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3 (10/46)

D-DAY -3

폭행이나 도난이 없으니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확증이 없으니 제대로 된 수사는 불가능하다. 남자에게는 스토커가 없을 것이다. 남자가 꼬이는 남자는 전부 게이일 것이다….

경찰의 방관과 사회의 편견. 어느 쪽이 더 큰 해악일까? 

뭘 고민해. 둘 다 문제지. 고작 며칠 사이에 난 성차별과 성 소수자들의 괴로움을 일부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내 의지가 누군가의 타의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비난과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화가 나고… 그리고 무서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좋은 방도가 있을까 인터넷을 뒤졌지만 남자답지 못하네, 어쩌고 하는 개소리만 가득했다. 남자다운 게 뭔데 시발! 네 집에 스토커가 들락거린다고 생각을 해 봐! 안 무섭고 배기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데 범인은 이미 내 집까지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가장 편해야 할 집이 더는 편하지 않았다. 목적이 뭘까. 다음엔 무슨 짓을 할까. 이러다 정말 칼이라도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거듭할수록 생생해지는 최악의 상황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식사도 거른 채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누가 범인일까.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매니저였다. 심증만큼은 매니저가 확실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화가 나서 그랬을지도 몰라. 전화를 해 볼까, 몇 번이고 매니저의 가게 번호를 썼다 지웠다. 하지만 통화는 하지 못했다. 네가 범인이지? 라고 물었을 때 긍정할 새끼도 없을뿐더러, 괜히 자극했다가 더 크게 당하는 건 아닐까, 겁이 나서였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건 효연과 관계된 의문의 남자였다. 자신의 입으로 남자 경험이 많다고 했었고,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물론 민석이 말하기론 효연의 남자관계가 복잡하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민석의 와이프와 계속 연락을 하는 걸 보면, 문제가 있다기보단 그냥 내가 싫은 것 같았지만. 하지만 이 범인에 대해서도 확신은 없었다. 효연과 나를 갈라놓는 게 목적이라면 이미 달성했잖아. 집까지 찾아올 이유가 뭐냔 말이야.

이 외엔 아무래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삼자가 이럴 이유가 없잖아. 지금으로선 심증이 가장 유력한 증거였다.

“휴대폰에 어플만 다운받으시면 언제든 실시간으로 카메라를 확인하실 수 있고요, 문의하셨던 녹화도 일주일은 자동으로 되니까요. 필요하시면 기간 안에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TV에서 한참 광고하던 카메라가 달린 전화기였다. 보통은 집을 비울 때 애견이나 어린아이들을 보기 위한 용도로 설치하는데,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이 모델을 설치하니 기사가 의아해했다. 강아지를 키울 예정이에요. 대충 변명을 둘러대며 카메라가 연결된 어플을 실행시켰다. 곧바로 전화기를 설치 중인 기사님의 얼굴이 보였다.

“잘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필요한 건 물증뿐. 이걸 설치하기 위해 아껴 뒀던 반차까지 사용했다. 이미 2번이나 집에 들어온 놈이었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이번엔 확실한 증거를 남겨야만 했다. 그럼 경찰도 제대로 된 수사를 해 주겠지. 현관과 침대, 주방이 한번에 보이는 각도로 전화기를 움직였다. 원룸의 장점은 카메라 한 대로 집안이 다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 시발. 어디 한번 또 들어와 보시지.

점심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늦은 출근을 했다. 평소와 같은 인사는 생략했다. 한다 한들 제대로 된 인사가 돌아오긴 할까. 여전히 모두가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하루 만에 사람들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마치 처음 보는 사이처럼…. 그런데 선배는 어디에 있는 거지? 전체 스케줄 표를 보니 시정은 이미 외근을 나간 시간이었다. 상담을 받고 싶었는데…. 같은 곳에 내 편이 하나 없다는 게 그렇게 외롭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애써 수군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미뤄 뒀던 업무의 처리를 시작했다. 이른 퇴근 그리고 반차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로 돌아와 있었다.

“정태 씨 어디 갔죠?”

“김 팀장님이랑 같이 외근 나갔는데요.”

