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5
“으으….”
머릿속에서 작은 공이 사방으로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쓰린 속을 부여잡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반짝. 새벽 6시. 가만히 있는데도 속이 뒤집혀 죽을 것 같았지만 그보다 갈증이 더 괴로웠기에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이… 빌어먹을 숙취.
칵테일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어설프게 남은 취기 때문에 슈퍼에서 소주 몇 병을 더 샀다. 갑자기 이것저것 걱정도 되고, 부모님 생각도 나고…. 그렇게 술이 당기더라.
어제, 민석은 내 전화에 신이 나서 환호를 했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소개팅 상대의 번호를 넘겨주며 지금 당장 연락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내일 할게. 야 10시가 뭐가 늦어! 내가 미리 말해 뒀으니까 지금 연락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실랑이 도중, 그 ‘미리’라는 게 어디까지 말을 한 건지… 상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공효연이라고 합니다. 민석 씨 소개로 연락드려요.]
긴 생머리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메신저 프로필엔 객관적으로 봐도 예쁜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도피였으니까. 여자라도 만나면 저 게이가 포기하지 않을까. 나이도 찼겠다, 잔소리도 귀찮은데 일단 아무나 만나 보는 건 어떨까. 원해서가 아닌 압박과 필요에 의한 만남…. 과연 이게 잘 하는 짓일까. 소주를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 게다가 술기운에 뭘 못 하겠는가. 손톱을 조금 잘근거리다 어색한 첫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이선유입니다. 사진이 너무 예쁘세요.]
[실물은 더 예뻐요.^^]
응? 뭐지? 이 당당함. 재밌는 사람이네. 가슴 한쪽이 쿡쿡거리는 와중에도 나쁘지 않은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28살이고, K 주식회사에서 근무 중이에요.]
[앗, 저희 사무실이랑 가깝네요. 저는 J 디자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정말요? 그럼 오가다 한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통성명만 할 줄 알았는데 대화는 의외로 끊이지 않고 1시간이 훌쩍 넘게 이어졌다. 식성, 취미, 영화 등등…. 뻔한 주제의 이야기였지만 왜 이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
[선유 씨, 내일 퇴근 후에 저녁 어때요?]
효연의 제안이었다. 벌써 만나자고? 성격이 원래 이런 건지, 아님 과하게 용기를 낸 건지. 내 생각엔 전자 같지만, 어쨌든 먼저 건넨 제안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제가 효연 씨 사무실 근처로 가겠습니다. 긍정적 답변에 효연이 웃었다.
이미 초반의 죄책감은 흐려진 지 오래였다. 그냥… 느낌이 좋았다. 술 때문에 감정 과잉도 있었겠지만, 효연에 관해 너무나도 긍정적인 마음이 들었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이 사진이 보정 덩어리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내일의 만남이 기대됐다.
-야, 어때.
“새벽에 웬 전화야. 안 자냐?”
-말 돌리지 말고. 어떠냐고. 효연씨.
“뭐 그런 걸 물어봐…. 네 입으로 말했잖아. 좋은 사람이라고.”
얼굴에 살짝 열이 올랐다. 술 때문이겠지.
-크핫하! 그치? 진짜 좋은 사람이지? 고마우면 한턱 쏴라?
“좀 전에 소개받았는데 무슨 한턱까지. 미친놈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의 일은 벌써 까맣게 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고작 몇 시간 만에 숙취로 이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지. 으윽. 머리야. 움직일 때 마다 둥둥- 울리는 머리를 누르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찝찝하냐. 바지 속이… 눅눅하다고 해야 할까…. 어… 설마. 어어? 마냥 낯설지 않은 느낌에 부랴부랴 바지를 벗어 던졌다. 으윽! 두통!
“미쳤다. 미쳤어! 이선유!”
발기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속옷의 안쪽은 처참하게 젖어 있었다. 익숙한 모양새…. 이 나이에 모, 몽정이라니! 심지어 한참 질풍노도를 달리던 10대 시절보다 훨씬 더 젖… 아니 됐어! 그런 건! 오랜만에 여자랑 만나려니 흥분이라도 했냐? 나이 30에 몽정이라니! 시발, 이게 뭐야! 으아악! 보는 사람도 없건만 이미 다 까발려진 기분에 쪽팔려 죽어 버리고 싶었다.
급하게 샤워를 한 뒤, 상황 탓인지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갈증에 냉장고에 있던 숙취해소제를 한번에 들이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생수병을 통째로 입에 물고 꿀꺽꿀꺽! 격하게 움직이는 식도에 살짝 멀미가 올랐다.
