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13/46)

D-DAY

“당신은…!”

낯선 얼굴. 하지만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분명 회사 앞에서 나를 태우고 경찰서로 가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왜 내 앞에 서서 웃고 있냔 말이야. 게다가 난 속옷 한 장 안 걸치고 묶여 있고…. 무슨 오해가 있던 걸까?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알몸인 것이 부끄러웠기에 묶인 손을 버둥거리며 사타구니를 가리려 애썼다.

“내, 내 옷은 어디… 윽!”

말을 하자 머리가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고통에 이를 꽉 깨물며 침대 시트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걸 보고 있던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렸다.

“아파요? 약이 너무 독했나?”

“약?”

“차에서 마신 음료요. 거기에 약을 탔어요. 그래야 당신도 잠을 좀 자고, 집에 오는 동안 얌전히 있을 거 아니에요.”

뭐가 잘못됐나요? 남자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대답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얼굴을 붉힌 남자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다지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욱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

“너 누구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누구냐고!!”

내 비명에 남자는 미소를 거뒀다. 한순간 공포가 엄습했다. 큰 소리를 내서 화가 난 걸까? 살해, 유기, 혹은 강간. 온갖 범죄와 관련된 것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차. 괜히 놈을 자극했다면 어쩌지? 손발이 다 묶인 채로 누워 있는 내가 불리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자, 잠깐…,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남자가 침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두 눈이 새카맣게 빛났다. 가까이 오지 마! 꺼져! 아직 온몸이 저렸지만 움찔거리며 남자와 멀어지려 애썼다. 하지만 내 발버둥에 비해 너무 쉽게 다가온 남자가 몸을 숙이더니…, 무릎을 감싸며 침대 앞에 쭈그렸다. 그뿐이었다. 무, 뭐야… 손찌검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음, 역시 기억 못 하네요.”

동등해진 눈높이에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하얗고 마른 얼굴에 조금 처진, 순해 보이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긴 앞머리가 눈 쪽의 상당 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남자가 워낙 가까이서 나를 마주하고 있기에 볼 수 있었다.

특징이나 특색 따위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인상이 약한 쪽이라고 할 수 있지. 기억을 못 한다고? 내가 이 남자를 언제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내려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답답함에 얼굴을 찌푸리자 남자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살풋 웃었다.

“비 오는 날, 우리 처음 만났는데….”

“비… 오는 날?”

전혀 모르겠다. 비가 하루 이틀 왔냐고.

“하필이면 차가 고장 나서 얼마나 짜증이 났었는지 몰라요. 그날따라 물건은 많지, 비는 쏟아지지…, 게다가 뒤에서 밀기까지. 짐은 다 젖어 가고 있고, 신호는 끝나 가는데 모두가 날 무시하더라구요. 평소랑 똑같이 말이에요.”

아…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열흘 전쯤에 횡단보도에서 넘어진 남자가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그런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한참 앞서가던 길을 돌아와서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그날을 회상하는 듯한 남자가 갑자기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 모습에 반했어요.”

…뭐?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남자는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했다.

“선유 씨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자기가 말해 놓고 부끄러운지 손등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물론 서류는 다 젖어 버리고 보온병도 깨져서 못쓰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당신을 만났다는 기쁨에… 행복해 죽을 것만 같았어요!”

비 오는 날 조금 도와줬다는 이유로 첫눈에 반했다고? 솔직히…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혈기왕성하고 호기심 많은 10대 무렵 누구나 한번쯤은 그려볼 것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첫눈에 반하는, 전학 첫날 식빵을 물고 모퉁이를 돌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그런 순정만화스러운 전개 말이다. 하지만 시발, 그건 진짜 만화일 뿐이잖아.

“요 며칠이 얼마나 설렜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 말에 소름이 쫙 돋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네?”

“너야?”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수록 내 얼굴은 굳을 뿐이었다.

“네가… 범인이야? 네가 그… 그….”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신 말했다.

“스토커냐구요? 맞아요. 제가 선유 씨 스토커예요.”

“이… 개새끼야!!”

놈에게 달려들었다. 묶여 있기에 침대에서 조금 튀어 나간 것뿐이었지만, 속에서 무언가가 폭탄처럼 터지는 통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씨발, 물건이 망가져서 보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서,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로 나한테 이런 짓을 해?!

“씨발! 씨발새끼! 나한테 왜!! 으아악!!”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다 보니 한순간 핑- 하고 눈앞이 돌았다. 동시에 너무 흥분해 잊고 있던 통증이 머리로 몰려왔다. 뇌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시트에 고개를 처박았다. 극심한 고통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아직 아플 텐데… 괜찮아요?”

“후욱…. 이거 풀어, 당장 이거 풀라고! 씹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놈은 내 발악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말투와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왜… 왜 나야. 왜 하필 나였냐고! 왜애!!”

