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럭키가이-14화 (14/120)

<-- 14 회: 럭키 가이! -->

* 이 글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전혀 생각 없이 쓰는 가벼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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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음!”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강렬함은 감고 있던 내 눈을 절로 뜨이게 만들었다. 딸래미 심청이 덕분에 눈 뜬 심봉사 심정이 이러할까? 내내 잠이 들어 있던 나는 햇살이 유난스럽게도 적응되지 않는 기분을 느끼며 기지개를 쭉 폈다.

“으음.”

그리고 는 쇼파에 등을 붙이고 두 눈을 비비자 그나마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아, 아무래도 이제 정말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이틀 연장으로 술을 마시니까 몸이 영 개운하지 않은 것이 말이다.

“응?”

그런데 왜 쇼파가 나 혼자인가? 분명히 어제 여기서 같이 잔 것 같은데…….

“음? 화장실에 갔나?”

하지만 집은 고요했다. 애시 당초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침의 시작에 왠지 모르게 맘 한 구석이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어디 갔지?”

분명히 어제 쇼파에서 같이 잠이 들었는데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지현이! 내가 잠이 들어 있을 때 가버린 것인지 흔적도 보이지 않는 까닭에 조금 당혹스러운 맘이 들었다.

“집에 가버렸나?”

설령 간다 하더라도 말은 하고 갈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혹시 어제 진도를 빼주길 바랬던 건 아닐까? 내가 하다 말고 멈춰 버리자 실망해서 사라진 건 아닐까? 눈을 뜸과 함께 홀로 되었단 느낌이 들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싫어지기라도 한 건가?

아니,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가 않았으니까!

“대체 뭐야……?”

보통 이런 식으로 여자가 슥 가버린 단 것은 다시는 만나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외로운 밤을 잠깐 나누는 원 나잇 스탠드 대상처럼 다시 만나더라도 그 날 기억은 지우기로 암묵적 합의를 한 것 같은.

젠장, 그런 거였나? 난 어제 지현이 덕분에 맘에 위로도 얻었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좀 진지하게 만나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다.

“쳇.”

아무래도 지현이는 그냥 하루 정도 풋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인가 싶은 맘이 들어 씁쓸함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체 왜 그런 말들을 했고, 그런 행동들을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야, 이게. 날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싸지도 못했고, 싸고 나서의 허탈감이 흐르다니. 허망한 가운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자다 불편해서 침대가 있는 내 방으로 간 건 아닐까? 침대 방으로 걸음을 옮겨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후.”

비어 있는 방에 다시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거실로 돌아와 보니 애시 당초 아무 것도 없었던 마냥 고요한 거실만 보일 따름이었다.

“쩝…….”

섹스를 못해서 아쉽다기보다는 어제 밤 나눈 감정의 교류가 이토록 허망하게 사라질 줄 몰라 쓴맛이 가득했다. 아직까지 에스프레소를 즐기지 못하는 어른이기 때문일까? 이런 젠장.

“그냥 가버린 모양이네.”

큰 실수를 범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지현이도 적극적이었고, 얘기들도 많이 나눈 것 같았고. 그런데 이렇게 가버리다니 뭔가 또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은 자괴감이 느껴진다.

“후. 젠장.”

이래서 인생에 여자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제기랄, 여자!

지현이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사연도 알 수 없으니 갑갑한 마음만 밀려왔다. 그러다 숙취도 함께 밀려와선 머리가 지끈거리자 나는 한숨과 함께 쇼파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 갈 길 갔겠지.”

고작 하루. 처음 본 여자애에게 무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하루 괜찮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닐 테 지. 그 생각과 함께 쇼파에 등을 기댄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왠지 나가리로 시작을 하는 기분이다. 소주의 쓴 끝 맛이 사라지지 않고 입안에 계속 남아 있는 듯 한 찝찝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물이나 마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여잔 진짜 두 번 다시 안 믿는다, 정말.”

물론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 내릴 일은 아니라지만 어쩐지 서운한 감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정말 그게 뭐냐. 대체…….

