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10
나가자 매달리는 직원들을 이틀 연속으로 뿌리칠 순 없었다. 팀 내 사기 증진과 단합에 대한 책임도 있었고, 윗선에서도 주 1회 정도의 회식을 권장했으니까. 물론, 유독 신입이 많은 부서라 지치지도 않고 매일 마시는 건 문제겠지. 멤버야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듣기론 주말을 제외하고는 모이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는 것 같다. 야근에 이어 회식까지…. 살인적인 일정에도 쌩쌩하게 출근하는 인턴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저 나이엔 저랬나 싶기도 했다. 우습게도 겨우 몇 살 차이일 뿐인데, 이 말도 안 되는 체력 차이는 뭘까? 젠장. 이게 나이라는 건가.
“위하여!”
뭘 위하는 건지도 모르고 다들 신이 나서 잔을 모았다. 누군가는 실적을 위해, 누군가는 연애를 위해,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모인 잔은 챙- 하고 맑은 소릴 내며 울었다.
좁고 어두운 곳에 성인 남녀가 2명 이상 모여 있고, 술까지 들어갔다. 분위기를 타자 자연스레 이야기의 주제가 음담패설로 넘어간다. 요즘 남자는 어떻고, 요즘 여자는 어떻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린 혈기들이 지치지도 않고 끓어올랐다.
“대리님은 어때요?”
“응? 뭐가?”
“에이, 빼지 말고 말해 주세요~.”
미안하게도 정말 주제가 뭔지 모르겠다. 5분에 한 번씩 바뀌는 주제를 따라갈 만큼 정신이 젊지 못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놀라운 건 저 무리에 구시정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거다. 나보다 학번도 높은 분이 대단하셔라.
“체위 말이에요. 체위.”
“풉! 콜록!”
얼굴을 맞댄 팀원들이 다른 테이블에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며 낄낄댔다. 무슨 엄한 소리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첫 키스 얘기 중 아니었어? 언제 거기까지 갔데? 맵디매운 술 사레가 걸려 대답은커녕 반박도 못 하고 캑캑대자 옆에 앉아 있던 시정이 물을 건네며 말했다.
“얘는 왠지 수동적일 것 같지 않아?”
낯선 단어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정을 바라봤다. 수동적이라뇨?
“왜, 그런 거 있잖아. 여자가 하잔 대로 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대리가 상황을 주도하기보단 잡아먹히는 쪽이라 이거지.”
“선배!”
모두가 까르륵거리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왜 웃냐? 이게 웃겨?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예시까지 들며 뻔뻔하게 말하는 시정 탓에 내가 수동적이라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된 듯했다. 망할 구시정. 겨우 기침을 멈추고 눈을 흘기자 큭큭대던 시정이 “장난이야.”라며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래도 눈꼬리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나름의 사과의 표시로 빈 술잔을 채워 주며 마시라 닦달한다.
“왠지 대리님은 그런 이미지예요.”
이번엔 건너편에 앉은 여직원들이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말했다.
“수동적이라고?”
“아뇨, 아뇨! 수동적이기보다 남녀 모두에게 자극적인 얼굴이라 이거죠! 무표정일 땐 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은근히~ 자극된다니까요?”
“무슨 소리야 그게. 수진 씨 취했구나?”
“안 취했어요! 안 취했어요!”
수진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도리질하자 곁에 있던 정태가 미간을 구기며 수진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수진 대신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수진 씨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구 주임님 때문에 눈에 안 띄셔서 그렇지 대리님도… 그 정도면 잘생기셨잖아요.”
“꺄! 정태 씨도 보는 눈이 있네~.”
수진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한 정태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나저나 시정을 옆에 두고 잘생겼단 소린 생전 처음 들어 봤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정태한테서 듣게 될 줄이야. 그 정도라는 쓸데없는 수식어가 붙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거 칭찬하는 거 맞지?
“하하, 살다 보니 잘생겼다는 말도 들어 보고, 신기….”
묘한 기분에 쑥스러워하며 술잔을 들어 올리는데 문뜩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꺅꺅대는 사람들 사이 정태가 예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칭찬이 아니었어?
“…하네…. 선배 들었어요? 정태 씨가 나한테 잘생겼대요.”
무쌍에 날카로운 눈매…. 정태가 입사한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내게는 아직도 저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어색함에 괜히 가만히 있던 시정에게 말을 걸자, 시정이 한껏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 턱을 매만졌다.
