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1 (12/46)

D-DAY -1

아직 잠에서 덜 깬 건 아닐까,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이게 뭐지?

[화내는 모습도 귀엽네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짧은 메시지엔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진이었지만 그 한 장은 날 경악시키기 충분했다.

사진 속에 나는 어두운 사무실 복도에 서서 까만 우산을 들고 있었다. 홀로 남아 야근을 했던 그날의 모습이었다.

매니저는… 내가 찾던 범인이 아니었다. 그저 창밖에서 얌전히 지켜보기만 한 변태일 뿐. 왜? 어째서? 매니저 말고 이상한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야?! 어젯밤, 안도하며 잠들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설픈 확신이 산산이 조각 나며 떨쳐 냈다 믿었던 고통을 다시 상반했다. 끈질기게도 이 지옥 같은 시간은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잘근잘근 물어뜯은 손톱이 어느새 살을 바싹 내보이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누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온 방을 서성였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매니저가 아니라면, 그럼 누가 진짜 범인이냐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 할 수 있는 행동은 뭐였을까. 일단 전화번호를 추적해 보려 했지만, 제대로 번호가 연결돼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사진뿐이다. 매니저가 아무리 철저했다 한들, 회사 건물 내엔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들어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튀는 머리가 회사를 돌아다니는데 눈에 안 띄었을 리가.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지? 이런 각도에서 나를 찍을 수 있는, 회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얼굴이….”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억지웃음을 지으며 평소대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물론 말 그대로 ‘노력’이었기에 정작 입에선 날카로운 말이 나갔지만. 무슨 말을 뱉었는지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이미 내 모든 신경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놈은 분명 회사 안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간에 나를 찍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범인이 호리한 몸매의 남자라는 것과 집안일에 능숙하다는 것…. 애꿎은 서류를 팔랑거리며 사무실을 둘러봤다. 여전히 많은 직원이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중에 범인이 있다. 꼭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끝이 보일 터였다.

겨우 며칠. 아니, 벌써 며칠이지. 그 며칠 동안 지칠 만큼 지쳐 버렸다. 사방의 공기가 따끔거렸고, 마치 진흙탕에 빠진 듯 무겁게 숨통을 조여 왔다. 평소엔 숨 쉬는 것처럼 쉬웠던 가식적인 웃음을 만드는 것조차 식은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힘에 겨웠다. 거짓이었지만 한번 끝을 봤었기에 이 반복이 더 끔찍하고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였다.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거니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조차 나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그 모습이 너무 싫었다. 시선이 두려웠다. 그래도 버텨야 해, 이선유. 만약 여기서 무너진다면… 그게 바로 놈이 원하는 걸 거야. 내가 힘들어할수록 그 변태 새끼는 기뻐할 거라고! 버텨. 그리고 진짜 놈을 잡아. 그땐 아무도 나한테 이러지 못할 거야. 

자꾸만 모니터 아래로 웅크려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놈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놈을 마주 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대리님.”

“……!”

갑작스런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진이었다. 내 소문을 퍼트린 바로 그 장본인 말이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수진도 원해서 온 건 아닌 듯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거래처에서 점심 이후에 방문하기로 하셨는데, 대리님하고 상담하고 싶으시다네요.”

“며칠이죠?”

“오늘인데요.”

“…네?”

말투 역시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일에, 그것도 몇 시간 전에 말하는 건 무슨 경우지? 어느 회산지, 누가 오는지,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에 대한 언질도 없었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통보된 스케줄이었다. 수진의 일처리 능력과 더불어 개인적인 감정까지 섞여 짜증이 확 올랐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하죠? 적어도 하루 전에 얘기하고 조정하는 게 방침 아니었나요? 준비도 없이 무슨 상담을 하라고.”

그러자 수진이 보란 듯 입술을 삐딱하게 올리며 반박했다.

“저는 계속 결재 올렸는데요? 대리님이 요즘 업무 시간을 다 못 채우셔서 확인 못 하신 거예요.”

아~ 그래. 요 며칠 반차 쓰고 조퇴한 내 탓이라 이거지? 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수진은 충분히 사적인 감정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제 친구인 효연과 관련된 악감정으로 인해, 나를 어떻게든 엿 먹이겠다는 노골적인 적대였다. 시발, 대단한 우정 나셨네. 그리고 내가 업무 시간을 못 채운 덴 너도 한몫했거든? 소문만 안 났어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을 거야.