“굳이 따지자면… 운명이었을까요?”

“운명은 무슨!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도와줬을 거라고!”

“아뇨.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줄 리 없잖아요. 선유 씨라 가능했던 거라구요. 우린 그렇게 만나게 될 인연이었어요.”

인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하지만 놈은 진심이었는지 조금 더 내게 가까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전 여태껏 당신을 기다려 왔어요.”

“씨바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고함을 치며 연신 거친 말을 쏟아냈다. 요 근래… 아니 올해 들어 가장 많은 욕을 내뱉고 있었다. 한마디를 내지를 때마다 머리가 둥둥 울렸지만, 쉬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다 결국 먼저 힘이 빠진 건 나였다. 당연했다. 내가 몸부림을 치는 내내 놈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으니까. 헐떡이며 시트에 늘어지자 놈이 겨우 한마디를 했다.

“끝났나요?”

간단명료한 놈의 말에… 문뜩 내 처지를 깨달았다. 나는 납치를 당했고, 내 앞에 있는 이놈은 납치범이었다. 나는 옷은커녕 기운조차 없이 묶여 있는 무기력한 처지였고, 놈은 나와 반대로 뭐든 할 수 있었다.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에 울고만 싶었다.

“시발… 운명 같은 게 아니야…. 나는 원래… 도울 생각이 없었단 말이야….”

정말 도울 생각이 없었다.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썅. 사람을 도왔을 뿐인데 왜 내가 이런 꼴을…! 꼴사납게 우는 대신 묶인 주먹을 꽉 쥐며 내 나름의 변론을 했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없게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유 씨.”

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움찔! 낯선 손길에 대한 공포로 온몸이 바싹 굳었다.

“선유 씨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결국 날 도운 건 선유 씨고, 지금 함께 있는 것도 선유 씨 잖아요.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활짝 웃었다. 순수. 그 단어가 딱 어울릴 법한 미소였다. 20대 중후반쯤 됐을까. 객관적으로 봐도 범죄자라기보단 선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일의 범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첫눈에 반했다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이상하잖아. 이 남자도 실수를 하는 걸지 모르지. 어쩌면… 잘만 설득하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남자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뭐가요?”

“여태 화낸 거… 미안해요. 그냥 조금 흥분해서 그랬어요. 생각해 봐요. 눈을 떴는데 이런 꼴이면…. 어쨌든, 미안해요. 내가 사과할게요.”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남자가 흐음? 하고 말끝을 높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제발 풀어 주세요. 신고도 안 하고 조용히 살 테니까…. 뭔가,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우리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첫눈에 반했다고 이러는 사람이 어디 있….”

“아닌데.”

“네?”

“오해 아니라구요.”

“흐읍!”

놈의 손등이 다시 내 볼을 천천히 쓸며 내려왔다. 너무 놀라 숨까지 멈추며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럴수록 시트가 다리에 엉켜 올 뿐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해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선유 씨를 잘 알아요. 나이는 30살. J디자인 입사 3년 차 대리. 창가 오른쪽 자리에 앉죠?”

“어, 어떻게….”

“술은 의외로 잘 못 하고. 담배는 즐기는 편이지만- 일단은 금연 중. 현재 애인은 없고, 여자관계는 담백하고…. 주변에 벌레들이 좀 많아서 문제지만요. 이상형은 꼼꼼하고 다정하고, 깔끔한 스타일? 이라고 했었죠?”

“그걸 어떻게…. 그건 선배랑만….”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여태 살면서 이상형에 대한 주관은 없었다. 시정이 집에 놀러온 날, 말해 보라 하니 그때 처음으로 입 밖으로 냈던 이상형의 모습이었다. 근데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내 의문에 놈이 보란 듯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내 휴대폰이었다. 저게 왜 저놈 주머니에?! 질문할 틈도 없이 놈은 꺼져 있는 휴대폰을 으드득- 소리가 나게 비틀었다. 그 소리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결국에 뒤쪽을 뜯어낸 놈이 손가락으로 하단에 작은 부품을 가리키며 내보였다.

“도청기예요. 우리가 만난 다음 날에 달아 뒀어요. 이게 엄청 비싼 거였는데… 그래도 당신한테 쓰는 돈은 안 아까워요. 나 돈 많아요.”

저걸 어느 틈에 달아 뒀단 말인가. 심지어 그 다음 날 바로라고? 일 때문이라도 휴대폰은 몸에서 잘 떨어트려 놓지 않는 편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가까이 지니고 있을수록 놈이 내게서 더 많은 것을 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대화는 그렇다 치고, 사진은 어떻게 된 거지? 우리 회사에 어떻게 들어와서 내 사진을 찍었냔 말이야.