“우리 선유 잘생겼지! 거기에 허우대 멀쩡하고, 성격도 좋고~ 근데 왜 애인이 없을까?”
“일하느라 바쁜데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괜찮은 사람이 생기면 시간도 생기는 법이다.”
시정은 그리 말하며 남은 술잔을 싹 비워 냈다. 사장님! 여기 소주 2병 추가요! 아직 테이블엔 까지도 않은 술이 있었지만 시정에겐 모자란 모양이다.
“야! 그래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나, 그다음이 너야.”
“연애에 위아래는 무슨.”
“넌 이제 30대지만 난 벌써 30대 중반이잖아.”
시정이 자신의 빈 잔을 채우며 덩달아 아직 술이 남아 있던 내 잔까지 가득 채웠다. 아 그만 부어요! 넘치는 잔에 급하게 고개를 숙여 입을 댔다. 힐끔. 고개를 돌리니 정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셈인가.
“자자, 정태 씨도 마시자!”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그냥 짠- 할 사람이 더 필요했던 건지. 시정은 이내 정태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위하여~! 또 한 잔을 털어 마신 시정을 따라 나와 정태도 마지못해 술이 뚝뚝 떨어지는 잔을 기울였다.
그 이후로 1시간가량 이어진 술자리에 다수의 팀원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늘 절반 이상이 제정신이 아닐 때쯤에야 자리가 끝났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뒤처리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비교적 온전한 정신의 나와 구시정, 전정태, 그리고 몇몇 사원들이 뒤처리 담당이지…만, 오늘은 정태까지 취해 버렸다. 구시정이 주는 걸 다 받아 마시면 어떡하냐. 어휴.
“정태 씨! 정신 차려 봐요! 집이 어디예요!”
어째 점점 노골적으로 노려본다 했더니 취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취중 진담이라 하지.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다른 사람이 민망해할 정도의 시선이었다. 역시 얜 나를 싫어하는 걸까.
“어떡해요. 대리님. 정태 씨 안 일어나는데….”
항상 챙겨 주던 정태가 취해서 늘어지니 당황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술에 취했던 사람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 정태를 흔들 정도였다.
정태의 휴대폰은 잠금 상태라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아서 집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졸리다는 말만 반복하니… 이것 참 당황스럽군. 날이 서 있던 눈은 어느새 잔뜩 풀려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고, 발음도 있는 대로 꼬이며 늘어지고 있었다. 모텔에서 재우는 건 좀 그렇고, 누군가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혹시 정태 씨 데려갈 수 있는 사람 있어?”
“부모님이 계셔서….”
“저, 저희 집은 여기서 2시간 넘게 걸려요. 시정 주임님은요?”
“나는 내일 오전 외근이라 안 돼.”
귀찮아서인지 정말 상황이 안 되는 건지. 다들 그럭저럭 괜찮은 핑계를 대며 정태를 서로에게 미뤘다. 아, 나도 귀찮은데.
“그래…. 그럼 내가 데려갈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난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집도 제일 가까웠고, 내일 외근도 없다. 서로의 감정이야 어쨌든 몸도 못 가누는 사람을 모른 척 두고 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내 부하 직원인데 나중에 뭔 일 생기면 내 책임이잖아.
“대리님이요?”
“와! 대리님 멋져.”
“헐, 그럼 나도 갈래!”
모두가 박수 칠 때 눈치 없는 시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내일 외근이라면서요. 그리고 우리 집이랑 방향도 정반대면서….”
“아 왜! 나도 갈래! 너 이사하고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나보다 쟤가 먼저 간다니!”
30대 중반의 탈을 쓴 초등학생이냐. 자신이 먼저 가 보지 못한 공간에 정태가 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은 언제쯤 철이 들려나.
“누가 들으면 정태 씨가 놀러 가는 줄 알겠어요. 자자, 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일어날까요? 내일 지각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입술을 삐죽 내민 시정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늘어져 있던 정태를 가볍게 흔들었다. 우리 집에 가요. 정태 씨. 그러자 정태가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순순히 일어나 뒤를 따라온다. 휴. 다행이다. 업고 가야 될까 봐 걱정했는데.
여사원들에겐 미안하지만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가장 먼저 유흥가를 벗어났다. 웬만하면 여자들 먼저 보내려 했는데, 정태가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기세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동료들이 여전한 술기운으로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안 보일 때까지만 대충 장단을 맞춰 같이 흔들어 주다 지친 몸을 시트에 기댔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택시 요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아. 할증.
