의 손은 의도적으로 내 입술 사이에 정액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나중에 알면 울지도 모르겠다. 하아, 우는 것도 예쁜데….”
잠시 내 입술을 가지고 놀던 놈이 아쉬운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는지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고, 가슴께에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기까지. 좋은 꿈 꿔요. 달콤하게 속삭인 놈이 방을 느긋하게 나섰다.
딸칵. 이 방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놈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 씨발…!”
이불에 입을 벅벅 닦고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더러워! 더러워! 시발 더러워!! 인중에 아직도 놈의 정액이 고여 있는 것처럼 계속 비린내가 났다. 씨발! 이 병신 같은 새끼가…! 그냥 콱 죽어 버리면 좋겠어! 한두 번이라 하기엔 놈이 너무 태연했다. 이 새끼 내가 잠든 다음에 매일 와서 이 짓을 하는 게 분명해!
이 상태로 잠이 올 리가. 애꿎은 베개만 쥐어뜯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시 놈의 출근이 돌아왔다.
“다녀올게요.”
물 떠다 놨으니까 마시고 싶을 때 마셔요. 이따가 오줌 마려우면 이 안에 싸고. 어제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이 말하고 있다. 이 정도면 로봇 아냐? 그 후에도 마찬가지로 한참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손목은 잘 묶여 있나, 방 온도는 적당한가, 불은 너무 밝지 않은가, 창문은 잘 닫혀 있는가…. 이미 확인한 걸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다 알람이 울리자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출근길에 나섰다.
쿠당-.
현관문이 닫혔다. 드디어 나갔네! 밤새 이 시간만 기다려 왔다. 기다렸던 만큼 급하게 침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우욱-! 격한 움직임에 구역질이 절로 올라왔다. 흥분해서 속이 안 좋은 걸 잠시 잊었네. 웁….
오늘 아침으론 평소보다 더 되직한 죽을 먹었다. 놈이 정액을 2번이나 쥐어짜 넣었기에 더 끔찍한 식사였다. 먹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 내느라 얼마나 용을 썼는지. 새벽에 한 발 빼놓고 아침부터 2번이나 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 정도면 혈관까지 정액으로 꽉 차 있는 수준 아냐?! 다시 꿀렁거리는 속에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속을 진정시켰다.
한참 심호흡을 한 뒤에야 바닥에 엎드릴 수 있었다. 재갈 옆으로 흐르는 침을 무시하며 고개를 살짝 돌리자, 침대 밑, 어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못이 보였다. 손을 뻗었지만 역시 좁은 틈으론 견고하게 묶인 양손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도구가 있으면 쉽게 꺼낼 수 있을 텐데, 이 방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게다가 그런 게 있었으면 벌써 내가 흉기로 썼겠지.
주변에 단단함을 가진 도구라곤 놈이 두고 간 개밥그릇과 소변용 페트병이 전부였다. 그릇은 침대 밑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고, 페트병은 구겨서 사용하기엔 너무 두꺼운 재질이고…. 다른 쓸 만한 게 없을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휑한 방에서 뭐가 보일 리 만무했다.
조급한 마음에 두통까지 오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봐! 정말 쓸 만한 게 없을까? 아, 그래. 사슬! 침대랑 묶여 있는 사슬은 어때? 하지만 묘하게 길이가 닿지 않았다. 답답함에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처박으며 신음했다. 시발, 진짜 아무것도 없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침구에 문지르자 섬유유연제의 향이 진하게 코를 찔러 왔다.
“…….”
고개를 들어 올리자 구겨진 이불 끝이 허벅지 위로 흘러내렸다. 멍청하게 그걸 바라보다 불에 덴 사람처럼 퍼뜩 몸을 일으켰다. 와, 이선유! 진짜 멍청하네! 도구가 없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허둥지둥 이불을 끝을 침대 밑으로 구겨 넣었다. 힘없는 원단이 꾸역꾸역 안쪽으로 밀려들어 가고, 대충 이쯤이겠거니- 하고 예상하며 이불을 힘껏 빼냈다. 모 아니면 도. 기대를 가지고 다시 바닥에 엎드리니, 못은 한껏 내 쪽을 향해 굴러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