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8 (5/46)

D-DAY -8

“들어오세요.”

“오냐.”

시정은 마치 제집에 온 듯 자연스레 들어와 침대 위에 자릴 잡았다. 예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지라 별다른 제재는 하지 않았다.

언제 너희 집에 갈 수 있냐! 하도 성화를 부리는 탓에, 둘 다 야근이 없는 오늘이 날이다 싶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마침 집 앞 마트에서 주류 세일을 하더라. 덕분에 팔자 좋게 양팔 가득 술을 껴안고 들어오는 참이었다. 

“이야, 질투 나네!”

“뭐가요.”

사 온 술들을 냉장고로 옮기고 있는데 시정이 탄성을 질렀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주방 구석에 씻어 엎어 둔 찬합이 있었다.

“누구는 이런 반찬 해다 바치는 부하직원도 있고~ 부럽다~.”

“별걸 다…. 남자한테 반찬 받는 게 부러워요?”

“남자가 해 주니까 더 대단한 거지! 상사한테 이런 거 해 주기가 쉽냐?”

“선배도 오늘 도시락 받아 놓고, 뭘 부러워해요.”

오늘 점심시간에 직접 도시락을 싸 왔다며 함께 먹자는 직원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나 말고 시정에게. 정태가 해 준 것처럼 집 반찬으로 꾸며진 도시락도 있었고, 알록달록 화려한 색의 샌드위치도 있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걸 받았으면서 웬 질투람.

“그거랑 같냐.”

“다를 건 또 뭐예요.”

“마음이 다르지, 마음이! 맛있긴 한데, 역시 여자한테 계속 받는 건 부담스럽단 말이야.”

시정도 회사에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도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회사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내내 그런 소리를 들었을 테니까. 나이가 들며 탐나는 연애 상대가 탐나는 결혼 상대로 승격이 된 것뿐이다.

“난 아직 결혼 같은 거 생각 없다. 평생 연애만 하고 싶어.”

시정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잘생긴 것도 마냥 이득은 아닌 것 같네. 그저 진지하게 시정을 노리고 있던 여사원들만 안타깝게 됐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앞에 작은 보조 테이블을 펼치고 안주를 늘어트려 놨다. 오징어, 땅콩, 육포 등. 멋들어진 안주는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조합이었다. 남자 둘이 펼친 술판이 화려할 필요는 없잖아. 뚱뚱한 맥주 캔을 마주 들고 가볍게 건배했다. 꿀꺽꿀꺽. 둘 다 목이 탔는지 아니면 술이 잘 넘어가는 건지, 순식간에 반 캔을 비워 냈다. 따끔거리며 목을 자극하는 탄산에 캬- 하고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내가 안주를 먹는 사이, 곧바로 남은 반마저 비운 시정이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말했다.

“전정태가 요즘 너 잘 따르더라.”

“집에 오고 나서 그러네요. 혼자 사는 게 안쓰러웠나?”

“하긴… 집에서 좀 홀아비 냄새가 나긴 한다.”

“네? 진짜요?”

“장난이야.”

그런 소리 안 들으려 나름 방향제도 뿌리고 살건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니 시정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넌 예전부터 그랬어. 좀 신경 쓰인다고 해야 하나? 손이 가는 편이지.”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런 거 있잖아. 길고양이 같은 거.”

“하필 비교해도….”

“말 그대로 비유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를 그렇게 괴롭혔냐. 신경 쓰지 말라며 습관적인 말을 내뱉은 시정이 새로운 캔을 집어 들었다. 칙- 하고 캔을 따는 소리가 유독 시원하게 들렸다. 그리고 맥주 캔이 차곡차곡 쌓여 갈 때쯤, 시정이 술이 싱겁지 않냐며 소주를 꺼내 들었다. 저렇게 먹고 내일 괜찮으려나…. 뭐, 내 몸도 아닌데 상관없지. 게다가 말린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혼자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하던 시정은 혼자 두 병의 소주를 비우고 나서야 드디어 술기운이 도는 듯 침대 끝에 머릴 기댔다.