“과자….”
“뭐?”
“과자 먹고 싶다.”
뜬금없이 무슨 과자?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용케 잠들지 않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앉아 있던 정태가 중얼거렸다. 홈런*. 다*제. 칙*. 초코*임. 오*오…. 주문을 외우듯 다디단 초코 과자만 말한다. 독기 빠진 얼굴로 과자를 보채니 회사원이 아니라 영락없는 고등학생 같았다. 하필 입고 있는 옷도 쥐색에 교복 같은 디자인이라 더 그렇게 보이네. 허. 진짜 고딩이라 그래도 속겠구만.
“기사님. 저기서 세워 주세요.”
집은 조금 더 가야 하지만 일부러 편의점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저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안 사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먹을 것도 사야 하고, 겸사겸사.
“정태 씨. 정태 씨?”
“네?”
“과자 먹고 싶다면서.”
“먹고 싶어요.”
취한 사람치고는 비교적 바른 움직임으로 차에서 내린 정태가 편의점 안으로 스스륵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뭐에 홀린 듯 초코가 들어간 과자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어어, 그렇게 많이? 좀 과한 듯싶어 말리려 했더니 정색을 하고 내 손을 쳐 낸다. 찰싹! 순간 다시 날카로워진 눈매에 따끔한 손등을 문지르며 불안한 눈으로 정태의 뒤를 쫓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사를 때리냐. 아냐… 차라리 날 때려라. 뭐 부수거나 그러지만 마라. 제발.
“이거 다 주세요.”
“정태 씨, 이거 너무 많은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습니다. 이거 참…. 구시정 말고 또 다른 애가 나타났네. 정태가 또박또박 말하려 애쓰는 발음으로 카운터에 산더미처럼 과자를 쌓았다. 뭐, 말 그대로 애쓰는 발음이라 직원이 도와 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안 된다 하면 누워서 떼쓰려나…. 슬쩍 몇 개를 빼내려 했더니 그걸 눈치챈 정태가 매섭게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138,700원입니다.”
결국, 몇 번의 시도가 무산되고 정태의 바람대로 수많은 초코 과자들이 봉투에 차곡차곡 담겼다. 하하, 과자만 14만 원어치라니. 봉투만 해도 5개다. 제일 큰 봉투를 들고 있던 정태가 가격을 듣더니 주섬주섬 제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또 뭐 하려고. 나 이제 슬슬 무섭다.
“이걸로 해 주세요.”
정태가 본인의 지갑에서 현금을 뽑아 불쑥 내밀었다. 영락없이 내가 계산하게 될 줄 알았는데 좀 놀랍군. 얼만지도 모를 현금을 알바생 손에 꼬옥 쥐여 준 뒤 정태는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도 없이 다시 주섬주섬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다 모르는 길이란 걸 깨달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유리창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평소의 그 부담스러운 시선이 아니었다. 맨날 저런 표정이면 좋을 텐데.
“손님. 잔돈이요.”
편의점 직원의 부름에 문뜩 정신을 차리고 정태 대신 거스름돈을 챙겼다.
아무도 없는 집안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정태는 신발도 겉옷도 가지런히 벗어 두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취했는데도 이 정도라. 평소 생활습관이 보이는 것 같다. 간단하게 씻고, 갈아입을 옷을 골라주고. 이제 정태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과자를 정돈하고 있었다.
잘 만한 곳은 침대랑 바닥뿐인데. 누가 어디서 잔담. 생각이 이기적인 쪽으로 기울 때쯤, 정태가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대리님.”
“어, 어?”
“대리님은 정말… 대단해요.”
“…….”
“정말로 존경하고 있어요.”
야, 정말 뜬금없다. 오늘 헛소리가 심한 걸 보니 네가 취하긴 제대로 취했구나. 하지만 정태를 바닥에서 재우려 마음먹었던 찰나에 이런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양심이 따끔거렸다. 것보다,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입사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들은 게 대리님 얘기였어요. 최단기, 최연소 승진에 인망도 좋으시다고…. 저는 진짜, 대리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래서 맨날… 보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최단기, 최연소 승진이면 뭐하냐. 월급은 쥐꼬리에 하는 일만 많은데. 엄지를 척 들고 어버버거리며 평소답지 않은 소릴 하니까 진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놈을 바닥에서 재우긴 글렀다는 점이다. 연약한 양심 같으니! 그렇다고 나도 바닥에서 잘 생각은 없고…. 침대가 싱글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근데… 기분은 썩 나쁘지 않네. 거참. 이래서 입에 발린 말도 일단 하고 보는 거라니까.
