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9 (4/46)

D-DAY -9

정태는 남색의 찬합을 들고 있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귀여운 디자인도, 아기자기한 사이즈도 아닌, 터프하고 커다란 사각형의 찬합. 뜬금없이 내밀어진 찬합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으니 정태가 어서 받으라는 듯 가볍게 흔들어 보인다.

“이게 뭐야?”

“반찬이요.”

“그니까 왜.”

“재워 주신 것에 대한 성의 표시로 봐 주세요.”

성의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는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별거 아니에요. 하지만 별거 아니라고 하기엔 얼떨결에 받아 든 찬합의 무게가 꽤 묵직했다. 뚜껑을 열어 보자 멸치볶음이며 나물 무침 같은 익숙한 반찬들이 가득하다. 순식간에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반사적으로 침샘이 활짝 열리며 입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반찬?

“편의점 음식만 먹으면 몸속에 방부제가 가득 차서 나중에 시체가 안 썩는대요.”

요즘은 다 화장해서 그런 걱정 할 필요 없는데…. 아무래도 어제 집에서 나눴던 말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이런 성의는 난생처음이다. 부하 직원이, 그것도 남자가 가져다준 반찬이라니. 갑자기 찬합의 무게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묘하게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고.

얼른 맛을 봐 달라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애써 어색함을 숨기며 반찬을 조금 주워 먹었다. 아 뭐, 비주얼이나 냄새가 좋기는 한데… 음?! 뭐야?! 맛있어! 기대가 없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짭조름하니 간도 알맞게 잘 되어 있고, 고소하니 아침을 먹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밥 한 그릇이 간절해지는 맛이었다. 보통 솜씨가 아닌데? 어느새 손가락은 다른 반찬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와! 이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고! 장난 아니잖아. 쥐포랑 조림도 최고야!

“누가 한 거야? 어머님이? 설마 냉장고 털어 온 건 아니지?”

“제가 직접 했어요.”

“거짓말. 진짜야?”

“부전공이 조리였거든요.”

이게 부전공이라고? 이 정도면 타고 난 거지. 당장 식당 차려도 되겠다! 얘는 못 하는 게 없네.

누군가가 직접 만든 집 반찬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자취 초반엔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이 한 달이 멀다 하고 반찬을 보내 주셨지만,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그중 못 먹고 상해서 버리는 게 태반이더라.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엔 버리는 것도 아깝고 왠지 엄마한테 죄송한 기분도 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받다 보니 어느 순간 편의점 도시락에 완전히 길들어져 버린 뒤였다.

연신 터지는 감탄과 사무실에 은근히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지나가던 직원들이 기웃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느낀 짠한 감동에 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쑥스러운 듯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너, 사실은 정말 좋은 놈이었구나…. 어쩌면 그때 술 취해서 한 소리도 진심이었을까. 일종의 뇌물을 받고 나서야 마음을 내준 것 같아 치졸하긴 하지만, 지금은 정태가 무슨 소릴 해도 예쁘게 보일 것 같았다.

“괜찮으시면 가끔 시간 날 때 만들어 드릴게요. 양 꽤 되니까 버리지 마시고 귀찮아도 식사 챙기세요.”

“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버려. 정태 씨, 성의가 너무 큰 거 아냐? 고마워. 나중에 내가 한턱낼….”

“음? 무슨 고소~한 냄새야?”

방금 출근한 건지 가방을 덜렁거리며 나타난 시정이 나와 정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와! 맛있겠다! 그리곤 묻지도 않고 우악스럽게 멸치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두 입. 시정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반질거리는 작은 멸치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완전 맛있다!”

“정태 씨가 만든 거예요. 맛있죠.”

“대박. 대박. 결혼하면 마누라한테 예쁨 받겠네.”

성의 없이 우물대며 엄지를 세운 시정은 벌써 멸치볶음의 절반가량을 집어 먹은 뒤였다. 안 짜냐? 잘 먹는 게 참 보기 좋긴 하다만…. 서둘러 찬합의 뚜껑을 덮어 버렸다. 시정의 배가 불러갈수록 그걸 지켜보는 정태의 표정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 먹어요. 내 거예요.”

“이 대리님 치사하시네. 이 맛좋은 걸 혼자 드시려 하고! 내가 나중에 만들어 줄게요! 좀 나눠 먹으면 안 됩니까? 굶고 와서 배고픈데.”

“나가서 빵 사 드세요.”

