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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2 (11/46)

D-DAY -2

경찰은 집을 비우라 말했지만, 집이건 어디건 그놈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찌해서 지인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됐다 치자. 근데 만약 그 사람이 범인이라면? 내 발로 직접 놈의 구역에 들어간 거라면?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기에 함부로 손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모텔이나 호텔에 가자니…. 여기도 제집 드나들 듯 막 다니는데 거긴 더 쉽지 않겠나 싶었다.

신경과민에 걸린 것마냥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밖을 지나는 사람 모두가 의심스러웠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의미부여가 돼서 행동도 소극적으로 변해 갔다. 전부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그 많은 시선 속에서도 내가 혼자라는 외로움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범인이 원한 그림인 걸까? 이미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말렸다는 느낌에 짜증까지 났다.

의심은 불신으로, 불신은 고립으로 변했다. 일단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긴 했지만, 언제 그놈이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어느새 습관처럼 손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물건들을 들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바로 위염으로 이어졌다.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로 속이 쓰렸고, 억지로라도 뭘 먹으면 속에서 받질 못해 바로 게워 내기 일쑤였다. 구역질이 올라와 화장실에 달려갈 때마다 거울 속에 있는 내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게 스포츠 드링크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일이 제대로 잡힐 리가 없었다. 결국은 내 얼굴을 본 부장님이 자기 손으로 앰뷸런스를 부르기 전에 조퇴하라 으름장을 놓으셨다. 어쩌면 그냥 내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부정적인 사고가 흐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집이든 회사든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부장님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가 없지. 왠지 경직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쫓겨나듯 밖으로 나왔다.

터덜터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중, 오늘따라 쨍하니 내리쬐는 햇볕에 현기증이 도질 것 같았다. 손에 든 캔 음료는 벌써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목말라…. 이상하게 음료수를 이렇게 많이 마시고 있는데도 갈증이 났다.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진짜 병원이라도 가 볼까. 가서 뭐라도 맞으면….

띠링- 띠링-

알람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손이 떨려 왔다. 그놈이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화면을 키자, 역시나 놈이 서 있었다. 이 미친놈은 경찰이 왔다 간 게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제집인 듯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바꾼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 이번에도 역시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놈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더운 날에 오한이 든 사람처럼 덜덜 떨자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마저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회사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은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내 귓가엔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남자인데 스토커가-. 게이일지도 몰라. 지금 집 안에 스토커가 와 있대. 치정 싸움 아냐?

귀가,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마!!

저 멀리 택시가 오는 게 보였다. 자꾸만 날 괴롭히는 목소리에서 도망치듯 도로에 뛰어들었다. 끼익! 갑자기 뛰어든 바람에 놀란 듯 택시가 급정거하며 창문을 내렸다.

“아니, 그렇게 뛰어들면 위험하…”

“oo오피스텔로 가 주세요! 빨리!”

기사가 뭐라고 하는지는 관심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으니까. 이번엔 꼭 너를 잡고 말 거야. 추잡하고 더러운 새끼!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다 네 짓이라고!

빠드득- 빠드득- 초조함에 이가 갈렸다. 택시 기사가 연신 불만스럽게 뒷자석을 훔쳐봤지만, 연관되지 않는 게 좋겠다 판단했는지 다행히 말은 걸지 않았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놈은 목격자가 없다는 걸 비꼬듯 어제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과 그것보다 더 빳빳해 보이는 종이봉투. 거기에 오늘은 알 수 없는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뭐지? 내용을 궁금해하는 순간, 놈이 그 안에서 반찬 통으로 보이는 것들을 꺼냈다. 일부를 냉장고에 집어넣더니, 남은 짐은 식탁 위에 올려 뒀다. 알 수 없는 물건에 불쾌감이 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행동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걸레를 가지고 나오더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걸레질뿐만 아니라 쓰레기를 정리하고, 내가 널어 둔 빨래를 걷어 개기까지 했다. 저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탁탁 털어 능숙하게 접는 모습이 집안일에 능통한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제집인 양 수건이며 옷을 정확한 위치에 정리하는데, 어이없는 걸 넘어서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나를 지켜봤다는 걸까….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그놈이 내 집에 있다. 경찰에게 신고하려 했지만, 영상을 끌 수가 없었다. 놈이 내 침대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불을 털고 각을 잡고, 베개까지 정리를… 하나 했더니 갑자기 영상이 멈췄다. 오류라도 난 건가? 아니야. 시간이 움직이는 걸 보니 영상이 멈춘 게 아니었다. 