정태가 올려 둔 보고서에 오류가 있었다. 수정 때문에 정태의 위치를 물은 것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평소보다 싸늘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을 거는 것도 기분이 나쁜가? 그 웃음에 앞에 서 있던 직원이 대놓고 미간을 좁히며 돌아섰다.

속이 쓰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네. 하지만 입맛이 없으니 배가 고프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러다 몸이 망가질지도 몰라. 그 전에 정신이 먼저 망가질 것 같지만…. 흐려진 실소를 거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주변에 자리한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마치 내가 소리라도 지른 듯한 반응이었다. 뭘 보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하지만 반박은커녕 점점 쌓여 가는 시선에 어깨가 안으로 굽으며 위축될 뿐이었다. 내겐 그럴 만한 배짱도, 용기도 없었으니까.

전신이 따끔거렸다. 모든 시선이 한껏 뾰족해져 나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의 관심거리였지? 동물원의 원숭이로 사는 게 여기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유 없이 부정적인 시선을 뒤집어쓰진 않을 테니까. 상처를 문지르듯 팔을 매만졌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꼭 살이 벌어진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책상 위엔 시정이 마구잡이로 두고 갔던 사탕이 놓여 있었다. 아 담배. 잠시 잊고 있던 담배가 간절했다. 시발. 금연이고 뭐고 이제 모르겠다. 시정이 없는 틈을 타 서랍 안쪽 깊숙하게 숨겨 뒀던 새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흡연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흡연실엔 딱 한 사람이 있었다. 그마저도 내가 들어서자 눈치를 보다 담배를 던지고 나가 버렸지만. 다른 부서 사람이었지만 소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아직도 회사에 내 얘길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 아무도 없는 흡연실 창턱에 걸터앉았다. 

부스럭 비닐을 벗겨 내니 새하얀 담배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중 하나를 빼내 입에 물었다. 싸구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숨 가득 들이키자 붉은 불씨가 내 속처럼 타들어 갔다. 

오랜만에 본 담배 맛은…. 윽! 최악이야! 금연한 건 고작 며칠이었는데 갑자기 니코틴이 들어오자 미간이 찡- 하니 아렸다. 담배가 간절해서 이곳에 왔건만. 오히려 속이 더 더부룩해졌다. 손가락 사이에 꽂혀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바라봤다. 버리려니 아깝고 더 피우려니 영 마음이 가질 않았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하며 매달린 담뱃재를 털어 내고 있는데,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띠링-

처음 듣는 수신음에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며 휴대폰을 꺼냈다. 까만 화면에 [Security Camera -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라는 글씨가 떠 있었다.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고 설치한 전화기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제 역을 해냈다는 소리다. 알람이 떴다는 건 놈이 내 집에 침입했다는 경고. 점점 빠르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떨리는 손으로 어플을 실행시켰다.

“시발, 너 잘 걸렸다.”

누군가가 주방 쪽에 있었다. 화면 속에서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 까만 정장을 빼입은 남자였다. 내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전신이 쭈뼛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더 소름 끼치는 건 범인의 모습이었다. 구멍 뚫린 종이봉투를 뒤집어쓴 얼굴….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설마, 설마 하는 사이 정확하게 카메라 앞으로 걸어온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자는 카메라의 존재와 더불어, 내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목덜미가 싸늘한 느낌에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흡연실 문을 열고 복도를 둘러봤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창밖을 아무리 살펴도 고층빌딩들만 빽빽할 뿐.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마구잡이로 살피고 있는데 손에 든 휴대폰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목소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소리였다. 왠지 소름 돋는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덜덜 떨며 들어 올린 휴대폰 안에서 남자는… 자위를 하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장 사이로 튀어나온 검붉은 성기가 보란 듯 격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씨발! 저 변태 새끼가!”

심지어 남자의 성기를 감싸고 있는 것은 내 속옷이었다. 정체도 모를 놈이 내 집에 함부로 들락거리는 것에, 게다가 내 속옷이 다른 남자의 딸감이 되고 있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소름 끼쳤고 화가 났다. 그리고 무서웠다. 저 미친놈은 왜 하필 우리 집에 들어와서 저러고 있는 걸까!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화면을 꺼 버리고 아까보다 훨씬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112을 눌렀다.

