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11
어릴 때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기가 눅눅해지는 것도 싫었고, 배려 없이 걷는 사람들 때문에 흙탕물로 바짓단이 젖는 것도 싫었다. 이럴 땐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쾌지수가 올라서 평소보다 짜증이 더 심해지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어이! 이 대리님!”
구시정이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달려왔다. 덕분에 사방으로 빗물이 끼얹어지며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구시정을 향해 소리 없는 비난을 쏘아 보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불평이 허락됐던 건 어린 시절뿐이다. 이 6차선을 건너기만 하면 크고 작은 사무실이 무려 300여 개가 넘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 당장의 거래처가 될 수도, 혹은 새로운 동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고작 빗물이 구두를 적셨다고 짜증을 내서야 평탄한 사회생활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횡단보도 앞에서는 말이다.
남몰래 구겨졌던 미간을 펴며 젖은 구두를 슬쩍 털어 냈다.
“일찍 오셨네요? 구 주임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지. 격렬한 아침 인사에 대한 보답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건네자 시정이 대뜸 어깨를 툭 친다. 그 움직임에 서로 부딪힌 우산들이 모아 뒀던 물방울을 주르륵 흘려보냈다.
“서운하다. 회사 밖에서도 주임이라 부를 거야?”
“길만 건너면 회사예요.”
“이야, 여전히 칼 같아! 우리 이 대리님!”
“…선배는 여전히 무르구요.”
선배라는 말에 시정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 시정을 날카롭게 흘겨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 외모란 참 대단한 무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정을 잡아먹을 듯 째려보고 있었는데, 고작 한 번 웃은 것만으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잖아.
이 정도야 이제 너무 자주 봐서 놀랍지도 않다. 구시정이 잘생겼다는 건 대학 때부터 유명했으니까. 180이 훌쩍 넘는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조막만 한 얼굴. 그 안에 오밀조밀 잘도 모여 있는 이목구비. 시정은 이미 어릴 때부터 여자들이 선호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소문으론 연예인 제의도 몇 번 받았다고 하고.
하지만 잘생겼다는 소문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정에겐 유명한 게 또 하나 있었다. 보통 얼굴값을 한다고 하지. 이 잘난 남자는 성격이 별나기로도 유명했다. 꼴통에, 이기적이고, 독점욕 강하고, 충동적이고- 기타 등등. 보통 구시정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건 멀리서 바라볼 때뿐이었다. 그를 어느 정도 잘 알게 되면 대부분은 다시 멀리하고 싶어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문 많고 말썽 많은 이 남자를 굳이 졸업 후에도 볼 일이 뭐가 있겠어. 대학에서 겪는 것만으로 충분히 과하잖아.
그러나 조기 취업한 회사에 입사하고 딱 4개월 되던 날. 시정은 후임 인턴이라는 직함을 달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같은 전공도 아니었던지라 의아해하던 찰나 구시정이 눈치 없게 귀띔을 하더라. 아빠 아니면 못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니 구시정은 부잣집 막내아들로도 유명했다. 아, 꿀 같던 4개월. 지금 생각하면 그때를 더 신나게 누렸어야 했는데….
잠시 추억을 되새기는 사이 건널목의 신호가 바뀌었다. 수십 쌍의 구두가 기다렸단 듯이 또각거리며 젖은 아스팔트를 누빈다. 그 발자국 뒤로 기세 좋게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통, 통, 통…. 야, 뭐 해? 아차.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정의 재촉에 뒤늦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보폭을 맞췄다. 어느새 초록 불이 깜빡이며 소등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철퍼덕!
반쯤 건넜을까, 어울리지 않게 둔탁한 것이 젖은 도로 위로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내 뒤꿈치를 무언가가 툭. 뭐야… 보온병? 돌아보니 한 남자가 건널목 한복판에서 떨어트린 가방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엮이기 싫은 듯 그를 피해 멀찍이 돌아가고 있었고, 남자는 어깨에 우산을 끼고 낑낑대며 빠르게 젖어 가는 물건들을 줍고 있었다. 근데 애써 들고 있는 것치고 우산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것 같다. 옷이고 머리고 이미 다 젖었잖아.
“안 가?”