게다가 만들어 준다니, 무슨 끔찍한 소리야. 시정의 거지 같은 요리 실력이야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MT 때 만들었던 그 지옥의 음식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걸 먹고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토 증상을 호소하는 바람에 잘 가던 고속버스를 세워야 했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우욱! 혹여나 시정이 다시 음식을 하겠단 무서운 소릴 할까 봐 급하게 찬합을 닫아 책상 아래로 숨겼다.

하지만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시정은 업무를 보는 내내 입맛을 다시며 내 쪽을 힐끔거렸다. 덩달아 주변의 여직원들까지 힐끔힐끔. 아마도 아까 시정이 뭘 제일 잘 먹었나 생각하고 있겠지. 이미 정태에게 붙어서 레시피를 배우고 있는 직원도 있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점심엔 도시락이 유행이겠군.

우리 회사는 유독 유행이 빠르게 도는 편이었다. 짧게는 8시간, 길게는 12시간 내내 일만 하는 건 확실히 무리니까. 잠깐의 휴식 중 가볍게 즐길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금방 유행을 타곤 했다. 최근엔 타로점이 유행이었다. 물론 이것도 곧 수제 도시락에 밀리겠지만. 저번 달엔 컬러링북, 그전엔 석고 방향제, 2개월 전엔 리듬 게임이었던 걸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빨리 퍼지는 만큼 빨리 질려서 바뀌는 주기도 빠르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아직 대세는 타로였다. 점심 후 들른 휴게실에 운세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카드는… 지연 씨가 기다리던 이상형을 만날 수 있다고 하네. 그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 그리고 또… 미래에 큰 재물이 들어온다고 하고….”

꽤 잘 본다고 유명세를 탄 사내 점술가 미영 씨가 직원들에게 점심시간을 쪼개 타로점을 봐 주고 있었다. 얼마나 입소문이 났냐 하면, 사무실이 가장 멀리 있는 과장님까지 내려오실 정도였다. 늘 업무 대신 휴대폰을 몰래 만지작거리기 바쁘던 미영도 이 시간만큼은 진짜 점술가가 된 것처럼 진지했다. 딱히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영업부답게 말주변이 좋아 그럴듯한 풀이까지. 덕분에 근래 미영 주변엔 타로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구 주임님! 이 대리님!”

그 인파 중엔 우리 팀원들도 다수 섞여 있던 모양이다. 시정과 자판기 커피를 물고 곁을 지나려는데 우리를 발견한 윤경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타로 보시려구요?”

“아뇨, 그냥 커피 마시러 왔어요.”

“에이, 오신 김에 보고 가세요! 미영 씨 진짜 잘 봐요.”

“주임님, 빨리요~ 네? 얼른 앉으세요.”

당연하지만 나보단 시정이 목적이었던 듯 쫑쫑거리며 다가온 여직원들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럼 한번 볼까? 시정이 못 이기는 척 따라가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비켜서며 자리를 내줬다. 얼떨결에 시정을 마주하게 된 미영의 귓불이 언뜻 붉게 달아올랐다.

“여, 연애나 승진, 건강, 재물 중에 어떤 게 궁금하세요?”

“음~ 전반적으로 다 궁금한데~”

“그럼… 미래에 관해 봐 드릴게요.”

쑥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능숙하게 움직이는 미영의 손. 별다른 동작도 하지 않았는데 촤르륵- 하고 카드가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졌다. 보고 있자니 감탄을 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진짜 전문가 수준이잖아. 미영 씨 사실 투잡 하고 있는 거 아냐? 시정 역시 놀랐는지 미영을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그러자 미영의 양 볼이 귀에서 전염이라도 된 듯 서서히 발그레해졌다.

“마음속으로 주임님에 미래에 집중하며… 카드를 3장 뽑아 주세요.”

집중해서 뽑으라 했건만, 정작 시정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가운데 있던 카드 3장을 뽑아 들었다. 아닌 척해도 사실은 떠밀리는 게 귀찮았던 거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미영이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시정이 내민 카드를 뒤집었다.

“마법사, 별, 태양…. 다 좋은 카드만 나와서 제가 뭘 해석해 드릴 게 없네요. 역시….”

시정 주임님은 타로조차 완벽하세요.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슷한 감탄이 들려왔으니까. 완벽해요! 최고예요! 멋져! 어쩌면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시정은 그런 평가가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가만히 있던 내 손을 붙잡아 당기는 통에 그 시선을 몰아 받은 내가 더 민망해졌다. 사람 당황스럽게 왜 이런담.