“집 좋네. 아담해서 관리하기도 편할 거 같고, 회사랑 가까워서 출근도 편하겠고.”

“보증금이 비싸서 그렇지 살 만해요.”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

시정이 이마를 문지르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 꽤 예전부터 시정이 집이 멀다고 불평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1, 2년만 배우고 아버지 회사로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3년이나 있을 줄은 몰랐네. 캔을 흔들자 얼마 남지 않은 맥주가 솨아- 하고 탄산을 뱉어 냈다.

“근처에 편의점도 많고 역도 가깝고 좋아요.”

부러워하니 장점을 알려준 것뿐이다. 시정이 앉은 건지 누운 건지 모를 기묘한 자세에서 눈만 대굴 굴려서 날 바라봤다.

“룸메이트 구할 생각 없냐?”

“이 좁은 집에요? 됐어요. 그리고 여기 주차장도 없어요. 선배 외제차라서 이런 데 대 놓지도 못하잖아요.”

“차는 집에 두고, 회사 가까우니까 너랑 지하철 타고 다니면 되지.”

“제가 싫어요.”

10평짜리 원룸. 화장실 외엔 구별된 공간도 없고, 가구 몇 개랑 침대 하나도 겨우 들어오던 집이다. 이 좁은 집에 남자가 둘씩이나? 게다가 시정은 나보다 키도 덩치도 컸기에 벌써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질색하며 도리질을 치자 시정이 입꼬리를 당겼다.

“우리 사이에~ 뭐 어때서.”

“우리 사이는 무슨….”

부담스러운 어필을 외면하며 새 맥주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뭐가 불만인지 시정이 귀찮을 정도로 칭얼대며 손에 쥐고 있던 땅콩을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아씨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 봐. 집세는 내가 6으로… 아니 7로 지불할게. 어때. 좀 끌리지?”

“여기 월세 그렇게 안 비싸거든요? 이런 데서 살고 싶으시면 저 밑에 부동산 가 보세요. 이 주변에 빈집 많아요.”

“이선유 냉정한 것 보소.”

“아니, 돈도 많으면서 왜 그래요?”

“혼자 살기는 싫어. 나 요즘 외로움 탄단 말이야.”

구시정도 외로움을 타? 충격적인 발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한쪽에 밀어 뒀던 재떨이를 끌어왔다. 근데 라이터가 왜 안 보이냐. 담배를 입에 물고 바닥을 뒤적거리자 시정이 제 주머니에서 금빛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퐁-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림과 동시에 파랗고 작은 불꽃이 솟았다. 아, 역시 비싼 게 멋있긴 하네.

“그건 또 언제 샀어요?”

“몇 달 전에 주문해 둔 거 받았지. 무려 한정판이다. 예쁘냐?”

고개를 끄덕이고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시정에게도 한 개비. 거절 없이 입에 무는 모습이 참 멋들어진다. 좋겠다. 잘생겨서. 별다른 대화 없이 담배 연기를 뻐끔대고 있는데, 연신 라이터의 뚜껑을 여닫던 시정이 중얼거렸다.

“…담배 …끊을까.”

“허, 갑자기?”

“이제 나이도 있고, 몸 관리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언행 불일치가 이런 건가 싶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필터 끝까지 맛있게 빨아 대는 모습에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몸 관리는 이미 잘 하고 있잖아? 그 정도 근육이면 됐지, 뭘 더 키우려고….

“그래, 너도 같이 끊자!”

“아씨,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요.”

“같이 하자고.”

“혼자 하세요. 가만히 있는 저는 왜 끌고 가요.”

“요즘 담배 피우는 남자 마이너스다? 여자들이 키스할 때 담배 쩐내 나는 거 엄청 싫어해.”

