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4 (9/46)

D-DAY -4

쫄딱 젖은 몸을 씻고 나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효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순간 울컥하는 바람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지만, 그래도 효연에겐 좋은 감정이 더 많았었다. 그래.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화를 누르고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뭔지는 몰라도 오해가 있다면 풀고, 만약에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사과라도 해야 않겠냐고. 하지만 전화도 메신저도 전부 불통. 도대체 뭐냐고! 왜 그런 건데! 이유라도 좀 알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던지니 웅- 하고 진동이 울며 전화가 왔다. 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기다리던 효연은 절대 아니었다.

-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이래서 이랬고, 저래서 저랬고. 차근히 사정 설명을 하자 민석이 좀 전에 나와 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나도 미치겠다. 분위기도 좋았는데…. 야, 이유나 좀 듣자. 갑자기 왜 그런 거래? 너는 효연 씨랑 연락했을 거 아니야.”

-아이 씨… 진짜야? 너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썅! 모른다니까! 뭔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민석이 내 결백을 믿어 주는 듯했다. 그래서 뭔데? 아, 빨리 말 안해?! 짜증 섞인 재촉에 민석이 조금 주저하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 앞에서 어떤 남자가 효연 씨를 붙잡고 이상한 말을 했다나 봐.

“남자가? 근데 왜 나한테 그래.”

-그게… 아휴…. 선유야.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게이는 아니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자 민석이 나를 달래듯 차근한 말투로 주절거렸다.

-알지. 내가 너랑 1, 2년 보냐. 나도 당연히 네가 아닌 건 알지. 그래도… 성향이라는 게 바뀔 수도 있고…. 나 막 그런 거 차별하는 사람 아니다?

“윤민석! 어떤 미친 새끼가 뭔 말을 했는데 이러는 거야?!”

-하아….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효연 씨를 붙잡더니…. 뭐, 선유 씨가 너랑 어울릴 것 같냐. 선유 씨는 내 거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나 봐. 아니, 나야 당연히 아니라 했는데, 우리 와이프가…. 아휴, 하여튼! 아니면 됐다. 내가 일단 잘 말해 볼게.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떤 미친놈이!!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게이에, 나에 대한 마음을 몇 번이나 솔직하게 드러냈던….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효연 씨한테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설마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닐 거야. 남자한테 무슨 스토커야. 그럴 리가 없지.

속에서 자꾸 화가 올라오는 바람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그저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한 건지에 대한 생각만 지독하게 맴돌 뿐이었다. 그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날 엿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닐까? 근처에 앉아 있었다면 나랑 효연의 이름 정도야 들었을 거고…. 아니면 설마 구시정이 질투로? 아냐. 이건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못 알아봤을 리가 없어. 게다가 눈에 엄청 띄는 사람이고…. 그럼 뭐지. 도대체 왜…. 정말 매니저일까? 아냐, 어쩌면 내 쪽이 아니라 효연의 스토커일지도 몰라. 효연은 예쁘니까 이상한 사람이 꼬일 수도 있어…. 

밤새 의심은 점점 커졌지만, 그 어느 것도 명쾌한 답을 주진 못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출근했다. 비는 그쳐도 남아 있는 습한 공기가 오늘따라 더 짜증스러웠다. 몸도 기분도 무거웠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회사에서 티 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잖아.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들어갈 때부터 자기들끼리 붙어서 수군거리는 것 같더니 자리로 가는 내내 힐끔거리는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잘못한 건 없지만 주눅이 들었다. 갑자기 직원들이 왜 이러는 걸까. 오늘 내 모습이 뭔가 이상한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시정이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흡연실로 와 봐.”

벌떡 일어나 시정의 뒤를 따랐다. 그대로 있다간 그 시선들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반응에 왠지 도망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흡연실의 문이 닫히고 완벽한 밀실이 되자 창밖을 보고 있던 시정이 뒤를 돌아봤다. 며칠간 멀리했던 담배의 찌든 내가 코를 자극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민석이 새끼가 그새 얘기했나…. 내 당황에 시정이 심각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떻게는 무슨! 어제 너 소개팅 했다던 여자, 수진 씨 친구였던 모양이야. 오늘 출근하자마자 수진 씨가 사방팔방에 다 소문내고 다니더라!”

“뭐라구요? 아 시발….”

갑자기 시야가 아찔해졌다. 소문이 났다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에 기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자 시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남자 만나는 건 아니잖아. 그치?”