갑갑한 맘에 자꾸 한숨만 나오고, 어깨가 축 쳐졌다. 고개 숙인 남자란 게 이런 것인지, 어제 그렇게 꼴릿꼴릿한 상황도 간신히 참아 냈는데 가버리다니. 그래서 더 허탈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이성적이려 해도 남자는 본디 본능을 떨쳐내기 어려운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배려심으로 인한 그 결과가 이러하다면 맘에 상처가 될 수밖에.

30살 남자는 10대 소녀만큼이나 여린 구석이 있단 말이다! 흥!

-벌컥벌컥!

홧김에 깡생수를 들이키니 그래도 좀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내 팔자에 무슨. 대길은 개뿔. 아, 맞아. 대길이도 죽지, 참.”

생각해보니까 대길이 재수 더럽게 없잖아? 언년이 년 때문에 집안 말아먹고 양반에서 노비 사냥꾼 됐지, 그 언년이 년 지켜준다고 죽고. 에라! 이게 좋은 게 아니었네! 젠장! 어쩜 언년이가 나오는 게 나을 뻔 했다. 보기엔 민폐라지만 결국 요 년 혼자 잘 먹고 잘 산 거 아닌가? 인생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정말!

“에휴.”

답답한 맘에 다시 한 번 더 깡생수를 들이켰다. 아, 이거 잘 하면 대낮부터 또 낮술을 할 것 같은데?

“술은 무신. 아, 끊어야지.”

이 참에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하자. 그래, 도인이라도 되어 보자. 좋았던 분위기, 훈훈했던 교류감만큼 뭔가 허전함이 더 강했다. 정말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우울감마저 밀려오고 있었다.

“에휴.”

내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게 아니겠냐? 그냥 다 포기하고 나 혼자, 이 한 몸 건사하면서 살련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고 생수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쇼파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무심결에 싱크대 위에 뭔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응?”

싱크대 위에 있는 것은 컵라면. 이걸 내가 여기에다 뒀던가? 아니, 어제 사와서 분명히 넣을 데 다 넣었는데 말이다.

“왜 이게 여기 있어?”

이상하단 생각에 걸음을 옮기니 컵라면 위에는 하얀 종이가 있었다. 일 때문에 전화기 옆에다 두는 메모지가 있는데 그 메모지에 직접 쓴 손 글씨였다.

-집에 반찬거리 같은 게 왜 하나도 없어요? ㅠㅠ 이거 밖에 없어서 아무 것도 못 했어요! 먼저 가야 할 것 같은데 오빠가 너무 곤히 자서 잠을 못 깨웠어요. 오빠 자는 거 귀엽다, 히힛. 일어나서 이거라도 챙겨먹고 술 풀구요. 그리고 장 좀 봐요!-_-+ 알겠죠? 쪽♡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또 다시 동네바보가 되고 말았다.

“프히힝…….”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그냥 간 게 아니었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오 마이 갓! 어느 샌가 시간은 오후 1시에 이른 상황이었다.

“맙소사……. 내가 이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나?”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자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말이다. 옆에 누가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 솔직히 승미 년이랑 같이 있을 땐 불편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신기할 정도로 많이 자버렸다.

“그냥 간 게 아니었어…….”

결론적으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지현이가 그냥 가버린 게 아니란 것인데 말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자 했건만 또 금방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지현이가 꺼내 놓은 오짬 컵라면을 들고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아 이렇게 애교 넘치는 손 편지라니! 너무 놀란 만큼 또 너무 기쁘다.

“그래, 승미 같은 거랑은 질적으로 다르지! 암!”

솔직히 불안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다 내 부덕의 소치다. 아, 정말 이런 일이 삼십대에도 일어날 수 있구나!

흐뭇함 가득한 가운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기 포트에다 물을 채웠다.

“지현이, 지현이~”

이 나이 되어 노래 부르는 게 창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긴 우리 집이거든? 아무도 없거든!

“아, 정말 장을 좀 봐야 하나?”

