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6
얇은 커튼 너머로 쨍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닫혀 있는 눈꺼풀 안쪽이 부실 정도였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누워 있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휴일인데 이 정도는 여유 부려도 괜찮잖아. 꿈도 안 꾸고 푹 잤고, 따끈 포근하니 기분도 좋고…. 평화라는 것을 정의해야 한다면 이 순간이 아닐까 싶다. 아, 너무 좋아. 시간이 멈췄으면.
웅- 웅-
하지만 내 바람을 비웃듯 낮은 진동이 머리맡을 울렸다. 부스스- 눈이 부셔 실눈을 뜨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윤민석. 대학 동기 중 나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놈 중 하나였다.
“…여보세요.”
-뭐야. 잤냐?
“쉬는 날이다.”
목이 푹 잠겨서 평소보다 낮고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점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으, 슬슬 일어나야겠지.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며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같이 점심이나 먹으려 했더니. 나 외근 나와서 너네 회사 근처거든.
“다음에 와.”
-다음은 없다. 형 바쁜 거 모르냐?
“지랄한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무슨 기획을 새로 담당한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작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공기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환기라도 할까. 커튼을 활짝 거두니 햇볕이 더 쨍하게 내리쬈다. 으 내 눈이야.
오랜만에 해가 떠서 그런지 평소엔 한적하던 골목에 사람이 꽤 보였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 철가방을 그릇을 든 배달원. 꺄르륵 웃음보를 터트리며 뛰어가는 시커먼 놈들. 그리고 예수 머리의 남…자?
“엇?”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낯설지 않은 뒤태였다. 매니저가 이 시간에 여기에? 하지만 거리도 좀 있었고 반대쪽 골목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기에 확신할 순 없었다. 평소보다 수수하니 옷 스타일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뭐야? 무슨 일이야?
“아니, 밖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아닌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야.
“얼굴은 못 봤거든. 머리는 똑같은데, 어깨까지 오는 예수 머리.”
-새끼, 요즘 그 머리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민석의 말을 들으니 아닌 것도 했다. 그리고 진짜 매니저라도 무슨 상관이람. 옆 건물 친구 집에 놀러 갔었나 보지.
-그나저나, 휴일에 이 시간까지 늦잠 자는 걸 보니 아직도 여자가 없나 보군?
“남이사.”
-시정이 형 옆에 뒀다 뭐할래? 한 명 넘겨 달라 그래.
“여자가 물건이냐?”
-소개 받으라 이거지.
곧 결혼을 앞둔 민석은 요즘 틈만 나면 여자 좀 만나라고 성화였다. 혼자일 때랑은 세상이 달라 보인다나? 만날 때마다 제 아내 될 사람 자랑을 하느라 바쁜 놈이었다. 바보처럼 헬렐레해져서 휴대폰 배경화면을 쓰다듬는 게 조금 징그럽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행복해 보이긴 하더라.
-말 나온 김에 소개팅 안 할래?
“허, 갑자기?”
-우리 와이프 후밴데, 성격도 되게 착하고, 얼굴도 착하고, 몸매도 착해. 한번 만나 볼래?
“그렇게 착한 분이 날 왜 만나냐. 나는 됐다.”
-야.
“아, 안 해!”
갑작스러운 소개팅 제의에 잠이 확 깼다. 얘가 아침부터, 아니 점심부터 왜 이럴까. 격한 거절에 덩달아 흥분한 민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이제 30이다! 좋은 기회 있을 때 잡으렴, 친구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진짜 괜찮은 여자야.
“그 괜찮은 여자분 시정 선배나 소개해 드리든가. 안 그래도 요즘 여자 때문에 고민 많은 거 같던데.”
-그 양반은 혼자서도 연애사업 잘하시잖아. 너는… 아휴! 하여튼 너는 나라도 신경 안 쓰면 평생 혼자 살 거 같아서 그런다!