이 주정뱅이가 혹시라도 자다 떨어질까,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고 난 바깥쪽에 매달리듯 누웠다. 침대에 눕기 직전까지 멋져요, 존경해요를 연신 중얼거리던 정태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했다. 누군가와 나란히 자는 게 오랜만이라 좀 어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피로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정태가 내 등 뒤에 딱 붙어서 자고 있더라. 어우씨!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정태가 꿈틀거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애벌레처럼 누워 있던 정태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정태 씨. 일어나요. 출근해야지.”
“으음…?”
부스스 눈을 뜬 정태가 미간을 구기고 나를 바라봤다. 마치, 당신이 왜 여기에? 같은 얼굴로. 상황 파악을 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까치집을 매달고 일어난 정태는 말없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혹시 실수….”
“엇, 필름 끊겼어?”
“…했나요?”
침묵이 길었다. 기억 못 하는구만. 하지만 굳이 없다는 기억을 꺼내 서로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아냐, 아냐. 실수는 안 했어. 근데 저거….”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14만 원어치의 과자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굳어 있던 정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워, 원래 단 걸 좋아하진 않는데 술 취하면 가끔 그래요. 자주 취하진 않아요! 컨디션 나쁠 때 아주 가끔인데…! 평소와 다르게 귀까지 붉어져서 어버버거리는 게 솔직히 좀… 귀여웠다. 아마도 어제의 취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과자 가지고 이 정돈데 존경메들리까지 얘기하면 어떨까? …불쌍하니까 이건 알려 주지 말자.
식탁에 나란히 앉아 따끈하게 데워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훅 풍기는 자극적인 양념 냄새에 배꼽시계가 소리 없이 울었다. 아침은 숙취해소제와 편의점표 돈가스 덮밥.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였다.
“늘 이런 것만 드세요?”
“하하. 요리엔 재능이 없어서….”
그 사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정태가 샐쭉한 눈으로 도시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집을 한번 스윽-.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긴장된다.
“정말 혼자 사는 티가 팍팍 나네요.”
거리낌 없는 말에 민망해진 건 나뿐이었다. 큼직한 인스턴트 돈가스를 삼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주변에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주든가.”
“연애하시게요?”
“음, 연애할 여자보다는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 싶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정태는 식욕이 없는지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샐러드만 뒤적거렸다.
“결혼이 편의점 음식인 줄 아세요? 그렇게 금방 하게…. 그리고 요즘은 다 늦게 가는 추세잖아요.”
“여기서 더 늦게? 지금 낳아도 애가 입학하면 내가 몇 살이야? 어휴. 난 일찍 퇴직하고 귀농할 거야.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로 가야지.”
“대리님이요? 완전 안 어울려….”
……왠지 조금 울컥했다.
출근 후 점심쯤 되자 외근을 나갔던 시정이 돌아왔다. 슬쩍 눈이 마주쳤지만 뚱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딱히 별다른 인사도 없다. 어휴, 저 초딩. 인사 대신 시정은 제 책상 위에 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초코 과자. 시정의 책상 위엔 여러 종류의 초코맛 과자가 올라와 있었다. 사실 시정의 책상 위에만 있는 건 아니고, 우리 팀원들 전부 받은 거지만. 과자를 대충 살핀 시정이 그대로 부욱, 망설임 없이 포장을 뜯는다. 보통 모르는 물건이 있으면 출처를 물을 법도 하건만.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시정은 별다른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우물우물, 도톰한 입술이 바쁘게도 움직인다.
“나중에 정태 씨한테 고맙다고 해요.”
“왜?”
“그거 정태 씨가 준 거예요. 오늘 사무실에 과자 돌렸거든요. 저 구석에도 잔뜩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더 먹으래요.”
“뭔 날이야? 갑자기 웬 과자.”
“있어요. 그런 일이.”
산더미 같던 초코 과자의 처분은 선물로 이뤄졌다. 감사의 표시라며 일부가 봉투째로 나한테 넘겨질 뻔했지만, 나 역시 단 걸 좋아하지 않아 몇 개만 받는 걸로 넘겼다.