포트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다. 뭐 반찬거리가 있었으면 밥이라도 해줬을까? 히히히히! 진짜 바보 같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다음주 월급 나오기 전까진 솔직히 좀 벅찬 게 사실이다. 뭘 사다 놓아야 할 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좋네, 좋아!”

나 진짜 진지하게 지현이랑 만나는 걸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걸 또 설레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남녀 사이에 거의 역사가 이뤄지기 직전이라면 사귀기로 한 거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속단할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부글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포트 불을 끄고 오짬 안에 물을 부었다. 비참한 컵라면 식사라고 하지만 지현이가 남긴 편지를 읽으니 이것도 무척이나 맛나고 좋은 아침상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 살면서 제일 서러운 건 인스턴트 식품만 먹는 게 아니라 아무도 이런 나를 챙겨주지 않는단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설령이 이런 걸 먹고 있다 하더라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단 거니까.

어느 순간인가부터 잔소리들이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듣는 순간에는 여전히 칭얼대거나 짜증난다고 하겠지만 잔소리들에 묻어난 정들! 정감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들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는 시점부터 혼자 사는 삶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는 거다. 바로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이름의 어두움이 말이지!

그때부터 더 이상 자유로움보다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게 된다. 혼자 사는 남자보다 처량한 게 어디에 있겠냐? 여잔 그나마 마음 붙일 곳이라도 여기 저기에 있지. 남잔 그렇지도 못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오늘부터 운동 좀 하러 다녀야겠다.”

어제만 하더라도 내 인생에 여자는 없다 했건만! 오늘은 또 다시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운동에 대한 열의를 다지다니. 사나이 계범도,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구나. 후후훗!

하지만 나도 이 나이 먹었는데 그걸 모르겠냐? 순간적인 감정과 실망감에 여잘 안 만난다 다짐하지만 실제로 내가 여잘 안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마음 먹자마자 지현이랑…… 그랬잖아.

“후루룩!”

어쨌거나 라면 먹는 게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다니! 얼큰하고 짭쪼름한 오짬 국물과 함께 면을 흡수하듯이 들이켜 삼켰다. 안도감 이후에 허기가 찾아와서 그런지 정말 맛있어도 이렇게 맛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크아!”

얼큰하다! 얼큰해!

어느 샌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으로 슥 닦아내고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모두 들이키니 좀 더부룩하던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것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파리가 꼬이지 않게 컵라면 안을 물로 헹군 나는 다시 쇼파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를 해볼까?”

사실 아직도 번호를 저장 안 해놓았다. 깜빡깜빡 해서 그렇다만 통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어? 꺼져 있네.”

간밤에 배터리가 방전된 건지 폰이 꺼져 있자 나는 인상을 살며시 찌푸렸다. 배터리 나갈 정도는 아닐 텐 데…….

이상하단 생각과 함께 폰을 우선은 충전기에 꽂아 넣고 티비를 켰다. 뭐, 운동을 하러 나갈 땐 나가더라도 채비를 하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폰이 충전 다 되면 과천 경마장까지 살 걸어 나갔다 올 생각이다. 걷기가 짱이라잖아?

“아, 헬스나 끊어 볼까?”

나이 들면서 이제 몸이 점점 탄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 어제 하진 않았지만 지현이 같이 젊은 애랑 하는데 또 체력적으로 모자라거나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단 생각이 불끈 샘솟아 올랐다.

“아, 벌써 거기까지 앞서 가냐. 계범도.”

역시 남잔 좆 달고 태어난 이상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나보다. 후후훗, 기왕 밝힐거라면 멋들어지게 밝히고 싶다. 그렇지 않냐?

“그거 말고 요가 같은 걸 배워볼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위와 밀접한 관련이……. 아, 아니! 허리 건강에 참 좋다는 요가가 생각이 났다. 명상을 통해서 음란 마귀가 씌여 있는 내 맘도 한꺼플 걷어내고, 몸의 바디 밸런스도 찾을 수 있지 않겠냐?