우리 부모님도 터치 안 하는 내 연애를 네가 왜…. 요즘 따라 내 연애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밥 먹자는 전화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네. 갑자기 뭐에 자극을 받은 건지, 민석이 기를 쓰고 소개팅을 주선하려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르고, 달래고. 그래도 안 되자 화까지 낸다. 새끼, 싫다는데 왜 자꾸 강요해!
“소개팅 얘긴 이제 그만하자. 너 배 안 고파? 사무실에 시정 선배 있으니까 연락해서 같이 점심 먹어.”
-이 고집불통! 어휴…. 알았다. 근데 너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꼭 연락해라? 어?
“알았어. 새끼야.”
몇 번이고 되물어 약속을 받아 낸 놈이 아쉬운 목소리로 ‘우리 여보님 후배라서 정말 좋은 사람인데….’ 라고 중얼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어휴, 아직도 귓가가 앵앵거리는 것 같네. 소개팅 자체가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다 듣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게다가 착하고, 착하고, 착하고 엄청 괜찮은 사람이 말이 되냐?
해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사방에 깔린 네온사인 탓에 어둠이 느껴지질 않았다. 달을 가릴 정도로 모든 게 빛났고, 낮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거리를 붐볐다. 몇 년이나 왔기에 익숙해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첫 번째 편의점을 지나 100m쯤 안쪽에 위치한 곳. 신경 쓰지 않는다면 여기 가게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간판이라도 좀 더 화려하게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매니저는 활짝 웃으면서 “그래서 찾아오는 분들이 더 의미 있는 거죠.”라고 답했었다.
그 수수한 문 앞에 서서 살짝 가빠진 숨을 골랐다. 사실 한숨일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믿어야지 뭐. 딸랑-.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어, 아무도 없네? 그 소리에 바 안쪽에서 검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잔을 닦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유 씨! 어서 와요!”
과할 정도로 나를 반기며 매니저가 해맑게 웃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웃으면서도 손에 쥔 마른행주가 쉼 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어제 추리닝도 잘 어울렸지만, 청바지도 멋지네요. 늘 업무가 끝난 후였기에 이곳엔 정장 차림으로 오는 게 보통이었다. 나한텐 청바지도, 추리닝도 평범한 차림 중 하나였지만, 일일이 모든 걸 칭찬하는 매니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멋쩍으면서도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손님이 없네요?”
“오늘은 좀 늦게 오픈하려고요.”
“엇, 저 때문인가요? 설마 제가 장사에 차질을….”
“아, 아니에요! 내가 어딜 좀 다녀와서….”
어딜 다녀왔다는 매니저의 말에 문뜩 낮에 봤던 남자가 떠올랐다. 골목을 벗어나던 예수 머리…. 가뜩이나 긴가민가한 모습이 시간이 지나자 기억 속에서 더 흐릿해져 있었다. 늘 앉는 테이블에 앉으며 아무 생각 없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점심쯤에 그 친구분 댁에 계셨나요?”
“…네?”
기본안주를 가져다주던 매니저의 손이 일순간 멈칫거렸다. 뭐야. 마치 내가 하면 안 될 질문이라도 한 것 같잖아.
“아, 별건 아니고 비슷한 분을 본 것 같아서요.”
수습하듯 급하게 뒷말을 잇자 매니저가 하하, 웃으며 들고 있던 과자를 내 앞에 내려 뒀다.
“아뇨. 오늘은 간 적 없어요. 그건 그렇고 저녁은? 빈속에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안 먹었으면 뭐라도 해 줄게요.”
“괜찮아요. 저녁 먹고 왔어요.”
그럼 바로 시음해도 되겠네. 매니저가 실없이 웃으며 다시 바의 안쪽으로 돌아갔다. 조신하게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매니저가 쉐이커 안에 얼음과 여러 종류의 술을 조금씩 부어 넣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TV에서 본 것처럼 불을 붙이거나 머리 위로 병을 던지는 등의 화려한 쇼맨십은 없었지만, 5분도 안 돼서 완성된 칵테일들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 빠르고 숙련된 솜씨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본 것 같다.