베개를 들고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놈이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양손으로 베개를 쥐고는 제 얼굴에 가져가 문질렀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얼굴에 쓰고 있던 종이봉투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아예 봉투를 코까지 들어 올렸다. 언뜻 보이는 얼굴에 황급히 화면을 가까이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리는 통에 제대로 보질 못했다. 익숙한 듯 낯선 마른 턱선이 내가 본 전부였다. 아는 구석이 있나 생각을 곱씹는 사이, 까만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설마 내 베개… 냄새를 맡는 건 아니지? 시발. 소름 끼치게!

“기, 기사님! 더 빨리 가 주세요!”

변태처럼 몸까지 떨고 있었다. 쓰읍- 쓰읍-.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숨소리가 귓가를 아른거렸다. 섬뜩한 환청에 미친 듯이 귀를 문질렀다. 어느새 놈의 사타구니가 터질 듯 부풀어 있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기사를 재촉했음에도 불구하고 5분이 지난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범인은 떠난 후였지만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혹시라도 아직 근처에서 꾸물거리고 있진 않을까 싶어서였다. 고작 몇 분 차이였건만, 3층 복도는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다행인 건 이번엔 전과 같은 역겨운 짓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놈은 발기된 상태로 베개에 부비적거리다, 내가 도착하기 2분쯤 직전에 아쉬운 듯 일어났다. 카메라를 향해 보란 듯이 손까지 흔들고 말이다. 나를 약 올리려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하필 내가 조퇴하는 시간에 맞춰 이런 짓을 하겠어? 아무리 애를 써도 넌 날 못 잡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 뻔뻔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경찰에 연락하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와도 도움이 안 될 게 뻔했으니까. 비웃지나 않으면 감사하지. 화가 나는 건 이렇게 대놓고 들락거리는데 주변에 목격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왜 알 수가 없는 걸까! 나를 보는 시선의 반이라도 놈에게 가 버리면 좋을 텐데!

조심스레 현관을 열었다. 나가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불안 때문이었다. 손바닥 가득한 식은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은 뒤 숨을 고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깔끔했다. 며칠간 내가 신경 쓰지 못한 게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년간 내가 먹고 자던 곳인데, 내 집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선뜻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아 고개만 빼꼼 내밀어 보니, 식탁 위엔 메모가 프린트된 A4 용지 한 장과 작은 종이봉투가 올라와 있었다. 주저하다 그냥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위장약. 죽 먹고 30분 후에 먹을 것.

간략한 내용이었다. 화살표가 있는 종이봉투를 열자 그 안엔 2종류의 약이 들어 있었다. 자세히 볼 생각도 없이 봉투째로 구겨 비어 있는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텅 빈 플라스틱 통이 요란하게 울렸다. 

놈이 냉장고에 무언가를 넣었던 게 기억났다. 냉장고를 벌컥 여니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죽이 있었다. 가정에서 쓰는 용기인 거로 봐서는 직접 만든 듯했다. 소름 끼쳐. 여기 뭘 넣었을 줄 알고 내가 먹는단 말이야. 뚜껑을 열고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은 죽을 싱크대에 전부 쏟아 부어 버렸다.