“아, 사진이요? 당신 회사랑 내 회사가 바로 옆 건물에 있잖아요. 우리 회사 회의실에서 당신 자리가 제일 잘 보여요. 거기서 찍은 것도 몇 장 있고,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직접 찍은 것도….”

“거짓말. 우리 회사엔 아무나 막 들어올 수 없는….”

“나 아무나 아니잖아요.”

시발, 거래처…. 그럼 오늘 점심에 상담 신청을 한 것도 날 가지고 논거였군…! 그럼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괴로워하는 사이에도, 저놈은 내 직장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소리야?! 내가 무고한 시정이나 정태를 의심하면서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멍청하다? 꼴 좋다? 그도 아니면 날 보고 희열을 느꼈을까?!

“더 말해 줄까요? 생일 6월 8일. 형제는 형이랑 선유 씨 단둘. 고향은 대전. 대전에서 oo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서 oo대학 졸업했고 구시정은 여기서 친해졌죠?”

“그만해….”

“형님은 인천에서 자동차 딜러로 일하고 계시고, 부모님은 대전에서 작은 과일가게를 하고 계시는데….”

“그만하라고!!”

전신에 털이 쭈뼛 섰다. 회사뿐이 아니다. 내 집에도 마음대로 들어와 행동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내 눈으로 봤었다. 거기에 이제 내 가족들과 과거까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너 뭐야! 도대체 뭐냐고! 이거 범죄야! 알아?!”

울컥하는 마음에 또 생각 없이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놈을 자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다행인지, 놈은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기분 나쁘게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뭘 못하겠어요.”

“사랑 같은 개뿔…!”

“나 다른 노력도 많이 했어요. 당신이 꼼꼼하고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해서…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나는 단박에 놈이 말하는 ‘노력’이란 것을 눈치챘다.

“며칠 전에 비 왔을 때 말이에요. 당신이 창문을 열어 놓고 가서, 그거 닫으려고 나 억지로 조퇴까지 했었어요. 그리고 매일 당신이 오기 전에 가서 집안일도 했고요. 아플 때 먹으라고 죽도 만들고, 약도 사다 놨어요. 근데 내 건 한 번도 안 먹으면서 전정태가 만든 건 잘도 먹더라구요.”

정태 이야기를 하는 놈의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거기에 눈까지 샐쭉해져서는 나를 흘겼다.

“외간 남자가 뭘 어떻게 만들었을 줄 알고 그렇게 넙죽넙죽 받아먹어요. 마음 같아선 그거 버리려 그랬는데, 당신이 너무 속상해할까 봐….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으라고 약간 조미료만 더 쳤었어요. 어찌 됐건 버려지긴 했지만.”

“미, 미쳤어. 당신 미쳤지?! 조미료?! 그걸 조미료라고 불러?! 또라이 새끼!”

전정태보다 ‘외간 남자’에 가까운 게 자기라는 걸 모르는 걸까? 분명 이 새끼는 심각한 정신병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어쩌다 이런 놈한테 걸렸을까. 그러니까 내가 비 오는 날은 싫다고 했잖아! 발버둥을 치며 몸을 흔들자 침대가 삐걱거리며 울었다.

“미친놈! 당장 이거 풀어! 풀라고!!”

“안 돼요. 그럼 도망갈 거잖아요. 어떻게 당신하고 한집에 살게 됐는데…. 당신 주변에 은근히 벌레들이 많아서 나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설마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당신이 바람피울까 봐 무서웠다구요.”

“난 네가 더 무서워. 변태 새끼야!”

“변태라 불러도 좋아요. 저는 그냥 사랑에 빠진 것뿐이에요.”

“지랄 말고 내 옷이나 내놔! 이거 풀어!”

발작하듯 몸을 흔들자 여태 곁에 앉아 있던 놈이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곤란해요. 그건 안 돼요.”

놈이 방을 나가려는 듯, 문고리를 붙잡았다. 곤란한 건 나거든!!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날 풀어 주란 말이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자, 잠깐!”

“왜요?”

“…미안해…. 미안해요. 내가 흐, 흥분해서…. 얌전히 있을 테니까 이것 좀 풀어 주면 안 될까요? 네? 제발… 너무 아파서 그래요.”

“…….”

놈의 처진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그리고 헤헤,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 아픈 거 다 알아요. 내 몸에 직접 써 보고 골랐는 걸요.”

선유 씨는 소중하니까요. 제품 광고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나를 묶고 있는 구속구까지 직접 써 보고 고를 정도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한 걸까. 내가 모르는 놈의 시간이 끔찍하기만 했다. 어디까지 계획된 일이란 말이야.

”조금만 더 누워 있어요. 금방 죽 만들어서 가져올 테니까.”

“잠깐! 잠깐! 나가지 마! 야! 이 씨발! 이거 풀어!”