“수진 씨, 입사한 지 얼마나 됐죠?”

“…갑자기 왜요?”

“일하는 거 보니까 인턴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 상사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없으면 주임님이나 다른 분한테라도 결재 받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만약 이 일로 회사에 손실이 생기면 책임질 수 있어요?”

쏘아붙이는 말에 수진이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쪽에서 꼭 대리님이랑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

“근데 제가 없었잖아요.”

“…….”

“물론 근래에 자리를 많이 비우긴 했지만, 이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고…. 전에는 잘 처리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며칠 전 서류를 뒤적이니 수진이 올렸다는 결재 파일이 존재하긴 했다. 정말 딱 하나. 3일 전 날짜가 찍혀 있었다. 하… 이거 하나 올려 두고 3일 동안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안 나왔다. 이제라도 내용을 훑었다.

음… 이 거래는 다른 팀장님이 따 온 건데, 왜 상담을 내가 해야 하는 거지? 아는 사람이라도 오나? 하지만 그렇다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 괜히 사전조사 없이 응대했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수진도 괘씸했고.

“저는 이거 못하니까, 담당 팀장님한테 전달하세요.”

“… 몇 시간 안 남았는데요?”

“그러니까 못 한다구요. 아무 내용도 모르는데 무슨 상담을 해요.”

수진의 얼굴이 낭패로 물들었다. 평소라면 부랴부랴 준비해서라도 내가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의지도, 의무도 없었다. 이제야 문제를 깨달았는지 초조한 듯 수진이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어떻게 떨어진 내용인지는 몰라도, 분명 수진의 이기심이 개입돼 이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엿은 너나 먹어라. 몇 시간 남지도 않은 상황에 이걸 팀장한테 넘기면 분명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뭐 해요?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 보세요.”

탁. 책상 끝에 서류를 던졌다. 한참이나 말없이 바닥을 노려보던 수진이 결국 신경질적으로 파일을 들고는 자리를 떴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듯 걸음걸이가 쾅쾅거리며 시끄러웠다.

수진이 사라지자마자 모니터 앞에 몸을 웅크렸다. 이선유 이 유치한 새끼…. 홧김에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아주 조금 통쾌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마냥 편치는 않았다. 시발… 애초에 그놈 잘못인데….

웅- 웅-

핸드폰이 울었다. 혹시나 했지만, 또 발신 번호가 없는 문자였다.

[상담… 안 하는 건가요? 이런. 일이 복잡해지겠네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놈은 지금도 날 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어딜까. 어디서 나를 훔쳐보고 있을까? 수진이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자가 온 걸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내 쪽을 바라본 시정과 눈이 마주쳤다. 시정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상했다. 왜 하필 지금 눈이 마주쳤을까. 혹시….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시정을 향해 다가갔다.

“선배.”

“응? 선배? 주임이 아니고?”

“선배 휴대폰 어디 있어요?”

“저기- 충전 중.”

시정의 손끝엔 사무실 구석에 있는 공용 충전기가 있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시정의 휴대폰은 그곳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핸드폰 없이 문자 정도야 보낼 수 있잖아. 게다가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고서야 본인의 폰으로 문자를 보냈을 리도 없다. 컴퓨터 좀 봐도 돼요? 응? 어, 봐. 업무라도 보는 줄 알았는지 시정이 순순히 자리를 내줬다.

“뭘 찾는 건데?”

“아뇨, 아니에요….”

홈페이지 기록은 물론 깔린 프로그램까지 다 확인했다. 수상한 점은 없었다. 혹시 다른 휴대폰이 있을까 책상 서랍과 가방까지 멋대로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시정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살짝 안도했지만, 아직 의심을 지울 순 없었다. 기록이야 지우면 되는 거잖아.

그때, 사무실로 정태가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또 웃는 거지? 뭐가 그렇게 즐거운데?

“전정태 씨.”

“네? 대리님.”

“휴대폰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왜, 못 볼 거라도 있어?”

“아,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정태가 떨떠름한 얼굴로 본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최신 기종임에도 휴대폰이 뜨끈뜨끈했다. 건네받자마자 메시지함을 빠르게 뒤졌다. 역시나 나에게 문자를 보낸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거야 지우면 없어지잖아? 미친 사람처럼 눈에 불을 켜고 갤러리까지 뒤졌다. 그의 갤러리 안엔 친구들이나 일에 관련된 사진밖에 없었다. 크흠…. 사진첩까지 뒤지자 불쾌한 듯 정태가 소리를 냈다.