물을 마시며 곁눈질로 둘러본 주방엔 2병이나 되는 빈 소주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칵테일에 소주에, 혼자 잘도 마셨네. 이러니 속이 안 좋을 수밖에. 그 와중에 대견한 건 담배를 참았다는 거다. 와, 의지가 술기운을 이겼네. 비어 있는 재떨이를 보자 약간의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없는 이질감도…. 이상한 얘기지만, 묘하게 평소보다 집이 깔끔한 것 같았다. 사이즈 별로 정돈된 주방 식기들하며, 뚜껑 덮인 통에 담긴 먹다 남긴 안주들…. 뭐지? 여전히 둥둥 울리는 머리와 가슴을 달래며 주변을 더 둘러봤다. 침대 맡엔 어제 입고 던져 둔 옷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효연한테 잘 자라고 인사한 다음에 뭘 하다 잠들었더라…. 분명 씻지도 않았었는데 옷은 언제 갈아입었지. 게다가 지금 깨달았는데 아까 빨래통에 던졌던 잠옷도 평소에 입던 게 아니었다. 저거 3년 전에 전 여친이 사 준 거잖아….
잘한다! 이선유! 술이 원수냐! 내가 원수지! 아 젠장, 아무것도 기억 안 나네. 언제부터 청소하는 이상한 주사가 생겼지?
기억의 부재를 깨닫자마자 급하게 휴대폰을 붙잡았다. 아우 두통!! 원래 휴대폰 붙잡고 진상부리는 주사는 없지만, 청소하던 주사도 없었는데 혹시 모르잖아! 혹시라도 술김에 실수했을까 메신저와 통화 목록을 싹 뒤졌다. 특히 효연에겐 절대 안 돼! 그분은 어제 처음 알았다고!
“어, 어, 어어어!”
왜 목록에 효연이 없지?! 아니, 번호도 지워졌잖아! 뭐한 거야 이선유! 그리고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이… 어, 잠깐. 이거 시정 선배 번혼데. 구시정 번호도 지웠나 봐! 이건 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락처를 통째로 지우진 않아서 다행인 건가. 민석이 메신저로 보내준 효연의 번호를 다시 저장했다. 번호야 그렇다 쳐도, 혹시 없는 기억에 실수라도 한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마침 평소에 맞춰뒀던 출근용 알람이 울렸다. 필름은 끊겼지만 어쨌든 출근은 해야만 했다. 어영부영 출근 준비를 시작하고, 그리고 8시가 넘어서야 안절부절 효연에서 다시 연락을 보냈다. 이 시간이면 일어났겠지?
[잘 잤어요?]
아 시발, 혹시, 정말 혹시라도… 실수했으면 어쩌지?
[네, 잘 잤어요. 선유 씨는요?^^]
저 갈매기 웃음조차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불안이 엄습했다. 뭐라고 물어야 자연스러울까. 혹시 제가 술에 취해 진상을 부렸나요? 참도 좋아하겠다…. 긴 고민 끝에 몇 자를 적어 전송했다.
[저도 잘 잤습니다^^ 그런데 효연 씨. 혹시 제가 어제 실례를 범하진 않았을까요….]
[실례요?]
[별건 아니구요! 그냥 너무 늦게 연락하기도 했고, 그래서 혹시나 대화즁에 실례을 범핶으ㅁㅕㄴ]
마음이 급하니 오타가 잔뜩 난 상태로 전송을 해 버렸다. 오타 죄송합니다. 보내면서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다짜고짜 실례를 범했냐니. 기분 나빠 하면 어쩌지…. 급하게 오타를 정정해서 메시지를 보내자 ㅋ가 가득한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아~ 여자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하셨죠?ㅎㅎ]
아 미친놈아. 별 얘길 다 했네.
[진짜 귀엽네요.]
누가요? 내가? 어머나 세상에.
[걱정 마세요. 전 어제 대화 너무 즐거웠어요.]
숙맥으로 낙인 찍힌 것 같긴 하지만 효연이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별짓도 안 한 것 같고. 휴…. 근데 대체 번호는 왜 삭제했을까.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대리님.”
유난히도 발걸음이 가벼운 날이었다. 활기찬 인사에 팀원들이 덩달아 높은 목소리로 웃으며 답을 했다. 사실 아직도 숙취는 여전했기에 징징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지만…. 작게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자, 먼저 출근한 시정이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굴러 내게 다가왔다. 아 맞아. 선배도 전화했었지.
“어제 왜 전화했어요?”
“잠이 안 와서요. 그나저나. 대리님, 오늘 좀… 차려입었네요?”
“…언제부터 제 옷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아침엔 좀 우왕좌왕했지만, 오늘은 효연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꾸미고 오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오늘 소개팅이 있는 걸 알면 엄청 놀리거나, 엄청 질투하거나 둘 중 하나는 분명했기에 일부러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근데 시정의 입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보니… 젠장.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소개팅 한다면서.”