맙소사. 무슨 얘기가 돈 거야!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렇지, 별걸 다 소문내고 있네! 이 억울한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급한 마음에 시정의 팔을 붙잡고 하소연을 쏟아냈다.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오히려 지금 내가 더 궁금해요. 그 남자가 누군지…! 설마 선배도 절 의심하는 건 아니죠? 저 진짜 게이 아니에요.”

“나는 당연히 널 믿어. 인마. 그러니까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 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시정이 혀를 차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 다정함에 나도 모르게 어제 있었던 일을 토해 내듯 주절거렸다. 억울해요, 나는 정말 억울해요. 맹세코 모르는 일이란 말이에요. 목소리가 묘하게 떨려 왔다. 내 간절함에 시정은 답지 않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줬다. 소개팅. 화장실. 모르는 사람. 물벼락…. 그렇게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난 시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갸름한 턱을 매만졌다.

“짐작 가는 사람 없어? 너한테 악감정을 품은 사람이나, 아니면 뭐 다른 감정이라도….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 말이야.”

“그… 그게 사실은.”

상황도 상황이고, 딱히 시정에게 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남자한테 고백받은 게 뭐가 자랑이라고…. 운을 띄우고 우물쭈물하는 게 답답할 수도 있건만 시정은 재촉 없이 차분하게 나를 기다려줬다. 후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냐.

“…자주 가는 술집이 있어요. 그 술집 매니저가 예전부터 저한테 좀 그러긴 했는데…. 그래도 설마…, 어떻게 알고….”

“못 알아낼 것도 없지. 마음만 먹으면 뭘 못하겠어.”

“정말 그 사람일까요? 당장 신고를 하면….”

“마음 같아선 나도 신고하라고 하고 싶지만 제대로 된 증거도 없잖아. 하, 별 미친놈이 다 있네. 확실히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조심하고…. 힘내라.”

등을 쓸어내리는 따스한 손에 오히려 마음이 더 약해져 버렸다. 효연을 도피처로 삼았듯… 시정을 의지해 버릴 것만 같았다. 슬슬 돌아갈까? 가고 싶지 않아요. 직원들이 어제 있던 일을, 그것도 일방적인 시선에서 알고 있다니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난 정말 모르는 일이란 말이야….

같은 맥락은 아니었지만, 소문의 무서움을 이미 곁에서 지켜본 적 있었기에 이 상황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작년쯤 회사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신입사원과 과장의 불륜.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과장의 부인이 회사에 찾아온 뒤, 비밀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마저 산산이 부서져 당사자들을 공격했다.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비난과 뒷소문들. 결국, 일주일도 되지 않아 신입사원은 회사를 그만뒀고, 소문이 너무 커지자 한 달 후에 과장도 도망치듯 해외로 떠나 버렸다.

소문은 전염병과 다를 게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쉽게 사람을 좀 먹었다. 게다가 주변을 다 침식 때까지는 멈추지 않았다. 말 옮기기 좋아하는 수진 씨가 출근하고부터 계속 떠들었다면, 이미 우리 부서야 모두 알고 있을 테고. 회사 전체에 퍼지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캄캄했다. 이제 그 소문의 주인은 누구도 아닌 나였다.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잖아.”

“알아요. 하지만….”

“이선유.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지!”

“…….”

“일단 친한 직원들한테는 내가 잘 말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선배….”

어리광을 부리듯 선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시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딜 각오를 했을까. 자리로 돌아오는 내내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대리님이 사실은 게이래. 숨겨둔 애인이 소개팅 한 여자랑 치정 싸움을 했다나 봐. 위장 결혼을 하려 그랬다는데? 순진한 척하더니, 역겨워라…. 듣지 않아도 들리는 수군거림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시발, 오히려 피해자는 난데…! 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진실에 서러움만 북받칠 뿐이었다.

그래도 점심쯤 되니 시정의 덕에 오해를 푼 사람도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와서는 “대리님, 맘고생이 심하시겠어요. 힘내세요.” 하고 위로를 하더라. 물론 극소수였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힘이 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게이가 아니냐며 의심을 하고 있었다.

정말 매니저가 범인일까? 포기하지 않겠다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만약 다른 사람이 진범이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하필 나한테…. 