어쩌지? 이제 어쩌면 좋지?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으니 머릿속이 빠르게 백지화됐다. 경찰도 도움이 안 되고, 다음엔 놈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혼자는 버거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시정에게 전화를 해 볼까? 아냐, 그랬다가 시정이 범인이라면 어쩔 건데.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시정도,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럼 난 이제 누굴 믿어야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족이었지만, 가족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놈에게 가족을 노출시키는 것도, 가족이 내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 와중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이 신경 쓰였다. 저 창문을 통해 그놈이 날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이 의심받아 마땅했다. 신경질적으로 걸어가 세게 창문을 닫았다. 고리를 걸어 잠그고 커튼까지 치려는데, 문득 가로등 아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장발의 예수 머리…. 순간적으로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쳤다.

“이봐!!”

창문을 열고 소리치자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역시 매니저였다! 어두웠지만 분명 눈이 마주친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매니저가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찔리는 게 있으니 도망을 치겠지! 지금이 아니면 잡을 수 없다고, 이 순간이 기회라고 느껴졌다. 아직 식탁 위에 있던 프린트를 구겨 쥐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왔다. 문단속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바꾸고 문을 잠가도 저런 새끼가 드나드는 판에 뭐가 중요하겠어!

매니저는 이미 한참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거기 서!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뒤를 쫓았다. 하지만 벌써 골목을 벗어난 남자는 택시에 오른 뒤였다.

“놓칠 줄 알고…!”

그 뒤를 따라 다른 택시를 붙잡아 탔다. 문이 닫히기도 전 매니저가 탄 택시를 지목하며 따라가 달라 말하자, 기사님은 무슨 일이냐고 어리둥절하면서도 빠르게 그 차를 따라잡았다.

우습게도 매니저가 도망친 곳은 그의 술집이었다.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너무도 익숙한 길이었기에 놓칠 수 없었다. 택시에서 뛰어내린 매니저가 허겁지겁 달려 존재감이 희미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눈으로 뒤쫓으며 잘 포장된 시멘트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딸랑-!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어쩔 줄 모르며, 매장 한가운데 서 있던 매니저가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시발, 당신 변태야?! 내가 관심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을…!”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가 무릎을 꿇고 내 앞으로 기어 왔다. 그가 자랑하던 장발은 보기 흉할 정도로 얼굴에 엉겨 붙어 있었다. 매니저는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더니, 이내 덜덜 떨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소름 끼치는 손길에 걷어차듯 매니저의 손을 뿌리쳤다. 날 올려다보는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놔! 여태 내가 헛짓하는 거 보면서 재미 좀 있었겠어요? 어?!”

“미안해요, 저는 선유 씨가 너무 좋아서! 그냥 매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시발,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미안해요! 선유 씨!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하다 소리치는 매니저의 얼굴에 여태 꽉 쥐고 있어 구겨진 A4 용지를 집어던졌다. 매니저는 제 얼굴을 때린 종이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 자기가 만든 거니까! 

“당신은 이제 끝이야.”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선유 씨가 자꾸 날 안 봐 주니까, 근데 너무 좋아서… 그래서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서,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횡설수설. 그는 벌벌 떨며 두 손으로 빌었다.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는데…! 미친 짓은 이제 끝났어요! 이거 범죄인 거 알죠? 빼도 박도 못하게 현행범으로 잡았으니까….”

“선유 씨!! 선유 씨!! 다신 안 그럴게요, 정말 다신 안 그럴게요!”

“닥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스토킹에 무단침입에 성희롱까지! 게다가 어떻게 그딴 소문을 퍼트릴 수가 있냐고! 당신이 한 짓 때문에 내가 어떤 취급을 받은 줄 알아?! 경찰이 그렇게 말하던 확실한 증거였다. 며칠간 내가 당했던 걸 생각하면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도 모자랐다. 하지만 애써 같은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참았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 매니저로부터 한 발 물러나며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경찰이 나설 때였다.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매니저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11-까지 번호를 눌렀는데, 매니저가 벌떡 일어나며 빠른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채 갔다. 솔직하게 말해서, 말도 안 되는 힘으로 날 밀어붙이는 매니저가 순간적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폭행이라도 하려는 건가, 긴장한 순간 매니저는 내 휴대폰을 손에 쥐고 내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이 된 몰골로 울먹거리는 매니저는 내 상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보였다.

