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창문에 붙은 시트지의 틈으로 붉은 노을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또다시 저녁이 돌아온 것이다. 혹시, 혹시 싶은 마음에 사지를 꿈틀거려 보지만 재갈의 틈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흐를 뿐, 팔다리를 옭아맨 가죽 벨트는 여전히 견고했다. 소득도 없이 격하게 움직인 탓에 눈앞이 한순간 아득해진다. 언제부터 굶었더라. 날짜 감각 따위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좆같은 곳에 갇힌 지 도대체 며칠이나 된 걸까….
삑삑삑삑삑. 띠리리-
현관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놈이다. 장이라도 봐 온 걸까? 한참 동안 주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키에 비해 가벼운 발소리가 방으로 다가온다.
“다녀왔어요. 오늘은 좀 늦었죠?”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일방적인 대화일 뿐이다. 나는 놈의 연인도, 비슷한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바닥에 늘어진 채 놈을 노려봤다. 마주한 시선이 담고 있는 감정이 전혀 다름에도 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까이 다가온 놈이 내내 누워 있던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갑자기 변한 시야에 눈앞이 핑- 돌아간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놈과 닿아 있다는 것이 더 끔찍해 아픔도 미룬 채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잠자리 날갯짓 같은 반항에 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질질 흐르는 내 침을 닦아 내며 태연하게 말했다.
“턱받이라도 해 줘야 하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놈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오른다. 무슨 생각을…. 아냐. 저 대가리 안에서 일어나는 망상을 굳이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제발 영원히 혼자 간직하길.
“아~ 해 봐요. 아~.”
드디어! 놈이 내 입에 물려 뒀던 재갈을 빼낼 차례였다. 장시간 고정돼 있던 입은 더 벌어지지도 다물어지지도 않는 상황이었지만, 놈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습관적으로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물고 있던 작은 플라스틱이 빠져나가자 엄청난 해방감이 몰려왔다.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과 구멍 난 공 사이에 얇은 실이 추욱 늘어졌다. 놈은 그 실이 사라지기도 전에 침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 재갈을 제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역겨워…! 내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동시에 놈이 늘어진 내 머리를 자신 쪽으로 돌려 눈을 마주했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놈의 얼굴. 그리고 입술. 끔찍한 체온이 맞물리며 벌레 같은 혀가 멋대로 입안을 헤집었다.
“!!”
츄릅, 쪼오옥. 놈은 일부러 지저분한 소리를 내며 내 입술이며 혀를 뽑을 듯이 빨아 댔다. 우욱. 기력이 없어 사고가 느려진 탓에 뭐든 놈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시발. 애초에 내가 왜 이 새끼가 하는 키스에 허우적대야 하는 거지?
“으웁!”
뒤늦게 이를 콱 다물자 놈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아픔을 호소하며 내민 혀엔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우우욱. 입안 은근히 퍼지는 비린 맛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윽! 아파라…. 위험하게….”
자신을 다치게 했다고 화를 낼까? 아님, 왜 이러냐며 서운해할까. 긴장하며 놈을 살폈지만 늘 그렇듯 놈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신음을 흘리던 놈은 이내 내 침을 닦아 내던 더러운 수건으로 자신의 상처를 꾹꾹 누르며 웃었다.
“당신 양치시켜줘야겠어요. 조금 냄새나.”
그 말에 반쯤 벌어져 있던 입을 꽉 다물었다. 이제 전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놈의 말대로 ‘냄새’가 풍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끈.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위생에 대한 권한이 타인에게 있다는 것은 꽤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내가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놈은 매일 내 위생 상태에 대해 직설적으로 평가하고 내뱉으며 수치심을 자극했다. 냄새를 맡거나, 만지거나…. 거기엔 방금 놈이 한 끔찍한 키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상에서 “당신 입 냄새나요.” 라는 말을 듣는 것도 매우 쪽팔린 일인데, 하물며 난 알몸으로 누워 매일을 저 남자에게 통제당하고 있었다.
“귀 빨개졌네. 귀여워라. 아직도 이런 게 부끄러워요?”
부끄러운 것과 쪽팔리고 수치스러운 건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놈이기에 정정할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대답이 없네. 아쉬워라.”
“…….”
“난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분명 있는 거니까.”
“…….”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윗입은 싫다니까 아랫입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빙그레.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뻗어진 손이 내 다리 사이를 비집었다.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에 움찔하고 다리를 오므렸지만 그뿐이다. 기력도 없이 묶인 몸으로는 이게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였으니까. 내내 구멍에 박혀 있던 기구의 끝이 붙잡힘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마른 목에서 쇳소리가 튀어 나갔다.
“시, 싫어!!”
“거봐요. 말할 수 있으면서. 잘했어요.”
다행스럽게도 단순히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손을 거둘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제발, 제발…. 어금니가 절로 갈렸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은 제발 사양하고 싶었다. 배설하는 곳을 강제로 자극당하는 건- 입 냄새를 지적당하는 것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풋.”
놈이 웃었다.
“귀여워라. 겁먹지 마요. 내가 언제 아프게 한 적 있어요?”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더 죽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징그럽게 발기하는 내 몸이 싫었고, 그걸 보고 기뻐하는 저놈이 혐오스러웠다. 제발 하지 마! 공포로 가득 찬 두 눈을 내려다보는 놈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부들부들 한참을 떨던 입술이 참지 못하고 벌어지며 호선을 그리자-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한나절을 넘게 뱃속을 메우고 있던 것이 순식간에 뽑혀 나가고,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든 놈이 흉측한 모양의 성기를 내 구멍에 끼우고 허덕였다.
“그만! 그만…! 시발… 이 개새… 아악! 제발, 그마… 으아아! 사, 살려 줘! 살려 주세요!”
매일 매일 소리치고 있었다. 구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놈이 너무나도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