시정의 한마디에 멀리 있던 직원들까지 토끼 눈을 하고선 달려왔다. 다들 소머즈라도 된 거야?
“대리님 소개팅 해요?!”
“누구랑요?”
“어머! 진짜요?!”
“예쁩니까?!”
평소에 나한텐 얼마나 관심이 많았다고 모여들고 그러지. 갑작스러운 관심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네. 소개팅 합니다. 느낌 좋은 분이랑. 속으로만 대답하며 괜히 바쁜 척 아무 서류를 뒤적였다.
“큼…. 구 주임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윤민석이 어제 밥 먹는 내내 너 소개팅 시킬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라! 요!”
억지 존댓말 아직도 하는 거였어? 내 손에 있던 서류를 빼앗은 시정이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화를 냈다.
“배신감 쩌네! 부정도 안 해요?”
“에이… 왜 이래요.”
“아니, 어떻게 나를 두고 소개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내가 먼저. 그다음이 너-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날 보며 시정이 이를 갈았다. 요즘 외롭다고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내가 소개팅을 한다니 어지간히 질투가 나는 모양이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시정의 손에 있던 서류를 도로 챙겨 들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뒤늦게 몰려든 직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몇 살이냐, 예쁘냐, 뭐 하는 사람이냐. 그 자리엔 정태도 끼어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얼굴 같네….
“자자, 내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 다들 그만하고 자리로 돌아갑시다. 오후에 미팅 준비는 다 하신거죠?”
노코멘트를 고집하니 직원들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하나둘씩 원래 위치로 복귀했다.
“대리님이….”
이대로 넘어가는가 했더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정태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시니컬한 말투로….
“소개팅 할 나이는 아니지 않나요?”
“무, 뭐?”
일방적인 말을 던진 후 정태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야! 나 아직 30밖에 안 됐거든?! 소개팅해도 괜찮은 나이거든?!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늦어 버린 반박에 속으로 씩씩거리고 있는데, 여전히 가자미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시정까지 휙! 하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아니 뭐 어쩌라고. 부러우면 본인들도 소개받든가!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고, 오늘따라 더디게 흐르는 시간에 벌써 100번도 넘게 시계를 바라봤다. 억지로라도 시침을 돌려 버리고 싶었다. 이 상태에서 일이 잡힐 리가. 2, 3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퇴근이 가까워질수록 업무 집중력이 눈에 띄게 분산되고 있었다. 아껴 신던 비싼 구두가 책상 밑에 숨어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3… 2… 1…. 땡! 7시다! 퇴근 시간이 되자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팀원들… 아니 시정의 등쌀에 못 이길 것 같아서였다.
“저 퇴근합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업무 외적으로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일부러 구시정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렸기에 평소처럼 빼액! 하고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다. 설마 정확하게 정각에 도망갈 줄은 몰랐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설마 싶긴 하지만 구시정은 마음만 먹으면 진짜 따라올 사람이란 말이야.
눅눅한 공기에 신경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보니 새벽에나 내린다는 비구름이 벌써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눅눅한 날은 싫지만… 그래도 오늘은 괜찮을 거야. 효연을 생각하자 예민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효연과 만나기로 했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조금 일찍 도착한 것 같다. 후, 먼저 와서 다행이다. 예약한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자 지잉-.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인사도 안 하고 가시냐!’ 시정의 메시지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근데 선배, 그렇게 높여 쓴다고 다 존댓말이 아니라니까요.
10분 정도 지나자 한 여성이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프로필에 있던 그 여자였다. 와씨 어떡해. 긴장된다.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다가온 여자는, 정말로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뻤다. 맙소사. 조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손바닥 안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효연 씨.”
일어나서 손을 흔들자 효연이 활짝 웃으며 또각또각, 곧은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죄송해요. 늦었죠. 일이 좀 늦어지는 바람에….”
“아니에요.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내 대답에 효연은 수줍게 웃었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공효연이라고 합니다. 전 이선유라고 합니다. 어색하고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엮었다. 그래도 어제 대화를 좀 나눈 탓인지 마냥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아 신기할 따름이었다.
곧 우리 테이블 담당이라며 유니폼을 빼입은 남자가 다가왔고, 효연의 취향을 존중해 메뉴를 골랐다.
“효연 씨, 와인 좋아하시나요?”
“조금 마실 줄 알아요.”
그녀가 작고 고운 손가락을 들어 조금을 표시했다. 그렇다면 와인도 시켜야지. 효연이 좋아한다는 화이트와인 중 담당이 추천해 주는 거로 골라 주문했다. 조금 가격대가 있어 효연이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와인 먼저 주세요.” 하고 담당자에게 메뉴를 넘겨 버렸다. 이럴 때 쓰려고 돈 버는 거지 뭐.