여전히 의심은 풀리지 않았지만, 정태의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까놓고 물어볼까? 찔리면 조금이나마 티가 나지 않겠어? 그렇다고 ‘네, 제가 스토커입니다.’ 할 새끼도 없겠지만…. 

초조함에 무리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지켜보는 정태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겉으론 깨끗하기 그지없던 휴대폰을 정태에게 도로 넘겼다.

“대리님…. 오늘 이상하시네요.”

“뭐가 이상하죠?”

“…아닙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가서 일하세요.”

“네.”

억지 섞인 명령에 정태가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사무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야 참고 있던 신음을 내보냈다. 과한 예민함에 배까지 살살 아파지고 있었다.

놈이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의심하고 뒤지면서도 꼬투리 하나 잡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우스울까. 누구지? 어떻게 잡을 수 있지? 내가 이러는 동안에도 그 새끼는 나를 보고 있을 텐데…!

“이 대리님.”

“마, 만지지 마!”

소리 없이 뒤로 다가온 시정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나를 바라봤다. 그 가운데 가장 놀란 표정으로 서 있던 시정이 뻗고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인기척을 내지 않았을 리가 없지. 내가 정신이 없어 못 들었다는 건 알지만, 괜히 시정이 원망스러웠다.

“와, 왜 이렇게 예민해요? 혹시 그 날?”

시정이 재밌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영 반응이 없자 본인도 민망한지 혀를 찼다.

“아니면, 금연 때문에 그래?”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나름의 배려라고 애써 다른 이유를 붙이고 있지만, 그것조차 미덥지 않았다. 답지 않을 정도로 과한 배려….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시정을 바라보자, 괜히 시정의 주변에 몰려 있던 여직원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설마, 대리님 나 몰래 담배 피우는 거 아니죠?”

시정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흠칫. 나 역시 저번과 마찬가지로 몸을 피하니 시정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거야.

“왜 쫄고 그래. 귀엽게.”

시정이 웃자 날이 서 있던 여직원들도 그를 따라 꺄르륵거리며 웃었다. 덩달아 전염이라도 된 건지, 나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웃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리는 웃음소리 속에 누군지 모를 놈의 목소리도 들어 있었다.

저 사람 게이래.

남자 주제에 스토커가 있다니.

치정 싸움 아냐? 더럽게….

그리고

화내는 모습도 귀엽네요.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역류했다. 입을 틀어막았다. 괴롭게 꿈틀거리는 목구멍에 숨까지 막혀오고 있었다.

“우욱!”

당장이라도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화장실로 뛰었다. 위가 지끈거리며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팠기에 칸막이 안으로 뛰어들어 가 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우웨엑! 우웩!”

먹은 게 없으니 탁한 위액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나마도 너무 작은 양이라 쉼 없이 올라오는 구역질에 이러다 내장을 뱉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었다.

“야! 너 괜찮아?!”

급하게 뒤따라 들어온 시정이 칸막이 밖에서 나를 불렀다. 저리… 우욱!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울렁거리는 속에 변기를 붙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모든 걸 쏟아낸 뒤엔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변기에 기대 고개를 조금 돌렸다. 조명이 역광으로 비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정은 여전히 내 뒤에 서 있었다.

“나가….”

“선유야.”

“나가라고.”

모든 상황을 불신할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웃고 있었나? 보이질 않았으니 이것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시정이 범인이라면 지금 내 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즐겁다? 재밌다? 혹은 또 귀엽다고 하며 낄낄대고 있겠지. 변태같이….

“…알았어. 괜찮아지면 나와.”