오, 그래! 요가! 솔직히 말해서 살이야 내가 술만 끊어도 쭉쭉 빠질 거다. 지금 배만 볼록 나온 게 술 살 덕분인데 다이어트 선언과 함께 금주를 시작하고, 먹는 것도 좀 돈 들여서 관리하고 요가로 태만 잡아주면 그 자체로 멋들어지지 않겠냐?

“아, 겁내 몸짱 되면 어떡하지?”

지금의 A팩을 에잇팩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헬스를 해도 되긴 할 텐 데 솔직히 말해서 헬스는 재미가 없다. 트레이너 붙이려니 너무 돈이 많이 깨질 것 같고, 요가가 좀 싸지 않나?

“눈요기도 할 겸 말이지.”

싱그러운 아가씨들이 한 가득 있지 않겠냐? 뭐, 대부분은 주부님들이겠지만!

어쨌거나 청일점으로 엣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단 욕망에 사로잡힌 나는 당장 인터넷을 동원해 집주변 요가 학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 싸잖아! 6개월에 30만원. 한 달에 5만원 밖에 안 하네! 일주일에 3일. 굿굿, 베리굿!”

그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학원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관악산 방면에 있는 요가 학원이었는데 올라온 사진을 보니 내부 시설도 상당히 산뜻한 것 같았다.

“인도에서 직접 수련하고 온 원장이라……. 제법 핫하신데?”

45세라는 섹시한 원장 사진까지 겸해져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염색을 했는지 갈색빛 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표범 무늬 요가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이 어찌나 큰 지 옷이 터질 것 같았다. 특히 레깅스만 입고 있었던지라 유난히 도드라지는 그 모양이 오 맙소사.

색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관급 나이트에서 만난다면 내 기를 모조리 빨아치울 것 같은 섹시한 용모였다. 혹시 이런 요가 선생과 또 좋은 섬씽이 생기지 않을까 들뜬 맘으로 기대를 하다 지현이 생각이 든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놔, 이제 정착해야지! 음란마귀 같은 놈.”

그래도 준다면 사양은 안 하리라……. 후후훗.

“전화를 한 번 해볼까?”

그와 함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충전기 꽂아 놓은 핸드폰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켜질 정도는 됐을 거다.

-꾹.

“응? 이거 왜 이래?”

전원을 꾹 눌러 보았지만 핸드폰은 켜지지가 않았다. 어, 씨바! 이거 왜 이래? 2년 약정으로 바꾼지 5달밖에 안 됐는데!

“아, 나! 고장 났나?!”

전원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핸드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 졌다. 아, 나 진짜! 이거 정말 왜 이러냐? 짜증이 막 샘솟는 이유는 핸드폰이 이유도 없이 갑자기 고장났단 것도 있지만 지현이와는 연락 할 길이 없단 것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얘가 연락이 안 돼서 오해라도 하게 된다면……?

“아, 미치겠네! 정말!”

그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좋은 느낌으로 만난 사람을 이렇게 놓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얼마나 피가 말리냐? 그렇지 않겠어?

“가는 길에 식당 이모한테 얘기 좀 해놓을까?”

그러다 머리를 번뜩이는 생각! 지현이가 일을 잠깐 돕는다 그랬으니까 분명히 식당에 있지 않을까? 없다 해도 이모는 알고 있을 거다. 그 생각에 다행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그럼 일단은 집 전화로 콜 때려야겠네. 이 개 같은 폰, 진짜. 물을 확 끼얹어 버릴까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아직 할부 원금만 60만원이 넘게 남았는데 말이다. 씁쓸함 한 가득 남은 가운데 나는 노트북을 들고 집전화 앞으로 와 번호를 꾹꾹 눌렀다.

“4444? 번호 한 번 참 요망하네.”

왠지 홈페이지의 섹시한 원장이 잔망하게 날 유혹하진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받지 않을 것도 같단 생각이 들었는데…….

-여보세요?

내 예상과 달리 전화기 너머로 무척이나 새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로틱이 흘러넘치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움찔할 정도 말이다.