구시정이 벌써 두 번이나 멈춰선 나를 잡아끌었다. 그를 피해 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를 도울 의무는 없었다. …눈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고, 고맙습니다….”
젠장. 귀찮게 됐네. 남자는 내가 자신을 돕기 위해 바라봤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도 아니고 고맙습니다- 라니…. 그냥 무시하고 갈까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 사람이 오늘 거래처의 주역일지도.
어쩔 수 없이 발치에 굴러와 있던 남자의 보온병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하는 김에 그 곁에 흩어진 서류봉투들도. 와, 이거 못쓰겠네. 완전히 젖었잖아. 자칫하면 찢어질 것만 같은 종이뭉치에 이게 중요한 물건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물건을 내밀며 예의상 물었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인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가린 덥수룩한 앞머리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헤어스타일 탓인가, 좀 멍청… 아니, 답답해 보이네. 어쩌면 흐르는 게 빗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고맙…습니다.”
남자가 물건을 건네받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엉망이 된 물건들을 한 아름 끌어안고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아씨 깜짝이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망이라도 가는 모양새였다. 이러면 내가 나쁜 놈이라도 된 것 같잖아. 어쩐지 곁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했다.
“LN엔터 사람이네. 아는 사람?”
시정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LN엔터라면 우리 사무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큰 회사 아닌가? 그나저나 빨리도 왔다. 물건 주울 때는 남처럼 보고만 있더니. 좀 도와주면 덧났냐.
“LN인지 어떻게 알아요?”
“가방에 대놓고 박혀 있더만. 근데 너 의외로 친절하다? 평소엔 남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시정이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반쯤 무릎을 굽히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술 덜 깼냐?”
“아뇨, 멀쩡한데요.”
“어쨌든 아침부터 보람찬 일 했네.”
“아, 예… 뭐.”
사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게 돼서 보람을 느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좀 나빴다. 이미 날씨 때문에 썩 좋진 않았지만, 애초에 먼저 도와 달라고 해 놓고 저런 태도는 너무하잖아. 괜히 손만 젖었단 이기적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야, 신호 끝나겠다. 얼른 건너!”
하지만 더 불평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깜빡거리는 보행 신호에 시정의 손에 붙들려 반강제적으로 사무실을 향해 내달렸다.
서둘러 들어온 건물 안에도 비에 젖은 발자국이 가득했다. 이 새카만 발자국들은 오늘도 고된 감정노동과 머리싸움을 하러 온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고. 발끝으로 살짝 바닥을 문지르자 모래 알갱이 같은 게 버석거리며 이질감을 낸다. 불쾌함을 꽁꽁 숨기며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없이 오르고 멈추길 반복. 7층을 알리는 기계음에 나와 시정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쏟아지듯 내려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른 출근을 한 건지, 아직 퇴근을 안 한 건지 모를 동료들이 벌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눅눅해진 겉옷을 벗으며 이미 책상 위에 가득 올라와 있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30분 후에 아침 회의 있는 거 알죠? 정태 씨는 자료 좀 부탁해요. 이거랑 같이 복사해서….”
“젖으셨네요.”
“뭐? 아….”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인턴직원 전정태의 시선이 비로 얼룩진 내 소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매에 이유 없이 눈치가 보여 책상 아래로 손을 숨겼다. 아니 잠깐, 내가 왜 숨겨야 하지?
“거기엔 사연이 있지.”
갑작스레 나타난 시정이 정태에게 팔을 걸치며 말했다. 강제적 어깨동무에 정태의 얼굴이 부담으로 물든다. 부담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내에서도 인기몰이 중인 시정의 목소리에 부산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아씨 구시정…. 과한 집중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미 다 읽은 서류를 의미 없이 들췄다.
“아까 횡단보도에서 어떤 남자가 넘어졌는데, 다 모른 척하고 지나갈 때 우리 이 대리님만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더라고. 크흐,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친절함. 나 감동했잖아.”
시정이 연기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사실 100% 순수한 마음도 아니었고, 끝도 구린 해프닝이었기에 시정의 비행기가 민망하기만 하다. 하지만 동료들이 “어머, 역시 이 대리님이야!” 하고 감탄하자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흠흠. 역시, 내가 나쁜 이미지는 아니라니까.