“이 대리님도 해 봐요.”

“하하, 전 안 할래요.”

군중심리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시정의 한마디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를 부추기는 사람들이란. 속는 셈 치고 한번 보라는 둥, 돈 안 받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둥…. 잠깐, 나 돈 없어 보여? 정신없이 치이다 결국 시정의 옆에 앉게 됐다. 시정은 내가 당황한 게 재밌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제 허벅지를 내리치고 있었다. 망할 놈….

“3장 뽑아 주세요.”

시정을 앞에 뒀을 때보다 훨씬 침착해 보이는 미영이 한 번 더 타로 카드를 솜씨 좋게 반원으로 펼쳤다. 여전한 민망함에 시정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있던 것을 3개 골라 내밀었다. 무뚝뚝하게 카드를 받아 든 미영이 순서대로 한 장씩 카드를 뒤집어 보여 줬다.

목을 매단 남자, 운명의 수레바퀴, 연인.

시정의 카드처럼 화사하게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모든 카드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것? 그걸 본 여직원 중 하나가 입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뒤집히면 안 좋은 거 아냐?”

저들끼리 말한다고 속삭인 것 같은데, 문제는 너무 가까워서 내 귀에 대고 말한 것마냥 잘 들렸다는 거다. 그 말에 미영이 내 눈치를 보며 제일 첫 번째 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니까 이 카드는요….”

“알겠다!!”

미영이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시정이 빽! 하고 소릴 질렀다. 아씨, 깜짝이야! 덕분에 같이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림을 멈추고 시정을 주목했다.

“목매달 만큼 사랑스런 연인이 생기나 보네~.”

내가 들어도 어이없는 시정의 초 긍정적 해석에 몇몇 타로 맹신자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에이, 그건 아니죠. 주임님. 보세요. 카드가 뒤집혔다니까요?”

“아, 험난한 사랑인가 보지.”

“어머? 주임님! 타로 무시하면 안 돼요. 이거 진짜 정확하단 말이에요! 나중에 저주받으면 어쩌시려고!”

저주…. 비현실적인 단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물론 속으로만. 그것보다 드디어 이 회사에서도 시정에게 반발하는 무리가 생긴 건가? 나머지 카드를 가지런하게 모으던 미영조차 살짝 불만인 얼굴로 시정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 구시정의 진짜 모습을 알 때도 됐지.

“에이, 저주는 너무 갔다. 타로야 말하기 나름 아니야? 물론, 무조건 전부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로만 보자구. 응?”

시정이 큰소리를 냈던 윤경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최근의 본 시정 중에 가장 환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그러자 인상을 구기고 있던 윤경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끄덕끄덕. 우와. 이기적인 세상 같으니.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볼 일이라니까.

점심시간의 막바지기도 했고, 시정 덕에 분위기까지 흐지부지되자 자연스레 모임은 해산됐다. 어차피 직원들끼리 모여 즐겼던 잠깐의 휴식이었다. 자리를 털며 자연스레 이어지는 건 업무 이야기다. 보고서 끝내셨어요? 자료 찾아야 하는데, 그때 서류 중에…. 사무실이 비품 없던데. 거래처에서 연락이, 어쩌고저쩌고.

각자 업무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휴게실을 나서며 앓는 소리를 내는 게, 그게 참 웃기면서도 짠했다. 나도 같은 입장이었으니까. 매일 같은 일, 같은 업무를 반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덩달아 밀려 있는 업무들이 떠오르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대리님. 안 들어갑니까?”

시정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휴게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와 시정뿐이었다. 아. 가야죠. 빈 종이컵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이니 시정이 피식 웃으며 컵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자신의 컵과 곱게 포개 재활용 상자로 휙. 정확하게 골인을 시키고는 내 정수리를 툭툭 치며 어서 일어나라 재촉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일하기 싫어서요.”

“별일이네, 그런 소릴 다 하고.”

확실히 회사 안에서 이런 얘기 잘 안 하는 편이었지. 싫어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혹시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상사라든가, 인사팀이라든가….

“난 또, 타로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네.”

“네? 설마요. 나이가 몇인데.”

제일 안 믿는 사람이 무슨 소리래. 구시정답지 않은 발상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사실 나이를 떠나서, 타로나 사주 같은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시정의 말대로 이런 건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뭐.