“뭐야. 둘이 비밀이라도 만들었냐?”
시정이 손안에 쥐고 있던 작은 과자 곽을 콰드득 구겼다.
“정태 씨는 좋겠다. 대리님 집에도 가 보고. 나는 아직 못 가 봤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나 들으라 중얼거리는 소리에 주변에 모여 있던 여직원들이 별일도 없이 까르륵거렸다. 뭐야. 왜 웃는 거지. 저게 웃긴가? 하긴 구시정 가식이 좀 웃기긴 하지.
“집에 와도 재밌는 거 없어요.”
“그냥 가서 구경만 할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수를 잡은 여직원들이 이때다 싶어 시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저희 집은 어떠세요? 다음 주에 조촐하게 집들이 파티 하려고 하는데! 저희 집엔 재밌는 것도 많아요.”
한 직원이 자신의 여성성을 강조하듯 시정에게 딱 붙어 콧소리를 냈다. 헉. 저렇게 노골적으로? 내 시선에선 과하게 저돌적인 유혹이었지만 시정은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기만 했다.
“누구누구 가는데?”
“음~ 일단은 저랑 여직원들 몇 명이랑… 주임님까지 해서 5명이에요. 아, 대리님도 시간 되면 오세요.”
완전 덤 취급이구만. 어차피 시간도 안 된다. 아쉬운 척하며 거절하자 다른 여직원이 어머, 그럼 주임님이 청일점이네! 하고 수줍게 말했다. 하… 왠지 구시정에게 부러움과 동시에 짜증이 치민다.
“에이, 뭐야. 남자가 나 하나면 안 갈래.”
“네? 왜요?!”
“왜긴. 가면 술 마실 거잖아. 술 취해서 사고라도 치면 어쩌려고.”
사고라 말하는 시정의 눈이 묘하게 음흉해 보였다. 그걸 느낀 건 나뿐이 아닌 듯했다. 동시에 여직원들이 꺄! 변태!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라며 까르륵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사람들 술 덜 깼나? 회사에서 왜 이래.
“다들 알면서 왜 이럴까?”
그 능글맞은 웃음에 여직원들이 또 자지러졌다. 구시정 근처는 늘 이렇다니까. 꺅꺅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조용히 서류를 덮고 일어났다. 소외감이 들어서가 아냐. 진짜 시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젠장.
흡연실로 피신해 안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의 비어 있는 라이터를 흔들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켰다. 후-. 입술 사이로 탁한 연기가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어느새 따라온 시정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 갔다. 엇, 내 담배.
“야. 난 언제 구경시켜 줄 건데.”
“뭘요….”
“아, 너네 집! 나는 왜 안 데려가는데?”
누가 보면 우리 집에 뭐 귀한 것 숨겨 둔 줄 알겠네. 빼앗긴 담배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제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요.”
“진짜 안 데려갈 거야? 전정태는 데려갔으면서?”
“전정태도 제정신이었으면 안 데려갔어요.”
“왜 걔는 되고, 나는 왜 안 되는데.”
“내 말 듣고 있긴 해요?”
또 시작이다. 남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거.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싫어한 시정의 버릇 중 하나였다. 뭔가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으면 옆에서 뭐라 하던 구시정은 그 고집을 밀고 갔다. 어떻게 보면 장점이기도 했지만… 보통은 단점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곤란함에 미간을 좁히자 성큼 다가온 시정이 나를 몰아붙이듯 벽에 팔을 짚으며 물었다. 저기,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어요.
“나는 왜 안 되냐니까?”
“안되는 게 아니라…. 정태는 어제….”
“정태?! 너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왜 이래요. 정말.”
“나한테는 몇 년 내내 꼬박꼬박 선배라 그러면서 전정태는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와 실망이다. 이선유.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에!”
누가 들으면 둘이 특별한 사인 줄 알겠네. 반박하려 했지만, 시정이 들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버리는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담배가 무슨 죄라고…. 이번엔 정말 삐진 듯했다. 아, 귀찮게 정말! 어쩔 수 없이 짜증스레 흡연실을 나서려는 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삐지면 어떤 것보다 무서운 게 구시정이었다. 수년의 경험상, 이 상태의 시정을 말리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오.
“아! 알겠어요, 놀러 오세요!”
“정말?!”
원하는 말을 받아 내고 나서야 시정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싸!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박수까지 치는 시정은 정말로 신나 보였다. 34살이나 먹고 저러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