그러나 모두가 같은 뜻은 아닌 듯했다. 좋은 평가에 멋쩍어하며 웃고 있는데 시정과 나란히 서 있던 정태가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네요.”
“응?”
“물에 빠진 걸 구해 줘도 보따리 내놓으란 세상인데…. 요즘엔 도와주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 그래요.”
변덕이란 파도와도 같다. 마치 구시정의 외모에 휩쓸리는 사람들처럼, 하하 호호 웃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미 물들어 버린 군중심리에 너도나도 혀를 차며 정태의 말을 거든다.
“맞아요, 대리님. 요즘 조심하셔야 해요. 얼마 전에 인터넷에 비슷한 거 올라왔는데….”
“어머, 맞아. 가방 찾아 줬더니 안에 든 거 없어졌다고 손해배상청구 한 거 맞지?”
“맞아, 그거! 대리님도 나중에 그 사람이 찾아와서 헛짓하면 어떡해요!”
여직원의 호들갑에 문뜩 너덜거리던 서류가 생각났다. 아니지. 그건 비에 젖어서 그런 거잖아. 내용을 보지도 않았고… 나랑은 상관없지. 순간 같이 휩쓸릴 뻔했지만 금방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 와중에 정태의 시선은 아직도 책상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전정태는 첫인상부터 참 껄끄러운 남자였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게 한결같이 차가운 표정. 문뜩 돌아보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찢어진 눈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좋게 말하자면 예리했고, 나쁘게 말해선 필터가 없다? 생긴 건 완전히 갓 졸업한 고딩이라 영락없이 어려서 그렇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군필에 20대 후반을 향해 달리는 중이라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동안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착하게 살면 된다는 거 다 예전 얘기잖아요.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지…. 안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하고 있지만, 정태는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썅, 세상 참 팍팍하게 사네. 도대체 쟨 맨날 나한테 왜 그럴까. 내가 만만한가?
“팀원들끼리 사이좋은 건 좋지만, 자네들. 이렇게 모여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회의 얼마 안 남았어.”
“앗, 부장님!”
손목시계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부장님 한마디에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신속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어찌나 빠른지 이 자리에 모여 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안 가지. 여전히 내 책상에 기대서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시정은 태연함을 넘어서서 여유로워 보였다.
“구 주임님은 할 일 없으세요?”
“제가 뭐 할 게 있겠습니까. 대리님이 바쁘시지.”
방긋 웃은 시정이 입꼬리를 당기며 자연스레 책상 위로 무언가를 내려놨다. 손수건이었다. 그냥 손수건도 아니고 금색 자수가 놓인, 누가 봐도 알 만한 명품 손수건. 그 손수건을 집어 들자 시정이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속삭였다.
“정태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제 할 말을 끝낸 시정이 그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쥔 손수건엔 시정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가끔 이런 세심함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정의 성격을 알면서도 따라다니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고.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터라 평소엔 그게 늘 얄미웠었는데, 오늘만큼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삐뚜름하게 당기며 젖은 소매 위를 문질렀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늘 느린 듯 정신없이 흘러갔다. 2번의 회의. 3시간짜리 외근. 그리고 1건의 계약. 시정이 늘 소원하는 짧은 회의, 칼퇴근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높으신 분들이야 일찍이 퇴근하셨고, 나를 포함한 일부 직원들이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구 주임님~ 오늘 한잔해요. 네?”
상습적 야근에 다들 스트레스가 쌓인 걸까. 여사원들이 온갖 애교를 부리며 시정을 꼬시고 있다. 스트레스보단 그걸 빙자한 사심이겠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암암리에 시정이 도련님이란 소문이 돌면서 시정의 인기가 더 부상했다. 애초에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안 돼. 오늘 일찍 가야 돼.”
“네? 왜요~ 그럼 조금만 있다 가시면 안 돼요?”
“아~ 이러면 거절하기 힘들어지는데…. 그럼! 이 대리님 가면 나도 간다.”
가만히 있는 나는 왜 자꾸 끌어들이는 걸까. 이런 식으로 끌려간 회식이 매주 2회가 넘는다. 시정과 친분을 쌓을 계획인 여직원들의 눈이 ‘어서 간다 말하세요!’라며 번뜩였다. 결국엔 이 시선들이 무서워서라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지. 평소와 똑같이 흘러가는 상황에 시정이 참지도 않고 깔깔대며 웃었다. 얄미운 얼굴…. 근데 어쩌냐. 오늘은 못 갈 것 같은데.