“왼쪽부터 콜레가, 아모르, 페카토르라고 이름 붙였어요.”
붉은빛의 칵테일들이 은은한 조명에 반짝이며 젤리처럼 흔들렸다. 마시기도 전부터 은근하게 풍겨 오는 달달한 향이 시각과 더불어 후각까지 유혹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살짝 긴장된 듯 손끝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아모르- 뭐요? 부르기 어려운데… 그래도 어감은 좋네요.”
“많이 어려워요? 라틴어 중 좋아하는 이름으로 붙여 봤는데… 참고해야겠네.”
바 위에 놓인 노트를 펼치고 급하게 무언가를 휘갈겼다. 너무 악필이라 확신은 없지만 대충 이름이 어렵다는 소린 거 같았다. 자 그럼, 시음해 보세요. 메모를 끝낸 매니저의 권유에 가장 가까이 있던 코스터를 가볍게 끌어왔다.
일단은 콜레가부터. 긴 글라스에 가득 찬 음료는 투명하면서도 아래로 갈수록 진한 빛을 띠었고, 가니시로는 하와이안 풍의 빨대와 레몬이 꽂혀 있었다. 대충 어떤 맛일지는 예상이 가네. 우산 달린 빨대를 쪼옥 빨자, 역시나 주스와 술이 섞인 맛이 났다. 오렌지… 아니 자몽? 매니저의 추천으로 입을 대고 마시니, 섞이지 않은 술이 강한 향을 내며 목을 타고 내려왔다.
“어때요? 위에 얹은 건 보드카에요.”
“음… 괜찮은 것 같네요.”
“솔직하게는?”
“…보드카는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하하, 그럴 줄 알았어.”
작업주의 정석 같은 느낌이랄까. 자신작이었는지 매니저는 웃으면서도 약간 아쉬운 얼굴을 보였다.
다음은 아모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아마도 사랑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넓적한 칵테일글라스에 한가득 담긴 음료는 이름과 어울리는 선명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어째 딸기우유 같아 보이기도 하고. 글라스의 얇은 다리를 쥐고 입술을 적시자 달콤한 맛이 혀를 확 휘어 감았다. 달달한 냄새가 얘한테서 나는 거였구나. 마냥 단맛이라 하긴 좀 그렇고, 솜사탕 맛?
“와, 되게 달콤하네요.”
“일부러 달게 해 봤어요. 요즘은 이런 것도 인기라.”
“괜찮네요.”
“근데, 선유 씨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내 입맛이야 이미 오래전에 들켰다. 맛있긴 한데, 이것도 내 취향은 아니라…. 입술만 살짝 대고 더 마시질 않자 매니저가 피식 웃으며 마지막 잔을 건넸다.
“마지막 거는 아모르처럼 달지 않아요.”
작고 아담한 칵테일 잔에 담긴 페카토르. 테두리엔 반짝이는 소금이 띠를 두르고 있었고, 새빨간 음료 안에 빠진 체리는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그 색과 색이 더해져 더 깊은 색을 내며 마치… 투명한 피를 담아 둔 것만 같았다. 살짝 흔들자 체리가 뾰족하게 꺼진 모서리를 둥실- 하고 굴렀다. 양 자체는 한입에 털어 넣을 수도 있을 만큼 작았지만, 이게 소주는 아니잖아? 점잔을 빼며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곧 새하얀 결정이 입술에 닿았고, 붉은 데킬라가 함께 어우러지며 짭조름한 여운이 혀끝을 맴돌았다.
“어때요?”
극단적으로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담스럽게 알콜의 맛이 강하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여태 이 가게에서 마신 술 중에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말없이 남은 잔을 비우자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메뉴엔 이걸 넣어야겠네.”