게다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기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쏟아진 일이 너무 많았다. 거래처에서 갑자기 변덕을 부린 것이다. 젠장. 매년 같은 조건으로 계약해 놓고 인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어쩐지 더럽게 일하기 싫더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업무용 전화기엔 불이 나는 것 같았고, 만나는 상사마다 짜증이 가득했다. 스트레스가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었지만 애써 그 누구한테도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미 분위기가 너무 나빴으니까! 괜히 나까지 나서서 부추길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그러기엔 내 인내가 너무 짧았던 모양이다.

“이거… 누가 작성한 거야?”

눈살을 찌푸릴 만큼 엉망인 보고서. 맘 같아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대신 주먹을 꽉 쥐며 부르르 떠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소리를 지르는 순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날도 아니고 왜 하필… 오늘 이런 걸….

“저, 저희 셋이 공동으로 작업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인턴들에게 맡겼던 작업이었다. 계산하고 정리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 심지어 계산도 컴퓨터가 다 해 주는데 어째서 초반 수치부터 틀렸는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는 결과물에 다른 장을 살펴봤지만, 볼 필요도 없었다. 첫 장이 틀렸는데 뒷장이 맞겠어? 수정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수준이었다. 믿을 수가 없네. 시발. 3명 이서 이틀 내내 이것만 했는데 결과가 이 꼴이라니. 만약 이걸 검토 없이 사용했다면…? 아, 상상만으로 뒷골이 터질 것 같았다.

“이 부분은 누구 담당이지?”

문제의 자료를 내밀자 내 앞에 서 있던 3명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한다는 말이.

“그냥… 다 같이 담당했습니다.”

아이,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그 한마디에 가뜩이나 예민했던 사무실이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한쪽에선 또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한쪽에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학교도, 동네도 다 다른 놈들이 뭔 정이 그렇게 많아서 매번 서로를 감싸는지 모르겠다. 물론 팀웍이 나쁜 것보다야 낫긴 하지만. 이럴 땐 그냥 아무나 나서서 수정하겠다는 한마디만 해도 충분한데.

“…….”

“…….”

미치겠군.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 하나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야, 너네 술 마실 땐 잘만 떠들면서 왜 갑자기 묵언 수행이야. 누가 말 좀 해라. 꼭 필요할 땐 입을 다물더라.

“하아….”

짙은 한숨에 인턴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회 초년생. 배울 게 많은 나이인 만큼 실수도 많은 나이다. 너희나 나나, 이게 다 배워 가는 과정…이겠지. 애써 화를 삭이며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별 기대 없이 맡긴 일이었잖아. 물론 이따위로 망칠 줄도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까 다시 작업을 시키면…. 하. 시발, 앓느니 죽지…. 그냥 내가 하고 만다.

“또 이런 실수가 발견되면 3명 다 아웃이야. 다음 달까지 평가 기간인 거 알지? 잘하자. 제발.”

그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인 인턴들이 도망치듯 내 시야를 벗어났다. 아직 계약 건도 해결을 못 했는데 할 일이 더 늘었다. 버석거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자 열이 잔뜩 오른 눈이 손바닥 안에서 구르는 게 느껴졌다. 온몸의 열이 다 쏠린 것만 같았다. 이러다 눈이 터져 버리면 어쩌지.

“제가 수정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제 온 건지 모를 정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힐끔.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의 정태가 의자에 기대 누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냐. 고맙지만 간단한 거니까 내가 할게요. 어차피 오늘 야근 확정이야.”

아쉬운 시선을 거두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맘 같아선 당장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신입들 야근 좀 그만 시키라고 말이 나왔던 게 불과 며칠 전이이었다. 벌써 이렇게 야근시키면 계속 출근하고 싶겠냐. 야근 수당은 너희가 주냐. 어쩌고저쩌고. 심지어 정태는 어제도 야근조였다. 구시정이나 있으면 좀 도와 달라고 하겠는데, 하필이면 외근 중이다. 하. 이런 날은 외근이 그렇게 부럽더라.