시정이 밖으로 나가자 화장실 안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화장실에 정말 나 혼자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건 나의 기만이 분명했다. 놈은 이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참을 더 앉아 있다 벽을 붙잡고 겨우 칸막이 밖으로 나왔다. 다리가 어찌나 후들거리는지 정신을 놓으면 바로 넘어질 것 같았다. 손등으로 입을 훔치고 세면대 앞에 섰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나려는 건 아니었다. 화가 나서였다. 놈에게 휘둘리는 내가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입까지 헹구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깨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보며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 이선유. 이럴수록 그 새끼는 더 기뻐하고 있을 거라고. 암시를 걸듯 중얼거리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뺨에 흐르는 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 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모두가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곧 터질 폭탄이라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침부터 수진이랑 한바탕 하고, 시정한테 소리도 지르고, 거기에 구토까지 했으니 저들도 예민해질 만하지.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마주했다. 일하는 시늉만 내는 것뿐이었다. 정작 내 눈은 혹시나 범인을 발견할까 바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증거고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휴대폰. 또 문자가 올까, 내 집에 들어올까. 1분이 멀어 잠금화면을 껐다 켜는 걸 반복했다. 도중에 몇몇 사원들이 와서 말을 걸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네가 누군지 알고 친절하게 답을 해 준단 말이야.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수진이 대놓고 눈을 흘기며 지나갔다. 시계를 보자 점심이 다 돼 가고 있었다. 그 거래처를 맞이할 준비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업무를 먼저 끝낸 몇몇이 수진을 격려하며 이른 점심을 해결하러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벌써 식사 시간이구나. 빈속이었지만 여전히 공복보단 갈증이 더 먼저였다.

조용히 일어나 휴게실을 향했다. 12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라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쿠당-! 적막을 깨며 자판기에서 캔 음료가 떨어졌다. 아무도 없지만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꿀꺽,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이온 음료가 미지근했다. 자판기도 고장이 난 모양이다.

웅- 웅-

[빈속에 음료만 마시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자꾸 토하죠.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시발…!”

잔뜩 남은 음료를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투명한 음료가 바닥을 흠뻑 적시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디서 날 보고 있는 거지?! 급하게 복도로 뛰어나왔지만, 근처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우연하게도 가장 의심 중인 두 사람 역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정태는 심부름을 위해 다른 부서에 가 있었고, 시정은 오후 미팅을 위해 잠시 외출을 했다고 했다. 과연 모두 우연일까? 적절한 핑계를 대고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게 아니고?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연달아 문자가 온건 처음이었다. 거기에 내용도 없이 사진만 첨부된 문자라니. 인상을 구기며 문자를 확인했다.

시발, 또… 내 사진이었다. 매니저의 술집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그다지 멀지 않은 위치에서 찍은 것 같았다. 사진 속 내 입가엔 희미하게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매니저에게 각서를 받고 나오는 중인 듯, 손엔 꾸깃꾸깃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내가 범인을 잡았다며 안도하는 사이에도… 놈은 내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구나.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여전히 메시지는 없었지만, 한 장으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사진이 전송됐다. 

경찰과 오피스텔 앞에 서 있는 내 사진. 멍청하게 아무 성과 없이 경찰을 돌려보낼 때도 역시나, 놈은 내 곁에 있었다. 한심했다. 경찰도 나도! 이렇게 가까이 놈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효연을 만난 그날, 화장실 쪽에서 찍은 게 분명한 사진. 들뜬 얼굴로 레스토랑 안쪽에 앉아 있는 내가 있었다. 내가 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도 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 복도에서 효연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도대체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야!

웅- 웅-

[첨부파일 2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사진이었다. 술병이 굴러다니는 걸 보니 효연과 연락을 하고 잠든 후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씨발! 사진을 넘기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경악 그 자체였다. 속옷까지 홀딱 벗은 내 위로 놈이 사정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 새끼! 그럼 그날 내가 몽정이라 생각했던 게… 내 것이 아닌 놈의 것이었다는 말인가? 시발, 이선유! 이 멍청한…! 누가 집에 들어와서 저런 짓을 하는 와중에도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고?!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우욱!!”

사진을 보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놈이 정태가 준 반찬 위로 정액을 싸지르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새끼의… 그… 그 더러운 걸 먹었다니! 우우욱! 위장이 쉬지 않고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이젠 있지도 않은 그 음식을 밀어내려 애를 썼다. 우욱! 우욱! 멈추지 않는 구역질에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놈은 멈추지 않았다. 내게 더 보여 줄 게 있는 걸까? 나를 어디까지 떨어트릴 작정일까. 사진을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손은 계속해서 놈이 보낸 사진을 확인하려 했다.

내 가방의 안이 찍힌 사진이었다. 뒤에 배경을 보니 우리 사무실에서 찍은 게 분명했다. 무슨 의미로 찍은 사진일까? 꼼꼼하게 사진을 살피다 보니 안주머니에 터질 듯 담긴 사탕이 눈에 띄었다. 시정이 넣어 뒀다 생각한 사탕은 놈이 넣어 둔 것이었다. 과연 이 사탕은 멀쩡한 사탕이었을까? 집에서 대담하게 저런 짓까지 한 놈이 사탕에는 과연 아무 짓도 안 했다 장담할 수 있을까?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까만 우산을 쓰고 빗속에 서 있는 사진. 놈이 두고 간 우산인 줄도 모르고 기뻐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던 거야!!