입술에 붙은 소금을 혀로 핥으며 잔 안에 있던 체리를 오물거렸다. 술에 절여진 체리가 쌉싸름한 과즙을 내뿜었다.
“한 잔 더?”
“와, 진짜요? 저야 좋죠.”
더 준다는 말에 거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칵테일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술보단 음료라는 느낌이 강하고, 한 잔만 마시긴 아쉬운 양이다. 특히나 페… 그래 페카토르. 이건 다른 것보다 양이 훨씬 적은 편이라 한 잔으론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칵테일이 작업주인 이유가 있다니까.
한 잔, 두 잔… 공짜 술이라 부담 없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넉 잔째다. 이쯤 되자 살짝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묘한 취기에 눈을 꾹- 비비자 매니저가 서둘러 얼음물을 만들어 왔다. 얼마나 차가운지 컵 표면이 벌써 새하얗게 변하며 손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안주도 더 줄게요.”
“아니에요. 더 안 주셔도 돼요!”
“사양하지 마요. 어차피 못 파는 거 주는 거니까.”
이미 과일까지 후하게 대접받은 후였다. 그것마저도 자투리 과일이라 했으면서 양이 꽤 됐기에 배가 부를 지경인데, 여기서 뭘 더 해 주시려고…. 내 거절에도 한사코 괜찮다며 매니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부탁받은 자리라고 해도 이렇게 서비스가 많으면 공짜로 먹기가 미안하잖아. 억지로라도 계산을 하고 가야겠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들려오는 식기 소리가 꽤 아득하게 느껴졌다. 매니저가 없는 틈에 빈 가게를 여유롭게 둘러보니, 새삼 여기가 이런 곳이었나 싶었다. 평소보다 넓어 보이고, 조용하고, 어두운…. 3년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이런 분위기도 가지고 있었구나. 낯선 곳에 와 있는 것만 같아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그 기분엔 걱정과 고민도 한몫했다. 사실 오늘도 문을 열기 직전까지 망설였으니까. 또 불편해지면, 그런 소릴 듣게 되면 어쩌지. 하지만 너무 과하게 걱정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술이 들어갔기에 방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 시간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다시 와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으면 그때 집 앞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겠지. 그럼 조금 아쉬웠으려나?
맨정신이라면 절대 없었을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딸랑-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텅 비어 있는 가게에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는 장신의 남자. 손님일까? 의아해하는 찰나 나를 발견한 남자가 곧장 내게 다가왔다.
“누구? 사장님 어디 갔어요?”
“아, 주방에 계세요.”
누군지는 내가 묻고 싶다. 내 대답에 남자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날 위아래로 훑었다. 뭐야 시발.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낯선 목소리에 주방에 있던 매니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언제 묶었는지 등 뒤로 늘어진 새까만 포니테일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누가 왔…”
“호준 형!”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그의 반가운 인사에 매니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뭐- 일이 있어야 오나. 한잔하러 왔지. 근데 이쪽은….”
동의도 없이 테이블에 착석한 남자가 다시 나를 훑어보다, 돌연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아씨! 깜짝이야!
“아하~ 남자친구구나!”
“그,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아니긴! 안녕하세요. 저는 호준 형이랑 제일 친한 동생인 최강훈이라고 합니다.”
당황한 매니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남자는 자신을 강훈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내게 내밀어진 큼직한 손. 일단은 그 손을 가볍게 맞잡아 흔들었다.
“이선유라고 합니다. 매니저님 말대로 그런 사이는 아니고요, 그냥 단골이에요.”
“어? 아닌 것 같은데? 진짜요…?”
매니저의 성향을 아는 걸 보니 정말 친한 지인이거나, 혹은 이쪽도 게이인 모양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매니저가 순식간에 어두워진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선유 씨. 강훈이는 진짜 연락 없이 온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기분 나빠하진 마요.”
“괜찮아요.”
“미안해요…. 정말.”
저 정도로 미안해하니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대신 이거 한 잔만 더 주심 안 될까요?”