-네. 112입니다.

“여, 여보세요. 거기 경찰….”

신고하려는 순간 흡연실로 타 부서 직원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덩달아 당황한 남자가 머뭇거리다 다시 밖으로 나가 버린다. 설마 내 말을 들었나? 여기에 경찰에 대한 소문까지 난다면…. 그땐 정말 이 회사에 계속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 걸겠습니다.”

방금 나간 남자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 주제에 스토커래! 머릿속이 웅웅 거리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야 해. 회사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어 쿵쾅거리며 층계를 뛰어내렸다. 스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발, 다 꺼져! 중간에 발목이 삐어 넘어질 뻔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계속 달렸다. 헉헉거리며 1층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와 택시를 잡았다.

“oo오피스텔로 가 주세요.”

업무 시간이라거나, 무단으로 밖에 나왔다는 그런 문제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저놈을 잡아야 했다. 다시 112를 누르고 끊어 버린 신고 전화를 이었다. 집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 있어요! 그 말에 기사가 백미러로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어쨌든 재신고인 만큼 빠르게 출동하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더해 가는 초조함에 식은땀이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띠링- 띠링-. 또 알람이 울렸다. 이제 집까지는 5분도 남지 않았는데. 조급하게 어플을 켰다, 그러자…. 무슨…! 남자가 카메라를 향해 더러운 정액으로 푹 젖은 내 속옷을 보란 듯이 펼치고 있었다. 우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자 기사가 불안한 눈으로 곁눈질을 했다. 속이 안 좋으시면 차를 좀 세울까요? 아, 아뇨! 그냥 가 주세요! 대답하는 사이 남자는 그 속옷을 소중하게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는 볼 일이 없는 듯 현관으로 향했다.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나가는 걸까. 정체 모를 남자는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현관을 닫기 전 손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기사님, 빨리 가 주세요. 빨리요…!”

내 불안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와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남자는 흔적도 없이 떠난 뒤였다.

“거… 별 이상한 변태가 다 있네.”

경찰은 내가 증거라며 보여 준 영상을 끝까지 돌려봤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처음으로 돌려 다른 동료에게 넘겼다.

“영상은 이게 답니까?”

“네…. 오늘 아침에 설치했는데….”

“더 없는 거죠?”

“여기서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날카로운 반박에 경찰은 어색하게 콧등을 긁적였다.

“아… 일단은 저 파일은 저희 쪽에서 다운받아 가겠습니다.”

“일단은이라뇨? 그럼 저 새끼는요.”

“놀라신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집을 다 둘러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잡기는 힘들어요. 얼굴이 나온 것도 아니고…. 이러고 들어온 걸 보면 계획적인 것 같네요.”

“그건 저도 다 알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못 잡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뭐….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뭐가 있어야 노력이나 해 볼 텐데, 여기 그 사람 정액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음모가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 주민분들 탐문해 봐도 영상에 나온 차림은 본 적이 없다고들 하니 저희도 막막합니다. 사실, 저희가 이 영상만 보고 어떻게 범인을 잡습니까. 대한민국 남자들 거시기 모양을 전부 대조해 볼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황당하게 들리는 변명에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경찰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게다가… 선생님한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그럼 제가 강간이나 살해를 당해야만 제대로 수사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뭘 또 흥분하고 그러세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선생님께는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란 소립니다. 크흠, 그리고 이런 일은 면식범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보통 이런 신고 받고 와서 보면… 남자 좋아하거나 그런 양반들이 이런 일을….”

“아닙니다. 저 게이 아니라구요!”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네? 그게 무슨!”

-칙- 칙- 3동에서 소매치기 발생. 3동에서 소매치기 발생.

“소매치기? 어이! 3동이면 바로 옆이지? 우리도 거기로 가지.”