늘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월급은 고만고만한데 직급이 하나 더 높다는 이유로 할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정시 퇴근을 포기할 때마다 반복되는 딜레마였다. 이번 연봉 협상 때는 꼭 더 높게 불러야지. 그래 놓고 정작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퇴근 시간을 넘기며 사무실의 인원이 반으로 줄었다. 그나마 들어온 희소식은 변덕을 부리던 거래처와 계약을 성사했다는 연락이었다. 역시 돈이 문제지. 금액을 조정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도장을 찍었단다. 그래도 제일 복잡한 일이 처리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남은 건 단순 업무뿐이다. 거기에 플러스로 인턴들 보고서 수습까지. 하나라도 더 빨리 치고 집에 가야지. 말은 하지 않아도 남은 모두가 한마음인 듯 타닥타닥- 타자 소리가 더 빨라졌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게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띠리릭- 띠리릭-

그렇게 또 한 시간, 두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내던 팀원들이 하나둘 퇴근을 하고, 어느새 울리는 정각 알람에 손을 멈추자 흔치 않게도 남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헉, 언제 다 갔지? 혼자라는 걸 깨닫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언뜻 대리님이 마지막인데 언제 가냐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 수정본에 너무 집중했네.

10시 이후엔 건물에서 자체적으로 절전 시스템이 가동된다. 센서가 있어서 사람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자동으로 소등. 따라서 지금 사무실에 유일하게 켜진 조명은 내 자리뿐이었다. 아무도 없이 어두운 와중에 주목받는 모양새로 조명을 받고 있으니 어쩐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장시간 앉아 있어 찌뿌듯한 몸을 쭉- 펼쳤다. 조금 아플 정도로 스트레칭을 하며 뻐근한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유리창에 피곤해 보이는 내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 장마철이라 그런지 지겨울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출근할 때만 해도 맑았는데 말이지. 어두운 탓인지 창을 훑으며 떨어지는 비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음… 이쯤 하고 집에 갈까. 남은 건 내일 하지 뭐.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다.

PC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며 슬쩍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우산을 찾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빌리기 위해서. 아침에 비 안 온다 해서 안 가져왔단 말이야. 젠장. 혹시 누가 두고 간 게 있나 2번이나 돌아봤지만, 우산은커녕 그 비슷한 물건조차 보이질 않았다. 정태가 준 찬합도 들고 가야 하는데….

“아… 시발.”

비 맞는 거 정말 싫은데. 아직 건물을 나서지도 않았건만 벌써 젖을 생각에 참고 있던 짜증이 터졌다. 불평해도 없는 걸 어쩌겠어. 차라리 더 쏟아지기 전에 얼른 가자. 피로감에 더 무겁게 느껴지는 찬합을 한 손으로 안아 들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탁-! 문에 기대 서 있던 무언가가 쓰러지며 텅 빈 복도를 크게 울렸다.

“으아씨!”

찬합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동시에 혼자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쪽팔린 비명 소리였어…. 구시정이 있었다면 100% 놀림감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이런 소리가 나면 당연히 무섭잖아!

나를 놀라게 한 범인은 싸늘한 복도 바닥에 누워 있는 우산이었다. 그것도 빳빳하게 포장된 새 우산. 아싸 개이득. 하지만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게 우산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주변을 돌아보자 방금 내가 나온 우리 부서와 복도 끝에 있는 회계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소등된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회계부 사람도 남아 있던 걸까. 그럼 내가 소리 지른 걸 들었겠네? 뒤늦은 수치심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계세요?”

혹시 싶어 우산을 들고 회계부의 문을 두드렸다. 안까지 들어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근데 왜 불이 켜져 있지? 혹시 화장실에 간 건가 싶어 거기까지 가 봤지만 전부 비어 있었다. 다른 층 사람이 굳이 7층까지 왔다가 두고 갔을 리는 없고. 헉, 설마 나 쓰라고 두고 갔…을 리는 절대 없겠지. 내가 구시정도 아닌데 말이야.

분위기 탓에 살짝 무서운 생각이 드는 동시에… 우습지만 점심에 봤던 타로가 생각났다. 처음엔 부정적인 카드의 그림으로, 그리고 다음은 시정의 말도 안 되는 해석으로. 목매달 만큼 사랑스런 연인…. 으, 아냐! 그만해! 괜히 부끄러워졌잖아! 아무래도 조금 전의 쪽팔림이 가시지 않은 것 같다.

어쨌건 이 우산은 지금 나 말고 딱히 사용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혹여나 주인이 있더라도 이 시간에 찾으러 오진 않겠지. 누구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감사히 사용하기로 했다. 덕분에 비를 덜 맞고 집에 갈 수 있게 됐네. 

사무실을 나설 때보다 조금 밝아진 기분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부터 시작한 숫자가 춤을 추듯 움직이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띵- 7층입니다, 라는 안내 멘트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탐과 동시에 우리 사무실의 켜져 있던 마지막 불이 소등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