“아~ 누가 키스할 때 담배 냄새난다 했구나?”

뜨끔했는지 시정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억울한 듯 호소했다. 나 구시정이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나는 담배 냄새가 나도 그것조차 매력이야! 네네, 그러시겠죠. 한참을 혼자 떠들던 시정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내 반응에 조금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였다.

“어쨌건, 같이 금연하자. 내기 어때, 내기. 10만 원 빵.”

“애걔, 겨우?”

“겨우우? 세게 나오시겠다? 좋아 그럼 100만 원.”

“아, 장난해요?”

“어쩌라는 거야. 알겠어, 그럼 50만… 아니야? 그럼 20만 원. 딱 한 달만 해 보자. 그 안에 피우는 사람이 지는 거.”

돈이 많다 많다 했더니 이젠 자선 기부까지 할 생각인가 보다. 이건 내게 더없이 유리한 내기였다. 시정은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태우는 골초였고, 난 식사 후에만 가볍게 피우는 정도였으니까. 안 그래도 요즘 체력이 딸리는 거 같아 금연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끊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금액은 너무 크지 않게 하자….

“음… 그래요. 뭐 한 달 정도야.”

긍정적인 대답에 당장부터 금연을 시작하려는지 시정이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싹 걷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아이고 저 돈 지랄. 저건 분명 술기운이다. 하지만 그걸 말리진 않았다. 난 저 사람을 말릴 자신이 없거든. 좀 아깝긴 했지만 내 건 어차피 한 개비밖에 없었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시정은 인터넷을 뒤져 금연에 좋다는 방법은 모조리 캡처해 내게 보내기 시작했다. 혼자 보지 왜 나한테 보내냐 버럭 소릴 지르니 “넌 내 메모장 같은 존재야.”라며 14장의 사진을 더 보냈다.

“사탕 같은 거 먹으면 좀 덜 심심하대. 아… 살찌겠네. 운동량을 더 늘려야겠다. 그리고… 지금 보낸 거 봐 봐! 얼른얼른!”

거참 귀찮게 구네. 톡 방을 열어 보니 남녀의 노골적인 키스 사진과 함께 주절주절 달린 글이 있다. [금연의 좋은 방법 12 – 키스]. 같은 사진을 보고 있는 시정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질 나쁜 아저씨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키스래! 이거 참 좋은 금연법이네!”

이 금연의 시발점이 키스 아니었냐…. 키스할 때 담배 냄새 난다고 거절당했다던 사람이, 키스가 금연 방법으로 좋다는 글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니 참 묘한 상황이었다. 킬킬대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정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우리 후배님은~ 가장 최근 키스가 언제?”

“만나는 사람 없는 거 뻔히 알면서….”

“넌 꼭 애인하고만 키스하냐?”

“선배는 아닌 사람하고도 해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

역시 구시정이다. 엄청난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늘 한결같은 당당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얼굴 빼면 시체인 인간을 여자들은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나 몰라…. 참, 그 얼굴 보고 따라다니는 거였지.

“진짜 없어?”

“있는 걸 없다 해요?”

“정말… 눈물이 나려 그러네. 없으면 나라도 해 줄까?”

“아악!”

시정이 잘생긴 입술을 쭉 내밀고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징그러워서 나도 모르게 소릴 지르자, 시정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깔 방이 떠나가라 웃어 댔다. 아오 이 미친놈! 그런데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릴 때까지 웃었으면서, 정작 표정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정색하고 싫어하면 내가 상처받잖아.”

“끔찍한 짓 하지 마요. 팔에 소름 돋았어….”

“추워서 그런 건 아니고?”

또다시 입술을 내미는 시정의 입에 땅콩을 한 주먹 쑤셔 넣었다. 아 쫌! 몇 번이나 더 같은 시늉을 하고 나서야 질렸는지 시정이 피식거리며 침대에 기대 누웠다. 입안 가득 머금은 안주를 우물거리는 게 꼭 햄스터처럼 보였다.