소매치기 무전에 내 말은 완전히 씹혀 버렸다. 더 들을 생각도 없는 듯 형식적으로 집안을 둘러보던 경찰들이 미련 없이 나를 지나쳐 현관을 나가 버렸다. 불쾌함에 인상을 구기고 그 꼴을 바라보고 있자,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아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경찰이 말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계속 주변 탐문하고 영상 대조해서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드릴 테니, 일단 선생님은 웬만하면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세요. 현관 비밀번호도 바꾸시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면식범일 가능성이 가장 커요. 주변 사람 중에 혹시 비슷한 체구가 있나 잘 살펴보시고…. 또 일 생기면 연락 주십쇼. 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지막 경찰마저 떠났다. 여전히 떨리는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으니 활짝 열린 문밖에서 오피스텔 주민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려왔다.

웬 경찰이야? 집에 누가 들어왔다나 봐요. 어머, 301호 남자 혼자 사는 집 아닌가? 도둑이래? 아뇨, 도둑은 아니고 스토커 같은…. 웬일이니, 남자가?

“구경났습니까!”

쾅-!!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 상황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나다. 당사자도 잘 모르는 상황을 뭐가 대단하다고 다 안다는 듯 떠든단 말인가. 경찰도, 이웃들도, 회사직원들도 다 똑같았다. 나는 피해자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피해자란 말이야!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만 잘났다고 떠드는 위선자들! 억울해서 자꾸만 미간이 뜨거워졌다. 속에서 왈칵하고 무언가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어째서 내가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지….

웅- 웅-

깨질듯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으니 휴대폰이 울었다. 힘없이 화면을 해제하자 시정의 문자가 상단으로 올라왔다.

[너 어디십니까? 부장님이 찾으시는데. - 구 선배]

아 시발…. 회사를 팽개치고 나왔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마음 같아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일개 인턴이 아닌 대리였다. 직함이야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울수록 다른 사람… 아니 회사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회사로 돌아오니 외근을 나갔던 직원들이 대부분 돌아와 있었다. 외부 스케줄이 없던 내가 밖에서 돌아오자 몇몇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물론 내가 뛰쳐나가는 걸 본 사람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또 무슨 스캔들이라도 났대? 근처에 있던 직원이 비꼬듯 중얼거렸다.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간 부장실에선 왜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했는지, 2시까지 올라오기로 한 서류가 왜 오질 않는지에 대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말을 듣기만 했다. 정말로 듣기만…. 지금 정신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가 않았다.

“이 대리, 듣고 있는 건가?”

“네….”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 자네 평소에 이런 실수 없잖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거 같더군.”

“…….”

“나는 자넬 믿네.”

“감사합니다….”

“보고서는 마저 완성해서 제출해. 나가 봐.”

믿는다고 하셨지만, 인상을 쓰고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걸 보니 진심은 아닌 듯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은 걸 억지로 버텼다. 이틀 내내 스트레스가 너무 큰 탓이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팀장실에서 나오던 정태와 눈이 마주쳤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한 걸음을 떼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벽을 붙잡았다. 아주 잠깐 휘청거린 것뿐이지만 놀란 정태가 급하게 부축을 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정태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어서였다. 뻗은 손이 오갈 곳 없이 어색하게 허공을 쥐었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겸연쩍게 사과를 하려는데, 문득 경찰의 말이 떠올랐다.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아요.

혹시 정태가… 범인은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결하지도 않았다. 집도 알고 있고, 요즘 들어서 많이 친절해졌고…. 혹시-라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점 부풀었다. 내가 너무 싫어서, 그냥 나를 엿 먹이고 싶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정태는 유독 나한테만 날카롭게 굴었지.

“정말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창백한 얼굴로 말해 봤자 신빙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정태가 정말 범인이라면…. 한사코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자 정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 아까 팀장님이 주신 건데, 저보다는 대리님한테 더 필요해 보여요.”

정태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박카스와 비타민을 내밀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것 중에… 내 집에 무단으로 놓여 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비타민이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타이밍이 묘했다. 이 새끼 정말 날 놀리고 있는 거 아니야? 혼란스러움에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자 정태가 억지로 그것들을 쥐여 줬다. 꾸욱. 힘으로 내리누르는 손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마시고 힘내세요.”