“워,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게요!”
매니저는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허둥지둥 바 카운터로 들어가 500cc 컵 가득 페카토르를 만들어 줬다. 이야, 이걸 다 마시라고? 한 잔만 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파격적으로 변한 양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자, 보고 있던 강훈이 익숙한 듯 안쪽에서 다른 잔을 하나 더 꺼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핏빛 음료를 들어 빈 잔에 반절을 덜어 냈다.
“칵테일을 누가 이렇게 마셔! 형도 참 별나. 이건 제가 마셔도 되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도 전, 이미 강훈은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너야말로 칵테일을 누가 그렇게 마시냐.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벌써 질린 기분이 들었다. 마치 구시정 업그레이드 버전 같달까. 내 불편함이 많이 티가 났는지 매니저는 주방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강훈의 옆에 앉았다.
첫 잔에 비해 맥주잔은 매우 무거웠다. 그래도 맛은 여전히 좋았지만, 배가 불러서 다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500 잔을 들고 홀짝이니 벌써 본인의 잔을 거의 비워 낸 강훈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나와 매니저 번갈아 바라봤다. 쓰으읍.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소리를 내는데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가… 아닌 게 아닌데….”
“최강훈. 너 괜히 헛소리할 거면 가라.”
강훈의 혼잣말에 매니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중간중간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걸 봐서는 강훈이 정말 뜻밖의 방문을 한 듯했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 됐지? 나 오늘 위로받으러 왔단 말이야!”
위로받으러 왔다- 강훈은 그렇게 말하고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년 넘게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유부남이더라. 게다가 애처가라고 소문까지 난 애 딸린 유부남. 손가락에 반지도 없어서 당연히 싱글인 줄 알았는데! 어쩐지 주말에 연락하면 잔업 중이라 하고, 만날 출장 갔다고 하더라. 사랑한다더니 우린 섹파 정도에 불과했다. 내 몸이 목적이었던 거지! 음탕한 새끼!
짧지만 긴 막장 스토릴 풀어내며 어지간히 속이 탔는지 강훈은 어느새 내 술잔까지 가져가 들이키고 있었다. 겨우 몇 잔을 천천히 마신 나도 술기운이 오르는데, 갑자기 많은 양을 마셨으니 오죽할까. 술이 원래 약한 건지 아니면 이 칵테일이 독한 탓인지. 중간부터 강훈의 눈이 조금씩 풀리더니 이젠 혀까지 꼬부라졌다.
“내가! 내가 마뤼야! 그 변태 새끼보다 더 멋!진! 남좌를 만날 거라고 내가…!”
“강훈아…, 너 많이 취했다. 택시 불러 줄 테니까 집에 가.”
초면인 내 앞에서 주사를 부리는 게 보기 민망했는지, 매니저가 강훈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애를 썼다. 그때마다 강훈이 거세게 저항한 것은 뻔했다. 원래 술 취한 사람한테 가라- 그만 마셔라- 그러면 더 싫어하잖아. 하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형 너무한 거 아냐?! 내가 실연당했다는데 위로는 못 해 줄망정…!”
“연락이라도 하고 왔으면 내가….”
“시발, 핑계는! 저 남자 때문이면서!”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훈의 손가락 끝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당황해서 매니저를 올려보니, 매니저 역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쟤 뭐래요?
“죽이 척~척~ 잘 맞네~. 둘이 사귀는 거 맞잖아! 시발, 나만 외롭지!”
“최강훈!”
“그럼 썸이냐?”
“자꾸 헛소리할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
“강한 부정은 긍정이랬어!”
“너 진짜!”
이젠 매니저까지 씩씩거리며 열이 오른 얼굴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자 강훈이 매니저에게 대항하듯 들고 있던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아니면 왜 차별하냐고! 저 사람이 뭔데!”