웅- 웅-

[첨부파일 1장 - 발신 번호 표시제한]

낯선 정장이 내 집안에 서 있는 사진이었다. 이 옷은 시정의 옷도, 정태의 옷도 아니었다. 게다가 카메라 알람은 울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놈이 집안에…. 설마 그전에 찍은 사진?

웅- 웅-

[언제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는지, 무슨 짓까지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이, 이 개새끼….”

거친 소리가 나왔다. 궁금했다. 당연히 궁금했다. 이 소름 끼치는 새끼가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치가 떨리게 궁금했다!

웅- 웅-

[당신이랑 욕은 안 어울려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시발…! 나와! 나오라고! 어디 있는 거야!”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무실 안에 직원들이 모두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중에 놈이 있겠지, 분명 나를 더러운 눈으로 훔쳐보고 있겠지! 어디야, 어디냐고!!

웅- 웅-

[내가 보고 싶어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그래 이 개자식아! 당장 나오라고!”

웅- 웅-

[기뻐요. 당신이 날 원한다니…♥ - 발신 번호 표시제한]

작은 하트에 이렇게 역겨워 보긴 처음이었다. 비명을 지르듯 욕을 하며 주변에 있던 물건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키보드며 마우스가 산산조각으로 튀어 올랐다. 씨바알!! 큰 소란에 개인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 아니 이 대리! 지금 뭐 하는 건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부장이 반쯤 깨진 마우스를 걷어차며 내게 다가왔다. 어쩌면, 어쩌면 저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겠지. 놓을 수 없는 의심이 늙은 남자를 향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한 발 멀어지며 그를 경계하자 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누가 이 대리 좀 말려 보게!”

웅- 웅-

[기념할 만한 날이 될 거예요^^ 집에서 만나요. 기다릴 테니까 얼른 오세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놈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놈의 정체를 확인할 기회였다!

“대, 대리님.”

“잡을… 잡을 수 있어….”

하지만 혼자 가는 건 당연히 멍청한 짓이었다.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조급해도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도대체 누구의 도움을?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여기서 그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만약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잖아.

아무리 못 미더워도 그나마… 경찰밖엔 방법이 없었다. 놈이 경찰 중에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으니까. 이번엔 확실하게 현장을 덮쳐야 해. 그럼 놈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경찰도 더는 방관하지 않을 거라고!

“너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지금 갈 테니까!!”

놈에게 소리치며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직원들도 덩달아 뭐라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그게 들릴 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역시 사치에 가까웠다. 잘 가던 사람들을 멋대로 밀치며 비상구를 성큼성큼 뛰어내렸다. 반쯤 내려왔을 때 발목이 접질리기라도 한 건지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달렸다. 아픔보단 놈을 붙잡는 게 먼저였다.

회사에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경찰서가 있었다. 이번엔 아예 경찰이랑 같이 가자. 중간에 엇갈리는 일 없이, 도망칠 구멍도 없이 놈을 덮치는 거야! 이제 싫어. 스토킹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다 싫다고!

끼이익-!!

“어머!!”

“괜찮아요?!”

“뭐야 갑자기!”

사람들이 나 대신 비명을 질렀다. 무작정 경찰서가 있는 방향으로 무단횡단을 하려다 은색 세단에 치일 뻔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찔했다. 만약 차가 멈추질 않았다면…. 너무 급한 나머지 신호도 눈에 보이질 않았다.

큰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수십 쌍의 눈이 나를 향했다. 분명 전부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사무실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왜 모여 있어? 무슨 일이야? 누가 차도에 뛰어들었어. 미쳤나? 몰라,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배려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난… 난 미치지 않았어. 난 제정신이야. 멈추지 않는 목소리에 따끔거리는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손바닥 안에서 익숙한 잡음이 들려왔다. 저 사람이 게이래. 남자 주제에 스토커가 있대. 징그러워….

“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보지 마, 쳐다보지 마!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말라고! 난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괜찮으세요?!”

세단의 주인이 운전석을 열고 뛰쳐나왔다. 내 눈에 경계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침착하게 나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팔뚝을 붙잡은 손이 생각보다 억셌기에 화들짝 놀라며 남자를 밀어냈다. 그래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없어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데….”