“미안. 나 선약 있어요.”
약속 있다는 말에 오히려 시정이 더 놀란 얼굴을 하며 달려들었다.
“무슨 약속! 어디 가려고!”
“있어요. 약속. 저 퇴근합니다. 수고하세요!”
자길 두고 어딜 가냐 시정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고맙게도 여사원들이 “그럼 우리끼리라도 가요!”라며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가볍게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상하지만 아빠 따라갈래! 하고 보채는 어린 아들을 떼놓고 집을 나서는 기분이 들었다.
시정은 유독 나와 함께 행동하는 걸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나와 함께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때 이미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라 내 앞에선 마음껏 술주정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긴, 직장 동료들한테 울거나, 노상 방뇨를 하거나, 더 나아가 구토 위에서 수영하는 걸 보여 주긴 좀 그렇지. 물론 대학생 구시정은 이것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그때 수발들던 것만 생각하면… 시발.
해가 지면서 비도 함께 그쳤지만, 아직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남아 있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비가 오거나, 혹은 두 가지 이유가 한번에 겹치거나. 바로 오늘 같은 날엔 여럿보단 혼자 마시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조용하게 한잔 걸치고 있으면 말 그대로 휴식한다는 기분이 든달까. 굳이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게 시정을 뿌리친 이유였다. 입사 3년 차. 3년이란 시간 동안 생각보다 이런 날이 많이 생기더라.
딸랑-. 출입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울자 카운터에 서 있던 매니저가 손을 흔들었다. 보통 예수 머리라 하지. 늘어진 장발을 자연스레 쓸어 넘기며 내게 인사를 건넨다.
“선유 씨, 오랜만에 왔네! 얼굴 까먹을 뻔했잖아요!”
“안녕하세요. 요즘 일이 많았어요. 하하.”
저 사람한테 꼬리가 있다면 힘차게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과하게 반가움을 표하는 매니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늘 앉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미리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내 취향의 안주가 테이블 위로 차려졌다. 딱히 주문하지 않아도 매니저는 3년 단골에게 뭘 내줘야 할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월급 전이니까 그렇게 비싼 건 마실 수 없고…, 그래도 기분은 내고 싶어서 저렴한 선의 위스키를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매니저가 내준 술은 주문한 것보다 더 비싼 술이었다.
“어? 이거 아닌데….”
“얼마 전에 선유 씨 생일이었잖아요. 그때 주려고 했는데 한 달이 훨씬 지나서 주네.”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지? 하긴, 다닌 날이 얼만데. 술김에 한번쯤은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선물이라니 거절은 하지 않겠다. 수줍게 웃는 매니저에게 감사를 표하며 기꺼이 술을 받았다. 아싸, 술값 굳었네.
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 좋은 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향부터 꽤 마음에 들었다. 비싸니까 좋은 거겠지.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비워 냈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알싸함에 절로 날숨이 나온다. 묘하게 잘 넘어가네. 그리고 안주를 곁들여 또 한 잔. 독한 술이 참 달게 느껴진다. 금방 석 잔째를 기울이자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피곤한 탓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마신 탓일까. 뜨거워진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있으니 건너편 의자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벌써 이만큼이나 마셨어요? 오늘 좀 빠르네.”
“술이 좀 좋아야죠.”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다. 엄청 열심히 골랐거든요.”
매니저가 헤실헤실 웃으며 제 턱에 난 짧은 수염을 문질렀다. 웃을 때 살짝 처지는 눈이 참 자애로워 보인다.
“근데 사장이 이렇게 손님 앞에 앉아 있으면 장사는 누가 해요?”
“괜찮아요. 오늘은 손님이 많이 없어서.”
말하기가 무섭게 다른 테이블에서 손이 번쩍 올라왔다. 순간 매니저의 얼굴에 낭패가 가득하다. 피식.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테이블이 꽤 찼는데 손님이 없다니. 저기요! 재촉하는 손님의 음성에 매니저가 아쉬움을 뚝뚝 흘리며 커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저 사람은 어쩜 자기 감정에 저렇게 솔직할까. 조금 다르게 솔직한 거로 치자면 구시정이나 전정태도 마찬가지지만.