태연하게 손까지 흔들어 주며 놈은 들어왔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개새끼, 뭔새끼. 아는 새끼는 다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놈의 말대로 묶인 곳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 치느라 버둥댄 관절이 더 아려 왔지.

“아아악! 죽여 버릴 거야! 씹새끼야! 개새… 으악!”

쿵 소리와 함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불과 같이 떨어지긴 했지만 맨 몸이라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게 아니면 아직 남은 약 기운 때문일 수도 있고. 온몸이 뻐근하고 지끈거리는 통에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뒤집는 것조차 버거웠다.

“씨이발… 왜 하필 난데….”

참고 있던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저 사이코패스 같은 놈의 눈에 띄었을까. 그냥 부모님이 고향에서 가게나 물려받으라고 할 때 알겠다고 할 걸…. 최악의 경우엔 놈에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자, 30 평생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한 적이 없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우리 가족 사정까지 다 알고 있던데, 설마 저 새끼가 가족들한테도 해코지를 한 건 아니겠지? 그 전에 내가 납치당했다는 걸 누군가 알고 있긴 할까? 회사에서 그러고 나왔는데 누군가 하나쯤은 의심해 주지 않을까? 시정 선배는… 정태는… 누군가는 나를 찾고 있을까?

문밖에선 여전히 놈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따금 들려오는 콧노래와 함께 보글거리는 냄비 소리와 통통거리는 도마 소리도 들려왔다.

시트에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이대로 누워서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해. 분명… 밖에선 나를 찾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묶인 팔로 바닥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울렸지만, 어서 저 미친놈한테서 벗어나야 했다. 알몸으로 벌레처럼 기었다. 수치스럽고 비참했지만 이렇게라도 나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발을 못 쓸 정도로 바짝 묶어 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상황을 보다가 놈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밖으로 뛰어나가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몰라.

덜컹-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꽉 조이는 감각에 뒷골이 서늘했다. 좆같네 진짜…! 왜 이걸 먼저 보지 못했을까! 발목의 구속구와 침대의 다리가 얇은 사슬로 묶여 있었다. 정말 얇아서 사슬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내 힘으로 이걸 뜯어내는 건 절대 무리였다.

“…젠장!”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묶인 발로 침대를 콱콱 찍어 내렸다. 침대 모서리에 찍힌 뒤꿈치가 아려 왔지만, 곧 그 아픔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눈앞이 핑 돌았다. 화가 나서인지 기력이 완전히 떨어져서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조차 원망스러웠다.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눈을 감고 헐떡이는 숨을 내쉬었다.

사슬을 끊을 순 없으니 다른 걸 끊어 내야 했다. 그렇다고 손목을 자를 순 없고…. 흐린 눈앞으로 구속구를 들어 올렸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죽. 그것도 몇 겹이나 겹쳐져 견고하게 만들어진 가죽이었다. 놈이 엄선한 이유가 있는 듯, 그냥 봐도 흔들어도 실밥 하나 뜯어질 생각 없이 짱짱했고, 피부가 닿는 쪽엔 역시나 아프지 않게 뽀송한 원단이 덧대어져 있었다. 시발, 이딴 배려가 다 무슨 상관인데! 

방을 둘러봤지만 애석하게도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그 흔한 가구나 물건 하나조차 없었다. 모든 게 놈의 계획대로… 이 방은 완벽하게 나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젠장.

일단 팔다리를 묶고 있는 가죽끈을 끊어 내는 것이 급했지만 애석하게도 방안엔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질 않았다.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인 듯, 이 방은 완벽히 나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젠장.

“제발, 제발 좀….”

급한 마음에 손톱으로 이음새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뭉툭한 손톱으로 백날 긁어 봤자지. 말도 안 돼. 이게 뭐냐고. 이번엔 이를 세워 끈을 물어뜯었다. 워낙 타이트하게 묶인 탓에 송곳니는 닿지도 않았고, 그나마 앞니도 틱- 틱-거리는 하찮은 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손톱보다는 낫겠지.

“악!”

잘 들어가는 각도를 찾다가, 끝부분이 이에 걸렸다 빠지는 반동으로 스스로 입을 힘껏 쳐올렸다. 으윽! 입술인지 잇몸인지가 지끈거리면서 피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여전히 밖에선 콧노래가 들려왔고, 이젠 문틈으로 고소한 냄새까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저 새끼는 저렇게 평화로운데, 나는…! 미간이 뜨거웠다. 눈을 뜨면 눈물이 터져 나갈 것 같았기에 그저 있는 힘껏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발, 울지 마. 이선유. 울지 말라고! 우는 건 밖에 나가서 해도 충분해…! 나가서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청승 떨지 마! 괜한 데 힘 빼지 말라고!

감은 두 눈의 안쪽이 유독 어둡게 느껴졌다. 양 볼이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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