매너도 좋고, 취향도 잘 맞고. 먼저 만남을 제안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차다고 해야 할까. 내숭도 없이 파스타를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것도 귀여웠다. 벌써 콩깍지가 씌었나 싶지만 정말로 귀여웠다. 메신저도 좋았지만, 실물과 대면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 아니, 확실히 호감이라고 하는 편이 옳지. 계기야 어쨌든 간에 나는 효연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짜고 매운 걸 좋아하지만 살찌는 게 신경 쓰여서 자주 먹지 못한다. 영화를 좋아한다. 취향이 맞으니 함께 보러 다니면 좋겠다. 일주일에 2일 쉰다. 하지만 그중 하루는 꼭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알레르기가 있다. 사실 남자는 많이 만나 봤지만, 선유 씨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겨우 첫 만남이고 두어 시간이 조금 넘게 대면했을 뿐이지만, 정말 결혼까지 가도 좋을 여자라고 느껴졌다. 이대로 헤어지는 건 너무 아쉬운데…. 효연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카페라도 가자고 할까? 내일도 출근이라 거절하려나? 그래도 어떻게 1시간만 더….
“저기 선유 씨.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가서 커피 한잔 안 하실래요?”
머리가 띵했다. 커피는 방금 후식으로 나온 차였다. 그녀가 작은 커피잔을 슬며시 밀며 말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입까지 가져갔던 잔을 서둘러 내려 뒀다. 멍청이. 이번엔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조, 좋아요. 저 커피 좋아해요.”
말을 더듬는 바람에 서투른 티가 그대로 났지만, 효연은 그조차 좋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가기 전 화장을 고치려는지, 두툼해 보이는 파우치를 손에 든 효연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얼마든지 다녀오세요. 그리고 그녀가 화장실 쪽 복도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쩌지! 너무 좋아! 민석이 말대로 안 만났으면 엄청 후회할 뻔했다. 내가 여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솔로였구나,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엄청난 김칫국인 건 알지만 벌써 효연과 함께 그리고 있는 핑크빛 미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언제 오실까. 화장 안 고쳐도 예쁜데…. 1분이 1년 같은 기다림에 테이블 아래서 손을 꼬물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효연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가 반가워서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날 바라보며 웃고 있지 않았다.
“효연 씨?”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효연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있던 물컵을 쥐어 들었다.
“맘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로 하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니? 뭐 이런 변태 새끼가 다 있어!”
그리고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는 컵 안에 가득 담긴 물을 내게 던지듯 쏟아부었다. 촤아악! 탁! 힘껏 컵을 내려 둔 효연이 그대로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머리고 얼굴이고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옷을 적셨다. 뭐야? 지금 무슨…. 아까 전까지 분위기 좋았잖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게 앉아 있으니 지배인이라 하는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내 옷을 닦아 줬다. 어느새 레스토랑에 시선이 모두 내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아 본 물벼락이었다.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곧 현실감을 회복하며 엄청난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불어 화도 났다. 효연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맘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로 하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안절부절못하는 지배인에게 연신 괜찮다고 하며 직접 얼굴을 닦고 있으니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더 앉아 있는 것도 쪽팔리네. 도망치듯 일어나 계산대를 향했다. 시발, 와인….
카드를 받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쿠르릉-! 하고 천둥까지 내리쳤다. 그리고 솨아아-! 타이밍 기가 막히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소나기가 쏟아지는 건 또 뭐람. 역시 일기예보는 믿을 게 못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가 온 덕분에 내 꼴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대로 레스토랑 어닝 아래 서서 우산을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올랐다. 출근할 때 창문을 안 닫고 나온 것이다. 새벽에 온다길래 활짝 열어 두고 나왔지! 젠장! 급하게 빗속으로 뛰어들어 택시를 붙잡았다. 이젠 비참하다 못해 절망스러웠다. 지금 기분으로는 그 창문 안으로 비가 잔뜩 들어가 뭔가 하나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빨리 가 주세요!”
기사님을 재촉해 집 앞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집을 향해 달렸다. 어차피 젖었으니 첨벙! 하고 물웅덩이가 튀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신발 가죽이었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만! 여전히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시발, 최악이야!”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3층까지 올라왔다. 최소한 바닥은 젖어 있겠지. 마음의 각오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비는커녕 오히려 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 걱정하던 내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라? 내가 창문을 닫고 나갔…던가? 적막한 집안에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무함에 그대로 고개를 젖히자 머리카락을 타고 내린 물방울이 후두둑- 현관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