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7 (6/46)

D-DAY -7

“대리님.”

“네. 수진 씨.”

“부장님이 비도 안 오는데 문 앞에 우산 세워 두지 말래요~.”

퇴근 후에 데이트라도 있는 건지 꽃분홍색의 치마를 하늘거리며 나타난 수진이 우산을 내밀었다. 며칠 전 사무실 앞에서 주웠던 그 우산이었다. 주웠다 해야 할지, 빌렸다 해야 할지…. 어쨌든 출처가 불분명하기에 주인이 있다면 가져가라는 뜻으로 주운 위치에 세워 뒀는데, 이틀째 번번이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부장님까지 한 소리 하셨으면 어쩔 수 없지. 

“아…. 고마워요.”

잘 말린 우산은 여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진짜 주인이 없는 건가? 이대로 집에 가져갈까 했지만 내 것도 아니고, 혹시나 누군가 급할 때 사용하라고 사무실 한쪽 구석에 세워 뒀다. 주인이 없으면 다 같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편이 좋잖아. 우리 팀이 주인 하지 뭐.

일어난 김에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나오는 건 익숙한 담뱃갑이 아닌 딸기 맛 막대사탕이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탕을 꺼내 들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시정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시정의 입 모양이 ‘바-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지금은 저렇게 여유로운 척 웃고 있지만, 오늘 시정이 먹은 사탕은 무려 10개가 넘어갔다. 겨우 점심을 넘겼을 뿐인데 말이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게 어지간히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가끔 보면 사탕을 담배처럼 들고 쪽쪽 빨고 있더라니까. 게다가 어제 마신 술이 좀 많아야지. 숙취까지 겹친 탓에 시정의 얼굴은 평소보다 빛을 잃은 상태였다.

일부러 담배를 참으려니 좀 허전하긴 했지만, 골초인 시정이 느끼는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걸 오늘 하루의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20만 원은 내 것이겠군. 작은 승리를 확신하며 딸기우유 향의 사탕을 뜯어 입에 물었다. 윽, 달다.

“그런 취향이셨어요?”

선임들과 함께 외근을 나갔던 정태가 돌아왔다. 인사도 생략하고 그런 취향이셨냐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안에 있는 사탕을 반대로 굴렸다.

“어떤 게?”

“사탕이요. 단 거랑은 벽을 쌓고 지내실 것 같은데.”

정태가 코끝을 찡긋거리더니 대리님한테서 딸기향이 나요. 라고 중얼거렸다.

정태 말이 맞다. 단 것보단 짠 것을 더 좋아하고, 초콜릿, 사탕 같은 건 거의 즐기질 않는 편이었다. 때문에 정태가 술에 취해 샀던 14만 원어치의 과자를 나눠 주겠다 했을 때도 단칼에 거절했었지.

“딸기가 아니라 초코라서 안 받으셨군요.”

“오해하지 마요. 금연 중이라서 물고 있는 것뿐이니까.”

애초에 내가 산 사탕도 아니고, 좋아하지도 않으니 맛은 상관없었다. 시정이 내 몫이라며 책상 위로 던져준 것 중에 유독 딸기가 많았을 뿐. 다시 혀로 사탕을 굴리자 사탕과 치아가 부딪쳐 또로록 하는 소리가 났다. 슬쩍 사무실 안을 돌아보자 어느새 또 금단현상이 몰려왔는지 시정이 막대 사탕을 2개나 물고 키보드를 내리치고 있었다.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정태가 발광하는 시정을 보며 상황이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내기 중이거든. 정태 씨는 비흡연자지? 웬만하면 배우지 마요. 언젠간 저 사람처럼 될지도 몰라. 반나절 만에 저러고 있잖아.”

“보나 마나 구 주임님이 먼저 시작하셨겠네요.”

“와, 이제 정태 씨도 회사 사람 다 됐네. 구 주임님 성격도 알고.”

나 이외에도 시정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건 축하할 일이었다. 기특한 마음에 주머니에 넣어 뒀던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우연찮게도 또 딸기 맛이다.

“줄게요.”

“…고맙습니다.”