똑같은 파일만 6시간째 검토 중이었다. 업무가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오후쯤엔 소문이 퍼지고 퍼져 윗선까지 간 모양인지, 7층엔 잘 오시지도 않던 부장님이 우리 부서를 다녀갈 정도였다. 그때 굳이 날 찾아서 바라보는 표정은…. 이게 뭐야. 내가 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데. 나는… 난 아냐. 아니라고! 난 게이도 아니고, 뭔가를 숨지기도 않았다고!!

“흡….”

견디다 못해 화장실로 도망쳤다. 힘을 빼면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 버릴 것 같았다. 쿵, 쿵.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는데 이상하게 손끝까지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가 난 건지 겁을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불안했다. 세면대에 기대듯 서서 이유 모르게 퉁퉁 부어 버린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솨아아-. 가장 차가운 물을 틀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이선유. 스스로 세뇌하듯 되뇌며 손안 가득 차오른 물을 몇 번이고 얼굴에 끼얹었다. 하아…. 거울로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대리님.”

“……!”

갑작스런 목소리에 예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정태가 빳빳하게 다려진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조금 주저하다 정태의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물이 옷을 적시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작게 인사한 뒤 얼굴을 닦으며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자 정태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 미안해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정태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수진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데 못 들었을 리가. 그래도 애써 아닌 척, 모르는 척을 하며 정태에게 웃어 보였다. 격한 세수에 젖은 셔츠 깃이 닦아 낼수록 불쾌하게 느껴졌다. 

“이 대리님.”

“할 말이라도 있나요?”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애먼 사람한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일부러 화장실까지 따라온 용건이 뭐냔 말이야.

“저는….”

정태의 찢어진 눈이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마주했다.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연애 성향이 어쨌든… 대리님은 대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내가 동성애자라 결론을 내린 사람의 발언이었다. 신경 안 쓴다라….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겐 정태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격려하러 온 거냐, 엿을 먹이러 온 거냐?

“전정태 씨.”

이젠 필요 없는 젖은 손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드는 정태의 손이 조심스럽다 못해 긴장한 듯 보였다.

“회사에선 말조심하지. 누가 들으면 내가 동성애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나, 게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젠 억지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꽉 다물린 입에서 으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정태가 놀란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뻣뻣하게 굳은 정태를 혼자 내버려 두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모든 게 괴로웠다. 도망쳐 들어간 화장실조차 다시 도망쳐 나와야만 했다. 사무실에서 쏟아지는 시선들, 웅성거리는 말소리…. 토할 거 같아… 더는 못 견디겠어…! 퇴근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시정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놀란 듯 나를 바라봤지만, 그들조차 외면한 채 자리를 박찼다.

의문은 분노로. 분노는 원망으로 변했다. 회사를 나서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저 사람이 그 사람…’ ‘게이라던데…’라는 속삭임이 내 귀를 난도질했다.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라고. 당신들이 뭘 아냐고. 그랬다간 소문에 살을 더 붙이는 꼴이겠지. 어쩌면 게이 인데다가 정신병까지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 돌지도 몰랐다. 이미 한번 퍼진 소문이란 그런 거였다. 살이 붙고 붙어 뭐가 진짠지 모르게 되는….

시시각각 격정적으로 변하는 감정에 집에 오는 내내 애꿎은 손톱만 쥐어뜯었다. 그 사이 효연에게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은 되지 않았다. 시발! 사람이 이렇게 곤란해졌는데 얘기라도 해 봐야 할 것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최악이야….

하지만 모든 일엔 늘 예외라는 게 존재했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진짜 최악은 따로 있었다.

“이… 미친….”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식탁 위엔 작은 쪽지와 함께 처음 보는 약통이 놓여 있었다. 

스트레스 완화에 좋아요.

고급 브랜드의 영양제와 컴퓨터로 깔끔하게 프린트된 쪽지였다. 쪽지를 보자마자 급하게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누가 내 집에 들어온 거지?! 정말 스토커였단 말이야?! 게다가 이 사람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언제 들어온 걸까. 아직 이 집에 있진 않을까? 방금 나갔다면?

“누구야! 어떤 새끼냐고!”

펄럭거리는 커튼을 걷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가로등 아래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였다. 저 새끼가 범인이 분명했다! 내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도망쳤으니까! 더 주저할 것도 없이 휴대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그 짧은 번호를 누르는 동안에도 흥분으로 인해 손가락이 부르르 떨려 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단침입을 당했어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시겠어요.