“그래서 넌 누구랑 키스하고 싶은데.”

“네?”

“이상형이 뭐냐고.”

“허… 너무 갑작스럽게 물어보시네….”

“어허, 하늘 같은 선배가 물으면 그냥 대답할 것이지. 혹시 모르잖아. 내가 불쌍한 널 위해 오작교를 놔 줄지도.”

이상형 같은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했던 3번의 연애는 전부 고백을 하기보단 받는 쪽이었고, 그마저도 지인의 소개로 만났던 경우가 전부였다. 그래. 나 수동적이다. 인정한다, 인정해. 곰곰이 과거의 여자친구들을 되돌아봤지만 크게 겹치는 공통점은 없는 것 같았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자 시정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좋아하는 연예인 상이라도 말해 보라 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예인보다는… 전 그냥 깔끔한 스타일이 좋아요. 꼼꼼하고 다정하고 그런 사람?”

“얼굴을 안 보시겠다?”

“… 조금은 보겠죠.”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지라 연애보단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떠올렸던 것 같다. 시정과 다르게 나는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누굴 만나서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왕이면 잘 웃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였음 좋겠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나만의 피로회복제 같은…. 욕심이 과한 것 같지만 상상인데 뭐 어떤가 싶다. 하는 김에 더 해 보자면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요리에 전혀 재능이 없으니까. 대신 청소는 잘할 자신이 있어.

“에이. 시시해.”

“물어봐 놓고 시시하다가 뭐예요.”

시정이 물고 있던 오징어를 테이블 위로 툭 내던졌다.

“무슨 대답을 바랐는데요?”

“적어도 가슴 큰 낮져밤이 정돈 나올 줄 알았지.”

“그건 선배 이상형이죠.”

“무슨 소리. 난 낮이밤이도 좋아. 누님들은 밤이건 낮이건 리더쉽이 끝내주거든.”

“이제 선배한테 연상이면 위험한 나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얄밉다며 땅콩이 날아왔다. 어느새 바닥에 굴러다니는 땅콩들이 수두룩했다. 젠장, 침대 밑에 들어간 건 네가 꼭 꺼내고 가라.

우스갯소리로 시작했던 주제가 조금 방향을 틀며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결혼에서 그 이후로. 아무래도 둘 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렇겠지. 대학 다닐 때랑 별로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달라진 주제에 약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대화 상대가 구시정이라는 게 더 놀라운 일이지. 누가 알았겠어. 졸업하면 안 볼 사람 No.1이랑 이러고 있을 줄.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난 부부간에 나이 차는 없다고 생각해. 연상이든 연하든 편하게 부를 거야.”

“전 반대. 웬만하면 서로 존댓말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게 보기도 좋고, 서로 위하는 기분도 들잖아요. 그리고 존대하면 싸울 일도 적다 하더라구요.”

안주가 지겨웠는지 강소주를 비우던 시정이 내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 설마, 여태 나한테 말 안 놓는 이유도 그거냐?”

“…….”

왜 하필 이럴 때 예리하고 난리인지. 시발. 내가 이럴까 봐 너랑 말을 안 놨다. 시정과는 말을 놓기 시작하면 생길 트러블이 한두 개가 아닐 것 같아서 일부러 몇 년째 존대를 고수하고 있었다. 애써 당황을 숨기며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던 오징어를 집어 들었다. 앗, 좀 축축한데. 구시정이 먹던 건가.

“딱 말해. 보기 좋아서냐. 날 위하기 때문이냐. 아님 싸우기 싫어서냐.”

“당연히….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님께 말을 놓을 수가 있겠어요. 존경이죠.”

존경. 아주 잠깐 정태가 떠올랐다. 시정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눈치가 좀 좋아야지. 시선을 피하며 맥주를 쭉 들이켜자 가자미눈을 하고 있던 시정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좋아, 그럼 지금부턴 말 놔.”