반 박자 느리게 정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분홍색 사탕을 받아 들었다. 음… 딸기 싫어하나? 살짝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다시 시정 쪽을 돌아보니 여직원들이 주변에 모여 “저도 사탕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하고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일쯤 시정이 선물용 사탕 한 통을 더 사 오겠군.

갑자기 시정이 보냈던 사진이 생각났다. [금연의 좋은 방법 12 - 키스]. 아마 저 중에 절반 이상은 시정이 원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입술을 내줄지도 몰랐다. 인기 있는 삶이란 어떤 걸까? 자존심은 상하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젠장.

“이 대리님?”

“아….”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사무실 안쪽만 바라보고 있으니 정태가 애매하게 눈치를 본다. 도리질을 치며 시정을 향한 사소한 질투를 거뒀다. 부러워할 일이 뭐 있어. 여자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 잘 따르는 부하 직원이 있잖아. 여전히 좀 사납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고….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정태를 향한 동료애가 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떤 부하가 반찬까지 해다 바치겠어. 너니까 해 주는 거지. 감사와 애정을 가득 담아 뻣뻣하게 서 있던 정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더 필요하면 주임님한테 가지 말고 나한테 말해요. 많으니까.”

“이거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정태도 단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스스로 동료애를 운운해 놓고 바로 드러난 무심함이 부끄럽다. 아 역시, 반응이 느렸던 이유가 있네. 속으로 나 욕하고 있는 거 아냐? 

짧은 사담을 끝내고 잠시 미루던 업무로 복귀했다. 어느새 물고 있던 사탕은 거의 녹아 막대기와 따로 입안을 구르고 있었다. 사탕 조각을 아작아작 씹으며 회의용 자료를 검토하고 있으니, 띠링- 하고 사내 메신저의 알람이 울렸다. 막내 인턴들이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첨부된 파일은 새로 맡긴 자료였다. 힐끔, 인턴들 쪽을 살피자 다들 며칠 전보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게 내려와 있다.

“…이제 좀 감 잡은 것 같네.”

드디어 그럴듯한 걸 만들어 냈다. 아직은 새내기 리포트 수준이지만, 성실하게만 해 주면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네. 답으로 엄지손가락 이모티콘을 보내줬다.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들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더 고생하라는 뜻으로 수정할 부분을 몇 군데 지적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듣는 칭찬이라고 기분이 좋은지 수줍은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인턴들도 말썽이 없고, 외근을 나간 영업팀은 무려 계약을 2건이나 따 왔고. 오후 회의는 평소보다 속전속결로 진행돼서 무려 30분 만에 끝이 났다. 오늘따라 업무가 술술 풀린 덕에 아-주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할 수 있게 됐다. 맨날 오늘만 같았으면!

원룸 골목에 들어서자 꼬르륵- 하는 애처로운 소리가 낮게 울렸다. 저녁때가 조금 지났던지라 텅 빈 위장이 과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퇴근길에 밖에서 사 먹을까 했지만, 냉장고 안에 넣어 둔 정태의 반찬이 생각났다. 으, 상상만 했는데 벌써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같네. 오늘 저녁은 뜨끈한 밥에 4첩 반찬. 너로 정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 찬장을 열었다. 그 안엔 자취생의 필수품인 즉석밥과 통조림들이 가득했다. 한때 자취 밥이라는 로망에 빠져 사다 둔 식품들이었다. 물론 정말 심각하게 요리의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거의 건드리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밥을 데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즉석밥을 품을 전자레인지가 카운트를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발끝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꼬르르르륵-. 금연하는 사람들이 왜 살찌는지 알 것 같네. 하루 종일 사탕만 물고 있었더니 출출함이 평소의 배로 느껴졌다. 1분 남았는데… 아, 못 참겠다. 결국, 밥이 데워지는 걸 참지 못하고 식탁에 꺼내 둔 반찬 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입에 넣자마자 느껴지는 맛이…, 아니 향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했다. 상한 걸까? 냉장고에 넣어 뒀는데 며칠 만에 상할 리가 없잖아. 의아함에 반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전엔 보지 못했던 반투명한 하얀색 액체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게 뭐지? 기름인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기름이 하얗게 굳는 경우는 보통 고기 기름인데, 나물에 고기 기름? 게다가 굳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액체의 형태다. 킁킁. 게다가 심하진 않지만 약간의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모든 반찬이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냉장고가 고장 난 게 아닐까? 급하게 냉장 중이던 다른 식품들도 살폈지만, 유독 정태의 반찬만 이상했다. 이유를 찾지 못하자 피해의식까지 들었다. 설마 상하기 직전이라 일부러 나한테 처리시킨 건…. 에이, 설마 그랬겠어. 괜한 애 의심하지 말자.