“정말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을 것 같아요. 병원으로 같이 가시죠. 모셔다 드릴게요.”

“아뇨. 저, 저는 갈 곳이….”

“이봐요, 이봐요!”

괜한 참견이라 생각했다.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때마침 바뀐 보행 신호에 건너편을 향해 달렸다.

“잠깐만요!!”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 않아 남자에게 도로 잡히고 말았다. 남자가 내 손목을 틀어잡고 자신의 자가용 쪽으로 끌고 갔다. 어찌나 힘이 센지, 아무리 비틀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와주세요! 아무나 좀 도와주세요! 내 외침에 여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는 듯이…. 심지어 앞쪽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은-

“교통사고는 겉으로 보면 몰라. 같이 가서 검사받아요. 다행히 차주가 책임감 있는 분이네.”

라고 말했다. 시발, 내가 원치 않는다는데 왜 이래!

“놔, 놔줘요! 왜 이래요!”

“정 그러면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어째서… 내가 당신을 뭘 믿고!”

“네? 당연히 못 믿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다른 소리 나오는 거 원치 않아요. 어디 가시는진 몰라도 가면서 다쳤는지도 보고…. 정말 다친 곳이 없으면 그대로 가셔도 돼요. 그럼 되죠? 이대로 가시면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씨…. 그럼 연락처만 주세요. 나중에 문제 있으면 연락 드릴게요. 제가 정말 급해서….”

“음… 그건 좀….”

아니 시발 뭐 어쩌라고. 마음은 이미 집에 가 있는데, 상황이 자꾸 늘어지니 나 역시 조급함에 짜증이 났다.

“썅…. 문제 있어도 연락 안 할 테니까 그냥 가시라고!”

“못 가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뭐…?”

“이런 식으로 보험 사기 치시는 분들이 좀 많아야죠.”

보, 보험 사기?! 내가?!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저 사람 차가 오는 걸 보고 뛰어드는 것 같았어. 치이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헐떡여? 벌써 연기하는 거 아니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정말 사기꾼이라도 된 것처럼…. 왜 또 날 그렇게 보는 거야. 나는 진짜 아닌데, 나는 그냥…!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해요. 제가 의심이 많은 타입이라.”

남자가 이상해진 분위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의심이라면 내가 더 많을 텐데, 어째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는 걸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들도 나도 남자의 말에 휩쓸린 지 오래였다. 날카롭게 노려보는 시선들에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제발… 날 쳐다보지 마.

“타시죠…. 가면서 몸 상태도 보고, 일단 타고 얘기하죠.”

남자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숨고 싶던 찰나에 열린 곳이었다. 타? 말아? 주저했지만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시작하자 도망치듯 차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문을 닫아 주자 아주 조금의 소음만 들려왔다. 오히려 내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남자가 앞쪽으로 돌아오는 걸 유리 너머로 보며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차라리 누구보다 이 사람이 더 믿음직할지도. 면식도 없는 생판 남인 데다가, 내 소문도 무엇도 전혀 모르는 타인이잖아.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아주 잠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문을 닫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창 너머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하며 남자가 물었다.

“어디로 가 드리면 될까요?”

“…….”

순순히 경찰서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놈을 잡을 기회는 지금 밖에 없는데…. 이 남자라면 도움을 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겨, 경찰서로 가 주세요….”

경찰서라는 말에 남자는 조금 묘한 표정을 했다.

“혹시… 조금 전 일 때문인가요?”

“아뇨! 아뇨 정말 아니에요. 그냥 제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라….”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는 말에 남자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탔으니 신호만 걸리지 않는다면 5분 내로 도착할 터였다. 초조함과 흥분이 뒤엉켜 머리가 복잡했다. 몸 역시 마찬가지인 듯 식은땀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헉헉거리며 손바닥을 바지에 계속 문지르니, 남자가 불안한지 운전을 하면서 내 쪽을 힐끔거렸다.

“어디 안 좋으시면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아뇨, 아닙니다…. 괜찮아요.”

마침 빨간불이 켜지며 차가 멈춰섰다. 그러자 그 틈을 타 남자가 자신의 가방에서 음료를 꺼내 내게 건넸다. 헐떡이는 게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힐끔 바라보니 남자의 가방엔 LN의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LN이면… 얼마 전부터 파트너 계약 얘기가 있던 회사 같은데…. 근래 제대로 된 업무를 못 봤기에 고작 며칠 전 일조차 확신이 없었다.