놀랍게도 정태는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미소조차 띠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평소라면 순수한 격려라 생각했겠지만, 이미 속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내가 우스운 건 아닐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으니까 얼마나 웃길까. 내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고, 뒤를 쫓아다니고, 심지어 보란 듯 자위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꼴이 얼마나 웃기겠어!

수상한 점은 아직 더 있었다. 하필 범인이 나타난 시간대에 정태는 외근을 나간 상태였다. 외근은 핑계고 그때 내 집에 온 건 아닐까?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복도에서 옷을 갈아입고, 종이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정태. 한번 와 봤으니 집 구조는 잘 알고 있을 테고, 주변 환경도 미리 봐 뒀겠지. 처음부터 모든 게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었을지도 몰라….

“이 대리님. 복도에 서서 뭐 하십니까?”

“허억!”

갑자기 어깨를 만지는 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았다. 구시정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라도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건 뭐야, 박카스? 마실 겁니까?”

“…아뇨….”

“안 마실 거면 내가 마셔도 되죠?”

당연한 듯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손에 있던 음료를 가져갔다. 동시에 정태가 얼마 전 아침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게 시정을 흘겨봤다. 크~ 달다! 상당히 목이 말랐는지 시정은 작은 음료 하나를 순식간에 비워 냈다. 그러더니 킁, 킁. 냄새를 맡듯 코를 찡끗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냄새가 나나? 알 수 없는 행동에 덩달아 킁킁거리고 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정이 갑자기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 이래요!”

반사적으로 시정의 품을 세게 밀쳤다. 코끝엔 언뜻 다가온 시정의 향수 냄새가 스쳐 갔다. 아야-! 한 박자 느리게 터진 앓는 소리는 한껏 과장돼 있었다. 시정이 밀쳐진 가슴을 부여잡고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이 대리님 나 몰래 담배 피웠지? 찔리니까 힘쓰는 것 봐라! 속일 사람을 속여요~ 내 코를 속이려고. 머리카락에서 담배 냄새 딱 나는구만!”

몇 시간 전에 태운 담배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나? 급하게 머리를 문질렀지만 내 코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기 금연에 대해 지적을 하고 있지만, 시정의 말투는 내용과 다르게 다정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피식 웃기까지 하며 구겨진 와이셔츠를 쓸어내렸다.

“그래도 요즘 스트레스 많은 것 같으니까…. 한 번은 내가 봐준다! 박카스 값이라 생각해요.”

박카스는 정태가 준 건데…. 인심을 쓰듯 내 어깨를 두드린 시정이 흥얼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다. 정태도 같은 생각인지 살짝 날카로워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시정 주임님이… 봐주는 일도 있네요.”

분명 시정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다. 운동부 출신이라 승부욕 하나는 엄청났으니까. 이런 찬스를 그냥 넘길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찰을 제외 하고는 주변 사람 중에 내 상황을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게 시정이었다. 아는 것을 넘어서 내 편에 선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스트레스가 극심한 걸 알고 있기에 내가 너무 땅만 파지 않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해 주는 것뿐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후하시네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아니, 선배는 그저 나를 배려해 주고 있는 거야. 속으로 시정을 옹호하며 반박했다. 시정이 내 편이니 나도 시정의 편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 정태의 한마디에 이토록 많은 생각이 드는 걸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이미 가지를 친 생각을 잘라 낼 수가 없었다.

정태와 마찬가지로 시정도 같은 시간에 외근을 나갔다. 또한, 내 집에 왔었던 적도 있었고. 어쩌면…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정태보다 더 높은 확률로 시정이 범인일 수도 있었다. 회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나와 많은 시간을 공유했으니까. 이유는 몰라도, 시정이 범인이라면 내 동선을 파악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터였다. 평소와 다른 태도가 사실 배려가 아니라면? 나를 속이려는 연기일 뿐이라면?

한번 시작된 의심은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갔다. 정태에 이어 시정까지…. 그러자 이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선량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수도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범인이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의심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누구도 범인일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범인이 아닐 수 있었다. 내가 싫어서, 미워서, 혹은 너무 좋아서. 그도 아니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수많은 이유와 관계들이 알게 모르게 엉켜 가며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 갔다.

도대체 넌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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