“집에 돌아왔는데, 모르는 물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창밖을 보니까 어떤 남자가 서 있길래….”

-지금도 있나요?

“아뇨…, 지금은 도망갔어요.”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어두워서 잘 모르겠는데… 모자를 쓰고 있었고, 체격으로 봐서는 남자인 것 같습니다.”

-신고자분이 집에 있을 때 침입했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집에 들어온 흔적이 있어요. 모르는 영양제가….”

-영양제요?

“네, 영양제요. 그리고 쪽지도 같이 있었어요. 아마 제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아! 어제! 어제도 같이 있던 여자분께 피해를….”

-어떤 피해를 받으셨나요.

“…화장실 앞에 서 있다가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하는데, 제가 직접 들은 건 아니라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네요.”

-여자분이 예쁘셨나 보죠?

“…네?”

귀를 의심했다. 가뜩이나 중간에 말을 자꾸 끊어서 짜증 나는 통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헌팅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뭐, 서로 간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상한 말을 들은 거 외엔 피해가 없으신 거죠?

“네….”

-다행이네요. 음…. 그럼 오늘 무단침입을 한 사람이랑 어제 그 사람이 동일인물인 거죠?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저희가 도움을 드리기 힘듭니다.

“…이봐요. 그럼 지금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많이 놀라신 거 이해합니다. 일단 신고를 접수했으니 곧 출동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경찰과 통화를 한 게 맞나? 주소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이 전혀 편치 않았다. 오히려 성의 없는 접수에 머리까지 펄펄 끓는 것 같았다. 시발. 게다가 곧 출동하겠다 했으면서 언제 도착하는 건지. 

무려 15분이 지나서야 겨우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성이 나서 문을 열자 느긋해 보이는 경찰 두 명이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들의 뒤로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는 이웃들도 있었다. 가십거리나 좋아하는 사람들 같으니…. 회사에서와 같은 기분이 들어 서둘러 경찰만 집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분실된 것도 없으시고… 그냥 이게 있었다고요? 영양제?”

“네.”

“그리고 도망간 분은 제대로 얼굴도 못 보셨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경찰이 모자를 벗고 숱 없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보통 무단침입의 경우는 절도 같은 목적이 있어요. 근데 지금 현장을 확인해 보니 딱히 그런 것으로 보이진 않고….”

“그럼 뭐죠?”

“글쎄요. 그건 저희도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네요. 영양제는… 혹시 선생님이 사다 두시고 까먹은 건 아니죠?”

“무슨… 하. 아닙니다. 여기 쪽지도 있고요…. 이런 게 증거 아닌가요? 가져가서 지문 조회라도 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양반이. 허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네. 지문 조회 아무나 막 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일단은 가로등 밑에 있었다는 사람이 이 집에 왔다는 것도 확실치 않고, 어제 일행분이 만난 그 사람도 동일인물인지 확증이 없지 않습니까. 그나마 큰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까만 옷에 모자라고 하셨죠? 주변 순찰을 더 강화하고, 혹시나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찰은 증거 확보라며 성의 없게 쪽지와 영양제를 챙겨 들었다. 혹시 또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십쇼. 끝까지 성의 없는 형식을 취하며 경찰들이 현관을 나섰다. 철컥. 터벅터벅. 값싼 빌라의 얇은 벽이 소리를 막지 못하고 들여보내고 있었다. 서 있을 기운도 없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계단을 내려가는 경찰과 그 동료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주변만 뒤져도 까만 옷 입은 사람 20명은 나올걸? 난 누가 이런 거 챙겨 주면 고맙다 하고 먹을 텐데, 무슨 남자가 저리 겁도 많고 예민하냐. 스토커라잖아. 징그럽게 남자한테 스토커가 뭐야. 하긴, 쟤 분명 게이일걸. 조사하나 마나 치정 싸움이겠지.

성의 없는 수사는 둘째 치고 나가자마자 변한 태도에 더 화가 났다.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저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생각했다. 범인을 확실히 목격하지 못해서? 현장에서 마주치지 않아서? 피해나 협박을 당한 게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남자고, 남자에게 남자 스토커가 생길 리 없으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한테 스토커가 뭐야.’ 낯설지 않았다. 내 입으로 한 말이었으니까. 불과 며칠 전까진 나도 저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을, 내가 바로 저들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억울했지만, 이젠… 누구에게 화가 나는 건지도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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