“…어쩔 수 없지.”

아깝긴 하지만 그냥 두고 먹기엔 상태가 너무 찝찝했다. 아씨,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게다가 얼마 먹지도 못하고 그대로 버리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정태에게도 미안했고, 또 버려지는 반찬에 죄책감도 들었다. 

우울함에 배고픔조차 잊은 채 현관 서랍을 열었다. 개나리색의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버릴 양이 꽤 됐기에 한 장으로 부족할 것 같아 그냥 남은 봉투를 다 꺼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서랍 바닥에 깔린 각 잡힌 하얀 봉투가 눈에 띄었다.

“어라?”

어제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던 종량제 봉투였다. 낱장도 아니고 뜯지도 않은 새것이 묶음으로 들어 있었다. 와, 어이가 없네! 고작 맥주 몇 캔에 정신이 없어서 이걸 못 찾은 거야? 술 담배 때문에 몸이 망가지긴 한 모양이다. 어쩐지, 요즘 컨디션도 예전 같지 않더라니. 진작 관리 좀 할걸.

꾹꾹 눌러 넣었음에도 봉투가 터질 듯 꽉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네. 냉동실에 얼려 둘 양은 아닌 것 같아서 슬리퍼를 찍찍 끌고 밖으로 나왔다. 습한 날씨에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엔 벌레가 잔뜩 꼬여 있었다. 뚜껑을 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여는 순간 저 벌레들이 다 달려들 것 같아서…. 으 소름. 결국, 한 발 멀리서부터 숨을 멈추고 손끝으로 조심히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안쪽에 봉투를 살짝…. 볼일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날뛰는 벌레를 손으로 쫓으며 후다닥 뚜껑을 닫고 뒤로 도망쳤다. 벌레 너무 싫어!

괜히 찝찝하게 느껴지는 손을 털며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원룸 앞 가로등 아래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주변이 어둡긴 해도 이 동네에선 흔치 않은 헤어스타일이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혹시- 했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매니저님?”

“어, 어. 안녕하세요. 선유 씨.”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돼 놀랐는지 장발의 매니저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게가 아닌 곳에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 오늘 가게 쉬는 날이라…. 친구가 어, 저기! 저 건물에 살거든요.”

매니저가 가리킨 곳은 우리 집 바로 옆 건물이었다. 놀람도 잠시. 매니저가 금방 반가운 기색을 비치며 웃었다.

“선유 씨도 여기 살아요?”

“이 근처가 집이에요. 친구분 댁이 저희 집이랑 참 가깝네요.”

“그러게, 이런 우연이 있나. 선유 씨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아… 쓰레기 버리고 오는 길이에요. 냉장고가 고장 났는지 안에 있던 반찬이 다 상했더라고요. 혼자 사니까 관리가 쉽지 않네요.”

“혼자 사는 사람들 다 비슷하죠. 뭐. 근데 추리닝 차림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잘 어울리네….”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인데… 하하.”

형식적인 몇 마디를 나누다 보니 금세 말수가 줄어들었다. 보통 가게에선 늘 술이 들어가 있는 상태기도 했고,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분위기가 좋진 않았으니…. 겉치레의 멋쩍은 웃음이 사그라들자 순식간에 어둠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함에 손가락을 꼬물대다가 여기 오래 있을 일은 아니다 싶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는 들어가 볼게요. 매니저님도 친구분 만나러….”

“저, 저기. 선유 씨.”

“네?”

자리를 뜨려고 하자 매니저가 급하게 나를 불러세웠다.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눈을 꾹 감고 소리치듯 말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떨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내일, 내일 뭐 하세요?” 

“…왜요?”

“신메뉴를 뽑았는데, 저희 신메뉴는 늘 선유 씨가 첫 시식 해 줬잖아요. 메뉴에 정식으로 올리기 전에 의견이 필요해서…. 내일 시간 괜찮으면 놀러 오지 않을래요?”