“용서해 주세요! 선유 씨, 제발요! 다신 안 그럴게요. 신고만은, 제발 신고는…. 이제 만나 달라고도 안 할게요. 절대로 선유 씨 눈에 안 띄고 살게요! 약속할 수 있어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매니저는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엉엉 울면서 다시 무릎을 꿇고 비는데, 어쩐지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거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여태 당한 건 어떻게 보상할 건데. 회사랑 동네에 퍼진 소문은 어쩔 건데?!

“뭐든, 뭐든! 하라는 대로 할게요. 맹세할 수 있어요. 뭘 할까요? 벗으라면 벗고,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게요! 제발 선유 씨. 나 이 가게 하나로 살고 있어요. 신고받으면 더 이상 영업 못 해요…. 나만 보고 있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해요. 제발 한 번만 용서를…!”

네 어머니를 나보고 어쩌라고! 시킨 것도 아니건만 잔뜩 겁에 질린 매니저가 훌렁훌렁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속옷까지 홀딱 벗은 남자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빌고 또 빌었다. 그 추한 꼴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잡으면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망가진 남자를 보니 기분만 더러울 뿐이었다. 카메라를 통해 봐 왔던 남자와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비굴하고 추잡스러웠다.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절대 이래선 안 됐다. 더구나 마음이 있는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겨우 내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까지 할 순 없는 거잖아. 나한텐 그런 짓을 해 놓고 용서를 구하다니…. 여태 내가 당한 시선과 비아냥이 억울하기만 했다. 저런 인간한테 내가…! 하지만 머리까지 바닥에 붙이고 있는 매니저를 보자 연신 한숨만 터져 나왔다.

각서를 받아 냈다. 무슨 이유건 다시는 내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하지만 필요에 따라 내가 원한다면 내가 겪은 상황에 대해 해명하겠다는 내용도 추가했다. 서로의 지장을 찍고 그것도 모자라 영상까지 찍었다. 만약 각서의 내용을 어길 시, 신고는 물론이고, 1분 30초 동안 알몸으로 서서 각서를 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는 네 어머니한테도 보낼 거고. 

매니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약속했다. 평생 지킬게요. 평생 지킬 수 있어요. 여태 저 말에 몇 번이나 속았기 때문에 별로 신용은 가지 않았다. 한편으론 어기길 바라는 못된 마음도 있었다. 그땐 정말 경찰서에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 통곡하는 매니저를 내버려 두고 가게를 나섰다. 며칠이 꼭 몇 년처럼 느껴졌다. 돌이키면 정말로 고작 며칠일 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잔뜩 지쳐서 녹초가 돼 버렸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스토커를 잡았다는 큰 안도감에는 비할 게 아니었다. 뒤늦게 여태 주변 사람들을 의심했던 일이 미안해졌다. 처음부터 범인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시정이나 정태가… 그 외 사람들이 이럴 리가 없었는데. 내가 너무 예민했었지.

여전히 회사와 동네에서의 입지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겠지.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진 못할 테지만, 지금만큼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해소됐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끝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면 매니저를 데려다 놓고 해명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젠 풀어 가는 것만 신경 쓰면 됐다.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한동안 잊고 있던 수마가 몰려왔다. 며칠간 못 잤던 잠이 오늘에서야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몸도 눈꺼풀도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겨우 초저녁이긴 했지만, 지금부터 내일 출근 전까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보다 달콤한 숙면이 있을까. 침대에 눕자마자 눈이 솔솔 감겨 왔다. 물론 매니저가 부비적거렸던 찝찝한 베개는 미련 없이 버린 뒤였다. 내일부턴 스토커 따위는 없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

웅- 

메시지 1건.

[화내는 모습도 귀엽네요. - 발신 번호 표시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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