“아, 저기 요가 수업 수강 상담 하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지금 통화 가능 하십니까?”

-어머, 그러시구나.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데, 오늘 일이 있어서 들렸더니 타이밍이 좋으시네요.

홈페이지의 원장 선생이겠지? 사진에 보이는 색기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왠지 모를 기대감이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다리가 맞았네요. 지금 일을 안 하시면 그럼 내일 연락을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도 인연인데 인연을 놓칠 순 없죠. 어차피 오늘은 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학원에 있어야 할 것 같네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중으로 직접 방문 하셔서 상담 받으시겠어요?

야릇한 그녀의 음성이 왠지 모르게 날 유혹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진짜 갔더니 요가보다도 더 소중한 걸 가르쳐 줄게요 하고……. 으흐흐흐, 야동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이 음란마귀 새끼가 진짜. 물러나지 못 할까?!

“아, 그러시면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핸드폰이 고장 나서 그런데 연락은 ㄸㆍ로 못 드릴 거 같고, 그럼 한 2시에서 3시 사이에 찾아 뵙도록 할게요. 이름은 계범도구요.”

-어머, 성이 굉장히 특이하시네요.

“그런 소리 종종 듣습니다. 아 이 아니고 여 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쇼. 술 마시면 가끔 아 이가 되긴 합니다.”

-후후훗! 참 재미있으신 분 같네요! 얼른 보고 싶네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2-3시 사이에 뵙겠습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요상한 생각을 떨쳐내며 나는 전화를 마쳤다. 이거 뭔가 울렁울렁 기대감이 있는 것이 뭔가가 될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드는데 말이야.

“……설마 그러진 않겠지.”

지현이는 지켜줘야 하지만 요가 학원 원장을 지켜줘야 할 일은 없지 않을까? 어쩜 내 몸을 지켜야 할 지도 모른단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나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씻고 나가서 식당 들려 이모에게 얘기하고 요가 학원으로 가봐야지!

갈아입을 속옷과 옷을 미리 챙기고 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옷을 벗다가 문득 주머니에 넣어둔 구슬 목걸이가 떠올랐다.

“오, 맞아! 오늘의 운세를 한 번 점 지어 봐야지!”

그게 정말 잘못 본 건지 몰라도 이게 뭔가 효력이 있는 게 아닐까? 왠지 모를 기대감과 함께 나는 주머니에서 파란 구슬을 끄집어 냈다. 아직도 목걸이는 영롱한 빛을 잃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와, 진짜 이거 뭘로 만든 거지?”

신비로움 가득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야 있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더 보고 있긴 뭣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자, 그럼 어디 오늘의 운세를 봐 볼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나를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구슬을 들어 올렸다. 뭘 어떻게 했더라? 그냥 별 거 없이 구슬을 햇빛에 비춰 보았던 것 같다.

“흠…….”

화장실 조명으로는 안 되나? 구슬을 들어서 살펴보던 나는 내가 그때 확실히 뭐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씨. 이게 LED 조명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돼지.”

그리고 나는 구슬을 화장실 안 붙박이 장 안에 집어넣었다. 빨리 씻고 나가서 얘기 하고, 요가 학원 강사도 만나 봐야지!

“식당 먼저 가서 지현이한테 얘길 전해야지! 폰 고장 났다고! 서두르자, 계범도!”

다른 일보다 그 일이 최우선이었다. 어차피 일요일이라 수리도 안 할 거고, 수리 맡겨 놓는다고 바로 될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니 지현이가 있을 지도 모르는 식당으로 가서 이야기를 전하자.

“흠흠흠~ 오, 즐거운 인생~ 예~! 찬란한 인생~”

그 생각에 들떠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던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붙박이 장 안에 넣어둔 구슬이 뒤늦게서야 정 가운데 글자를 머금는 것을.

그리고 그 글자가…….

‘흉(凶)’이라는 것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뮤지컬 인생 계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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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랴, 이랴! 달려라,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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