“이것 좀 드세요.”

산 지 얼마 안 된 듯 음료는 아주 차가웠다. 계속된 구토에 갈증이 났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음료를 받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래가 낀 듯 텁텁했던 목구멍이 그나마 상쾌해진 듯했다. 순식간에 비어 버린 병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정말 아프신 데 없죠? 뻐근하다거나… 저리다거나….”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초록 불에 차가 다시 움직이며 경찰서 방향으로 좌회전을 했다. 3블록만 더 가면 경찰서가 나올 터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질문도 잦아졌다. 착한 사람인지 걱정이 많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네. 그냥 조용히 갔으면 좋겠는데…. 그때, 내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남자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남자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앞에서 사고가 생겨서요…. 네, 건물 앞에 있던 그 차가 저 맞아요. 네. 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말고 다른 날 찾아 봬도 괜찮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차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최 팀장님.”

아무래도 근처에 일을 보러 왔다가 나 때문에 미뤄진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그냥 가라니까…. 근데 묘하게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도 못 보시고….”

“아니에요. 급한 일도 아닌걸요.”

“그런데 혹시 가려던 곳이… J 디자인…?”

“와, 어떻게 아셨지? 혹시 절 아세요?”

“아, 아뇨. 모르는데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돌렸다. 최 팀장이 그 최 팀장이었구나.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더라. 점심 때 미팅이 잡혀 있던 거래처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수진이 꼬아 놨던 바로 그 계약 말이다. 나를 콕 집어서 상담 요청을 했는데 거절을 했으니…, 내가 이 대리라는 걸 걸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알고 상담 신청을 했지? 말하는 걸 보면 나를 모르는 것 같은데.

“정말 어디 아프신 데 없죠?”

“아, 네. 진짜 괜찮아요.”

마지막 신호에 걸린 사이 남자가 또 물었다. 아 이 사람 정말 피곤하네. 나도 모르게 약간 짜증 섞인 대답이 튀어 나갔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건데, 이상하게 점점 몸이 무거워졌다. 괜찮은 게 아니었나? 언젠가 들었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늦게 나타난다고. 늦었다고 할 만한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어지러운 시야에 조금 겁이 났다. 

“어… 어….”

“왜 그래요?”

“몸이….”

이젠 손을 가누기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끝없이 무거워지는 몸에 마치 차 시트가 나를 잡아먹는 것 같았다. 이대로 차를 뚫고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가위에 눌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고, 기분이 나빴다. 눈꺼풀 역시 점점 무거워졌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당장 그 자식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왜 그래요? 괜찮아요?”

비정상적인 내 상태에 놀란 듯, 남자가 급하게 갓길로 차를 몰았다. 안 돼…! 경찰서가 코앞…인데…. 얼른 가야… 하는…데….

남자가 내 눈앞에 손을 흔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의 끈을 놓쳐 버렸다.

바스락-

비닐봉지가 구겨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큰 소리도 아니고 아련할 정도로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귀에 꽂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의식이 돌아올수록 전신이 지끈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뻐근함에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린 뒤에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뜬 곳은 낯선 환경이었다. 머리를 움직이자 부드러운 시트가 피부를 간지럽혔다. 허전한 느낌에 고개를 숙이자 내가 속옷 한 장 걸치지 못한 알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손발이 앞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는 상태로….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게,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당황스러움에 사방을 훑었다. 

작은 방안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 그 위에 누워 있는 나. 정면과 좌측에 문이 하나씩 있었고, 우측에 있는 창문은…. 그렇게 큰 창도 아니었지만, 쓸모는 없었다. 그마저 까만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뭐야? 뭐야 시발.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정면 쪽일까. 문밖에선 여전히 부스럭거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움직이려고 애를 쓸수록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이대로 누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끙끙대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놀라서인지, 아파서인지, 그도 아님 다른 이유에서인지. 심장과 같은 박자로 머리가 둥둥 울렸다. 씨발, 이게 무슨 상황이야.

겨우 반쯤 상체를 일으켰을 때, 문뜩 바깥의 소리가 멈췄다. 그 침묵에 덜컥 겁이 났다. 가벼운 발소리가 방을 향해 다가오고… 벌컥-! 한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깨어난 나를 보고 행복한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깨어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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