아니 시발, 나는 왜 자꾸 끌어들여. 갑작스러운 난동에 기껏 취했던 술이 다 깨고 있었다. 쾅! 쾅! 점점 커지는 소리에 잔이 곧 깨질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살짝 몸을 뒤로 피하자, 매니저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강훈의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 택시 잡아 줄게!”
“어어, 놔. 이거 놔. 씨발! 나 더 마실래! 아이 씨, 이 형이 연애하더니 변했네! 나는 이렇게 괴로워 죽겠는데! 형은 애인이랑 붙어서….”
“아니라고! 아직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아직~?”
매니저가 강훈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댈 곳이 없어진 강훈이 와르르 무너지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아직 사귀는 게 아니다? 역시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씁쓸했다. 확실하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는 이 상황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있었을 거란 소리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무언가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화가 났다. 안일하다는 걸 알면서 이곳에 있는 자신과 일방적 감정을 호소하는 매니저에게. 그리고 저 주정뱅이 새끼한테도.
“자, 잠깐. 잠깐만, 선유 씨, 설명할게요.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아뇨. 괜찮아요. 강훈 씨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잘 살펴 주세요. 약속했던 메뉴는 결정됐으니까 저는 가 보겠….”
“실수에요! 다,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어요!”
매니저의 다급한 변명과 동시에 강훈이 소파에서 미끄러졌다.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은지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버린다. 안쓰러웠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매니저가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선유 씨!”
여러 의미로 불쾌했다. 닿은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손을 빼냈다. 더 이상의 여지는 없어야 했다.
“하아…. 의도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강훈 씨는 매니저님 계획엔 없었겠죠.”
“선유 씨, 저는….”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말도… 매니저님 말대로 당황해서 나온 소리라 생각할게요. 하지만.”
“…….”
“이제 확실하게 알았어요. 제가 여길 오는 게 매니저님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왜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건지…. 제가 좀 더 단호하지 못한 탓이었네요.”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시발. 내 잘못이지. 게이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들락거리니까 저 사람한테 여지를 준거 아니야. 진작 정리했어야 했는데. 단골인 게 뭐, 집이 가까운 게 뭐 대수라고 여길 계속 왔냐.
“제발… 선유 씨. 이러지 마요.”
“여태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새 메뉴 잘 팔리길 바라요.”
지갑에서 현금을 몇 장 꺼내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러자 매니저는 그 자리에 서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가지 마요…. 나, 나는 선유 씨 포기 못 해요. 좋아한단 말이에요. 진짜 좋아한다구요!”
혼자 드라마라도 찍는 줄 알았다. 좋아하는데 뭐 어쩌라고. 나는 안 좋아한다는데 왜 자꾸 그러지. 이젠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기적인 저 사람에게 질렸을 뿐. 포기하지 않겠다 소리치는 매니저의 말에는 답답함을 넘어서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한 번만 더? 애초에 난 어떤 기회도 준 적이 없었다. 더는 대꾸할 이유도 없다고 느껴져 말없이 등을 돌려 가게를 나섰다.
골목과 멀어질수록 점점 빨라지는 걸음에 숨이 차올랐다. 큰길로 나왔을 땐 거의 뛰고 있더라. 마침 지나던 택시를 붙잡아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 쉬는 날 이게 뭐야. 괜히 심란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민석의 연락이 잔뜩 쌓여 있었다.
[소개팅 ㄱㄱ,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술 때문에 감정이 예민해진 게 틀림없었다. 고작 저 한 줄이 뭐라고. 여태껏 의미 없이 나를 스쳤던 말들이 가뜩이나 복잡한 내 속을 헤집어 놓았다.
우리 이제 30이야! 거절할 나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 잡아.
넌 아직도 혼자냐? 언제 애 낳아서 언제 키울래?
네 형수 될 사람 왔다 갔는데 괜찮더라. 선유야, 너는 만나는 사람 없니?
나는 선유 씨 포기 못 해요!
아, 시발….
-여보세요?
“민석아. 난데.”
-어.
“그 소개팅…. 아직 유효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