“에이…. 갑자기 어떻게 그래요. 이젠 습관 같은 건데.”

말 그대로 몇 년이나 이러고 지내다 보니 이젠 습관처럼 존댓말이 나오는 사이가 됐다. 그걸 하루아침에 어떻게 바꿔.

“하면 되지.”

“못해요. 저는.”

“못해?”

“네.”

“그럼 내가 한다? 아니, 할까요?”

“네에?”

학교에선 후배였지만 직장에선 상사인 복잡한 관계였다. 입사 초기만 해도 둘 다 서로의 관계가 역전되는 걸 여간 어려워했었지. 특히나 시정은 그 높은 자존심에 여간했을까. 시간이 지나 이제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시정은 아직도 회사에서 한 발자국만 나오면 기다렸단 듯이 날 후배로 칭하곤 했다. 근데, 그런 구시정이 회사 밖에서도 존대를 하겠다고? 이번엔 또 무슨 심보야.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맥주가 입가에 흐르는 것도 모르고 시정을 바라봤다.

“서, 선배, 무섭게 왜 그래요.”

“네가 존대가 좋다면서요. 보기도 좋고, 서로를 위하고. 나도 후배님을 좀 위해 보려구요.”

존대인 듯 묘하게 존대가 아닌 듯하다. 분명한 건 구시정은 지금 내가 당황한 걸 즐기고 있다는 거다. 대놓고 얄밉게 웃고 있는 얼굴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몇 번이나 내가 잘못했다며 원래대로 편하게 부르라 했지만, 시정은 끝내 말끝을 내려놓지 않았다. 가뜩이나 고집도 센 양반인데 취기가 올라서 더 저러나. 이것만큼은 뜯어말려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나 역시 술기운이 오르고 있기에 쉽지 않았다.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도 아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졸리고, 귀찮고. 아이, 모르겠다. 술 깨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아이구, 입이 그래서 찢어집니까?”

피곤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하품이 터져 나왔다. 그걸 보고 비웃던 시정도 경쟁이라도 하듯 입을 크게 벌렸다. 어디서 들었는데 하품도 전염된다더라.

“집에 가긴 늦은 거 같으니 주무시고 가세요.”

“난 당연히 잘 생각으로 왔는데요.”

네네, 그러시겠죠. 자기 전에 대충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아 흩어진 안주를 줍자, 딱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시정이 빈 캔과 소주병을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의외로 이런 건 잘해 준다니까. 재활용은 시정에게 맡기고 안주를 포함해 다른 쓰레기를 쓸어 모았다. 별로 늘어놓은 것도 없었는데 모으다 보니 양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새 봉투를 꺼내는 게 나으려나. 잠시 고민하다 결국 종량제 봉투를 꺼내기 위해 일어났다. 내일 출근하면서 버리면 딱이겠네. 

“뭐 찾는데? 요?”

“종량제 봉투요. 어라, 다 썼나?”

쓰레기봉투는 늘 현관 서랍장에 보관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는다. 한 장도 없어? 설마 다 썼나? 서랍 안의 물건을 다 꺼냈지만, 다시 봐도 찾는 건 보이질 않았다.

“없네….”

“일단 다른 봉투에 담든가, 요.”

“그래야겠어요.”

피곤했기 때문에 빠르게 미련을 털어 내고 뒷정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깔끔해진 바닥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고민이 생겼다. 남자가 둘. 바닥과 침대. 누가 어디서 자는가. 하지만 막상 돌아보니 시정은 벌써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

“왜. 같이 잘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시정과는 한 침대에서 잘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정태는 마른 편이라 조금 불편한 게 다였지만, 시정과는 그 불편을 훌쩍 넘어설 게 뻔했다. 정신과 육체 양쪽 모두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계속 터져 나오는 하품 탓에 그냥 미련 없이 바닥에 이불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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