조용하게 앉아 한 잔을 더 기울였다. 그리고 매니저가 돌아와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한 잔. 취기가 오를수록 피곤한 몸이 점점 늘어진다. 피곤할 만했지. 이번 달에 우리 팀이 뚫은 거래처가 몇 갠데…. 이대로 하루 종일 자면 소원이 없겠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자 언제 옆으로 온 건지 모를 매니저가 말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인상을 구기자 손등을 감싼 손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뭐예요.”
“글쎄….”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냈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지치지도 않고 또 이러네.
“선유 씨.”
“…….”
“진짜 나랑 안 만나 볼래요?”
“매니저님….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저 남자한테 관심 없다니까요.”
혹여나 다시 손이 잡힐까,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문뜩 비에 젖었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물기는 마른 지 오래지만 흐리게 남은 얼룩이 이상하게 피부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매번 아니라면서… 저번에 그 남자는 뭔데.”
내 대답에 매니저는 살짝 화가 난 듯 보이기까지 했다. 저번에 그 남자? 아… 설마. 쓴웃음이 절로 났다. 저번에, 그것도 두 달도 훨씬 전에 이 가게 한복판에서 쪽팔리게 엎어질 뻔한 걸 지나가던 손님이 붙잡아 줬을 뿐이었다. 한동안 안 그러더니 왜 이러실까. 사람 불편하게 만드네.
“그때는 발이 꼬여서…. 아니, 이런 변명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정말 저 남자한테 관심 없어요.”
반년 전 매니저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여러 번. 거의 3년 가까이 보던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듣는 것도 놀랐지만, 동시에 우리 둘 다 남자라는 점에 놀랐다. 남자끼리? 그것도 내가 대상이라니?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매니저는 아주 가끔 이런 반응을 보이곤 했다. 늘 쿨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던 남자가 대놓고 질투를 보여 올 때마다 느껴지는 당혹감이란. 첫 고백엔 농담인가 했고, 두 번째는 진짠가? 싶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세 번째는 뭐. 지금이랑 비슷했네.
난 이성애자다. 여자한테만 반응하는 이성애자. 동성애는 절대 안 된다- 하는 주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동성애를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의 이런 고백도 좀 당황스러웠을 뿐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건 감사할 일이지. 하지만 그 마음이 강요되면 그건 성별을 떠나서 최악이잖아.
게다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주점은 일반 술집이라기보다 게이들의 숨겨진 플레이스로 유명한 듯했다. 매니저의 마음을 알게 된 뒤로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몇몇 단골들의 성향에 대해 눈치채게 되더라. 그렇다고 발을 끊을 만큼 놀란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말 그대로 ‘숨겨진’ 느낌이 강했고 손님의 비중은 그쪽 사람들보단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가격 적당하고, 분위기 좋고, 딱 회사와 집의 중간에 위치하고. 무엇보다 익숙해진 단골집이고…. 매니저한테 고백을 받고 게이 몇이 다니는 가게라는 이유로 그만 오기엔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물론 두 번째 고백 이후에는 진지하게 그만 다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매니저가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겠다며 설득했기에 아직 여기에 앉아 있는 거였다. 근데 또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이러려고 나한테 술을 줬나?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매니저는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번에도 그랬으니까.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앉아 있는 매니저를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내 얼굴까지 구겨질 것만 같았다. 하아… 됐다. 집이나 가자. 더 있어서 뭐하겠냐.
“저 슬슬 일어나 볼게요. 술이 들어가니까 피곤해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자 매니저가 이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미안. 미안해요. 선유 씨. 이제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더 있다가….”
“아니에요. 저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 지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술기운도 많이 올랐다 싶어 겸사겸사 일어난 것이다. 다소 경직된 분위기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 잔뜩 주눅이 든 매니저가 뒤늦게 내 눈치를 살폈다.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주를 만지작거리던 매니저가 힘없이 물었다.
“미안…. 다시는 이런 소리 안 꺼낼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또 올 거죠?”
“…….”
“또 와 줄 거죠?”
“…네.”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눌어붙은 불편함이 그 대답에 확신을 주진 못했다. 텁텁한 입안에 남은 잔향이 조금씩 쓰게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