초대를 해 놓고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 역시 매니저와 같은 이유로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며칠 전 그 일 때문에 매니저를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괜히 또 갔다가 불편해지는 건 아닐까. 이제 매니저의 그런 태도도 싫었고,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미안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선유 씨 의견이 확실하니 부탁하는 거예요! 선유 씨가 걱정하는… 그런 건 이제 절대 없을 테니까….”

젠장. 내가 구시정의 발뒤꿈치만큼만 능글맞았으면. 앞에서 이렇게 간절하게 애원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다.

“약속할게요. 네? 선유 씨…. 부탁해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아 싫은데…. 그래도 이 정도로 말하는데 한 번 더 믿어 볼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엔 신메뉴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싶어 하는 거고…. 이게 진짜 마지막이다. 결국, 마지못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매니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고마워요. 꼭 와요. 기다릴게요.”

“음… 네. 저녁때 갈게요.”

“그, 그럼 저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내일 봬요!”

“네, 들어가세요.”

확답을 받아 낸 매니저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옆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참고 있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와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안 간다고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결국 또 가네. 그저 이 미련함이 후회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설마 저렇게까지 말해 놓고 또 그러겠어.

퇴근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었다. 술술 풀리는 업무에 정말 오랜만에 칼퇴근까지. 그런데 막상 집에 오니 반찬은 다 상했고, 매니저랑 약속도 잡아 버렸고…. 좋을 거면 마냥 좋게 해 주지, 왜 점점 구려지냐. 심지어 공복이란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전자레인지가 빽빽거리며 안에 든 밥을 꺼내 가라 울고 있었다. 혼자 한껏 뜨끈해진 밥을 꺼내 쥐자 헛웃음이 터졌다.

4첩 반상은 어디로 가 버리고, 내 앞에 있는 건 참치 통조림과 간장으로 비빈 밥이었다. 그래, 이것도 맛있긴 하지. 유일하게 내가 망치지 않는 음식 중 하나잖아. 하지만 자꾸 정태의 반찬이 아른거리는 통에 이게 무슨 맛인질 모르겠다. 젠장. 조만간 한식 뷔페라도 가든가 해야지.

대충 끼니를 때우고, 더부룩한 배를 문지르며 TV 앞에 앉았다. 딱히 볼 게 없어서 채널을 마냥 돌리고 있으니 갑자기 입이 심심해졌다. 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담배 때문이었다. 평소엔 이렇게 흡연에 대한 욕구가 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몰래 피워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구시정은 모를 거야. 슬슬 찾아오는 금단현상에 모든 생각이 자기합리화되며 달콤한 유혹이 피어올랐다.

아, 잠깐만. 정신 차려라. 이선유. 몸을 생각해서라도 금연해야 한다. 참자. 참아. 여태 참았잖아. 차라리 사탕이나 먹자. 분명 회사에서 가져온 게… 없네. 젠장. 입고 갔던 옷을 다 뒤졌지만, 사탕은커녕 사탕 봉지 하나 나오질 않았다. 이 멍청아. 다 자리에 두고 오면 어떡하냐.

끙- 하고 앓는 소릴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간식을 사러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무의식중에 서랍 안에 숨겨둔 새 담배를 찾아 피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런데 지갑은 또 어딜 간 걸까. 신기하게도 물건 놓는 자리는 늘 뻔한데 찾으려 하면 안 보였다. 식탁에도 없고, 옷에도 없고. 가방 안에 있나?

“어?!”

가방을 열자 나도 모르게 반가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작고 새하얗고 동그란, 박하사탕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한 주먹이 넘게. 언제 넣어 뒀지? 누군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구시정이 넣어 둔 게 분명했다. 애초에 오늘 사탕을 사다 안겨 준 것도 시정이었으니까. 거참, 박하도 있었으면서 회사에선 왜 딸기만 잔뜩 준 거야. 하나를 까서 입에 물자 상쾌한 단맛이 녹아내렸다.

“음. 딸기맛보다 훨씬 낫네.”

나가기 싫었는데 다행이다. 평소에 사람을 괴롭혀서 그렇지, 가끔 이렇게 기특한 짓도 한다니까. 입안 가득 퍼지는 박하 향에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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